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350) 썸네일형 리스트형 Antwerp 루프트 교수님과의 면담, 그로만 교수님 수업에서의 발표를 모두 마치고 가뿐해진 마음으로 떠났다. 스스로에게 보상을 준다는 생각을 정말 오랜만에 했는데, 자기연민처럼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무척 즐거운 1박 2일이었다. 혼자였지만 많이 웃었고, 어쩌면 혼자였기 때문에 많이 웃을 수 있었다. 타지살이를 하면서 놀라운 점은 내가 외로움을 많이 타는 편이고, 지금도 조금은 쓸쓸하게 느끼지만 그런 것치고는 혼자서 상당히 잘 논다는 사실이다.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며칠을 보낸 뒤, 새삼스럽게 오, 며칠동안 입을 안 열고도 그냥저냥 지냈네, 레벨업,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게 된다. 기차를 타고 산 하나 없는 플랑드르의 평원을 지나는 중, 바로 앞에 앉은 장발의 남자가 너무 험악하게 생겨서 쫄았다. 그렇게 움츠린.. 20250225 기대 속에 사슬이 시끄러운 알람 시계를 장만했다. 꺼버리고 다시 자는 날도 있지만, 옛날보다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게 됐다. 밤이 늦으면 자야 한다는 감각. 오전에도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감각. 그리고 햇살은 생각보다 오래 지상에 머무른다는 감각 등을 익히고 있다. 피아노를 치러 집 뒷쪽의 작은 공터를 지나는데, 공터의 가생이에 흐르는 개울 같은 것 위로 나무들이 무성했다. 어떤 나무 하나가 지나치게 녹색이어서,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졌다. 아직 발명되기 전의 공업 용품처럼 빳빳하고 원색적으로 초록인 이파리 위로 햇볕이 왁스처럼 흘러내렸다. 나는 초록의 원형이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네가 아는 모든 초록의 원형. 자연에 속해 있지 않은 것만 같은 색이었다. 그로부터 묘한 생명력을 느꼈다. 정확하게는 생명력.. 부서진 파르테논은 그녀 자신이다(2025.2.17)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있지 않다. 쥐는 있다. 티끌은 있다. 유령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 유령은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신도 있다. 신조차 있다. 너도 있다. 너는 당연히 있다. 너를 내가 말하기 때문이다. 그치만 내가 입을 열기 전에도 너는 이미 있다. 너는 있었고, 있으며,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있지 않다. 없는 것은 아니다. 있지 않을 뿐이다. 없지는 않다. 없다면, 아예 없다면 나는 너를, 너는 나를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있지 않다. 있기는 너무 어렵다. 너는 쉽게 있는다. 사람들은 쉽게 있다. 대부분 그렇다. 사람이란 개념도, 조금 어렵게이기는 하지만, 있다. 나만 있지 않다. 어떻게 하면 있을 수 있을까? 너에게 묻는다. 어떻게 하면 있을 수 있어? 너는 .. 2025년 1월의 독서 1. Nikhil Krishnan, A Terribly Serious Adventure: Philosophy and War at Oxford 1900-60, Random House, 2023. 오늘날 '분석철학'이라 불리는 전통을 개시하고 탄탄하게 정비한 철학자들--Moore, Wittgenstein, Ayer, Ryle, Austin, Anscombe, (arguably) Murdoch, Williams, Strawson etc.--이 몸담았던 옥스포드 대학에서 20세기 전반에 철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개괄하는 역사서이다. 저자 자신이 전공자여서 그런지 철학적인 내용도 상당히 깊이 있고, 무엇보다 끝장나게 재미있다. 헤겔 식 관념론과 불가해한 형이상학에 맞서, 각 철학적 개념이 도대체 무엇을 의.. 20250206 백수의 마음 글을 쓰기 위해 애써 우울한 척을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바깥세상의 부산스러움과, 집 안에서 이런저런 영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싸구려 웃음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야만 글을 쓸 수가 있고, 그런 탈주는 아무리 상쾌할지언정 약간의 헛헛한 기분을 남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때의 공허란 불행과 전혀 다르다. 애초에 불행과 우울 사이에는 별다른 인과관계가 없다. 슬픔과 우울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나는 가뿐하게 우울하며, 우울하게 가뿐하다. 덕분에 글을 끼적이기 시작할 수 있었다. '인디펜던트 리서처'라 쓰고 백수라고 읽는다. 6개월 차. 오늘은 오후 네 시에 일어났고, 정신적으로는 이미 약혼식까지 올린 애인과 한 시간 정도 통화를 했다. 애인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복통을 호소했는데, 내가 해줄 수 있는 .. 우다영,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 우다영, ⟪그러나 누군가는 더 검은 밤을 원한다⟫, 문학과지성사, 2023. 우다영의 세 번째 소설집에 실린 다섯 편의 글은 모두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인간성의 본질, 혹은 (본질주의의 언어가 부담스럽다면) 조건이라고 불릴 수 있는 그것은 그 개념상 선험적으로 성립하는 것으로서, 한낱 경험적인 변화에 불과한 문명의 발달이나 지구적 사건에 의해 좌우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하지만 SF라는 장르는 인간적 삶의 선험적 구조를 극적으로 시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한다. 여기서 '극적으로'란, 인간의 조건 가운데 하나를 과감히 삭제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에서는 자아의 단일성을, 에서는 한 번의 탄생과 한 번의 죽음으로써 규정되는 삶의 유한성을, 에서는 미래의 불확실성을, 에서는 .. 사뮈엘 베케트, <머피(Murphy)> 사뮈엘 베케트, 이예원 옮김, ⟪머피(Murphy)⟫, 워크룸프레스, 2020. 인간이기를 멈추고자 발버둥치는 인간의 실존적 실패를 기록한 소설. 1935-6년, 유럽의 전간기에 쓰인 ⟪머피⟫는 기이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머피가 창밖으로 미미하게 들려오는 속세의 소리를 경멸하면서, 제 몸을 목도리 일곱 장으로 흔들의자에 스스로 결박한 채 휴식을 취하고 있다. 삶도 죽음도 아닌 이 부동의 상태가 머피에게만큼은 지복이다. 의지도, 행위도 없고 무엇보다 타인이 없다. 유아론자 머피는 이처럼 부산스러운 세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려 하지만, 베케트는 첫 문단부터 "자유인 양"이라는 미묘한 표현을 통해 벌써부터 머피의 실패를 암시하고 있다(9). 머피의 스승 역시 심장을 자의로 멈출 줄 아는 니어리라는 도인이다.. 7: 엑스터시론 성악과를 나온 H 언니를 위해 바빌로프(카치니)의 성악곡을 반주하게 되었다. 구성요소가 좀 더 많고 화려한, 그러니까 연주자가 더 돋보일 수 있는 그리그의 곡을 치는 데 시간을 보내다 그래도 언니에게 폐가 되지 않기 위해 부랴부랴 악보를 바꿨다. 그렇게 정말 간단한 화음을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얼굴에 열이 올랐다. 누군가에게는 신파로 들릴 수 있는 세련미 없는 화음들 위로 ‘아베 마리아’라는 단일한 가사가 덧입혀 들리는 가운데 갑자기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찬송가들이 흔히 억지스럽게 전달하는 슬픔이나 두려움과는 무관했다. 지상의 시련에 슬퍼하고, 그 이후에 펼쳐질 지옥에 대한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면 여전히 ‘나’의 쾌고가 중요해야 한다. 그 ‘나’가 물질성을 보존하든, 아니면 소위.. 이전 1 2 3 4 5 ··· 44 다음 목록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