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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현상학

막스 셸러, <윤리학에서의 형식주의와 가치에 기반한 비형식적 윤리학>, 2부 5장 7절 요약

Max Scheler, Trans. by Manfred S. Frings & Roger L. Funk, Formalism in Ethics and Non-Formal Ethics of Values: A New Attempt toward the Foundation of an Ethical Personalism, Evanston, IL: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73, 모든 이탤릭체는 셸러의 것, 강조는 나의 것, '[]' 안은 단순 패러프레이징을 넘어 나의 해석이 추가적으로 들어간 부분.

선배인 A와 무스타쉬에서 정신없이 커피를 사왔다. 이곳에서는 초가을조차 끝났다는 듯 온도는 벌써 10도 남짓이고 가는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2부 5장 7절: 윤리적 가치에 대해 소위 양심적인 주관(Die sog. Gewissenssubjektivität der sittlichen Werte)

 사람들 사이의 의견차는 사실 도덕의 영역에서보다 이론의 영역에서 훨씬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나 과학에 대한 회의주의보다도 도덕에 대한 회의주의가 훨씬 자주 부상한다. 이는 사람들이 도덕의 영역에서 [유독] 사회적인 지지(social support)를, 즉 자신의 가치판단이 타인의 그것과 조화되기를(consonance) 희망하기 때문이다. 이 희망이 좌절돼, 즉 조화를 찾는 데 실패해 생겨난 실망이 곧 도덕에 대한 회의주의를 낳는다. 근대에 이르러 도덕에 대한 회의주의는 근대인의 도덕적 경향성의 심장부에 자리하는 자유로운 양심의 언어로써 표현된다. 즉 양심의 자유가 절대적이기 때문에 도덕적 가치판단은 '주관적'[인 데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셸러는 만일 우리가 보편적 타당성을 [윤리적 가치판단의 규범적] 기준으로 고집하기를 포기한다면 객관적 가치가 직관적으로 주어지는 방식에 보다 걸맞게 [윤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되며] 회의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보편적 타당성에 대한 집착은 "가치를 실현하는 데, 그리고 가치를 알아봄으로써(recognize) [비로소] 누군가(somebody)가 되는 데 대한 무능함의 경험"을, 즉 우울감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열등감을 기원으로 가진다(320). 이어 셸러는 저 '양심의 자유'가 정확히 어떤 사태를 가리키는지 따질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 맥락에서의 '양심'은 단지 주관적으로만 타당할 뿐인 내용을 고지해주는 무언가로 개념화되어있다. 저마다 절대적으로 양심의 자유를 누린다면, 객관적으로 타당한 내용과 무관하거나 심지어는 그에 반대되는 내용일지라도 자기의 양심에 부합하는 한 당당히 그를 준수할 권리를 모두가 갖추게 된다. 이 경우 도덕적 가치판단은 객관성을 상실한다. 후설 역시 사후 유고 중 하나에서 유사한 구조의 귀류논증을 펼치고, [자기에게만 옳은 무엇을 고지하는] '소박한 양심'의 개념을 내놓는다(Hua XLII, 196ff.). 연구자로서 빠른 시일 내에 취급하고 싶은 내용은, 셸러는 동일한 객관성 상실을 저지하기 위해 윤리적 권역에서의 보편적 타당성을 포기하는 반면--정확히 말하면 보편적 타당성을 원하지도 않기에 딱히 슬픈 포기도 아니다--후설은 같은 보편적 타당성을 지키기 위해 초월자가 수립하는 목적론적 질서를 끌어온다는 점이다. 둘 사이의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하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텐데, 셸러도 후설도 개별적 의무(특정 개인이나 집단만을 종속하는 비보편적 의무 또는 사랑)의 아이디어에 개입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작업이다(cf. ⟪법철학⟫, §136-140). 

① 오귀스트 콩트는 과학에서의 인식과 도덕적 인식에 대한 질문에 [동종의 객관적 해답이 가능하고 요구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학적 인식과 달리 도덕적 인식은 느낌(feeling)과 선호로 이루어지는 가치-경험[=가치에 대한 경험, value-experience]에 기반하기에 둘 사이의 유비는 성립할 수 없다.* 그런데 양심은 [가치에 대한 경험에서 길어지는] 도덕적 직관(insight, Anschauung) 또는 그와 같은 직관을 얻을 능력과 동일하지 않다. 후자는 직관이 성립하는 한에서 [오류불가능한데], 전자는 종종 도덕적 오류를 진리인 양 속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양심은 결코 도덕적 옳고 그름에 대한 최종적 심판관의 역할을 취할 수 없다. "양심은 도덕적 가치들의 담지자(bearer)이지만, 그것들의 궁극적 원천인 것은 아니다."(322) 이처럼 양심에 무오류성을 부여하는 양심 해석을 폐기할 경우, 양심은 도덕적 무질서의 원칙(principle of moral anarchy)으로 전락한다.

*후설 역시 Prolegomena §13에서부터 꽤 늦게까지 기술적(deskriptiv) 학문의 권역과 규범적 학문의 권역 사이 유비를 고집했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 과학을 괴롭히지는 않지만 도덕적 인식은 방해하는 '우연의 비합리성(Irrationalität des Zufalls)'에 천착하면서 두 권역 사이 유비를 서서히 포기하는 것으로 (개인적으로) 읽힌다.

 게다가 양심의 [본래적 형태는] 죄책을 [인지하는] 비판적 양심이며 '좋은 양심'이란 죄책감의 결여태에 불과하다. 즉 양심은 "근원적이고 실질적인(original, positive) 직관을 부여해주는 기능"은 갖고 있지 않다(322). [도덕에 대한 근원적이고 실질적인 직관을 부여해주는 것은 양심이 아닌 느낌과 선호를 통한 가치-경험이다.]

 [그렇다면 양심 일반은 진정한 윤리학에서 그 어떤 자리도 차지하지 못하는가?] 상기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진실되고(true) 정당한(legitimate) 의미로 쓰인 '양심의 자유'는 (물론 양심이 그를 인정해주느냐 마느냐 여부와 무관하게 성립하는) 도덕의 객관적 타당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양심은 "[결코] 덜 객관적이지 않은 [...] 개인적으로 타당한 직관의 매개체(vehicle)"(326)로서 (a) "보편적 규범들 속에 포함될 수 없는"(324) 직관을 [대변하며] (b) 그리하여 이미 보편적 규범 및 법칙이 이미 만족됐을 때[=발동되지 않는 경우에만?] 발동하고* (c) 해당 직관이 "나 자신만의 생의 경험(my own life-experience)에서"(324) 올 때 성립한다. 그리하여 (d) 진정한 의미에서의 양심은 동일한 상황에 놓여있을지라도 결코 다른 두 사람에게 동일한 내용을 지시하지 않는다.

*Q. 진정한 양심의 발동조건에 대한 서술이 모호하다. 

A. 보편적 규범 및 법칙은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줄 수 없는, 즉 보편적 프리스크립션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상당히 특수한, 개별적인 상황 속 윤리적 대응이 요구될 때를 의미하는 것 같다.

Q. 셸러는 '보편적 규범 및 법칙'을 일체 거부하는 게 아니었나?

A. 보편적 타당성이 그 자체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를 위해 (내용 없는) 형식주의를 내거는 게 문제지. (???)

Q. 그럼 보편적 타당성은 무엇을 통해 성립하는가? 목표는 아니고 우연적으로 저마다에게 타당한 바들이 조화된 결과인가?

Q. 도덕적 무질서까지는 아니더라도 진정한 양심들 사이의 갈등의 문제는 잔존한다. 타당한 개별적 의무들 사이의 충돌(의 가능성)에 대해 셸러는 뭐라고 말하는가?

 그런데 정말 양심의 소리가 삶의 경험으로부터 제 내용을 길러온다면, ['좋은 양심'이 지시할 만한] 도덕적 직관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미 도덕적인 삶을 살고 있어야 할 것이다. 즉 좋은 양심을 가지려면 이미 도덕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반대로 도덕적이려면 또 좋은 양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안티노미에 즉해 셸러가 제시하는 해답은 직관 획득의 첫 단추로서 권위(authority)[에 대한 순종]이다. "그러나 양심이 직관의 특유한 원천으로서 지배하는 권역에서는 모든 권위가 제한된다. 모든 권위는 오직 보편적으로 그리고 직관에 따라(evidentially) 선한(good) 것과만 관계하지, 개별적으로 그리고 직관에 따라 선한 것과는 관계하지 않는다. 보편적으로 타당한 가치들 너머에 자리하는 가치의 권역 속에로 권위의 명령이 침투해온다면 해당 명령은 윤리에 반한다(immoral, widersittlich)."(328)*

*그런데 '보편적으로 선한 것'과 '개별적으로 선한 것' 사이의--후자에서 양심의 자유는 "무제한적으로(unconditionally) 타당"한데(324)--구분이 생각보다 쉽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종교적 양심이나 몇몇 액티비즘을 떠올리면, 많은 사례들에서 대다수 타인은 그것을 후자로 규정하지만 당사자는 그것을 전자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동물권 운동가가 윤리적 채식을 옹호할 때, 그는 자신만 고기를 먹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고기를 먹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좀 더 직관적인 예시로, 포교에 진심인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자신만 구원을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야 하며 따라서 자신에게 전도의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야 침투적이고 귀찮지만, 그들은 어떻게 보면 끈질기게 선의를 베푸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셸러에게 도덕적 선택의 중심이 개별-인격(person)일 때 저 '보편적 선함'의 의미가 무엇인지가 내게 불가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