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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마틴 반 크레벨드, <양심이란 무엇인가>

마틴 반 크레벨드(Martin Van Creveld), 김희상 옮김, ⟪양심이란 무엇인가(Conscience: A Biography)⟫, 니케북스, 2020 (originally published at London: Reaktion Books, 2015).

이 글을 쓰는데 밥솥에서 밥이 다 지어진 향기가 방 안으로 솔솔 밀려들어온다.

 한국에서 읽기 시작해 출국 후 충동적으로 들른 안트베르펜의 버처스 커피에서 다 읽었다. 역사학자가 쓴 책이어서 그런지 참고된 텍스트의 목록이 학술 문헌뿐만 아니라 신문기사나 편지, 희곡 등도 포함해 참 방대하다. 덕분에 유대교 전통에서부터 시작해서 고대 그리스의 전성기, 헬레니즘 시기, 초기 기독교 및 서구 중세, 소위 계몽의 시대, 마지막으로 나치 독일 및 현대에 이르기까지 양심 또는 양심과 비슷한 개념에 무엇이 있었는지 많이 배웠다. 또 단순하고 간결하게 쓰여 좋았고, 재밌는 소스들을 많이 발견했으나, 가끔씩 작가의 냉소가 지나쳐서 가벼워선 안 될 내용들이 가벼워지는 부분들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즐거운, 무엇보다 유용한 독서였다. 한국어 번역이 나온 덕에 이 책을 알게 돼 감사하다.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고민한 부분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선한 행위의 동기에 이해관계가 개입되지 않아야만 양심적인 행위가 성립한다면--저자는 신의 분노에 의해 추동된 다윗의 회개를 양심 발동의 예로 포함시키지 않는다--양심은 어떻게 자신의 순수성을 입증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온전히 양심에 따른 행위와 그렇지 않은 행위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나아가 구분할 수 있다면, (특히 선한 행위의 결과로서 이득이 수반될 때에) 그 구분을 어떻게 (자신이 또 타인이) 인식할 수 있는가? 처벌의 회피나 구원 혹은 명예와 같은 보상의 획득은 부차적으로조차 행위의 동기가 되어선 안 되는가? 덕성과 에고이즘 사이의 관계에 대한 후설의 사유와 유관한 부분이라, 친화력이 있는 대목을 주의 깊게 살폈다.

 둘째, (a)명령에 대한 무비판적 복종과 그 정의상 자율적인 비판의 산물(또는 주체)인 양심이 대립된다는 사실--저자는 홀로코스트의 원인 중 하나로 전자를 꼽는다--그리고 (b)현행적인 숙고 없이 자동적으로 또는 습관적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이 매번 고민을 거쳐야만 겨우 선을 택할 수 있는 사람보다 도덕적이라는 직관(feat. 맹자나 아리스토텔레스)이 참일 경우, (a)과 (b)는 어떻게 양립 가능한가? 복종의 오토마티즘과 성품/습관의 오토마티즘은 어떻게 구별되어야 할까? 이 문제 역시 데카르트로부터 후설이 물려받은 자기책임의 원칙과 상당히 유관하다.

 (b)를 파고들다 보면 어쩌면 양심이란 모랄 지니어스에게는 불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도 품게 된다. 달리 말해, 이렇게 표현해도 된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양심이 없을수록 사람이 덕스러워질 수도 있는 셈이다. 그런가 하면 역설적이게도 양심의 불필요성뿐만 아니라 양심의 불충분성도 똑같이 문제적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는 인간 개인의 양심에 더해 신의 은총이 구원을 위해 필수적이라 말했고, 레비나스도 무한자에 대한 충성이 뭐랄까, 시야가 협소한 유한자의 양심보다 우월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양심이 불필요한가 아니면 불충분한가의 문제는 저 주어 '양심'을 어떻게 정의하냐에 달린 데 불과할 수도 있겠다. 다만 양심의 정의 자체가 벌써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실천적 합리성 일반을 양심과 동일시해버릴 경우 양심이란 개념의 외연이 지나치게 넓어져 그 의미가 공허해지고 마는데, 그렇다고 둘을 구분하고 양심 자체에 특정한 내용을 부여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 나에겐 특히 어렵다.

 이 외에도 양심이 행하는 자율적 비판의 오류 가능성 및 양심적 결단의 지나친 다양성으로 인한 무정부주의의 문제 등도 책에서 제기된다. 이런저런 책들을 편력하며 최근 촉발된 아이디어는 엄청 많은데, 그것을 소수의 대표 논증을 가지는 프로포잘의 형태로 정제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 하지만 양심이라는 주제에 세틀 다운하게 돼서 무척 기쁘다. 얼른 박사과정에 입학해 논문에 착수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