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

레오 페루츠, <심판의 날의 거장>

레오 페루츠, 신동화 옮김, ⟪심판의 날의 거장⟫, 열린 책들, 2021.

 

 가벼운 언어로 그러나 인간의 욕망을 깊이 파고드는 추리소설이다. 단순히 연쇄적인 자살 사건의 비밀을 파헤치는 이야기로만 읽힐 수도 있지만, 그 표피 아래에는 재능의 한계에 부딪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 또는 처음부터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고자 하는 예술가들의 과욕이 묘사되어있다. 창조적 상상력에 대한 갈망은 예술가들로 하여금 일련의 의례를 거쳐--이 이상 스포일하고 싶지 않다--'심판의 날'을 맞이함으로써 모든 것이 새로운 이세계, 말하자면 완벽하게 타자적인 것을 만나 영감을 얻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그들이 심판의 날에 만나게 되는 것은 타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 그것도 자기 영혼의 핵을 이루는 가장 내밀한 공포일 뿐이다. 이 소설에서 공포는 단순히 조심하면 되거나 마주해도 피할 수 있는 종류의 감정이 아니다. 공포는 삶을 죽음보다 못한 것으로 만들 만큼 치명적인 것이며, 의식된 적이 있든 무의식에 남아있든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고유한 공포가 있다는 것이 이 소설의 통찰 중 하나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궁정 배우 오이겐 비쇼프다. 리차드 3세를 연기하기 위해 진정한 공포의 감정이 무엇인지 배우고자 했던 오이겐은 결국 자신처럼 냉철한 사람에게도 죽음보다 두려운 일이 있음을 자각하고 숨을 거두는 역설을 드러낸다.

 소설의 대부분을 이루는 수기의 작성자인 요슈 남작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도 이 소설이 동원하는 문학적 장치 중 하나다. 골동품 수집가와의 만남을 통해 등장하게 되는,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조반시모네 키기가 심판의 날을 맞이한 후 무시무시한 '나팔 빨강'색의 그림을 그리며 '심판의 날의 거장'이 된 것처럼, 요슈 남작 역시 자신만의 공포를 견디고 소화하기 위해 현실과 환영이 예술적으로 교차하는 이 수기를 작성한 것이 아닐까. 소설의 내용뿐 아니라 형식까지도 주제의식에 봉사하고 있는 통일적이고 완성도 높은 소설이었다. 같은 작가가 쓴 ⟪스웨덴 기사⟫도 언젠가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