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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현상학

에드문트 후설, <수동적 종합> 요약

에드문트 후설, 이종훈 옮김, ⟪수동적 종합(Analysen zur passiven Synthesis, Hua XI)⟫, 한길사, 2018.

 반지를 샀더니 버터 발린 식빵 스티커를 사은품으로 줘서 붙였다.
그 반지는 체크무늬 반지인데 요렇게 생겼다.

 1918년부터 1926년까지 이루어진 강의와 연구원고를 수동적 지향성에 해당하는 촉발[Affektion] 및 연상[Assoziation]을 통한 대상, 시간의식, 자아, 궁극적으로 객관적 세계의 구성이라는 주제 하에 엮어낸 책이다. 이 책에서 후설은 지향성의 층위를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또는 자발적인 것과 수용적인 것)으로 나누고, 주로 지각에서 성립하는 후자의 근원적인 지향성을 통해서야 비로소 판단과 같은 보다 고차원적인 전자의 지향성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수동적 지향성을 통한 대상의 종합 과정을 설명함에 있어서는 수동적 차원에서의 기대라고 말할 수 있는 '예지[Protention]'의 본질적인 역할을 강조하고, 자아의 종합 과정을 설명함에 있어서는 수동적 차원에서의 회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파지[Retention]'의 본질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아래는 책의 주요한 대목들을 요약한 것이다.

*역자는 'Protention'을 '미래지향'으로, 'Retention'을 '과거지향'으로 번역했으나 이와 같은 역어의 의미는 예상 및 회상의 의미와 중첩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남인, 김태희 선생님의 번역을 따라 각각 '예지'와 '파지'로 번역한다. 'transzendental' 역시 '선험적'이 아닌 '초월론적'으로 번역하는데, '선험적'으로 번역할 경우 'transzendentale Erfahrung'과 같은 표현이 모순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초월론적'보다 '초월구성적'이 정확하고 직관적이라고 생각한다.)


서론: 지각에서 스스로를 부여함[지각에서의 자기소여Selbstgebung]

 외부 지각은 신도 피할 수 없는 필연성 하에 본질적으로 비충전적이다[inadäquat]. 따라서 외부 지각은 원본적인 직관과 "가능한 새로운 지각을 지시하는 공허하게 지적하는 것의 혼합물"이다. 즉 "그때그때 주어진 측면"이 동일한 대상의 "주어지지 않은 다른 것"을 지시한다(58). 이때 대상은 무한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보일 수 있지만 "각 순간의 대상적 의미는 사념된 대상인 대상 그 자체에 대해 동일한 것이며, 순간적 나타남이 연속으로 경과하는 가운데 합치한다."(59) 다시 말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 가운데서도 지각의 대상은 지향적 통일체로서 동일한 의미를 유지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대상의 현출은 그것의 내용이 규정되지 않은 공허한, 즉 충족되지 않았고 충만하지 않은 지평 가운데서만 비로소 가능하다.** 이 공허한 영역은 ['Wenn A, so B'의 구조를 가지는 운동감각과 관련된] 특정한 본질적 규칙을 따라서 충만해질 수 있다. "이미 보인 것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미리 지시하는 테두리, 즉 더 상세하게 규정하기 위한 X다."(62)

cf. 외적 지평과 내적 지평의 구분, 충족과 상세규정의 구분

**규정된 직관과 규정되지 않은 지평 사이의 관계는 하이데거의 ⟪예술작품의 근원⟫ 속 탈은폐성과 폐쇄성 사이의 관계와 유사한 것 같다. 하이데거에게 세계의 탈은폐[die Unverborgenheit der Welt]는 대지의 폐쇄[die Verschlossenheit der Erde]와 더불어서만 가능하다.

 아직 [그 의미가] 규정되지 않은 공허한 지평은 예지라는 예상의 형태를 동반하는 지각의 경과에 의해 충만해질 수 있다.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등장시키는 작용인 지각은 근원인상의 "'지금'이라는 형식으로 등장하는" 동시에 직전의 예지를 충족시킨다(63). 물론 새로운 것을 지각한다고 해서 이전엔 보였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게 된 것이 우리의 앎에서 상실되지는 않는다." 지각은 "각 순간마다 단순히 대상의 항상 새로운 측면을 직관적으로 갖는 것이 아니라 [...] 원본적 앎의 통일체를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65). 이전에 규정된 바들은 파지를 통해 여전히 의식에 붙들려있다. 요컨대 의식은 파지를 통해 이전까지 획득했던 규정들을 유지하고, [운동감각의 계열을 통해 동기 부여된 결과인] 예지를 통해 앞으로 나타날 규정들을 체계적으로 기대 및 예상하며*, 지각의 근원적인 산출을 통해 예지를 충족시킴으로써 다시금 새로운 규정이 파지 속에 간직되도록 한다. 이 연속적인 규정들은 서로 합치하며 하나의 동일한 의미를 가진 완전사물[Vollding]을 구성한다.

*92쪽의 서술 참조.

 후설은 지각의 근본적 성격인 파지를 통해 보호되는, 내멋대로 비유하자면 '의미들의 저수지'를 "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는 [앎의] 소유물"로 묘사하며 이 자유로운 처리의 능력을 "초재에 대해 동일한 것을 다시-지각할 수 있는 실제성, 새롭게 지각할 수 있는 실제성"과 동일시한다(67). 그리고는 이 능력이 운동의 자유로부터 온다고 말한다. 지각 대상에 대한 자유로운 구성은 "내가 자유롭게 처리할 수"도, "억제할 수"도, "다시 연출할 수"도 있는 운동감각의 동기부여 체계를 통해 비로소 가능하다(73). "즉 대상의 나타남은 오직 운동감각으로 동기가 부여된다"고 말할 수 있다(74).

 그러나 운동과 운동을 통해 구성되는 공간성에 의해 제약되는 대상은 초월적 대상뿐이다. "무한히 많은 [나타남의] 방식"을 가지는 초월적 대상과 달리 예컨대 검은 색의 순간적 자료와 같은 "내재적 대상은 각각의 '지금' 속에 원본으로 주어질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가능한 방식만"을 가진다. 또한 초월적 대상과 달리 "'나타남[현출, Erscheinung]'과 '나타나는 것'이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은 타당하다."(76) 내재적 대상은 음영을 가지지 않으므로 대상화되기 위해 더-사념함[Mehrmeinung]을 요구하지 않으며, 자신과 다르거나 분리된 무언가를 제시[darstellen, 현시]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월적 대상은 이처럼 음영 지우는 기능을 갖춘 [그러나 그 자신은 음영을 가지지 않는] 내재적 내용을 토대로만 구성된다. "'시각적 나타남이라고 부르는 각각의 '지금' 속에 새롭게 등장하는 사물의 나타남은 이러저러하게 확장된 색깔의 표면에서 계기들의 복합체이고, 이 계기들은 내재적 자료이며, 따라서 가령 빨간색이나 검은색처럼 그 자체로 원본으로 의식된다."(77) 이 내재적 자료들에 "객관적으로 '초월적인[더 이상 내재적이지 않은] 것'을 제시하는 기능을 부여하는 의식의 작업수행[Leistung]"이 곧 초월적 통각이자 파악이다(78). 다른 한편으로 내재적 대상은 [지각되지 않는 지평을 동반하는] 통각을 통해 의식되지 않는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 '지각된 것'(percipi)과 '존재하는 것'(esse)이 각각의 '지금'에서 합류하기 때문이다."(79, 강조는 필자) 하지만 어떤 종류의 대상성이든지 간에 그것은 의식의 고유한 작업수행을 통해 자아에 대해서 구성되는 것이다. "존재하지만 어쨌든 의식의 대상이 아니며 원리적으로 의식의 대상일 수 없을 대상이란 난센스다."(81)

cf. 'Gehalt'와 'Inhalt'의 구분(각주 18번)

 한편 외부지각의 [순간적] 의미들은 지각의 경과에 따라 유동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유동적 의미를 통해 [...] 부단히 합치됨으로써 견지되고 더 풍부하게 규정되는 기체"는 통일적이다(82). 후설은 이에 따라 모든 외적 지각에 "완전히 규정된 대상의 이념" 즉 아무것도 미규정적이지 않은, 규정되지 않고 "개방되어 남아 있는 [...] '그 이상의 것'(plus ultra)'"이 전혀 없는 순수대상의 이념이 속한다고 주장한다(83). 이 이념은 직시될 수 있고 그에 접근할 수도 있지만 결코 실현시킬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성급하게 회의주의가 옳다고 말해선 안 된다. "내재적 대상은 접근하는 것의 의미가 끊임없이 변화됨으로써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은 미래 속으로 들어오는 한에서만 예지와 예지로 [아직] '규정되지 않은 것'을 지닌다. 그러나 현재인 '지금' 속에 구성된 것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측면이 전혀 없는 절대적인 '자기 자신'이다."(84) 또한 초월적인 대상이라 할지라도 그 현출은 더 적합하거나 덜 적합할 수, 후설의 표현으로는 [대상 그 자체와] 가깝거나 멀 수 있는데, 이 계열 가운데서 대상이 현출하는 '최적의 상태'(Optima)가 성립한다. "충만한 사물 자체는 [...] '최적의 상태'의 테두리 안에 기입함으로써 획득될 모든 '최적의 상태'에 관한 체계다. 지각 속에서 충분히 발휘되는 주제적 관심은 우리의 학문적 삶에서 실천적 관심으로 이끌리며, 그때그때의 [실천적] 관심에 대해 어떤 '최적의 상태'의 나타남들[...]이 획득되면, 그 관심은 진정된다."(86, 강조는 필자)

 후설은 이로써 자신이 의미의 구성 방식을 탐구하는 '구성적 분석'과 대비되는 '발생적 분석'을 개시했다고 말한다. "발생적 분석의 주제는 '그것을 통해 결국 외적 세계가 의식과 자아에 나타날 수 있는 그 복잡한 지향적 체계들이 어떻게 각기 의식흐름의 본질에 속하는 발전--이것은 동시에 자아의 발전이다--속에 [시간적으로] 전개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87, 강조는 필자)


제1장: 양상화

제1절 부정의 양상 앎은 획득될 수 있는 만큼 폐기될 수도 있다. "요컨대 근원적으로 양상화되지 않은 존재 의식에 대립해 양상화된 존재의식의 차이 같은 것이 있다."(91) 즉 지각된 것은 더 이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심스러운 것', '불확실한 것'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양상화될 수 있고, 지각된 것에 대한 확실한 신념 역시 의심, 추측, 부정 등으로 양상화될 수 있다. 이는 지각의 경과의 필연적 구조에 속하는 체계화된 예상이 실망될 수 있는 가능성과 관련된다. 예상이 실망되면 [기존의 신념이 수정되는 것이 자연스럽기에] "지각의 의미 전체가 변화"하며 이 변경은 "그 이전의 모든 나타남으로 소급해 발산"해 파지의 체계에도 영향을 미친다(93). 이제 후설은 의식의 어떤 작업수행이 이와 같은 양상화된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지 묻는다. 이와 같은 초월론적 물음은 논리학에서의 양상성에 대한 이해를 예비한다.

★ 그런데 "실망함은 본질상 부분적으로 충족시키는 것을 전제한다. 지각이 진행되는 가운데 어느 정도 통일성이 견지되지 않으면, 지향적 체험의 통일체는 붕괴되기 때문이다."(92) 대상이 변경되거나 변경되지 않았음을, 체험이 유의미하게 달라지거나 그러지 않았음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의 의식의 불변성"이 요구되는 것이다(96, 강조는 필자). [다시 말해 후설은 실망의 현실성을 근거로 들어, 실망의 가능조건이 자아의 항구성이므로 자아는 항구적으로 체험의 모든 국면을 관통하는 통일체임을 논증한다고 읽을 수 있다.]

 실망은 예상을 폐기하는 새로운 지각의 힘[또는 명증성]이 예상의 힘을 압도함으로써 이루어지며, 이것이 곧 폐기[Aufhebung]와 무효화[Vernichtung] 그리고 부정[Negation]을 설명해준다. 후설은 이로부터 세 가지 결론을 도출한다. 첫째, 부정은 정상적 지각의 변양태다. 둘째, 지향은 본질적으로 실망 가능하며 '무효화' 등의 변양태를 받아들일 수 있다. 이로써 기존의 지향은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실망하는 지향은 타당한 것으로 드러난다. 셋째, 실망 이후에도 "대상적 의미 자체는 [단지 말소된 것으로서] 동일하게 유지되어 남아 있다 [...] 따라서 의미의 내용과 그 존재의 양상은 구별된다."(101)

제2절 의심의 양상 의심[Zweifeln]의 현상은 같은 질료적 자료에 대해 저마다 타당성을 주장하는 배타적인 파악들이 중첩될 때 발생한다. 그 결과 "의심 속에는 결정되지 않은 대립이 남게 된다."(104) 그러나 "변양된 타당성의 양상을 제공"하는 "의심의 본질에는 결정하고 해결할 가능성[...]이 속한다."(106) 후설에 따르면 "근원적 인상을 통해 충족시키는 것은 모든 것을 압도하는 힘이다."(107) 그러므로 지각의 경과에 따라서 의심의 한 선택지는 확실성을 가지게 되고, 다른 선택지는 부정될 수 있다. "의심을 통과해 긍정하는 결정이 이루어지자마자, 우리는 확실성을 회복한다. [...] 의식이 전환되고 변화되면서 겪는 모든 것인 이른바 의식의 운명이 그 변화에 따라 의식 자체 속에 자신의 '역사'로 침전되어 남아 있다는 사실" 또한 기억해야 한다(108). 나아가 확실성에 대한 의식은 참으로 간주하는 의식과 평행적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참'과 '거짓'이라는 개념이 여기에서는 위에서 말한 존재의 양상들에 대한 표현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110) 이것은 진리에 대한 현상학적 탐구의 시작점이다.

cf. 의심은 'A oder B'라는 선언의 의식과 연관이 깊다(139).

제3절 가능성의 양상 지각이 더 사념하며 '미리 지시함[Vorzeichnung]'의 가능성은 무한히 그러나 법칙에 따라 개방되어있다. 이와 같은 '앞서 해석함[Vordeutung]'은 [예상이나] 상상과 같은 "현전화의 형태로 [...] 명시화"될 수 있다(112). 이와 같은 현전화는 지각의 실제적 진행과 달리 유사-충족적인 지향이며 아직 권리가 없는, 규정력 없는 의식이므로 불확실성의 양상을 가진다. 이 "'규정되지 않은 것'은 자유롭게 변경할 수 있는 범위[외연]을 지닌다. 이 범위에 들어오는 것, 그것은 동등한 방식으로[동등한 힘으로] '함축적으로' 함께 포괄될 뿐, 어쨌든 적극적으로 동기가 부여되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미리 지시되지 않는다. [...] 이 항[Glied]이 개방된 가능성이라는 개념을 형성한다."(114-5, 강조는 필자)

 그런데 신념에는 경향성이 있어서, 이미 규정된 것은 아직 규정되지 않을 것을 "명백하게는 아니더라도 애매하게 미리 지시할 수 있다."(115) 따라서 자아는 이미 현실화된 것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아직 규정되지 않을 것을 앞서 해석하며 다른 가능성은 신경쓰지 않으려는 경향을 가진다. 후설은 이에 따라 지각이 "'신념을 유혹하는 것[신념으로의 유혹, Glaubensanmutung]'이라고 부르는 작용으로 양상화"된다고 말한다. "의식된 대상의 측면에서도 우리는 '존재를 유혹하는 것[존재에로의 유혹, Seinsanmutung]'에 관해 이야기한다. 즉 대상에서 촉발이 출발하고, 대상은 자신에 대립적인 상대방과 마찬가지로 자아에 존재하는 것으로 유혹한다. 그래서 의미 자체는 존재하려는 경향을 지닌다."(116) 이와 같이 유혹하는 가능성의 개념은 개방된 가능성의 개념과 구분되어야 한다. 후자에는 아무런 경향, 유혹, 요구도 개입되어있지 않다. 반면 전자는 "'문제가 있는[problematisch]' 가능성, 독일어로 '의문스러운[fraglich]' 가능성"이다(116). "유혹과 [이에] 대립된 유혹이 맞설 때 이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경우에만 의문스러움이 문제가 된다."(116-7) 나아가 개방된 가능성은 맥락에 따라 특수한 조건만 만족하는 한 모든 특수자들이 확실한 타당성에의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모든 외적 지각은 각각의 순간에 일반적으로 '미리 지시하는' 확실성 안에 그 특수성의 무엇도 그것들을 지지하지 않는 특수화하는 활동공간[Spielraum]을 수반한다. [...] 이 속에는 다른 가능성에 반대하는 그 어떤 것도 어느 한 가능성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 확실성은 순수한 확실성으로, 오직 하나의 유일한 가능성만 부각되고, 오직 그 가능성만을 '어떤 것이 지지하며' 이 가능성은 단순히 유혹하는 특징이 전혀 없다."(122) 반면 유혹하는 가능성이 제기되는 경우 어떤 대립이나 충돌이 문제시되며, 특정한 가능성이 다른 가능성들보다 말하자면 의식에서 높은 비중을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능성은 "불순한 (또는) 불완전한 확실성의 양상"을 가짐이 필연적이다(119). 왜냐하면 ①의식하고, ②지지하고 마침내 ③결정한 것과 반대되는 요구도 잔존하는 가운데 다만 하나의 요구만을 인정하고 납득[확신, überzeugen]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불순한 확실성'에도 "그것 나름대로 등급"이 있으며 그것의 약화와 강화가 가능하다(121). 이에 따라 유혹하는 가능성들은 저마다 상이한 등급의 촉발력을 가진다. "촉발하는 힘은 그것에 대립된 영향이 자아가 응답하는 활동인 자아를 겨냥하는 경향[Tendenz]을 뜻한다. 즉 자아는 촉발에 따르면서, 달리 말하면, 촉발에 '동기를 부여하고', 찬성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능동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이지 않고 단지] 주관적 확실성의 방식으로 유혹하는 것을 지지해 결정한다."(127)

제4절 수동적 양상화와 능동적 양상화 ★ 후설은 수동적 의견[Doxa]의 양상적 변화에 자아가 태도를 취함으로써 또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능동적으로 응답한다는 구도를 도입하며 수동성과 자아의 능동성을 개념적으로 구분한다. 수동성은 [의미의] "일치나 불일치의 종합, 억제되지 않고 자유롭게 충족되는 지향들이나 말소되어 억제된 지향들의 종합"에 관여한다. 한편 자아의 능동성은 자아의 납득에서 드러난다. 능동적 자아는 자신의 수동적 지향성을 단순히 알아차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아는 고유한 태도를 취하는 것에서 자신의 판단을 표명하고, 찬성하거나 반대해 스스로 결정한다 등등. 정상적인 방식으로 '판단한다'고 부르고 또 부를 수 있는 것의 특수한 원천이 여기에 있다고 말해도 좋다." 이와 같은 능동적인 태도 취함은 수동적인 의견이 일어남을 전제하므로 "지향적으로 완전히 비자립적"이다(131, 강조는 원저자). 승인이 되든, 기각이 되든 그와 같은 자아의 능동적 태도들은 "그 동기부여의 토대를 지각 자체, 즉 지각에 고유하고 어쩌면 순수하게 수동적으로 경과하는 가운데 지니"기 때문이다. "[선술어적] 지각은 자아의 능동적 행위나 그 구성적 작업수행의 그 어떤 것도 아직 자체 속에 포함하지 않는 자신의 고유한 지향성을 지닌다."(133, 강조는 필자) 이에 반해 "[술어적] 판단작용은 언제나 이러저러하게 결정하는 것이고, 그래서 무엇을 지지해 결정하는 것 또는 반대해 결정하는 것, 승인하는 것* 또는 거부하는 것, 기각하는 것"이다(131-132).** 능동적 결정에 동기를 부여해주는 것은 수동적 지각들의 일치다. 반대로 지각들의 분열은 결정을 방해한다. 한편 결정은 순수한 확실성을 가지는 결정과 불순한 결정, 즉 단지 추측하거나 개연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결정으로 나뉜다.

*승인의 현상은 본질적으로 타당성에 대한 단발적이지 않고 지속적인 신념을 요구한다.

**Q. 판단이 꼭 타당함 또는 타당하지 않음(그리고 이에 따른 존재함과 존재하지 않음)과 관련된 결정과만 결부되는가? 'S ist P'의 형태를 띠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일까?

★ 수동적인 의심은 능동적인 의심 및 질문을 낳을 수 있다.* 질문은 확고한 판단을 내리도록 도움으로써 양상화를 극복하려는 노력이다. "문제가 있는 가능성들의 수동적인 선언적 긴장[...]은 작용이 분열되는 행위인 능동적으로 의심하는 것[능동적 의심]에 동기를 부여한다. 이 행위는 본질적으로 또 직접적으로 불쾌감을 수반하는 동시에 이 불쾌감을 넘어서고 일치하는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는 근원적 충동을 수반한다. 그래서 확고하게 결정하는 것, 즉 궁극적으로 억제되지 않은 순수한 결정을 얻으려는 노력이 생긴다."(140, 강조는 필자)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판단은 질문을 충족시키고, 긴장을 완화시키며 만족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모든 가능한 판단은 어떤 질문의 내용으로 생각할 수 있다. [...] 또한 의심하는 것[의심]은 전개된 의식 속에 의심하는 행위, 즉 표상으로 내려질 수 있는 판단들과 관련해 태도를 취하는 것에서 '억제-되는 것'이나 '분열-되는 것'이다."(141) 달리 말해 의심은 판단으로 이어지는 태도 취함의 억제 또는 분열이다. 한편 응답에도 확실성의 등급이 있다. 예컨대 개연적으로 간주함 또한 긍정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분열을 해소하며 "결정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142).

*수동적인 의심은 '그 존재가 의심스러움'의 양상으로 대상을 지각하는, 정상적 지각의 양상적 변양태인 반면 능동적인 의심은 주제화된 의심으로서 의심스러움이 명시화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 같다.

★ "질문하는 실천적 지향은 본래 어떤 '앎'을, 특별한 의미에서 어떤 결정을, 적확한 의미에서 어떤 판단[곧 응답]을 겨냥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142) 질문함은 결정에 대한 소망, 즉 판단에 대한 향해-있음 가운데서 발생하는 실천으로서 "인식하는 이성과 이 이성의 형성물에 관한 학문인 논리학에 필연적으로 함께 속한다. 어쨌든 단지 판단하는 삶, 또한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삶은 특유하게 소망하는 것, 노력하는 것, 욕구하는 것, 행위를 하는 것--이것들의 목적은 곧 판단, 특별한 형식의 판단이다--에 대한 매개[Medium]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모든 이성은 동시에 실천적 이성이며, 그래서 또한 논리적 이성이다."(143, 강조는 필자) 후설은 로고스의 삶이 수동성과 수용성의 층위, 자아에 고유한 작업수행을 작동시키는 자발적 능동성과 능동적 지성의 능동성의 층위로 층화된다고 주장하며 1절을 마무리한다. 


제2장: 명증성

제1절 충족시킴의 구조 지각은 파지-근원인상-예지의 시간적 구조를 가지고 있기에 정상적인 지각의 체험은 예지의 부단한 충족과 파지와의 부단한 일치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렇게 일치되는 것이 단절될 때, 양상화"가 발생한다(152). 그러므로 충족시키는 확인[Bewahrheitung]강화[Bekräftigung]의 기능이 지각의 정상성을 회복하거나 유지하기 위해 중요하다. "우리가 어떤 표상을 명증적으로 만드는 것은 어쨌든 그 표상을 근원적으로 충족시키는 확인으로 이끄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동적 종합을 해명하기 위해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스스로를 부여하는 [충만한 직관적] 표상과 스스로를 부여하지 않는 [공허한] 표상의 종합이다." 외적 지각 또한 지평을 가지기 때문에 "자신의 고유한 내용을 넘어서 지시하는 의식"으로서 "최초의 새로운 지각을 이끌어낼 공허함에서 지시한다."(153, 강조는 필자)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충족시키는 것이 확인하지[는] 않는다"(154).

 후설은 직관성의 의미를 그 근원으로부터 확장하며, 회상[Wiedererinnerung]과 같이 "현재적인 것[Gegenwärtiges]의 지각은 아니면서 이것에 관한 현전화인 현재적인 것에 대한 직관적 표상이 있다"고 말한다(155). 예상 또한 직관적 현전화로서 앞서 직관함이다. 예컨대 우리는 우리 주변의 환경이 1초 후에도 잔존하리라 매 순간 직관적으로 예상한다. 타인지각 또한 '함께 현재하는 것'에 대한 "현재의 기억[Erinnerung, 떠올림]"으로 소개된다(158). 이처럼 지각에서는 현재의 과거와 미래가 [그리고 타인의 영혼이] 지평으로서 공허하게나마 함께 의식된다.

 이때 "직관의 모든 방식에는 공허한 표상의 가능한 방식이 상응한다."(159) 공허한 표상은 그 어떤 대상적 의미도 구성하지 않으며, 따라서 어떤 존재(자)도 구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허한 표상은 그것이 표상하는 무언가가 있으며, 그 무언가를 직관적으로 부여하는 표상과 공허한 표상을 짝지을 수 있다. 한 직관이 경과하고 나면 그것은 파지되어 비직관적인 방식으로 즉 공허한 표상으로서 의식된다. "이 표상이 선행한 직관에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수동적 발생의 근본적 법칙을 특징짓는다." 다시 말해 파지적 변양은 수동적 발생의 근본적인 일환이다. 근원인상의 파지변양 그리고 이 변양의 연속은 "근원적 시간의식의 구성이라는 근본적 법칙성의 한 측면"이기도 하다(160).

 후설은 수동적 지향성을 설명함에 있어 파지와 구분되는 예지만의 특성들을 몇 가지 부각한다. 첫째, 예상은 순수한 수동성의 차원, 심지어는 파악 이전의 차원에서도 발생한다. 수동적 지각은 이미 그 안에 '미리 향해-있음[Vorgerichtet-sein]'을 가진다. 다시 말해 직관적 예상은 직관적 기억과 달리 지각에 발생적으로 선행한다. "[...]중요한 문제는 표상된 것이 자신을 넘어서 다른 표상된 것을 앞서 지시하는 종합이다." 이 앞서 지시함이 비로소 표상에 대상을 향하는 지향성을 부여하며, 이때 자아는 그와 같은 "'향해-있음'이 '발산되는 점'"이다(165). 저 특수하고도 근본적인 종합의 형태에 대해 후설은 '연상적'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파지와 근원인상도 물론 종합되지만, 예지와 근원인상처럼 연상적으로 종합되지는 않는다.* 파지는 "인상에서 소급하는 연상적 일깨움을 통해 일어나지 않으며, 따라서 연상적 일깨움에서 발산하는 공허한 표상의 과거를 향한 방향을 자체 속에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166) 연상은[, 특히 예지와 근원인상 사이의 근원연상 관계는] 수동적 발생의 보편적 형태로서 "근원적 시간구성의 미래지향[예지]과 관련된 계열에서만 지배하고, [...] 연속적 과거지향[파지]과 관련된 계열을 일깨우는 것으로만 기능한다."(167) 심지어 후설은 파지가 경우에 따라 사후적으로 어떨지는 몰라도 기본적으로는 "어떠한 지향적 특징도 지니지 않는다고 말"하기에 이른다(168). 연상을 통해 파지가 일깨워질 때에만 비로소 파지는 수동적 지향성을 획득한다.**

★ *Q. 오히려 파지와 예지가 연상적으로 종합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오히려 근원인상이 예지를 일깨우지 않나? 근원적 연상이 어떤 사태를 가리키는지 정확히 모르겠다.

**Q. 어째서 파지가 그 자체로는 비지향적인지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cf. 171쪽 

제2절 수동적 지향과 이것을 확증하는 형식들 직관화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는 단순한 묘사로서 구체적인 상을 산출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합치되지 않은 잔여"를 남긴다(170). 둘째는 확인으로서 예상과 그에 상응하는 지각을 종합 및 동일화한다. 이 경우 잔여는 발생하지 않으며 오히려 상세하게 규정된다. "미리 지시하는 것의 합치로서 최초로 일어나는 것은 1차적으로 충족시키는 것[1차적 충족]이다. 그러나 직관이 제시하는 '그 이상의 것[Superplus]'은, 이것이 그때 지향되었고 이제 지향함을 바로 충족시키는 대상 자체로서 직관이 되는 대상 자체에 속하는 것으로 주어지는 한, 2차적으로 충족시키는 것[2차적 충족]이다."(171, 강조는 필자) 공허한 파지의 표상 또한 연상적으로 일깨워짐으로써 그것의 미규정성을 충족시키고 확인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회상은 "단지 상대적으로만 명석하며", 이는 아직 지각으로 충족되지 않은 예상도 마찬가지다(175). 이러한 부분적인 또는 전적인 공허함은 완벽한 충족의 이념을 지시한다.

 연상적 일깨움에서 유래하는 모든 '향해-있음'은 본래적인 지향성에 속함으로써 본래적 충족 및 확인에의 경향성을 가진다. 이는 가능한 한 직관성을 확보하려는 노력, 즉 "가능한 [최대의] 만족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경향으로서 '넘어서 욕구한다[hinauswollen]'."(176, 강조는 필자) 요컨대 지향한다는 것은 충족과 확인이라는 목표를 스스로 가지는 것이다. 여기서 후설은 촉발에 대한 분석으로 잠시 방향을 전환한다. 후설에 따르면 촉발은 수용에 발생적으로 선행한다. "어떤 배경을 향한 표상은 자아를 촉발하고--이 속에 자아를 향한 경향이 생긴다--이 자아는 방향을 전환함으로써 반응하며, 표상은 [...] 파악하는 표상의 형태를 취한다. [...] 그러나 '향해-있음'이 [사념하는 것을] 확인하는 가운데 한정하는 지향함의 형태를 취해야 할 경우 [...] 표상은 이제 자아에서 출발하는 노력의 형식, 즉 참된 그 자체를 지향하는 '지향함[intentio]'의 형식을 취한다."(177-8, 강조는 필자) 그러므로 '모든 의식은 대상에 대한 의식'이라는 단순한 지향성의 개념, 또는 "존재자 자체를 향한 노력"(179, 강조는 필자)이라는 가장 포괄적인 범주는 ①촉발에 따르는 대상에의 향해-있음(e.g. 잠자는 사이의 인식, 원초적 표상*, 연상에 의해 일깨워진 파지 등)과 ②촉발을 통해 이미 수용된 것을 확인하려는 좁은 의미에서의 지향성(e.g. 노력하는 개별화된 지향작용)으로 세분화된다. "우리는 모든 의식 속에 노력이, 즉 스스로를 갖는 것에서 자신의 대상적인 것을 지향함이 놓여 있다고 당장 말할 수 없다. [...] 그렇지만 모든 의식이 우리가 수동적 영역에서 '연상적 일깨움'이라고 부른 그 어떤 동기부여를 통해 방향을 또 이와 연관해 존재자를 그 자체 속에 사념하는 '그것으로-향하는 것[Hin-richtung]'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은 정말 일반적인 본질적 가능성이다."(178) 이로써 [비지향적 파지와 달리] 모든 정립에 동반되는 '앞서 사념함'으로서 예지가 가지는 고유성이 부각된다. 모든 지향함은 무언가를 선취함이자 앞서 포착함이다. 

*Q. 원초적 표상은 무엇인가? 수동적 지각?

 후설은 능동성의 필요조건으로서의 수동성에 대한 탐구를 이어나가면서 앞서 지은 개념적 구분들을 재정비한다. 지향성의 첫 번째 의미는 연상적 일깨움을 통해 현재와 엮이면서 비로소 대상성을 가지게 되는 파지와 같은 것--"'무엇에 관한' 의식은 이 무엇, 즉 자신의 대상성에 '향해-있다'는 부각된 형식을 필연적으로 내포할 필요가 없다"(184)--의 지향성을 가리키고, 두 번째 의미는 처음부터 대상성을 가졌으면서 "표상하는 것을 그 자신의 양상 속에 의식하게 하는 [자기소여적] 직관"의 지향성을 가리킨다.

 나아가 직관 역시 ①단순히 묘사하는 직관②스스로를 부여하는 직관으로 나뉜다.* ①의 직관은 아직 충족되지 않은 것으로서 충족을 위해 ②를 요구한다. 이 연장선에서 ②에 상응하는 공허한 파지와 ①에 상응하는 공허한 예지 사이의 차이 또한 구별된다. 공허한 파지는 "그 자신을 실로 미리, 실로 잠재적으로 자체 속에 지니고 있"지만 "공허한 예상 속에 잠재적으로 놓여 있는 것은 그 자신의 어떤 것도 자체 속에 부여하지 않은 것을 묘사하는 직관뿐이다."(190) 재생산적 회상이 명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을 때, 예컨대 불현듯 어떤 기억이 떠오를 때에도 파지는 직관적으로 충족될 수 있다. 반면 예지는 "직관적일 때조차 충족시킬 수 없는 선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취하는 표상"은 모든 체험의 "지향적으로 일깨워진 지평"으로서 충족의 기능에 관여하며 나름의 강도를 가진다(191).

*Q. 지향성의 구분과 직관의 구분은 정확히 상응하는가? 

A. 아닌 것 같다. 파지는 지향성의 구분에서는 전자에 속하지만 직관의 구분에서는 후자에 속하기 때문이다.

Q. 예상이 어째서 자기소여적 직관이 되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실망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는 자기소여적인 것 아닌가?

 이어지는 보충적 논의에서 후설은 "실로 모든 직관이 '충족시키고-확인하는 것'으로 기능할 수[는] 없다"면서 지각과 기억을 특권적인 직관으로, 예상을 포함한 현전화를 그렇지 않은 직관으로 분류한다(192). 여기서는 회상이 현전화보다 현전에 가깝게 이야기되는 것, 나아가 현전화 역시 직관으로 간주되는 것이 흥미롭다. 지각은 당연히 가장 "대상을 탁월한 방식으로 의식"하는 체험이며 "대상 그 자체를 생생하게 간취해[포착해, erschauen] 갖는 의식이다." 회상 또한 "생생한 현재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충분한 의미에서 '생생한 과거'를 제공한다."(193) 뿐만 아니라 회상은 지각으로 획득된 앎의 지속적 타당성을 보장해주는 기능을 수행한다. 앎의 "대상은 그것이 반복할 수 있는 회상 속에 되돌아올 수 있는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로만 주체의 환경세계에 있는 실제적 대상일 수 있다."(194) 반면에 상상이나 예상* 등의 스스로를 부여하지 않는 직관은 충족을 위해 상술한 특권적 직관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예상하는 것은 오직 지각을 통해서만 충족될 수 있고, 소급된 지향함은 오직 회상으로만 충족될 수 있다."(195)

*후설은 상상은 정립적 체험이 아닌 반면 예상은 믿음과 존재정립을 내포한다고 구분짓는다(194).

 내재와 초재에 대한 발생적 해명, 의식의 통일과 객관성의 구성 등의 모든 문제는 "비록 불일치, 가상, 환상이 전혀 없지는 않더라도, 일치되는[모순 없는] 종합 속에 구성된다. 참되지 않은 것, 존재하지 않는 것은 이미 어떤 방식으로 수동성에서 배제된다."(196) 그리고 단순히 일치하는 사념, 즉 모순이 없는 사념은 여러 감각장들에서 연속적으로 합치하면서 주어지는 사념을 경유해 입증된다. "그와 같이 입증하고 여러 차례 합치되는 가운데 강화하는 기능은 [...] 스스로를 부여하는 충족시킴의 기능에 속한다. 지각의 '지평들'은 실로 연관되고 지각이 진행되는 가운데 서로 다른 방향으로 현실화된 공허한 지향함[...]에 대한 명칭이다."(197)

Q. 199쪽에서 스스로를 부여하는 직관들이 자기 자신을 구성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제3절 경험의 궁극적 타당성의 문제 후설은 새로운 주제로 관심을 돌려, 모든 판단이 저마다의 확증 규범을 가지는 듯 보이는 가운데 "판단이 확증될 수 있는지는 또는 반박될 수 있는지는 아무튼 그 자체에서, 즉 미리 그래서 실제로나 가능한 모든 의식의 미래에 대해 결정될 것"이라는 주장을 검토한다. 이는 모든 물음의 답은 물음과 함께 이미 결정돼있으며 우리가 그것을 긍정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만 남는다는 주장이다(이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그 유명한 미래 해전과 결정론의 논제를 낳았다). 검토의 방법은 과연 이 주장이 "경험의 지향성에서 길어낼 수 있고 실제로 통찰할 수 있는 본질적 법칙"인지 따지는 것이다(205).

cf. 수동적 지향성에서 시작해 이론화로 끝나는 의식의 층위들(201)

 후설은 우선 '진리 그 자체'는 의미나 명제에 귀속되며, "진리 그 자체에는 대상 그 자체가 상응"하고, "'그 자체[그 자체의 존재, An sich]'는 대상에 속한다"고 개념화한다. 그리고 먼저 내재적 영역에서는 미래가 "어떻게 그 자체로 미리 결정되어야 하는지 전혀 통찰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206). 오직 동기 부여에 따라 예상하는 신념만이 가능할 뿐이다. 초재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세계에 대한 앞선 확신과 개연성을 모든 거스른, 파악이 실패해 통일체조차 형성되지 않는 무질서한 체험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미래의 것을 향한 모든 신념이 결단코 앞서서 자신의 참이나 거짓을 미리 지시한다고 생각"하기를 고집할 따름이다(208). 이 고집에 대한 후설의 반박은 단호하다. "동기부여어떤 자료와 그 예지의 지평이 체험에 따라 다른 자료가 등장함으로써 '함께 등장하는 것'으로 요청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연상적 요청은 현실적 경험작용이 경과하는 가운데 폐기될 수 있다. [...] 감각자료가 갑자기 혼란스럽게 등장하기 시작하면, [...] 운동감각의 동기부여는 그 힘을 잃어버릴 것이다." 외적 지각의 규칙이 무너지면 외적 지각 역시 무너진다. "외적 지각들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규칙화되어 기능한다는 것 그리고 형성된 동기부여가 계속 전개된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것은 본질적으로 감각이 실제로 경과하는 것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이렇게 경과하는 것은 항상 전혀 다른 것으로 생각될 수 있으며, 완전히 규칙이 없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209, 강조는 필자)*

*이로써 후설의 악명 높던 '세계의 전멸 시나리오(annihilation of the world scenario)'는 사실상 '세계가 질서를 잃는 시나리오' 정도에 가깝다. 이는 Crowell(2008)이 지적한 적 있는 것처럼 예컨대 영유아나 정신장애 환자에게 충분히 나타날 수 있는 매우 개연적인 가능성이다. Crowell, S (2008), “Phenomenological immanence, normativity and semantic externalism.” Synthese 160, p.348 참고.

 그렇다면 앎 자체는 결코 완수될 수 없는, 그에 대한 최종적 확신을 확보할 수 없는 끝없는 과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폐기할 수 없는 타당성을 지니는 순수 내재의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우선 우리는 자신의 생생한 현재 속에 내재적으로 구성된 존재가 존재하는 것으로서 스스로 주어져 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이 존재가 말소될 수 없다는 사실도 본질적으로 통찰한다." 그러나 이 내재적 표상의 "타당성은 순간적인 것이기 때문에 [...] 회상 속에서 우리는 동일한 표상으로 반복해 되돌아가고 이 표상이 동일하게 사념된 대상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말하자면 응고의 작업수행을 거쳐야 한다(212). 요컨대 회상을 통해서만 비로소 표상의 지속적 타당성과 자기동일성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회상과 합치되어 동일화된 파지와 같은 것은 양상화될 수 없으며, 회상은 그 본질적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대상의 '그 자체의 존재'의 원천이다.*

*이 대목에서는 파지에 대한 후설의 이중적인 태도가 돋보인다. 그에게 파지는 '단지 방금 지나간 것'으로서 절대적으로 확실하지만 충분히 명석하지 않다. 문제는 파지를 명석하게 해주는 회상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 Q. 그렇다면 파지는 정말 확실한 것이냐고 되물을 수 있다.


제3장: 연상

제1절 수동적 종합의 근원적 현상과 질서형식 연상이란 "의식 일반에 끊임없이 속하는 내재적 발생의 형식과 법칙성"으로, 인과성과는 구분된다(223, 강조는 필자). 역자에 따르면 이 정의는 "시간이 흐르면서 [파지]변양된 표상이 동기부여를 통해 새롭게 주어지는 표상에 끊임없이 결합하는, 즉 시간의식 속에 어떤 것이 다른 것을 기억하고 지시하는 내재적 체험이 발생하는 짝짓기[Paarung]의 법칙"으로 구체화된다(224, 각주 2번, 강조는 필자).* 연상에서 중요한 것은 유사성에 기반한 앞서 포착함[Vorgriff]과 특히 재생산하는 발생이다. "[...] 현상 자체는 어떤 항은 일깨우는 것으로서, 다른 항은 일깨워진 것으로서 하나의 발생이라고 스스로를 부여한다. 일깨워진 항을 재생산하는 것은 일깨움을 통해 성취된 것으로서 스스로를 부여한다." 연상적 결합은 수동적으로 발생하며 그에 주의가 기울여지지 않지만, "반성의 방식으로 지나간 의식과 그 내용을 깨"달을 수 있다(229, 강조는 필자).

★ *Q. 이 정의에 따른다면 '앞서 포착함'은 연상이 아니게 되지 않는가? '앞서 포착함'은 연상인가?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연상인가?

A. 연상이다. 선취 또는 기대를 일깨우는 2차적 연상으로서, 과거를 소급해 지시하는 1차적 연상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추후 소개된다.

 하나의 현재와 다른 재생상된 현재를 이어주는 이와 같은 연상에 대한 탐구는 "어떻게 순수 자아가 자신이 지나간 체험들의 무한한 장을 그 자신의 것으로 자기의 배후에 지닌다는 의식을, 즉 시간의 형식 속에 지나간 삶--회상을 통해 원리적으로 말하면 어디에서나 순수 자아에 도달할 수 있는 삶, 또는 동일한 것이지만, 순수 자아 '자신의 존재[Selbstsein]' 속에 다시 일깨울 수 있는 삶--의 통일체를 획득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답할 수 있게 해준다(232).* 미래의 삶 역시 "새로운 종류의 확증을 통해 언제나 [미리] '규정된 것' 속에 [확증하려는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선취하는 것을 실로 그때그때의 현재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미리 지시하는 가능성을 통해" 획득된다. 요컨대 연상 덕분에 주관성은 당장 흘러가고 있는 현재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 또한 그 자체로 타당하게 존재하는 것으로서 확보할 수 있다. 이로써 자아의 시간성이 강조되고, 체험의 흐름과 시간 자체가 어떻게 구성되느냐는 문제가 (칸트에게서 망각된 것과 달리) 대두된다.

*Q. 연상이 이 물음에 정확히 어떤 대답을 제공하는가? 재생산적 연상과 미리 지시함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과거와 미래가 확보돼있어야 하는데, 연상이 가능하므로 과거가 확보돼있다는 논증인가?

cf. 'transzendental'을 '초월론적'이 아닌 '선험적'으로 번역하는 역자의 동기(234-5의 각주 7번)

 시간의 종합은 동시성과 계기성 모두를 구성한다. 자세히 말해 서로 다른 자료들의 형식적 구조가 합치함으로써 유일무이한 현재가 구성되고, 현재들이 연속적인 통일체로 의식되면서 흐름이 구성된다. 이와 같은 시간의식의 종합과 의식의 시간적 구조의 작동은 대상의 구성을 내포한다. "이제 시간의식이 동일성의 통일체에 관한 구성이나 대상성의 구성에 관한 근원적 장소라면, 더구나 의식되는 모든 대상성의 공존과 계기를 결합하는 형식에 관한 근원적 장소라면, 시간의식은 하나의 일반적 형식을 만들어내는 의식이다. [...] 그래서 시간의식과 그 작업수행에 대한 지향적 분석은 처음부터 추상적 분석이다."(238-9, 강조는 필자)*

*이에 대해 김태희(2014)는 후설이 말은 이렇게 해도 실제로는 시간의식의 분석을 질료에 대한 분석과 함께 엮어서 진행하고 있다고 비판적으로 지적한다(김태희, ⟪시간에 대한 현상학적 성찰⟫, 필로소픽, 2014, p.233).

 그런데 후설은 유사성만으로는 충분히 실제적인 결합이 불가능하다면서 하나의 대상은 유사한 것을 넘어 서로 동질적인 또는 ‘친족관계’에 있는 친밀한 자료들 간의 결합으로 구성된다는 보충적 주장을 펼친다. 이러한 분석은 정적인[statisch]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발생적으로 말하면 한 자료는 그것과 동질적인 자료를 연상시킨다. 이로써 두 자료들은 합치나 합동의 과정을 경유해 동등한 것, 심지어는 동일한 것으로까지 주어진다(동질성의 정도에도 당연히 등급이 있다). 달리 표현해 a에 대한 체험은 a와 동질적인, 동등한, 또는 동일한 b에 대한 체험을 수동적으로 촉발하며, 이와 같은 촉발은 공통성, 일반성에 대한 의식에 발생적으로 선행한다. 이때 a와 b의 어떤 계기가 서로 동질적인 것으로 부각되는지는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다양한 부각의 가능성은 명시화[외현, Explikation]의 의식을 통해 대상의 비자립적 부분과 전체 사이의 관계를 탐구할 수 있게 해준다.

 이제 후설은 다수[의 자료] 간의 질서의 통일이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감각장에 수동적으로 질서를 부여함은 '근원적 현상' 중 하나다. 이 질서는 앞서 분석한 동등성으로서의 유사성뿐만 아니라 '점차 상승함' 또는 '일관적으로 변화함'으로서의 유사성을 통해서도 부여된다. 그러므로 후설은 "어떻게 연쇄가 단순한 수동성 속의 단순한 집합들[...]에 대립해 이루어지는가?"라고 묻는다(247, 강조는 필자). 시간의 형식 자체가 방향이 정해진 흐름 가운데 대상성들이 구성되도록 강제하며, 이러한 형식적 연쇄에 더해 "동일하게 하는 통일체가 이러한 상대성의 흐름을 관통해가고 동일하게 계기하는 자료들 자체 사이에 일관된 질서의 연쇄"를 수립시킨다. 시간에 대해서뿐 아니라 공간에 대해서도 장소의 질서형식이, 즉 "공존 속에 연쇄를 미리 지시하는 질서위치의 장이 제시된다"고 말할 수 있다(249). 감각장 내의 "모든 위치체계"는 "하나의 '장 형식[Feldform]'으로 통합"되며 이 형식 하에 "이러저러한 내용"이 질서있게 통일된다. [여기서 이미 후설은 시간과 관련된 형식적 질서와 질료적 질서를 함께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어서 후설은 통일체 내 계기들 사이 동질성상승함에 이어 '대조'라는 새로운 관계를 개념적으로 도입한다. [애초에 대조 덕분에 각 자료의 고유한 정체성이 의식되는 것이다.] "즉 다수의 항은 그 자체만으로 대조를 통해 각각의 항으로 구분되지만, 그렇다고 서로 대립하지는 않는다."(253) 후설은 대조로 인해 특수하게 비연속적으로 부각되어있는 자료를 포함하는 '멀리 떨어진 융합[Fernverschmelzung]'과 그렇지 않은--말하자면 부드러운 연속과 지속을 가지는--'가까이 있는 융합[Nahverschmelzung]'을 구분한다. [얼룩반점이 있는 흰 평면을 보는 체험과 매끈한 흰 평면을 보는 체험은 다를 것이다.] 어느 쪽이든지 간에 구체적인 통일체는 시간적 연장 가운데서만 생각될 수 있다. 모든 통일체는 시간적 연속체다.

Q. "하얀 바탕 위의 빨간 얼룩반점"이 어째서 "대조가 없는 융합"의 예시인지 이해할 수 없다(253).

 연속적 질서를 수립하는 위치 체계로서의 시간과 공간은 통일체의 개체화를 가능하게 한다. 각 통일체는 특정한 시간위치와 공간위치 또는 구간을 점유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대상은 개체성과 자신의 '이것임[Diesheit]'을 구성하며 "모든 대상은 동일한 것, [회상을 통해] 끊임없이 다시 인식할 수 있는 것 또한 이와 같은 것으로서 근원적으로 구성하는 삶과의 일정한 연관에 속한다."(261, 강조는 필자)

*Q. 시간위치나 공간위치가 어떤 징표, 표찰, 지표가 아니라는 주장을 이해하지 못했다(259).

cf. 기하학과 위상기하학의 정초, 감각장의 현상학(262-265). 친화성을 통한 융합 또는 대립에 의한 수동적 겹쳐짐[Überschiebung]으로서의 시각장의 변화(265).

제2절 촉발의 현상 연상에 대한 탐구는 "의식된 대상이 자아에 미치는 특유한 움직임"인 '촉발'에 대한 탐구를 포함해야 한다. "이것은 자아가 그것에 향하는 것에서 완화되고, 여기에서부터 스스로를 부여하는 직관, 즉 대상의 그 자신을 점점 더 드러내 밝히는 직관--따라서 대상을 앎, 더 상세하게 고찰함--을 얻으려는 노력에서 계속되는 움직임이다."(266) 여기서 잠재적인 촉발하는 경향과 실제로 촉발하는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 "감각자료(그래서 자료 일반)는 촉발하는 '힘이 발산하는 것'을 '자아 극[Ichpol]'으로 보내지만, 그 힘이 약할 경우 '자아 극'에 도달하지 못하며, 실제로 '자아 극'을 일깨우는 자극이 못 된다."(267)

★ Q. 촉발의 대상은 자아인 것 같은데, 촉발의 주체는 의식인가, 대상인가? 아니면 촉발은 이 이분법 이전의 현상인가? 또는 오히려 자아와 의식 사이의 새로운 이분법을 전제하는가? (cf. 칸트에게서는 촉발의 시작점이 의미화되기 이전의 '물 자체'였다.)

 "촉발은 무엇보다 [한 개별적 자료가 다른 개별적 자료보다] 부각되는 것을 전제"하는데, "부각되는 것은 우리에게 대조[Kontrast]를 통해 내용적으로 융합됨으로써 부각되는 것이었다. 촉발은 이제 어떤 방식으로 대조하는--비록 단순히 대조하는 것만이 아니더라도--기능이다. 가장 근원적인 촉발이 인상의 현재 속에 산출된 촉발로 간주되는 한, 대조하는 것은 촉발의 가장 근원적인 조건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267, 강조는 필자) 대조, 촉발, 촉발하는 경향에는 모두 등급이 있으며, 이는 "쾌락처럼 선호하는 감각적 감정"이나 "근원적으로 본능적인, 충동에 따라 선호하는 것"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269).

 다른 한편으로 촉발은 "대상을 향함, 즉 지향함[Intention]을 일깨우는 것[Weckung]으로도 특징지"을 수 있는데, 이것의 "가장 탁월한 예는 촉발이 주목, 파악, 앎, 해석으로 영향을 미치는 경우다."(269) 어떤 층위에서든 통일체의 형성 일반이 "유착과 대조의 조건 아래 또 어쩌면 심정의 조건 아래" 촉발과 연상이라는 요인에 의존한다는 것은 자명하다(271).

Q. 후설은 각 감각장이 "그 자체만으로 촉발의 경향이 완결된 특유한 영역을 형성하며, 연상을 통해 조직화해 통일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감각장들은 실제로도 서로 독립적인가?(270) 이에 대해 경험과학은 뭐라고 말하는가? "어떠한 연상도 어떤 감각영역의 대상에서 다른 감각영역의 대상으로 넘어갈 수 없"다는 촉발의 전파 및 연상의 법칙은 어떠한가?(280)

cf. 촉발 개념과 망각되어있는 '무의식[Unbewußtes]' 사이 관계(273)

cf. 부분에 대한 일깨움과 전체에 대한 일깨움 사이의 상호연관(274-6)

 촉발의 힘과 시간의식의 구조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면, "생생한 현재에서 근원적 인상으로 등장하는 것은 '다른 사정이 같다면' 이미 파지인 것보다 더 강한 촉발의 경향을 지닌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촉발은 전파하는 방향에서 미래를 향한 통일적 경향을 띠며, 지향성 역시 주로 미래를 향한다. [...] 파지로 변화하는 본질에는 [...] 촉발하는 힘을 약화시키는 '명석하지 않게 하는 것'이 포함된다."(276-7) 이와 관련해 연상 또한 "과거로 향한 [...] 연상과 선취하는 것[Antizipation]을 일깨우는 연상"으로 나뉜다.* 후설은 전자를 1차적 연상 또는 '소급해 일깨움'이라 부르고, 후자를 2차적 연상 또는 '부수적으로 일깨움'이라고 부른다. 촉발 일반과 연상 일반의 관계는 긴밀한데, 촉발은 "끊임없이 자신을 넘어서 영향을 미치"기에 자신의 끝에 연상을 발견하고, 연상은 새로운 촉발을 일깨운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278).

*시간의식의 구조 자체가 연상으로 이루어지고 설명된다. "[...] 현재의 구조[...]에는 한편으로 '함께 현재하는 것'[Mitgegenwart]과 파지의 과거 속으로 발산하는 연상, 다시 말해 일깨움이 생기고, 다른 한편으로 미래를 향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연상이 생긴다."(279) 그렇다고 해서 이 형식적 구조가 촉발 덕분에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촉발이 이 형식 위에서 발생할 뿐이다.

Q. '촉발이 전파된다'는 표현을 전반적으로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cf. 촉발의 '소통'에 대한 정의(303)

 이렇게 후설은 촉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촉발이 관여하지 않는 현상에 대해서 역시 지적하고 넘어간다. 어떤 통일체들은 촉발에 힘입어서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지만, 현전을 가능케 하는 시간의 형식 그리고 장소의 형식 및 감각장의 형식"을 구성적으로 실현시키는 융합"은 촉발이 아무 영향도 행사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필연적 융합"이다(281). 내용적 연속성이나 비연속성과 결부된 질료적 종합 역시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통일체로서의 어떤 색깔이 그 자체로 예컨대 강도의 그라데이션을 품고 있는 사태는 촉발과 무관하다.

cf. 촉발과 융합의 관계(283-4)

★ 촉발과 대상성 사이의 관계의 주제로 되돌아가자. "자아에 대해 끊임없이 미리 주어진 대상성과 그런 다음 어쩌면 [이미] 주어진 대상성의 장을 만들어내는 것은 수동성의 작업수행과 이 속에서 가장 낮은 단계인 질료적 수동성의 작업수행이다. [...] 자아에 대해 의식에 따라 구성된 것은 오직 그것이 촉발하는 한에서만 현존한다. 그 어떤 구성된 것은--그것이 촉발의 자극을 행사하는 한--미리 주어지고, 그것은--자아가 자극에 따르고 주의를 기울이면서, 파악하면서 자극에 몰두했던 한--[이미] 주어져 있다. 이것이 대상화하는 근본적 형식이다."(284-5, 강조는 필자) 그렇다고 해서 "대상성들이 그것들의 위치에서 모든 촉발에 앞서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을 뜻하지는 않는다."(287) 촉발 없이는 그 어떤 대상성도 불가능하다. 다만 파지와 연결되어있지 않은, 예컨대 갑작스러운 폭발과 같은 것의 촉발은 순수한 무로부터 비롯하는 것인지, 다시 말해 '무의 촉발'이라는 것이 가능한지와 관련된 수수께끼가 무의식--의식의 생생함과 촉발의 효력이 제로가 된, 파지되고 침전된 대상성들을 함축적으로 포함하는 통일체이자 모든 현재의 필연적 배경--및 의식의 변화라는 수수께끼와 더불어 잔존할 뿐이다.

 한편 '촉발'은 체험 또는 의식의 자료의 생생한 변화 일반을 가리킬 수도 있고, 자아를 실제로 일깨워 주목을 유발하는 사태를 가리킬 수도 있다. 후자는 전자보다 촉발의 힘이 증대된 상태이다. 후설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점점 커지는 잡음에 관한 예시를 든다. "자아는, 비록 아직 주목하는 파악의 방식으로 그 잡음에 귀 기울이지 않더라도, 이제 이미 그 잡음을 특수하게 알아차린다. 이러한 '이미 알아차림'은 자아 속에 그 대상을 향하는 적극적 경향이 일깨워졌다는 것, 자아의 '관심'이 자극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자아의 관심은 '자아 극'에서 잡음을 겨냥하는 이러한 적극적 경향을 노력하면서 충족시키는 [대상을] 향함[Zuwendung] 속에 현실적으로 활동하는 관심이 된다."(290)

제3절 촉발을 일깨우는 작업수행과 재생산적 연상 후설은 무의식의 수수께끼를 되짚으며 새 장을 시작한다. 새로운 근원인상은 늘 새로운 촉발력을 가진 대상성을 설립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의미의 동일성을 매개로 새 대상성에 의해 무의식 속에 은폐되어있던 대상성이 연상적으로 일깨워지기도 한다. 이 경우의 일깨움은 결국 "함축적인 것이 다시 명시적으로 되는 것뿐이다."(302) 이와 같이 침전된 의미를 깨워 일으킴[Aufwachen]의 "동기는 생생한 현재 속에 놓여 있"는데, "가장 효력이 있는 동기는 [...] 관심[Interesse], 즉 심정의 근원적이거나 이미 획득된 가치, 본능적이거나 실로 더 높은 충동 등이다."(307)

Q. 가까운 종합과 멀리 떨어진 종합이 각각 무엇이며 어떤 차이를 빚는지 모르겠다.

A. 각각 비교적 생생한 과거와 현재 사이의 종합과 덜 생생한, 그리하여 보다 덜 명석한 과거와 현재 사이의 종합을 일컫는 게 아닐까?

 가까운 것을 일깨우든, 멀리 떨어져 공허해질 대로 공허해진 표상을 일깨우든지 간에 일깨움은 회상으로 이행할 수 있는데, 이때 회상만이 곧 양상화의 가능성의 원천이다. 회상과 달리 "근원적 경험은 절대적 필연성에서 시종일관 일치하는 연관"이기 때문이다(315).

제4절 예상의 현상 후설은 기본적으로 파지가 예지에 선행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보통은 "이제까지의 생성작용과 유사한 계속적 생성작용이 예상되기 때문이다."(317) 과거에 p가 q로 이어졌다면, p와 유사한 p'가 발생했을 때 q'을 예상할 동기가 부여된다. 이 동기 부여의 힘은 p가 q로 이어졌던 상황의 빈도와 비례해 상승한다. 습관[Gewohnheit]이 어떠했느냐에 따라서 "예상의 선취하는 신념에 힘의 차이가 있으며 따라서 등급이 있다는" 것이다(320). 후설은 이와 같은 'Weil A so B' 형식의 동기부여의 인과성이 필연성의 일종이라고 말한다. 이 필연성은 귀납추리의 법칙들을 산출하기도 한다. 통각 역시 예상의 형식에 힘입어 이루어질 수 있는데, 예컨대 우리는 부분만 보아도 전체의 배치 및 현존을 과거의 경험에 입각해 예상하여 경험적인 확실성을 가지고 통각할 수 있다. 이렇게 "생성된 통각의 통일체, 즉 이러한 동기부여 속의 배치"는 그 안에 종속된 단계들이 서로를 요청하는 "공속성의 통일체"를 생성시킨다(324).

Q. "미래는 근원적 의미에서 경험의 통일체로 만들어지지 않고, 오히려 이 경험의 통일체를 전제한다"(316)는 언명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Q. "예상과 더불어 발생적으로 가장 근원적인 양상화하는 원천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언명(317)은 회상이 양상화의 원천이라는 앞선 설명과 배치되지 않는가?


제4장: 의식의 흐름의 '그 자체의 존재'

제1절 회상의 영역에서 가상 후설은 과거의 대상성을 일깨울 수 있게 해주는 [공허하거나 직관적인] 회상의 본질적 불완전성, 즉 추후에 가상으로 밝혀질 "통일적인 과거의 겉모습은 어떻게 가능한지" 묻는다(328). 무의식의 침전물들은 언제나 일깨워질 수 있는 잠재성을 품고 있다. 그것들이 일깨워질 때, 오류나 착오 또는 "서로 다른 과거에 속하는 기억들이 겹쳐지고 서로 침투하는 것"은 어떤 경로로 발생하는가? 이에 후설은 공통적으로 함께 일깨워지는 파지들은 결코 "동시에 완전한 직관적 회상이 될 수 없다"고 답한다(329-330). 완전한 직관성은 근원인상만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지나간 현재 전체가 완전히 생생해지는 [이상적인] 가능성"(335)도 물론 고려할 수 있지만, 서로 다른 회상들이 같은 촉발의 힘을 가지고 경쟁하거나 심지어는 아예 혼합되어 가짜 기억을 형성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가짜 기억을 가짜인 것으로, 즉 가상을 가상으로 입증해주는 것은 "더 높은 명석함의 단계로 이행하는 가운데 수행된다."(337) 쉽게 말해 더 명증적인 기억이 억압을 뚫을 만한 촉발하는 힘을 발휘할 때 가상은 진상의 후보 가운데서 밀려난다.*

*Q. 가짜 기억에 대한 후설의 설명은 설득력이 있는가? 문제를 해결하기는 하는가? '가짜 기억은 기억들의 혼합물'이라는 가정부터 의심스럽다. 

제2절 내재적으로 존재했던 것들의 체계에 참된 존재 "모든 확인하는 것[Bewahrheitung]은 은폐된 것을 드러냄, '스스로를 부여함[자기소여]'의 명석함으로 이끄는 것이다."(338, 강조는 필자)) 가상을 가상으로 입증하며 반박하고 진상을 확증하는 것뿐 아니라 간접적으로만 현시되었던 외적 지평 또는 내적 지평을 자기소여적 직관의 시야 내로 가져오는 작업도 확인의 예시다. 이 모든 자기소여는 "'명석함'의 등급의 법칙에 지배받는데, [...] 이 등급은 절대적이거나 '순수한' '스스로를 부여함[자기소여]' [...] 속에 자신의 이념적 극한을 갖춘다."(341, 강조는 필자)

★ 여기서 후설은 다소 의미심장한 주장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회상뿐 아니라 "모든 '스스로를 부여함'은 [...] 근원적이며 충분한 의미에서 초월적"인 "어떤 의미에서 '초월적으로' 부여하는 지향적 체험"이다. 심지어는 "의식의 흐름과 그 내재적 시간"마저 초월자에 귀속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능동적인 회상 또는 반성을 통해서만 자기동일성 및 자유롭게 처리될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하기 때문이다(343). "의식의 흐름은 흘러감[Strömen]과 더불어 살아가며, 동시에 자신의 자아에 대해 대상적으로, 즉 객관적으로 된다. [...] 우리는 나중에 곧바로 회상의 '근원적 초재[Urtranszendenz]'에 적용되는 것 또는 내재적 시간의 보편적 형식으로 존재하는 의식의 흐름인 생생한 현재의 흘러감 속에 구성되는 '근원적 그 자신[Urselbst]', '근원적 대상성[Urgegenständlichkeit]'에 적용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다. 따라서 공간적 세계의 초재는 두 번째 단계의 초재이며, 이 초재와의 관계에서 [첫 번째 단계의 초재였던] 의식의 흐름은 내재적 대상성이라고 불린다."(344, 강조는 필자)*

*이처럼 의식의 흐름을 대상화하는 관점은 사실상 사르트르가 펼쳤던 후설의 자아론에 대한 비판을 무효화시킨다. 후설은 자아가 초월자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근원초재'라는 개념은 정말이지 놀랍기만 하다. 

 후설은 이상의 논의로부터 생생하게 흐르는 의식의 경험적 현존뿐 아니라 "그 자체'로서[의] 현존"까지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의식[자아]이 능동적 자아로서 확인할 [그리고 확인될] 수 있다는 것은 진리다. '지금'까지의 의식의 흐름은 참된 존재이며, 의식의 흐름이 자아를 확립하든 않든, 자아에 대해 존재했다. 존재했던 모든 체험은 그 자체로 존재했다. [...]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의식의 흐름에 관해서는 전혀 논의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348-9)* 그 자체로 존재함은 의식 흐름의 본질이다. 이처럼 "의식 삶인 흐르는 자아의 삶 속에 어떻게 이러한 삶 자체가 참된 존재--즉 [...] 가능한 확증의 이념적 상관자인, [...] 의식에 속한 '스스로를 부여함[자기소여]' 속에 놓여 있는 이념적 규범인 참된 존재--로서 구성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초월론적 논리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다."(349, 강조는 필자)** 결론적으로 "자아는 그 자체 존재의 첫 번째 영역, [...] 절대적으로 확고한 참된 대상성의 첫 번째 영역을 구성한다"는 사실이 수동적으로는 작동하기만 하고 능동적인 반성을 통해 비로소 알려진다(350).

★ *Q. 이상의 논의로부터 이 결론이 어떻게 따라나오는지 잘 모르겠다. 계속해서 회상을, 물론 특권적 직관으로 분류하기는 했으나, 불완전한 것으로 이야기했으며 자기소여적 지각조차 더 확인할 것이 남아있는, 공허한 표상과의 혼합물로 규정하지 않았던가? 자아가 초월자라는 주장과 '그 자체 존재/즉자존재'로서의 참된 대상성이라는 주장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 초월자는 언제나 기만의 가능성을 본질적으로 품지 않는가? 내가 후설의 논증에서 놓친 것이 있는지 궁금하다.

**Q. 형식논리학과 구별되는 '초월론적 논리학'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때 '논리학'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A. "인식하는 이성과 이 이성의 형성물에 관한 학문(143)"

제3절 의식의 미래에서 참된 존재의 문제 모든 회상이 일깨우는 연상을 통해 순수한 내재의 영역 내에서 참되고 유효한 것으로 증명될 수 있듯이, "미래에 대해[서도] 참된 존재의 규범이 구속력 있는 규범으로 확정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예상은 오직 지각을 통해서만 실제로 충족될 수 있다."(353) 따라서 실망의 가능성은 모든 예상의 본질이다. 그럼에도 자아가 "다소간에 규정된 선취된 미래를 앞서 갖는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게다가 자아는 과거의 본보기에 따라 충족된 미래를 이렇게 미리 지시하는 테두리 속에 입안하는 직관적 가능성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자유가 있다."(354)*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미규정적 영역으로서의 미래 자체는 즉자적 존재 또는 미리 주어질 수 있는 참된 대상성이 아니겠지만 [앞서 말한 '참된 존재의 규범'의 제약을 받는] 예상만큼은 "대상성을 구성할 수 있고, 미래를 규정할 수 있다."(355)

*하이데거의 '기투[Entwurf]' 개념을 연상시킨다.

 게다가 의식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과거뿐 아니라 미래에 관해서도 자신의 고유한 시간적 존재를 객관적으로 구성"한다. 미래를 포함한 객관적 시간의 구성은 "의식[이] 그 자체 속에 초월적 지향성으로 객관적 세계를 구성"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객관성의 구성 이후에는 심리적 체험이 "신체를 통해 규칙적으로 조직되어 구성"되어 "심리물리적 체험으로 규칙화"되고(356)*, 사물은 "그 자체로 미래를 지니며" 경험되는지 여부와 무관한 즉자적 존재가 된다(357). 버클리에 반대하며 후설은 "어떤 사물이 존재했다고 지각으로 그것을 계속 증명할 필요는 없다"고 단언한다(358, 강조는 필자). 사물들의 구성 가운데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세계인 세계의 보편적 객체성" 또한 구성될 수 있다. 이 모든 일을 수행하는 의식의 "모든 가능한 경험에는 확고한 규칙이 미리 지시되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359).**

cf. 자연의 구성(357-8)

*물론 현상학적 환원 하에 신체성[Leiblichkeit]은 "오직 현상학적으로 구성된 것으로서만 고려된다."(359)

**Q. 후설은 어째서 자연 및 세계의 구성과 의식 체험의 규칙이 미리 지시되는 사태를 서로 긴밀한 것으로 서술하는가?(358-9)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연의 객관적 실제성이 자아와 관련 없이 그 자체만으로 있는 사실[Tatsache]"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아에 대한 사실, 즉 실제적이거나 가능한 경험을 통한 또 이 경험 속에 미리 지시된 확증하는 것을 통한 사실"이다. 한편 물리적 자연은 "주어진 세계 전체의 단지 구성적 하부 층일 뿐이다."(360) 그 상부에는 "인격적 공동체의 세계와 문화의 세계"가 현존한다(361). 이와 같은 객체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특정한 규칙들 하에 자기소여적 직관을 가질 수 있다.

★ Q. '자아에 대한 객체성'과 '[버클리가 없다고 단언한] 경험됨과 무관한 객체성'이 어떻게 같은 것일 수 있는가? 후설은 두 개의 객관을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


결론적 고찰 의식은 지향적 발생을 통해 "끊임없이 생성되는 것"으로서 "결코 중단되지 않는 역사"이자, "내재적 목적론으로 지배되는, [진리의 규범에 따라] 더욱더 높은 의미의 형성물을 단계적 방식으로 구성하는 것"이다(364). 이렇게 구성된 객체들, 예컨대 자연과 문화에 대한 존재론[Ontologie]은 초월론적 현상학과 긴밀한 동맹관계를 맺는다. 전자는 대상성이 주어지는 의식 일반을 탐구하는 반면, 후자는 대상적인 존재 자체를 그저 주어진 것으로 간주한 뒤 탐구한다. 따라서 후자의 판단의 현실성과 가능성 모두가 전자의 판단에 의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