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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임승유, <그 밖의 어떤 것>

임승유, ⟪그 밖의 어떤 것⟫, 현대문학, 2018.

 

 "조용하고 안전한 나만의 세계"(16)에 대한 갈망과, 그 세계를 이루는 사물들과의 친연성이 돋보이는 짧은 시집이었다.

 여러 시들에서 화자는 마치 "없는 생활"(31)과도 비슷한, 다만 "하루도 빼먹지 않고 모든 게 거기[여기] 있"(18)는 평온한 고립을 꿈꾼다. 계속해서 등장하는 시어인 '외투'는 파괴의 위험이 없어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세계의 내부와 외부를 구분 짓는 기표이다. 화자는 외투를 입었다가 다시 벗고, 내부로 재진입하면서, "더 갈 수도 있고 안 갈 수도 있"(32)는 선택권이 온전히 자신에게 있다는 데서 실존적 위안을 얻는다.

 불변하는 평온의 경계 내에서 화자는 사람보다도 사물을 더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나'가 일어나려면 먼저 나의 의자가 일어나려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는 식이다(24). 시인이 책 말미에 실린 에세이에서 조르지오 모란디의 작업실을 흠모한다고 고백한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모란디는 평생, 비현실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만큼 추상적인 배경에 놓여있는 그릇들을 배열만 바꾼 채 그리고 또 그렸기 때문이다. 모란디는 자신이 벼룩시장에서 사온 그릇들을 매우 아꼈고, 그것이 가만히 있다는 성질--주인을 떠나지 않는다는 성질--못지 않게 매일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는 사실도 잊지 않았다. 그릇들은 변하지 않고 반복해서 같은 자리에 머무르지만, 주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미묘한 차이들을 끊임없이 드러내 보인다. 이 차이를 감지하고 감상할 줄 아는 능력이 곧 평화를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삶이 됐든, 시가 됐든 그만두지 않으려면 살아가야 할 장소를 끊임없이 물색해야 한다. 세상 어디에도 그런 장소가 없다면 추상을 통해서라도 발생시켜야 한다. 지금부터 가게 될 장소가 지나온 과거의 단순 반복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 단순 반복 속에서, 혹은 단순 반복 속에서라야 살아진다면 장소는 무한히 반복됐으면 좋겠다."(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