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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피에르 아도,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

피에르 아도, 이세진 옮김,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 열린 책들, 2017

 이번 방학을 포함해서 대학원의 첫 학기는 고중세 철학을 공부하는 데 할애하기로 했다. 이 책은 이 계획을 달성하기 위한 첫걸음이었는데, 기대했던 것보다도 훨씬 즐겁게 읽었다. 아도에 따르면 (서양)철학의 뿌리는 이론이 아닌 경험이다. 특정한 삶의 방식에 대한 실존적 선택이 담론들에 선행한다. 담론은 이 삶의 방식을 정당화하는 수단이거나 실천의 한 양식일 뿐이다. 담론이 철학에 비본질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철학 속에서 그것의 지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절대적이지 않다는 주장으로 읽혔다.

 이상적인 삶의 방식은 학파마다 고유하다. 하지만 담론이나 생활 면에서 공통적인 요소들은 있다. 내용적으로는 열등한 욕망에 시달려온 기존의 자아를 초월하여 세계 전체를 관조하는 동시에, 말하자면 '진정한 자아'에 해당하는 존재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점이 공통된다(<존재와 시간>이 연상되는 대목이었다). 이러한 목표를 위해 명상, 양심 고백, 필사 등의 정신수련이 동원된다는 점도 여러 학파들의 교집합에 자리한다.

 일련의 실천들을 성실하게 수행해야만 이를 수 있는 정신적 고양 또는 각성의 경험(신플라톤주의자에게는 종교적 신비체험에 가까운), 그리고 그 후에 접근 가능해지는 새로운 삶/진정한 삶/세계의 실상, 이라는 서사는 비단 고대 철학뿐만 아니라 이후의 철학들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저자는 데카르트와 칸트의 예를 드는데, 넓게 보면 후썰도 포함될 수 있으리란 생각이다. 이 적용이 얼마나 의도적이어야 '계승'의 수준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예전에 김홍중 선생님의 저서 <사회학적 파상력>에서 읽었던 바르부르크의 '잔존(Nachleben)' 개념이 떠오른다.

 고대 철학의 기본적으로 실천적인 성격에 대해 알게 되고 나니, 그간 플라톤의 대화편 등등을 읽으며 느꼈던 회의감 - "진짜 이렇다고 믿는 거야?" - 이 모두 내 무지의 소산이었음을 깨달았다. 고대 철학은 앎을 위한 앎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앎은 덕을 얻고 권유하는 데 유용한 한에서만 의미있었고, 이런 맥락에서 앎은 곧 덕이었다. 그러므로 담론 위주의 철학에 들이대는 평가의 잣대를 고대 철학의 저서들에 적용하는 일은 부당하다. 고대 철학의 저서들은 (그것을 위해 고심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지만) 팸플릿, 강의록, 청중들의 물음에 대한 그때그때마다의 대답, 어떤 경우에는 관조의 기쁨 또는 그럼직한 가설을 꾸며내는 기쁨을 위한 산책과 같은 사색에 가깝기 때문이다. 나아가 상대를 감화시키고 설득하기 위해 신화적인 표현을 동원하기도 하는데, 이를 비과학적이라고 비난하는 것만큼이나 그릇된 독해는 없으리라.

 탐구에서 비롯하는 저 기쁨이 많은 고대 철학자들에게 사유의 원동력이었던 것 같다. 부나 명예에 대한 욕구 같은 소위 헛된 정념은 고대 철학자들이 대체로 배척하는 편이었지만 모든 정념이 배척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이성은 정념을 토대로 갖는, 애초에 정념으로 인해 비로소 작동하는 이성이며 그들의 정념은 이성에 대한 이끌림 그 자체다. 플로티누스의 말마따나 욕망이 사유를 낳는다. 니체는 같은 말을 <도덕의 계보>에서 '충동이 철학을 낳는다'고, 아도는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의지가 반성을 낳는다'고 바꿔 말한다. 그리고 이 욕망, 충동, 의지는 좋은 삶을 향한 욕망, 충동, 의지다. 철학은 '어떻게 살 것인가' 또는 '좋은 삶은 어떤 삶인가'를 의지적 반성을 통해 답하고자 하는 반성적 의지다.

인상 깊은 부분 인용

기원전 6세기 말,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섬의 철학자들은 “세계에 대한 합리적 해명을 제시했다.”(34) “세계를 원소들 간의 투쟁으로 설명하지 않고 <물리적> 실체들의 투쟁과 그중 한 실체의 (다른 실체들에 대한) 지배로 설명했다는 점에서 합리적이다. 이 같은 근원적인 변화는 그리스어 <퓌시스phusis>로 요약되는데, 이 말은 원래 어떤 사물이 이루어지는 시작과 전개, 결과를 동시에 의미한다.”(35) 또는 “생명체, 인간은 물론 우주까지도 성장하는 현상”(51)을 가리킨다.

 “민주주의는 권력을 향한 투쟁을 낳았다. 민중을 설득하고 그들로 하여금 회합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게 하는 법을 알아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민중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되고자 하는 자는 언어를 잘 구사하는 법을 터득해야 했다. 이 같은 요구에 부응하여 일어난 것이 바로 소피스트 운동이다.”(37) “그들은 설득적 담화의 기술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청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높은 식견, 달리 말해 일반 교양도 가르쳤다.”(39) 아도는 이들이 “인위적 환경에서의 교육을 고안”(39)했다고 평가한다.

 <소피아sophia>의 개념은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소피아는 “교육과 수련을 전제”하며 “작품을 만드는 비결을 제시”해주고 “기술을 실행할 때에 도움을 줄 어떤 신의 가호, 신성한 은총”(46)을 포함한다. 나아가 정치가나 시인의 말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놓는다.”(47) 또한 그것을 가진 이로 하여금 “하나의 우주적 비전에 접근”하도록 해주기 때문에 “불행을 잊게”(48) 한다. 마지막으로는 “타인과 더불어 살며 처신하는 능숙함”(49), 즉 처세술이라는 의미도 포함함으로써 어떤 텍스트에서는 탁월성arete과 대비되어 쓰이기도 한다.

 “철학자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자신의 무지를 자각한 사람이다.”(58) “앎이란 제조의 대상이 아니요, 글을 통해서든 담화를 통해서든 완성된 상태로 다른 이에게 전달될 수 없다.”(60) “이제 철학을 한다는 것은 소피스트들이 생각한 것처럼 어떤 앎이나 노하우, <소피아>를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문제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바대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이것이 『향연』에서 플라톤이 제시했던 철학자 - 지혜를 갈구하는 인간 - 의 정의이다.”(64-65)

 “소크라테스와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이성의 담론이 요구하는 바에 - 이성의 요구에 - 복종해야만 했다. 자기에 대한 관심, 자기 자신을 문제시하기는 우리가 개인성을 초극하여 보편성의 수준 - 두 명의 대화 상대에게 공통된 <로고스logos>로서 표상되는 - 에까지 이르렀을 때만 가능하다.”(69)

 “앎은 일련의 명제들이나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선택, 결정, 발의의 확실성임을 확인하게 된다. 앎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요, 무엇을 선호할 것인지 아는 것, 즉 일종의 노하우다. 그를 대화 상대들과의 토론으로 이끄는 것도 바로 이러한 <가치>에 대한 앎이다.”(71, 강조는 인용자)

 “사람이 어떤 가치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까지 한다면 그에게 그 가치는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73) “그[소크라테스]가 악으로 여기는 단 하나는 바로 도덕적 과오이며, 유일한 선이자 가치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삶의 방식이 항상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의 영감을 받고 인도되는가를 끊임없이 엄격하게 살피기를 피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한다.”(74, 강조는 인용자) “도덕적 의도의 순수성은 끊임없이 쇄신되고 재건되어야 한다. 자기 변화는 결코 결정적으로 완성되지 않으며 영속적으로 재정복되어야만 한다.”(75, 강조는 인용자) 칸트는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는 도덕적 의도의 순수성에 동의할지 모르겠지만 흄이나 니체는 부정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크라테스의 “자기에 대한 관심으로의 초대”는 “일상적인 삶, 통상적인 삶의 관습과 습속, 나아가 친숙한 세계와의 단절을 뜻했다.”(76) “자기에 대한 관심은 도시polis에 대한 관심과 대립되지 않는다.”(77) 세계에의 퇴락 상태를 일깨워주고 그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근본기분인 불안, 나아가 그를 통해 만나지는 본래적 자아에 대한 하이데거의 사상이 연상되었다.

 플라톤의 저서와 아카데메이아의 발전과 더불어 “철학은 생활공동체, 학교에서 스승과 제자가 주고받는 대화 등을 통해서만 실현되는 것이 되었다.”(106) “애당초 플라톤의 의도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는 도시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철학적으로 교육함으로써 정치적 삶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109) “플라톤은 그저 능수능란한 정치인을 배출하기보다는 사람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정치적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 엄청나게 돌아가는 우회로를 택해야 했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새로운 인간을 양성해 낼 책임을 진 지적, 정신적 공동체를 설립한 것이다.”(110) 고대 철학에서 교육은 연구만큼이나, 어쩌면 연구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이 공동체는 ‘대화의 윤리학’이 지배하는 공간인데, “어느 한쪽이 자신의 진리를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저마다 상대의 입장에서 보고 자기만의 관점을 초월하는 법을 배운다.” “여타의 고대 철학 사조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개인이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향하여 스스로를 초월하는 운동에 철학이 있다. 그리고 플라톤에게 있어서 이 어떤 것은 로고스, 곧 보편성과 합리성에 대한 요구를 함축하는 담론이었다. 게다가 이 로고스는 일종의 절대적 앎을 표상하지 않는다. 사실, 로고스는 어떤 입장들을 공통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두 명의 대화자들 사이에 수립된 합의를 가리킨다. 합의 안에서 대화자들은 저마다의 특수한 관점을 초월한 것이다.”(116) 여기서의 로고스는 소피아(지혜)와 달리 생각되어야 하나 보다.

 “죽음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요, 철학자는 영혼을 육체로부터 분리하는 데 골몰하기 때문에 철학이 곧 죽음의 연습이다.”(122) 후썰의 초월론적 환원도 죽음의 연습의 일환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 하이데거의 죽음으로의 선구는 확실히 유사한 냄새가 나는데 말이다.

 “학문은 존재의 변화이며 미덕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학문이 정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학문은, 심지어 기하학까지도 영혼 전체에 개입하는 지식, 언제나 에로스, 욕망, 도약, 선택과 연결되어 있는 지식이다.”(127)

 “대화편은 온갖 문학 기법의 효과를 동원하되 철학으로의 전향을 꾀하는 선전용 저작으로 간주될 수 있다. 고대에는 공개 강의가 자신을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따라서 플라톤도 이러한 공개 강의 시간에 대화편들을 낭독했을 것이다.”(129) “플라톤의 철학은 양성, 다시 말해 개인들을 변화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대화편을 읽으며 자신이 그곳에 동참하고 있다고 상상하게 함으로써 이성의 요구를,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선의 규범 혹은 표준을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양성의 관점에서 볼 때 문자로 기술된 대화의 역할은 무엇보다도 바로 이성의 방법, 변증적이면서 기하학적인 방법을 실천하도록 가르치는 데 있었다.”(131-132, 강조는 인용자)

 “플라톤의 철학적 담론은 기꺼이 대화에 참여하기로 하는 선택, 실제로 생생한 대화를 나눠  본 구체적 경험을 토대로 삼는다. 본질적으로 이 담론은 행위와 담론의 공정성을 보장해 주는 불변적 대상들, 즉 비감각적인 형상들의 존재로 나아간다. 또한 인간에게 영혼이 실재한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게다가 대부분의 대화편들에서 이 형상은 무엇보다도 인간사와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판단을 정초하는 도덕적 가치들임을 확인할 수 있다.”(134, 강조는 인용자)

 

 어... 한꺼번에 다 하려니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