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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김연경 옮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2019, 민음사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될 테지만, 악이 없다면 아무런 인간적 사건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비극적인 통찰이 빛나는 책이다. 아래는 감상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위대한 책에 대한 어느 잡념꾸러미.

 1. 신앙이 제거된 이성을 독주시킨 끝에 둘째 아들 이반 카라마조프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가공할 명제를 발견하지만, 본인은 7000년 인류의 습관인 양심을 버리지 못해 자신의 발견을 체득하지 못한다. 그의 말로는 섬망증 환자의 길이다. 그러나 이반의 발견을 온몸으로 수용한 스메르쟈코프 역시 스스로 파멸한다. 인간은 파멸하지 않으려면 신을, 적어도 신적인 것을 믿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2. 하지만 신의 섭리는 평생을 선에 봉사한 조시마 장로의 시체 위로조차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보이지 않는 신을 믿을 것인가, 믿지 않고 악에 빠질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에 봉착한다. 이 자유야말로 인간을 존엄하게 만드는 동시에 죄의 시한폭탄으로 전락시킨다. 이반의 대심문관은 인간이 믿음을 선택하고 유지하기엔 너무나 연약하다고 말한다. 드미트리가 "두 개의 심연(1298)" 사이를 극단적으로 오가는 것처럼 말이다. 고결함과 저열함 사이의 진자가 곧 인간이며, 그와 같은 분열로 대변되는 '카라마조프적 천성'은 '인간성'의 또 다른 표현이다. (궁금한 것은, 나아가 나에게 중요한 것은 신을 믿지 않고도 악에 빠지지 않는 길이 없는지이다.)

 3. 오직 셋째 아들 알렉세이 카라마조프만이 분열하지 않는다. 자신이 사랑한 장로의 시체가 기적이 열리는 곳이 되기는커녕, 역한 냄새를 풍기자 잠시 신의 섭리를 의심하지만 꿈 속에서 카나의 결혼식에 초대되는 신비를 체험한 것이다. 알렉세이는 희망 그 자체를 육화한 인물로서, 비현실적일 정도로 사랑스러운 인물이다. 알렉세이 같은 인간이 문학이 아닌 현실에서도 나타날 것인지, 나타나더라도 다른 분열한 인간들에 의해 파멸하지 않을 것인지가 인류의 관건이다. (나는 영화 '행복한 라짜로'에서 선인 라짜로가 사람들에게 맞아죽었던 것을 잊지 못하고 있다. 잔인성 때문이 아니라 그 현실성 때문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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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덮고 난 뒤에 든 두 가지 의문은 첫째, 스메르쟈코프가 자살한 동기는 무엇이며 둘째, 스메르쟈코프는 왜 이반이야말로 아버지 표도르 카라마조프와 가장 닮은 아들이라고 생각했을까, 였다. 스메르쟈코프를 악의 화신으로 보는 평이 많은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그가 그렇게까지 악한 인물로 읽히지 않았다. 스메르쟈코프의 자살은 그의 양심이 부린 마술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반에게 건넨 표도르의 지폐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살핀 것은, 그곳에 특별한 표식이 없는지 들여다봄으로써 자신이 무죄가 될 것을 확인하는 행위가 아니었을까? 자신의 죄인됨이 명백한데도, 지상에서 벌을 받을 길이 없어졌음을 그렇게 확신하게 된 뒤 속죄하기 위해 자살을 선택했다고 말한다면... 내가 그를 너무 자비롭게 해석해주는 것일까? (그가 쥬치카와 일류샤에게 저지른 만행을 보면 자비심이 뚝 떨어지기는 한다.) 어쩌면 완벽한 악의 화신은 이 세상에 없기를 바라는 나의 꿈, 그 어떤 악인이라도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는 순간이 있으리라는 내 희망 때문일 수도있다.

[20201028 추가. 스메르쟈코프가 만일 정말 속죄를 의도했다면 살아서 죗값을 치르고 드미트리의 누명을 벗겨줘야 하지 않았겠냐는 의견을 들었다. 왜 그가 절대악에 가까운 존재로들 여겨지는지 전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이반과 표도르 사이의 유사성은 풀리지 않는 숙제다. 아마 표도르 역시 신을 믿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조시마 장로가 규탄한 바 있는, 신 없는 사회에서 고립된 인간들이 제 욕구만을 쫓는 세태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무신론을 둘의 공통점으로 삼기엔 이반이 너무 고결하다. 아버지가 죽기를 바랐다는 이유만으로 죄의식을 느끼는 이반을 나는 존경하는데, 스메르쟈코프는 그에게서 뭔가 다른 방향의 심연을 봤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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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의 깊이도 깊이지만 소설의 작법 상으로도 배울 점이 많은 책이었다. 1)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 그/그녀를 소개시키고 생생하게 그려내는 기술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모두의 사랑을 받는 알렉세이 카라마조프, 오만한 이폴리트 키릴로비치, 사회과학자 재판장 등의 등장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내공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2) 스메르쟈코프가 죄인인 걸 알면서도, 이폴리트에 의해 재판이 드미트리가 죄인인 쪽으로 흘러가는 장면을 읽을 때 독자만이 느끼는 서스펜스... 이 정도 분량의 책이 재미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3) 소설이 특정한 철학이나 사상을 염두에 두고 쓰이는 것이 문학적인가, 비문학적인가를 두고 내적으로 많이 갈등했었는데 이 책을 통해 해결의 열쇠를 찾았다. 사상이 드러나느냐, 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사상이 구체적인 인물에 의해, 다시 말해 전형적이지 않게 육화되느냐가 문제다. 예화되는 것이 아니라, 육화되어야만 한다. (최근에 미셸 투르니에라는 작가의 책을 읽게 됐는데, 그가 철학을 소설 속에 투영시키는 것을 자신의 문학적 과제로 삼고 있다는 식의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의 문학세계를 탐구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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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몇 마디 덧붙이자면, 읽으면서 나 자신에게 계속해서 놀랐는데, 드미트리가 설령 표도르를 죽였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를 동정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드미트리가 2등 대위 스네기료프에게, 그리고 그의 아들 일류샤에게 상처를 입힌 것은 곱씹어도 정말이지 화가 난다. 스네기료프가 드미트리 대신 그를 찾아간 알렉세이의 200루블을 거절했을 때 느꼈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럼에도 드미트리가 그루셴카와 행복하기를 원하며 강한 연민을 느끼는 것은 내 정의감이 약하기 때문일까? 이 질문에도 나는 답할 수가 없다. 이성과 신념의 힘이 부족하고 갈팡질팡하기만 한다.

 

P.S. 2년 전 <안나 카레니나>도 김연경 님의 번역으로 읽었었는데, 이번에도 번역이 감탄스러울 정도로 매끄럽다. 소설가가 문학을 번역할 때 가지는 이점이 있고 학자가 문학을 번역할 때 가지는 이점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분은 두 이점을 겸비하신 것 같다. 번역상 받으셨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