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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시몬 드 보부아르, <초대받은 여자>

시몬 드 보부아르, 강초롱 번역, ⟪초대받은 여자⟫, 민음사, 2024.

"그 애인가 나인가. 그건 내가 될 것이다."(365)

 인물을 살아있는 육체가 아니라 형이상학의 사례로 전락시키고자 의도한 보부아르에게 실망했다. 문학은 철학의 시녀가 되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문학의 의미는 개념과 논증, 심지어는 직관에 의해서도 감금되지 않는 데, 즉 교훈으로 전락하는 일로부터 끊임없이 도주하는 데 있다. 그러나 오만과 나란히 상당한 자기혐오를 지니고 있는, 자아의 경계가 허물린 그자비에르와 위선의 표본 프랑수아즈, 그녀들의 모든 불안 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저 홀로 단단히 지내 얄미운 피에르 사이 복잡한 욕망의 서사에 압도적인 설득력이 있어 소설가로서 보부아르의 역량을 부정할 수만은 없다.

 결정적으로 이 소설은 보부아르의 의도를 벗어난다. 나는 그자비에르가 정말 보부아르의 의도대로 우리들 모두가 겪는 타자와의 형이상학적 투쟁을 성공적으로 예화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자비에르는 속마음과 겉표현이 지나치게 상이한 나머지 대타관계의 근간인 정직성을 훼손하는, 예시 아닌 예외이기 때문이다. 그자비에르는 ”고르기아스“에서 도덕의 가치를 논리적으로 옹립하려는 소크라테스의 질문들에 조금도 동의하지 않으면서 조롱 조로 그렇습죠, 네, 하고 대강 고개를 끄덕여주는 칼리클레스를 닮았다. 대화의 기본적인 규칙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대자와 철학을 수행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그자비에르처럼 그 어떤 책임도 질 줄 모르고--그렇기에 사실은 자유롭지도 않고--감정을 인수할 만한 정신적 힘도 못 가진 연약한 반-주체와의 대타관계는 결코 모든 대타관계의 표본으로 이해될 수 없다. 그자비에르의 실존은 프랑수아즈, 그리고 프랑수아즈의 입을 빌린 보부아르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전혀 굳건하지 않은 것이다. 그자비에르의 현존은 인간 모두에게 적용되는 실존주의보다도 치유를 필요로 하는 인간의 일부에 주목하는 정신병리학이 관심을 가질 만한 권역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보편적인 정상성과 병리상태를 무비판적으로 구분할 의도는 없다. 하지만 그자비에르가 표현하는 것과 같은 광기를 모두가 보편적으로 겪을 만한 무엇으로 치부한다면 그야말로 광기가 수반하는 특수한 고통을 무시하는, 윤리적으로 안일할 처사다.)

 결론적으로 내가 생각하기에 보부아르는 타인의 낯섦이라는 형이상학적 테제를 강조할 의도로 그자비에르를 지나치게 변덕스러운 인물로 그려낸 나머지 오히려 자기의 소설을 자기의 철학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었다. 이는 보부아르의 실패이고, 문학의 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