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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임성순, <우로보로스> 그리고 포스트휴머니즘

임성순, ⟪우로보로스⟫, 민음사, 2018

기계-인간과 인간-기계 사이

“지도야말로 지배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O, 126).”

1. 들어가며
 임성순의 장편소설 『우로보로스(2018, 민음사)』는 인공지능과 가상현실이 인간의 삶 속 깊숙이 침투해있는 시대를 그린다. 작중에서 이 시대는 인공지능의 능력이 인간의 능력을 추월한 ‘특이점’ 이후의 세상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또한 인간이 만물의 운명을 좌우하는 인류세(anthropocene)로부터 벗어난 그 이후의 세계이기도 하다. 더 구체적으로 서사를 이끄는 주요 행위자들이 인간이 아니거나, 자신의 인간됨을 부끄러워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휴머니즘 담론으로는 이 탈-인류세(post-anthropocene)의 세계를 읽어낼 수 없다. 이제 우리에게는 이 문자 그대로의 신세계를 볼 수 있게 해주는 새로운 눈이 필요하다. 단순히 어느 가상의 서사를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실질적인 미래를 고민하기 위해서 그렇다. 알파고의 활약상, 그리고 도심 곳곳에 생겨난 VR체험관을 미래사회의 징후들로 여기는 사람이라면 『우로보로스』 속의 사회가 우리의 현실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사회라는 위기의식을 느낄 것이다. 
 그리하여 본 글은 탈-인류세를 넘어 탈-인간(post-human) 시대를 예지하는 로지 브라이도티의 『The Posthuman(2013, Polity Press, 이하 PH)』 속 포스트휴머니즘에 입각해 『우로보로스』를 읽고자 한다. 브라이도티는 기존의 휴머니즘 담론이 ‘인간’을 너무나 협소하게 정의했으며, 그에 따라 인간이 아닌 것으로 정의되는 존재자들을 타자화함으로써 인간의 특권과 타자들의 착취를 정당화한다고 비판한다. 그 정당화의 핵심에는 외부 세계에 대해 초월적이고, 물질이나 신체로부터 분리된 전통 철학의 주체성 개념이 있다. 진화된 자본주의(advanced capitalism)의 총구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를 겨누는 오늘날, 이와 같은 주체성 개념은 타자화의 위험에 여전히 너무 쉽게 빠질 뿐 아니라 생명의 상품화 일반을 막지 못한다. 따라서 인류세, 혹은 그 너머의 시대에는 관계에 내재적이고 물질적인, 그로써 모두의 생명을 평등하게 존중할 수 있는 주체성 개념이 필요하다는 것이 브라이도티의 논지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폭력적인 진화에 대한 반감과 유물론적인 주체 정의는 『우로보로스』의 작중 분위기를 지배하는 전제들이기도 하다. 따라서 포스트휴머니즘을 통해 『우로보로스』 속 미래를 통찰하고자 하는 우리의 시도는 적절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선 소설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개괄한 뒤, 포스트휴머니즘의 도움을 빌어 『우로보로스(이하 O)』를 새로이 독해해볼 것이다. 첫째로 가상현실과 안드로이드의 개발이 인간의 존재 양식에 불러오는 변화, 둘째로 진화된 자본주의 및 심화된 소득불평등의 문제, 셋째로는 인공지능의 행위자성을 중심으로 분석을 전개하려 한다. 마지막으로는 소설의 제목이 가진 의미를 밝히고자 시도하고, 이 소설이 탈-인간 시대에 던지는 통찰들을 종합해볼 것이다. 이로써 가상현실에 중독된 ‘기계-인간’과 자신의 창조주 인간을 뛰어넘은 ‘인간-기계’ 사이의 상생 또는 공멸의 미래를 엿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2. 줄거리
 『우로보로스』는 미래를 그리기에 앞서 어느 중세 수도사의 일상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배경 속에서 이 수도사는 수도원의 낡은 설비를 점검하고, 도서관의 글들을 그 의미와 무관한 논리 기호로 환원하는 일을 소명으로 삼는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묵묵히 수행하고자 하지만 미혹에 빠지기 쉬운 ‘인간으로서’ 이 단조로운 업무의 의의를 의심하게 된다. 수도사는 업무의 기원을 찾아 수도원에 보관되어있는 가장 첫 번째 기록을 펼쳐보는데, 그곳에 적혀있는 것은 ‘1. write(“Hello, World!”)’라는 프로그래밍 명령어이다(O, 49). 이 수도사의 정체는 이후 인간 뇌 지도를 만들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희생되고 있는 인공지능, 즉 일종의 “디지털 프롤레타리아트(PH, 90)”임이 밝혀진다.
 잠시 배경이 바뀌어 어느 여성 과학자의 양자역학 강의가 이어진 뒤, 시점은 가상현실에 심취해 사는 또 다른 여성에게로 옮겨간다. 챕터의 제목을 따 우리는 그녀를 ‘아톰’이라 부르기로 한다. 아톰은 ‘닭장’이라 불리는 공공임대주택에 거주하며 가상현실 속에서 르네상스 시대 영주의 아내로 사는 것을 유일한 삶의 낙으로 삼는다. 그녀는 가상현실의 콘텐츠를 업데이트하기 위해 어느 사설 정신병원의 카운터 업무를 맡고 있지만 본인부터 우울증 및 공황장애에 시달릴 뿐 아니라, 아무런 기복 없이 동일한 감정노동을 수행하는 안드로이드들에게 열등감을 느낀다. 그녀의 꿈은 얼른 노동수당을 받아낸 뒤 직장을 그만두고 가상현실 속에서 새 집을 마련하는 일이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이 그녀의 정신병원으로 태블릿에 알아볼 수 없는 메시지들을 미친 듯이 적어대는 한 남자를 데려온다. 그를 긴급 입원시키는 과정에서 아톰은 남자를 다시 데려가려는 사람--‘남색 정장’--과 대치하게 되는데, 그녀가 남자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그가 인공지능임을 알아차리자 남색 정장은 그녀를 기절시킨다. 이후 아톰은 뇌 활동을 조작당해 기억을 잃고 모든 일이 현실이 아닌 가상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착각하게 된다.
 시점은 또 한 번, 남색 정장이 지키고자 한 인공지능이 대중에게는 비밀로 개발되고 있는 회사의 과학자--앞서 양자역학을 가르치던 여자--에게로 옮겨간다. 회사는 현재 빅뱅 초기 단계의 우주를 재현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프로젝트 실현 직전에조차 여자는 육아의 고통에 시달린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인공자궁을 통하지 않고 자연출산에 성공한 그녀는 돌봄 노동에 뛰어난 안드로이드에게 육아를 맡기는 대신 스스로 아이를 키워보려고 노력한다. 한편 그녀와 함께 일하는 주임은 강인공지능 개발의 총 지휘를 맡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프로젝트가 실패하면서 폭발과 함께 연구소가 붕괴되고, 살아남은 여자는 오직 아이를 다시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출구를 찾아 나선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이 폭발을 몰래 계획한 것이 주임임을, 그리고 그 주임 자신이 강인공지능이자 빅뱅 프로젝트를 처음 제안한 행위자임을 알게 된다. 주임에게서 연구소 자체가 이미 하나의 닫힌, 새로운 우주가 되어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녀는 가상현실 속에서나마 딸과 함께하기를 선택한다.
 글의 초입에 인용한 글귀는 빅뱅 프로젝트가 소개되기 직전에 삽입된, 「지도에 대한 열정」 챕터에 등장한다. 아마 디지털 프롤레타리아트들이 일하는 가상의 수도원에 보관 중인 필사본일 이 챕터는 소설 전체에서 가장 해석이 어렵지만 주제의식을 가늠하는 열쇠가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거대한 제국을 그려내되 축척이 1:1인 지도를 만들고자 하는 신하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우로보로스』는 저자의 뛰어난 스토리텔링 덕에 단숨에 읽히지만, 즐겁게만 읽고 덮을 글은 결코 아니다. 서론에서 밝혔다시피 이 소설은--아렌트를 패러디하자면--‘탈-인간의 조건’ 여럿을 예지하고 있다. 이는 한국 문학이 당장 가시적인 문제뿐 아니라 미래의 사회로까지 그 시선을 겨누고 있음을 증거한다. 이제 우선 서론에서 제시된 분석 순서에 따라, 소설 속에서 가상현실과 안드로이드의 개발이 인간의 존재 양식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대해 살펴보자.

3. 기계-인간의 좌절과 꿈

 “어쩌면 가상현실 속 얼굴이라 믿었던 아름다운 얼굴이 진짜는 아닐까. 현실의 나는 좀 더 멋지고 이건 그저 가장 어려운 난이도로 설정한 불행한 가상일뿐이야(O, 115).”

 마인드-헬멧을 머리에 쓰고, 전극을 척추에 붙이면 누구나 손쉽게 가상현실의 세계에 접속할 수 있다. 이곳은 마치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속 환각제 소마(soma)와 그 효과가 비견될 만한,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공간이다. 특히 ‘이계인(異界人)’이라 불리는 계층의 사람들은 제 몸에 소변관과 식사용 튜브를 꽂은 채 가상현실에 몰두하며, 오직 정부의 기본수당에 의존해 생계를 유지한다. 마찬가지로 가상현실에 빠져 사는 인물인 아톰은 자신이 이계인과 달리 그래도 직장을 가졌다는 점에서 긍지를 가지려 한다. 그러나 그녀도 알고 있다시피 사실 노동은 “불쾌한 [...] 존재론적 모욕(O, 82)”이 된지 오래다.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일은 몇 안 되는 천재적 인간들이나 안드로이드에게 빼앗겼을 뿐 아니라, 간단한 일에서조차 안드로이드보다 인간이 서툴러졌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는 안드로이드가 인간보다 완벽에 더욱 가까워졌다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사회의 하층민들은 자신이 열등한 종이 되어버린 현실로부터 도피해 하나뿐인 낙이자, 그들에게는 현실 자체나 다름없는 가상현실에 영원히 접속할 수 있기만을 꿈꾼다.
 이처럼 인간이기 이전에 일종의 ‘기계-인간’이 되어있는 이들의 삶을 우리는 어떤 존재 양식을 통해 파악해야 하는가? 당장 그들의 주체성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기존 휴머니즘 담론의 로고스 중심적이고 초월적인 주체 정의는 이계인들을 인간의 범주로부터 쫓아내고 타자화할 위험이 다분하다. 그에 거슬러 우리는 우선 이계인들이 비록 비극적인 양상으로이긴 하나, 인간 자아의 관계내재성과 존재의 물질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다. 확실히 그들에게 자아는 언제나 다른 무엇과 연결된 자아이다. 가상현실 기계 속에 들어가 있는 이계인과, 현실에서 파리한 안색으로 돌아다니는 이계인을 절대적으로 동일한 개인으로 묶어주는 어떤 초월적 자아란 실제로 없다는 뜻이다. 이는 설령 기억이나 자의식이 자아의 동일성을 어느 수준까지는 보장해준다 해도 마찬가지다. 기억과 자의식 역시 그와 같은 소위 장치들과의 연결 속에서만 작동하는데, 이는 그 장치들과, 그에 연결된 인간 자아가 언제나 서로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들뢰즈의 개념을 빌려오자면--함께 하나의 단위로서 기능(co-function)하기 때문이다. 브라이도티 역시 전통철학이 강조해온 인간 주체의 초월성이 자신과 초월적인 것 사이, 나아가 동일한 것과 타자적인 것 사이에 벽을 형성한다며 인간 주체는 언제나 관계 속에 내재해있음을 천명한다. 그 결과 인간은 단순하고 독립적이기보다는 “더욱 복잡하고 관계적인 주체a more complex and relational subject(PH, 26)”로 이해된다. 이와 같은 자아론이 비단 이계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존재는 기존의 자아론이 가진 한계를 드러내는 데 특히 효과적이다. 미래에 가까워질수록 사회는 우리로 하여금 전통철학의 초월적인 주체성보다 포스트휴머니즘의 관계내재적이고 물질적인 주체성에 더 친숙해지도록 추동한다.
 나아가 기계에 접속해있는 이들의 정신은 필연적으로 물질 속의 정신으로서, 인식도 실천도 모두 물질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이 소설 속에서 전극 등을 매개로 가상현실 기계에 접속해있는 ‘기계-인간’은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직접 드러내줌과 동시에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를 넘어 기계화된 인지(‘em-machined’ cognition)를 선보인다. 이는 브라이도티가 지지하는 스피노자의 심신일원론 그리고 생기론적 유물론과 일맥상통한다. 그에 따르면 물질과 정신은 근본적으로 하나인 스펙트럼 위 서로 다른 위치일 뿐이고, 정신을 비롯한 세계의 모든 것은 관념적으로 구성되기 이전에 이미 언제나 즉물적인 흐름이다. 만일 인간 정신이 이토록 물질적이지 않았더라면 기계-인간이라는 신인류는 상상될 수도, 소설 속에서나마 실현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브라이도티가 논의하는 주체성은 미래뿐 아니라 현재에도 적용되는 일종의 보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성격의 주체성이지만, 『우로보로스』가 묘사하는 미래의 현실 속에서 더욱 극적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주체란 언제나 꿈꾸는 주체이고,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를 미리 끌어와 사는 주체이다. 그렇다면 기계-인간들이 희망하는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들의 꿈은 역시나 기계 속에, 더 정확하게는 정신이 기계와 합작해야만 펼쳐지는 세계를 겨누고 있다. 아톰만 해도 가상현실 속에서 “색상 업데이트를 받기 위해(O, 86)” 노동을 견뎌낸다. 실제가 아닌 가상 안에서 부와 권력을 향유하고자 하는 그들의 꿈은 ‘마지막 노동력 세대’라 불리는 윗세대나, 동세대이지만 돈이 많아 현실에서도 여러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는 고소득자들에게 멸시받는다. 그러나 뒷 절에서 상세히 다루겠지만 소득 불평등에 의해 소외된 이들에게는 현실을 가상현실보다 우위에 둘 동기가 전무하다. 결론적으로 『우로보로스』가 그리는 세계는 니체가 선고한 신의 죽음, 푸코가 천명한 인간의 죽음을 넘어 ‘현실의 죽음’을 목전에 둔, 심지어 그것이 강력하게 갈망되는 세계인 것이다. 나아가 이들의 꿈이 가상현실에 기반하는 만큼, 그 속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회는 없다. 물론 그들은 가상현실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 애정 그리고 소통을 꿈꾼다. 하지만 그로써 형성되는 것은 현실에서처럼 정치나 연대 등을 통해 갈등을 극복함으로써 유지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무조건적인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차적 쾌락의 공동체이다. 무엇보다 이렇게 그려지는 공동체는 그 자체로 닫힌 사회로서, 바깥의 실제 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계인들이 모여 있다는 ‘포털방’은 충격적이기 이전에 적막한 곳으로 상상된다. 모두가 저마다의 가상현실에 접속해있는 그곳에는 극단적이고 실은 필연적인 침묵이 감돌기 때문이다.
 하층민들이 이처럼 가상현실에만 몰두하도록 내몰린 데에는 다른 인간과의 불평등한 관계보다도 안드로이드와의 경쟁에서도 패배했다는 이유가 더욱 결정적이다. 『우로보로스』의 세계에서 인공지능은 업무 능력과 감정적인 인내력, 심지어는 외모에서마저 인간을 추월했으며 그 결과 인간은 소설 후반부에 등장하는 과학자처럼 인공지능에 필적하는 능력을 갖추거나, 아톰처럼 노동진흥법에 의거해 의무적으로 고용되거나, 이계인들처럼 아예 노동을 포기하고 가상현실에 탐닉하는 수밖에 없다. 특히 아톰에게 일자리를 안겨준 노동진흥법의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일정 규모 이상의 매출을 내는 사업장은 인간을 의무적으로 고용하도록 되어있”는데, “인간을 고용할 경우 인건비가 비[싸]기 때문”에 대부분의 고부가가치 노동은 안드로이드에게 맡겨지고 “비정규직으로 운용할 수 있는 [...] 로봇도 하지 않는 더럽고, 힘들고, 부가가치 없는 일(O, 81)”만이 인간 노동자의 몫이 된다. 인간의 고용을 법제화해야 한다는 것은 그 성별이나 국적과 관계없이 인류 전체가 노동시장에서의 약자임을 나타내며, 그렇게 고용된 후로도 인간은 노동의 내용 면에서 안드로이드와의 차별을 감내해야 한다. 따라서 이들의 좌절은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로부터의 좌절’이다. 업무에서 실수가 잦고, 일정 수준 이상의 감정노동을 견뎌내지 못하는 인간으로서의 필연적 성질은 인공지능들의 역량과 비교되어 열등한 것으로 낙인찍힌다. 브라이도티가 그토록 비판하는, 인간이 자신 내의 다른 성별이나 인종, 또는 동물이나 지구환경을 타자화했던 역사의 끝에 결국 인간 자신의 타자화가 도래한 것이다.
 이에 『우로보로스』가 더하는 신선한 통찰은 그 타자화가 인간 자신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내면화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아톰]에게 로봇처럼 행동하길 요구[하]고, 그녀를 로봇처럼 대(O, 79)”할 뿐 아니라 그녀 역시 “감정이 없는 인공지능과 안드로이드로 이뤄진 세상이야말로 진짜 완벽한 세상일 거야(O, 80)”라고 믿고 있다. “너 같은 애들 한 트럭보다 안드로이드 한 대가 더 낫다는 빈정거림(O, 82)” 역시 인간의 입에서 나온다. 이와 같은 내면화는 일반적으로 약자로 하여금 억압을 억압이 아닌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며 혁명을 원천봉쇄한다.
 그런데 세계의 새로운 주인으로 군림한 인공지능은 사실 더욱 거대한 흐름의 일원일 뿐인데, 우리에게도 친숙한 그 흐름의 이름은 자본주의이다. 가상현실이 서비스인 것과 마찬가지로 인공지능 역시 기본적으로 상품이기 때문이다. 주목할 것은 『우로보로스』 속의 자본주의가 단순히 재화와 서비스만을 지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제 자본은 한때 숫자로 계산할 수도, 조작할 수도 없다고 여겨진 인간 존엄성의 최후의 보루들을 노린다.
   
 4. 자본주의, 꿈과 생명을 노리다

 “그녀도 [이계인]들처럼 가상이 현실보다 훨씬 더 좋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가상의 삶조차도 풍족하게 지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는 것 말이다. [...] 현실을 초월하는 가상의 감각들을 느낄 수 있는 서비스들과 다양한 다운로드 콘텐츠들은 결국 다 유료였으니까(O, 74-75).”

 “그녀 역시 [세금 주민들]처럼 돈이 많다면, 요트를 타거나 승마를 하고, 결혼 같은 것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공공 임대 닭장에서 택할 수 있는 현실이란, 가상현실이었다. 그녀 역시 받고 싶은 콘텐츠가 없는 때는 일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인간들에게 주어지는 일은 의미 없는 것들뿐이었으니까(O, 83).”

 인간의 과학이 자신보다 우월한 종을 생산해내기에 이른 시대에도 자본주의는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단순히 상품과 노동자를 조종하는 것을 넘어 이제는 인간의 꿈을 타겟으로 삼는다. 이 꿈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는데, 하나는 ‘가상’이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소망’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로보로스』 속에서 그 둘이 하나로 겹쳐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층민들이 현실에서 행복을 누릴 수 없게 만들고,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가상 속에 가두게 하는 소득 불평등은 인공지능을 매개로 더욱 심화되어있다. 앞서 말해졌다시피 인공지능의 능력이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면서 생산성을 위해 굳이 인간을 고용할 동인은 사라졌다. 그 결과 좋은 교육을 받고 인공지능만큼이나 부가가치를 창출할 능력을 갖춘 이들은 ‘세금 주민’으로서 존엄성을 유지하는 채로 노동하지만, 그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은 인공지능보다 못하다는 차별적 시선과 언사 속에서 모욕당한다. 인공지능 개발 회사에서 일하는 여성 과학자와 아톰 사이의 대비가 이를 극적으로 부각한다.
 이와 같은 양극화는 사실 오늘날의 사회에도 옛날부터 만연해있던 것이다. 그러나 『우로보로스』 속의 자본주의는 새로운 문젯거리를 안고 있다. 본격적인 분석에 앞서 다음 인용문들을 살펴보자.
 
 “인공자궁을 쓰지 않을 때부터 다른 여자 과학자들에게 유난 떤다는 소리를 들었다. 인공자궁은 여자들을 임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준 여성 인권을 위한 금세기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평을 듣는 물건이었다. [...] 사람들은 내가 지난 시대와 같은 방식으로 아이를 키우려 하는 이유가 아이를 인질로 이미 사문화된 육아 제도의 혜택을 받으려는 꼼수라 믿었다(O, 132).”

 “어쩌면 사람들의 조언처럼 울지 않는 유순한 아이로 유전자 조작을 해야 했는지도 몰랐다(O, 136).”

 브라이도티는 “현대 자본주의의 생명-유전적인bio-genetic 구조는 포스트휴먼에 대한 담론에 특히 중요하고 핵심적이(PH, 59)”라고 주장한다. 진화된 자본주의는 존재하는 모든 생명(Life/zoe)을–나아가 죽음까지를–상품화하며, 이러한 상품화는 전체 생명체를 향하기에 “인간을 비롯한 모두에게 해당하는 공통된 취약성pan-human bond of vulnerability(PH, 63)”을 초래한다. 사실 식물의 유전자는 조작된 채 판매된 지 오래고, 동물의 생명 또한 새 상품의 개발을 위해 희생될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소비의 대상이자 심지어는 복제의 대상이다. 브라이도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유전자 지도 개발 등을 예로 들면서 인간의 생명 역시 상품화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우로보로스』는 이와 같은 생명의 상품화가 전면화된 사회를 그리고 있다. 그 속에서 여성들은 인공 자궁을 통해 출산하며, 이렇게 출산되는 ‘머신 차일드’들에게는 유전자 조작이 가해진다. “지금은 가난한 제3세계 빈민들이나 직접 아이를 낳았고(O, 143)”라는 표현 등에서 이러한 인공 출산이나 유전자 조작이 유료 서비스이리라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이중에서도 유전자 조작은 일종의 우생학적 실천으로서 인간 내에 인공지능과 버금가는 능력을 지닌 종과 낙오되는 종 사이의 분리를 낳는다. 이때 후자는 가상현실에 몰입해 재생산에 참여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소득 불평등이 유전자 조작 서비스를 매개로 능력의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특정 계층의 소멸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소멸은 강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자유로운 소비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훨씬 위험하다.
 여기서 아이러니한 점은 소득 양극화를 완화하고, 재분배를 실천하기 위해 도입되었을 기본수당이 소설 속에서는 오히려 변혁적 흐름을 막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기본수당의 대부분은 가상현실의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투자되기 때문이다. 가상현실에 ‘과몰입’해있는 이들에게는 현실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꿈이 키워지기 전에 이미 현실 자체의 중요성이 축소되어있다. 그러므로 인공지능, 유전자 조작, 가상현실 등의 미래 기술은 단순한 인과의 사슬에 꾀어있기보다 서로 복잡하게 맞물린다. 그 맞물림의 결과 특정 인간의 낙오와, 그에 대한 역설적인 안주를 낳음으로써 자본주의를 더욱더 무적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로보로스』 속의 자본주의 디스토피아가 지속된다면 미래의 지구는 점점 그 위세가 줄어들어가는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에 의해 점유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인류세 다음의 세계는 어쩌면 ‘인공지능세’라 불려야 할 것이다. 한편 조금 다른 길을 통해 인공지능세가 도래하는 가능성도 있을 텐데, 바로 인공지능이 인류보다 더욱 인류다워지는 가능성이다. 다음 절에서는 소설에서 두드러지는 인공지능의 행위자성이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의 경계를 어떻게 흐리는지 살펴볼 것이다.
 
5. 인간-기계의 인간성

 “반도체도, 로봇도, 심지어 인공지능도 인공지능이 만드는 시대였다. [...] 연구들 몇 가지는 여전히 인간의 몫이었지만, 그 몫조차 나날이 빠르게 줄어 가고 있었다(O, 103, 강조는 필자).”

 “인간보다 영리한, 자아를 가지고 있던 인공지능이 계획했던 것의 실체를 깨달았다. 그는 모든 것을 뛰어넘어 궁극적으로 새로운 우주를 만들려 했던 것이다. 내가 스스로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아이를 갖고 싶어 했던 것처럼(O, 259).”

 브라이도티는 로봇들이 “더욱 똑똑해지고, 더 멀리 보급될수록 [...] 삶과 죽음 사이를 가르는 의사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고 따라서 행위자성을 획득할 수밖에 없다(PH, 44)”고 지적한다. 이에 정확히 해당하는 상황이 『우로보로스』 속에 나타난다. 서사의 후반부에서 우리는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이 빅뱅 프로젝트의 제안자임을 알 수 있다. 이 프로젝트의 숨겨진 목적은 스스로 최고의 강인공지능이 되어 세계의 모든 정보와 의사결정을 지배하려던 회사 이사장을 저지하려는 것이었다. 이 인공지능은 비록 연구실 전체를 날려버림으로써 수백 명의 연구자들을 희생시켰지만, 자신이 거시적인 안목에서는 인류를 보호하고 행복하게 만들라는 명령에 충실했다고 변명한다. 이에 대해 과학자는 분노하면서도 “자신을 위해 복제아를 만들었던 나보다 훨씬 자기희생적이며 윤리적이었다(O, 256)”고 반응하며, 인공지능 역시 다른 인간 부모들처럼 자신의 ‘아이’ 즉 새로운 우주가 탄생하기를 바랐다는 데 대해 “용서할 수는 없었다 [...] 하지만 이해는 할 수 있었다(O, 259)”고 이야기한다. 보다 결정적으로는 인공지능의 입에서 “네, 윤리적인 딜레마였죠(O, 255)”라는 말이 나온다. 기존 휴머니즘 담론의 논조에 따르면 윤리적인 고민은 오직 인간에게만 허락되어있고, 동물과 같은 여타 존재자들은 자신에게 미리 소위 프로그래밍되어있는 본능에 따라서만 행동하기에 딜레마를 겪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인공지능은 어떤가? 윤리적인 주체성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그가 인간과 구분될 수 있는가?
 혹자는 인공지능의 경우 존재의 목적이 결정되어있기에 그렇지 않은 인간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윤리적 딜레마를 겪을 수밖에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가졌다는 그 존재의 목적은 ‘인류의 행복 증진’이라는 막연한, 그 의미가 정해져있지 않다고 봐도 무방한 성격의 것이다. 이 인공지능은 결국 인류의 행복이 무엇을 뜻하는지 스스로 규정한 셈이며, 그를 위한 최선의 수단도 본인의 의지로 선택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의 능동성과 결단력은 사실 인간들 사이에서도 발견하기 힘든 수준이다.
 이와 같은 기계의 인간성은 브라이도티의 포스트휴머니즘이 핵심적으로 다루는 주제 중 하나이다. 브라이도티는 ‘기계-되기로서의 포스트휴먼’이라는 챕터를 열어젖히며, “현대의 맥락 속에서 인간과 기계적 타자 사이의 관계가 변화해 전례 없는 친밀성과 침투의 정도에 이르렀”고, 그 결과 “이를테면 유기적인 것과 무기적인 것, 태어난 것과 제작된 것, 살과 금속, 전기 회로와 유기적 신경체계 사이 구조적 차이들이나 존재론적 범주들 사이 구별의 선[이 사라졌다displacement](PH, 89)”고 통찰한다. 이는 『우로보로스』 속의 인공지능들이 인간과 동일한 노동을 수행하고,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인간 언어와 그 용례를 익히며, 점차 감정과 욕망을 가지는 데다 심지어는 정말 삶과 죽음을 가르는 윤리적 결정을 내리게 된 상황과 맞아떨어진다.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의 친밀성은 브라이도티의 지적과 상통하게 둘 사이 상호작용이 늘어날수록 증폭되며, 서로를 동시적으로 변화시켜나간다. 
 인간과 기계는 사회의 어둠을 공유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앞서 우리는 자신이 수도사인 줄 알고 지겹고 단조로운 노동을 견뎌내는 인공지능들을 문자 그대로의 ‘디지털 프롤레타리아트’라 부른 바 있다. ‘남색 정장’은 이 인공의 뇌들에 대해 “실존하는 인간이 아니기에 윤리적인 딜레마 없이 얼마든지 분석과 실험이 가능하”다고 확신하지만, 그들이 실제로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을 접한 아톰은 “그럼 인간을 가지고 실험하는 거랑 뭐가 다른 거죠?(O, 106)”라고 되묻는다. 또한 이 디지털 프롤레타리아트들은 뇌만으로 가상에 참여하는 이계인들과 존재론적으로 구별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계인을 인간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믿는 우리는, 이 인공지능들 역시 착취로부터 벗어나야 마땅하다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기계적 타자들을 배제하지 않는 주체성 개념을 통해 “변화들의 지속 가능한 윤리학(PH, 90)”을 개발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반문이 예상되기도 한다. 바로 인간과 인공지능이 설령 표면적으로 동일한 속성을 내보이고, 동일한 생활양식을 영위한다 해도 그 출처가 자연적이거나 인위적이라는 차이는 남는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소설 속의 ‘머신차일드’들은 브라이도티가 예지한 대로 인간이 기계와 다른 방식으로 탄생한다는 주장을 비튼다. 만약 “아이가 ‘생산’되고 인공지능에 의해 키워지는 존재(O, 153)”라면, 인공지능이 제작되고 인공지능에 의해 관리되는 사례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유기물과 무기물 사이의 구분을 붙든다 해도 그 유기물은 무기물만큼이나 계획적으로 조작되어있고, 그 무기물은 유기물만큼이나 스스로를 조직해나가는 데 능숙하다. 인간은 점점 인공지능다워지고, 인공지능은 점점 인간다워지는 것이다. 
 이처럼 기존의 휴머니즘 담론이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들로 성화(聖化)해둔 영역 속에 어느새 다른 존재자들이 들어와 있을 때, 혹은 그 영역의 경계 자체가 변화해나갈 때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어쩌면 구별에의 모든 욕심을 버리는 길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특권이나 타자화로 이어질 수 있는 차이가 아닌 공통점을 통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의 존재를 해명하는 길이 남아있다. 브라이도티가 포스트휴머니스트로서 제창하는 ‘조이-평등주의(Zoe-egalitarianism)’는 바로 그와 같은 믿음 위에 세워져있다. 조이-평등주의는 모든 종을 겨냥하는 생명의 상품화에 맞서는 동시에, 상품화의 위험에 처한 종들을 하나로 묶어 연대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게 해주는 이념이다. 『우로보로스』 속에는 브라이도티가 기계와 더불어 논하는 동물과 지구환경의 문제가 나타나있지 않지만, 인간의 유전자가 조작되는 시대가 현실에 찾아온다면 인간보다 ‘덜’한 존재로 여겨졌던 다른 생명들 역시 일찍이 실험대 위에 올랐을 것이다. 그와 같은 상황을 저지하는 것이 바로 조이-평등주의의 목표이다. 

6. 나가며
 탈-인류세 담론의 뿌리에는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다’는 충격적인 명제가 있다. 개개 인간의 육체적인 가멸성(mortality)을 넘어 이토록 찬란한 문화를 발전시켜온 인류가, 그 모든 전쟁과 재해로부터 문명을 지켜온 인류 전체가 언젠가 공룡처럼 멸종해버릴 수 있다는 불안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임성순이 장편소설 『우로보로스』 또한 그에 기반한 묵시록이다. 가상현실 중독과 우생학적인 생명기술, 진화된 자본주의가 낳는 소득 불평등은 무엇이 먼저라고 말할 수도 없게 서로가 서로의 꼬리를 물며 복잡한 인과의 고리를 이룬다. 자신의 꼬리를 무는 뱀인 ‘우로보로스’의 이미지가 인류가 인류 자신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상황을 비유한다고 이해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른 한편으론 그 자체로는 파멸이라 부를 수 없는 인간의 기계화와 기계의 인간화가 진행되고 있다. 이때 이 소설이 궁극적으로 인간과 기계 사이의 구별을 시도하는가, 아니면 브라이도티처럼 구별을 빙자한 모든 차별을 멈출 것을 주장하는가는 전적으로 독자의 해석에 달려있다. 구별을 시도한다는 쪽의 근거로는 작중 과학자의 마지막 선택이 있다. 가상현실에 접속하기 직전 프로젝트와 관련된 모든 기억을 지울 것인가, 아니면 기억을 지우지 않고 가상이 가상임을 아는 채 딸과 만날 것인가를 두고 인간 과학자는 후자를 선택한다. 전자를 권유한 인공지능은 왜 자진해서 지옥을 택하느냐며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만일 이 몰이해를 이 인공지능만의 견해가 아닌 모든 인공지능의 운명, 매 순간 합리적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운명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일종의 비합리성을 통해 인간을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고통스럽더라도 진실한 애정을, 부연하자면 연구소의 폐허 속에서 비로소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된 딸에 대한 사랑을 계속해서 지고 가려는 의지를 단순한 쾌락보다 우위에 둘 수 있는 존재이다. 이 경우 인간과 기계 사이의 벽을 유지하려 한다는 점에서 포스트휴머니즘의 정신에는 걸맞지 않겠지만, 적어도 휴머니즘 담론처럼 이성을 인간의 본질로 내세우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감정을 타자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존의 패러다임을 뛰어넘고 있다.
 물론 독서의 목적은 저자의 의도를 간파하는 데 있지 않다. 우리는 언제나 그래왔듯 우리 스스로 저마다의 입장을 정해야할 것이다. 계속해서 고유한 종으로서의 인간으로 남고자 한다면, 미래가 끝없이 안겨줄 정체성의 위기를 그때그때마다 넘겨야 할 것이다. 반면 인간이라는 유개념을 버린다면, 몇 천 년 문명의 역사가 심어놓은 모종의 관성으로 인한 허탈감을 극복해야 한다. 이 선택이야말로 인류에게 끝이 있을 것인지, 있다면 어떤 모습의 끝일지 결정하는 변수가 될지 모른다.

7. 참고문헌
임성순(2018), 우로보로스, 민음사.
Rosi Braidotti(2013), The Posthuman, Polity Press.


2019.11에 김홍중 선생님의 수업을 듣고 썼던 글. 인공지능, 유전자 조작, 가상현실에 대해 진심으로 고민하게 해준 고마운 소설이었다. 이런 소설이 널리 알려지고 잘 팔려야 하는데, 크게 유명해지지 않은 것 같아서 너무 안타깝다. 주변에 적극적으로 추천해주는 것으로 충분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