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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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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와 줄리(2022.12) 배수아,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테오리아, 2022. 짧은 소설로 감상을 갈음한다. 라파와 줄리 라파는 빈에 사는 스무 살의 소년으로, 키가 훤칠하고 몸은 아주 깡말랐다. 그는 레몬색 반팔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거리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여 버는 돈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관광객들이 빈에 대해 품어주는 환상의 덕에 그의 벌이는 불안정할 뿐 아주 나쁘지는 않은 편이다. 그의 특기는 아마추어답지 않게 깔끔한 더블스톱으로, 그가 두 현을 동시에 켜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지갑에서 하나둘씩 동전을 꺼내보인다. 동전이 짤랑거리는 소리는 라파에게 반가운 반주이다. 라파의 버스킹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12시까지, 오후에는 15시부터 17시까지 도시의 가장 더운 시간을 피해 진행된다. 12시부터 15시 사이에 라파..
프란츠 카프카, <꿈> 발췌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배수아,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배수아,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문학동네, 2021(고려원, 1995의 재출간). "대신에 "난 외로워서 상처를 입었거든" 이렇게 언젠가 말하였다. "나는 애정 속에서 질식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어.""('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49) 배수아의 문학세계가 어떤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잉태되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단편집이다. 등단작인 '1988년의 어두운 방'이 실려있다. 작가의 시선은 일관적으로 도시의 여자들에게 향하며, 그들에 대해 일종의 유형학을 수행한다. 도시의 여자들은 결혼을 했거나, 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로 나뉜다. 결혼을 한 여자들은 백이면 백, 생명력을 잃는다. "여전히 이태리제 청바지 광고 모델처럼 생기발랄하고 만족하는 듯한 미소를 하고 있어도 옛날의 오래된 사진관에서 빛나는..
배수아, <부주의한 사랑> 배수아, ⟪부주의한 사랑⟫, 문학동네, 1996. 배수아-유니버스의 첫 번째 장편소설. 제목대로 두 세대에 걸쳐진 부주의한 사랑들을 다루는데, 다만 장소가 시골에서 도시로 바뀔 뿐이다. 물론 이것은 작은 차이가 아니다. 왜냐하면 "도시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바람이 어느 편에서 불어오거나 아니면 아버지를 모르는 아이를 낳는다거나 지나간 일들이 꿈속에서 보이는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기 때문이다(112). (도시적 삶에 대한 문제적 시선은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2003)⟫에서 발전된다.) ⟪뱀과 물(2018)⟫에 실린 단편소설 '1972'에서 어린시절은 존재하지 않으며, 기억은 망상일 뿐이라고 단언했던 배수아였기에 소설의 전반부가 아기의 시선에서 언니 연연, 사촌들의 어린시절과 엄마 모..
아글라야 페터라니,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 아글라야 페터라니, 배수아 옮김, ⟪아이는 왜 폴렌타 속에서 끓는가(Warum das Kind in der Polenta Kocht)⟫, 워크룸프레스, 2021. 아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1인칭 소설을 쓴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아이는 많은 것을 경험해본 적이 없지만 많은 것을 경험해본 적이 있고, 살아가는 일에 대해 무덤덤한 듯 굴다가도 문득 생의 고통을 어른보다도 예민하게 느껴버린다. 가족을 증오하는 동시에 세상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고, 섹스를 모르지만 또 알고 만다. 아이가 모르는 것과 아는 것, 모르지만 아는 것, 알지만 모르는 것을 자연스러운 언어 속에 녹여내야 한다. 이런 작업은 인위적인 공을 들인다고 해서 밀도와 완성도가 높아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경험이 필요하다. 어린시절..
배수아,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배수아,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난다, 2015. 배수아의 장편소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페이지가 '알타이의 목동처럼'이란 표현을 포함한다는 이유만으로 이 책을 구매했을 때, 나는 내가 이전엔 단 한 번도 여행기를 사서 읽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는 전형적인 여행기가 아닌 것으로 치자.) 직접 여행을 가기 전 실용적인 정보가 담긴 가이드북은 몇 권 구매했었지만, 일반적으로 타인이 여행에 가서 무엇을 느끼는지에 대해 별다른 관심 없이 살아왔던 것 같다. 다만 이번에는 그 타인이 내가 동경하는 작가였을 뿐이다. 그 동경을 계기로 스스로에게 묻게 됐다. 좋은 여행기의 기준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매우 애매하고 역설적인 성격의 것이라고 믿는다. 좋은 여행기는 독자..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G.H.에 따른 수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배수아 옮김, ⟪G.H.에 따른 수난⟫, 봄날의 책, 2020 '장편은 서사, 단편은 인물'을 무의식중에 공식처럼 생각하며 지냈던 것 같다. 손보미 소설가의 단편이 서사와 서스펜스로 넘쳐나고, 오정희 소설가의 (하나뿐이었던) 장편이 인물을 중심으로 돌아간 것을 어쩌면 의도적으로 망각한 채로. 그런데 ⟪G.H.에 따른 수난⟫은 저 공식을 파괴하는 것을 넘어 처음부터 없었던 것마냥 무화시킨다. ⟪G.H.에 따른 수난⟫에는 서사랄 것이 없다. 가정부가 자신 몰래 치운, 자기 집에 속한 방에서 바퀴벌레와 마주하는 것, 그 바퀴벌레를 죽이는 것, 그리고 벌레의 사체에서 배어나온 하얀 체액을 섭취하는 것이 240쪽 남짓 되는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전부다. 그렇다고 해서 인물의 성격이나 ..
토마스 베른하르트,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배수아 옮김, , 필로소픽, 2014 2018년 여름에 를 우연히 읽은 이후 1년에 1번씩은 베른하르트의 소설을 찾게 된다. 작년엔 빈을 여행하면서 일부러 을 가져갔고(여행 내내 나를 행복하게 해준 예술가들에 대한 냉소로 가득찬 책이었다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올해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 중 한 명인 배수아가 옮긴 를 종강하자마자 읽었다. 베른하르트의 소설들은 분위기나 문제의식, 문체 면에서 서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비슷하다. 사태의 어둠만을 보는 극단적으로 절망적인 관점이 모든 작품을 관통하며, 실존하는 인물 또는 집단에 대해 어떻게 이런 깡이 있을 수 있지 싶은 수준으로 그 정신적 타락을 비판하고, 문단의 구분도 서사도 없이 사건의 발생 순서를 왔다갔다 하며 당당하게 헤매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