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창작물

부서진 파르테논은 그녀 자신이다(2025.2.17)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있지 않다. 쥐는 있다. 티끌은 있다. 유령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 유령은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신도 있다. 신조차 있다. 너도 있다. 너는 당연히 있다. 너를 내가 말하기 때문이다. 그치만 내가 입을 열기 전에도 너는 이미 있다. 너는 있었고, 있으며,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있지 않다. 없는 것은 아니다. 있지 않을 뿐이다. 없지는 않다. 없다면, 아예 없다면 나는 너를, 너는 나를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있지 않다.

 있기는 너무 어렵다. 너는 쉽게 있는다. 사람들은 쉽게 있다. 대부분 그렇다. 사람이란 개념도, 조금 어렵게이기는 하지만, 있다. 나만 있지 않다. 어떻게 하면 있을 수 있을까? 너에게 묻는다. 어떻게 하면 있을 수 있어? 너는 어떻게 있어? 너는 답한다. 이상한 질문이야. 물을 수 없는 걸 묻고 있어. 마치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아는 회의주의자가 우스운 것처럼, 너도 똑같이 우습다. 너는 있으니까, 나에게 물을 수 있는 거야. 그치만 나는 있지 않은걸. 너의 대답과 무관하게, 나는 있지 않다. 네가 아무리 내가 있다 해도, 나는 있지 않다.

 그렇다면 있지 않은 나는 보이는가? 있지 않아도 보일 수 있는가? 들리는가? 만져지는가? 네가 나를 만질 때, 나는 만져지는가? 분명 너는 나를 만지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있는가? 만질 뿐만 아니라 어루만질 때, 내 안에로 파고들 때에, 내가 있는가? 없지는 않아도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은 말의 문제인가? 있음은 말의 문제인가? 단지 그뿐인가? 있음은 말의 문제냐고 생각하는 나는 그런 생각을 하기에, 그런 생각 덕분으로 있는가? 생각만이 있고, 나는 있지 않다. 나의 없음에 대한 부정만이 있고, 나는 있지 않다. 나의 있지 않음에 대한 긍정만이 있고, 나는 있지 않다. 그런 긍정에 대한 슬픔만이 있고, 나는 있지 않다. 슬픔을 현실에로 옮겨주는 언어만이 있고, 나는 있지 않다. 언어만이 있고, 언어를 구사하는 것은 없다. 구사되는 언어만이 있고, 언어는 언어를 낳고, 그 언어는 새 언어를 낳고, 이따금 이유를 가지고, 혹은 아무 이유 없이 나는 침묵에로 빠져들지만, 마치 침대 속에 웅크려 몰래 읽는 책처럼 흡입력 있게, 침묵에로 빠져들지만, 침묵만이 있고, 침묵하는 것은 있지 않다. 피는 있고, 살도 있다. 추론하건대 뼈도 있다. 올바르게 추론된 존재는 있다. 뼈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딱히 만져지지도 않지만, 뼈는 올바르게 추론되어 있다. 하지만 네가 보고 듣고 만지는 나는 있지 않다. 아무리 오래 들여다보고, 여러 관점에서 보고, 여러 관점에서, 가까이서, 멀리서 귀를 기울이고, 볼을 만지고 목덜미를 만지고 손을 잡고 가슴을 움켜쥐고 허리를 쓰다듬고 무릎을 꿇리고 발목을 붙잡아도 나는 있지 않다. 볼은 있다. 목덜미도 있다. 손도 가슴도 허리도 무릎도 발목도 있다. 가슴은 가장 있다. 성기는 가장 있는 것보다도 더 있다. 그런데 성기의 주인은 있지 않다.

 돼지고기를 먹는다. 내가 먹는다. 두 덩이를 통째로 냄비에 부어 시뻘건 소스에 펄펄 끓인다. 매콤하다 못해 매캐한 냄새가 올라온다. 부엌이 더럽다. 다행히 탁자는 깨끗하다. 하얀 탁자가 있다. 탁자가 하얗게 있다. 그 위에 냄비를 올린다.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먹는다. 허기가 졌다. 허기가 있었다. 지금은 없어졌다. 돼지고기를 먹으니 허기가 없어졌다. 하지만 허기가 있었고, 허기는 있었지만, 나는 있지 않았고, 지금도 있지 않다. 없지 않지만, 있지도 않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단순히 있지 않기만 한 것이 아니다. 없지도 않다. 목이 마르다. 물병을 향해 손을 뻗는다. 그 손은 누구의 것인가? 손이 물병을 잡는다. 물이 컵에로 흘러내린다. 물이 모양을 바꿔 컵에 담긴다. 컵의 모양대로 모습을 바꾼 채, 물은 있다. 물을 마신다. 내가 물을 마신다. 컵에는 더 이상 물이 없지만, 내 안에 물이 있다. 물이 몸에 스민다. 아마도 장기가 축축해지고 있다. 근육이 촉촉해지고 있다. 세포가 깨어나고 있다. 장기가 있고, 근육이 있고, 세포가 있다. 나만 있지 않다. 왜일까?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이 와중에 지구는 돌고, 사십오 억년 째 돌고 있고, 입자들은 충돌하며, 분자들은 조합된다. 분자들이 조합돼서, 존재들이 활개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