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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이나 소회 같은 것

20210325 가위 돌리던 아이

  9시 40분 셔틀버스를 타고 학교를 나왔는데, 술집의 영업이 끝나는 시점과 겹쳐서 그런지 2호선도, 3호선도 지하철이 만원이었다. 이곳저곳을 조심스레 비집고 다니다가 운 좋게 자리를 잡았다. 가방 끈을 풀고, 어깨 위의 무게감이 갑자기 줄어든 데 안도하고 있는데 지하철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딱 들어도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자신은 신입 차장인데, 구파발행 열차를 몰 때마다 대화행 열차가 아니어서 실망하는 고객님들을 스쳐지나간다고. 그 분들을 생각하면 죄송스럽다고. 그래서 대화행 열차가 더 많이 운행될 수 있도록 자기가 힘 닿는 데까지 노력하겠다고. 그에게 직접적으로는 아무것도 해준 게 없음이 거의 분명한데도, 손님들께 늘 감사드린다고. 단어가 하나하나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강 이런 이야기를 담은 방송이었다.
  그러고 보니 서울로 이사를 온 뒤로는 구파발행 열차와 대화행 열차를 구분하지 않고 타게 됐다. 이따금 게으름을 피우거나 만용을 부리다 독립문행 열차를 놓치고, 압구정행 막차만 남은 것을 보면서 허탈해 한 적은 종종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도 일산에 살았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아니 꽤 길었기 때문에 피로에 절은 누군가가 다음 열차도, 다다음 열차도 구파발행임을 확인했을 때 느낄 법한 좌절감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 좌절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 아무런 권력도 없는 신입 차장의 입으로부터, 대화행 열차를 늘리겠다는 말이 나온 것을 듣고 있으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리고는 불현듯, 초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남자아이 한 명이 떠올랐다.
  그 아이는 못됐다기보다는 짓궂었고, 장난스럽다기보다는 불가해함에 가까운 느낌을 내게 풍겼었는데 바로 가위를 돌리는 습관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아이는 가위의 두 손잡이 중 하나에 검지를 넣고 마치 요요를 가지고 놀듯 가위를 빙빙 돌리는 놀이에 매일 같이 몰두하곤 했다. 그것도 한 곳에 멈춰서서가 아니라 온 교실에서, 분단과 분단 사이를 쏘다니며 책상이 없는 모든 공간을 지그재그로 완주하면서 가위를 돌렸다. 나는 쥐불놀이처럼 원을 그리는 그 쨍한 색의 가위가 너무 무서웠다. 그 따가운 가위날이 내 자리에 가까워올 때쯤이면 혹시나 나에게 가위가 날아올까 봐 항상 두려워 했다. 그 아이와 함께 보내는 쉬는 시간은 당시의 내게, 정말이지 실질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초등학교 1학년 때  내가 그 아이에 대해 가졌던 기억의 전부는 아니다. 어느날 선생님께서 각자 장래희망을 적어오면 교실 벽면에 이름표와 사진 아래에 함께 붙여주겠다고 말씀하셨고, 나는 별다른 열정도 없으면서 단지 당장 피아노 학원에 다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피아니스트'라고 적어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처럼 번지르르한 직업을 골랐는데, 축구선수가 가장 인기가 좋았고, 피아니스트가 한 명 더 있었던 것 같았으며, 아마 여느 학급들처럼 대통령도 한 명쯤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위 돌리던 아이의 꿈은 기관사였다. 나는 어린 나이에도 그의 꿈에 어딘가 특별한 구석이 있다고 느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느낌은 아마 기관사라는 꿈의, 대통령에 비했을 때의 상대적인 소박함도 소박함이지만, 그보다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구체성 때문에 일었던 것 같다. 아무튼 시간이 흘러 나는 그 아이와 초등학교 때였나, 중학교 때였나 아니면 두 번 다였나 다시금 같은 반을 배정받았다. 아이는 자라서 더 이상 가위를 돌리지 않게 됐고, 나의 꿈은 조금 더 현실적으로 조정되어 교사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여전히 기관사였다.
  지금의 나는, 당연하지만 더 이상 초등학교 1학년 때 내 앞에서 가위를 돌리던 그 아이를 원망하지 않는다. 미워하는 마음이 남아있다면 오히려 그 편이 더 이상할 것이다. 다만 일산 또는 그 근처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대화행 열차를 늘리겠다고 말한, 아마 내 또래일 그 신입 차장이 그 아이였기를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바랐다. 구파발역에 도착하기 전 나는 지하철에서 내렸지만 그때도 같은 것을 바라고 있었다. 마치 그가 정말로 기관사가 되었다면, 그것도 이토록 마음씨가 고운 기관사가 되었다면, 나의 어린시절이, 그리고 우리 모두의 어린시절이 조금 더 사랑스러워지기라도 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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