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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엘프리데 옐리네크, <피아노 치는 여자>

엘프리데 옐리네크, 이병애 옮김, 『피아노 치는 여자』, 문학동네, 2009

 내가 읽은 그 어떤 소설의 여성인물보다도 비참한 인생을 산 피아노 선생, 에리카 코후트의 이야기다. 아래의 내용은 스포일러로 충만함을 미리 알린다.

 에리카는 평생 어머니의 강압적인 교육 방식과 집착 아래서 자랐다. 그 반작용으로 그녀는 타인을 지배하겠다는 권력욕을 품는 동시에,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일, 즉 복종으로의 강력한 회귀본능을 지니고 있다. 문하생 발터 클레머에게 마조히스트적인 성행위를 요구하면서도 - 굴종하는 쪽이 오히려 주도권을 쥐는 종류의 섹스라는 점에서 그녀와 어울리고, 단 한 번도 타인에게 지배당해 본 적 없는 남성 클레머의 빈틈을 파고들어 그를 당황시킨다 -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적인 형태의 소위 ‘부드러운’ 사랑을 갈망하는 대목은 그녀의 분열을 있는 그대로, 다시 말해 가장 혼란스럽게 보여준다.

 “그녀는 자신이 그의 악기에 불과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악기를 연주하는 방법을 그에게 가르치는 건 바로 악기인 에리카 자신이다. 그는 자유로워야 하고, 그녀는 완전히 묶여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녀를 결박하는 도구들은 에리카 자신이 결정한다. 그녀는 자신을 대상으로, 하나의 도구로 만들기로 결심한다. 클레머는 이 대상물을 이용하기로 결심해야 한다. 에리카는 클레머에게 [마조히스트적인 성행위를 요구하는] 편지를 읽도록 강요하면서도 그가 편지의 내용을 알고 나서 그 내용을 무시해 버리기를 마음속으로 바란다.(p.280, 강조는 필자)”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그녀가 대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에리카 자신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평생 자신의 욕망을 모르도록 교육받아 왔으니까. 자신을 모르는 대신, 음악만은 완벽하게 파악하도록 지도되었다. 주체로서의 경험이 전무해 스스로를 피아노, 즉 정복의 대상과 동일시하며 물건으로 전락시킨다.

 미하엘 하네케의 영화를 먼저 보았으므로 줄거리는 대강 알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원작 소설이 훨씬 충격적이다. 내 기억으로 영화에서는 에리카의 존재감에 짓눌려 클레머가 그렇게 인상적인 인물이 아니었는데, 소설에서는 그의 활기와 매력이 어떻게 같은 남성성 - 이라는 이름으로 느슨하게 묶이는 여러 특성들의 집합 - 을 매개로 폭력으로 돌변하는지 생생히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에리카를 편지의 내용대로, 그러나 상대의 뜻을 완전히 거슬러 강간하면서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을 것을 확신하는 그의 모습, 그리고 이튿날 공과대학 친구들과 떠드는 그의 모습은 최고로 가증스럽다.

 안타까운 것은 모든 일이 결국 에리카를 모든 남자들로부터 차단하려 했던 어머니의 비뚤어진 예상대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이다.

 형식 면에서는 인격을 인격 아래로 강등시키는 비유들이 파격적이었다. “에리카는 시간과 연령을 초월한 곤충이다.(p.22)”라든지 “에리카는 클레머의 기기를 입에서 빼서 꺼내고 기기 소유주에게 앞으로 그가 그녀에게 어떤 일들을 해도 좋은지 전부 적어주겠다고 한다.(p.238)” 등. 이 외에도 페이지 수를 기억할 수 없지만 ‘사랑의 자동판매기’나 ‘일인용 사립 동물원’ 등의 표현이 가슴을 아리게 했다. 이 작가는 어떻게 이토록 과감하고, 줏대 있고 용감할 수 있었을까.

 아무튼 나중에 독일어를 더 열심히 공부하게 되면 원전으로 읽고 싶은 책이다. 토마스 베른하르트, 페터 한트케에 이어 세 번째로 읽은 오스트리아 작가였는데 돌아보니 셋 모두에게 냉소적인 문체가 돋보인다. 내게는 결코 없는 문체라 용감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가끔은 과하다는 생각에 낯뜨겁다. 그럼에도 내가 소화할 수 있고, 익숙해 하는 언어의 외연을 넓히는 일은 절대적으로 가치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