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번역

에드문트 후설, <보편적 목적론> 번역

E. Husserl (Hrsg. von I. Kern), Zur Phänomenologie der Intersubjektivität Dritter Teil(1929-1935), Martinus Nijhoff, 1973(Hua XV), s. 593-597. 모든 강조는 필자.

[593] Nr. 34 보편적 목적론. 모든 각 주체를 포괄하는 상호주관적 충동에 관한 초월론적 고찰. 모나드적 전체성Totalität의 존재(1933년 9월)

 생식Zeugung의 내부. 다른 성을 향한 충동. 하나의 개별자 안에 있는 충동과 타 개별자 안에 있는 그의 편에서의 충동Wechseltrieb. 충동자신의 대상을 아직 자신의 목적지Worauf로서 자신 안에 담지하지 못한 미규정된 고픔의 단계 속에 있을 수 있다. 일상적 의미에서의 고픔은 규정된 것인데, [이를테면] 고픔이 충동적으로 요리에 향할 때 [그렇다] -- 규정되어 근원양태 속에서 향해진 [고픔](고픔이 그러한 요리를 통해 배불러지기도sättigen 전에, 그리고 요리가 이미 재인식의 성격을 그리고 심지어 한 '요리'의 전형적인, 고픔을 만족시켜주는 친숙한 대상의 전형적인 [성격을] 가지기도 전에). 성욕의 경우에 규정된 방향을 가지고 고픔을 촉발하는, 자극하는 목표는 타인der Andere이다.* 이러한 규정된 성욕은 섹스Kopulation의 양태를 띠는 충족형태를 가진다. [성]충동 자체에 놓여있는 것은 [594] 타인으로서의 타인과의 관계성 그리고 타인의 상관적인 충동과의 관계성이다. 두 충동은 자제, 거부Widerwillen의 양태--변양양태--를 가질 수 있다. 근원양태에서의 [성]충동은 '저지하는 것 없이hemmungslos' 변양되지 않은 충동, 언제나je 타인 속으로 다다르고hineinreichen 자신의 충동지향성을 타인 속의 상관적인 것을 향해 관통해둔hindurchreichen 충동이다.

*비문이라 의역하였다. 

 [성충동의] 단적인 근원양상적 충족에서 우리는 각 원초성 속 두 개의 서로 분리되는 충족들을 가지지 않고, 도리어 상호간의 충족Ineinander der Erfüllungen을 통해 산출되는 두 원초성들의 통일체를 가진다. 이를 내가 나의 세계성 속에서 가장 큰 독창성[근원성]을 가지고 해석한다면, 나는 오직 성적인 인간으로서 그렇게 할 수 있고 그로써 현행적 타인경험 속에서 인간에서 인간들로, 남성에서 여성으로 [시선을 옮겨 그 내면을 간접경험할 수 있다?](일반적으로 말해 그렇다는 것이고, 당연히 [내 해석은] 간접적이다mittelbar).

 그로부터 나아가 '더 고차적인' 동물을 위한 간접적인 해석, 타인경험을 통해 서로 교통하는 '타자지각', 우리 인간들에게서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그런 '타자지각'의 동기 속에서 그리고 그 속에서 동물이 스스로를 세계적으로, 자신의 종에 속하는 동물로서 경험하는 그런 세계표상 속에서 내가 아직 볼 수 있고 보아야 하는 것으로서의 해석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동시에indessen [다음의] 질문이 제기된다. 충동지향성 [일반], [그리고] 타인을 향해 (성적으로-사회적으로) 향해진 충동지향성 또한 선행적 단계Vorstufe, 완성된ausgebildet 세계구성에 앞서 놓이는 그런 선행적 단계필연적으로 가지지 않는지[에 대한 질문 말이다]--[경우에 따라서] 세계구성이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해서와 같이 [그렇게까지] 멀리 나아가지 않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여기서 나는 부모라는 문제, 또는 무엇보다도 어머니와 자식이라는 문제, 단 섹스의 문제설정의 연관 속에서 자라나는 그런 문제를 생각하고 있다.

 원초성은 하나의 충동체계이다Die Primordialität ist ein Triebsystem. 우리가 원초성을 근원적으로 지속하는stehen 흐름으로서 이해할 때, 거기에는 다른 흐름들 속으로,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자아주체들과 함께 들어가고자-노력하는hineinstreben 충동이 모두 놓여있다. 이러한 지향성은 그것의 초재적transzendent[자신을 초월하는] '목표'를 가지며, [나의 흐름에?] 들어선 타자로서[타자라는] 초재적인 목표를, 그것도 고유한 목표로서의 원초성 속에서, 그러므로 지속적으로 자신의 근원양상적인, 스스로를 단적으로 부각시키는erheben 그리고 충족하는 지향의 핵으로서의 원초성 속에서 [가진다.] 내적 시간의식에 대한 나의 예전의 이론에서 나는 여기서 제시된 지향성[충동지향성]을 지향성으로서, 예지로서 미리-향해져있고 파지로서 스스로를 변양시키는, 그러나 통일성을 보존하고, 취급하는, 그러나 자아에 대해 말해진 것이 아닌, 자아적인 것(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의지지향성)으로서 [595] 특징지워진 지향성이 아닌 그런 지향성으로 가진[바 있]다. 나중에 나는 후자의 지향성을 무자아적인('수동성') [지향성]에 의해 정초된 [지향성]으로 도입했다. 그런데 작용의 자아와 그로부터 발원하는 작용습성들은 그 자체로 발달[의 경로] 속에[위에] 있지 않은가? 우리는 하나의 보편적인 충동지향성을 전제해도 되지, 또는 전제해야 되지 않을까? 모든 근원적인 현재를 지속하는 시간화로서 통일적으로 이루고 구체적으로 현재로부터 현재에로 몰아가는 그런 보편적 충동지향성, 그리하여 모든 내용이 충동충족의 내용이도록 하고 목표를 향해 지향하도록 하는, 그리고 이때 또한 모든 원초적인 현재 속에서 더 높은 단계의 초월하는 충동이 모든 다른 현재 속으로 이르고 모두가 모나드로서 서로 묶이는 그런 보편적 충동지향성을 말이다, [그것도] 모두가 서로의 안에 함축되어있는 동안--지향적으로 [함축되어있는 동안]?* 환문과 재구축은 모든 원초성의 자아극을 통한 지속적인 중심화Zentrierung에로 이끈다. [이 자아극은] 객체화의 지속적인 진행, 그 속에서 세계적인 면모에 있어서 객체화된 자아가 그의 육체와 함께 서 있는 그런 진행 속에서 지속적으로 극으로 남는다.

*상호주관성과 시간성이 충동지향성에 의거해 결합되는 멋진 대목. 시간화도, 상호주관적 접촉도 모두 충동의 충족의 산물이다.

 이는 하나의 보편적 목적론, 전체 충동체계의 통일체 속에서 조화롭게 충족되는 하나의 보편적인 지향성의 목적론으로서의 그런 보편적 목적론에 대한 파악으로 이끌 것이다.

 그렇다면 물어질 것은 지속적으로 구성된 전체-원초적 근원적 살아있는 현재에서의, 모든 모나드들의 절대적인 '동시성'에서의 지향적 함축의 보편성 속에서 자아중심화Ichzentrierung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이다. [이 동시적 현재는] 공동체화된 모나드들의 충동의 상호적인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초월Transzendieren을 통해 [구성된다]. 이러한 열린 무한성, 초재의 간접성의 열린 무한성으로서의 열린 무한성은 본질적인 고유성을, 모나드단계의 무한성이 그에 속한다는 그런 고유성을 가진다--자아발달과 세계발달의 단계와 함께.* 이때 생물적animalisch 모나드, 동물의, 선동물의,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에 이르기까지, 다른 한편으로는 유아적이고 선유아적인 모나드들의 단계의 무한성 --'개체발생적'이고 계통발생적인 발달의 지속성 속에서.

*후설은 서로가 서로를 지향적으로 함축하는 모나드들로 이루어진 상호주관적 세계가 그 자체로 발달의 단계와 발달의 (아마 역사적일) 텔로스를 가지고 있다는 어마무시한 형이상학적 주장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본래적인 자아로서, 주위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작용들의 중심으로서, 그러므로 '존재자'의 구성들의 일깨워짐[각성]Erwachen, 마침내 세계지평의 구성[주체]로서의 자아들의 일깨워짐--[596]보편적 목적론 속에 함께 포함된 목적론으로서, 통일적인 의식적bewusstseinsmässig 모나드공동체의 자라나는 생동성 속 끊임없이 '상승하는' 전체 지향성의 목적론으로서. 이러한 것[모나드공동체]은 보편적으로 구성된 충동공동체이며, [이러한] 충동공동체에는 흐름 속에서 그때그때마다 지평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세계가 상응한다. 그에 따라 세계 [자신이] 그 자체로 언제나 다시금 모나드들을 상승된 훈련Ausbildung으로, '발달'로 데려오고 언제나 이미 데려온 그런 세계가 말이다. 이러한 형식 속에서 모나드들의 전체성이 부분적으로in Abschlagszahlung 자기의식되고, 궁극적으로zuhöchst 인간공동체로서 보편적으로 [자기의식된다].

 인간공동체는 하나의 보편적 세계, 그 속에서 인간공동체가 자신을 세계를 인식하는 것으로서 찾아내고 보편적 실증적 학문을 창조하는 [주체]로서의 유럽적 문화인간성 속에서 세계인식에의 의지에로 고양되는emporsteigen 그런 보편적 세계를 가진다. 그리고 오직 이로부터만 초월론적 환원의 가능성, 그를 통해 모나드들이 우선 인간모나드들로 발견되고, 그리고 나면 [제각각의] 모나드단계의 모든 모나드들의 세대적인generativ 연관의 형식 속에서 고차적이고 저차적인 동물, 식물과 그보다 아래의 단계[의 모나드], 그리고 모든 그것의 개체발생적 발달들을 [알아차리기] 위한 것인 그런 환원의 가능성[이 발원한다].

 나는 인간인 나로부터 출발해 나의 인간적인 모나드에로 가는데, 그 속에는 나의 인간적 공동세계Mitwelt가 직접적으로 함축되어있다. 섹스의 지향성에 대한 물음. 충동충족의 속에는, 직접적으로 보았을 때, 낳아지는 아이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다. 아이가 다른 주체 속에서 알려진 결과들Folgen을 가지며 궁극적으로는 어머니가 아이를 낳는다는 데 관한 것은 아무것도 말이다. 그러나 다른 '영혼' 속에 다다르는 것으로서의 충동충족은 타인에게로의 이입[타인경험] 그리고 타인의 삶에 대한 계속된 경험Forterfahrung이 아니며, 하나의 세계적 사건으로서의 생식작용의 세계적인 결과에 대한 경험이 아니고, 타인과 관계된, 그의 속으로 다다르는 자아작용[--]세계삶 속에서의 작용으로서[--]은 더더욱 아니다.*

*Q. 그 이유는 무엇인가? 충동의 충족이 자아나 세계의 구성 이전에 이루어져서인가?

 시간화로부터 그리고 시간화 속에서의 지속적 존재로서 나의 구체적 존재의 통일체는 또한 지향성의 통일체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적으로innerlich 취해졌을 때 [나는] 그 속에서 세계가 근원적으로 구성되는, 그러나 그 자신은 세계적인 것으로서 그리고 세계적 경험과 인식 속에서 해석되어 물어지지는 않는 그런 것의 통일체이다. [597] 세계에 '앞서'Vor der Welt 세계구성이, 선시간 속에서의 나의 자기시간화가 그리고 상호주관적 선시간 속에서의 상호주관적 시간화가 있다. 상호주관적 '생식작용'은 타인의 삶 속에서 새로운 과정을, 자기시간화의 변양물[의 탄생]을 '동기부여하며', 그리고 세계성의 면모가 탈은폐됨 가운데서, 인간으로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을 경험한다. 거기에 무엇이 세계적으로 보여지며 나아간 귀납들 속에서 무엇이 임신의 생리학과 관련하여 말해지는지를.

 목적론은 모든 모나드들을 포괄한다. 모태 속에서in der mütterlichen 일어난 것은 그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속에 '반영된다sich spiegeln'. 그러나 나는 오직 나 자신을 세계삶 속 학문적 인간으로서 발견하는 데까지만 [탐구를] 관철하며 나와 우리의 모나드적 존재에 대해 환문하고 그로부터 체계적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환문은 나로부터 그리고 세계, 그 속에서 내가 구체적으로 자연적으로 사는 세계, 나의 그리고 우리의 경험의 세계, 그 자체로 나의 세계에 속하며 자신의 방식대로 경험 가능하고 이러한 세계의 존재자로서 경험되는 그런 학문을 위한 것과 같은 세계인 그런 세계로부터 출발한다.*

*초기의 후설이 세계를 나보다 후행하는 것으로 인식했다면, 후기의 후설은 세계와 나 사이에 평등한 지위를 부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