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

울리히 하세•윌리엄 라지,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울리히 하세•윌리엄 라지, 최영석 옮김,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앨피, 2008.

 

 Routledge 출판사에서 나온 입문서 시리즈가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기에 세 권을 우선 사봤다. 하이데거와 리쾨르에 대한 책은 전공과 관련이 깊어 구매했지만 블랑쇼의 경우 순수한 흥미에 이끌린 결과였다. "철학을 한 문학가"(19)라는 수식이 내가 가진 꿈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블랑쇼는 단순히 투잡을 뛰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문학을 통해 철학을 수행하고자 했다. 마치 니체가 세계의 근저가 아름다움이라 보았듯이, 블랑쇼 역시--세계의 형이상학적 근원까지는 아니더라도--언어와 윤리, 정치 등의 굵직굵직한 주제들을 '문학' 또는 '문학적인 것(=중성적인 것=익명적인 것=탈-주체적인 것=죽어가는 경험을 선사하는 것)'의 개념으로 풀어쓰고 있었다.

 어떤 사상가에 대해 한 권의 입문서만 읽고 그를 조금은 꿰뚫어봤다고 자만하던 시절은 지났기에, 아주 피상적인 독후감이 될 테지만 적어도 중심적인 테제들은 요약해서 오래오래 간직하려 한다. 현상학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문학의 공간⟫도 언젠가는 읽어보고 싶다. 인생은 짧고 철학은 길다. 그런데 나는 왜 때문에 게을러...


1. 문학과 주체중심적 형이상학의 전복
 블랑쇼의 문학론은 기존의 문학이론들에 반대한다. 거칠게 말하면 그는 문학작품을 ①작가의 의도로도, ②독자의 해석으로도, ③텍스트 구조의 산물로도 보지 않고 ①, ②, ③으로의 환원을 거부하는 그 자체의 능동적인 생명력 즉 "끈질긴 개별성"(40)을 가지는 것으로 기술한다.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는 한, 모든 문학 텍스트는 단 하나의 해석이나 의미로 축소되지 않으려고 나름의 방식으로 저항한다." 그러므로 문학은 주체(들)이 자의적으로 통제하고 장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우리 자신의 '무의미성'이나 주체성의 한계를 묻는 질문으로서의 죽음이다. 글을 쓰는 것은 언어의 익명성에 노출되는 것이니, 인간 주체의 파멸과 소멸은 문학의 조건이다."(21) 여기서 익명성이란 '그것에 누구의 이름도 주인으로서 붙지 못함'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언어의 외재성과 중성성
 그는 기존의 문학이론에 반대할 뿐 아니라 문학에 대한 일률적 정의 일반에 반대하는 것 같다. "정의한다는 행위가 필요로 하는 일반화는 독서 경험의 독특성을 놓치게 만"들기 때문이다(37, 강조는 필자). 이 독특성은 문학에서 언어가 단순히 현실에 대한 재현이나 정보 전달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낯설게, 다른 맥락으로 일반화될 수 없는 방식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발생한다. 헤겔을 따라 블랑쇼는 언어의 본질을 부정성으로 받아들이는데, 언어는 실재를 부정하고 그 자리에 실재에 대한 관념을 위치시킨다. 여기서 더 나아가 문학은 여러 개별 대상들을 추상화해 (그 개별성들에 대한 직접 경험을 폐기하는 대신) 동시에 지칭할 수 있게 해주는 관념을 부정하므로, "말하자면 문학은 이중 부재이다."(63) 이중 부재로서의 문학은 부정성으로서의 언어의 본질을 일상언어보다 훨씬 잘 보여준다. 이중의 부정 끝에는 낱말의 물질적인 현존만이 남는다. 낱말의 "물질성과 비실재성"이 곧 "문학이 이해에 저항하는 근원"이다(67). 언어는 주체의 관념 바깥에 있기에 중성적이고 외재적인 무언가다.

3. 철학적 죽음 개념에 대한 반대
 블랑쇼는 헤겔과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이 주체로 하여금 세계를 지배하게 해주는 데 일조한다고 비판한다. 헤겔에게 사물에 대한 의식적 부정으로서의 죽음은 창조를 위한 밑거름이다. 또 하이데거에게는 죽음이 개별자에게 본래적인 실존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러나 블랑쇼가 생각하기에 죽음은, 정확히 말해 '죽어가는 경험'은 주체적 삶에 봉사하기는커녕 극도로 수동적이고 공포스러운, 주체를 무의미한 익명의 부재자로 전락시키는 체험이다. 이 체험은 독서를 통해 이루어지며 창작을 추동한다. 문학은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으며 그 의미의 근거를 누군가의 심중에서 찾지 않는 언어"를 통해 성립하기 때문이다(106). 문학언어는 일상적인 개념화 이전의 실재를 언어화하고자 한다. 그로써 역설적이게도 침묵을 향해 다가간다.
Q. 하이데거가 정말 죽음의 수동성을 간과했는지 의심스럽다. 그에게 죽음으로의 선구를 가능케 하는 불안에 대한 체험은 어디까지나 '엄습'해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죽음은 하이데거의 생각과 달리 공동체적인 경험이라는 주장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4. 타자에 대한 동일화를 반대하는 윤리와 정치
 블랑쇼는 레비나스의 영향을 받아, 타자를 자아--자아의 세계관, 자아의 목적 달성을 위한 유용한 수단 등--에 동일화시키는 대신 타자를 존재하는 그대로 수동적으로 체험할 것을 명하는 윤리학을 펼친다. 이는 문학언어가 그 외재성으로 말미암아 타자성을 나타내보인다는 블랑쇼의 문학론과 일관적이다. 나아가 그는 타자가 익숙한 세계에 가져다주는 균열을 유지하는 것이 곧 정치참여라고 말하며, 이방인에 대한 환대를 앞세우는 정치사상을 내놓는다. 그는 모든 시민을 국가의 일원으로 획일화시키는 파시즘에도, 진정으로 정치적인 것을 소멸시키고 정치적 아젠다를 경제에 대한 것만으로 축소시키며 공동체 내 개인들을 원자화하는 자유민주주의에도 반대한다. 대신 전통을 끊임없이 재해석해온 유대교로부터 영감을 받아 '영구한 혁명', 즉 기성 질서에 대한 끊임없는 전복이자 균열 내기로서의 공산주의를 꿈꾼다. "사회의 지배적 정체성이 형성되지 못하도록 계속 방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209). (흥미로운 것은 이 과정에서 블랑쇼가 '지구촌'의 개념을 거부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 개념이 이방인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일갈한다.)

 Q. 그의 정치사상이 기존 질서에 대한 반대를 위한 반대로 전락할 가능성은 없는가? 아무런 통합의 이념 없이 균열을 형식적으로 유지하기만 하면 된다는 사상으로 해석될 위험이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