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뮈엘 베케트, 이예원 옮김, ⟪머피(Murphy)⟫, 워크룸프레스, 2020.
인간이기를 멈추고자 발버둥치는 인간의 실존적 실패를 기록한 소설.
1935-6년, 유럽의 전간기에 쓰인 ⟪머피⟫는 기이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머피가 창밖으로 미미하게 들려오는 속세의 소리를 경멸하면서, 제 몸을 목도리 일곱 장으로 흔들의자에 스스로 결박한 채 휴식을 취하고 있다. 삶도 죽음도 아닌 이 부동의 상태가 머피에게만큼은 지복이다. 의지도, 행위도 없고 무엇보다 타인이 없다. 유아론자 머피는 이처럼 부산스러운 세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려 하지만, 베케트는 첫 문단부터 "자유인 양"이라는 미묘한 표현을 통해 벌써부터 머피의 실패를 암시하고 있다(9). 머피의 스승 역시 심장을 자의로 멈출 줄 아는 니어리라는 도인이다.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에 대한 인간의 열망이라는 주제가 줄곧 작품을 이끈다.
그런 머피가 애인 실리아를 위해 무려 돈벌이를 하겠다고 길을 나선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격증도 숙련도 아닌, 말하자면 자신의 사주팔자가 쓰여있는 천궁도다. 얼핏 보기에 자유와 고독에 대한 머피의 선호와 유사과학에 대한 신봉은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 둘은 (인간이라면 그 속에 살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란 것에 대한 거부라는 효과로 묶여있다. 스스로의 주체성을 지우기를 희망하는 머피이기에, '의도'나 '목적'보다는 '효과'라는 표현이 더 정확해보인다. 현실의 크고 작은 진실을 밝혀주는 학문과 이성이라는 소위 '자연의 빛'에 반해, 머피의 궁극적인 지향은 "요소로도 상태로도 이루어지지 않은, 형태가 되어 가는 형태와 새로운 발원의 파편들로 부스러지는, 사랑도 증오도 이해 가능한 어떤 변화의 원칙도 없는 형태들만"으로 이루어진, 분절되지 않은 "소란"뿐인 "어둠"이다(88). ⟪머피⟫가 탈고된 동일한 해에 후설은 말년작 ⟪위기⟫로 학문과 이성의 개혁을 외쳤는데, 같은 시기 베케트는 학문을 포기하는, 정확히 말하면 등지는 선택지를 제시한 것이다.
그리하여 머피는 상당한 인문학적, 자연과학적 지식을 갖췄지만 학문과 일체 무관한 영역에서만 자신의 지성을 사용한다. 이를테면 어떤 맛의 과자를 어느 순서로 먹을지를 결정할 때처럼, 일반적인 현실에서는 아무 중요성도 지니지 않는 사태에 학문적 개념을 동원해 골몰하는 것이다(76-77). 이런 머피는 무엇보다도 우스꽝스럽지만--이 작품에서 현학성은 무거운 사상을 전달하기보다 유머를 위해 활용된다--다른 한편으로는 일상에서 무엇이 중대하며,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판가름하는 신선한 관점을 선사한다.
보다 우스운 점은 현실을 무시하고자 발악하는 머피가 너무나 인기가 많다는 사실이다. 베케트는 검열을 피해 암시적으로 머피의 남성적 매력을 에둘러 표현하는 듯하다. 이성애자 여성인 카우니핸 양과 애인 실리아는 물론이고, 머피에게서 우정을 구하는 니어리, 카우니핸 양에게 얼마나 진지한지 알기 어려운 와일리, 머피를 찾도록 고용된 주정뱅이 쿠퍼 모두가 노동에 나섰다가 연락이 두절된 머피를 찾는다. 그것도 몹시 애타게. 수많은 사람들이 머피를 그가 바로 그라는 이유 하나로 필요로 하는 반면, 정작 머피는 더 이상 머피이고 싶지가, 인간이고 싶지가 않다. 그는 정신병원에 취직해 외부 현실을 도외시하고 오직 자신의 내면의 질서에 골몰하는 조현병 환자 엔던을 동경한다. 그에게 엔던은 "다른 이의 손이 됐건, 자기 손이 됐건, 어느 손에도 놀아나지 않는 [...] 행운"을 지닌 자유로운 영혼이다(188). 머피가 꿈꾸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실존적인 자족이다.
그러나 머피는 카페 웨이트리스와 차 값을 두고 기싸움을 한 바 있다. 방 안에는 불을 꼭 필요로 하며, 비록 저버렸더라도 실리아와 사랑이란 것을 하고 말았었다. 그는 상이한 인간들의 감정과 인지가 서로 얽혀있는 상호주관적 현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있지가 않은 것이다. 물론, 이처럼 인간으로서 사회적 상호작용이 불가피할지라도, 10장에서 머피를 찾고자 하는 니어리, 와일리, 카우니핸 양 사이의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긴 대화는 동일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조차 불통이 지배적임을 보여준다. 탈주할 수도, 만족할 수도 없는 함께-삶(Mitsein), 그 피곤함을 베케트는 의도적으로 가소로운 현학성으로 풀어낸다. 결국 머피는 자살인지, 사고사인지 아리송한 방식으로 죽음을 맞는다. 흔들의자에 묶인 채, 호흡조차 최대한 멈춘 채 그저 사물처럼 '있기'--가장 비인간적인 사태--가 행복이었던 그는 결국 모든 인간의 종착지인 죽음이라는 운명을 어쩔 수 없이 공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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