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mund Husserl, trans. by David Carr, The Crisis of European Sciences and Transcendental Phenomenology,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70 (원문은 Walter Biemel이 편집한 Hua VI).
1부 유럽 인류(Humanity[Menschentum])의 급진적 삶의 위기에 대한 표현으로서의 위기
§1 그것의 계속되는 성공을 생각했을 때, 정말 학문에 위기가 있는가? 본 강의의 제목에 따라서 만일 학문 일반에 정말로 위기가 찾아왔다면, 그것은 학문의 성격 자체, 전개의 방식 및 방법론 자체가 의문스러워졌음을 가리킬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회의주의, 비합리주의, 그리고 신비주의에 굴복한 철학 또는 철학적 주장을 펼치는 심리학이라면 모를까, "엄밀하고 매우 성공적인 학문적 분과로서 동경을 받는 범례인" 순수한 수학과 정밀한 자연과학마저 같은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3-4) 물론 수학, 과학이라 할지라도 그 전체적 양식은 변화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한물 간 것으로 취급된 양식 하에서 산출된 지식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 학문적 성격과 설득력을 여전히 인정하고, 그것이 타당한 발견들로 이어졌으며 기술적인 발명들을 가능케 했음을 알고 있다. 뉴턴의 것이든, 아인슈타인의 것이든--즉 이론의 최종적 구축이 불가능하다 할지라도--물리학은 계속해서 정밀학으로 남는 것이다. [철학과 심리학을 제한] 인문과학 역시 의문의 여지 없는 성과를 내왔다.
§2 순전히 사실적인 과학의 이념으로의 실증적 환원. 삶을 위한 의미를 상실했음[Verlust ihrer Lebensbedeutsamkeit]으로서의 학문의 "위기". 그러나 학문의 위기는 [학문에 내재적인 동기에서가 아니라] "우리 문화의 위기와 여기서 학문에 귀속된 역할의 위기에 대한 일반적인 비탄[Klagen]"에서 발발한 것이다. 오랜 시간 심리학을 괴롭혀온 "주관성이란 수수께끼[Rätsel]" 그리고 "심리학적 주제 설정[Thematik]과 방법의 수수께끼"*가 심리학뿐만 아니라 근대적 학문 일반의 모호성을 낳은 것이다(5, 강조는 원저자). 구체적으로 말해, 학문이 인간의 현존[Dasein]을 위해 가지는 의미는 지난 세기[19세기] 초 급격히 변화했다. 학문을 지배한 실증주의적 경향은 전쟁과 역사적 격변들을 겪으며 우리에게, 특히 젊은 세대에게 그 호소력이 가장 짙어진 "[...] 인간 현존 전체의 의미 또는 의미없음[Sinn oder Sinnlosigkeit]에 대한 물음들"을 원칙적으로 배제했다. 그러나 이 물음들은 "모든 인간을 위해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것으로서, "합리적인 통찰을 기반으로 한 보편적 반성과 답변을 요구"한다. 순전히 물체들에 대한 학문[bloße Körperwissenschaft]은 주관성을 추상시킴으로써, 인문학은 모든 가치판단의 물음을 배제함으로써 이 요구를 저버렸다. 결과적으로 학문과 객관적 진리의 문제는 "세계가 사실적으로 [...] 무엇인가[was die Welt [...] tatsächlich ist]"를 따지는 문제로 전락했으며, [가치있음과 무가치함을 결정하기에 오늘날 우리에게 정작 중요한] 인간 주체의 이성과 비이성의 문제를 외면했다(6). 학문이 사실에만 집착하여 "정신적 세계의 모든 형체들(shapes[Gestalten]), 인간이 그에 의존하는 삶, 이상, 규범들의 모든 조건이 덧없는 파도처럼 형성되고 스스로 용해된다는 것"만을 가르쳐준다면, 우리는 그로부터 위로를 얻을 수 없다(7).
*Q. 이 수수께끼로 후설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A. 데카르트 이래로 에고 코기토의 본질이 잘못 파악되어 그에 의해 모든 학문이 그릇된 영향을 받았다는 것 아닐까?(S씨)
§3 르네상스 시대에 철학의 이념의 새로운 정식화를 통한 유럽 인류의 자율성 정초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만 해도 상술한 인간적인 문제들은 학문의 왕국으로부터 배제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19세기에 이르러 "학문의 이념의 실증주의적 제한"이라는 본질적 변화를 주동한 "더 깊은 동기들"을 밝히는 것이 본 강연의 중요한 주제다(7, 강조는 원저자). 이전에 르네상스의 유럽인들은 중세의 현존 방식을 버리고 고대인을 범례로 삼아 스스로의 삶을 자유롭게 재형성하고자 했다. 고대인의 본질은 그들이 순수 이성 또는 철학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삶을 지배하게 했다는 것이다. 고대인은 모든 신화적 선입견이나 전통으로부터 비판적으로 독립하여, 인간과 세계를 그에 본유적인 이성과 목적론에 입각해 이해하는 보편적 지식으로서의 철학을 이론으로서뿐만 아니라 실천의 기반으로서도 중시했다. 근대 초기에만 해도 철학은 르네상스 시기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대로부터 기원한] 모든 것을 포괄하는 보편적 학문으로서의 의미를 보유하고 있었다. 사실과 이성, 시간성과 영원성의 문제는 철학이라는 보편학 하에 상호적으로 관련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후설 당대] 학문의 실증주의적 개념은, 역사적으로 말해, 잔여적인 개념이다." 왜냐하면 기존의 철학이 취급했던 형이상학, 즉 이성[Vernunft]의 문제들을 포기하고 남은 것만을 연구하기 때문이다. 이때 "이성은 "절대적", "영원한", "초시간적", "무조건적으로" 타당한 이념과 이상들을 위한 표제"이자 그에 따라 진정한 지식, 진정한 가치, 진정으로 선한 행위를 규정해주는 기준으로서 "순전한 사실의 우주로 이해된 세계를 능가한다."(9, 강조는 원저자) 결국 이성의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철학적인 동기가 [초기 근대인] 18세기 즉 계몽의 시기의 학문적 성취와 열정을 추동했던 것이다.
cf. 후설에게 이성이란 의미 및 가치를 부여하는 기능이자, 반성의 능력 그리고 법칙성과 비우연성의 원천 같다. ⟪사물과 공간⟫의 결어에서 세계의 존재가 '비합리적' 사실이라고 지적했던 점을 기억할 것.
§4 초기의 성공 이후 새 학문의 실패; 이 실패의 해명되지 않은 동기. 그러나 [계몽주의 이후] 새로운 인류는 보편적 철학의 이념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으며, 오직 실증적인 학문들에만 엄청난 성공을 가져다준 방법론을 채택했다. 철학과 사실적 과학이 상호적으로 배타적인 관계를 맺게 되면서 실증적 과학자들은 "비철학적인 전문가"로 머물렀다(11). 형이상학이 어째서 이와 같이 실패했는지에 대한 반성적 이해는 흄과 칸트의 시대로부터 오늘날[후설 당대]까지 소수의 선택받은 이들에 의해서만 그러나 오랜 시간 계속되었다.
§5 보편적 철학의 이상[das Ideal]과 그 내적 용해[Auflösung]의 과정. 이에 따라 우선 철학은 형이상학의 가능성에 대한 학이 되었으나, 이는 그 자체로 사실적 학문의 가능성을 포괄했다.* "왜냐하면 [사실적 과학]은 그것의 관계적 의미[...]를 철학의 분할 불가능한 통일성 안에서 가졌기 때문이다. 이성이 앎으로서 무엇이 존재하는지를 규정할 때, 이성과 존재하는-것(that-which-is)은 분리될 수 있는가?"(11, 강조는 원저자) 이 물음에 대한 후설의 답은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이성이야말로 모든 사물과 가치, 목적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것들에 대한 인식의 참됨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말하자면 근원적인 이성에 대한 철학적 믿음은 후설 당대에 깨졌고, 그에 따라--철학의 건립이야말로 모든 학문과 유럽 인류 자체를 건립하는 것이기에--사실적 과학들의 참됨의 의미 전체가 흔들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 인류의 문화적 삶 즉 현존의 의미마저 상실되는 위기가 발발했다.** 검토되지 않은 의견으로서의 독사에 반해 참된 존재[에 대한 지식으]로서의 에피스테메라는 이념적 목표가, 그 목표를 쫓는 올곧은 철학과 경험주의적 회의주의--경험주의적 회의주의의 입장은 그 어떤 사실적 경험으로부터도 이성적 요소를 발견하지 않는다--사이의 투쟁 가운데서 폐기된 것이다. 이로부터 "이성과 존재하는 것 일반 사이의 가장 깊은 본질적 상호관계에 대한 세계-문제"라는 "모든 수수께끼 중의 수수께끼"가 인지될 필요성이 생겨난다(13, 강조는 원저자). 이 모든 서술은 역사 속에서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해 분투하는 인류"라는 역사적 현상에 대한 것이다(14). 그러나 이에 더해 철학의 이념으로의 귀환과 참된 방법론을 통해 철저주의적으로 모든 소박성을 탈피하는 새로운 시작이 요구된다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다. 이 요구는 근대의 숙명이며 세계-수수께끼[Welträtsel]에 대한 발견을 통해 추동된다.
*Q. 철학이 여타 모든 학문을 정초해야 한다는 이념도, 정초할 수 있다는 믿음도 한갓 역사적인 것이 아닌가? 어째서 후설은 이것이 철학의 정의에 마치 분석적으로 포함되는 것처럼 생각하는가?
A. 철학을 오늘날의 분과 학문으로서가 아니라 반성함 일반, 무엇을 왜, 어떻게 하는가에 대한 생각함 일반으로 여긴다면 후설의 믿음은 꽤 자연스럽다(S씨).
**Q. 실존의 위기가 철학의 위기로부터 초래된다는 진단은 철학의 영향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것이 아닌가? 이와 같은 진단의 근거는 무엇인가? 앞선 질문에 대한 답변과 연관지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
A. 반성의 상실 또는 그릇된 반성은 실존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S씨). 물론 실존의 위기에 대한 해답을 개개인이 찾도록 두는 것이 아니라 철학이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을 것이다(P씨). 그러나 후설의 해답은 구체적인 의무를 부과하기보다 '직관에 따라 획득한 명증한 앎을 토대로 스스로를 이해하고 자신의 인식에 책임을 지고 살아가라'는 원리를 부과하는 것이기에 개개인에게 충분한 자유의 여지를 준다.
§6 인간의 의미를 위한 분투[Kampf]로서의 근대 철학의 역사 후설은 [상술한 요구가 현존의 위기 가운데서 발발하는]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데카르트로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의 근대철학의 운동을 철학 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철학이 자신의 참되고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분투하는 것은 결국 인류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분투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유럽 인류의 진정한 정신적 분투 자체는 철학들 사이의 분투, 즉 회의주의적 철학들--또는 [철학이라는] 단어는 보유하고 있지만 그 과제는 보유하고 있지 않은 비철학들--과 실제적이고 여전히 생명력있는(vital) 철학들 사이의 분투라는 형태를 취한다." 철학의 진정한 자기이해만이 "고대철학의 탄생과 함께 유럽 인류가 타고난 텔로스"가 과연 [다른 문명과 다를 것 없는] 어느 한 문명의 역사적으로 우연한 성취에 불과한지, 아니면 인간성의 본질을 처음으로 구현한 것(entelechy)인지 결정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15, 강조는 필자). 달리 말해 이성이 그것의 보편적 형태, 즉 필증적 방법을 통해 필증적 통찰을 낳는 보편 철학의 형태 속에서 현현해야만 비로소 "유럽 인류가 "중국"이나 "인도" 같은 순전히 경험적인 인류학적 유형[으로 남]기보다 자신 안에 절대적 이념을 가질지 [그] 여부가 결정될 수 있고, 다른 모든 문명들의 유럽화라는 스펙터클[Schauspiel]이 세계의 의미에 속하지, 세계의 역사적 무의미에 속하지 않는 절대적 의미의 지배를 입증하는 것인지 여부가 결정될 수 있다."(16)*
*후설의 유럽중심주의가 끔찍하다.
§7 이 글의 탐구 계획. "과제로서의 철학의 가능성, 즉 보편적 지식의 가능성에 대한 신념(faith[Glauben])은 우리가 떠나올 수 없는 것이다[nicht fahren lassen kann]. 우리는 진지한 철학자들로서 우리가 이 과제에 대한 소명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안다. [...] 우리의 철학함 속에서 [...] 우리는 인간이란 종의 공식 직원들(functionaries of mankind[Funktionäre der Menschheit])이다." 그러므로 철학자의 직업적 책임은 인류의 참된 존재를 위한 책임을 내포한다. 인류의 참된 존재는 "[...] 텔로스를 향한 존재이며, 만일 그것이 실현에 다다를 수 있기나 하다면, 오직 철학을 통해서만 그럴 수 있다."(17, 강조는 원저자)
이에 따라서 후설은 과거의 철학을 역사적이고 비판적으로 되돌아봄으로써 철학의 자기이해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철학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을 꿰뚫음으로써 그것의 내적 의미와 숨은 목적론을 발굴하겠다는 것이다. 이로써 철학 전체가 뜻하는 바가 변형되고 새로운 철학[현상학]--모든 철학이 무의식중에 내심 그 뜻을 향해있었던(inwardly oriented)*--의 실천적 가능성이 직접적인 수행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 입각해 근대 심리학의 [필연적] 실패와 심리학주의의 비극적인 태동 또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현상학의 역사적 필연성에 대한 후설의 확신의 근거가 무엇인지 추적하는 것이 추후 독해의 관전포인트 중 하나일 것 같다.
Q. 역사적 필연성인가, 당위인가? 만일 전자라면, 역사에 의해 이미 반박되지 않았는가? 애초에 사실로부터 필연성을 도출해내겠다는 계획 자체가 이상하게 생각된다.
A. 전자라 해도 반박되지 않는다. 역사의 종점은 도래하지 않았으므로 알 수 없다(S씨).
2부 물리주의적[physikalistisch] 객관주의와 초월론적 주관주의 사이의 근대적(modern, [neuzeitlich]) 대립의 기원에 대한 해명[Ursprungsklärung]
§8 수학의 재형상화(reshaping[Umgestaltung]) 속 학문의 보편성이라는 새 이념의 기원 후설은 보편적 학문이라는 과제가 근대에 부과되었으며, 그것이 이후의 모든 철학적 운동들을 지배했다고 말한다. 이 새로운 이념은 수학의 재형상화 가운데서 태동했는데, 이 과정의 일부는 "체계적으로 일관적인 연역적 이론이라는 이념"을 표방하는 고대의 유클리드 기하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고대의 유클리드 기하학은 공리적인 근본 개념들 및 원칙들로부터 출발해 필증적인 논증을 이어나가며, "순수한 합리성으로 형성된 총체성(totality[Allheit]), 그것의 무조건적 참됨이 통찰될 수 있는 총체성"을 추구했다. 그러나 유클리드 기하학, 나아가 고대 수학 일반의 과제 [그리고 탐구영역은] 근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념화와 형식화를 활용하긴 했으나 유한하게 닫혀있었다. 근대의 수학이 고대의 수학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바로 "무한한 과제의 가능성"을 엿보았다는 점에 있다(21). 근대의 수학은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일관적인 방법론을 통해 "[무한한 세계를 이루는] 모든 대상을 궁극적으로 그것의 완전한 즉자존재[An-sich-sein]에 따라 획득"하고자 했다. "존재하는 것 일반의 무한한 총체성이 본성적으로 합리적이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통일체[Alleinheit]"이며 그것이 "그에 상응하는 보편적 학문을 통해 남김 없이 정복될(mastered) 수 있다"는 믿음이 대수학 및 해석기하학의 도움을 빌어 확산된 것이다(22, 강조는 필자). 근대의 합리주의는 수학에서 멈추지 않고, 갈릴레이적인 '수학적 자연과학'으로 나아간다.
§9 갈릴레이에 의한 자연의 수학화 새로운 수학은 갈릴레이로 하여금 자연 자체를 수학적 다양체로 이념화할 수 있게 해주었다. 후설은 자연의 수학화가 어떤 숨겨진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사유의 흐름이 이러한 결과를 동기부여했는지 추적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갈릴레이의 탐구가 무엇을 전통을 따라 전제했고, 무엇을 변화시켰으며, 그처럼 물리학을 완전히 혁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직관으로부터 유리된 상징주의로 탈바꿈한) 현대 물리학과는 어떻게 다른지 알 필요가 있다.
a. "순수 기하학." "직관적으로 주어진 주변세계(surrounding world[Umwelt])"에서 주어지는 물체들의 도형(shape[Gestalt])은 아무리 그에 상상을 통한 자유변경을 가해도 "이념적 공간에서 그려질 수 있는 기하학적으로 "순수한" 도형들이 아니다."(25) 그것들은 다소간 곧거나, 둥글거나 할 수 있지만 완벽의 이념을 따라서 순수하게 곧거나 순수하게 둥글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완벽성을 끝까지 추구해나가면 일상적으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극한-도형들[Limes-Gestalten]"을 획득할 수 있다. 극한-도형들은 실제적 프락시스가 아닌 ""순수한 사고"의 이념적 프락시스" 가운데서 "탐구의 장으로서 이념적 대상들의 무한한 그러나 자기폐쇄된(self-enclosed[in sich geschlossene]) 세계"를 이룬다. 이러한 도형들은 일종의 문화처럼 침전되고 축적된 의미를 가지는 채, 사용될 때마다 그것을 비로소 의미화한 최초의 직관을 상기할 필요가 없는 "오랫동안-이해된 획득물의 형태"를 가진 도구가 되었다(26, 강조는 원저자).
cf. 후설에 따르면 "여기서 우리에게 기하학은 시공간에 대한 수학 전체를 대변한다"(27).
새로운 수학적 프락시스는 "정밀성[Exaktheit]"을 획득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기본적인 도형들로부터 출발해 "아프리오리하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체계적 방법을 통해 최대한 모든 상상 가능한(all possibly conceivable) 이념적 모양들을 건설적으로 그리고 일의적으로(univocally) 생산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마침내 태동한 [것이]다."(27, 강조는 원저자) 이러한 기하학적 방법론은 물론 주변세계에서 직관적으로 주어지는, 전학문적인 도형들을 되가리키지만(point back), 그러한 도형들은 상호주관적으로 일의적으로 규정될 수 없다. 전학문적인 도형들의 이러한 결함을 보완해주고 [정밀성을, 궁극적으로] 객관성을 획득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측정의 기술[Meßkunst]이다. 세계의 참되고 객관적 존재를 규정하고자 한 새로운 "철학적" 지식에 대한 열망과 함께 측정의 기술 또한 실천적이기보다 이론적인 관심 하에서 단순히 경험적인 성격을 잃고 이념화되었고, "순수하게 기하학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28).
b. 갈릴레이적 물리학의 기본적 관념[der Grundgedanke]: 수학적 우주[Universum]로서의 자연. 갈릴레이는 이렇게 이념화된 (그럼에도 테크놀로지[Technik]의 수단으로서 "응용"되는) 기하학 그리고 정밀한 측정의 기술을 전통으로서 그대로 받아들였다. 기하학자는 이념화의 성취(accomplishment[Leistung])가 최초에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필증적, 수학적 명증의 기원들"이 무엇인지를 따질 필요가 없다. 그러나 역사를 반성하는 현상학자는 이러한 배경 위에서 어떻게 "지식의 "기원"이 [새로운] 중대한 문제가 되어야 했는지" 물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어째서 자연의 수학화가 지식의 토대에 대한 데카르트적 물음을 야기했는지 물을 수밖에 없다.]
후설에 따르면 갈릴레이는 기하학적으로 사고했으며, 기하학을 통해 궁극적으로 물리학의 이념으로 인도되었다. 기하학적 방법론은 "경험적으로 직관되는 세계에[는] 사실 본질적인 주관적 해석들의 상대성을 극복"하고 모두에게 "동일하고 비상대적인 진리"를 확보하게 해준다. 경험적 도형에서 시작해 계속되는 접근[Approximation]을 통해 기하학적으로 이념적인 도형이라는 극한에 도달하는 것이다(29). 그런데 극한의 도형들을 취급하는 순수 수학은 물체적 세계로부터 그 일부를 추상함으로써만 작동한다. 반면 구체적인 체험에서 도형들은 감각 가능한 감성내용(sensible plenum[sinnlichen Fülle])을 가진 것으로 체험된다. 달리 말해 흔히 2차 성질이라 [잘못] 일컬어지는 색, 소리, 냄새와 같은 감각적 성질들이 인식을 동반하는 것이다. 구체적 물체에 있어 그것의 시공간적 위치나 감성내용의 성격 등은 공속하면서 전체 물체의 변화 가능성을 제한하고, "그것[물체]의 존재[Sein]를 그것의 그렇게 존재함[Sosein]에 묶어둔다."(30, 강조는 원저자) 예컨대 사과 한 알이 갑자기 파래지거나 냉장고보다 커질 수 없듯, 아직 수학화되지 않은 주변세계에서도 체험의 내용은 결코 임의적이지 않다. 세계를 이루는 요소들은 체험의 불변하는 양식[Stil] 하에서 (동기부여적) 인과성의 규칙[kausale Regelung]에 따라 단순한 총체가 아니라 상호공속하는 총체적 통일체를[nicht bloß eine Allheit, sondern Alleinheit] 이룬다. 이 점은 후설에게 아프리오리한 명증이다.
그러나 주변세계[라는 통일체의 규칙]에 대한 전학문적 지식은 전형성에 기대며 ['실재'의] 근사치에 머무른다. 관심과 주제가 끊임없이 변전하고, 세계가 단지 지평으로서 모호하게만 의식되는 전학문적인 인식의 삶 가운데서 세계에 대한 [진정한] "철학", 학적 지식은 어떻게 가능해질 것인가? 후설에 따르면, [자연의 수학화를 신봉하는 이들에게] 이는 바로 수학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수학은 첫째, 세계의 시공간 내에 자리하는 도형들을 일의적으로 규정 가능한 이념적 대상으로 추상시킴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의 객관적 세계를 처음으로 만들어냈다."(32) 수학의 도움을 빌어서야만 비로소 모든 사물과 속성과 관계는 '그 자체로' 즉 객관적으로 규정될 수 있다. 수학은 둘째, 측정의 기술을 통해 이념의 영역에서 경험적으로 직관되는 세계로 '하강'하면서 사물을 연장성의 면에서 탐구할 수 있게 해주었다. 연장으로서의 사물의 성격과 그런 성격을 가진 사물들 간의 관계를 측정하면서 "새로운 종류의 귀납적 예측" 즉 필연성에 대한 일종의 "계산"이 가능해졌다(33). 이로써 이념적 기하학은 "응용[angewandeten]" 기하학이 된다.
후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만일 연장으로서의 사물이 수학화되어 그에 대한 에피스테메가 가능하다면 그 외의 자연에 대해서도 같은 이념적 가능성을 부과해야 하지 않겠냐는 추측[vermutende Frage]을 제기하고 이것이 갈릴레이로 하여금 자연 전체를 건설적으로[konstruktiv] 규정 가능한 무언가로 생각하도록 추동했다고 말한다. 자연 전체의 수학화는 측정이 연장뿐 아니라 모든 실제적 속성들과 인과관계, 궁극적으로는 경험 가능한 모든 것에 적용되어야만 비로소 가능하다. 세계에 대한 주관적 해석의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세계가 결국 하나의 같은 세계라는 신념은 감각적 성질들마저 객관적 세계의 현현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달리 말해, 세계는 수학화될 수 있는 연장의 세계와 수학화될 수 없는 감성내용의 세계로 이분되어있지 않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감각적 성질들은 연장과 달리 그에 대한 직접적 수학화가 불가능하다.*
*Q. 그렇다면 후설은 사실상 1차 성질과 2차 성질의 구분이라는 로크의 구도를 폐기하지 않고 있는 것 아닌가?
A. 둘은 추상적으로만 분리 가능하지, 사실/구체적으로는 분리 불가능하다(35).
c. "감성내용(plena["Füllen"])"의 수학화 가능성[Mathematisierbarkeit]이라는 문제 그러나 직접적 수학화는 왜 불가능하며, 애초에 '간접적 수학화'는 무엇을 의미할 것인가? 후설은 감성내용에 대해서도 특정한 기준--온기, 매끄러움 등--을 정해 그 크기를 측정하는 작업이 가능하지만 '정밀한' 측정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정밀성'은 오직 이념성에 의해 인도되어야만 획득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선 추측에 따르는 긍정적인 기대를 이어간다면, 이념화와 건설[Idealisation und Konstruktion]을 통해 이미 객관화된, 둘이 아닌 하나의 세계 형식[Weltform]은 마찬가지로 둘이 아닌 하나의 기하학에 의해 규정 가능한 전체 형태를 가지고 있고, 구체적인 감각적 성질 또한 이러한 유일한 세계 형식의 일부다. 따라서 감각적 성질은 그것을 말하자면 담지하는 시공간적 도형에 본질적으로 속하고 또한 그에 의해 규정된다. "[구체적] 실제적 물체의 모든 경우에서, 사실적 도형은 사실적 감성내용을 요구하고 그 역도 참[인 것]이다."(35) 나아가 도형[의 모양]이든, 감성내용이든 자연의 모든 변화는 "특정한 인과성들에 따라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사실 순수 기하학 이론과 측정 기술의 이념화를 통한 응용 기하학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위에 제안된 구상[Konzeption]"이 조금도 낯설지 않다(36, 강조는 필자). 그런데 [물리학의 이념을 최초로 창립하다시피 한] 갈릴레이에게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 이 구상, 즉 구체적 감각-성질을 통해 스스로를 실제적인 것으로서 현현시키는 모든 것은 [이념화된] 도형의 권역[...]에 속하는 사건들 속에서 자신의 수학적 지표를 가져야만 하며 이로부터 [감성내용의 권역에 대한] 간접적 수학화의 가능성이 태동해야만 한다는 구상에 맞닥뜨릴 수 있었는지" 묻는 것이 중요하다(37, 강조는 원저자).
Q. 직접적 수학화와 간접적 수학화 사이의 차이가 분명하지 않은 것 같다.
A. 이념적 기준은 이미 주어져있고 그것에 접근하기만 하면 됨 vs 이념적 기준이 될 수 있는 척도를 새로 고안해야 함?(S씨)
d. 자연에 대한 갈릴레이의 구상의 동기 진정한 객관적 지식의 추구라는 르네상스의 시대정신이자 근대적 전통을 이어받아, 갈릴레이는 "순수 수학의 보편적 적용 가능성"을 당연하게 생각했다(38, 강조는 필자).* 감성내용의 영역이라 할지라도, 측정의 적절한 방법만 찾아내면 그에 대한 수학화가 가능하다고 믿은 것이다. 이에 따라 그는 "직관적으로 주어진 세계에서 보편적 귀납성[존재하는 모든 것이 귀납추리의 대상이라는 성격]이 성립한다"는 실질적으로는 가설인 주장을 애초부터 참된 것으로 받아들인다. 갈릴레이는 "실제로 "공식들"로써 수학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인과적 상호관계들을 찾아냈다(40)". 위의 가설을 검증하는 데에[Bewährung der Hypothese] 성공한 것이다. 이로써 물리학의 과제는 직관적인 감각의 세계를 포괄하는 자연 일반을 수치로써 법칙화하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고, 공식을 발견하며 이론을 생성해내는 것이 되었다.
*Q. 이는 c에서 갈릴레이에게 상술한 구상이 낯설었으리라는 서술과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어디까지가 전통이고 어디부터가 혁신인가?
A. 성립 자체에 대한 신념은 굳건했으나, 어떤 방법론을 통해 그 참됨을 검증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아직 신념이 없었을 수 있다. 즉 수학이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하다는 것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으나, 어떻게 적용 가능하냐에 대해서는 탐구를 직접 수행해봐야 한다고 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인과성의 보편적이고 구체적인 네트워크 내에서 구체적으로 실제적인 것을 규정할 수 있는 것으로 가정되는 수학적 객관화의 본질적 전제 위에서" 물리학적 탐구와 프락시스를 통해 실천적으로 규정될 문제다(40).
e. 자연과학의 근본가설의 검증적 성격[Bewährungscharakter] 갈릴레이의 이념에 대한 자연과학적 검증[확증, Bewährung]은 본질적으로 끝나지 않는 성격을 가진다. 각 검증의 단계는 그 자체로는 오류 없이 고유한 방법론에 입각해 정밀하게 이루어지지만, 새로운 검증의 단계로 나아갈 때마다 참된 자연에 점점 더 접근해가는 진전된 표상이 제시된다.
f. 자연-과학적 "공식"의 뜻["Formel"-Sinnes]이라는 문제 수학적 이념성들 사이의 상관관계를 함수적으로 규정하는 공식만 구비되어있다면 그에 따라 직관적으로 주어지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삶에서 필요한 예측들[Voraussichten]이 가능해지며, 수학은 순전히 프락시스의 특별한 형태가 된다. 그렇다면 수학화 그리고 그것의 실현된 공식들은 삶 전반을 위해 "결정적인 성취"이다."(43) 그러나 자연의 공식화와 더불어 그것의 의미는 보다 피상적인 것이 된다[외면화된다, 그 근원으로부터 분리된다, Sinnesveräußerung]. 측정의 기술을 통해 기하학은 산수화(arithmetization[Arithmetisierung])의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 직관적 현실성보다도 수와 수적 관계, 수의 법칙에 대한 사고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다. "이러한 기하학의 산수화는 거의 자동적으로 [...] 그것의 [원래의] 의미의 소실[Entleerung ihres Sinnes]로 이어진다. [순수 직관으로서] 현실적으로 시공간적인 이념성들[die wirklich raumzeitlichen Idealitäten]*은 [...] 말하자면 순수한 수학적 형태[Zahlgestalten], 대수적 구조물[Gebilde]로 말하자면 변형된다."(44, 강조는 필자) 이제 기하학은 오직 "상징적인[symbolisch]" 의미만을 가지게 되며, 사실상 순수한 해석[분석, Analysis]의 방법으로 변형된다. 이러한 방법적 변경, 즉 완전히 보편적인 "형식화"가 곧 갈릴레이의 시대의 이론들 가운데서 무반성적이고 본능적으로 발생한 바이다. 이 형식화는 라이프니츠의 구상을 경유해 오늘날 세계 일반, 존재하는 것 일반의 다양체가 준수하는 의미의 형식을 밝히는 형식논리학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Q. '현실적 이념성'이라니 형용모순이 아닌가? 이념성에도 이념적인 수준의 차이가 있는 것인가?
A. 현실을 수치화하는 것과, 수치에서 수치를 연산해내는 것은 상이한 작업이다(S씨).
Q. 후설은 자연의 공식화를 일종의 '타락'으로 보는 것인가?
A. 후설은 수학과 자연과학의 성과를 인정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공식화 및 형식화가 발생해선 안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근원적인 현실을 망각하고 직관으로부터 유리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뿐이다.
A2. 근원의 망각뿐 아니라 근원의 왜곡 또는 해체 또한 후설이 지적하는 문제다. 직관적 생활세계로부터의 파생태인 수의 세계가 사실은 참된 자연이라는 식의 사고는 일종의 '패륜'이다(S씨). ➔ 비직관적인 것이 근원적일 수는 없다.
g. "테크닉화"에서의[in der "Technisierung"] 수학적 자연과학의 의미 소실[die Sinnentleerung] 이제 대수적 산술은 일종의 테크닉[Kunst]이 된다. 계산적 테크놀로지[rechnerische Technik]를 통해 "그 참됨의 진정한 의미[wirklicher Wahrtheitssinn]가 오직 주제화된 것(subject matter[Themen]) 자체에 현실적으로 향해진 구체적으로 직관적인 사고에 의해서만 획득될 수 있는 결과들[...]을 성취하는 순전한 기술"이 된 것이다. 학자는 문자와 기호들을 가지고 "게임의 규칙[Spielregeln]"을 따라서만 작업하며, "여기서는 이 기술적 과정에 의미를, 올바른 결과들에 진리를 진정으로 부여하는 근원적(original[ursprünglich]) 사고[...]가 배제돼있다."(46, 강조는 원저자) 그러나 이러한 테크닉화가 정당하고 필연적인 것은 오직 해당 방법에 근원적으로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어째서 해당 방법의 사용이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설정됐는지가 망각되지 않는 한에서, 의문시되지 않는 전통[unbefragten Traditionalität]이라는 성격을 벗는 한에서이다.
[그러나 상술한 조건들은 지켜지지 않았고 오늘날까지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오늘날 물리학은 [물리적 사태에 대한] 순수하게 논리적인 가능성과 그에 따른 공식을 산출하는 수학 물리학자들과 그 공식을 검증하는 실험 물리학자들의 협력에 의해 전개된다. 그러나 실험 물리학자들조차 수치적 크기와 일반적 공식을 산출하는 작업을 자신들의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물리학의 모든 관심은 결국 "자연과 말하자면 맞춰져있는 공식-세계 속에서의 발견[Entdeckungen in der sozusagen der Natur zugeordneten Formelwelt]"에 쏟아지고, 방법론상으로는 앞서 지적했듯 수학적 사고의 테크닉화가 이론가들로 하여금 [단순히] 상징적인 개념들을 가지고 사고하게 만든다(48, 강조는 필자). 그러나 아무도 이 모든 과정--방법, 공식, 그리고 이론 따위--의 의미 그리고 이 과정의 끝에서 산출되는 자연의 의미를 반성하지 않는다.
h. 자연과학의 잊힌 의미-토대[vergessenes Sinnesfundament]로서의 생활세계(life-world[Lebenswelt]) 후설은 갈릴레이 이후로 "유일한 실제적 세계, 지각을 통해 현실적으로 주어지고, 여태까지 체험되었으며 체험 가능한 것[세계]--[즉] 우리의 매일매일의[alltägliche] 생활세계를 수학에 기초해 구조화된(mathematically substructed[mathematisch substruiert]) 이념성들의 세계로 은밀하게 바꿔치기[하는 사태, Unterschiebung]"가 계속해서 발생해왔다고 결론 짓는다(48-49, 강조는 필자). 그러나 순수기하학이 당연히 [생활세계로부터 분리돼] 자족적으로 절대적 진리를 산출할 수 있다는 믿음은 환상이며, 응용된 기하학마저 그 의미의 기원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이 새 학문이 전학문적 삶과 주변세계로부터 자라났을 때 봉사해야 할 [것으로 취급되었던] 궁극적 목적을 반성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의미있는 [학적] 귀납의 지평은 곧 학문에 앞서 우리에게 미리 주어지는 생활세계이다.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직관의 세계인 [생활세계]에는 시공간의 형식이 그에 포함된(incorporated) 모든 물체적[körperlich] 형태들과 함께 속한다. 우리가 우리의 신체적[leiblich], 인격적 존재의 방식에 따라 스스로 살아가는 곳이 바로 이 [생활세계]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 어떤 기하학적 이념성도, 기하학적 공간이나 수학적 시간도 [...] 찾을 수 없다."(50) 생활세계에서의 삶도 귀납에 의존함은 물론이다. 심지어는 존재에 대한 일상적인 확신들마저 귀납적 예측에 의존한다. 그러나 기하학적 그리고 자연과학적 수학화에서 이루어지는 귀납적 예측은 생활세계의 감성내용를 수치화시킨 지표들을 이용하는 것으로서, "매일매일의 예측이 성취하는 바를 무한하게 능가한다." 그러므로 "수학과 수학적 과학은 [...] 생활세계를 표상(represent[vertritt])하며, 그것에 "객관적으로 현실적이고 참된" 자연으로 변장시킨다[verkleidet]. 이 이념들의 의복[Ideenkeid]을 통해서 우리는 사실은 방법인 것을 참된 존재로 취하는 것이다."(51, 강조는 원저자)
이제 자연은 그 자체로 수학적인 것이며, 따라서 오직 수학적 공식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취급된다. 이와 같이 자연과학적 방법의 근원적 목표도 과제도, 전제되는 의미도 필연성도 이해하지 못하는 소박성이 오늘날까지도 역사적 사실로서 지속되고 있다는 것은 자연과학의 대단한 발전과 유용성을 생각하면 무척 놀라운 일이다.
cf. '본능'으로서의 숨겨진 이성에 대한 언급(52)
i. 수학화의 의미에 대한 명석성의 결핍[Unklarheit]으로 인한 불길하고도 숙명적인(portentous[verhängnisvoll]) 오해들 갈릴레이가 자연을 수학적으로 재이해하면서, 자연의 영역을 넘어선 영역에 대한 그릇된 주장들이 산출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주장 중 대표적인 것으로 후설이 제시하는 것은 바로 "현상은 오직 주체들 안에 있다. 그것들은 수학적 속성[만을 가지는] [...] 참된 자연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인과적 결과로서만 그곳에 있다. 만일 우리 삶의 직관된 세계가 순전히 주관적이라면, 그것[전학문적이고 학문외적인 삶]의 사실적 존재와 관련된 전학문적이고 학문외적인 삶의 모든 진리들은 가치를 박탈당한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는 그릇된 한편, 가능한 경험의 이 세계 너머에 놓여있는 즉자(in-itself[An-sich])를 모호하게 지시하는[vage bekunden] 한에서만 그리고 그것[가능한 경험의 세계]에 대비해 초월적인 한에서만 의미를 가진다"는 주장이다(54). [여기서는 오히려 생활세계가 수학적 자연과학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사태가, 의미의 근원의 전도가 발생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한편 물리학자들은 "자연이란 그 자신의 "참된 즉자존재"에서, 수학적"이라는 이해를 당연시하게 된다. "시공간에 대한 순수 수학은 필증적 명증을 가지고 이 즉자에 대한 무조건적으로, 보편적으로 타당한 법칙들의 집합에 대한 지식을 확보한다. [...] 자연의 시공간의 형식에 대하여 우리는 (모든 현실적 경험 이전에) 수학적으로 이념적인 존재로서의 참된 즉자존재를 명확성을 가지고 아는[bestimmt erkennen] [...] "본유적" 능력["eingeborene" Vermögen]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함축적으로 시공간의 형식은 그 자체로 우리 안에 본유적이다."(54, 강조는 필자)
그런데 ①시공간의 형식과 관련한 필증적 법칙성과 달리, ②"자연의 더 구체적인 보편적인 합법칙성"에 대한 지식은 경험적 자료에 대한 귀납추리를 통해서 확보해야 한다[die gesamte Naturmathematik über die raumzeitliche Form hinaus müssen wir von Erfahrungstatsachen aus induzieren](54). "자연에서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 우리는 아무런 아프리오리한 명증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후설은 명석성의 결핍이(obscurity[Unklarheit]) 발생한다고 지적하며 묻는다. "그런데 자연은 그 자체로 철두철미하게 수학적인 것이 아니었는가?" 달리 말해, 자연이 그 자체로 철두철미하게 수학적인 것이라면, 어째서 그에 대한 필증적 인식이 불가능한 영역이 자연 안에 포함되어있는가? 물론 순수 수학과 응용 수학을 나눔으로써 문제를 피상적으로 해결하고자 할 수 있겠지만, 세기의 천재 라이프니츠조차 "존재의 두 종류--즉 ①보편적으로 순수하게 기하학적인 것으로서 시공간의 형식의 존재와 ②사실적, 실제적 형식을 가진 보편적 수학적 자연의 존재--의 올바른 의미를 파악하는 문제" 그리고 두 존재의 상호 관계를 파악하는 문제에 고전했다(55, 넘버링은 필자).
k. 수학적 자연과학의 기원이라는 문제[Ursprungsproblem]의 근본적 중요성[grundsätzliche Bedeutung]* 요컨대 자연과학을 수학화하는 기술과 테크네는 계속해서 전승되었지만, 그것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이해는 그렇지 못했고, 그와 관련해서 명석하지 못한 부분들 역시 해명되지 못했다. 그러나 학자들이 자신들이 사용하는 방법론의 의미구조와, 그것의 최초의 설립의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그 방법론들이 의미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문제는 수학자나 자연과학자는 방법을 아주 잘 활용하는 기술자(technician)는 될 수 있어도, 자신의 기술에 대한 반성을 수행할 능력은 결여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러한 반성적 해명이 세계와 자연 자체에 대한 참된 지식을 추구하고자 하는 관심 하에서 필요하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한편 수학과 과학의 영역 바깥의 학자들이 그러한 반성적 해명을 수행하면 "형이상학적"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하는 형편이다.
*Carr에 따르면 독일어 나열에서는 i와 j를 구분하지 않기에 j절은 없다.
**Q. 어째서 해당 방법론들의 성과와 유용성만으로는 부족한가?
A. 자연과학적 방법들이 원래의 궁극적 목적에 봉사하기는커녕 인간의 삶을 짓누를 때(e.g.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살상무기의 발명) 과연 그것이 의미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자문해보라.
l. 우리의 해설(설명, exposition[Auslegung]) 방법의 성격규정 후설은 여태까지 진행된,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역사적 탐구의 전반적인 목표를 '철학의 현재에 대한 자기 이해를 위한 근대 정신 및 학문의 기원 추적'이라는 큰 틀 하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갈릴레이를 시작으로 하여, 근대인 일반이 가지게 된] 자연에 대한 이념의 구상으로 이어진 근원적 동기와 사고의 운동, 그리고 이로부터 자연과학 자체의 현실적 발전 속에서 [그 이념]의 실현의 운동과 관련된 명석성."(57) 이와 같은 목표를 달성하는 일이 어려운 이유는, 자연과학자뿐만 아니라 현상학자 또한--모든 근[현]대인이--이미 학문의 의미와 기원에 대한 시대의 무반성적 기조에 너무나 익숙해져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일종의 해석학적 순환이 발생하기에--해석되어야 할 대상에 대해 이미 어떤 전이해, 앞선 해석을 가지고 있는 현상--해명의 순서에 변형을 가하는 일, 말하자면 지그재그 식으로 왔다갔다 하며 역사를 해석하는 일이 불가피하다. 후설은 이를 "역사 내 도약(historical leap)"이라고 부른다(58, 강조는 원저자). 이를 통해 새 학문, 특히 자연에 대한 정밀한 과학의 근원적 의미를 근대 학문, 근대 철학, 근대 유럽 인류의 정신에 미친 영향력과 관련해 탐색하는 것이 이어질 작업의 과제다. 그로써 결국에는 "삶의 소박성으로의 적절한 귀환이 [...] 전통적인 객관주의적 철학의 "학적" 성격에 놓여있는 철학적 소박성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한 유일한 길"이라는 점이 점차 선명해질 것이다(59, 강조는 필자).
§10 자연과학의 지배적인 모범성에서의 이원론의 기원[근원]. 기하학적 방식에 입각한[more geometrico*] 세계의 합리성. 기하학적 관점에 입각한 수학적 자연이라는 신종의(novel[neuartig]) 구상에 성공한 "갈릴레이는 인격적 삶을 이끌어가는 인격들로서의 주체들로부터 [다음을] 추상한다[abstrahiert]. 그는 어떤 식으로든 정신적인(spiritual[geistig]) 모든 것을, 인간적 프락시스 속에서 사물들에 부착된 모든 문화적 속성들을 추상해낸다. 이 추상의 결과는 순수하게 물체로서의 사물이다. [...] 실제적으로 자기-폐쇄된 물체의 세계[in sich real abgeschlossenen Körperwelt]로서의 자연의 이념[관념]은 갈릴레이와 함께 최초로 태동한다고 참되게 말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모든 사건이 명백하게 미리 규정되는 자기-폐쇄된 자연적 인과성의 이념[관념] 또한 부상하며, 궁극적으로는 세계에 대한 이념[관념] 자체가 변화한다. "세계는 말하자면 두 세계로 분열된다. [바로] 자연 그리고 심리적(psychic) 세계[로 분열되는데], 비록 후자는 그것이 자연과 관련을 맺는 방식 때문에 독립적인 세계의 지위를 성취하지는 못해도 그러하다(60, 강조는 필자)." [이러한 구분은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심리적으로 존재하는 것 사이의, '존재 양식(mode of being)'의 구분이기도 하다.] 자연과학은 가장 높은 수준의 합리성을 가진 것으로 취급되었으며, "모든 진정한 지식의 범례[모범, Vorbild]가 되었다. [...] 세계는 그 자체로 합리적인 세계가 되어야 했으며 [...] 그에 상응해 세계에 대한 보편적 학문인 철학도 기하학적인 방식으로 통일된 합리적 이론으로 세워져야 했다."(61)
*이 표어는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얼마나 성공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겠으나) 기존의 철학적 전통과 단절하기 위해 내세운 자신들만의 '철학하는 스타일'을 가리킨다.
§11 이성의 문제의 불가해성(incomprehensibility[Unfaßbarkeit])에 대한 이유로서의,학문의 전문화의 전제(presupposition[Voraussetzung])로서, 자연주의적 심리학의 기초(foundation[Grundlage])로서의 이원론. 심리적인 것을 자연으로부터 떼어냄으로써 이성의 문제는 불가해해졌다. 예컨대 '자연의 합리성은 신에게서 온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순수한 주관성이자 심리적인 존재가 자연적 즉자존재에 선행하는 것이 아닌가?'와 같은 물음에 선뜻 대답할 수가 없어진 것이다. 나아가 자연과 동떨어진 정신의 영역을 합리적으로 해명하는 새로운 심리학이 요구되었다. 예컨대 홉스는 일종의 심리물리학적 인류학을 펼쳤으며, 비록 경험주의자였으나 물리주의자로서* 물리적 합리성의 범례를 따랐다. 그러나 이 새로운 심리학은 [근대철학의 대부 격인] 데카르트의 강한 심신이원론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심리를 자연과 전혀 다른 본질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존 로크의 백지설은 심리적인 것을 [일종의 자료 배치의 결과로서] 자연화한 대표적인 예다. 한편 물리주의가 도움을 주지 못하는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서는 스콜라철학적 개념들이 명석하지 않은 자격을 가지고 동원되었다. 후설은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이러한 형이상학의 예로 제시하면서도 그것이 "최초의 보편적 존재론"이라는 점을 지적하기를 잊지 않는다(65).
*후설은 '물리주의[Physikalismus]'를 "근대 물리학의 참된 의미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부터 비롯하는 철학적 오류들"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한다(63).
§12 근대적 물리주의적 합리주의의 전반적 성격규정[Gesamtcharakteristik] 철학이 그로부터 기원한 고대의 철학자들은 존재하는 것 일반에 대한 보편적인 합리적 지식, 즉 [독사가 아닌] 에피스테메를 추구했다. "그러나 합리성의 진정한 이념, 그리고 그것과의 연결 속에서 보편적 학문의 진정한 이념은 [...] 새롭게 형성된 수학과 자연과학의 범례를 따라서만 [비로소] 가능했다."(65) 수학과 자연과학의 범례를 따른다면 세계 자체가 필증적으로 합리적인 체계적 통일체로 밝혀지며, 그것의 모든 세부사항 또한 합리적으로 규정될 수 있다. 게나가 귀납을 통해 세계의 형식과 본질구조를, 그것들이 순수하게 수학적인 한에서 획득할 수 있다. 이러한 신념을 가진 학자는 생활세계에서 감각적, 직관적으로 주어진 것을 그것의 참된 존재를 가리키는 수학적으로 이념적인 극한에 최대한 가깝게 접근시키려고 한다. 학자는 자신이 그 자체로 알고 있는 바를 무한히 확장시키고자 하며, 주변세계와 인류, 가치와 선마저 지배하고자 한다. "인간은 그러므로 참으로 신의 모상이다."(66)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순수한 그 자체의 모습에서 간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자연과학은 궁극적으로 물리학이라는 신념이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물리학 이외의 학문들은 저마다의 방법론적 혁신을 도모하게 되었다.
§13 심리학에서 물리주의적 자연주의의 첫 번째 어려움: 성취하는[leistend] 주관성의 불가해성. 물리학에 대한 신념의 약화보다 더 이전에 이미 심리학의 영역에서 자연주의적 심리학이 전개됨에 따라 세계의 수학화가 의심스러운 것이 아니냐는 의문의 첫 징후가 감지되었다. 예컨대 [자연주의적 심리학을 수행한] 버클리와 흄의 경우 수학과 자연과학의 합리성 모델과 개념들, 그 의미들 모두를 심리학적 허구로 치부하는 역설적 회의주의를 발전시켰다. 특히 흄은 "보편적 객관적 학문으로서의 철학의 과제" 자체를 부정했다(67). 이러한 회의주의가 역설적인 이유는 수학과 자연과학의 눈부신 성장과 명증[자명성] 때문이다. 나아가 이들의 회의주의는 학문뿐 아니라 학자들마저 그 안에 언제나 이미 속해있는, 존재의 명백한(obvious) 타당성이 지배하는 전학문적 생활세계까지 공격했다. 에피스테메처럼 보이는 것의 상대성을 주장한 고대의 회의주의보다 훨씬 급진적으로 세계[의 안정된 규칙] 자체를 공격한 것이다. 이에 따라 무지막지한 수수께끼들이 철학적 탐구의 장으로 밀려들어왔고, 기존과 다른 새로운 목표와 방법을 가진 "인식론적" 철학, "이성이론적" 철학이 체계적으로 발달했다. 이러한 혁명은 "학문적[과학적] 객관주의[...]의 초월론적 주관주의로의 변형"으로 그 성격이 규정될 수 있다.
§14 객관주의와 초월론주의[Transzendentalismus]에 대한 예비적(precursory[vordeutend]) 성격규정. 근대 정신사의 의미(sense[Sinn])로서 이 두 이념들 간의 투쟁[das Ringen]. 객관주의는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것, 즉 세계에 대한 '객관적 진리'를 추구한다. 반면 초월론주의는 "미리 주어진 생활세계의 존재의미[Seinssinn]는 주관적인 구조[Gebilde][를 갖추고 있으며] [...] 이 생활[삶] 속에서 세계의 의미와 존재 타당성[Seinsgeltung]이 세워진다[고 본다.] [...] 주관성 그리고 특히[und zwar] 모든 세계-타당성[Weltgeltung]을, 그것의 내용과 그것의 모든 전학문적이고 학문적인 방식들 속에서, 그리고 이성적 성취들[Vernunftleistungen]의 "무엇"과 "어떻게" 속으로 궁극적으로[letztlich] 가져오는 주관성으로 돌아가는 철저한 탐구만이 객관적 진리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세계의 궁극적인 존재의미에 도달하게 해준다. [...] 그 자체로 일차적인 것은 [처음부터 명백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취급되는 세계가 아니라] 세계의 존재를 소박하게 미리 부여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합리화하거나 (같은 일인데) 객관화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주관성이다."(69, 강조는 원저자) 그러나 이때의 주관성은[, 후술하겠지만 데카르트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인간의 심리학적 주관성이 아니다.
인식론의 등장과 함께 철학의 역사는 객관주의적 철학과 초월론적 철학 사이의 긴장으로 점철되었다. 이 대립의 기원 그리고 철학의 이념이 급진적으로 변형된 궁극적 동기를 해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해명을 통해 "근대 속 철학사의 전체 운동을 통일시켜주는 가장 깊은 유의미함[die tiefste Sinnhaftigkeit]에 대한 최초의 통찰[을 가지고] [...] 모든 세대의 철학자들을 함께 묶어주는 목적의 통일성, 그리고 이를 통해 개별 주체와 학파들의 모든 노력의 방향성"을 이해할 수 있다. 후설은 이러한 목적론적 길의 끝에 "초월론적 철학의 최종 형태[Endform]"로서 현상학이, 그리고 그 안에 그것의 지양된 계기로서 근대의 자연주의 심리학을 뿌리뽑는 심리학의 최종 형태가 자리한다고 말한다(70, 강조는 원저자).
Q. 애초에 모든 서양철학자를 아우르는 통일된 목적론이 존재한다는 주장부터 증명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15 우리의 역사적 고찰[Betrachtungsart] 방법에 대한 반성 그러므로 이어질 탐구의 과제는 철학, 특히 근대 철학의 역사 가운데서 그것의 목적론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이 목적론의 담지자로서의 우리들 자신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는 것--무엇이 우리의 선입견이며, 그것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서로 협력하거나 대립하는 모든 철학적 기획들을 관통하는 통일성을, [철학자들의 역사적 진술이 어떠했든지 간에 독립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탐구는 외부의 관점에서 역사의 사실들을 인과성에 입각해 들여다봄으로써가 아니라 내부자의 관점에서 전개되어야 한다. 또한 특정한 세계관 따위를 역사적으로 해명하는 과제가 아닌--세계관은 우연히 형성되는 것이다--"이 인류를 지배하는 의지의 방향"을 추적하는 과제는 진지한 철학자에게 필연적으로 부과되는 것이다(71). 이 의지의 최초의 설립[Urstifung]이 그리스에서 이루어졌다면, 역사적 과정의 과제로서의 최종적 설립[Endstifung]은 [현상학이다. 요컨대 후설은 현상학이 철학사의 필연적 귀결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의 철학사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이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우리가 역사를 통해 도대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기이해이기도 하다.
§16 객관주의적 합리주의의 근대적 이념뿐 아니라 그것을 폭파하는(explodes[sprengend]) 초월론적 동기(motif[Motiv])의 창립자(primal founder[Urstifter])로서 데카르트 갈릴레이가 자연과학의 새로운 이념을 설립한 뒤 데카르트는 수학적이고 물리주의적인 합리주의를 담지한 보편적 수학으로서의 철학 즉 "보편적 철학의 새로운 이념"(73)을 고안했다. 그의 구상은, 그 자신도 그 의미를 명시적으로 알지 못했지만 단순히 수학적으로 사고하는 학자들뿐 아니라 근대 일반의 학문 및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새로운 합리주의를 위해 그리고 그 다음으로 그로써(eo ipso=by that very fact) 이원론을 위한 철저한 기초를 제공하기 위해" 쓰인 ⟪성찰⟫에서 최초로 확립되었다(74). 그러나 ⟪성찰⟫에서의 구상들은 겉으로는 합리주의를 영원히 정초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나, 그 숨겨진 의미를 따지면 오히려 합리주의를 전복한다는 것이 후설의 의견이다.
§17 데카르트의 에고 코기토로의 귀환[Rückgang]. 데카르트적 에포케의 의미에 대한 해설[Sinnauslegung]. 갈릴레이에 대해서 수행한 바와 마찬가지로, 데카르트의 ⟪성찰⟫에 대해서 역시 저자가 무엇을 인지했고 무엇을 인지하지 못했으며, 무엇을 무의식중에 당연시했는지--비단 스콜라철학적 전통뿐 아니라 훨씬 오래된 선입견들까지--따짐으로써 데카르트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만을 솎아낼 필요가 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철학적 지식은 "절대적으로 정초된[begründet] 지식"으로서 "그 명증[자명성]이 상상 가능한 모든 의심을 배제하는 직접적이고 필증적인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한다."(75, 강조는 원저자) 데카르트적 에포케의 철저주의는 기존 학문의 타당성뿐 아니라 "전학문적이고 학문외적인 생활세계, 즉 의문시되지 않으며[fraglos] 당연하게 취해지는 것으로서 계속해서 미리 주어지는 감각경험의 세계 그리고 그것에 의해 영양을 공급 받는 모든 사고의 삶[alles von ihr genährten Denkenlebens]의 타당성까지" 배제한다. 이는 단순히 즉자존재에 대한 학문적 지식, 즉 에피스테메만을 의문시하고 부정했던 프로타고라스와 고르기아스의 고대 회의주의--후설은 이들이 '불가지론(agnosticism)'에 개입한다고 표현한다--보다 훨씬 나아간 것이다. 그들은 데카르트와 달리 절대적으로 합리적인 철학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인간의 지식은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현상들 너머로 확장될 수 없다"고 말한 데 그쳤다(76, 강조는 원저자).
세계와 관련된 모든 존재타당성(ontic validity[Seinsgeltung])을 부정해도 에포케를 수행하고 있는 에고 자신은 수행의 필연적 주체로서 그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는 데카르트적 회의의 결론은 유명하다. 이러한 '생각하는 에고의 존재'가 곧 보편적 철학의 "필증적 근거"로 기능한다. 그러나 '생각하는 것이 존재한다[sum cogitans]'는 명제는 단순히 에고의 존재를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에고가 생각하며 생각의 대상을 생각의 대상으로서 생각한다는 것까지 포함한다[ego cogito--cogitata qua cogitata]. 그러므로 코기토뿐 아니라 하나의 코기타치오로 통일되는 모든 코기타치오네스(작용의 삶 전체)와 그 존재타당성의 효과가 무효화된 코기타툼으로서의 순전히 현상적인 세계 역시 필증적 존재를 인정받게 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에고"라는 표제 하에 순전히 '에고가 생각한다' 또는 '생각하는 것이 존재한다' [같은] 하나의 공리적 명제만을 가지는 게 아니라 존재의 절대적으로 필증적인 권역을 가질 것이다."(78) 이 존재의 권역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상상 가능한 모든 존재자와 그 존재의 권역보다 원칙적으로 앞선다. 수학적 공리들의 명제마저 이렇게 새로이 발견된 권역으로부터 정초됨으로써만 비로소 정당화될 수 있다.
§18 자기 자신에 대한 데카르트의 오해. 에포케를 통해 획득된 순수 에고[자아]의 심리학주의적 곡해(falsification[Verfälschung]) 데카르트의 에포케는 사실 두 가지 상이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지만 데카르트 자신은 오직 하나의 길밖에 인지하지 못했고, 그로써 자신의 기획에 애매성이 깃들어있지 않다고 (잘못) 확신했다. 그러나 이는 그가 자신의 근원적 기획이 요구하는 철저주의를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까닭이다. 에포케를 통해 에고를 발견한 직후 데카르트는 그것이 "인간존재, [즉] 매일매일의 삶 속 감각적으로 직관되는 인간존재인지"를 묻는다. 이어 그는 신체를 [그 비존재 가능성에 따라] 배제한 후 에고를 [인간 가운데서 신체의 잔여물인] '마음 또는 영혼 또는 지성(mens sive animus sive intellectus)'로 규정해버린다.
그러나 후설은 만일 데카르트의 회의가 충분히 철저했다면 인간의 신체뿐 아니라 인간됨 일반을 "(철학하고 있는) 나에게 미리 주어진 총체성"에 포함시켜 그에 대해서도 에포케를 수행했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순전히 감각적으로 경험 가능한 것과 순수 사고의 대상인 수학적인 것 사이의 구분과 함께 물리적 물체의 보편적이고 절대적으로 순수한 세계[의 독립적 존재]에 대한 갈릴레이적 확신에 의해 미리 지배되고 있지 않은가? 그는 [...] 수학적 합리성을 가지고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아는 [...] 합리적 방법이 있음에 틀림없음을 [...] 이미 당연시하고 있지 않은가?"(79, 강조는 필자) 이러한 의문들 끝에 후설은 데카르트가 성찰에 앞서 에고가 그 수단으로 이용된 '목표'가 미리 설정되어있었던 것이 아닌지 묻는다. 그러나 후설에 따르면 "에고는 세계의 잔여물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증적이게 정립된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는 오직 에포케, 세계의 타당성 전체를 "괄호 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은 그로써 가능해지는 유일한 정립이다. 반면 영혼은 순수한 물리적 물체[신체]에 대한 사전적 추상의 잔여물[Residuum einer vorgängigen Abstraktion]이며, 이러한 추상에 따라,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이 물체의 보완물[ein Ergänzungsstück]이다. 그러나 이 추상은 [...] 에포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태도에서 일어난다(79-80, 강조는 원저자).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에고가 순수 영혼과 동일시될 때 [...] 일관성의 균열이 발생한다." 데카르트의 소박성 또는 안일함은 에고 및 그의 인식적 삶과 그 외부 사이의 구분으로도 이어졌으나, 후설은 애초에 "존재의 이 자아학적 권역에 대해서 "외부"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긴 하는지 여부"가 물어져야 한다고 말한다(80, 강조는 필자). [우리는 여기서 초월론적 자아에게는 자아의 내부와 외부 사이의 구분--이는 내재와 초재 사이의 구분과는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예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가 에고 코기토를 발견한 덕에 철학에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으며, 그와 함께 새로운 텔로스가 뿌리를 내렸다.
§19 자기 자신에 대한 그의 오해의 이유로서 객관주의에 대한 데카르트의 지나친(obtrusive[절실한, vordringliches]) 관심. 후설은 ⟪성찰⟫이 절대적 에고를 심리적(psychic) 에고로, 자아학적 내재성을 심리학적 내재성으로, 자아학적 자기지각의 명증을 심리적, '내부적 자기지각'의 명증으로 불길하고 숙명적으로[verhängnisvoll] 대체했으며 이러한 대체가 자신의 당대에까지 [잘못된] 역사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데카르트는 자신의 이론이 에고를 초월하는 영역에 대한 올바른 추론을 제시한다고 확신하며, 그의 문제의식은 칸트의 문제의식, "나의 이성 속에서 산출된(engendered) 합리적 구조가 어떻게 [...] 객관적으로 "참된", 형이상학적으로 초월적인 타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지의 문제" 즉 "지성[오성, 이해력, Verstand] 또는 이성의 문제"로 이어졌다. 결국 데카르트와 함께 주관적인 것 속에서 인식의 궁극적인 기초, 토대[Erkenntnisboden]를 찾는 완전히 새로운 철학적 전통이 시작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데카르트가 이러한 전통의 창립자임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객관주의를 지속"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에포케에 의해서 발견되고 지식과 객관적 학문의 절대적 근거로서 기능하는 마음(mens)이 "동시에 다른 모든 것과 함께 학문 내에서, 즉 심리학 속에서 정당한 주제로서 정초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81, 강조는 원저자). 객관주의를 성급하게 정초하느라 데카르트가 놓친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그는 에고가 "결코 세계 속의 무언가로서 주제화(turn up as subject matter)될 수가 없다"는 것을 놓쳤다. 에고의 기능들로부터만 비로소 세계의 모든 것이 자신의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는데도 말이다. 둘째, 그는 에포케에 의해 발견되는 에고가 자신의 외부에 [즉시] 타자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놓쳤다. 후설에 따르면 '나'와 '너', '내부'와 '외부' 사이의 구분은 절대적 에고 속에서 비로소 최초로 구성되는 것이다(인용).
*Q. 객관주의에 대한 데카르트의 집착은 후설의 해석의 결과인가, 데카르트 자신도 인지하고 의도한 바인가?
A. 후자인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하면 선한 신을 매개로 한 외부세계의 즉자적 타당성 확보가 ⟪성찰⟫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20 데카르트에게서의 "지향성". 이에 따라 후설은 데카르트의 제1성찰이 심리학에 불과했다는 일침을 놓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학적 삶의 본질을 이루는 지향성"의 존재를 짚어냈음을 높이 산다. 달리 말해 "모든 코기타치오는 자신의 코기타툼을 가진다"는 본질적 법칙을 짚어낸 것이다(82, 강조는 원저자). 지향성의 문제는 이성 또는 지성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고, 역으로 이성 또는 지성의 문제는 지향성에 대한 이해 없이는 해결될 수 없]다. 새로운 보편적 철학은 ""지식의 이론", 즉 에고가 어떻게 자신의 이성의 지향성 속에서 (이성의 작용들을 통해) 객관적 지식을 이끌어내는지(bring about)에 대한 이론"으로서 성격규정되어야 하며(83, 강조는 원저자), [그러므로 지향성은 이 새로운 보편철학에서 중차대한 위치를 차지한다.]
§21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라는, 발전의 두 노선의 시작점으로서의 데카르트. 데카르트가 시작하고 말브랑슈,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울프 학파를 거쳐 칸트로 이어진 합리주의적 철학의 노선에서는 "기하학적 양식(mos geometricus)의 방법을 통해 초월적인 "즉자"로서 생각되는 세계에 대한 절대적으로 정초된, 보편적 지식을 실현할 수 있다는 신념이 지배한다."(83, 강조는 필자) 이에 반해 홉스와 로크로부터 버클리와 흄으로 이어지는 영국의 경험주의적 노선은 초월자로 나아가려는 운동, 종래에는 초월적인 것 자체에 반기를 든다. 후설은 이와 같은 발전들이 데카르트의, 심리학이 섞인 곡해된[psychologisch verfälschte] 초월론주의가 진정한 초월론주의로 나아가는 역사의 본질적인(essential[wesentlich]) 일부였다고 말한다. "여기서 일차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경험적 심리학주의[...]의 관용될 수 없는 부조리로서의[als eines unerträglichen Widersinns] 자기계시였다[Selbstenthüllung]."(84)
§22 로크의 자연주의적-인식론적 심리학 로크는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객관적 학문의 객관성을 인식론적으로 정초하는 작업을 수행하지만 신체로부터 분리된 영혼에 대한 내성심리학을 통한 방식을 선택한다. 그는 아무런 의심 없이 에고를 영혼으로서 취하며, '내적 자기경험'을 통한 관념과 표상들만이 직접적으로 주어지며 '외부'의 세계에 관한 모든 것은 간접적으로 추론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 또한 자신이 궁극적으로 의문시하고자 하는 객관성을 선취하여 전제로써 잘못 사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자아학적 타당성을 어떻게 초월할 것인가 하는 [말하자면 정적 분석의] 문제는 로크에게서 "타당성에 대한 실제적 경험들 또는 그것들에 속하는 능력들의 심리학적 발생의 문제"로 변한다(85). '외부세계로부터 온 감각자료'라는 개념은 조금도 의문시되지 않고, 영혼은 신체만큼이나 고립되고 폐쇄된 공간으로서 그 위에 심리적 자료가 쓰였다 지워지는 백지로 비유된다. 지향성, 그리고 그에 본질적인 코기타치오와 코기타툼 사이의 구분에 로크가 무지한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후설은 [순수 자아의] 지향성에 대한 탐구 없이는--사실 이는 데카르트도 도외시한 것인데--이성의 문제 [나아가 객관성의 문제를] 건드릴 수 없다는 입장을 유지한다.
§23 버클리. 지식에 대한 허구주의적 심리학으로서의 데이빗 흄의 심리학. 철학과 학문의 "파산[der Bankrott]". 감각주의와 내적 자기경험에 대한 배타적 신뢰는 버클리의 관념론에로 이어진다. 버클리는 "자연적 경험에서 나타나는 물체적 사물들을 그를 통해 그것들이 나타나는 감각자료의 복합체들로 환원시킨다."(86) 이러한 자료를 넘어서 추론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물질[ein an sich seiende Materie]이란 그에게 철학적 발명품[Erfindung]이나 다름없다.
흄은 이러한 방향성을 그 극단으로까지 밀고 나간다. 흄은 객관성의 모든 범주를 허구라고 단언한다. 수학적 개념들은 심리학적으로 남김없이 설명되며, 그 법칙들은 "관념들 사이의 연상과 관계들의 내재적 법칙성[Gesetzlichkeit]"을 통해 이해된다. 뿐만 아니라 전과학적 세계, 직관된 세계의 물체성[물질성, Körperlichkeit]과 그 자기동일성조차 회의의 대상이 된다. 존재하는 것은 그저 자료의 복합체와 그것의 현상방식뿐이지, '[자기]동일적 대상'이라든지 그 '동일성[Identität]'과 같은 것은 어디서도 경험될 수 없는 환상이다.* 인과성도 마찬가지며--'post hoc ergo propter hoc(시간적 전후관계가 있으므로 인과관계가 있다)'의 오류를 상기하자--종국에는 "세계 일반, 자연, [자기]동일적 물체들의 우주, [자기]동일적 인격들의 세계, 그리고 그에 따라 또한 객관적 학문[...]이 허구로 변형된다."(87) 심지어 이성, 지식, 참된 가치와 윤리적인 것을 포함한 모든 순수 이상들 또한 허구다. 후설은 이를 "객관적 지식의 파산"이라 명명하며 그 결과 흄이 유아론에 빠진다고 말한다(88, 강조는 필자). [흄이 지식을 얻는 유일한 원천으로 인정한] 자료들로부터의 추론은 결코 한 자아의 내재적 권역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흄은 실증주의의 아버지이지만, 자신의 이론을 참되게 만드는 이성의 지위를 해명하지 않았으며, 모든 회의주의와 비합리주의가 그러는 것처럼 자기부정에 이를 수밖에 없다.**
Q. 자연주의자로서의 흄의 면모를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지 않은가?
*Q. 반대로 후설에게는 자기동일성이 초월론적 허구라는 지적이 가능하지 않은가? '(초월론적으로 구성된) 구성물로서의 존재'와 '(심리학적으로 구성된) 허구'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A. "[…] there are quite definite noetic and noematic conditions for the possibility of intentionality and knowledge—that neither intentionality nor knowledge comes ‘‘ready-made.’’ It does not, however, entail that the existence or nature of stars, numbers, or God depends upon those noetic conditions, any more than a good theory of grasping[손으로 붙잡음] entails that the properties of branches and rocks depend upon the configurations of human hands. What we ‘‘make’’ in constituting objects are not the objects themselves, but the intentions in virtue of which we can be conscious of them."(Walter Hopp, Phenomenology and Fallibility, Husserl Studies (2009) 25, p.8, 강조는 필자)
**후설은 '경험주의 자체는 경험될 수 없다'는 이유로 흄을 비판한 적이 있다.
§24 흄의 회의주의[Skepsis]의 부조리함 속에 숨겨진 진정한 철학적 동기: 객관주의의 동요(shaking[Erschütterung]). 데카르트의 철저주의는 주체에 대한 반성, "그의 내재성 속에서의 인식하는 에고로의 회귀[Rückgang auf das erkennende Ich in seiner Immanenz]"를 뒤이은 모든 철학에 요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영국의 경험론자들은 데카르트의 탐구에 이미 숨어있었지만 제대로 풀어지지 못한 문제, 즉 "[전학문적이든 학문적이든] 세계에 대한 모든 인식이 거대한[ungeheuer] 수수께끼"라는 점을 조명하고야 말았다(89). 데카르트가 필증적 에고로 회귀하면서 그것을 영혼으로 해석하고, 영혼의 자기지각을 최초의 자명성으로 내세운 이상, 로크가 영혼을 백지로서 자연화하고, 버클리가 물질의 존재를 부정하며, 흄이 더 심화된 회의를 전개시키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철학사적 전개가 또 있을까? 정밀과학의 무수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주관성의 수행과 성취를 파고들어가는 순간 학문의 모든 자명성과 명석성이 부조리로 변화해버렸다. 이를 통해 "의식의 삶은 [존재적 의미Seinssinn에 대한] 성취의 삶"이라는 점만큼은 확실해졌다(90). ['존재함' 또는 '어떤 의미를 가짐'이란 지위는 의식의 특정한 성취[Leistung]에 의해서만 비로소 획득될 수 있는 것이다.] 버클리와 흄 덕분에 독단적 객관주의는 그 기초부터 동요하게 되었다. 그들의 철학은 갈릴레이 이후의 수학화하는 객관주의뿐 아니라 수 천 년을 지배한 객관주의 일반에 대한 공격이었다는 점에서 무척 중요한 철학사적 분기점으로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25 합리주의 속 "초월론적" 동기: 초월론적 철학에 대한 칸트의 구상. 후설은 칸트가 흄과 마찬가지로 초월론적 주관주의적 철학을 수행하지만, 경험주의자 흄의 후계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흄이 자신을 독단의 잠으로부터 깨웠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렇다면 칸트가 그로부터 극복한 '독단주의'란 무엇이었는가?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자들은 데카르트가 지식의 궁극적 원천으로 돌아가 그토록 철저하게 설립하고자 했던 "객관적 학문의, 또는 [...] 하나의 객관적 보편적 학문으로서의 철학의 절대적 형이상학적 타당성. 또는, [...] 자신의 이성적 구조물들[Vernunftgebilde]로 하여금 그것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명증들 덕분으로 이 에고를 초월하는 의미를 가진 채 자연으로 취급되게 하는 인식하는 에고의 권리"를 당연시했다(91-92, 강조는 필자). 자기폐쇄된 자연의 권역에 대한 학, 그리고 수학적 모델을 따르는 마찬가지로 자기폐쇄된 영혼의 권역에 대한 학의 구분과 이념은 이미 확립되어있었다. 합리주의적 철학은 지식에 대한 초월론적 반성을 행하기보다, "지식의 수행에 대한 반성[erkenntnispraktische [...] Erkenntnisreflexion]"을 행하며 특정한 실천적 관심 하에 수행되는 일종의 테크놀로지의--'논리학'의--모습을 내보였다. 테크놀로지로서의 철학의 주제는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일반적으로 순수하게 아프리오리한 모든 것" 즉 "객관적으로 참될 수 있는 모든 판단들의 규범으로 기능할 수밖에 없는 진리들의 이론적 총체"로서의 ""논리적 법칙"의 체계적 우주"를 탐구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판단을 내리는 이들이 [...] 어떻게 [...] 그 법칙들을 규범적으로 사용할 것인지"를 탐구하는 것이었다(92, 강조는 원저자). 전자에 속한, 예컨대 모순율과 같은 형이상학적 진리 또는 일반적 존재론의 객관적 참됨은 의심되지 않았고, 후자의 영역에서는 순수한 사고와 외적이거나 내적인 경험의 능력인 감성이 대비되어 감성을 통해 촉발된 자아가 사고를 통해 객관적 세계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는다는 합리주의적 구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흄의 경험주의적 심리학에 영향을 받은 칸트는 "정확히 어떻게 이성의 진리들이 사물에 대한 지식을 정말 보장해줄 수 있는지" 의심했다. 그에게는 "수학적 자연과학의 모범적 합리성"마저 수수께끼로 화했다(93). 하지만 흄과 같이 감각주의(sensualism)에 개입한 이들과 달리 칸트는 순전한 감각자료로는 지각이 성립할 수 없고, 지각을 위해서는 감성의 기능 외에도 특수한 정신적 성취(mental accomplishment)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간파했다. 후설은 과연, 전학문적 생활세계를 지각하기 위해서부터 이미 이처럼 추가적으로 요구되는 기능이 수학이나 논리학을 위해 요구되는 기능과 같은지 묻고 논증하는 것이 칸트의 과제였다고 말한다. 달리 말해 칸트는 객관적 진리로서 알려질 수 있는 자연의 대상에 대한 경험이 성립하려면, "직관적으로 나타나는 세계는 이미, 수학과 과학에서 스스로를 명시적 사고로 드러내는 것과 같은 능력들인 "순수 직관"과 "순수 이성"의 구축물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94).* 이러한 과정을 통해 칸트는 주관성의 성취로서의 객관적 학문과 객관적 인식의 가능성 및 범위를 탐구하는 자신의 철학적 이론을 구분하기에 이른다. 예컨대 자연과학은 더 이상 철학의 한 가지가 아니라 그것과 완전히 분리되는 별도의 영역이 된 것이다.
*후설은 '이성'으로서 칸트의 '이성'과 '지성/오성[Verstand]'을 통칭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칸트가 흄의 실증주의에 반해 "초월론적 주관주의의 형태로 의식적 주관성으로의 데카르트적 전회가 전개되는 철학"을 추구했다는 점이다(95). 그런데 후설은 칸트가 흄의 철학을 추동했던 진정한 문제의식을 오해했다고 생각한다. 흄의 문제의식은 결국 "그 속에서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확실성의 소박한 자명성(naïve obviousness[naive Selbstverstänlichkeit])을 어떻게 [...]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 것인가"였다(96, 강조는 원저자). 흄은 '세계'의 타당성이 주관성으로부터 비롯하는 타당성이라는 점을 거의 처음으로 짚어냈다. 그에 따르면 체험하는 주관성 없이 객관성을 논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소박하고 안일한 일이다. 객관적 진리나 객관적 세계 자체는 저마다의 생의 구축물이다. 이렇게 주관성에서 출발해 객관성에 이르는 길에 대한 의문이 곧 흄의 문제[Humesche Problem]다. 그러나 흄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연주의와 실증주의를 동원하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데카르트 이래로 최초의 초월론적 주관주의자의 지위는 칸트에게 돌아간다.*
*Q. 흄이 초월론적 주관주의에 개입하는지 여부가 애매한 것 같다.
§26 여기서 우리를 인도하는 "초월론적"인 것의 개념에 대한 예비적 논의. 후설은 자신이 여기서 '초월론적'의 의미를 가장 넓게 사용하고 있으며, 그로써 "모든 지식 형성의 궁극적 원천으로 돌아가 탐문하는 동기[das Motiv des Rückfragens nach der letzten Quelle aller Erkenntnisbildungen], 인식자가 그 속에서 그를 위해 타당한 모든 학문적 구조들이 목적을 가지고[zwecktätig] 발생하고, 습득물로서 저장되며[als Erwerbe aufbewahrt], 자유롭게 접근 가능하고[verfügbar] 계속해서 자유롭게 접근 가능하게 된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의 인식의 삶을 반성하는[sichbesinnen] 동기"를 가리킨다고 말한다(97-98). 철저하게 수행될 경우 이는 자아의 구체적인 삶이라는 주관적 원천에 의해 궁극적으로 정초되는 보편적 철학의 동기이기도 하다. 이 의식적 삶을 사는 자아는 자신의 인식 구조[Erkenntnisgebilde]를 통해 세계의 참된 존재를 인식한다. 그런데 '초월론적'의 개념은 오직 근대 철학사의 추동력(dynamis)과 활동(energeia)을 되돌아봄으로써만 획득 가능하다. 이는 "역사에 대한 "목적론적" 접근과 초월론적 철학의 확정적 건설을 위한 그것의 방법적 기능"을 정당화해주는 예비적 작업이다(98).
§27 우리를 인도하는 "초월론적"의 개념의 관점에서 본 칸트와 그의 후예들[Nachfahren]의 철학. 비판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과제. 칸트의 철학은 "전학문적 그리고 학문적 객관주의에 대립해, 감각의 모든 객관적 형성물들과 존재적 타당성들[이 형성되는] 최초의 장소로서의 인식하는 주관성으로 되돌아가고, 존재하는 세계를 감각과 타당성의 구조로 이해하는 일에 착수"한다는 의미에서 완전히 새로운 철학적 태도를 가정하고 있으며 초월론적 철학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흄의 부정주의적이고(negativistic) 회의주의적인 철학을 제하면 칸트의 철학이야말로 최초의 엄밀학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칸트 이후 독일의 관념론 역시 초월론적 철학의 정신을 이어받아 "객관적 학문이 [...] 조금도 진지한[ernstlich] 학문이 아니고, 궁극적으로 정초된 즉 그들 자신을 위해 궁극적으로, 이론적으로 책임을 지고 있는 인식[Erkenntnisse aus letzter Begründung, d. i. letzter theoretischer Selbstverantwortung]들[이 아니라는--그리고 그것들[객관적 학문]은 그러므로 궁극적 진리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는 기본적 신념[Grundüberzeugung]을 공유한다."(99, 강조는 필자) 이는 자연과학의 성과를 가상적인 것으로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연과학의 성과가 은폐된 주관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이 근거를 캐물어야만 비로소 실증학문이 내놓은 성과의 의미를, "객관적 세계의 진정한 존재적 의미--정확히 초월론적-주관적 의미로서[의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100).
이어지는 장에서 후설은 칸트가 자신의 초월론적 철학을 개진함에 있어 충분히 철저하지 못했던 대목들을 짚어내고, 어떤 의미에서 그가 철학사뿐 아니라 근대 역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이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칸트에 대한 해석을 통해 객관주의와 초월론주의 사이의 대립의 진정한 의미를 밝히고 직접적인 경험의 권역으로서의 초월론적인 차원을 직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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