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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토마스 베른하르트,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배수아 옮김,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필로소픽, 2014

 2018년 여름에 <몰락하는 자>를 우연히 읽은 이후 1년에 1번씩은 베른하르트의 소설을 찾게 된다. 작년엔 빈을 여행하면서 일부러 <옛 거장들>을 가져갔고(여행 내내 나를 행복하게 해준 예술가들에 대한 냉소로 가득찬 책이었다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올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 중 한 명인 배수아가 옮긴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를 종강하자마자 읽었다.

 베른하르트의 소설들은 분위기나 문제의식, 문체 면에서 서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비슷하다. 사태의 어둠만을 보는 극단적으로 절망적인 관점이 모든 작품을 관통하며, 실존하는 인물 또는 집단에 대해 어떻게 이런 깡이 있을 수 있지 싶은 수준으로 그 정신적 타락을 비판하고, 문단의 구분도 서사도 없이 사건의 발생 순서를 왔다갔다 하며 당당하게 헤매는 듯한 문체는 이미 유명하다. 너무 빠져버리면 한동안 주위의 모든 것들이 형편없고 증오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의 글은 1년에 1권씩만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1년에 1권씩은 꼭 읽음으로써, 미화된 모든 것, 이를테면 건강과 자연 같은 것에 대해서조차 신랄하게 사유할 수 있는 능력과 정신적 자유를 배워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는 '나'와 제목 그대로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인 음악 마니아 파울 비트겐슈타인과의 우정을 그린 책이다. 그 점에서 <몰락하는 자>를 연상시키고, 상대 친구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상당히 유사하다. 하지만 <몰락하는 자> 속 베르트하이머와 '나'의 우정은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에 대한 열등감을 동력으로 삼는 반면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속 파울과 '나'의 우정은 그들이 천재로 인정하지 않는 건강한 사람들에 대한 증오를 동력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약간의 자기애 및 긍지를 바탕으로 가지고 있다. 이 차이는 광기와 폐질환을 "존재의 원천(32)"으로 삼는 인간이 화자로 내세워짐에도 불구하고 책 곳곳을 장식하는 유머(의 존재 가능성)을 설명해준다. 사실 낙관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풍부한 대상들(정신과 의사라는 직업, 부르크 극장, 귀농생활 등)에 대해 비난만을 퍼붓는 베른하르트의 화법 자체에 우스운 면이 있다. 신경이 너무 예민해서 세계 내 모든 존재자에 대해, 세계 자체에 대해 끊임없이 투덜거리는, 그러나 그 투덜거림의 방식이 너무나 개성적이어서 계속 귀 기울이게 되는 그런 화자를 앞에 앉혀놓는 기분이다. 

 파울 비트겐슈타인의 광기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철학만큼이나 철학적이고 독창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건강하지 못한 상태를 견디지 못하는 현대사회와 그곳을 장악하고 있는 소시민들에 의해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고 베른하르트는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루트비히만을 천재로 떠받들 때, 그만큼이나 지적이었던 파울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려는 베른하르트의 기획으로 읽을 수 있다. 베른하르트에 따르면 루트비히는 철학을 '출간'했지만, 파울은 철학을 '실천'했다. 그러나 파울이 어떤 의미에서 철학을 실천했으며, 철학을 실천한다는 것이 애초에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시되지 않는다. 파울의 무절제하고 편력적인 인생이 어째서 철학자의 생이 되는지 고민하는 것이 이 책을 덮은 지금 나의 과제다.


 이 소설을 읽고 개성적인 글은 어디서 나오는가에 대해 Y에게 물었다. 그의 결론은 개성적인 글은 개성적인 사유로부터 나오는데, 개성적인 사유는 그 자체로 또는 일차적으로 목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개성적 사유보다는 우선 좋은 사유에 이르러야 하며, 사유하지 못함 또는 나쁘게 사유함에서 좋게 사유함으로 가는 길에 비하면 좋게 사유함에서 개성적으로 사유함으로 가는 길은 너무나 순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