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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패트리샤 처칠랜드, <양심: 도덕적 직관의 기원>

패트리샤 처칠랜드, 박형빈 옮김, ⟪양심: 도덕적 직관의 기원⟫, 씨아이알, 2024.

"양심은 우리의 신경회로망에 뿌리를 둔 뇌의 구성체이며, 신적인 존재가 우리 안에 심어놓은 신학적 실체가 아니다."(226)
"뇌의 보상 시스템은 도덕적으로든 그렇지 않든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 강력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규칙 위반을 생각할 때 듣게 되는 양심의 소리는 우리의 보상 시스템이 '부정적 가치'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어떤 선택에서 정당하다는 우리의 신념은 물리적 뇌와 연결되지 않는 가상의 '순수이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 뇌가 적당한 규범으로 내면화한 것, 즉 보상 시스템이 어디에 가치를 부여하고 어떤 제약 조건이 지배적인지에 따라 달라진다."(273, 강조는 필자)


 과학을 무조건 경시하는 철학자는 하수다. 목표가 지적 허영심이 아닌 진리라면 과학의 성과에 당연히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 드러난 바를 곰곰 성찰해보면, 양심에 대한 신경과학적 탐구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드러난다. 첫째, 인간의 본성(nature)이 도덕성에 대한 담론에서 다시금 고려사항이 된다. 윤리의 철학사 내에서 오랜 시간 '자연' 혹은 '본성'이라는 표현은 고리타분한 것으로, 전근대적 사유의 안일함에 절여진 것으로서 배제되어왔다. 실존주의자는 미래를 미리 결정하는 본질을 부정할 줄 아는 개개인의 무한한 자유를 이유로, 반면 구조주의자는 어떤 구조에 놓이느냐에 따라 팔색조인 개인성의 무력함과 공허를 이유로 본성론을 거부했다. 경험과학의 분야에서는 사회학과 인류학이 상황의 막강한 영향력을 상당히 설득력 있게 강조해왔다. 그러나 도덕성을 진화의 항상적인 압력에 처해있는 유전자의 문제, 더 정확히 말하면 유전자가 개입하는 뇌 구조의 문제로 설명할 경우 상황 이전에 인간이 타고나는 무엇을 논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와 더불어 의도치 않게 목적론 역시 그 의의를 회복하는데, 진화를 말하는 순간 생존 투쟁에서의 이익 및 유용성이라는 목적을 염두에 두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 타 동물과의 질적 차이가 아닌 유사성이, 단절보다는 연속성이 훨씬 중요해진다. 동물과 인간 사이의 질적인 차이는 양적인 차이(뉴런의 크기, 피질 혹은 뇌 일반의 크기, etc.)로 환원되며 동물을 상대로 한 실험의 결과로부터 인간의 사정이 추론된다. 인간은 포유류 또는 영장류로, 자아는 말초적인 감정적 보상에 의해 좌우되는 뇌로 이해된다. 협력을 동기부여하는 신경호르몬들(옥시토신, 바소프레신 등)에 더해 한편으로는 사회적 불승인에 따른 불안과 고통, 다른 한편 승인에 따르는 만족 및 쾌감이 규범성의 기원이다. 이에 따라 양심을 인간성의 고유한 표식으로 간주해온 오랜 철학적 전통(e.g. 인간성 내 '신적 본능'으로서의 양심(루소))이 위태로워진다. 사실 동물의 이름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양심의 기원론을 비롯해 모든 종류의 기원론은 어느 정도 탐구 대상을 탈신비화하는 효과가 있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가 좋은 예이다.

 그러나 처칠랜드 스스로가 인정하듯 신경과학적인 접근에도 한계는 있다. "[...] 신경생물학적 데이터는 [...] 어느 것이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선택 사항인지 알려줄 수는 없다."(78) 또 "겉보기에 점잖던 사람이 왜 뇌물을 받거나 아동 성추행 또는 위증하는 식으로 양심에 반하여 행위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구한다면 신경과학은 아직 그렇게 정확한 신경생물학적 답변을 해줄 수 없음을 인정해야만 한다."(290) 처칠랜드의 언명은 뇌과학이 발전단계상에서 일시적으로 겪는 한계를 넘어 윤리학이란 근본적으로 뇌에 대한 탐구만으로는 고갈될(exhaust) 수 없음을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양심에 대한 신경과학적 접근은 도덕적 규범과 도덕으로부터 독립적인 규범 사이를 구분하지 않는다. 

 더 구체적으로, 내가 생각하기에 양심에 대한 신경과학적 접근은 우리가 대답하기를 원하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적이다. '왜 살인하면 안 되는가?(왜 살인은 양심에 불편감을 초래하는가?)'*에 대해 '뇌의 A부분이 B부분과 C방식으로 상호작용하기 때문에'라고 응수한다면 그다지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사소한 문제에 있어 과도한 죄의식을 느끼는가?'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호르몬이 너무 잘 흡수돼서'라는 답은 불만족스럽다. 독특한 심리철학적 관점을 갖고 있지 않는 한, 양심이 움직일 적에 뇌에서도 뉴런들 사이에 이러저러한 사건들이 일어나리라는 점을 의심할 철학도는 없다. 문제는 양심의 정체를 물으면서 우리가 궁금해하는 바가 영장류 뇌의 보상 메커니즘이나 신경호르몬 회로에 대한 사실들이 아닌 것 같다는 점이다. 뇌과학은 틀리지 않았지만, 우리가 원하는 타당성을 제공해주지도 않는다. 

*이 두 질문도 엄밀히 말하면 같은 질문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적어도 나는 부재할 경우 반사회적 행동을 낳고, 과도할 경우 자기파괴적 광기를 낳기에 운용상 균형을 요구하는 그것, 개인의 내면에 자리하되 외부세계의 상황과 당위적 이념의 형태로 존재하는 도덕률에도 개방되어있는 그 경계선적 기관의 정체가 궁금한 것이다. 그리고 양심이 작동함으로써 주관성과 물리적 사물세계, 사회적 지평 그리고 이념적 대상성들 사이 획정되어있(다고 생각되)는 경계가 어떻게 교란되는지가 궁금하다. 어쩌면 저 '원하는 것'이란 특정한 내용이 아니라 언어인지도 모르겠다. 혹시 나는 퀘스천베깅의 함정에 빠진 걸까?


 내 블로그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 (아주 대단한 숫자는 아니지만) 종종 조회수에 놀라곤 하는데, 어떤 분께서 무슨 경로로 이곳에 오게 되셨는지, 떠나시면서는 어떤 생각들을 품으시는지 솔직히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