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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토마스 베른하르트, <몰락하는 자>와 니체의 생리학

토마스 베른하르트, 박인원 옮김, ⟪몰락하는 자⟫, 문학동네, 2011.

 

 어쩌다 보니 이 한 소설만 네 번을 읽었다. 구매한 날짜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2018년 6월 20일 북페어에서 구매해 처음 읽었고, 책을 덮자마자 공허해진 마음에 다시 읽었고, 2019년에 ⟪사랑하지 못하는 자들의 사랑⟫을 쓰면서 또 꺼내봤고, 이번엔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를 강독하는 수업에서 리포트를 쓰기 위해 재독했다. 그러나 읽을 때마다 새롭고 흥미로운 점들이 돋보이는 책이다. 베른하르트의 문학적인 역량에 오늘도 감탄한다.

 글의 작은 일부는 내가 기존에 니체의 저서들을 요약하면서 썼던 문구들을 옮겨온 것으로 이루어져있다. 아주 마음에 드는 글은 아니지만 데드라인 내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9학점을 들은 것은 대학원에 와서 처음인데, 알차면서도 힘들었다. 6월 내내 글 찌는 찜기가 되라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살았으니...


육체적 부작위라는 데카당스

-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몰락하는 자⟫에 대한 ‘생리학적’ 독해 -

1. 서론: 생리학으로서의 철학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는 “디오니소스 십자가에 박힌 라는 이항대립으로 끝맺어진다(EC, 189). 이는 오랜 세월 유럽인의 현존재와 지성사를 지배해온 형이상학적 이원론과 기독교적 도덕관념을 정면에서 뒤엎고자 한 니체의 철학적 기획을 적확하게 요약해주는 한 마디다. 종래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은 차안과 피안, 육체와 순수한 영혼을 구별한 뒤 허구에 불과한 후자를 위해 전자를 경멸해왔다. 이 같은 염세주의적 경멸에 맞서 니체는 당장의 생성소멸하는 세계 속의 육체와 그 욕망, 고통 모두를 긍정할 것을 명령하는 운명애의 사상을 내세운다. 또 다른 이상주의인 기독교적 도덕은 위선에 불과한 이웃사랑 및 동정심과, 자기애를 억압하는 희생 및 금욕을 강제함으로써 사제들의 병적인 힘에의 의지만을 충족시켜왔다. 니체는 진정한 지혜와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기독교적 피안과 선의 개념을 폐기할 수 있고, 폐기해야 한다고 거듭 역설하며, 자신을 새로운 “'진리'의 척도를 손에 넣은 최초의 사람”으로 규정한다(EC, 152). 만연해있는 데카당스를 극복하고 긍지와 자기애, 욕망의 실현, 육체의 건강, 삶에 대한 긍정과 같은 디오니소스적 가치들을 숭상하는 초인의 상을 처음으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평생의 철학적 기획이 난해하게나마 집대성돼있는 이 책에서 니체는 자신이 여태껏 몰두해온 작업들을 ‘생리학’이라 규정한다. 고전문헌학을 공부했던 시절을 경멸적으로 회상하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서 정신의 영양 섭취가 단절되었던, 쓸모 있는 것은 하나도 배우지 않았던, 먼지에 파묻힌 학술적인 허튼소리는 아무 의미가 없다 [...] 그 후로 나는 실로 생리학과 의학과 자연과학을 공부하는 것 외에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EC, 107, 강조는 필자). 하지만 힘에의 의지를 인간의 본능이자 모든 개인적 행위 및 사회현상의 배후로 보고, 그것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초인이 되라는 그의 사상이 육체의 기능 원리를 취급하는 생리학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가? 니체가 기존에 경시되어온 육체의 가치를 재평가하고자 했다는 사실은 대답을 위한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니체는 인간이 육체와 정신으로 이분된 존재가 아니라 여러 힘에의 의지들이 복합된, 그러나 그 의지들이 하나의 위계질서 하에 정돈될 것이 요구되는 어디까지나 일원적인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해 정신을 ‘내장’으로 비유해왔다. 이상범(2017)은 니체가 “현대와 현대인의 다양한 실존적 현상들을 건강과 병의 관점에서 진단하고 그 치유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위, 영양, 소화불량 등의 “비철학적 개념들”을 동원한다고 옳게 지적한다. 이와 같은 개념화는 니체만의 고유한 인식론에서 비롯한 것이다(이상범, 2017: 62). 니체에게 인식은 육체로부터 분리된 순수한 영혼의 직관 같은 것이 아니라 “내재적 힘의 작용에 의해 끊임없이 세계와 삶에 대한 관점을 달리하는 해석”이다(이상범, 2017: 66, 강조는 필자). 따라서 초인과 같이 고양된 힘에의 의지로써 세계를 긍정하는 관점에 입각해 삶을 해석하는 것은 원활한 소화에 해당하는 반면, 그 외의 경우들에 소화불량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Rosciglioni(2013)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를 분석하며 니체가 데카르트적 심신이원론도, 환원적 물리주의도 거부하는 ‘비환원적 생리주의’에 개입한다고 주장한다. ‘큰 이성’에 해당하는 육체는 감각뿐 아니라 지적 활동의 주체이기도 하며, 육체와 육체에 봉사하는 ‘작은 이성’인 정신 사이의 상호의존성과 상호작용이 비로소 자아의 주관성을 구성한다는 것이다(Rosciglioni, 2013: 46). 정신이 내장, 즉 일종의 신체기관이라는 니체의 표현은 단순한 비유에 그치지 않고 심리적인 것과 생리적인 것을 하나뿐인 실체의 두 부분으로 보는 심리철학적 전제 위에 쌓아올려진 철학적 진술이다.

 요컨대 육체와 그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잘못 여겨져온 정신은 니체의 인식론과 심리철학 하에서 통일체를 이룬다. 그렇다면 상술한 디오니소스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실현하는 사람들은 ‘건강한’ 정신을, 자기혐오와 복수심에 사로잡힌 채 삶을 부정하는 염세주의자, 혹은 어디서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허무주의자 등은 ‘병든’ 정신을 가진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니체는 급기야 인류의 구원이 “영양 섭취의 문제”에 달려있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EC, 31). 이 선언은 현실이 욕망과 충동을 당당하게 또는 은밀히 표현하고, 타인과 건설적인 또는 원한에 찬 경쟁을 벌이는 육체에 의해 경험되는 것이라는 니체의 주장을 잘 보여준다(이상엽, 2019: 96-99 참조).

 그러나 학자들은 현존재의 근본적 육체성을 비겁하게 외면해왔다. 첫째, 그들은 육체적인 현실과 독립적으로 성립하는 불변하는 진리의 영역이 존재한다고 가정했으며 둘째, 건강의 개선과 전혀 무관한 사소한 사실들을 마치 이 잡듯 발견해내는 것을 정당한 학문적 탐구라고 믿어왔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 제3논문에서 사제들의 금욕적 이상을 생리학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주체가 자신 스스로를 보존하려는 시도로 규정하면서, 학자들도 사제들과 같은 운명에 처해있다고 진단한다. 학자들은 “형이상학적 가치, 진리의 가치 그 자체에 대한 신앙”을 강박적으로 고집하는 학문영역의 사제들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GM, 246). 이에 니체는 존재하지도 않는 순수 진리를 헛되이 탐하기보다—어차피 학자들은 저마다의 힘에의 의지가 이끄는 결론으로 부지불식간에 미끄러질 것이다—“거짓을 신성시”하는 예술적인 창조를 시도하는 것이 훨씬 가치있다고 못박는다(GM, 249-250). 철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철학자”는 칸트와 헤겔 같은 ‘철학적 노동자’처럼 “과거의 가치평가와 가치창조에 대한 자료들을 확정하고 정식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가치를 “명령하는 자이며 입법자다. [...] 그들의 ‘인식’은 창조이며, 그들의 창조는 하나의 입법이고, 그들의 진리에의 의지는 힘에의 의지다.”(JGB, 257, 강조는 원저자) 이 인식이 내장에 의해 이루어지는 한, 진정한 철학은 창조적으로 입법하는 예술일 뿐 아니라 니체의 사상과 같은 생리학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육체가 힘에의 의지를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발산하느냐에 입각해 생명체를 해석하는 학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천재 글렌 굴드의 연주를 듣고 좌절해 피아니스트의 길을 포기한 뒤 진정하지 못한 양상의 철학으로 도피한 두 인물의 이야기를 담은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설 ⟪몰락하는 자⟫는 니체의 생리학, 특히 생리학적 질병에 해당하는 ‘데카당스’의 개념에 입각해 독해 가능하다. “우리는 피아노 대가가 되겠다고 등장했다가 정신과학과 철학 분야를 뒤지고 파헤치는 자들이 되어 황폐해진 것”이란 문장이 이 가능성을 뒷받침해준다(DU, 17). 필자는 본론을 통해 ⟪몰락하는 자⟫의 등장인물인 베르트하이머와 ‘나’가 ‘육체적 부작위’라는 특수한 양상의 데카당스에 처해있음을 보일 것이다. 먼저 인물들의 성격과 삶을 각각 살펴보고, 베르트하이머와 ‘나’가 어떤 의미에서 니체의 데카당스 개념을 체화하는 존재들로 이해될 수 있는지를 해명함으로써 니체의 생리학이 이를 수 있는 새로운 진단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구체화하고자 한다. ⟪몰락하는 자⟫로부터의 모든 인용은 ‘(DU, 페이지 수)’를 덧붙였다.

 

2. 본론: 육체적 부작위라는 데카당스

 소설 ⟪몰락하는 자⟫는 ‘나’가 한때 함께 피아노를 공부했던 친구 베르트하이머의 장례식에 다녀온 후 그와 자기 자신 그리고 글렌 굴드 사이의 우정을 회상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있다. 세 인물은 모두 빈의 명문 음악대학을 졸업했고, 평범한 연주 실력에는 만족하지 않는 완벽주의자였음에는 같았지만 상이한 성격을 가지고 상이한 삶을 살았다. 굴드는 이미 완성된 것이나 다름 없는 실력으로 대학에 입학해 잠깐의 연습만으로 ‘나’와 베르트하이머를 압도한다. 굴드의 재능에 순전히 감탄한 데 그친 ‘나’와 달리 진심으로 위대한 피아니스트로서의 꿈을 품고 있었던 베르트하이머는 자신보다 뛰어난 동료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좌절한다. 학교를 졸업한 뒤 굴드는 자연스럽게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는 반면 ‘나’와 베르트하이머는 피아노 연주를 포기한다. ‘나’는 철학 책을 읽고 글을, 무엇보다 ‘글렌 굴드론’이라는 비평을 완성해내기 위해 빈을 떠나기까지 한다. 베르트하이머 역시 ‘정신과학’에 해당하는 내용의 아포리즘을 쓰는 일에 홀로 몰두하다가, 굴드가 피아노를 연주하다 자연사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많은 사람들을 집 안에 불러들여 조율되지도 않은 피아노를 이틀 내리 연주한 뒤 극적으로 자살한다. 그가 사라진 방 안에는 굴드가 연주한 바흐의 레코드판이 놓여 있다. 각 인물들의 성격과 삶은 다음과 같다.

 먼저 천재 피아노 연주자로 허구화된 글렌 굴드는 니체의 초인상에 부합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끊임없는 연습을 통해 스스로를 훈련시켰으며, 자연과의 관계에서는 피아노를 치기에 최적인 환경을 찾는 데 집착했고,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청중의 인정에 연연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주변의 모든 자원들을 자기초극을 위해 선용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피아노를 칠 때 시야에 들어온다는 이유로 창 밖의 물푸레나무를 집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곧장 베어버린 일화다. 나무를 벤 뒤 굴드는 “우리를 방해하는 게 있으면 말이야, 그것이 물푸레나무일지라도 제거해야 해 […] 물푸레나무를 베도 괜찮으냐고 물어보면 안 돼, 물어보면 약해져”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굴드가 니체가 말한 ‘신성한 이기심’을 체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글렌은 결과적으로 자기 목표 달성을 위해 우리까지 이용해먹었던 거야, 난 생각했다. 일부러 그러지야 않았겟지만 글렌 굴드라는 인물이 되기 위해 모든 것을 이용했던 거지, 난 생각했다.”(DU, 58)

 굴드의 이기심이 단순한 자기중심성에 그치지 않고 신성함을 띠게 되는 것은 그것이 흔들리지 않는 긍지로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굴드는 자신의 삶의 목표이자 추구해야 할 가치를 스스로 설정한 뒤, 그에 도달하기 위해 음악적 성장 이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으면서도 자신의 성취에 만족할 줄 알았다. 

 “글렌은 자신을 불행하다고 보는 사람들한테 그렇지 않다고, 자기야말로 제일 행복하며, 행복이 빚어낸 제일가는 사람이라고 우겼다. 음악/강박증/성공욕/글렌[…]”(DU, 41, 강조는 원저자)

 요컨대 글렌 굴드는 최고의 음악성을 성취하겠다는 욕망을 분출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니체의 생리학에 입각해 말한다면 그는 세계의 사건과 사물들을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최대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해석하고 흡수해내는, 원활할 소화와 신진대사 능력을 가진 ‘건강한’ 인간 그 자체인 셈이다.

 “글렌은 가는 곳마다 불구의 몸, 허약한 자의 이미지로 그려지고, 불구라는 이미지와 함께 지극히 예민하고 전적으로 정신적인 인간으로 그려졌지만, 글렌은 사실 육상선수 타입이었으며 베르트하이머와 나를 합친 것보다 더 힘이 셌다.”(DU, 78, 강조는 원저자)

 한편 베르트하이머는 굴드에 의해 이 소설의 제목에 해당하는 ‘몰락하는 자’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는 인물이다. 베르트하이머는 부친에 대한 복수심으로 피아노를 전공하기 시작하고, 많은 이들에게 칭송받는 피아노 대가가 되기를 꿈꿨지만 굴드에 대한 열등감을 이기지 못해 음악을 포기한다. 그는 쉰한 살이 될 때까지 부모님이 물려주신 사냥 별장에서 줄곧 여동생을 감시하고 괴롭히다, 그녀가 자신을 떠나 스위스의 부자와 결혼하자 또 다른 복수심으로 그리고 “여동생이 평생 죄책감을 느끼며 살도록” 그녀의 집 앞을 찾아가 일부러 그곳에서 목을 매단다(DU, 53). 한 마디로 그의 삶 전반에는 니체가 가장 적극적으로 비판해 마지 않았던 원한의 파토스가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타인에 대한 그의 원한은 실존 자체에 대한 원한으로 번져 그를 독실한 염세주의자로 만든다.

 “베르트하이머처럼 자기 친척을 지독한 사람들로 묘사하고 묘사만으로 깔아뭉갤 줄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까지 증오했던 그는 자신이 불행한 건 그들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자기가 살아야 하는 건 순전히 가족의 잘못이라고 끊임없이 책망했으며, 가족이 자신을 이처럼 끔찍한 실존이라는 기계 속으로 던져 놓고 완전히 망가진 모습으로 다시 기계에서 나오기를 바란다는 거였다.”(DU, 45, 강조는 원저자)

 “존재하다는 건 돌려 말하면 이런 거잖아, 우리는 절망한다, 베르트하이머는 이렇게 말했다.”(DU, 49)

 물론 실존에 내재한 불행의 필연성은 니체 역시 ⟪비극의 탄생⟫에서 실레노스의 경구를 인용하며 인정한 바 있다. 그러나 베르트하이머의 문제는 자신의 염세주의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항상 스스로를 파멸시킬 생각에만 골몰했다는 점에 있다. 이는 그가 삶을 긍정하는 데 실패하고 긍지를 찾는 데에도 실패했음을 암시한다. 긍지의 부족분을 베르트하이머는 타인의 인정으로써 보충하고자 한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존중하지 않으면 어쩌나 두려웠던 나머지”, 침묵을 고집한 굴드와 달리 늘 질문, 사과, 수다를 일삼았으며, 어줍잖은 동정심으로 빈자를 위한 기부금을 낸 적도 있지만 끝내 사기를 당한다.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타인을 흉내내는 일도 서슴치 않는데, ‘나’는 베르트하이머의 자살마저 굴드의 자연사를 흉내내려 한 결과였다고 해석한다(DU, 53).

 이처럼 베르트하이머는 자신의 삶의 의미와 자신이 추구해야 할 가치를 자율적으로 규정하는 데 실패한다. 그는 굴드가 지어준 별명 ‘몰락하는 자’를 자신이 쓴 잠언집의 제목으로 삼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새 삶을 살기 위해 음악을 떠나 정신과학을 택했지만 끝까지 부자유와 자기혐오로 괴로워했던 것이다. 여기서 베르트하이머가 작업물의 저자인 자신뿐 아니라 스스로의 작업물 또한 의도적으로 평가절하한다는 점을 짚어두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그마한 성과라도 남기고자 발악했으나, 그조차 죽기 전에 전부 태워버리고 만다.

 “[…]부정적인 평가를 받든 긍정적인 평가를 받든 아포리스트로 불리는 작자는 다 역겨워, 그래도 난 아포리즘을 못 끊겠어, 그동안 써놓은 것만도 수백만 개에 달하는 것 같아, 라던 그의 말이 생각났다. […] 안 마시면 목말라 죽는다, 안 먹으면 굶어 죽는다, 아포리즘의 결론이란 게 전부 그런 유의 지혜잖아[…]”(DU, 66)

 요컨대 베르트하이머는 소화불량인 인간 그 자체다. 굴드 그리고 ‘나’와의 진지했던 우정마저 그에게는 열등감으로 귀결됐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피아니스트로서의 재능을 꽃피우지 않았고, 그 대신에 남은 힘에의 의지를 여동생을 비난하는 데 남용한다. 자신보다 우월한 굴드가 존재한다면, 또는 열등한 여동생이 자신보다 행복해진다면 자신이 존재 의의를 잃는다고 해석해 쉰한 살의 나이에 삶에 대해 원한을 품고 제 육체를 해한 것이다.*

 마지막 인물인 ‘나’는 모든 것을 그로부터 거리를 두고 관조하면서, 드문 감탄과 잦은 경멸을 일삼는 이 소설의 화자이다. 그 역시 “해가 갈수록 더욱더 뛰어난 실력으로 [음악에 무지한] 가족을 지배”하고자 피아노를 전공하기 시작하지만 굴드를 만난 뒤 더 이상 피아노가 자신의 삶에 긍지를 더해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망설임 없이 값비싼 피아노를 처분한다(DU, 22). 어떤 면에서는 그 역시 굴드와 같은 초인처럼 보인다. 그는 데셀브룬의 이웃들이 베푸는 배려에 질색하고, 그곳 사람들이 의지하는 천주교와 사회주의 정당을 “이 시대의 가장 구역질 나는 단체들”로 규정하며(DU, 126) “최상의 공기”를 찾기 위해 훌쩍 마드리드로 떠난다(DU, 72). 그곳에서 ‘나’는 글렌 굴드에 대한 회고록을 작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그러나 ‘나’의 완벽주의는 이 목표의 달성을 자꾸만 지연시킨다. 마치 밤이 되면 낮에 짜두었던 실들을 푸는 페넬로페처럼, 그는 열심히 써놓은 글을 언제나 말소시키곤 한다. 말소의 이유로 ‘나’는 “오류와 부정확성, 부주의, 딜레탕티슴”을 든다. 하지만 “글쓰기에만 매달리면서 지내온 28년동안 단 한권도 출판하지 못했어, 글렌에 관한 글만 해도 장장 9년을 붙들고 있었지”라는 그의 말을 상기한다면 그의 공적 침묵은 비겁이나 다름없다(DU, 76). ‘나’의 용기는 사적으로 타인을 평가하는 데서만 발휘된다. 그는 현명한 척, 자신을 비롯해 베르트하이머와 굴드의 삶을 끝없이 추켜올리거나 비판하지만, 베르트하이머가 자살한 이유가 여동생의 결혼 때문이었는지, 굴드의 연주 실력 때문이었는지에 대한 해석을 여러 차례 번복하는 등 그마저도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인다. 작가 베른하르트는 ‘나’의 모든 평가 뒤에 ‘라고 난 생각했다’는 술어를 꼭 덧붙임으로써 ‘나’가 오직 데카르트적 코기토만을 가진, 결단을 내린 뒤 그에 따라 행위할 용기와 그 용기의 그릇이 되는 육체성은 상대적으로 결여되어있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이따금 ‘나’는 자신의 비겁함을 자각하고 있음을 밝히지만, 그럴 때조차 ‘베르트하이머보다는 자신이 나았다’는 논리로 스스로를 두둔한다. 그 역시 베르트하이머 못지않게 경멸스럽다.

 “베르트하이머는 조건이 안 되는데도 늘 욕심을 냈지, 난 생각했다. 글렌은 모든 면에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 나도 여러모로 조건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나태하고 오만한 데다 게으르고 싫증을 잘 냈기 때문에 일부러 그런 조건들을 무시했던 거지, 난 생각했다. 하지만 베르트하이머는 조건도 안 되는 주제에 일을 벌이곤 했다.”(DU, 93, 강조는 필자)

 베르트하이머가 만성적인 피로 가운데서 소진 또는 영양 실조에 시달리는 환자의 모습을 보인다면, ‘나’의 행보는 영양이 과하게 수용된—왜냐하면 삶의 내용이 수용되기만 하고 배출되지도 승화되지도 않으므로—“모든 것을 먹는 인간(homo pamphagus)”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프리드리히 니체, 박찬국 옮김, ⟪아침놀⟫, 책세상, 2004, 189쪽. 이상범(2017), p.63에서 재인용). ‘나’는 정보를 흡수하고 그것을 되새김질하는 과정에서 삶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을 소화하지만, 소설 전체에서 그가 내린 적극적 결단이라고는 망설임 끝에 베르트하이머의 장례식에 간 것뿐이다. 그의 모습은 헤겔이 ⟪정신현상학⟫과 ⟪법철학⟫에 걸쳐 비판적으로 묘사한 바 있던 ‘아름다운 영혼’과 유사하다. 아름다운 영혼은 특정한 신념을 가지고—니체의 언어로 말한다면 힘에의 의지를 제 나름대로 고민한 방향으로 고양시키기 위해—적극적으로 행위하는 타인을 완강한 마음을 가지고 심판하기만 할 뿐, 정작 자신이 행위에 나서지는 않는다. 행위에 나서는 순간 특수한 관점을 취하게 되기 때문에 자신의 순수함이 오염되고, 보편적 의무를 대변하는 존재로서 타인을 심판할 자격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상술한 분석을 바탕으로 필자는 초인 글렌 굴드와 달리, 염세주의자 베르트하이머와 아름다운 영혼인 ‘나’는 모두 데카당이며, 그들이 데카당스의 병에 걸렸다는 사실은 ‘육체적 부작위’란 증상을 통해 드러난다는 생리학적 독해를 시도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선 니체가 데카당스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고 설명했는지 살펴보겠다. 니체에게 데카당스란 힘에의 의지가 쇠퇴한 생리학적 질병으로 정의된다. 그에 따르면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선택하는 것, ‘이해관계 없는’ 동기에 유혹되는 것”이 바로 데카당스의 공식이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찾지 않는다’―이것은 완전히 다른 사실, 즉 다음과 같은 생리적인 사실을 숨기는 도덕적인 덮개에 불과하다: “나는 내게 이익이 되는 것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더 이상은 모르겠다라고 하는”……본능의 분산!―이타적이 되어버린 인간은 종말을 맞는다.―“나는 이상은 가치가 없다”고 단순하게 말하는 대신, 데카당의 입에서 나오는 거짓 도덕은: “가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삶은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프리드리히 니체, 백승영 옮김, ⟪우상의 황혼⟫, 책세상, 2002, pp.170-171, 이상범, 데카당스에 대한 니체의 심리-생리학적 해명, 니체연구 제36집, 2019, pp.144-145에서 재인용. 강조는 필자.)

 이상범(2019)에 따르면 이와 같은 허무주의는 데카당스라는 근원적 문제의 표면적 현상이다. 데카당스는 ‘정신’의 타락이 아니라 육체의 생리적 기능이 퇴행한 결과로 인간이 자신을 상실하는 질병이다. 그 고통을 이기기 위해 고안된 것이 바로 형이상학적 이원론과 기독교적 도덕관념이다(이상범, 2019: 146 참고).

 “[…]힘에의 의지가 쇠퇴한다는 것은 표피적으로는 인간이 더 이상 지속적인 자기 극복 속에서 매순간 새로운 실존적 변화를 도출하는 삶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가 더 이상 자신의 자연성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리고 이 상실의 감정은 필연적으로 의지의 박약의 증상을 도출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나를 나로서 느끼지 못하는 자는 자신을 위해서 무엇도 없고 또한 하고자 하지 않는 힘에의 의지의 쇠퇴, 다시 말해 변화의 정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이상범, 2019: 150-151)

 이처럼 의지 박약, 부작위, 정체의 언어로 표현되는 데카당스는 초인으로의 노정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데카당스의 증상으로 이상범(2019)은 “의지의 박약”을, 이상범(2017)은 “창조적 무능력”을 내놓은 바 있지만, 필자는 여기에 ‘육체적 부작위’를 더하고자 한다. 필자가 정의하는 ‘육체적 부작위’란 타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적극적 행위에 임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나’와 베르트하이머가 혼자만의 세계에 머무르며 그 안에서 힘에의 의지를 소진시켰다는 사실을 감안했을 때 상술한 표현들보다 본 글이 주제화하는 소설의 내용에 더 정확하게 부합한다. 남은 과제는 첫째, ‘나’와 베르트하이머가 어떤 이유로 육체적 부작위의 혐의를 받을 수 있으며 둘째, 육체적 부작위가 어째서 니체의 데카당스 개념의 새로운 증상으로 추가될 수 있는지 밝히는 것이다.

 먼저 첫 번째 과제를 ‘나’와 베르트하이머 순으로 수행해보자. ‘나’는 단적으로 말해 합리화의 대가이다. 그리고 다음 인용문들은 그가 무엇을 합리화하고자 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베르트하이머는 피아노 대가가 되기를 원했지만 나는 원하지 않았지, 난 생각했다. […] 글렌의 연주 몇 소절로 베르트하이머는 끝장난 거야, 난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왜냐하면 글렌을 만나기 전부터 피아노를 그만 두겠다는 생각을, 내 노력이 허무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DU, 85)

 “내 경우 내 머리가 연주 활동을 금했던 것이라면 베르트하이머의 경우는 글렌이 그것을 막았던 셈이다. 연주 활동이란 그 무엇이 되었든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소름 끼치는 일이며, 청중 앞에서는 피아노를 연주하든 바이올린을 연주하든 끔찍하지[…]”(DU, 108)

 ‘나’는 앞서 정리했듯 그리고 오직 코기토의 생각으로써만 세계와 접촉하는 존재다. 그는 자신이 말하자면 육체를 상실한 통 속의 뇌와 다를 바 없다는 진실을 합리화하고자 한 것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는 자신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베르트하이머를 비난하는 데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쏟음으로써 스스로의 급조된 긍지를 부질없이 지키고자 한다. ‘나’는 육체로서 세계에 나서기를 두려워하는 겁쟁이다. 한편 베르트하이머는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스스로의 행위를 부정하는 데 사용한다. 기존의 작위들을 무효화하는 데 힘을 쓴다는 뜻이다.

 “결국 그 친구는 자신의 실패와 사랑에 빠졌어, 아니 실패에 홀딱 빠져버렸지, 실패하기를 끝까지 고집했어, 그는 자기가 불행하다는 사실 때문에 불행했지만, 자고 일어났는데 불행이 사라졌거나 찰나의 순간에 불행을 빼앗겼더라면 더욱더 불행해졌을 거야, 그것만 보더라도 그는 진정으로 불행했던 게 아니야, 불행을 통해서 불행과 함께 행복했다는 증거지[…]”(DU, 101) 

 “베르트하이머는 아주 전형적인 막다른 골목형 인간이었고, 어느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면 곧바로 다른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갔어 […]”(DU, 140)

 두 사람의 육체적 부작위는 무엇보다도 ‘각자의 작품을 타인들 앞에 내놓지 않았다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나’는 ‘글렌 굴드론’을, 베르트하이머는 정신과학적 아포리즘들을 출간하지 않는다. 혹자는 이와 같은 공적 침묵이 니체의 데카당스 개념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동시대의 부덕한 타인들로부터 도도하게 고립되는 것이 오히려 덜 데카당한 태도이지, 어째서 타인들 앞에 자신의 작품을 내놓는 것이 건강의 표식이 된단 말인가? 설령 혼자서만 골몰하고 만 철학적 작업들이라 하더라도, 작업을 꾸준히 진행했다는 그 사실만은 적극적인 작위 및 니체의 자기초극의 개념 하에 포섭될 수 있지 않은가? 이 의문에 필자는 니체가 힘에의 의지의 표현을 단순히 개인적인 현상으로 보지 않고,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 또는 명령하는 자와 순종하는 자 사이의 위계관계와 결부된 사회적인 현상으로 이해했다고 응수할 것이다.

 육체적 부작위 또한 데카당스의 증상으로 이해하게 해주는 이 해석적 테제는 여러 근거를 통해 입증될 수 있다. 첫째, 니체는 기독교가 삶을 긍정하는 자들에 대한 원한과 복수심의 발로라는 점을 꾸준히 지적한다. 삶을 직면할 줄 모르는 자들의 열등감이 그들의 힘에의 의지를 부추겨 기독교를 통해 권력을 잡도록 이끌었다는 것이다. 사제들이 가진 힘에의 의지는 자신보다 우월한 자들을 자기 발 밑에 굴종시키고 본인이 우위에 서기 위한 사회적인, 심지어는 정치적인 의지의 양상으로 발현된다. 

 “저들[사제들] 가운데도 영웅은 있다. 너무나도 많은 고통을 받아온 자도 많고. 그래서 저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하려 드는 것이다. 저들은 사악한 적들이다. 저들의 겸손보다 더 복수심에 불타고 있는 것도 없다.”(Z, 150 그리고 Gudrun von Tevenar, 2013: 286 참고)

 둘째, 비단 비겁한 복수를 꿈꾸는 자들뿐 아니라 니체의 이상적 인간상 중 하나인 ‘주권적 개인’ 또한 ‘그 자체로 탁월함’ 못지 않게 ‘타인보다 우월함’을 체화하고 있다. 이 우월성을 근거로 그에게는 다른 이들을 정당하게 지배할 권리가 부여된다.

 “실제로 약속할 수 있는 이 자유로워진 개체, 자유의지의 이러한 주인, 이 주권자—그가 약속을 할 수 없고 자기 자신을 보증할 수 없는 모든 사람들보다 자신이 얼마나 우월한지, 얼마나 큰 신뢰, 두려움과 외경심(그는 이 세 가지 모두를 야기할 만하다)을 불러일으키는지 어찌 모를 리 있겠는가? 그리고 이처럼 자신을 지배하는 것과 아울러 환경이나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나 의지가 좀 부족해 신뢰할 수 없는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는 것도 자신의 손에 맡겨져 있음을 어찌 모를 리 있겠는가?”(GM, 86-87, 강조는 원저자)

 셋째, 필자의 테제는 평등주의를 비판하는 니체의 정치사상과도 통한다. 니체에 따르면 평등주의는 권력자에 대한 위장된 복수심에 불과하다. 평등주의는 각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고양하고 계발할 의욕을 결과적으로 꺾는 데다가, 결과적인 여파와 무관하게 근본적으로 다른 이들보다 고귀한 삶을 영위하는 이들의 존재를 은폐한다. 만일 개인의 힘에의 의지의 고양이 타인과의 관계로부터 전적으로 독립적인 것이라면, 니체가 이토록 신랄하게 평등주의를 비판할 이유가 줄어들 것이다.

 “나는 이들 평등을 설교하는 자들과 섞이고 혼동되고 싶지가 않다. 정의가 내게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평등하지 않다”고. 평등해서도 안 된다! 내가 달리 말한다면, 위버멘쉬에 대한 나의 사랑은 어찌될 것인가?”(Z, 169, 강조는 원저자)

 힘에의 의지의 표현이 타인과의 우열관계를 고려하는 사회적 현상이라는 필자의 해석적 테제에 따라 ‘육체적 부작위’ 개념 속의 ‘육체성’은 ‘대타성’의 의미까지 함축하게 된다. 힘에의 의지의 표현(또는 표현되지 못함)은 언제나 ‘타인에게’ 힘에의 의지가 표현됨(또는 표현되지 못함)과 같다. 과거의 자신을 초극했는가뿐만 아니라 타인보다 고귀해질 수 있는가, 아니면 비천해지는가 역시 관건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나’와 베르트하이머는 모두, 학자의 탈을 쓰고 작은 이성을 이용해 머릿속으로 생각하기만 했을 뿐 큰 이성인 육체를 활용해 세계로 발을 내딛지 않았다. 행위를 통해 온몸으로 자신을 표현하지 않는 자는 예술가가 될 수 없다. “진정한 예술은 몸과 자기에서 출발한다. 몸으로써 사유하고 도취적인 체험을 하는 것, 몸 안의 힘에의 의지들의 카오스에 형식과 질서를 부여해 위대한 양식을 창조하는 것이 진정한 예술가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인 것이다(이상엽, 2018: 113). 두 인물은 그로써 직업인으로서의 예술가가 되는 일뿐 아니라 “인생의 예술가”가 되는 데도 실패했다(DU, 101). 진정한 철학자가 되는 데 실패했음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철학이 본질적으로 생리학이며, 그 본령이 인간의 힘에의 의지를 끌어올리는 데 있음을 간파한 진정한 철학자라면 타인들 앞에서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부작위로써 숨죽여놓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3. 결론: 추지 않은 자들

 본 글은 니체의 생리학, 구체적으로는 ‘데카당스’ 개념에 착안하여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설 ⟪몰락하는 자⟫의 인물들을 이해해보고자 하였다. 그 결과 데카당스 개념에 육체적 부작위 역시 그 증상으로서 포함될 수 있으며, 니체가 강조한 육체성은 대타성을 포함한다는 해석적 가설까지 제시할 수 있었다. 본론에서 전개한 필자의 분석에 따르면 결국 ‘몰락하는 자’는 한 명이 아니며 베르트하이머뿐 아니라 ‘나’까지도 겨냥하는 별칭이 된다. 두 인물 모두 그 어떤 입법도, 창조에도 실패했으므로 서론에서 상술한 진정한 철학의 개념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한 명은 염세주의자로서, 한 명은 아름다운 영혼으로서 삶의 기회들을 원활하게 소화해내는 데 실패하고 몰락했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본 글에서 제시된 ‘육체적 부작위’의 개념이 니체 철학 전반에서 중요한 ‘춤’의 개념과 대립되는 것으로서 설정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운동이 소화를 돕는다는 단순한 상식에서 출발한다면, 두 사람의 생리학적 불능, 구체적으로 말해 소화불량은 춤을 추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온다고 창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춤을 추어서 자신의 힘을 발산해내지 않는 자, 세상을 향해 아무것도 표출하지 않는 자는 결코 건강하다고 볼 수 없다. 본 글이 추후 니체의 생리학이 ‘춤’의 개념과도 긴밀히 연결되는 데 이바지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4. 참고문헌

1 문헌

프리드리히 니체(2007), 박찬국 옮김, ⟪비극의 탄생⟫, 아카넷.

   __________  (2004), 박찬국 옮김, ⟪아침놀⟫, 책세상.

   __________  (2018), 박찬국 옮김, ⟪선악의 저편(JGB)⟫, 아카넷.

   __________  (2020), 홍성광 옮김, ⟪도덕의 계보학(GM)⟫, 연암서가.

   __________  (2016), 이상엽 옮김, ⟪이 사람을 보라(EC)⟫, 지식을 만드는 지식.

   __________  (2002), 백승영 옮김, ⟪우상의 황혼⟫, 책세상.

   __________  (2007), 정동호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Z)⟫, 책세상.

토마스 베른하르트(2011), 박인원 옮김, ⟪몰락하는 자(DU)⟫, 문학동네.

 

2 문헌

권미연(2016), 니체 철학에서 자살 문제에 관한 고찰, 범한철학 제82집, pp.137-164.

신성엽(2016),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몰락하는 자⟫에 나타난 인물 구도와 죽음의 아이러니, 독일언어문학 제74집, pp.201-221.

이상범(2017), 니체의 개념 “위”와 “소화, 소화불량”의 철학적 의미에 대한 연구, 니체연구 제32집, pp.61-99.

이상범(2019), 데카당스에 대한 니체의 심리-생리학적 해명, 니체연구 제36집, pp.139-183.

이상엽(2018), 니체의 몸과 자기, 그리고 예술생리학, 현대유럽철학연구 제51집, pp.89-116.

Claudia Rosciglione(2013), A Non-Reductionist Physiologism: Nietzsche on Body, Mind and Consciousness, Prolegomena 12 (1), pp.43-60.

Jacqueline Scott(1998), Nietzsche and decadence: The revaluation of morality, Continental Philosophy Review 31, pp.59-78.

Gudrun von Tevenar(2013), Zarathustra, That Malicious Dionysian, The Oxford Handbook of Nietzsche(Ed. by Ken Gemes & John Richardson), Oxford University Press.

*신성엽(2016)은 필자의 베르트하이머 해석에 반해 베르트하이머가 늘 사람들 사이에, 세계로부터 고립되지 않은 채 존재하기를 원했던 인물이며, 기계처럼 피아노만 연주하다 매끈한 스타인웨이 앞에서 고꾸라진 글렌 굴드와 달리 적시의 의도된 죽음을 연출함으로써 자신만의 고유한 몰락을 실현한다는 해석을 펼친다. 베르트하이머는 글렌 굴드의 연주를 듣고 좌절하여 파멸한 것이 아니라, 거의 선천적으로 감지하고 있던 자신의 몰락에 글렌 굴드를 능동적으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베르트하이머는 자신의 죽음을 일종의 부조리극처럼 연출했으며 전적으로 예술적인 양상으로 통제했으며, 이는 충분히 니체의 입장에서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실존적 결단으로 이해될 수 있다.다. “베르트하이머는 생동하는 정신이 아닌, 죽음이라는 해묵은 주제를 통해 자기 존재를 파괴적으로 실현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과도하리만치 ‘과장된’ 의욕을 선보였다.” 하나의 작품이 이처럼 정반대되는 해석을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작품의 문학성을 극대화시켜준다. 신성엽,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몰락하는 자에 나타난 인물 구도와 죽음의 아이러니, 독일언어문학 제74집, 2016, p.210.

**물론 니체의 데카당스 개념이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을 수 있다. Scott(1998)은 니체가 데카당스에 대해 한결같이 배제적인 태도만 비춘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니체는 삶의 고통 자체보다 고통에 대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 인간에게 더욱 치명적인 실존적 위기이므로, 그 이유를 제시해주는 것이 철학자의 책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철학자가 삶에 특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순간, 그는 필연적으로 데카당이 되고 만다. 모든 가치는 특수한 관점으로부터만 부여되는 반면, 그 관점은 결코 객관적일 수 없기 때문, 즉 보편화되어 전체에 적용될 수 없으며 따라서 전체에 균열을 내기 때문이다. 이에 Scott(1998)은 ‘약한 데카당’과 ‘강한 데카당’이란 개념을 창안하여 니체가 자신을 후자에 귀속시키는 방향으로 모든 철학자를 괴롭힐 수밖에 없는 저 패러독스를 피하고자 했으리라는 주장을 펼친다. 약한 데카당은 세계 내의 고통을 인지할 줄 모르는 낙관주의자와, 고통을 인지했지만 그에 굴복해 삶을 부정하는 비관주의자로 나뉜다. 반면 강한 데카당은 “도덕의 문제를 인지”한 채, “자신이 어떤 유형의 가치를 창조하느냐에 따라” 데카당스가 치유될 수 있음을 알고 그 앎을 실천에 옮긴다(p.65). 그러나 필자는 Scott(1998)이 데카당스 개념을 지나치게 니체 자신에게 불리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그의 해석은 디오니소스적 가치의 의미마저 상대화시키지만 니체에게 그 가치들은 절대적으로 덕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애초에 자신은 ‘다른’ 철학자들과 같은 패러독스에 빠지지 않는다고 믿었을 확률이 높으며, 그 확신을 바탕으로 비로소 ⟪이 사람을 보라⟫에서 자신은 최초로 진리를 목도하고 소유한 반면 다른 철학자들은 허구에 머물렀다고 비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니체의 저작 어디서도 그가 자신의 주장을 의심하거나 상대화시키는 구절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도 상기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Scott(1998)의 해석은 모든 인간, 심지어는 차라투스트라마저 데카당으로—다만 ‘강한’ 데카당으로—만들어버린다(p.68). 이는 니체의 후기 저작들이 차라투스트라에 대해 보이는 일관적인 열광에 비추어보았을 때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므로 본 글에서 필자는 Scott(1998) 대신 이상범(2017)과 이상범(2019)의 해석을 따라 니체가 데카당스에 대해 균일한 비판을 가했다고 이해할 것이다. 데카당스 개념의 외연이 지나치게 넓지 않아야 니체의 비판이 보다 풍부한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은 물론이다. Jacqueline Scott(1998), Nietzsche and decadence: The revaluation of morality, Continental Philosophy Review 31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