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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알라 알아스와니, <야쿠비얀 빌딩>

알라 알아스와니, 김능우 옮김, ⟪야쿠비얀 빌딩⟫, 을유문화사, 2011

 

 한참 소설가 김영하의 팟캐스트에 빠져 살던 때가 있었다. 그가 했던 말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정확한 워드 초이스까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좋은 소설에는 오히려 밑줄을 칠 곳이 없고 밑줄을 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쳐야 하게 된다'는 것이 골자였다. 표현이 아름다운 탓 또는 충격적인 탓으로 두드러져서 흐름을 끊는 부분들이 산재해있기보다, 그리하여 밑줄을 통해 해당 부분을 전체 흐름으로부터 절단시킬 수 있기보다 이야기 자체가 통째로 하나의 유기체로서 온전한 소설이 곧 좋은 소설이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알라 알아스와니의 ⟪야쿠비얀 빌딩⟫이 내게는 바로 그런 소설이었다. 이 소설에는 화려한 비유도, 일상을 뒤집는 매혹적인 환상도 없다. 다만 수많은 인물들이 저마다 자신의 특수한 관점에서 상호주관적인 삶을 대면하는 움직임의 총체가 타고난 이야기꾼 알라 알아스와니의 목소리를 빌려 포착돼있을 뿐이다. 작가 알라 알아스와니는 설득의 천재다. 그의 인물들은 너무나 생생한 모습으로 종이와 독자 사이에 살아숨쉬며, 거짓말을 하든 살인을 하든 생계를 위해 성을 판매해야 하는 궁지에 내몰리든 그 어떤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개연적으로, 다시 말해 설득력 있게 행동한다. 바꿔 말해 그 어떤 사건도 갑작스럽지 않다는 것이 이 소설의 미덕이다. 이야기의 흐름은 단 한 번도 끊기지 않는다. 나는 펜을 들고 소설을 읽는 게 습관인 사람인데도 실제로 이 소설에 밑줄을 몇 번 긋지 못했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안팎으로 꿰메어진, 이집트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다. 알라 알아스와니는 덤덤한 목소리로 감정에 호소하지도, 어떤 논증을 밀어붙이지도 않고 차분한 어조로만 말을 이어가지만 그 안에는 빈부격차와 고위층 인사의 부패, 사법질서의 붕괴, 성폭력과 같은 묵직한 주제들이 소설이라는 장르만이 성취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핍진하게 재현되어 있다. 예를 들어 돈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난, 그러나 실종된 남편을 잊지 못한 가난한 여인 수아드와 지역의 명망가 핫즈 앗잠의 관계는 이 모든 문제들을 한 번에 체현한다. 수아드는 아들을 키우기 위해 핫즈 앗잠을 사랑하는 척하는데, 급기야 핫즈 앗잠에 의해 사회적 삶을 차단 당하고 그의 아파트에 갇힌 채 그에게 성을 제공하는 것만을 일과로 삼게 된다. 핫즈 앗잠은 위선적이고도 실질적인 수아드의 보살핌을 받는 가운데 세력가 카말 알풀리에게 청탁을 해 지역의 인기 있는 무소속 출마자를 제치고 압도적인 표수로 국회의원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수아드가 핫즈 앗잠의 아이를 가지게 되자--그녀는 풍족한 배경에서 자랄 뱃속의 아기를 통해 새 삶의 희망을 품는다--핫즈 앗잠은 당사자가 원치 않는 임신중절을 강요하고, 결국은 폭력배들을 동원해 그녀를 마취시킨 뒤 마찬가지로 매수한 의사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달성한다. 그의 자기중심적 행보에 벌이라도 내려지듯 핫즈 앗잠은 자신이 새로 개척한 사업 수익의 4분의 1을 얼굴도 모르는 '윗선'에 납부해야 한다는 소식을 카말 알풀리에게서 듣게 된다. 분노한 핫즈 앗잠은 납부 상대자의 대저택을 찾아가지만, 얼굴도 만나보지 못한 채 수화기 너머의 위압적인 목소리만으로 만일 계약을 거부할 경우 그의 과거 마약 거래 정황을 폭로해 그의 삶을 망치겠다는 협박을 받는다. 자부심을 넘어 자만에 빠져있던 그 역시 부패를 통해 공고화된 위계질서 속 중간자일 뿐, 최고의 포식자는 따로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밀즈는 ⟪사회학적 상상력⟫에서 개인이란 역사와 개인사의 교차점 자체라고 말한 바 있다고 기억한다('an individual is the intersection of history and biography'였던 것 같다). ⟪야쿠비얀 빌딩⟫의 모든 인물들이 저마다 하나의, 이와 같은 교차점임은 밀즈의 명언을 모르더라도 이야기에 몰입한 자라면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 세속화된 사회와 종교 근본주의 사이의 갈등을 그려내며 이별하는 부사이나 알사이드와 타하 알샤들리의 이야기 역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하팀 라쉬드와 압두 라부흐의, 비극으로 치달은 사랑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압두의 아내 하디야는 아기의 갑작스러운 병사가 압두의 동성애에 대한 신의 벌이었다고 생각하고, 압두 역시 그녀에 설득되고 만다. 하팀은 끊임없이 압두에게 우리는 그저 사랑한 사이였을 뿐임을 강조하지만 종교적 죄의식에 시달리는 압두에게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생활비를 대지 않겠다는 하팀의 모욕과 욕설 섞인 협박에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하팀을 살해하고 만다.

 사실 이 소설은 그 자체로 온전해서--말라크와 아바스카룬의 이야기가 끝맺어지지 않았다는 찜찜함은 있지만--내가 이에 더할 만한 바는 더 이상 없는 것 같다. (흥분한 나머지 이미 장황한 스포일러를 너무 많이 저질렀다.) 정말이지 수려하고 매끄러운 직역에 감탄했다는 것, 그리고 무슬림인 작가는 동성애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전혀 내비치지 않았으나 출판사 측에서 오히려 표지 뒷부분의 문구를 통해 하팀 라쉬드를 "동성애에 빠진 신문사 편집장"으로 소개하면서 이를 이집트 사회의 "썩은 이" 중 하나로 묘사한 사실이 경멸스러웠다는 것 정도만 언급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