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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요약 및 논평

미셸 푸코, 이상길 옮김, ⟪헤테로토피아⟫, 문학과지성사, 2014 

 공간에 대한 푸코의 짤막한 사유들을 조각조각 모아놓은 책이다. 작년 9월 나는 절망에 빠져있었고, 절실한 마음으로 서촌에 나가 보안서점에서 구매했는데 이래저래 정신이 없어서 이제 와서야 펼쳐봤다. (한참 니체를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이 가장 적절한 시기라고 느낀 탓도 있다.) 이 책에는 '헤테로토피아', '유토피아적인 몸', 그리고 '헤테로토피아'의 정제된 판본 격인 '다른 공간들' 등이 실려있다.

 '유토피아적인 몸'은 우리의 몸은 그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인 장소이며, 그곳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모든 유토피아적인 공상이 시작되었다는 선언에서 시작하지만 결국은 몸이 세상의 중심으로서 그 자체가 유토피아라는 안티테제, 그러니까 몸이야말로 장소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결론으로 뜀박질하는 에세이다. 거울과 시체가 비로소 몸에 공간성을 부여한다는 아이디어, 몸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세계의 다른 장소들로 뻗어나갈 수 없다는 통찰이 현상학도로서 흥미로웠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헤테로토피아'를 요약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데 집중하려 한다. 텍스트 자체는 '다른 공간들'이 더 풍성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헤테로토피아'와 겹치는 내용이 대부분일 뿐더러, '헤테로토피아'의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느낌이 난 더 좋았다. 라디오로 강연된 철학 원고라니! 우리나라에서는 생성되기 어려운 종류의 글 같다고 느낀다.

 '유토피아'란 정의상 '좋은 곳'인 동시에 '없는 곳'이다. 그러나 모든 현실사회들은 자기 안에 "유토피아적인 장소들을 구획하고, 그것이 바삐 움직이는 시간 속에서 유크로니아적 순간들을 구획"해왔다(12). 이와 같이 "위치를 가지는 유토피아들"은 "자기 이외의 모든 장소들에 맞서서, 어떤 의미로는 그것들을 지우고 중화시키고 또는 정화시키기 위해 마련된 [...] 반-공간contre-espaces"이다(13, 강조는 필자). 이처럼 "우리가 사는 공간에 신화적이고 실제적인 이의 제기를 수행하는 이 다른autre 공간들"을 푸코는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라고 부른다(14). 헤테로토피아의 예로는 아이의 눈에서 본 부모의 침대, 정원, 묘지, 감호소, 사창가, 감옥, 휴양촌 등이 있다. 헤테로토피아의 정의를 제시한 후 푸코는 헤테로토피아를 연구하는 헤테로토폴로지가 일반적으로 숙지해야 할 원리들을 나열하는 한편, 여러 구체적인 헤테로토피아들을 그것의 기능 또는 그것이 구축하고자 하는 관계망에 따라 분류하고 달리 분석한다.

 헤테로토폴로지의 첫 번째 원리는 "자체적인 헤테로토피아[...]들을 구성하지 않는 사회는 아마도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15). 한 사회가 어떤 헤테로토피아를 형성하느냐는 그 사회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지표다. (그렇다고 해서 헤테로토피아가 사회의 영향력 하에서 불변으로 남아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컨대 많은 사회들은 "생물학적 과도기에 있는 개인들[사춘기의 청소년, 생리 중인 여성, 출산을 기다리는 여성, 첫 번째 섹스를 하는 처녀]"을 위해 특별한 장소를 마련해왔다. 푸코는 이러한 종류의 헤테로토피아를 생물학적 또는 위기의 헤테로토피아라고 부른다. 오늘날에는 생물학적 또는 위기의 헤테로토피아 대신 "일탈의 헤테로토피아가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 평균 혹은 규범의 요구로부터 일탈된 행동을 하는 개인들에게 마련해놓은 장소들 말이다. 요양소, 정신병원, 그리고 물론 감옥이 거기에 속한다.(16-7)"

 헤테로토폴로지의 두 번째 원리는 "역사가 흐르면서 모든 사회는 그것이 이전에 구축했던 헤테로토피아를 완전히 흡수하거나 사라지게 할 수도 있고,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헤테로토피아를 조직할 수도 있다(17)"는 점이다. 푸코는 그 예로 매음굴이 점차 국가적인 차원에서 제거되어가는 것(혹은 교묘히 비가시화되는 것), 그리고 프랑스에서 무신론이 만연해진 뒤에 도리어 묘지가 도시의 가장자리로 밀려난 것을 든다.

 헤테로토폴로지의 세 번째 원리는 헤테로토피아가 "보통 서로 양립 불가능한, 양립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여러 공간을 실제의 한 장소에 겹쳐놓는"다는 점이다. 그 예로는 극장과 정원이 있는데, 극장에서는 이차원 스크린에 삼차원 공간이 새롭게 펼쳐지고, 정원에서는 세계 전체를 상징하는 온갖 식물들의 표본 가운데 "분수, 사원 같은 신성한 공간"이 자리한다(19). 푸코의 정원 분석은 미르체아 엘리아데의 ⟪성과 속⟫을 연상시켜서 흥미로운 만큼 약간 낡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양탄자가 겨울의 정원을 실내로 들여온 것이라는 사실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헤테로토폴로지의 네 번째 원리는 "헤테로토피아는 십중팔구 시간의 독특한 분할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푸코는 영원성의éternitaire 헤테로토피아한시적인chronique 헤테로토피아를 구분한다. 전자는 예컨대 박물관과 도서관처럼 "시간을 정지시킨다는 발상, 혹은 시간을 어떤 특권화된 공간에 무한히 누적시킨다는 발상"을 토대로 형성된다. 푸코에 따르면 17-8세기만 해도 박물관과 도서관은 그저 주인의 취향을 보여주는 "개성적인 기관"이었으며, 특정한 주제에 대한 모든 것을 강박적으로 아카이빙하려는 시도는 "완전히 근대적인 것"이라고 한다(20). 후자는 예컨대 극장, 시장, "마을의 변두리나 어떤 경우엔 심지어 마을 한가운데 있는 멋진 공터" 그리고 휴양촌처럼 한정된 시간동안 마치 축제와 같은 특별한 체험을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을 가리킨다. 특히 폴리네시아의 휴양촌에서 "사람들은 인류의 가장 오랜 전통과 다시 관계를 맺도록 초대된다(21)." 그들은 박물관, 도서관과 반대로 오히려 시간을 지우고 역사를 제거당하는 체험으로 인도된다는 것이다. 한편 "통과, 변형, 갱생의 노고"를 떠맡는 헤테로토피아들도 있다. 19세기 기숙학교와 병영, 그리고 오늘날의 감옥이 그 예다(22, 강조는 필자).

 헤테로토폴로지의 다섯 번째 원리는 헤테로토피아가 "언제나 그것을 주변 환경으로부터 고립시키는 열림과 닫힘의 체계를 갖는다"는 점이다(22). 모든 헤테로토피아는, 설령 모두를 위해 개방된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특정한 의식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푸코는 "헤테로토피아들에 가장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강조하며 짧은 원고를 마감한다. "헤테로토피아들은 다른 모든 공간에 대한 이의제기이다." 이 이의 제기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데, 하나는 매음굴처럼 스스로가 환상이면서 동시에 "나머지 현실이 환상이라고 고발하"거나* 예수회 수도사들이 파라과이 식민지에 건설한 공산사회처럼 "우리 사회가 무질서하고 정리되어 있지 않고 뒤죽박죽이라고 보일 만큼 완벽하고 주도면밀하고 정돈된 또 다른 현실 공간을 실제로 만들어"내는 것이다(24, 강조는 필자). 마지막으로 푸코는 선원들로 하여금 여러 헤테로토피아를 드나들게 해주었던 '배'야말로 "가장 거대한 상상력의 보고"로서 "특출난 헤테로토피아"였음을 강조한다(26).

 개인적으로 내가 든 생각은 두 가지였다. 첫째, 헤테로토피아가 너무 많아 보인다는 것. 둘째, 헤테로토피아적 특질이 공간의 성격에서 올 수도 있지만, 공간에 들어선 주관에 의해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 각각을 구체화하면, 먼저 푸코가 든 헤테로토피아의 예시들이 우리 주변에서 너무 쉽게, 자주 발견할 수 있는 공간들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물론 그것이 '현실화된 유토피아'라는 '헤테로토피아'의 정의에 들어맞기는 하지만, 도서관까지 헤테로토피아라고 부를 정도라면 사실상 거의 모든 공간에 대해 '헤테로토피아'라는 개념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조금만 관찰력을 발휘하면 거의 모든 공간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특별하고, 신비롭고, 정상성을 거스르며, 심지어는 사회 질서에 대항하는 가능성을 품은 특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 대상들의 외연이 너무 넓어서 개념의 힘이 약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헤테로토피아가 반대한다는 '철두철미 정상적인' 공간들의 예로 대체 무엇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나아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공간도 해당 공간에 대해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거나, 반대로 특별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헤테로토피아로 화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나는 대학생이 되어 고등학교를 방문하면서 고3 때 자리를 잡고 공부했던 복도의 텅 빈 구석을 사진으로 남겼었다. 그 자리는 엄격한 자기통제와 금욕의 공간이자, 전교 1등으로서의 긍지와 수치스러울 정도로 강박적이 돼버린 성격의 공통된 근원이었다. 나는 나만의 공부를 하면서 그렇게 나만의 공부를 하는 내 모습을 복도를 돌아다니는 모두에게 전시했고, 그를 통해 다른 아이들의 시선을 의식해서라도 나태해지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의 효과를 누렸다. 그 자리에 헤테로토폴로지의 원리들을 적용해보면 그곳은 한국 입시구조의 산물이었고, 시간이 1시간 단위로 분할되어 의무가 부과되는 작은 수도원이었으며, 매우 친한 사람들이 아니면 건드릴 수 없는 경계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모두가 구경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장시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었던 그곳 또한 헤테로토피아일까? 어린이의 눈에 부모의 침대가 헤테로토피아로 보인다는 푸코의 서술은 헤테로토피아 개념을 적용하는 책임을 주관에게 지우는 것을 그가 거부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읽힌다. 그러나 그렇다면 다시금, '헤테로토피아'라고 말할 만한 곳이 너무 많아지는 것 같다.

*매음굴이 매음굴 바깥의 현실을 환상으로 고발한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정조를 지키는 일이나 난잡하지 않고 소위 깔끔한 섹스가 '정상적'으로 여겨지는 것이 사실은 인위적 통제의 결과라는 의미인가?


 나와 푸코 사이의 인연은 18살 때 시작되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읽은 후 사회학이론에 빠져든 나는 아무 배경지식도 없이, 막연한 생각으로 인터넷에 '사회학 고전'을 검색해보았고, ⟪감시와 처벌⟫이란 책의 존재를 발견했다. 그리고는 그 책이 얼마나 어마무시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지한 채 별명이 '티거'였던 친구와 '독일어과 3남신'이었던 친구들(중 둘)을 모아 넷이서 독서 세미나를 꾸렸다. 결국엔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기숙학교 자체가 우리의 행위와 이동, 상호작용을 강력하게 통제하는 감시와 처벌의 공간이라는 결론을 매우 즐거워하면서(?) 내놓았던 기억이 있다. 정식 사회학도가 되어 다시 ⟪감시와 처벌⟫을 읽었을 때 나는 내가 18살 때 그 책의 문제의식을 단단히 오해했음을, 철학사적 맥락을 제거한 채로 사형과 판옵티콘의 묘사 같은 자극적이고 피상적인 이미지들에 이끌려 활자를 훑기만 했음을 깨달았다. 그 이후로는 '푸코를 읽는 사태' 자체에 자신감을 잃어서 그의 책을 찾아보지 않았다. 철학도로 전직을 하고 나서야 이렇게 다시 푸코를 펼쳐보았고. 그렇게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망중한을 틈탄 즐거운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