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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프리드리히 니체, 박찬국 옮김, ⟪선악의 저편(Jenseits von Gut und Böse)⟫, 아카넷, 2018

파죽지세의 작가, 성실한 역자, 깔끔한 내지 디자인의 삼박자가 고루 갖춰진 완벽한 철학서.

내용이 너무 빡세서 표지에 안락의자 스티커라도 붙였다...

 ⟪비극의 탄생⟫의 창의적이지만 장황한 성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감동적이지만 암호와 같은 성질, ⟪우상의 황혼⟫의 가독성 좋지만 산만한 성질, ⟪이 사람을 보라⟫의 재미있지만 난잡한 성질이 ⟪선악의 저편⟫에는 없다. ⟪선악의 저편⟫은 내가 읽어본 니체의 저작 가운데서 가장 명료한 논지와 서술을 갖춘 책이다. 그의 핵심적인 사상들이 직설적인 언어로 표현되어있기 때문에, 비록 1886년이라는 비교적 늦은 시기에 저술되었기는 하지만 니체 이전의 철학사에 익숙하기만 하다면 니체 입문서로 제격인 책이라 생각된다. 중간 중간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와 같은 대철학자들의 체계를 몇 문장으로 깨부순다든지 구조주의나 해석학, 육체의 철학과 같은 현대사상을 예리하게 선취하는 대목들은 정말이지 감탄스럽다. 읽으면서 이 "빛의 외투 속에 숨어 있는 은둔자(110)"의 말들 중 나의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기억해두고 싶었던 것들을 간략히 정리해두고자 한다.


1. 힘에의 의지 자기보존이 아닌, 힘에의 의지의 자기발산이야말로 삶의 근본적 충동이다. "생명 자체는 힘에의 의지다. 자기보존은 이러한 의지의 간접적이고 가장 자주 나타나는 결과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51, 강조는 원저자) 니체는 심지어 자연세계를 기계적으로 운영하는 힘, 유기체의 생식과 영양 섭취의 문제까지도 힘에의 의지로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99).

Q. 모든 '현상'을 힘에의 의지로 설명하는 니체의 접근방식은 그가 그토록 기피한 현상(진상의 표현)과 진상 사이의 이원론을 부활시키지 않는가?

2. 관점주의 "니체에게 '관점주의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보는 세계가 사실은 우리 자신의 힘을 유지하고 강화한다는 관점에서 보이는 세계라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는 세계를 감각적인 증거에 입각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힘을 강화하고 고양시킨다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41, 각주 36번)." 물리학마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실증적인 학문이 아니라 "단지 세계를 해석하고 짜 맞추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52). 오늘날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과학사회학의 의제들이 연상되었다.

3. 창조로서의 철학 철학적 지식 역시 힘에의 의지가 발현된 결과이며 세계에 대한 발견이 아닌 세계를 새로이 창조하고자 하는 "전제적인 충동"에 따라 형성된 것이다(38). "진정한 철학자"는 칸트와 헤겔 같은 '철학적 노동자'처럼 "과거의 가치평가와 가치창조에 대한 자료들을 확정하고 정식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가치를 "명령하는 자이며 입법자다. [...] 그들의 '인식'은 창조이며, 그들의 창조는 하나의 입법이고, 그들의 진리에의 의지는 힘에의 의지다(257, 강조는 원저자)."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개념들이 완전히 폐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이제 창조적 재해석의 대상으로 화한다. "영혼에 대한 새롭고 보다 세련된 가설을 세울 수 있는 길은 열려 있다. '사멸하는 영혼', '주체의 다수성(Subjekts-Vielheit)으로서의 영혼' 및 '충동들과 감정들의 사회적 구조로서의 영혼'과 같은 개념들은 앞으로 학문에서 시민권을 가져야 할 것이다(50, 강조는 필자)." 나아가 철학을 창조행위로 규정하면서 니체는 진리와 거짓 사이의 대립 역시 해소시켜버린다. "진리가 가상보다도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은 도덕적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 어째서 우리가 관계하는 세계가 허구여서는 안 되는가?"(96, 강조는 필자) 

4. 기존의 철학적 개념들(직접적 확실성, 절대적 인식, 물자체)의 내적 모순 및 코기토 비판 데카르트의 회의의 결론은 논증 불가능한 전제를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생각하는 어떤 것이 나라는 것, 생각하는 어떤 것이 필연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 생각이란 그것의 원인으로 간주되는 어떤 존재의 활동이며 작용이라는 것, 하나의 '나'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생각한다는 것의 의미가 이미 확정되어 있다는 것, 다시 말해서 생각한다는 것이 [의지나 감정과 달리] 무엇인지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이다. [...] 이와 같이 '나는 생각한다'는 상태는 [의지나 감정이 무엇인지 등에 대한] 다른 '지식'에 소급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어쨌든 어떠한 직접적 확실성을 갖지 못한다."(56-57, 강조는 필자)

Q. 데카르트에게는 의지나 감정 역시 코기토의 소관이 아닌가? 니체의 데카르트 비판은 얼마나 타당한가?

5. 주체 내 의지의 다수성, 복합성 및 사유의 비이성성 니체는 ⟪선악의 저편⟫ 내내 주체가 다양하고 복합적인 의지들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다. 다양하고 복합적인 의지들 사이의 무정부 상태를 진정시키고, 뚜렷한 위계질서를 성립시켜 하나의 의지의 지배 아래에 하위 의지들을 종속시키는 것이 곧 고귀한 인간의 덕목이다. 나아가 "사유도 의지의 구성요소"이며, "의지는 감정과 사유의 복합체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 명령의 정념이다(61, 강조는 필자)." 심지어 "사유란 어떤 충동들 상호 간의 연관에 불과"하다(97).

 위와 같은 통찰은 정신분석학을 선취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 행위에서 모든 의도적인 것, 행위에 의해서 보이고 알려지고 '의식'될 수 있는 모든 것은 행위의 표면이나 피부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 의도란 해석을 필요로 하는 기호나 징후일 뿐이며, 더 나아가 그것은 너무나 많은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 의도를 중시하는 도덕이란 하나의 편견"이다(92). 칸트의 윤리학에 날리는 어퍼컷.

6. 철학에서 문법의 역할 "철학한다는 것은 일종의 최고급의 격세유전이다. [...] 언어상의 친족성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 [철학자들이] 동일한 문법적 기능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지배되고 인도됨으로써 [...] 세계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길이 애초부터 막혀 있다(64)". 예컨대 주어 개념이 발달한 언어권과 그렇지 않은 언어권 사이의 '주체'관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통찰은 구조주의를 선취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7. 거리의 파토스 인간 사회의 모든 발전은 귀족과 노예 사이의 거리가 철저히 유지됨으로써만 비로소 가능했다. 귀족사회의 기원은 맹수와도 같은 인간의 자연본성 그 자체다.

(i) 평등사회를 만드려는 '현대적 이념(민주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에 대한 비판 니체는 모든 종류의 평준화를 하향평준화로 간주해 비판한다. "인간의 모든 불행과 실패의 책임을 이제까지의 낡은 사회형태에 돌리려는 [이 현대적 이데올로그들의] 근본성향"은 어리석다. 나아가 "그들은 고통 자체를 반드시 근절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간주한다.(108)" 하지만 위험할 정도의 고통이야말로 인간의 성장의 필요조건이다. 안락은 종말이며, "고통을 견디는 훈련, 거대한 고통을 견디는 훈련[...]만이 지금까지 인류의 모든 고양을 가능하게 했다(283, 강조는 원저자)".

Q. 이 정도면 정신적 마조히즘이 아닌가? 고통을 회피하고자 하는 경향성은 니체가 그토록 긍정하는 식욕, 성욕, 지배욕만큼이나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속하지 않는가?

cf. 생리학적 평준화의 과정으로서의 유럽의 민주주의 운동(318-320)

cf. 공리주의 비판 쾌락과 고통은 삶에서 부차적인 것일 뿐이며(쾌락주의 및 염세주의 비판), 일반적인 복지와 안락 일반 또한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구토제에 지나지 않는다". 나아가 "어떤 한 사람에게 정당한 것이 다른 인간에게도 반드시 정당할 수는 없다는 것,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도덕을 요구하는 것은 보다 높은 인간에게는 해가 된다는 것, 요컨대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위계질서가 존재하며, 따라서 도덕과 도덕 사이에도 위계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이 공리주의자들에게는 간과된다(290-291, 강조는 원저자).

(ii) 귀족주의의 극단적 옹호 귀족들은 노예가 "자신을 위해서 희생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사회가 사회 자체를 위해서 존재해서는 안 되며 선택된 종류의 인간들이 자신을 보다 높은 과제와 보다 높은 존재로 향상시키기 위해서 이용하는 토대와 발판으로서 존재해야 한다"고 정당하게 믿는다(359, 강조는 원저자). 귀족으로서 지배하는 자는 "오직 자신과 동등한 사람들에 대해서만 의무를 지니며, 하층민이나 낯선 자들에 대해서는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혹은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되고, 어떤 경우에서든 '선악에 구애받지 않고 행동해도 된다(365)".

8. 니힐리즘, 염세주의에 대한 잘못된 대응으로서의 플라톤적 이원론과 그리스도교 "[...]경건함이라든가 [...] 하는 것은 진실에 대한 공포의 가장 교묘한 최후의 산물이며 [...] 진리를 전도시키려는 의지이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허위를 지키려는 의지다. [...] 이러한 경건함에 의해서 인간은 그처럼 [...] 선한 것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에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140, 강조는 필자)" 그러므로 종교의 기능은 고통 받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을 견딜 수 있게 만드는 데에 있다.(143, 강조는 필자)"

 그리스도교의 성직자들은 사실상 그리스도교 이전의 모든 가치체계를 전도했으며, "가장 고귀하고 가장 훌륭한 유형의 '인간'에게 고유한 모든 본능을 불안과 양심의 가책과 자기파괴로 왜곡하고 지상의 것에 대한 모든 사랑과 대지에 대한 지배를 향하는 모든 사랑을 대지와 지상의 것에 대한 증오로 전도"시켰다(146). '순수 형상'이나 이데아와 같은 것도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무의미한 생성소멸로 점철된 세계의 진상을 은폐하기 위한 허구이다. 

cf. 자기혐오 비판 연민은 유럽에 만연해있는 '자기멸시'의 징후다. 자신에 대해 불만이 많은 이들의 "허영심은 오직 '함께 괴로워하고(mit leiden) 싶어 하는 것(277)"으로 표현된다. 연민과 동정, 금욕 등의 그리스도교적 '선'은 힘에의 의지가 병적으로 발현된 결과다. 특히 자기희생적 금욕은 "자기 자신을 겨냥한 저 위험스럽고 전율스런 잔인성이다.(293, 강조는 원저자)"

cf. 인간이 자연 이상의 존재라고 아첨하는 철학에 반해 니체는 인간을 다시 자연적 존재로 되돌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298).

9. 반도덕주의 타인에게 무해한 존재가 되라는 이 시대의 도덕은 "힘에의 의지를 자신의 본질로 갖는 이 세계에" 부적합하다(192).

(i) 도덕의 비실재성 "도덕적 현상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현상에 대한 도덕적 해석만이 존재할 뿐이다.(165)" 심지어 니체는 "도덕이란 정념의 기호[아마 preference]에 불과"하다고까지 말한다(194, 강조는 원저자).

(ii) 다양한 도덕의 가능성과 상대주의 도덕철학자들은 다른 환경, 다른 시공간의 도덕에 대해 탐구하지 않았고, "많은 도덕을 서로 비교"하지 않음으로써 "도덕의 진정한 문제들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철학자들이 고집한 '도덕의 정초'란 한정된 시공간을 지배해왔을 뿐인 기존의 도덕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기 위한 새로운 수단에 불과"하며,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도덕이 문제시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일종의 부인"이다(191, 강조는 원저자).

(iii) 도덕의 반생명적 성격 "생명 자체는 본질적으로 자신보다 약한 타자를 자기 것으로 하고 그것에게 위해를 가하고 그것을 억압하는 것이다. 그것은 냉혹하며, 자신의 형식을 타자에게 강제하고 타자를 자신에게 동화시키는 것이고, 가장 부드럽게 말한다고 해도 최소한 착취하는 것이다. [...] 착취란 유기체의 근본적인 기능으로서 살아있는 것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의 의지 자체인 본래의 힘에의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론으로서는 혁신적인 것일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모든 역사의 근본적인 사실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360-361, 강조는 원저자)"

Q. 니체는 당위와 사실, the prescriptive/normative와 the descriptive 사이의 구분을 의미있게 취급하는가?

(iv) 노예도덕과 주인도덕 자신에 대해 긍지를 느끼는 것을 중시하고, "스스로를 가치를 규정하는 자라고 느끼기 때문에 타인에게 인정 받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주인들의 "도덕에서는 '탁월함(gut)'과 '저열함(schlecht)'이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이러한 대립은 대체로 '고귀함'과 '비천함'의 대립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선(gut)과 악(böse)의 대립은 다른 기원을 갖는다(363)." 주인도덕을 내면화한 "고귀하고 용감한 자들은 동정이나 타인을 위한 행위 또는 무사무욕(Selbstlosigkeit)을 도덕적인 것의 특성으로 보는 저 도덕[노예도덕]을 가장 낯선 것으로 느낀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긍지, 무사무욕에 대한 근본적인 적개심과 경멸은 공감과 '온정'에 대한 가벼운 멸시와 경계와 마찬가지로 고귀한 도덕에 속한다(364-365)."

 다른 한편 노예도덕은 노예의 고통과 생존의 압박을 경감시키기 위한 "본질적으로 유용성의[공리주의적인] 도덕이다. [...] 노예에게는 권력, 위협적인 것,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 세련된 것,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힘 등이 모두 악한 것으로 느껴진다. [...] 왜냐하면 노예적인 사고 방식에서 선한 인간이란 위험하지 않은 인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367-8, 강조는 원저자)" 허영심은 타인에게 평가받는 대로 자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노예의 후예들에게 두드러지는 특질이다.

10. 기타 세계의 영원한 회귀마저 긍정하는 인간상(134), 자기경멸과 자기존중의 공존(155), 증오(looking upwards or at least at eye-level)와 경멸(looking downwards)의 차이(159), 소크라테스 비판(202 각주 13번), 행위의 다양한 해석 가능성(267), 도덕적 우월주의자 비판(268-9), 도덕적 심판 및 단죄 비판(270-271), 정신과 위장의 유사성(295), 우스울 정도의 여성혐오(299-312, 자기초극도 '본성' 내에서 이루라는 말인가?), 유럽중심주의(320), 독일적인 것의 정의(320-325), 음악가들에 대한 평가(325-328), 유대민족에 대한 평가 및 민족 정체성의 유동성(337), 영국인 비판(339-343), 프랑스 및 남유럽 찬양(343-349), 유전의 힘(378)

11. 트리비아 니체는 주변의 거의 모든 '위인'들을 혐오한 것 같지만 베토벤과 비제, 스탕달만큼은 높이 평가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핵심을 담고 있다고 생각되는 대목을 인용하며 글을 끝내고자 한다.

 "고귀한 인간임을 결정해주고 등급을 확정해주는 것은 [고귀한 것을 갈망하는 이의] 작품이 아니라 [...] 신앙이다. 즉 고귀한 영혼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갖는 어떤 근본적인 확신이며, 구할 수도 없고 발견할 수도 없으며 아마 잃어버릴 수도 없는 어떤 것이다. 고귀한 영혼은 자신에 대해 외경심을 갖고 있다(403, 강조는 원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