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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번역

에드문트 후설, <현상학의 한계문제들> 일부 번역

Edmund Husserl, hrsg. von Rochus sowa u. Thomas Vongehr, Grenzprobleme der Phänomenologie. Analysen des Unbewusstseins und der Instinkte. Text aus dem Nachlass(1908-1937), Springer, 2013(Hua LXII)

 본능은 그것이 목표하는 바가 비직관적이며 무규정적이지만, 즉 구체적으로 표상하는 바가--말하자면 대상극이--없지만(어둡게만 알려지고 공허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향성이다. 또는, 본능이 충족을 목표하고 충족감을 안겨줄 만한 대상을 표상할 때 그 표상은 암묵적이다(Hua LXII, 87). 본능이 지향하는 바는 본능의 충족을 통해서만 사후적으로 드러나는데, 한 종류의 본능은 동종의 충족을 목표로 삼는다(Hua LXII, 83-85). (예를 들어 장신구가 허기를 채워줄 수는 없다.) 본능지향성은 충족행위를 정초한다(Hua  LXII, 85-86). 우리네 삶은 가치있거나 없거나 무차별한 본능과 욕구의 충족으로 부단히 이루어진 실천적인 삶이다. 그리고 실천적 삶에서 로고스는 우리로 하여금 도덕적 법칙을 세울 수 있게 해준다. 실천의 가운데서 우리는 가장 선한 자라는 신의 이념을 가지게 되며, 세계를 가치론적이고 목적론적으로 파악하는 종교적 신념을 습득할 수 있다.


Nr. 5 본능적 행함

§1 충동행위들(Triebhandlungen). 본능적 충동들 - 습득된(erworben) 충동들.

 본능적 행함(Tun), “목적 없이”. 그것의 통일성 속에서 (“행위”의 통일성으로서) 무언가에 달성하려는 활동들(Betätigungen)의 연속, 기존에는 직관적으로도, 비직관적으로도 목표로서 표상되지 않았던 [무언가에 달성하려는 활동들의 연속]. 이는 우리가 다음과 같이 말함을 배제하지 않는다. 행위하는 본능지향(충동행위의 본능지향)은 하나의 표상하는 지향 속에 정초되지만, 선행해서(im Voraus) 규정된[특수한] 것(규정된[특수한] 것의 보편적 특징들일 뿐일지라도), 선행해서 알려진 것을 가리키는 [지향] 속에 정초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관점에서 완전히 무규정적이며 오히려 규정성을 충족을 통해 비로소 전유하는 [지향 속에 정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상은 충족 속에서 표상에 전유되는 그것에 대해 “향해져” 있으며 다른 것에 향해져있지 않다. 이는 충동행위가 임의적인 것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다시금 발산지향(Ausgangsintention)의 같은 현상학적 내용물에 있어서 ‘같은 것’을, 말하자면 유형적으로 동종의 것들을 실현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동종성은 어둡고 무규정적인 표상에 의해 미리 그려져있다.

 습득된 충동들의 경우 어떠한가? 나는 일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낀다(Es treibt mich zur Arbeit). 또는 일의 도중에 나는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충동, 자연에 탐닉하고 싶은 충동 또는 피아노를 치고 싶은 충동 등등을 느낀다. 여기서는 피아노 연주에 대한 명료한(klar) 표상이 결여되어있을 수 있다. 표상 자체가 완전히 비직관적인 것일지라도(mag - sein), 그럼에도 표상은 자신 속에 규정성을 품을 수 있다. 실제로 피아노 [앞]에 가지 않는 채로 나는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다. 내가 원래 무엇을 원했던가, 무엇을 생각했던가? 나는 불명료성을 명료성으로 변하게 둘[만들] 수 있다. 명료한 것은 이전에 비직관적으로 사념되었던 것에 대한 직관적인 표상으로서 스스로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순수한 본능표상은 이러한 방식으로는 선행적으로 외현될 수 없다(nicht im Voraus explikabel). 본능적 욕구가 아직 만족에 이르지 못하는 한, 결여되어있는 것, 욕구(Bedürfnis)가 만족시킬 그것은 알려져있지 않다. 그것[결여되어있는 것]은 그 어떤 특징과 관련해서도(nach keinem Zuge) 선행적으로 규정되어 표상되어있지 않다. 표상의 공허한 내용물 속으로 침투해들어갈(eindringen) 그 어떤 가능성도 존립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식을 가지지 않는다. “내가 원래 무엇을 향해 의지했는지를 나는 나 자신에게 명료하게 만들 수 있다” 등 — 여기서 욕구와 관련해서는 — “무엇이 나에게 결여되어있는지[를 나는 나 자신에게 명료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구와 무언가를 향한 실천적 충동은 성립하며(geht) 실천적 충동은 규정된[특수한] 표상내용물을 가지는 최초의 활동을 통해서 매개적으로(intermediär) 충족된다: “그것이다(Das ist es).” 그러나 그것을 관통하여 충동은 계속해서(weiter) 성립한다. 경험의 원환 속에 두 번째 충동이 들어서면, 이것을 다시금 충족시킬 수 있다 등등.

 그러나 엉켜있는(verwickelt) 관계들, 표상관계들과 의지관계들을 전제하는 복잡한 활동들에서는 사정이 어떠한가? 둥지틀기(Nesterbau)를 예로 들자. 충동의 내용들이 그에 의존하는(sich auf - stützen) 지각들과 직관적 표상들이 어떻게 현시되는지는 사실과 관련된 물음이다. 만일 그것들[지각들과 직관적 표상들]이 거기 있으면, 그것들은 공허한 지향을 “뒤에서(hinterher)” 충족시켜준다. 이는 그러므로 (①)완전히 비차별화된(undifferenziert) 의미를 가지는[,] 표상 속 비직관적 표상들, 그것의 충족 속에서 그럼에도 고정된 방향성을 보여주는 또는 오직 충족을 통해서만 자신의 의미를 차별화하는 표상들, 그리고 (②)비직관적일 때조차 차별화된 의미를 가지는 표상들(“무언가”에 대한 표상과 혼동해선 안 된다) 사이의 구분을 포함한다.

§2 본능적 행위. 본능적 충동과 충동충족. 좁은 의미에서의 행위. 본능들로부터 이끌어질 있는 행위들

 본능행위들에 대한 현상학적 이해. 감성적으로 그리고 감성적 쾌감(Lust)과 함께 충족되는 감성적 충동들, 욕구들로서의 감성적 지향들의 충족. 이어지는 이해, 그를 통해 충족의 형식과 내용물이, “목적들”로부터, 본능의 목적들로 향해져있는 [그런 이해]. 본능의 충족에 봉사하고 그것의 목표를 달성하는 행위들의 종류. 배고픔을 달래기 위한 먹기 행위, 음식에 대한 의지함, 성적-감성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성적 행위(Geschlectshandlung). 사회적-동정적 충동들. 사회성충동(Geselligkeitstrieb). 낯선 영혼삶에 대한 타인경험하는 포착에서 오는 근원적 기쁨. 낯선 영혼삶의 기쁨에 대한 타인경험하는 참여에서 오는 근원적 기쁨. 근원적인 연민(Mitleid), 부모와 자식 간 관계에서: 낯선 욕구들의 진정을 위한, 낯선 고통의 제거를 위한 등등의 근원적인 충동.

 본능의 ‘맹목성’. 처음에는 공허하게 규정된, 충족하는 사태실질성(Sachlichkeit)의 어두운 지평. ‘불만족’은 만족에, ‘쾌감없음(Unlust)’은 종결시키는 쾌감에 향해져있다. 이 종결시키는 쾌감은 그런데 쾌감으로 가득한(lustvoll) 것, 하나의 ‘사태’를 요구한다. 행위목표는 알려져있지 않지만, 불만족은 만족이 될 것이다(soll - werden). “향해진”[, ]감정(Gemüt)의 공허한 것으로서, “충족”의 “느낌”으로서 무언가에-기울어짐이라는, 의미라는 이중적 방향성. 그러나 이러한 공허한 것은 또한 정초하는 토대의 공허함이며, 방향은 그것[공허한 것]의 충만함을 향해 성립한다. 이는 감정을 위해서도 방향을 부여한다. 만족시키는 것은 곧 만족시켜주는, 목표된 그리고 사랑받는 사태이다. 이는 그러므로 분석의 특수한 주제이다.

 본능 속의 ‘이성’. 어두워진[희미해진] 이성. 행위들 그리고 행위들의 공허한 지평들, 그러므로 행위들의 “목표들”(경향성의 목표들)의 규정 가운데서 본능이 탈은폐되면서, [그제야] 쾌감없음은 만족되지만, 충동 또한 목표한다[목표하는 바가 있다]. 그런데 [충족감을 안겨주는] 사태실질적인 것이 들어섰을 때 그것은 [상황]에 따라서 “그 자체로 가치있는 것” 또는 “그 자체로 가치없는 것” 아니면 무차별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금: 그것은 이어지는 삶의 경과에서, 그것이 가치 없거나 무차별한 곳에서조차, 하나의 가치 또는 더 높은 가치를 위해 부상할 수 있다(herausstellen). 이에 따라 충동은 이성적인 충동, 비이성적인(“거짓된”, “병적인”) 충동 그리고 공허한 충동으로 나뉜다.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조차 이때는 당연히 다른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 더 높은 가치를 위한 수단으로 현출할 수 있다. 음식을 향한 충동을 예로 들 수 있다. 특수한 맛이 그 자체로 가치있을 수 있고, 포만감과 엮이거나 엮이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배고플 수 있고, 그 맛이 나는 음식을 먹으면서 나는 배불러진다(satt). 이러한 맛이 내게 마음에 들고 그것은 그 자체로 가치있다. 나는 그러나 또한 배가 부른데도 이러한 맛에 대한 동경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내가 [그런 맛이 나는] 음식을 먹으면 이 동경은 만족되지만 포만감 없이 또는 불쾌한(unlustig) 과도한-포만감의 방식으로, 그러므로 방해되는(stören) 방식으로 만족이 이루어진다. [이 경우] 음식을 향한 동경은 본능이 아니다. 그 동경은 규정된 욕망(Begehren)이다. 배고픔에서의 동경, 허기(Hungertrieb)가 본능이다. 나는 배불러지게-해주는(sättigend) 요리를 상상한다. 그러면 이러한 것은 충동을 만족시켜주는 무언가(그러나 다른 것이 이를 위해 들어설 수 있다, 본능은 그의 보편성을 가진다[본능은 하나의 특수한 것으로만 충족되지 않는다?])로서 상상된다. ★충동은 무엇을-향함의 규정성보다 앞서며(vorhergehen), 규정된 무엇을-향함에 대한 표상은 “뒤따르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내용물을 가지는 맛에 대한 한 욕망의 목표로서의 한 음식에 대한 표상은 무언가에 대한 표상이고, 알려진 방식으로(bekanntermaßen) 내 맘에 들었던 것이고 내가 지금 다시 향유하고 싶은 것, [과거에 향유했던 것과] 같은 것은 아니지만 같은 특수성을 가진 것이다. 생각(Idee)이 욕구를 깨우며, 마음에 드는 것에 대한 생각(흡사 맘에-드는-것이 내 눈앞에 아른거린다)이 욕구를 동기화한다(motivieren). 다른 경우에[도] 충동은 선행하는데, 그 충동은 충족을 “향해” 있다. 충족하는 것의 표상은 나타날 수 있고 “경험을 근거로 해서”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욕구되며, 충동을 충족하는 것으로서 거기 있으며(“그것은 나를 만족시킬 거야” 하는 것으로서), 그런 것으로서 그것[충족하는 것]은 욕구된다.* 이는 물론, 어렵지 않게 계속될 해명의 작은 시작이다.

*각주: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욕구(소망)은 명시적으로(explizit) 향해지며, 본능적 충동은 암묵적으로(implizit) 향해진다고 말이다. 어두운, 충동과-유사한 소망은 명시적으로 향해지지만, 어두운 표상을 통해서 그렇고, 충동은 암묵적 표상을 통해서 [향해진다]. 그러므로 또한 명시적 표상과 암묵적 표상을 구분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맹목적인 본능은 그 자체로 이성적인 것을 향해 또는 보편적으로 목적에-맞는(zweckvoll, purposeful) 것을 향해, 말하자면 그 자체로 가치있는 것과 간접적으로 관련되어 나타날 수 있다. 본능은 그러나 또한 변태적이고, 병적이고, 가치없는 것에 향해질 수 있다.*

*각주: 욕구의 개념을 다음의 차이들을 가지는 유로 포착하는 것이 아마 좋을 것이다. a) 본능적 충동, b) 소망, 소망은 “의지의 작용없이 진행되는(ideomotorisch)” 것이다. 이때 충동은 “쾌감있는 것”을 향해 “향해져” 있다. 그러면 충동은 경향(Tendenz)과 동일하지 않다. 기울어지는 지향[경향]은, 그것이 본질상[,] 실천적 지향들과 얽혀있을 수도 있지만 그 자체로는 얽혀있는 것이 아닌 사유지향 속에, 독사적 지향들 속에 놓여있는 것처럼 [있다.] (Dann ist Trieb nicht identisch mit Tendenz, tendierender Intention, wie sie in den Denkintentionen, in den doxischen Intentionen liegt, die ihrem Wesen nach zwar verflochten sein mögen mit praktischen Intentionen, aber nicht in sich selbst solche sind.) 이를테면 연상하는 것으로부터 연상된 것으로의 이행 속에서의 경향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지만 충동[의 이행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물론 경향과 충동은 “경향”으로 표현될 유적으로 공통적인 것을 가진다. 욕구는 표상과 동등한-수준의(gleichstehend) 유가 아닐 것이다. (맘에-듦으로서의 쾌감은 가치이며, 그렇지 않으면 감각이다.)

 삶의 과정은 지속적인 충동지어져-있음(Getriebensein), 욕구함(=소망함), 의식된 노력함 그리고 목표를 향한 의식된 행위함의 과정이다. 맹목적 정향들(Neigung)에 굴복함, 욕구들의 자극에 굴복함 또는 탐닉함의 과정, 자발적인 가치평가함과 가치를 위한 그리고 무가치에 반한, 높은 가치를 위한 그리고 낮은 가치에 반한 자유로운 자기결정 등등의 과정 말이다. — 그러므로 맹목적인, 비이성적인, 부자유스러운 활동성들(Tätigkeiten)의 과정과 얽힌 “의무에 따른” 자유로운 행위들의 과정이 [곧 삶이]다.

 이러한 삶의 과정 속에서 나는 “실천적 경험들”의 다양체를 겪는다(machen).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의 모든 진행은 나에게 새로운 실천적 목표를, 사태실질성들, 대상들, 관계들 등등의 새롭고 새로운 유형들을 열어준다. 이 유형들은 내 주관적 처리의 권역 속에 [들어]서있으면서, 내 할-수-있음의 내부에서, 나의 충동을 만족시키며, 나에게 가치있는 것으로서 보여질 것만이 아니라 [다른 충동들도 만족시켜준다.](nicht nur das, ⟨die⟩ auch mir Wertfülle zeigen würden.) 

 나는 그-자체로-가치있는-것들(Selbstwerten)과 수단적으로-가치있는-것들(Mittelwerten)에 대해 충만하게 배우고, 더 낮은 그리고 높은 가치들에 대해 충만하게 알고, 나를 유혹하는, 충동과 욕구가 그것을 향해 나를 열정적으로 끄는 가상적인-가치들(Scheinwerten)에 대해 충만하게 안다. 이 충동과 욕구는 그러한 것으로서 그 자체로는 무가치하고, 무차별하거나 오직 열등한 가치를 가지지만 같은 것에 대한 가능한 충족으로부터 가상적-가치성을 획득하는 것이다(die als das von der möglichen Erfüllung derselben her eine Scheinwertigkeit erhalten, während sie in sich selbst unwert, gleichgültig oder nur von unter- geordnetem Werte sind). 나는 자유롭게 나의 점점 풍부해지는(보편적이고 특수한 유형들로 점점 풍부해지는, 개별적인 환경의 소여들과 결합되어, 주어진 사물들로, 주어진 개별적 환경들로 점점 풍부해지는) 실천적 경험성들의 권역 속에서 나의 목표를 세울 수 있고, 이러한 자라나는[불어나는] 자유로운 권역 속에서 나는 이성적으로 행위할 수 있다. 나는 가능한 것을 알고, 연관들을 알고, 수단과 목적들 간 관계들을 알고, 그것들의 토대에 놓여있는 인과성들을 알고, 내가 어떤 것을 행할 때에(또는 나에 의해 처리되는 것으로서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경험에 걸맞게 이런 그리고 저런 것이 결과로서 나타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곧 그 결과는 더 높은 가치, 나에 의해 자유롭게 소망되고 그리하여 의지되는 등등의 가치를 낳는다. 이는 물론 내가 나의 욕구에 휩쓸려 갈 때, 내가 한갓된 이성을 가지고 결과적으로 수단을 통해 무가치한 목표를 실현하고자 할 때에도 성립한다.

 그렇게 우리는 실천적 지혜와 비-지혜의 유형에 대해 깊고 학문적으로 쓰고 써야 했다. 인간성의 선학문적 진보의 유형과 모든 학문적인 것 이전의 실천적 문화의 가능성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철학적 인식[이전의 실천적 문화의 가능성?]에 대해 [말이다].

§3 실천적 삶을 위한 사유의 성취들

 일반적으로 사유함 또는 생각은 실천적 삶을 위해 무엇을 성취하는가[leisten, 수행하는가]? 사유함 또는 생각은 선학문적 삶 속에서 무엇을 성취하는가? 왜냐하면 우리가 삶의 단계들을 나눌 때, 우리는 선학문적인 단계와 학문적인 단계를 나눠야 했을 뿐만 아니라, 전자의 내부에서 한갓된 표상의 단계와 사유의 단계를 나눠야 했기 때문이다. 사유함은 보편적으로(in der Allgemeinheit)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가진다. 사유함이 특수한 것에 대해 생각할 때조차, 사유함은 같은 것[특수한 것]을 보편성의 관점 하에서 그리고 보편성의 형식들 속에서 생각한다. 그리고 보편성에는 필연성이 (보편성필연성으로서) 속하며 그러면 법칙성의 단계와 우리가 법칙적인 또는 필증적인 통찰[직관]이라고 부르는 통찰[직관]이 [역시 거기에 속한다.] 실천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것[사유함?]은 한편으로 노력함, 가치평가함, 지배함[walten], 진리평가함, 이론적 인식으로서의 이론적 진리를 위해 노력함 그리고 그것을 목표함이라는 새로운 권역을 낳는다. 다른 한편으로 그러나 그것[사유함?]은 이론적 인식의 가능한 응용을 낳고 수단으로서 그와 같은 인식에 대한 노력을 낳는다—보편적 일반성[universelle Allgemeinheit] 속에서 그리고 그밖의 다른 행위목표와 행위수단에 적응하여 모든 행위 일반에 봉사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그것[사유함?]은 준칙들, 보편적 규칙들에 따른 행위를 가능케 하며, 보편적이고 우선 가치론적이고 실천적인 종류의 형식적인 규칙들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또한 보편적인 자연인식과 마침내 자연과학적 인식의 실천적 목적을 위한 응용을, 자연과학적 인식과 실천적 의식의 수단-목적-형식들 그리고 실천적 의식의 형식적 법칙들과의 결합을 통해 같은 것의 실천적 응용[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도처에서 그렇다.

 그렇다면 질문은 그로써 무엇이 성취되며, 무엇이 우위[Vorzug]를 이루고, 무엇이 준칙에 따른, “윤리적”이고 자연적인 연관들에 대한 이론적 인식들에 따른 (그 자체로 다시금 의식 속에서 목표로 세워지는) 행위들에 (그 자체로 다시금 사유를 통해 보편적인 방식으로 정식화되고 그렇게 가치로서 인식되며 그런 다음 실천적으로 의지될 수 있는) 그것의 특수한 가치와 그것의 실천적인 가치를 제공해주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나는 더 이상 간접적으로 직관적으로 실현되는 연관들에 묶여있지 않다. 나는 그를 통해 내가 미리 가능한 단일적인 연관들을 위한 틀을 윤곽지어놓은 그리고 그를 통해 내가 이 연관을 미리 개념적으로 구축할 수 있으며 그러면 개별적이고 직관적으로 주어진 사태사정의 허락(Zuzug) 하에서 [저 연관을] 구체적인 유형에 따라 미리-볼 수 있고, 미리-스케치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법칙들과 법칙들의 연역을 가지고 있다(ich habe die Gesetze und die Deduktion aus Gesetzen, wodurch ich im Voraus den Rahmen für mögliche singuläre Zusammenhänge vorgezeichnet habe und ⟨wodurch ich⟩ diese im Voraus begrifflich zu konstruieren und dann unter Zuzug der individuellen und anschaulich gegebenen Sachlage dem konkreten Typus nach vorauszuschauen, vorauszuzeichnen in der Lage bin). 수단과 목적의 연관들에 따른 나의 가능한 행위를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가치론적이고 윤리적인 원칙들을 따라 미리, 곧 원리적인 보편성 속에서, 최상위의 가치층들과 특수한 가치유들과 가치종들을 구별할 수 있고, 그것들을 상대적으로 가치들로부터, 나를 미리 의식적으로 이끌어주는 우위의 원리들로부터 얻을 수 있다. 선호되는 의지(의지는 의지하는 이성으로서의 사유단계 속에서 결정된다 = 원리적으로 우선적인 것과 최상의 것을 위해 사유에 걸맞게 매개된 이성)의 원리들을 따라서 나는 선의 규칙들, 모든 나쁜 것을 미리 배제하는 등등의 규칙들을 만들 수 있다. 나는 “도덕적이다” — 나는 실천적으로 지혜롭고 하부 단계들에서 사유함 없이 “이성적이고 선하다.” 좁은 삶의 원환 속에서는 그것으로 충분할 수 있다. 나는 말하자면 “선한 동물”이다. 더 높은 단계에서 나는 사유에 걸맞은-이성적인 통찰을 통해, 사유의 보편성의 매개(Medium) 속 통찰을 통해 도덕적이고 실천적으로 이성적이다. 로고스는 더 고차원적인[높은] 사유삶(한갓된 표상삶에 비해 더 고차원적인)의 매개자일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리고 특히(erst recht, especially) 사유형식뿐만 아니라 새로운 내용물을 취하는 가치론적이고 실천적인 삶의 매개자 속에 [있다.]

§4 그의 실천적인 지평 선한 인간

 도덕적인 그리고 다른 식으로 [말하면] 선한 인간(gute Mensch)은 단적으로 선하지만, 위계(Relation) 속에서만 선하다. 그는 다음과 같을 때 단적으로 선하다. 그가 그의 인간성의 단계들에 걸맞게 그리고 그의 개별적인 삶의 과제[—]이러한 [인간성의 ]단계로부터 그에게 그리고 그의 개별적인 관계들(Verhältnisse) 속에서 늘어나는[—]에 걸맞게 최선을 행할 때, [그가] 이러한 단계에서 가능한 한 최대한 멀리 생각하고 최대한 많은 통찰들[직관들]을 획득할 때 그리고 그러므로 [그렇게] 해야 할 때: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향해져서(so weit denkt und so weit Einsichten gewinnt, als er es auf dieser Stufe kann und daher soll: theoretisch und praktisch gewendet). 수공업자, 농부, “단순한” 인간—나는 그에게서 자연과학, 철학적 논리학, 윤리학 등등을 요구할 수 없다. 그리고 그는 그가 그의 일(Sache)인 모든 것을 또는 그의 일이 어떠한지[에 따라 ]노력하고 행할 때 선하다. 이는 더 유능하고(mehr können), 그러므로 더 그리고 높은 것을 의지해야 하는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들의 단계는 처음부터 높은 것이며, 그들이 실현하는 가치는 그러면 곧 또한 더 높은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위계에서 더 높은[고차적인] 인간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또한 그들의 단계가 가능케 하고 요구하는 만큼보다 더 나을 수 없는 한 [그런 의미에서는] 더 나은 인간이 아니다(Sie sind aber nicht bessere Menschen insofern, als auch sie nicht besser sein können als so gut, wie ihre Stufe es ermöglicht und fordert). 모든 인간유형과 개별적 인간은 그의 실천적인 지평을 가지며, [그 지평] 그 자체가 다시금 유형으로서 또는 개별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모두는 그가 이러한 지평의 최선을 [위해] 노력한다는 목적이념 하에서 살 때 최선의 인간이거나 그의 이념의 선한 자이다. [저] 지평을 통해 그는 그의 완전성을 달성하고 지시한다. 이러한 지속적이고 불가결한(unablöslich) 신념(Gesinnung) 속에서 [그렇다].

 선한 인간에게는 그 어떤 윤리적인, 실천적인 결함(Manko)도 달라붙어있지(anhaften) 않다. 그는 절대적으로 흠잡을 수 없는 자이다. 그는 최선을 행하며, 또는 최선을 [위해] 노력하며, 이성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더 이상[최선의 이상을] 요구할 수 없고, 스스로를 더 높게 방향지워진 의지함의 객체로 만들 수 없다. 누구도 그것을 그에게 요구할 수 없다. 그는 그의 한계(Begrenztheit)를 통해 그에게 미리그려져있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한다.

 그의 개별적인 완전성에는 또한 겸허(Bescheidenheit)가 속한다. 또한 그가 경우에 따라서 타인의 더 높은 단계를, 타인의 실천적 가능성들의 더 높은 가치 등등을 매우 잘 평가해주고, 타인이 자신의 목표 속에서 사는 한에서 그리고 사는 만큼, 상상하면서(erahnend) 타인을 자신 위에 놓고 타인에게 더 높은 순위(Rang)를 줄(einräumen) 수 있고 주고자 하고 주어야 한다는 점이 [선한 인간의 완전성에] 속한다. 그리고 마침내 모두가 자신보다 높은 순위[에 있는 타인]을 가지고 있다(Und schließlich hat jeder seinen höheren Rang über sich). 모든 인간은 그의 유형에 따라서 [선의] 무한한 단계계열(Stufenfolge)의 구성원이다. 모두가 자신 위에 무한자 속에 놓이는 것으로서 [가장 선한 자라는] 신의 이념을 가진다.

 종교적 관점에서는 [사정이] 다른가? 개별자의 삶의 경험 속에서 비로소 또는 오히려 전통을 통해 인류의 기억으로 지속되는(sich durchhalten) 인류(Menschheit)의 삶의 경험 속에서, 그리고 개별자가 이러한 계속해서 작동하는 경험의 통각적인 원환 속에서 만들어내는 특수한 삶의 경험 속에서 비로소[,] “적대적인” 운명들에 반해, 그에게 종교적 믿음이, 선의 힘에 대한 믿음으로서, 늘어나지 않는가? [이 선의 힘]은 모든 선한 것들과 엮여 있으며, 모든 선한 것들 속에서 작용하고(auswirken), 세계를 그것의 가치론적 의미로서 실제로(realiter) 함께-두고, 실제로 목적론적으로 파악한다(ergreifen). 이는 자신의 실천적-직관적 통찰을 자신과 더불어 [가지고 사람을] 이끄는 하나의 실천적인 믿음이다(Das ist ein praktischer Glaube, der seine praktisch-anschauliche Einsicht mit sich führt). 그러나 이에 대해 이념으로서 더 위대한 순위에 있고 모두에게 기대될 수는 없는 생각믿음(Denkglaube)이 있지 않은가(Aber steht darüber nicht als Idee ein Denkglaube, der von größerem Rang ist und der doch nicht jedem zugemutet werden kann)? 모두가 선한, 진정한 신의 자식이며 신에 대한, 선에 대한 믿음 속에서 산다. 그는 자신이 신과 하나라고 느낀다. 그러나 다양한 성숙함의 단계[에 놓인] 신의 자식들이 있다. 신의-자식됨은 윤리적 요구[—]그것이 가능한 한에서[—]의 틀 속에 속한다. 신의-자식됨은 모든 유형에 대해 하나의 규정된[특수한] 이념이며 이념으로서 하나의 규정된[특수한] 요구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나에게서 가장 이른 시기에 이미 자라난 그리고 우선 부각되었던(voranstehen) 생각의 계열들이 아직 고려되지 않았다.


 본능들 사이에는 경쟁관계가 있다. 한 본능이 다른 본능을 압도할 수 있는 것이다. 본능 및 충동은 쾌감을 목표로 삼으며, 이때의 쾌감은 자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구성적 통일체다. 그러나 본능 및 충동이 쾌감을 목표한다고 말할 때 그 '쾌감'은 다의적이다. 예를 들어 사과를 먹을 때, 먹는 행위 자체/배부름/과즙의 맛 모두 쾌감을 불러일으키지만 다른 의미에서 그렇게 한다. 본능 및 충동의 발동은 끝이 없고, 언제나 충족되어야 할 것으로 자아에게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자아의 삶은 인식삶이기 이전에 "본능적 충동삶"이다(Hua LXII, 95). "자아는 자기 자신인 그것이며 본질적으로 근원적이며 습득된 욕구들의 양식 속에서, 욕구에서 향유로 이행해가고 향유에서 욕구로 이행해가는 욕망양식 그리고 만족양식 속에서 존재한다."(Hua LXII, 96) 특히 모든 동물은 자기보존과 종보존의 본능을 가진다.

 동물적 발전의 단계에 따라, 본능의 주체로서의 동물은 자신이 아닌 존재자, 세대, 탄생과 죽음, 곧 상호주관적 주변세계에 대한 의식을 가질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 (고차적인) 동물은 자신이 특정한 세대의 구성원이며 조상과 자손을 가진다는 점을, 하나의 공동체, 궁극적으로는 종의 공동체(e.g. 인류공동체)를 만들며 살아간다는 것을 의식한다.


Nr. 6 충동들과 본능들. 자기보존 그리고 유의 보존 속 인격적 삶

§1 본능적 충동들과 습관성의지능동성의 지향적 변양으로서 의지수동성

 그것의 상황적 개별성 속, 그것의 계속되는 지속(Fortdauer) 속, “배고픔”-지향(나는 배고프다)으로서 자아의 향해있음(Gerichtetsein), 경우에 따라서 잠이라는 휴지기에 의해 또는 [기타] 중단들, 다른 관심들 사이에 끼게-됨(Zwischenschiebung)에 의해 중단되는 [그런 향해있음] — 이를테면 서로에게서 상대적으로 독립적으로 충족될 수 있는 여러 본능지향성들, “배고픔”의 여러 종류들의 경쟁[파산?](Konkurs) 속에서 “더 근원적인 것[고픔]”(etwa „ursprünglicher“ im Konkurs mehrerer Instinktintentionen, mehrerer Sorten von „Hunger“, die relativ unabhängig voneinander sich erfüllen können). 음식-배고픔(Nahrungshunger)은 이를테면 성욕(Geschlechtshunger)을 압도하거나 또는 성욕이 배고픔을 압도하며, 그리고 특히 충족[된] 만족은 아직 만족되지 않은 다른 고픔(Hunger)을 말하자면 가려준다.

 “그” 고픔이 만족되지 않은 한에서 그것[그 본능]은 그것의 현행성형태(의식적 충동)의 “중단”을 관통하여[서도] 하나이고 같은 것이다. 그것은 자신 속에 방향의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자아는 “언제나 아직(immer noch)” 고프다. 자아는 고파하는 존재로서 존재한다(Es ist als hungerndes). 고파함은 자아의 습성이며, 의식적 충동들의 도중 연속적인 것, 의식의 중단의 도중[에는] 비현행적인 것이지만 [결국은] 특정한 방식으로 연속적인 것, 말하자면 “여전히(noch immer)”의, “사이에” 또한 “계속-고픔”의 방식으로 [그러한 것], 이러한 것이 “의식”되지 못할지라도 [그러한] 것이다. 충동이 충족에 이르면 충동은 충족하는 것 속에서 명백한 방식으로 “종결된다”. 충동은여전히충동이지만, 충만성(Fülle)의 양태 속에서의 충동이다. [충동을] 충족하는 것은 “대상”, 충동이 향해져있는 그것이며, 이러한 향해진-곳(Worauf)이 곧 충족을 통해 탈은폐된다[드러난다]. 그러나 여기서 “대상”은 현상학적으로 순수하게 하나의 충족하는 무언가를 가리킨다. 충족하면서 접근해가는(nähernd) 행함 속에서 (“고픔”으로서) 충동을 이완해주면서, 부정적 충동에서는 멀리-떨어뜨려놓는(entfernend) 행함 속에서[이겠지만], [충동이 향해져있는 ]그것은 쾌락, 충동의 충족 자체이지 [단순히] 동반되는-자료가 아니며 쾌의 감정이다. 그러나 [저] 무언가는 그 나름대로 구성된 통일체이며 다르게 주어질 수도 있었던 무엇으로, 다만 그것이 충동이 향해진-곳 또는 충동이 반하는-곳으로서—향유에서[—]알려지고 입증된다는 점에서 부각된다(ausgezeichnet). 이러한 알림(Ankündigen)이 이미 충족의 시작이다. 알림은 충족의 과정에 포함된다. 배고픈 내가 무언가 영양가-있는 것을 시야 안으로 받아내면서, 이미 음식 옆에 있었더라도, 어쩌면 처음부터 이미 음식 옆에 있었을 때조차 [그러하다.] 저 알림이 본래적인 포화를 이끌어준다(einleiten). 나는 영양가-있는 것[또는 알림]의 근처에서 서두르며 [영양가 있는 것을] 포착하고 먹기에 속하는 것을[행위를] 수행한다. 그 속에서 나는 본래적인 충족을, 이러저러한 것의 향유(Genuss)를 체험한다. 향유의 쾌감(종적인 향유)는 “충족”의 양태 속 긍정적 충동이며, [저 향유는] 이러저러한 것의 향유 또는 이러저러한 것을 통한 향유이고 [자신 안에] 차이와 단계들을 가지며 그러므로 다의성의 근거(Vieldeutigkeitsbegründung)를 가진다. [쾌감의 다의성의 예는 다음과 같다.] 사과를 먹는 데서 오는 쾌감, 먹음, 깨물음, 사과로부터 점점 과즙이 나오도록 만드는 씹음 가운데서 오는 사과에 대한 쾌감 등등.

 내가 그것을 향해 배고파-있음 속에서 향해진 그것은 다의적이며, 내가 지금 충동의 향해진-곳으로서 [무엇을 간주하는지가,] 첫 번째 의미에서 쾌감(향유)를 간주하는지 아니면 관련된 대상에 대해 육체적으로 활동적인 과정을 그리고 [자신에게]서 쾌감을 만들어내는 것으로서 대상들 자체를 간주하는지가 완전히 규정되어있지 않다.*

*각주에서 후설은 긍정적 충동과 부정적 충동을 구분하며, 그것들 각각에 상응하는 수동적 종합, 충족과 향유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다.

 모든 특수성에 선행하는 “보편적인” 배고픔, 충동의 보편성. 이는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보편성이 아니며, 이미 가능성들의 다양체를 [그것이] 미리-그려진 채 자신 안에 담지하는 [그런?] 지평의 보편성 또한 아니다. 거기에는 오직 처음에 충족과[, 당장 관계하고 있는 것과] 다른 것이 마찬가지로 [충동을] 잘 충족시켜줄 수 있다는 의식이 없는 하나의 충족이 있다. 쾌감은 이러한 [특정한 ]쾌감이며, 이러한 [특정한 ]대상에 즉해있으며[an sein], 이러한 [특정한 ]대상에 즉해 육체적으로 몰두해있기(sich betätigen, to occupy oneself)이다. 충동의 충족 과정 속으로 들어서면서, “그것을 통해 만족이 아마 올 것이고 와야만 하는”의 방식으로의 몰두하기 말이다. 보편적 지평으로서 보편성의 발전(Ausbildung). “어떠한” 식료품에 향해져있는 배고픔, 다양한, 알려진 그리고 아직 알려져있지 않은, 그러나 친화력있는(verwandt) 형식을 가진 [식료품]—우리가 우리의 문화권역에서 “요리”[라는 단어] 하에 이해하는 것 등등. 개별적 사태실질적 방향의 발전, 특정한 요리를 향한 충동방향의 발전. 케이크에 관한(nach) 배고픔, 빵에 관한 배고픔, 와인“을 향한(auf)” 목마름 등등.

 배고픈 나의 편에서는—충동이 보편성권역에로 들어가는 경우(나는 먹고 싶다—이것 혹은 저것을)의 충동지향성의 분열. 나[를 끌어당기는 ]더 강한 그리고 더 약한 자극, 촉발 또는 이러한 지평 위에서의 이 혹은 저것을 향한 향함-지향(Hintendieren). 단계성(Gradualität), 경쟁, 나 자신의 굴복, 더 강한 경향의 승리—일시적인 절제(Sichzurückhalten) 속 [충동의] 강도 시험하기, “최선의 것” 고르기.

 언제나 다시 음식에 대한 욕구들을 가지는 자로서의 나의 주관성의 통일성, 정기적인 만족을 관통하여 그리고 삶의 열린 지평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삶이냐면] 그 속에서 자아가 계속해서 음식을, 음식의 준비를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요리하기를, 음식 소유하기를, 그리고 욕구가 나타나면 음식을 준비해-놓기를 찾아나서는 [그런] 삶.

 모든 의식된 충동은 하나의 충동차원에, 욕구의 요구되는 만족을 향한 자아의 구성된 지속되는(bleibend) 방향에 속한다. 이러한 욕구는 언제나 [자아를] 충동질해왔으며 충동질할 것이고, 언제나 다시금 만족되며 만족되“어야 한다.”

 본능적 충동삶 속 연상과 통각. 모든 구체적 현재에는 본능적 충동의 구조유형이 속한다, 또는 자아에는 매 순간 그의 충동습성이 속하며 시간의 전진 속에서 자라나는 그리고 다시금 충족되는 욕구들의 정기성이 욕구유형 속에서 경과하며 [속한다.]

 충동삶 속의 또는 자아의 충동구조 속의, 자아의 습성 속의, 욕구들의 구성적 전개(Fortbildung), 먼 목표, 마침내 삶의 목표와 더불어 의지방향들의 발전 속 게네시스[발생]. 목적으로서의 목표와 목적을 위한 수단. 발달습성(Entwicklungshabitualität)으로서 이러한 습성. “맹목적인” 근원본능, 근원충동 또는 근원습성으로부터 (숨어서) 발전하는 자아의 본질형식.

 의지방향들. 습성적으로 하나의 목표에 향해져있음과 함께인 자아와 자아의 익숙함들(Gewohnheiten). 의지권역 속의 수동성. 산책하고자 하는 욕구. “외출하고 싶다” 속에서 그 욕구를 “수동적으로” 따름. 이때 이를테면 생각-속에-있기, 아니면 다른 어떤 고민들에 몰두하기 그리고 수동적으로 “익숙한” 길 걷기, 선택함 없이, 그 길에 특수하게 향해진 의지적 결정 없이 [익숙한 길 걷기]. 그럼에도 나의 의지에 반해서가 아니라, [나를 비의지적으로] 이끌어준다는 의미에서. 나는 여름의 온도에 따라서 근원적으로는 숙고한 채로 때로는 이 길을 때로는 저 길을 선호하면서 간다. 더울 때는 [특정한 ]한 길로 가는 버릇이 있는 등. 그런데 지금(지금은 덥다) 나는 숙고함 없이 그늘진, 시원함을 약속하는 길을 간다. 그러므로 비의지적으로(unwillentlich). [그러나] 의지구조 없이는 아니다. 그것은 의지수동성이다. 충동과 의지로서의 원초적인(urquellend, primordial) 자아능동성의 지향적 변양.

 자아는 자기 자신인 그것이며 본질적으로 근원적이며 습득된 욕구들의 양식 속에서, 욕구에서 향유로 이행해가고 향유에서 욕구로 이행해가는 욕망양식 그리고 만족양식 속에서 존재한다. 그러나 이때 곧 다양한 단계들의 욕구의 근본종들의 유형을 [자신] 속에 유지하면서 [존재한다.] 저 유형은 전체 삶에 구조형식을 주는데, 이는 자아로서의 자아가 욕망의 방향들과 근원충동의 방향들을 고려한 의지방향들의 체계적 구조를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이 모든 것은 의지의 양식들이며, 근원충동은 원형(Vorgestalt, prototype)[에 해당한다.]

 동물적인, 보편적-“생기적(vital)” 충동들, 종적인 본능들, 개체발생적 자기보존의 그리고 계통발생적인, 종보존의 충동들—겉으로 보았을 때의(von außen gesehen), 물리적으로 정향된 시선[에서 보여지는 충동들]. 물리적-유기적 현존재와 그것의 물리적-유기적 “삶”의 과정, 실재로서의 물리적인 것은 일반적으로 그것의 지속하는 현존 속에서[의] 물리적-유기적 통일체를 취소시키는(aufheben) 변화들을 허락한다. 물리적-유기적의미에서의 “죽음”. 이와함께필연적으로주어지는것은구체적이고완전한의미에서의동물적죽음이다. [죽음에서는] 그 어떤 동물적-물리적 삶도 그 어떤 동물적 주체도 더 이상 현존하지 않으며, “자아적인” 충동습성들의 기체 등등인 그런 삶[이 더 이상 없다]. 자기보존과 종보존의 물리적-유기적 고찰방식과 “충동”에 대한 이야기는 전형적인 형태로 기대되는 귀납적인 생기방향(Geschehensrichtungen)을 물리적인 자연 속에서 지정해준다(bezeichnen).

 물리적 자연연구자들의 것이 아니며 그들의 귀납적-이론적 경향들과 관심들이 아니라 스스로를 심리적 주관성 속으로 옮겨놓음에 대한 고찰, 초월론적인 [것]으로서 초월론적 변형(Wendung) 속에서 스스로를 심리적 주관성 속으로 옮겨놓음에 대한 고찰인 그런 내적 고찰에서 우리는 동물적 주체를 그에게 미리 주어진 주변세계의 주체로서 가지며 동물적 주체를 그의 충동들, 충동습성들, 그의 습득된 [어딘가를]-향한-방향과 그 방향에 상관적인 습득물들[—]그 속에 동일한 대상들이 놓이는[—]의 주체로서 가진다.

 특히 음식에 대한 충동, 공동체화의 본능적 근원지향성을, 공동체구성을 미리-근거지우는 성적 충동, 공동체에 대한 선-의식 그리고 다양한 특수성들 속에서[의 선-의식] 그러나 연결들[에 대한 것인 선-의식]. 발전 속에서 구체적-실천적 소여와 공동체세계의 선소여—습성적으로 근거지워진 그리고 발전된[,] 개별주체가 실재적 세계 내 그의 “인격적인” 환경세계와 맺는 관계[. 이 주변세계는] 그 자체로 다른 의미에서 공동체적인, 말하자면 공동체의 “문화”세계이다. 촉발.

 그러나 여기서 “객체”의 문제를, 동일한 대상의 문제를 더 자세히 숙고해야 한다.

 물론 처음 말한 두 본능들[음식충동, 성충동]로는 충분치 않다. 음식에 대한 충동은 “자기보존”본능(cf. 본능적 두려움)을 고갈시키지 않는다. 본능적인 불쾌감과 쾌감, (냄새, 시각적 감각들 등을 통한) 본능적인 끌어당김과 밀어냄(Angezogen- und Abgestoßensein),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자기보존”에 봉사하고 부분적으로는 공동체화에 봉사하는 본능성들(Triebmäßigkeiten)이다. 그러나 내적인[심리학적, 초월론적] 고찰에서 “자기보존”과 “종의 보존”에 대한 이야기(Rede, talk)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러한 근원단계에 와서(Nämlich auf dieser Urstufe)?

§2. 내적 고찰과 외적 고찰에서의 자기보존과 종보존인간적이고 동물적인 삶이 죽음  탄생과 맺는 관계성

 “개체발생”과 “계통발생”의 개념들에 속하는 동물학적 개념으로서 “자기보존”과 “종보존”. 생산을 이유로 한 탄생을 통한 유기적인, 특히 동물적인 존재(Wesen)의 세계 속 출현. 죽음을 통한 퇴거(Abgang). 자연적인 나이에서의 또는 병을 이유로 한 죽음, 그 나름대로 자신의 자연적인 유형을 가지는 우연적인 손해들에 의해 야기된 [죽음]. 유기적 종들의 세계 속, 지구 위 출현, 그리고 같은 것들[유기적 종들]의 소멸.

 순수하게 물리적-유기적인 경험주의(Empirie)는 얼마나 멀리까지 이르는가? 완전하고 진정한, 구체적인[현상학적인?] 동물학적(zoologisch) 연구는 그런데 동물을 그의 구체적인 실재적 현존재에 입각해 다루지 물리적 자연의 연관 속 한갓되게 물리적-유기적인 사물을 다루지 않는다. 경험하는 동물학자는 세계 속 실재들로서 동물을 발견하면서, 고찰하면서, 학문적으로 연구하면서: 그에게 알려진 그의 주관적 환경세계 속 동물적 현존재, 그의 내적 진화 속 동물의 본능삶, 그의 구체적인 정신적(심리적인, 자아적-지향적인) 삶과 그의 주관적 주변세계의 발달과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 그의 자아적인 발달[을 연구한다]. 동물과 그의 현존의 본능적 현존, 본능-탈은폐 또는 본능-충족을 통한 의식삶의 관점에서 그리고 자아적 습성의 관점에서. 자아적 의식삶의 양식 속 자아적 주변세계의 상관관계에 미리 주어지고 주어진, 다른 한편으로는 “인격적인” 존재[의 양식], 동일한 인격, 이러한 삶 속에서 “세계”를 향해 여기 사는 그런 인격의 존재[양식 속에 미리 주어지고 주어진 습성?].

 이러한 인격적 존재와 삶이 죽음과 맺는 관계—내부로부터, 죽음을 향해, 죽음이 내부세계적으로 또는 자아적으로 동물을 위해 무엇인 그 무엇으로서. 그의 죽음과의 관계에서 보아진, 고찰된 동물, 그러나 그 자신 속에(in sich selbst), 순수하게 주관적으로, 그의 죽음과의 관계를 끌고 가면서(tragend) [존재하는 동물로서 고찰된 동물]. 그러나 그것은[동물학자는?] 죽음을 알아야 하는가, 동물학자로서 그리고 동물심리학자로서의 내가 죽음을 세계사건으로서, 나를 위해 존재의미를 가지는 세계의 사건으로서 [알아야 하는가]?

 문제적인 것. 내적 고찰에서의 동물성과 외적 고찰, 생물학-물리학적(biophysischen) 고찰과의 평행 속에서의 [내적 고찰에서의 동물성].

 문제인 것. “고차적인 동물”과 그의 내적 심리적인 것, 의식에 걸맞은 주변세계—그것의 가장 하부 단계의 그리고 하부 단계들의 동물적 주변세계들. 어떤 단계에(동물세계의 “발달”에 국면(Abschnitt)이 존재할까?) 고유한 죽음과의 관계가 해명[탈은폐]형태를 가질까? 그러면 동물은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경험을 가질 것이며 당연히 그의 “세대들[동지들](Genossen)”에 즉해 그리고 그 세대들로부터 간접적으로 고유한 죽음에 대한 표상, 앎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는 그러므로 다음의 문제와 연관되어있다. 동물성의 다른 단계는 이미 “세대들”에 대해, 어미들에 대해, 부모, 아비들, “아이들”, 성적인 또는 그 밖의 생산 등에 대해 명시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무엇을?] 구분해야 하지 않는가? 근원본능들과 그것의 충족의 방식들, 이와 더불어 [앞서] 서술된 양면성 속 그를 통해 야기되는 발전은 상위의 단계로 이끌며, 하나의 특정한 발전단계가 비로소 동물을 위해 구성된다. 너-동물들과의 상관적 관계 속 자아-동물로서 그 자신, 그러므로 “우리” 속 [동물]. 그리고 그러면 비로소 상호주관적인 주변세계의 단계가 도달된다. 이 단계는 남성과 여성 사이, 아버지, 어머니동물과 “젊은” 동물 사이, 친구와 적 사이, 삶을 위한 싸움과 죽음, 이러한 주변세계의 사건으로서의 죽음 사이의 여전히 원시적인 인격적 관계들을 위해 전제되어있다. 저차적인 동물들은 “암묵적인”, 그러나 명시적이지는 않은, 그러므로 현실적인 [것은 아닌] 의식을[,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세계, 자아 그리고 비-자아 등에 대해 가진다.

 그러면 “고차적인 동물”은 이미 명시적으로 타자, 상호주관적 주변세계, 죽음을 구성한 어떤 단계를 가지는가? 어떤 단계가 명시적, 본래적인 자아성 또는 인격성[을 가지는가?] 그리고 어떤 단계의 연속체가 본질적으로 명시적인 상호주관적 세계에 공동체의 관점에서(성별공동체, 함께 현존하는 타 종들에 대비된 종공동체) 속하는가 등등?

 그 다음으로 우리는 이 모든 동물단계들을 위해 “자기보존”의 의미를 규정할 과제를 가진다. 하나의 심리적 존재(Wesen)의(그의 심리적 내면성 속 동물적인 것의) 존재양식과 생활양식의 해명, 그 속에 암묵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그 자신의 죽음과, 그 자신의 고유한 시간성(내면의 시간성) 속에서 끊임없이 가능한, 특정한 방식으로 끊임없이 가능성으로서 함께-작동하는, 위협하는, 극복되는 또는 밀어내지는 그리고 마침내는 피할 수 없게 가까워지는 [죽음,] 궁극적 자연적 질병, 여기서 “노인”, “쇠락”을 뜻하는 질병의 형식 속 죽음과 관계되어있는 [그런 양식의 해명]. [그러한 죽음과의 관계.]

 삶은 그것이 전진하는 한 자기보존이며 이러한 공허한 보편성 속에서 전진하는 실현의 형식을 가진다. 하나의 가능성의, 저지들(Hemmungen), 질병들, 우연적인 물리적으로 야기된 방해들, 적의 공격에 그리고 그로부터 자라나는 상처들 등등에 맞서고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의 실현형식을 말이다. 이 속에는 그러므로 가능한 죽음과의 관계성이 [놓여있다.] 이 속에는 그런데 하나의 경험적 유형이, 그 나름대로 하나의 본질양식을 가질 것이 예상되는 [유형이] 지배한다.

 다른 한편으로 삶은 탄생과, 하나의 시작형태(Anfangsausstattung), 하나의 사실적 양식 그리고 구체적으로 시작되는 존재와 삶의 한 본질형식을 가지는 시작과 관계되어있다. 이 삶은 그 자체로 자기보존[—]자신의 가능한 유형 속에서 그 자체로 미리-그려져있는[—]의 가능성들의 내부에서의 발달의 본질형식을 미리-그려준다.

 그러나 탄생은 다른 유기적 또는 동물적 존재를 통한 생산을 소급지시한다. 여기에 한갓된 경험주의가 지배하는가? 해파리가 원숭이를 생산한다는 것이 생각 가능한가(denkbar)? 동물적 존재(그의 자아성의 통일체 속[에서의] 존재) 그리고 하나의 지향적 삶 속에서 환경세계에 관계되어 존재함의 형식 속 존재가 동물적 존재의 연관[사슬](Verkettung) 속에 놓인다. 이 연관[사슬]은 한편으로는 생물물리학적으로 하나의 생물물리학적 인과성의 연관 및 생물물리학적 육체성들의 연관[사슬] 속에 놓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비실재적으로 하나의 “심리적” 연관 속에, 순수하게 주관적으로 고찰되는, 세대적 사슬[Kette]의 순수하게 주관적인 것을 통일시키는 그런 연관 속에 놓인다. 모든 존재가 그의 탄생에 대해 맺는 소급지시관계는 우선 다음을 뜻한다. 모든 개별적 존재는 하나의 시작을 가지며 거기로부터 하나의 발달의 통일성을 그의 가능한 자기보존의 지속적인 실현 속에서 가진다. [모든 존재가 그의 탄생에 대해 맺는 소급지시관계는 ]나아가 다음을 뜻한다. 발달은 스스로 발전하는 부모와 선-부모에로 보다 되돌아가 이른다—이 모든 세대적 과거를 통해. 내부에서[현상학적으로, 비실재적으로, 심리적으로] 보았을 때, 생산의 사슬의 기이한(wundersam) 형식 속 하나의 발달의 통일체가 관통한다. 하나의 정신적 유산(Erbschaft, inheritance)을 통해 하나의 시작을 만드는, 그것의 구체적인 규정성 속에서 전체 사슬을 통해 그것의 유형 속에서 미리-규정되어있는, 그러나 부모를 통해 개별적으로 규정되어있는 [그런 생산], “내부에서 보았을 때”(Von innen her gesehen, geht eine Einheit der Entwicklung hindurch, in der wundersamen Form der Kette der Erzeugungen, die jede einen Anfang durch eine geistige Erbschaft schafft, die in ihrer konkreten Bestimmtheit durch die ganze Kette vorbestimmt ist in ihrem Typus, aber individuell bestimmt ist durch die Eltern, „von innen her gesehen“).

 다른 편에서 보면: 개별적 자기보존으로서의 발달은 죽음 속에 그것의 자연적인 끝을 가진다. 그러나 그에 의해 생산된 “아이들” 속에서 [동물적] 존재의 “계속-살아감”은 죽음을 넘어선다(übersteigen). 생산으로부터 출발하는 세대적 발달[이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다성적인 짝짓기의 기적, 개별적 삶의 공동체화의 기적 그리고 개별적 삶과 공동체적 아이들[이 가지는] 유전된 것(Erbmasse) 속 공동체적 계속-살아감의 방식[이 있다].

 내적으로 고찰된 세대적 발달은 그 자체로 전체 세대적 연관의 “죽음”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전체 세대적 연관을 위해서도 우리는 적어도 문제로서 최초의 탄생, 아담의 문제를 가진다. 그리고 죽음이 관여하는 것, 어떻게 다양한 세대적 진화연관들이[—]개별적인 것[연관?]은 죽음과 함께 경우에 따라 종결되는[—]연관되느냐는 문제, 그러므로 다양한 세대적 종들의 서로-함께 삶, 종의 현존을-위해-서로-함께-싸움, 종의 경우에 따라서는 공동의 아버지를 통해 서로-함께-얽혀있음, 그러므로 궁극적으로는 모든 상대적으로 나뉜 종들의 근원아버지들로부터의 보편적 발생에 대한 물음. 그러면 다시금 개방된, 끝없는 세계의 토대 위에서 물어지는 물음. 지구 위[의 종]과 달 위, 화성, 금성 등 위의 세대적으로 연결된 종의 공존하는 총체성들의 관계는 사정이 어떠한가 등?

 세계사건으로서의 그리고 고유한 운명으로서의 죽음이 동물에게—고차원적 동물 또한—명시적으로 알려질 수 있는지가 이미 의문스럽지 않은가? 그렇게 이것이 종의 가능한 죽음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은 의문스럽지 않다(so ist es unfraglich, dass das nicht der Fall ist hinsichtlich des möglichen Gattungstodes). 인간적 삶은 명시적으로 그의 죽음에 관계되어있지만, 또한 그의 인간적 역사와 관계되어있으며, 구체적으로 그의 인류로서의 미래 및 그와 함께 인류 일반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의 문화세계로서의 인간적 주변세계와 관계되어있다. 적어도 고차원적인 진화들에 이른 인류에게는 적어도 그렇다—여기서 또한 다양한 가능한 그리고 현실적인 단계들[이 있다].

 여기에 최초의 동물학적, 자연사적, 구체적으로 순수하게 심리학적 기술이 있다. 심리적 자연역사로서 소박하게 곧장 수행된 그리고 물론 연속적으로 성공하는 것을[기술을?] 통해 그리고 타인경험의 확장 속에서 그 자체로 입증되는 기술이 말이다. 이에 더해 생물심리적 자연사와 귀납적 심리물리학이 진행된다. 초월론적 철학적 태도로의 이행과 이러한 문제설정의 초월론적 해석.


★부록 X. 최초의 유아성이라는 이차적 문제(Randproblem). 절대적 자아와 필증성으로의 되돌아-이끎(Rückleitung). 비합리적인 것의 합리성. “보편적인 조화”(1929즈음), s. 102-103

 발생은 충동-자아로서의 나에게로 되돌아가-이끈다(zurückführen). 상관자로서의 미리 주어진 세계라는 현상에 속하는 모든 것을, 세계를 초월론적으로 구성하는 주체구조를 관통하여 본능삶이, 충동성(Triebhaftigkeit)의 다양체적인 것이 성립한다(gehen). 본능들은 변양들을 경험하지만, 언제나 거기 있다(sie sind immer da). [이를테면] 억압된 충동은 그 자체로 동일한 충동의 한 양태이다 등등. 미리 주어진 세계의 구성 내부의 발생은 언제나 이미 충동, 본능을 전제한다.

 우리는 그러므로 최초의 유아적 시작을 위해 이미 하나의 충동체계를 전제하도록 강제된다. [또한] 모든 발달에서 전제되는 그리고 모든 발달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모든 지향적 근원-수동성을 충동체계에 귀속하도록 강제된다. 근원형태(Urgestalt) 속 그의 충동체계를 가지는 근원-자아 그리고 근원형태 (자체)는 수동성 속에서 [먼저] 그리고 그러고 나서 능동성 속에서 만들어진다(sich auswirken). 충동체계 속에는 이미 엔텔레키로서의 전체 세계구성을 위한 맹아(Anlage)가 놓여있다.

 근원충동, 근원본능은 기계적인 힘들(Kraft)이 아니다. 근원충동과 근원본능은 모든 할-수-있음, 모든 할-수-있음-체계의 원천들이다. 세계는 진화된 자아 속에서 그것의 상관자를 하나의 능력체계, 능력들의 체계적 통일체인 그런 능력체계 속에서 가진다. 모든 가능한 경험은 숙련(Gekonntheit)의 한 계열(Linie)이다. 나의 모든 경험적 사유는 내 능력의 경험적 사고이다. 그리고 나의 능력은 지속적인 진화 속에 있으며 그것의 원천을 근원능력(Urvermögen) 속에 가진다.

 맹아는 필증적으로 자아의 필증성 속에서, 상호주관성 속에서, 그리고 필증적 형식 및 개별적 필증성 속 구성되는 세계의 속에서 하나의 그 자체로 필증적인 계기로서 재구축된다. 비합리적 사실(Faktum)은 본질에 비하면 우연적이지만, 사실[이 있다는 것?]은 필증적인데(das Faktum ist apodiktisch), 왜냐하면 주관성은 그것의 개별성 속에서 필증적이며[,] 그것의 개별성 속에서 능력으로서 모든 필증적 본질보편성을, 또한 고유한 본질형식의 본질보편성을 자신 안에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본질보편성은 고유한 본질형식의 구성성분(Bestandstück)이다. 본질은 그러나 개별자(Individuum), 그것에 그것이[본질형식이?] 이성의 능력으로서 근거하는 그런 개별자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비합리적인 것은 우연적이다—그것은 자신의 곁에 다른 가능성들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은 필연적이다—형식은 내용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가능성들 중 하나가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나 모든 에고들은 조화 속에 존재해야 한다. 하나의 규정된[특수한] 세계의 구성 속에서의 보편적 조화는 가능성들의 선별(Auswahl)을 위해 하나의 법칙을 처방해준다(vorschreiben). 이러한 법칙은 언제나 가능성들의 더 넓은 유희공간들을 열어둔다. 여기에도 하나의 문제가 있다.


 쾌감의 충족 및 충족을 향한 노력은 육체적인 활동으로서, 키네스테제와 질료적 쾌감 사이의 근원연상을 통해 성립한다. 달리 말해, 욕망의 충족과 관련된 실천은 질료적-키네스테제적 노력을 함축한다. (가치를 향한 이러한 노력은 실천의 능력을 전제한다.) 능력은 나아가 자아의 미래에 가능한 상황들을 개시해준다. 여기서 세계의 구성이 출발한다.

 자아는 욕구와 욕구의 실천을 위해 노력하는 활동들의 통일체이다. 실현되기 이전의 본능은 근원적으로 세계화하는 객관화가 결여되어있는 지향성이다. 그러나 [결국?] 본능의 실현은 '먹기' 등으로 객관화된다.

 자아는 욕구를 발동시키거나 (욕망에 대한 판단중지를 비롯하여) 절제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자유 역시 능력을 전제한다.


Nr. 7 본능과 본능충족본능  발전된(entwickelt) 인간의 행위(s. 104-107)(1931 즈음)

 먹기에 대해 고찰해보자. 우리에게 먹기란 우리가 그 속에서 “요리”라는 사물로서 잘 알려진 것을 변화시키는 활동이다. 구체적으로 요리는 입 속에 있고[,] 씹어짐과 질서에 따라 그리고 [특정한] 양만큼(portionsweise) 삼켜짐의 공간세계적 과정 속에 있다. 이때는 관계되는 육체적 기관들이 기능하게 되며, 나는 그 기관들을 움직이고, 그것들을 진행(Gang) 속에 유지시키고, 죽과 같은 것(Brei)을 만들기를 행하는 과정 속에서 맛이 생겨나고 그에 속하는 맛-쾌감이 나의 쾌감으로서, 나의 느끼는 이끌림으로서, 가능한 최선의 방식으로 충족되는 [나의] 노력으로서 [맛-쾌감]이 생겨나도록 [육체적 기관들을 움직여 섭취의 과정을 진행시킨다].

 열망하면서 충족되는 활동으로서 먹기는 양면적이다. [한편으로] 질료적인 것 또는 맛 등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느끼면서-향유하는 나를-내어줌(Hingegebensein), 쾌감정립적(lustpositiv) 끌림. 질료적인 것은 느끼는 자아로서의 자아를 “촉발한다”. 그러나 나를-내어줌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이 문제이다. [즉] 그것이 한갓된 느낌의 사태인지—불쾌감이 촉발되는 사례에서의 밀어냄과 마찬가지로—또는 나를-내어줌이 오히려 본래적인 활동성경향과 활동-(노력-)성분들을 나타내는지가 문제이다. 쾌감촉발은 활동촉발을 야기하거나(auslösen) 그 자체로 자신과 더불어 향해-노력함(Hinstreben)을 행함의 또는 노력하며-존재함의 그때그때마다의 양태 속에서의 행함으로서 이끌어낸다. 그리고 이것[향해-노력함?]은 좁고 넓은 의미에서 모든 “운동감각적인” 것의 장이다. 그것은 다양하게 규정된 그리고 근원적으로 본능적으로 규정된 노력의 방식들이며, 질료적인 동반[질료적으로 동반되는 것]과 근원적으로 “본능적으로” 하나이다. 이것은 그러므로 근원연상의 한 형식이겠지만, “합치”를 통한 [그런] 연상은 아니다.

 본능적인 것(“선천적인 것”)은 모든 통각들 속으로 그리고 객관화들 속으로 나중에(nachher)[서야] 들어가며 “실행(Einübung)을 통해 완전해지는 활동”이라는 새로운 형태를 취하게 된다. 아이는 그의 먹기의 본능적 방식을 근원적인 시작에서의 형태로 유지시키지 않는다. 아이는 “예의있게” 먹는 법, “올바르게” 먹는 법을 배웠으며 이는 당연히 식탁에서의 훈련된 행위(Gehaben) 등만과 관계하지 않는다. 그러나 처음에는 실행의 곁에 실행과 함께 가는 세계화하는 객관화가 결여되어있다.

 더 정확하게 해석하면, 우리는 이를테면 먹기-본능, 영양본능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구분한다. 맛과 맛과 관련되고 느낌에 걸맞은(Geschmacklich-Gefühlsmäßig) 것의 키네스테제적 변양(Abwandlung)과 하나인 맛-쾌감을.

 맛은 촉각적(haptisch) 권역에 함께 속하며, 그것은 언제나 그리고 필연적으로 보편적인 촉각적 장, 접촉자료들의 장의 한 폐쇄된(abgegrenzt) 부분과 촉각적으로 관련되어있다. 이러한 부분은 맛성질(Geschmacksqualifizierung)의 특유성(Besonderung)을 가진다. 근원적으로 본능적인 것으로서 키네스테제적으로 경과하는 근원연상이 여기서 이중적으로 잘 간주되어야 한다. 한편으로 접촉과 관련하여. 모든 접촉감각들은 특수영역(Sondergebiet)들 속 보편적 접촉감각장의 내부에 놓여있다. 하나의 “그 속의 자극”, 부각되어 등장하는[등장하고 부각되는] 감각은 하나의 근원연상적으로 질서지어진 키네스테제를 일깨운다(무자아적(ichlos) 수동성 속에서 순수하게).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고자] 의도하고 있다: 모든 질료적인 것에서 등장하는 것으로서의 느낌에 걸맞은 것이 또한 이러한 일깨움과 더 나아간 경과들을 위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우리는 그런데 맛과 관련해서는[,] 접촉감각에 더해지는 질료적 성질로서 키네스테제적인 것을, 부분적으로 동일한 키네스테제적인 것을 기능하게 만들었고(in Funktion setzen) 새롭게 일깨워진 것을 통해 확장시켰다. 그리고 이때 접촉과 하나인 맛의 편에서의 일깨움은 처음부터 하나의 복합적인 것이다.

 질료적-느낌에 걸맞은-키네스테제적 과정은 그러나 본능적인 것으로서 하나의 노력과정이며, 구체적으로 먹기에서는 충족[시킴]의 근원양태 속에 있다. 본능의 다른 모든 경우에서도, 우선 “감성적” 본능[의 경우에서도] 당연히 마찬가지이다. 냄새맡기—동물적 들이마심의, 신체적으로 향해짐의 비자발적 운동들 등. 시각적 자료들도 마찬가지이다—안구운동들, 신체운동들.

 다양한 키네스테제들이 키네스테제적으로 기능하는 복합체에 결합되는 방식은 이때 또 하나의 문제이며, 구체적으로 거기서 어떻게 “키네스테제적 촉발”이 하나의 “키네스테제적으로 총체적인 영역” 속에서 재생산되는지(sich fortpflanzen)[가 문제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첫째인 것이 고찰되어야 한다. 세계화하는 객관화[가]. “인류아이”는 그가 눈, 머리 등등을 움직인다는 것을 안다. [그가] 혀를, 삼키는 기관을 움직인다는 것도 안다. 그는 요리가 손 등을 가지고 입 속에 집어넣은, [자신이] 먹으면서 잘게 부수는, 침을 가지고 하나의 죽과 같은 것으로 변화시키는 하나의 사물임을 안다.

 객관화하는 구성은 그에 상응해서 본능적 노력의 양태를 변화시키는데, 그것의 구체존재 속에서 그리고 그 구체존재에 의식의 한 방식으로서 이제 고유한 의미에서 그렇게 한다(⟨in⟩ dem ihm als Bewusstseinsweise nun eigenen Sinn)[?]. 먹기는 의식적인 육체적인 자아행위이며 그것을 매개로 요리를-가지고-이것과-저것을-행함과 하나이다. 먹기는 이제 세계 속, 자아적으로 그의 육체를 가지는 그리고 그의 육체를 통해 세계 속에서 사는, 세계 속에서 이것과 저것을 행하는 내 인류의 세계 속 하나의 행위사건(Handlungsvorgang)이다. 이제는 또한 미리 나의 육체외부적 권역의 사물이, 거기-존재하는 것으로서 방향지어 주어진 채, “요리”로 통각된다. 그것은 이제 지각-사물장 속으로 들어서는 것으로서 먹기를 위한 열망을 불러일으킬(erregen) 수 있다. 이러한 열망은 자신 안에 지향적으로 명백히 하나의 매개성(Mittelbarkeit)을 담지한다[?]. 나의 실천적인 가능성(Vermöglichkeit)으로서 기대되는 것은, 그쪽으로-감과 먹기의 실현 행위이다—그러므로 모든 경우에 함께 기대되는 것은 자신의 고유한 방식의 노력하는 행함에서의 먹기 자체이다. 충족의 근원양태[?]에서의 본능의 방식으로서 함축된 채(impliziert), 그 속에는 기대 속 근원적인 질료적-키네스테제적 노력이 놓여있다. 그것[먹기]은 지금 하나의 말하자면 통각적 옷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여전히 같은 것이지만, 먹기로서 통각되었다. 그리고 현실적 먹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여전히 동일한 본능적 일어남(Geschehen), 노력하는 행함이지만, 먹기로서 “이해된다.” 누군가 먹기 시작하고, 맛이 난다—[먹기의] 진행 속에서 우선 충족욕망(Erfüllungslust)이 증가한다. 먹고자 하는 욕망(Lust)은 충족[시킴]의 양태에서의 열망이며(Die Lust am Essen ist Begehren im Modus der Erfüllung), 이러한 열망 자체가 그것의 지속적인 충족과 함께 증가한다. 먹기 이전의 허기는 당연히 충족되지 않은 열망이다. 그러므로 본래적으로 허기를 넘어서는 그 어떤 먹기도 없다(Es gibt also eigentlich kein Essen über den Hunger ⟨hinaus⟩). 이는 사람들이 [잘] 알듯이 그에 무력감이 뒤따르는 그런 “배부름”의 지각 속에서 지시되는[,] 소화 가능성(Bekömmlichkeit)의 경험적 한계를 넘어서는 먹기를 의미한다. 저 무력감은 이를테면 사유능력을 불가능하게 만들거나, 사람들이 [잘] 알듯이 위의 병을 결과로 가진다 등등.

 충족[시킴]의 근원양태에서의 욕망은 자신의 속도를 가지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 오직 어떤 향유에 착수함(Einsetzen), 이제는(nunmehr) 똑같이 남고 다음으로는 결국 제로가 될 때까지 희미해지는(abklingen) 그런 향유에 착수함의 양식 속에서 그렇다. 또는 착수함 그리고 다음으로는 증가함 그리고 다음으로는 비로소 같은 정도에[높이에] 남음 등등의 양식 속에서의 허기—쾌감에 향해진 긍정적 욕망, 그리고 정상적인 포만감에서, 허기를 진정시킴의 정상사례에서 그러므로 긍정적 충족으로서의 쾌감이 긍정적 욕망의 양태로서 들어선다. 그러나 그와 함께, 그것과 하나가 되면서, 주변의 동시적인 악취와 같은 불쾌감이 들어설 수도 있다. 발전된 인간(또는 동물)의 사례에서처럼 쾌감이 한 존재하는 실재의 그렇게 존재함에 대한 기쁨이라면(그것[실재]의 그것[실재] 자체에 객관적으로 덧붙여지는(zukommend) 가치의 향유), 욕망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실망될 수 있다. [욕망의] 실현의 경우에서 기대된 가치특성과 함께 다른 특성들이 들어서고, 그것도 불쾌감으로서 흥분시키면(erregen)—그리고 이와 함께 즉시 무가치한 것으로서, 객체의 가치를 떨어뜨리거나 취소시키는 것으로서 [흥분시키면 그렇다]. 쾌감과 쾌감, 쾌감과 불쾌감, 근원적으로 현전하는 그리고 파지적으로 가라앉는 [그런 쾌감 또는 불쾌감은] 서로의-곁에 남지 않는다. 그것들은 당연히 결합되며, 그 속에서 “현상”인 모든 것과 함께 체험으로서 연상되며, 그러므로 또한 의미이다. 그러나 감정삶의, 수동적이고 능동적인 감정삶의 특성들을 그리고 가치와 무가치의 구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저것[만]으로 멀리 나아갈 수 있는가? 쾌감은 계속되는 불쾌감을 통해 어떻게 방해되고 손해 입는가?  

 나아가 가치와 객체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그러면 “가치객체”라고 불리는 [그런 객체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 요리, 즉자적으로 있는 객체는 하나의 가치이다[가치를 가진다]. 그리고 그것의 지속함 속에서의 객체가 지속하는 규정성들 하에서, 그것[객체]의 객관적 특성들 하에서 하나의 특정한 의미를 또는 무엇-내용을 넘어서지 않는 한에서[?], 객체는 가치있으며[,] 그것의 변화-방식들 속에서 곧 가치가 높아지고(요리가 “나아진다”) 또는 낮아지며(음식이 해를 입었거나 썩었다), 객체가 모든 현행적 쾌감-불쾌감과 독립적으로—가치 또는 무가치를 가진다. 그러나 물론 그것의 가치존재에는 그리고 그것의 존재에는 접근(Zugang)의 “실현”의 능력이 속한다. 가치존재를 위해서는 그것[객체]이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경험할 가능성[이 속한다].


부록 XII. 본능으로부터의 객관세계의 전개(Ausbildung, development)(1932 3)(s.108)

 영양객체(허기를-충족시킴)의 장으로서의 세계와 객체들의 유형화 그리고 이에 봉사할 수 있는 접근로들. 거기서의(dahin) 행위유형들의 전개. 남아있는 관심방향들의 전개—관심의 대상들로서의 식료품의 주변세계. 모두가 [저마다의] 관심을 가지며, 모두가 저마다의 영양재화를, 서로-함께-있는 주체들을 가진다[?]. 인간은 영양을 향해 노력한다. 쾌감각을 향해서는? 이 모든 영양재화는 허기의 가능한 충족의 객체들이다—본능의 구성적인 “통일체”, 공허함과 충만함의 다양한 양태 속 욕망의 지속적인 통일체로서의 자아의 통일성, 그것은 노력하는, 욕구하는, 욕망하는, 그리고 그리로부터 동기화되어 활동적인 자아의 동일성이다.

 그러나 한계경우들(우선 원초적으로 타인들을 그리고 싸움을 [고려] 바깥에 두면서). 진정되지 않은 채로 남는 허기, 행위 속 자아의 무력감. 불쾌감뿐만 아니라—“그 사이에 한 번” 충족되지 않은 열망, 충족된 욕망과 충족되지 않은 욕망의 유희 속에서, 때때로 자유롭게 발동하거나 방해되는 [그런 욕망]뿐만 아니라—현존의 불안. 이렇게-될-수-없음, 사라질-수는-없음(Nicht-fort-Sein-Können) 앞에서의 의심. 삶의 불안, “죽음에-대한-불안”—죽음에 대한 표상 없이. 허기 때문에 “나는 죽어간다.”(„Ich vergehe“ vor Hunger.)

 타인 및 타인과의 싸움—삶에 대한 위협 속 “삶과 죽음을 가르는[삶과 죽음에 관한] 싸움.”

 그의 고유한 현존을 둘러싼 싸움—음식을 두고 타인과 [싸우는] 배고픈-자로서—은 하나의 [자기]방어(Abwehr)가 된다. (나의 “현존”에 대한) 나의 무조건적 의지가 타인의 의지와 갈등 속에 있음. 나는 그의 무조건적 의지 속에서의 그에게 반대해서, 무조건적으로 증오 속에서 그에게 반대해서 정향하며 [이러한 정향의] 끝은 그의 죽음이다. 

 사랑의 욕망. 생산적(Generativ) 욕망. 보편적 인류애와[,] 객체로서의 그에 대한 경험에 관한 한갓된 관심은 아닌 것. 그러나 나의 실현되는 자기보존의 틀 속에서, 그러므로 한계의 내부에서[만 생겨나는 관심]. 나의 육체적인 자기보존(영양)의 내부에서 나는 변화하는 현행적 욕구들을 가지며, 그러나 하나의 장을, 재화들의 영역(Bereich)을, 가능한 만족의 접근가능성들을 가지는 [그런 장 또는 영역을] 가진다. 남는 것에 대해서 나는 사랑을 가지고 타인과 넘긴다. 그들이 [남은 것을] 붙잡게 하[면] 나는 기쁜데, 특히 내가 배부를 때 그렇다. [그때에] 나는 충분히 [음식을] 가지고 있고 미래를 위해서도 충분[할 정도로 가지고 있다].


부록 XIII. 본능본능적 노력함과 반대로-의지함(Widerwillen) “나는   잆다 경험과 자유의지의 문제(1932 3 13)(s.109)

 본능들, 본능의 단적인 발동(Auswirkung)이 잇따른다. 마찬가지로 습관적인(gewohnheitsmäßig) 경향성들이 (유사-본능적으로) 잇따른다. 자유. 본능적인 “향해-원함”, 향해-노력함을 억제하기(inhibieren). 스스로를 자제하기, 나를 붙잡아두기. 나의 세계적 지평 속의 나. 자아적인 지평 속의 나. 이미 존재자들에 의해 일깨워진 내 경향성들 속의 나. 자제함 속의 나, 보편적인 자제[?] 속의 나, 실천적인 가능성들을 관통해 살면서. 서로 싸우는 경향성들. 그것의 가능한 발동에 있어서 방해받는 경향성들, 본능들. 긍정적 본능, 향해-기울어짐—부정적인, 무언가 앞에서 겁이 나 뒷걸음질치기(zurückscheuen). 무언가를 향한 긍정적 본능의 발동이 어떤 길 위에 오르고[?] 공동의-성과로서의 무언가, “께름칙한” 무언가로 이끌 때(Wenn die Auswirkung eines positiven Instinkts auf etwas auf dem Weg führt und ⟨auf⟩ etwas als Miterfolg führt, was „widerwärtig“ ist). 부정적인 가치를 가지는 결과에 의해 기대된 것(내가 양보할 “때”)의 잇따름(Folgeleistung)을 수용함(Inkaufnehmen), [잇따름이] 취소됨. 잇따름에 대한 자기숙고, 불쾌한 일들을 비롯해 실천적인 “불가능성”에는 X표치기. 다른 불가능성들과 내가 극복할 수 없는 또는 나에게 너무 많은 비용을 지우는 불리한 상황[Widerstand].

 실천적인 가능성들 사이의 선택: 하나의 결정을 통한 판단중지의 취소: “나는 저것을 원한다”. 그러면 나는 그러므로 하나의 경향성을 선호하고 그것을 따른다; 하지만 [이러한] 잇따름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자유로부터 나온다. 이는 선택이란 의미에서의 자유이다—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자유. 그 위에(Darüber) 내 모든 가능성들의 절대적 보편성으로부터의 자유와 절대적인 의무(Sollen).

 경향성들, 충족들의 종합; 경향성들, 충족들, 경향성들에 의해 일깨워진 경향성들, 그러므로 본능 속의 종합: 성공과 실패라는 이중의 가능성[을 가지는] 본능 속에서의 무언가에 대한 밖으로-향해-노력함(Hinausstreben). 내가 출구를 찾을 수 없는 한에서, 그 자체로 실패할 수도 있는 [그런] 본능적인 반복충동. 어떻게 반복이 가능하느냐는 물음; 예를 들어 키네스테제의 반복, 키네스테제라는 자료가 사라지면서(Wiederholung der Kinästhese, das Datum Kinästhese verschwindend). 자료를 다시 얻으면서. 비슷한 것, 즉 유사한 것, 유사한 자료들과 함께 거기 있는 것, 그러나 동일하지는 않은 것을 향한 방향성은 키네스테제로 하여금 [체험류에?] 들어서게 해준다. 비슷한 것이 올 때까지 말소시키기(Durchstreichung) 그리고 언제나 새로운 반복. 성공적인 반복을 통해 확신하기. 한 번의 성공적인 반복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모든 방해(Ablenkung) 이후에[도] 경향성, 새로운 반복에로의 경향성이 되살아나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할 수 있다”의 경험, 능력: “내가 원하면, 나는 그것을 얻는다”. “나는 원한다”로부터의 언제나-다시-옴[Immer-wieder-kommen], “나는 원한다”의 “표상”은 “의지적으로 일어난다”는 뒷표상(Folgevorstellung)에로 이끌어준다.

 정상적인 상황과 관련해서는 “나는 언제나 다시 할 수 있다”가 그에 속하는, 그 속에서 능력(할-수-있음의 현실화)의 말소가 일어나지 않는 그런 숙련된 능력지평 속의 나. 능력들의 우주, 다가올 실천적 상황들의 우주. 그 속에 내가 서있고 보편적인 것으로서 미래 전체를 개시하는, 즉 무한한 다의성 속에서 다가올 상황을 개시하는 보편적인 현실적 상황. 왜냐하면 현재 속의 결정은 미래에 의존하고 그렇게 모든 다가올 결정은 더 먼 미래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실천적 에포케—모든 미래를 위해 충분할 하나의 보편적인 프락시스를 향한 의지. 그 속에서 내가 현재에 내가 함께 원할 수 없는 그 어떤 미래도 내 쪽으로(auf mich) 취하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결심 속의 나. 순간(Moment) 속에 살지 않고 가까운 최선의 것(낮과 밤의 최선이 아니라[?])을 행하겠다는 의지, 그리고 나서 내가 미리 예상했더라면 나를 위해 낮에 다르게 결정했을, 내가 겪지 않아도 됐을 [그런] 것을 내 쪽으로 취해야 한다는 의지[???]. 미래 속에 살지 현재 속에 살지 않는 인간.

 내 현사실적인 살았음(Gehabtleben)과 삶의 자아로서의 나. 모든 과거는 미래를 위한 양식을 윤곽지어준다[vorzeichnen]—내재적인 시간화로부터. 그런데 나의 작용들이 다뤄지는 그 윤곽지음이란 무엇인가? 세계가 반복된다고, 즉 세계가 하나의 전형적인 정상성 속에서 경과한다고 내가 말할 수 있다면, 거기에는 인간적 구조물들을 흡수하는(in Aufnahme von) 세계의 언제나 새로이 생성됨의 정상적인 유형이 속한다. 그리고 이에 상관적으로, 인간적 상황들이 전형적으로 반복된다는 것 그리고 모든 인간은 그가 유사한 상황들에서 전형적으로 “결정한다”는 그 [사실] 속에서 개별적이라는 것. 그런데 이 유형의 사정은 어떠한가?[라고 묻게 되는데,] 왜냐하면 인간은 그 자신의 의지함에 의해 미래를 비로소 규정하고 모두가 자신을 위해 자신의 권역 속에서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행하게 되고 주변세계가 무엇을 그에 의해 가지게 될지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신의 습관들조차, 의지행동들(Willensverhalten)에 순종함[?]이며, 그 순종함[?]을 통해 인간은 습관들을 자신에 대하여 최초로 근거지운다. 근원적인 본능은 스스로를 발동시킨다(Die ursprünglichen Instinkte wirken sich aus). 거기서 세계의 구성이 본능적으로, 자아의 한갓된 순종함[?] 속에서 그리고 불리한 결과들에 대한 저항 속에서(in Abwehr der Widerfolgen) 일어난다는(statthaben)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자연은 어떻게 해서 본능의, 한갓되게 수동적인 의지본능의, 한갓된 “경향성”의 그리고 습관과 능력의 숙련됨의 구조물인가? 아직은 자유와 관계가 없는 능력은 도리어 자유에 의해(von ihr) 이미 전제되어야 한다. 더 고차원적인 의미에서 원하면서-지배하는 자, 숙고하면서 스스로 결정하는 자로서의 인간의 실천적인 현존은 어떻게 자라나는가(erwachsen)? 그러면 먼 그리고 가장 먼 미래를 고민하고 마침내 무한성에 대해 전시간적으로, 전세계적으로, 전인간적으로 고민하는 인간들은 어떻게 [자라나는가]?

 내재적인 시간화 속 내 삶의 구성—나는 그것을 나의 지나간 현실성 속에서 조망할 수 있다. 모든 과거는, 미래가 얼마나 상이하게 드러나든지 간에 미래를 윤곽짓는다; 드러난 미래는 미래를 다시 윤곽짓는다(eingetreten, zeichnet sie wieder vor); 그리고 그렇게 나의 조망 가능한 과거는 이제 나의 미래를 윤곽짓는다: 그 속에서 나의 행위와 나의 동료-인간들과 그들의 행위와 함께인 나. 내재와 관련해서 나에게 유효한 것은 그들 자신을 위해서도 유효하다(그렇게 나는 동료 인간들을 타인으로 본다). 그런데 이는 내가 의지주체이며 나의 의지함이 비로소 무엇이 존재하게 될 것인지를 결정한다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리고 모두가 그렇다는 것(Und so eines jedermann)[?]. 나는 물론 나의 숙련된 습관들을 가지고 있고, 아마도 나는, 습관적인 경향성을 따르고자 의지함 속에서조차, 나 자신을 습관 바깥에서 살기에는 원칙적으로 너무나 게으른 사람으로 안다. 그래도 나는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는 그리고 때때로 숙고하는 그리고 아마도 단번에 경향성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삶의 결정을 내리는 한 명의 인간이다.

 내가 나를 습관에 입각해 보면, 나는 내가 무엇을 하게 될지 예상하게 된다. 그러나 내가 나를 자유로운 자아로 보면, 그 경우 예상과 관련하여 어떻게 되는가(wie ist es da mit der Voraussicht)?

 그런데 미래는 모든 경우에 무한하게 다의적이지 않은가? 그리고 일의적인 예상 가능성에 대한, 다가올 세계의 일의적 존재에 대한 자연주의적인 전제는 세계를 의지주체들과 함께 마치 세계가 자연처럼 그와 같은 불변성의 윤곽지음을 가질 뿐만 아니라 의지정신성 속에서 또한 자연적인 불변성을 가질 것처럼 간주하는 것만큼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이는 다음을 의미할 것이다: 의지함은 돌이 떨어지는 사건과 다를 바 없이 상호주관적으로 구성된 세계 속의 사건(Geschehnis)이 될 것이다. 이는 초월론적 주관성을 위해 무엇을 의미하는가?


부록 XIV. 고착된[갇힌](Eingeklemmt) 정동들금욕주의(s.112-113, 1934 여름)

 고착된 정동들, “열정적인 욕망들”, 충족되지 않는 채로 남고, 하나의 판단중지 하에 놓이지만—말소되지는 않는 [그런 욕망들]! 그것들은 계속해서 유효하다. 판단중지는 무엇이었던가? 경우에 따라서 능동적인 충족의 가능성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순종하는 것[에 대한 절제], 심지어는 이를테면 그와 같은 가능성들을 산출하기를 시도하는 것에 대한 절제뿐만 아니라, 모든 상황들에서 유지되어야 하는 절제. 주요 사례들은 명백하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신사에게 예의없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절제가 필요하]며, 나를 사회적인 보이콧의 대상으로 만들[어선 안 되기 때문에 절제가 필요하]거나, 그것은[?] 종교적인 규범들에 반[하기 때문에 절제가 필요하]다(Es gilt allgemein als unanständig für einen Gentleman, ich setze mich gesellschaftlichem Boykott aus, oder es ist wider die religiösen Vorschriften). 판단중지는 또한 [욕망에 대한] 부정의 한 방식, 순종의 말소이다. [이와] 본질적으로 다른 부정은 욕망 자체 속에 놓여있는 “태도”의 말소이다. 타당성[유효성](Geltung), “욕망”이라는 양태에서의 의지.

 “고착된 정동”이라는 문제: 생각되지 않을 때조차 무가 아닌, 영혼의 “병”으로서 하나의 습관적인 불만족. 발동(본능적 욕망에 즉해서 그 속에는 향유와 욕망으로서의 충동의 다시-깨어남의 정기성이 놓여있다)의 가능성의 묵인(Gewährenlassen)에 대한 에포케에는 “시선-돌리기(Wegsehen)”이, 시선을-돌리고자-함이 속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내 눈앞에 생생하게 서있지 않은 것)은 나를 뜨겁게 만들지 않는다. 욕망된 것, 필연적이지는 않지만 특히 직관적인 [욕망된] 것을 향해 방향을 돌리는 과정에서 욕망의 강도의 증가. 시선을-돌림과 시선을-돌리고자-함. 그러나 그와 함께 정동은 단지 “가려져있고” 억압될 뿐[,] 모든 가려지고-억압된 것과 같이 힘있게[wirksam] 거기 있다. 병의 증상들! 보상: 불만족한 채로 사람들은 다른 권역에서의 만족을 찾는다. 여기에는 또한 다음과 같은 것이 속한다: 때때로 혹자는 그에 빠져서(음주, 성욕) 폭력적인 고착과 함께 더 심하게 반응한다. 그와 같은 정동들로부터의 치유. 이해 가능한 종류의 사례들: “고착된 정동들”(우리의 서술에 따라)의 개념의 보편성 속에는 또한 목표에 향해진, 연관들을 충분히 멀리까지 추적하지 못해 그 목표의 어리석음을 보지 못하는 정동이 속한다. 나중 가서는 그것[그러한 추적]이 쉬워진다. 결단(Vorsatz)의 도움을 통한 완전히 고착된 정동의 다시-일깨워짐: 만족의 완전히 명료한 표상, 그러나 또한 실망의 완전히 명료한 표상, 만족이 가장 외면적인[표면적인](äußerst) 불만족으로 바뀌게 되는 한에서 [실망은?] 욕망 자체의 말소로 이끌어준다. 또는 발작적으로[갑작스럽게](krampfhaft) 망각된 정동의 다시-일깨워짐과 (가능성에 따라) 그것에 정상적인 “발동”을 마련해주기. 그러나 이는 성의 권역 속 더 어려운 고착들[갇힘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여기에서 금욕주의의 문제가 대두될 것이다. 금욕주의는 어떻게 가능한가, 어떻게 근원충동이 말소될 수 있는가? 사람들은 여기서 자살의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여기서 숙고된 것이 일반적으로 얼마나 사용 가능한지가 물어진다. 아마도 무언가에는 [유용할 것이다].

 보론. 모든 가려진 것, 모든 가려진 타당성은 프로이트적 방법론이 가능케 하고 전제하는 연상적이고 통각적인 깊이와 함께 기능한다.


 본능은 (1)알려지지 않은 채로도 촉발을 동기부여하고(깨어나게 하고) 그때그때마다의 대상 구성을 주도하며 대상적 지향성을 비로소 발동시킨다. 이때 대상에 대한 표상/앎, 곧 구성 일반은 (알아감) 본능의 충족과 같게 된다. 본능은 (2)탄생의 시점에부터 기능하면서 근원적인 시간화의 토대가 된다. 모든 자아는 목적론적인 발전의 특정한 단계 위에 있으며, 본능이 기능함에 따라 자신의 텔로스인 본능의 충족을 향해 노력하게 된다. 이 목적론의 (처음과) 끝에는 세계의 필증적인 소유가 있다. 그런데 본능 자체는 모든 구성을 위해 (단지) 타고난 것으로서 전제되는 것이다. 이로써 후설은 (대상에 대한 앎과 관련된) 합리성을 위해 (본능이라는) 비합리성이 가능조건으로서 요구된다는 주장에 이른다.


Nr. 8 본능에 대한 이론을 향하여(1933 1, s. 114-123)

1) 원초적 본능: 음식[영양](Nahrung)을 목표로 가치평가하면서(wertend) 그리고 노력하면서 행위하는 삶; 2) 타 주체 및 타 육체성과 관련된 성의 본능.

 그런데 “육식하는” 동물, 그 가운데서 (“잡식성 동물”로서) 인간. 인간은 원래(eigentlich) 동물을 잡아먹는 동물, 동물의 육체(Leib)를 한갓된 신체물체(Körper)로 변화시키면서 동물신체를 잡아먹는 동물, [잡아먹히는 동물의] 힘(das Walten)을 줄이고, 완전히 제거하고, 신체적인 육체를 그것이 더 이상 힘과 힘쓸-수-있음을 표현하지 못하도록 바꾸는 그런 동물이다. 감성적 향유[를 주는] 이러한 변화시킴 속에서의, “허기”의 포만한-충족(Sättigung)이라는 본능충족.

 음식을 찾고자 하는 본능. 닭들의 발구르기(das Scharren).

 함께[공동으로] 영양을 섭취할 수 있는 자리(Platz)를 찾고자 하는 본능. 이동본능.

 본능적인 욕망함과 행함 속에서 무매개적으로 삼켜진(verzehrt) 것으로서 미리주어진 음식객체[대상]. 객체는 본능적으로 구성되고, 경험을 통해 단지 더 규정적으로 지각되고, 키네스테제와 현출들의 귀속들이 연습된다(üben). 현행적으로 보아진 것 등. 먹기에서 본능적으로 가치평가되고 욕망되는 사물. 곧 그렇게 음식객체로서 미리주어졌던 것이 새로운 경우들에서[도] 친숙해지고, 규정된 존재의미[를 가진 것으]로 통각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더 나은 그리고 더 선호할 만한 등등의 늘어나는 “경험” 속에서 차별화된다.

 한 음식객체—배치와 관련하여(konfigurativ) 음식객체들의 다수성, 비슷한 [음식객체들], 가깝고 먼 데 따라 배치된 [음식객체들]. 육체적으로 배치된 다수의 동물적 주체들. 모두가 가장 먼저 손안에 잡히는 것을 잡는다(Jeder greift nach dem Erstbesten). 하나의 개별적인 것, 유일한 것이 지각적으로 거기 있으면, 다수의 주체들이 동일한 것을 향해 욕망하면서 향해진다.

 그러나 또한 욕망함이 본능적으로 하나의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주워모으고 삼키는 행함 속에서 다수적인 것(Mehrheit, majority)에 향해지게 되는 일이 가능하며, 여러 주체들이 그렇게 하는 일이 가능하다; 다른 한편으로 다수적인 것이 본능적으로 하나의 제약된 “크기”를 가지고[,] 그와 같은 객체들의 지각적인 전체다수성의 범위가 특수자들로서 여럿의 그와 같은 다수적인 것들을 부분적으로 개시하는 일이 가능하다[???].

 욕망하는 방향들 사이의 경쟁(Konkurrenz)—서로를-위함(Füreinander) 가운데서의 갈등, 지각하면서 그리고 욕망하면서 동일한 것에 함께 향해져있음—본능적 싸움. 타 육체를 향한 폭력적이고 육체적인 타격 등, 폭력적인 물기, 할퀴기, 때리기 등. 결과로서의 고통, 고통을 피하기 위한 물러서기를 낳는 본능적인 반응. 방어라는 목표[가], 고통에 대비하기, 불안하게-만들기, 물러서도록-강제하기가 본능적인 노력의 목표로서 알려지고,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을 위한 음식을 가지는 일이다.

 본능들의 우주—보편적 지향성—나의 깨어있는 의식삶 속의, 나의 의식적 공동체 속의 나. 의식지평, 소여성과 선소여성의 지평. 자신의 존재적 지평으로서의 세계를 가지는 그리고 객관적으로 세계 자체 속에 있는 주체성의 구성된 지평—습득물 속에 있는 그리고 자신의 습득물들을 가진, 자신의 구성하면서-구성된 구조를 가지는 초월론적 전체주체성—, 보편적 본능지평들에 대한 충족하는 외현[들춰냄]으로서의 이와 같은 구조적으로 분절된 보편지평.

 이는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근원적으로 흐르는 현전시킴(Gegenwärtigen) 속에서 현전해있는 나, 그 속에서 세계를 “가지면서”, 나를 인간-자아로서 가지면서, 다른 인간, 자연, 인격적 공동체, 문화세계로서의 인격적 세계를 [가지면서 현전해있는 나]. 나와 나의 절대적인 구성하는 삶. 초월론적 발전의 초월론적 자기해석. 초월론적으로 구성하는 일어남(Geschehen)의 형식으로서의 초월론적 시간성, 자연시간과 더불어 세계시간의 상관자로서, 인격적 인류-역사적 시간, 문화역사적 시간.

 나의 초월론적 탄생타고난 본능—“수동적인”, “무자아적인” 것의 흐름 속에서 깨어나는 본능, 구성하는 시간화의 근원토대. 그것[본능]은 “순서대로 깨어난다”. 이는 다음을 의미한다: 근원토대 속에서 구성되는 통일체들로부터 자아극을 향해 촉발들이 나가게 된다(ausgehen). 본능들은 근원적인(urtümlich) 것, 본질보편적으로 모든 발전을 규정하는 근원충동들, 근원촉발들을 나타낸다. 모든 에고는 발전 속에 있다. 발전의 본질형태, 발전의 시작, 발전에 속하는 근원욕구들, 발전의 단계들. 각 단계마다 새로운 욕구가 이러한 단계를 위해 본질적인 형태로 어두운, 목표함 속에서야 비로소 드러나는, “본능적인” 것으로서 들어선다. 욕망함 또는 노력함, 자아욕구들의 현전화들(느낌들)의 양태. 자아는 “반응하고”, 촉발들에 대답한다; 그리고 욕망들의 충족형태들과 더불어 지향적 목표들이 깨어난다(erwachen). —다양한 단계에서의 통일체들의 구성. 가장 낮은 단계: “자연”과 육체 및 타인의 단계, 그리고 주관적으로 유의미한 것들, 음식, 성적인 가치평가, 친구, 적, 동료들, 유용한 객체들, 섬기는 인간과 동물 등을 위한 본능적 기체. 본능의 유형학—본능의충족으로서구성의 유형학. 본능이 순서대로 “깨어나면서”, 맹목적인 노력으로서 자극되고 지향성으로서 발동되면서. 새로운 본능들이 언제나 다시 깨어날 수 없다고 누가 말했는가? 우리는 우리가 인간들 일반 그리고 우리의 단계(여러 곁에-있는 그리고 서로-함께 살아가는 인간성단계들을 가지는 인류의 내부에서)에 있는 인간들이듯, 우리의 본능들을 지속적인 발동[하는 것으로] 가진다; 그리고 이러한 발동은 발전에 대한 하나의 개념을 규정한다: 우리의 [발전에 대한 개념을]. 그것[본능?]이 어떻게 “깨어났고” [어떻게] 마침내 모든 게 깨어나고 이제 우리의 주변세계 [내] 우리의 현존의 유형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자아의 타고난 맹아로서 축적된(versammeln) 본능들의 “체계”, 그것들의 공동의 작동(Zusammenspiel), 전진하는 자아와 자아의 세계의 “발전” 속 본능체계로서 그것의 지속성과 더불어 상응하여 존재적인 충족형태들 그리고 그러한 형태들의 지평들의 체계적인 충족과 구성. —모든 구성을 위해 전제된, 자아의 이러한 타고난 근원본질, 근원맹아. 그것[구성? 근원맹아?] 속에 정적으로 그리고 “발생적으로” 포함되어있는 것은 그것의 본질형식을 가지는 구성된 세계 또는 비합리성의 우주이다. 그렇게 주체성의 타고난 맹아는 합리적인 것을 가능케 하는 비합리적인 것이다. 또는 비합리적인 것은 모든 합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근거”가 되는 데서 자신의 합리성을 가지게 된다.

 이 모든 것은 매우 불충분하고, 무척 명료하지 못하다.

 자연적 소박성 속에서: 존재하는 세계 속의 인간; 사물들은 [인간을] 촉발하고, “충동적인” 본능적 자극, 충동적인 향함; 충동은 계속된다. 이제 내가 사물 “곁에” 있으면, 나는 그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고, 그것은 나를 끌어당긴다; 나는 그것을 고찰하면서, 해석하면서, 향유하면서, 행위하면서 그것에 몰두한다(sich beschäftigen). 이러한 몰두는 그러나 그것[사물?]의 존재의미를 변화시킨다. 나를 위한 세계로서의 그리고 변화된 존재의미의 세계로서의 세계는 나를 다시금 촉발하고 새로운 몰두들과 새로운 변화들로 이끈다.

 초월론적 환문(Rückfrage). 그의 본질형식에 입각한 초월론적 주관성, 그의 필증적으로-형식적으로-흐르는(apodiktisch-formströmend) 생성 속 흐르는 지향적 구성. 추상적으로: 취소된[?] 통일체들을 위한 본질형식으로서의 순수하게 연상적인 형식. 다시금 타당성통일체들, 존재통일체들, 가치통일체들, 실천적 통일체들을 위한 생성형식으로서의 자아적인 본질형식, 모든 그것이[형식이] 역시 존재통일체인 나에 의해 포착될 수 있는 한에서: 존재론. 자아적인 것을 정초하는 그 둘(beider)[?]의 공동의 작동.

 ★세계를 가지는 자로서의 나; 이러한 나의 필증성 속에는 세계타당성이 이미 포함되어있고[,] 거기서 “세계를 가지는 자로서의 나의 필증적 존재함의 가능조건”에 대한 환문. 이는 세계를 연역함이 아니라, “구체적 에고”를, 구체적 필증성을 그것의 함축된 필증적 “원소들”로 해소시키는(auflösen) 것이다. 그의 원소들 속 에고의 서있는(stehend) 흐름—내재와 “전체성(Ganzheit)”형식. 내재적인 함께임(Zusammen)이 함께인 것으로 기능하면서[?], 의미의 통일체를 구성하면서: 종합. 서있는 흐름 속에서 종합적으로 연상적인 시간화: “체험류”. 그의 자아적인 기능들 속 자아. 존재시간화에서의 본질보편적인 것. 그런데 여기에 본능의 특유성[특유한 것]이 들어선다.

 촉발들과 행동들은 이미 존재적인 구성에 맞춰져있다. 그 속의 목적론. 연상적으로 산출하는(zeugend) 성취의 진행이 이미 목적론적 의미를 가진다. 등장하는 질료적 통일체들의 종류와 배치, 감각장들 속 그것들[질료적 통일체들]의 배치와 다양한 감각장들의 통일체들의 공동의 작동, 이와 함께 “자연”이 자연적 시공간적 형식과 더불어 구성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뒤나미스의 단지 하나의 추상적인 구성요소일 뿐이다. 치우쳐진 것(Das Tendenziöse)은 여기서 본래적으로 도외시되었다(물론 이러한 추상함은 위험하다).

 나의-편에서는: 자연구성을 향한 본능, 충동, 경험하면서 신체성의 구성을 숙련시키고, 그것이 설령 상대성에서 상대성으로 [숙련될]지라도[?](erfahrend Konstitution der Körperlichkeit auszubilden, sei es auch von Relativität zu Relativität). 정신적 세계의, 하나의 “인간적” 세계의 핵으로서의 신체, 인간들의 연합과 연합된 인간성들을 포함하는 세계; 인격적 삶 속의 인간과 인간에게 유의미한 세계 속에서, 인간적인 욕구들을 만족시키고 다시금 자극시키는 세계 속에서 인격들 가운데서의 인격들로서 공동체화되는 인간 그리고 공동체적인 세계가 조화와 충돌 속에서 구성한다(in der Menschen als Personen unter Personen sich vergemeinschaften und gemeinschaftliche Welt in Einstimmung und im Streit konstituieren)[?].

 신체를 향한 본능적 향해있음—신체구성을 향한 본능적인 노에시스-노에마적인 경향성, 가치있는 것, 영향재화들으로서 음식객체들에 대한 구성의 하부단계, 육체들의 구성을 위해서, 다른 인간들을 위해서(우리의 신체적인 지각을 위하여 육체가 이미 기능하고 있는 그 곁(wobei)), 가치객체로서의 다른 인간, 관심객체들(성, 공동체 일반을 향한 충동, 공동체에서의 기쁨 등). 사회성들의 구성의 하부단계로서 구성된 개별적 인간. 본능의 단계들, 근원적인 충동들, 욕구들로부터(자신이 무엇을 향하여 의지하는지 우선 아직은 알지 못하는), 체계적으로 서로의-위에 쌓여, 자기 자신을 넘어서 더 높은 단계를 지시하는 [본능의 단계들]. 이는 하나의 목적론이다, 그로부터 필증적인 세계소유(Welthabe)만이 발원할 수 있는 그리고 [세계소유가] 그것의 형식 속에서 이러한 목적론 자체로서 필증적 구성성분들에 속하는 [그런 목적론](Das ist eine Teleologie, aus der die apodiktische Welthabe allein entspringen kann und gehört in ihrer Form als diese Teleologie selbst zu den apodiktischen Beständen).

 초월론적 환원을 통해 나는 세계를 초월론적 자아의 초월론적 현상으로 획득한다; 나는 필증적인 초월론적 자기경험을[,] 그 속에서 내가 나의 초월론적인 [주관인] 흐르는 근원현재를, 나의 초월론적인[,] 내재적인 시간권역으로서 구성된 삶을, 세계를 체험하는 것인 삶의 흐름을, 그러므로 세계체험함의 흐름의 [삶의 흐름을] 획득하는 [그런 초월론적 자기경험을] 획득한다. 나는 “세계현상”을 그것이 나의 (구체적으로 이해된) 초월론적 에고의 필증적 구성성분에 속하는 방식대로 나타내고 이어(dann) 특별히 “세계”라는 경험현상을 그것의 탁월한 지위(Stellung)과 기능 속에서 기술의 주제로, 필증적 분석(본질분석)의 주제로 만드는 그런 방법을 획득한다.* 현상으로서의 세계로부터 나는 세계에 본질상관관계 속에서 귀속되는 노에마적이고 자아적인 양식들의 해명[탈은폐]에로 나 자신이 되돌아-이끌어지도록(초월론적 실마리) 허락한다(Von der Welt als Phänomen lasse ich mich zurückleiten (transzendentaler Leitfaden) zur Enthüllung der ihr in Wesenskorrelation zugehörigen noematischen und ichlichen Modi). 현상 속에서 나는 인간을, 그의 신체를 육체로서, 그의 영혼적 삶을 의식삶으로서, 그의 의식삶을 개별자화와 공동체화 등에 입각해 가진다. 그 속에 또한 노에마적이고 자아적인 양태들이 심리적 구조물로서, 심리적 작용들로서, 심리적 성향들 등으로서 등장한다. 초월론적 관찰자로서 나는 초월론적으로 상응하는 정적인 분석을, 그 과정에서 절대적인 초월론적 지향성이 그것의 본질적[인] 존재의미에 입각해 지시되는, 존재적인 타당성을 구성하는 성취들, 그 중에서 무엇보다도 또한 심리적 지향성 등등과 인간의 심리적 구성물을 구성적으로 산출하는(ergeben) [그런 성취들이 지시되는 정적인 분석을] 수행한다. 세계를 만장일치로(einstimmig) 경험된 그리고 경험 가능한 세계로 취해보자, 고로 세계의 심리적 “현출방식들”, 특히 그때그때마다의 현행적으로 “현출하는”(의식되어 존재하는) 사물들, 인간들, 공동체들 등등의, 그리고 그렇게 세계 속의 모든 사건, 또한 모든 영혼적인 것, 그것이 영혼 또는 영혼적 주체들에 의해 의식으로 가져와지는 한에서의 [“현출방식들”]이라는 말뜻의 확장 속에서 [그래보자]. 현행적인 현출방식들은 그러면 또한 함께-사념된 것으로서의 그들의 의식지평에 속하게 된다.

*Q. 그렇다면 후기 후설에게서 필증적인 것은 역시 자연적 세계가 아니라 초월론적 세계인가?

 모든 현출방식들, 그를 통해 현출하는 타당성통일체들로서의 모든 의식통일체들은 그러면 심리적인 구조물, 그 속에서 그때그때마다의 영혼이 어떤 방식으로든(wie auf immer) 함께-오면서, 함께 “형성되는(gebildet)” [그런 심리적인 구조물], 지향적 심리학에서는 더 상세한 설명에 속하는 [그런 심리적인 구조물이다]. 내재적인, 영혼의 타당성양태들 속에서 타당한 대상들 자체(그리고 개별적인 영혼 속에서 사념된 주변세계 자체) 그리고 그것의 현출방식들의 변화(관계되는 영혼 속에서)는 그러면 세계 자체, 그 속에 관계되는 영혼 또는 관계되는 심리물리적 인간이 존재하고 모든 그의 심리적 체험들 그리고 심리적 구조물들과 함께 존재하는 그런 세계 자체와는 구분되어야 한다[?]. 세계의 토대 위에 서면, 또는 세계라는 초월론적 현상의 본질구성성분에 집중하면(an etw. Sich halten, stick to), 인간의 곁에(bei) 그리고 그의 인격적인 공동체에 관한 또한 문화세계의 형태화에 관한 발전의 문제에 부딪히게 되고 우선 이미 개별적인 인간의 곁에서 그의 역사성[의 문제에 부딪히게 되는데,] 이 역사성[을 해명함에 있어서]는 궁극적으로 탄생으로부터의 최초의 발전의 문제에 부딪히게 되며 [이는] 전형적인 (나이의) 발전단계들의 문제에로 이끈다. 발전 속에는 하나의 목적론이 놓여있다: 모든 영혼은 그를 위해 타당한 세계를 스스로 획득해내며(erarbeiten);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놓여있다[.] 영혼은 현출방식들의 형성(Bildung), 그를 통해 다양한 세계영역들과 그 가운데서 이 세계가 구체적인 세계인 그런 특수한 유형학이 그를 위해 의식되는 그런 형성을 스스로 획득해낸다. ★세계는 그것이 존재하는 대로 존재하지만(Die Welt ist, wie sie ist), 영혼은, 말하자면 깨어나면서, 그러므로 세계 속에 들어서면서, 의식을 가지기는 해도 도리어 이러한 영혼 자체의 발전단계 속에서 수행되는 하나의 성취인 것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의식은 가지지 않는다.* 모든 인간적 영혼은 처음부터 세계경험, 세계인식, 인격적인 것으로서, 공동체 내 삶으로서 그리고 하나의 공동체 속에서 의미를 취하는 문화세계 [내 삶으로서] 가능한 의식적 세계삶을 겨냥한다(auf … angelegt). 이로부터 본능의 개념, 심리학적 의미에서의 근원적 본능들, 그것의 발동 속에서 신체적인 현존에 대한 의식다른 인간의 현존에 대한 의식역사적 문화세계에 대한 의식이 습득되는 그런 본능들이 얻어진다(bekommen). 인간성에 대해 또는 민족인간성이나 국가인간성과 같은 특수인간성에 있어서 [어떤] 발전에 대해 그것의 개별인격적 담지자를 “성숙한” 인간으로 취하면서 말할 때, “본능”의 개념은 언제나 새로이 기능하게 된다[?]. 다가올 인간성의 운명을 규정하게 되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모든 창조적인(schöpferisch) 성취는 새로운 것에 향해진 어두운[희미한] 충동을 전제한다. 이 충동은 충족(여기서 [이는] 창조적 작업의 완성물에까지 이르는 창조적인 행위[를 뜻한다])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목적론적 의미를 보여주고 새로운 것 자체를 창조자를 위해 그리고 그에게 공감하는 동료-인간들을 위해 의식되게 해주며 그로써 그것을[새로운 것을] 새로운 환경세계 속에 삽입시키면서(einfügen) 그렇게 한다. 우선은 절대적인 가치에 대한 물음 없이 인간성에 증가하는(aufsteigend) 발전의 통일체를 할당하면(zuschreiben, ascribe), 이는 동시에 다음과 같은 것을 뜻하게 된다. 하나의 목적론이 그것의 역사적 연관 속의 영혼을 관통하며, 근원본능에 의해 정초된 언제나 새로운 본능, 보편적으로 모든 탄생에서 보편적으로 똑같이 기능하게 되는 그런 본능**이 발원한다는 것을 말이다.

*Q. 세계의식 없이 가능한 세계가 있다는 말인가? 그 경우 세계가 전제된다는 말은 타당성을 얻게 된다.

**Q. 과연 본능이 모두에게 똑같이 작동할까?

A. 본능은 같되, 교육의 양태 따위가 다를 수는 있겠다.

 당연히 본능(근원충동들과 더 높은 단계에서 새로이 뚫고-들어오는(durchbrechend) 충동들), 개별적인 영혼과 영혼적인 연합(Verbundenheit)에 있어서 타고나야 하는 [것으로 상정되는] 그런 본능에 대한 이러한 심리학적 개념은 하나의 구성된 구조물이며 구성된 세계에 속한다. 이에 반해 초월론적 연구는 그에 초월론적 본능이 초월론적 목적론의 근본개념으로서 속하는 초월론적 발생의 문제에로 이끈다.

 모든 초월론적 자아에게는 그가 타고난 것이 있다 — 자아는 선천적으로 그의 흐르면서 구성하는 초월론적 삶, 그 속에서 자아가, 세계를 시간화하면서, 그 자신을 인간으로서 시간화하는 그런 초월론적 삶을 위한 “목적론적 근거”를 자신 안에 담지한다. 자아는 자신 안에 흐르는, 자아의 참여 없이도 전진하는, 순수하게 연상적인, 자아-하부적인(unter-ichlich) 시간화를 그것의 본질형식 속에서, 그것의 고유한 정초구조(Fundierungsbau) 속에서 담지한다. 이와 본질적으로 하나인 것은 그의 본질형식 속, 연상적으로 시간화되는 지향성 속에서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신종의 자아적으로 지향적인 성취들, 촉발성과 능동성으로부터 타당성통일체를 구성하는 그런 성취들의 본질형식 속 구체적으로 자아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이는[상술한 성취는?] 언제나 함께 작동하는, 모든 타당성구조물들에 함께 참여하는 연상의 지속적인 근거 위에서 [있]다. 이에 더해 현행성과 잠재성 사이의, 현행적으로 살아있는 구성된 구조물과 재생(Wiederaufnahme)의 능력 하에서 비현행성으로 가라앉음 사이의 구분의 본질형식[이 있다]; 비현행적인 계속-타당함(Fortgeltung), 그러나 또한 뒤따를(nachkommend) 양상화의 가능성, 타당성양상성들 가운데서 근원타당성의 변화의 가능성. 그러므로 그의 현행적인 구조들을 흐름의 현행성 속에서 가지는 본질적으로 현행적인 초월론적 자아(모나드로서 구체적으로)는 현행성구조 속에서 내실적으로 주어진 것 그리고 그 속에 “함축된” 존립요소들과 구분된다; [초월론적 자아는 또한] 촉발되어-존재함의, 사념함의, 경험함의, 가치평가함 등의 흐르는 일어남(Geschehen)과도 구분된다[.] 체험함으로서의 의식은 그 속에서 체험된 것, 그의 추정성의 양태 속 추정된 것, 소여의 방식[어떻게] 속 추정된 것 자체와 구분되며, 추정함과 관련하여 명시적으로 사념된 것과 함축적 함께-사념함의 지평 등이 구분된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본질형식을 가진다. 이 본질형식은 에이도스로서 부각되어(herausstellen), 필증적인 본질법칙성이며, 그 아래에(darunter) 모든 자아적이고 자아-외적인 또는 순수하게 연상적인 성취 그리고 성취하는 의식삶이 [성립하는데 그것도] 그의 내실적으로 내재적인 그리고 그의 그 속에서 구성된 존재구조와 함께 성립하며(stehen), 그 속에서 다가올 존재통일체들, 가치통일체들, 실천적 의미에서의 통일체들의 모든 잔존할[?] 계속-타당함 그리고 타당성양상화의 모든 작동과 관련하여 성립한다(hinsichtlich aller darin zur bleibenden Fortgeltung kommenden Seinseinheiten, Werteinheiten, Einheiten praktischen Sinnes und mit allem Spiel der Geltungsmodalisierung).

 여기서 숙고할 점이 있다: 구체적 자아로서의 나의 사실(das Faktum)은 필증적이며, [그런데] 나의 구체적인 존재가 그에 묶여있는 일반적인[generell] 본질형식이 [또한] 필증적이[라는 점 말이]다.

 나는 필증적인 필연성 속에 있으며, 공허한 자아-극으로서가 아니라 그것과 분리 불가능하게 하나인 모든 것과 함께 나의 구체적인 삶 속의 자아로서 그렇다. 그런 자아로서 나는 나의 본질을 가진다. 그러나 이는 마치 나의 사실성이 이제 하나의 우연적인 것인 양, 나의 필증적으로 통찰 가능한 보편적 본질이 [나의 사실성에] 선행했던 양[—]우리가 다른 경우에서 필증적인 본질보편성과 그 아래에 속하는 사실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알[게 되]는 그런 의미에서[—]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삼각형 일반”(이것을 이루는 모든 것과 함께)의 필증적인 에이도스가 아프리오리한 유효성을 가지는 것과 비슷하게, 모든 사실적인 삼각형에 선행하는 유효성이, “이러한 삼각형”이라는 사실을 위하여(세계 속에서 사실적으로 존재하는 실재하는 형태로서) 무엇보다도 그 근거와 관련해(nach dem Grund) 의문에 부쳐져야 한다. 이 근거는 에이도스 자체로부터 나타나지 않는다(für den das Eidos von sich aus nicht aufkommen könne). 본질은 실존에 선행한다. 실존은 무엇보다도 그것의 옳음(Recht)을 [본질에] 뒤따라서 입증해야 한다. 에고의 필증성과 관련하여서는 그러나, 그 필증성이 필연적으로 더 일찍인 것이, 본질의 필증성을 비로소 통찰 가능하게 해주는 것으로서 더 일찍인 것이 된다.

 하나의 자아의 필증적인 본질구조에 대한 통찰 일반(나의 초월론적 자아의 가능성변양들과 나아가 다양한 자아의 가능성들 그리고 초월론적 상호주관성의 가능성들)은 나의 자아의 필증성(필증적 통찰을 수행하는 [나의 필증성])이 우선 현행적으로 통찰되어야만 가능하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필증적으로 깨닫게 되고 이러한 자아의 필증적 내용물[,] 내가 나에게 필증적으로 할당해야 하는 그런 필증적 내용물에 대해 묻게 됨으로써, 나는 필연적으로 다음의 사실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전체 내용물 또는 이러한 내용물 속 나의 필증적인 존재는 나에 의해 자유롭게 변양 가능하다는 사실, 즉, [전체 내용물 또는 이러한 내용물 속 나의 필증적인 존재가] 자유롭게 가능한 두루-꾸며내봄(Umfingieren)을 통해 그것의[내용물의] 순수한 가능성변양들로 전환될(überführen)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모든 변주물들 가운데 하나의 공동의 본질이 깨어질 수 없는 불변자로서 관통한다는 사실에 말이다. 이러한 자기변주 및 불변자에 대한 발견의 능력은 그 자체로 나의 필증적 구성성분에 함께 속하며 이로써 다시금(abermals) 모든 상상가능한 자아에, 내가 얼마나 창의적[으로 변주하]든지 간에 나의 자아로서[의 모든 상상가능한 자아에] 속한다. 나 자신을 필증적으로 존재하는 자로서 가능성(상상가능성)으로서 가정하는 능력 속에서 그리고 그 가능성을 자유롭게 변양하면서 그로부터 산출되는 변주물들 일반의 범위(Spielraum) [내]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로] 이행하게(übergehen) 두는 능력 속에서 모든 나-변주물은 나일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나를 나의 고유한 무엇-내용 속에 포함된 것으로서 인식하고 이러한 무엇이 하나의 불변하는 본질을 가진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러면 물론 [내가] 나의 필증적인 “나는 존재한다”는 하나의 흐르는 본질과 함께(mit einem strömenden Wesen) 흐름의 본질형식을 가진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흐르는 본질 속에 지향적으로 함축되어있는 것은 하나의 흐르는 시간화와 그 속에서 시간화된 존재, 그의 고유한 존재의 진리를 가지는 그리고 그의 고유한 본질 속에서 [진리를 가지는 그런] 시간화된 존재이다. 궁극적으로 나를 위해 존재하는 모든 것, 나를 위해 참되게 존재하는 것으로 증명가능한 것이, 또한 나의 흐르는 본질 속에서 상상가능하게 구축 가능한 가능존재로서 나를 위해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 속에 지향적으로 구성된 것으로서 함축되어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나의 구체적인 무엇(Was)은 지향적인 함축의 방식으로 다시금 무엇임들(Washeiten)을 자신 안에, 단계들의 다양체 속에 포함시키고 있으며, 이 모든 무엇임들은 나의 필증적인 존재의미와 분리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나의 구체적인 필증적 본질에는 사실적인 무엇이 속한다. 이 사실적인 무엇 속에서 나는 그 속에서 사실적인 세계가 그것의 사실적인 본질과 함께 구성된다는 것을 본질법칙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는 이해가능하게(verstehbar) 세계에 대해서도 유효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나의 필증적인 실존 속에 필증적으로 함축된 “세계”라는 사실은 “세계”라는 본질에이도스에 선행한다. 모든 꾸며내진 세계는 이미 사실적인 세계의 변주물이며 그러한 것으로서만 변주물로 구축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렇게 획득될 모든 세계변주물들의 불변하는 에이도스는 [세계의] 사실에 묶여있다. 나는 존재한다”의 필증성은 한 공허한 자아극의 공허한 필증성이 아니라 내가 사실적으로 그것인 나, 나의 존재 속에 필증적으로 포함된 모든 것과 함께 나의 필증성이다.


부록 XV. 발전되지 않은 본능들과 발전된(알려진[탈은폐된]) 본능들(s.123-124, 1933년 중반)

 나 자신에 대해 반성하면서(besinnend), 나는 내가 세계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경험하면서 인식을 취하는, 느끼면서 가치평가하는, 행위하면서 형태화하는 다양한 작용들 속에서 세계와 관계해있다는 것을 발견한다(Mich besinnend, finde ich mich der Welt bewusst, des Näheren[?] auf sie in mannigfaltigen Akten bezogen, erfahrend Kenntnis nehmenden, fühlend wertenden, handelnd gestaltenden). 자아-활동성들로서의 모든 작용들 속에서 나는 무엇인가를 미리-가진다(vorhaben). 그러나 현행적인 미리-가짐은 이때 습관적인 것들, 지속되는 관심들의 현실화들이다. “관심들”이란 1) 근원관심들, “맹목적” 본능들[이며] 이들은 그러한 것으로서(als das) 발전되어있지 않다[알려져 있지 않다]; 2) 드러내진[탈은폐된](또는 발전된) 본능들[이다]. 본능습성들이란 그에 상응하는 활동성을 위한 습성들이다(Instinkthabitualitäten sind Habitualitäten für ihnen entsprechende Aktivität). 이러한 것[본능습성]은 자아의 맹목적인, 노력들이 어디를 향해 의지하고 있는지가 표상되지 않는 한에서 맹목적인 노력함이 될 수 있다. 이 노력들은 활동들(Tätigkeiten) 속에서 발동되는데, 그 활동들과 함께 이것[본능적 노력] 또한 명증적으로 의식되며, 이것이[명증적 의식] 일어나자마자 맹목적 본능은 전개된(entfalten)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리고 본능이 현실화될 때마다 현행적인 노력함은 즉시 표상적인 기대된 텔로스, 가치있음의 성격을 가지는 그런 텔로스에로의 향해있음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충족의 과정은 행위, 모든 국면에서 최종적인-일어남에 향해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종결되면서 향유하는 거기-함께-있음(Dabeisein)의 성격을 가지게 되는 그런 행위의 형태를 가진다. 중간의 행위들은[행위의 중간단계(Zwischenstadien)는], [텔로스에 대한] 말하자면 섬김 속에서 최종적 가치의 습득을 정초하면서, 매개된[수단적인] 가치의 성격을 가진다.

 완전히 성숙한 인간의 본능은 이미 그의 고유한 삶으로부터 그리고 매개적으로 그에 대해 타인경험에 입각해 함께-거기-있는 인간의 삶으로부터 드러난[탈은폐된] 본능이다. [저마다의] 고유한 어린시절을 기억으로써 되돌아보는 자기이해는 본능들이 들어서고 뒤이어(nachkommend) 자신을 드러내보인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러한 일[기억]이 일어나자마자 세계는 하나의 새로운 얼굴을 가지게 된다—[자신과 같은] 유[를 향하려는] 충동(Gattungstrieb)과 관련해서도 그렇다. 사람들은 이제 서로를 다르게 보게 되며 새로운 의미로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이 새로운 의미는 궁극적으로 본능적인 가치평가함과 그것의 변양들, 그 속에서 하나의 가치목표를 향해 상이하게 관계된 변양들을 소급지시한다. 더 심화된, 지금에 와서는 아직 접근 불가능한 고찰들은 모든 인간적 발전의 시작에 이미 본능이 [기능하고] 있다는 점, 구체적으로 주변세계에 대한 알아감(Kennenlernen)의 보편적 본능으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본능을 통해서만 하나의 환경세계에 대판 표상이 실재적 구조의 세계[에 대한 표상으]로서 자라나는데[?], 세계표상과 객체들 그리고 그것들의 연합의 구조적 유형에 대한 표상이 이러한 본능의 충족[,] 그때그때마다의 그것의 특수한 형태들 속에서의 [그 본능의 충족]과 다르지 않은 그런 방식으로 자라난다. 이 속에는 유아적인 시작 속에 하나의 삶, 그 안에 아이가 아직 없는(in dem das Kind sich noch nicht) 그리고 그의 그 밖의 환경세계가 세계의미를 가진 [것으로] 아직 표상되지 않은 그런 삶이 있다는 점이 놓여있다.


Nr. 9 충동들에 대한 억제(Hemmung). 억눌러진(Zurückgedrängt) 욕망, 체념(Entsagung) 그리고 진정한 금욕주의(s.125-129, 1934 7)

 충동들—본능들, 근원적인 충동들, 그것의 보편적인 유형학에 따른 충동의 종류들. 만족의 양태에 따른 충동과 욕구. 억제[됨]의 양태에 따른 충동. 만족의 템포. 그러나 여기에 이미 욕망과 욕망의 충족이 생각되어있다. 그러나 충동이 “무의식적으로”, 자아참여 없이 충족되는 가능성이 또한 언급되어야(hinweisen) 하지 않겠는가(자기면제(Selbstentladung), 이완(Entspannung))? 병자의 건강하지-못함 속 “처지의 변화(Wandel des Befindens)” 가운데 이완되는, 점점 더 나아지는 쾌차 가운데서 자아가 참여할 필요 없이도 [이완되는 그런] 하나의 충동이 놓여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건강하지-못함은 견고한 억제 속에서, 계속해서 지속되는, 정초된 느낌(Gefühl)이다. 나아가 억제가 강력해질 수 있다는 점, 즉 이전보다 더 억제될 수 있다는 점이 주목되어야 한다. 삶은 고립되지 않은 충동들의 이완이다. 모든 구별 가능한 충동들은 총체적 충동의 통일체 속에서 하나이다; 그리고 총체적으로 고찰되었을 때, ‘건강한’ 삶이란 그에 귀속되는 억제되지 않은, 파괴되지 않은 삶[—]그것의 통일적인 충동성 속에 있는[삶—]의 전체느낌(건강한[쾌-있는] 자의 전체기분)과 함께인 이완으로서의 충족의 통일적인 결과이다. 이러한 통일체 내부에서 특수충동들이 부각된다. [충동들의] 전체와 그것의 특수충동은, 그 자체로 고찰되었을 때, 이완의 변동하는 템포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완 속에는 억제의 극복이 놓여있지 않은가? 모든 충동-경과가 곧 긍정성과 부정성의, 충족과 억제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들 또는 면들(분리 불가능한 계기들)을 가지지 않는가? 충동은 오직 점진성의 템포 안에 있지만, 다차원적으로 그렇다. 완전성과 불완전성. 각 국면에서의 불완전성은 다음을 의미한다: ‘억제-없음’의 상대적으로 가장 큰 정도, 경과 속에서의 억제되지-않음. 하나의 부분충동—충동의 총체 속—은 충족의 방식에 있어서 그것이 멎는 식으로, 그것이 순수하게 억제된 충동’인’, 말하자면 현행적인 경과형식을 가지는 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것[부분충동]은 충족되면서 억제를 극복하는 것으로서, 그러고 나서 다양한 템포 속에서 [그러한 것으로서] 긍정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러면 충족의 쾌감(Wohlgefühl)은 템포와 소위 충족의 부조(Erfüllungsrelief)에 의해 규정된다(충족방식에 있어서 다양한 방향들이 가능한 한에서). 관건은 완전성, 상이한 면들에 따라 그를 넘어서 뻗어가고 통합되는, 그러나 또한 완전성의 획득의 ‘빠름 또는 느림’의 시간적 템포에 의존하는 완전성이다. 여기에 그러므로 숙고하고 더 보충해야 할 것이 많다. 감정들은 이때 언제나 하나의 전체 삶-느낌의 계기들이다. 그것들은 자료들(이를테면 색깔자료와 같은), 섞이거나 분해되어(entmischend) 분리되는 자료들이 아니며, 그에 따라 특수충동들이 그것들의 충족과 억제의 (그러므로 비-충족의) 방식으로 그것들의 느낌을 가지는 하나의 본질적인 것이, 그리고 이러한 것이 어떻게 전체느낌에 ‘영향을-미치는지’에 따라 하나의 본질적인 것이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충족의 긍정성 속 포화의 양태로 있는 충동. --이것은 완전한 억제의 반대절편(Gegenstück)인가? 그러나 포화는 ‘해결(Erledigung)’로서 삶 속으로 완전히 다르게 들어선다. 그 해결과 함께 좋은-느낌의 한 요소가 보유(여기서 하나의 수동성을, 그러므로 ‘침전’을 의미하는)의 변화 속에서 삶의 배경 가운데서 계속해서 기능하는 그런 해결로서, 하나의 충동에서 충족되지-않은-것으로-남은 것 전체가 절대적인 억제되어있음으로서, 주관성 안에서 계속해서 지속되면서, 각 생동하는 현재 속에서 수행되는(treibend) 현행성인, 말하자면 지속적으로 해결을 울부짖는 그런 해결로서 말이다. 당연히(Natürlich) 이는 프로이트적인 정신분석과 그것에 끼워진 정동들, 그것의 ‘억압들’ 등의 선해석(Vordeutung)이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명백하게, 이러한 정신분석적 사물들에 현실적으로 주관적인 사실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명을 위해 근본적인(radikal) 것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양상들. ‘무의식’의 양태에서의 충동, 나에게 의식되지 않은 존재, 자아-중심으로부터 출발하는 욕망하는 향함(Zuwendung)의 양상에서의 충동과 반대되는 [그런 충동]. 그것의 양상적 변화들 속에서의 삶의 충동[이] 통일적으로 그것의 통일적인 충동[인 충동?]—시간성 속에서 하나의 지속적인 생성, 스스로-변화함 속[에 있다]—그러므로 개별적인, 나란히-함께-있는, 하나의 지속적인 발생 속에 놓여있는, 하나의 ‘지향적’ 발생 속에 있는 특수충동들의 변화 속에, 우리가 여기서 맨 밑에(zuunterst) 하나의 선지향성, 모든 명시적인 지향성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그런 선지향성 속에 서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아적 지향성 속에 있는 충동. 아직 ‘드러나지-않은’ 목표를 욕망하면서 향해져-있음, 그 어떤 ‘목표표상’도, 충족된(erfüllt-gewesen) 것으로서의 목표에 대한 기대도 없이. 상응하는 키네스테제와 그것의 결과를 억제 없이 반복하는 일깨움으로서의 즉시 행함으로 이행해감의 형식 속에서의 충족. 새로운 것: ‘나는 할-수-있다’, ‘한갓되게 표상적’인 상응하는 행함, 상응하는 키네스테제와 결과, 억제된 지향, 아직 충족의 과정 속에 발견되는 다른 [지향]에 의해 억제된 그런 지향의 동안에. 충족을 진행되게 하는 한갓된 표상, 긍정, 명령(fiat), 긍정함(Ja)로서의 의지충동(Willensimpuls). 그러나 상이한 충동들의 경쟁이 억제인가—하나의 충동의 발현(Auswirkung)이 저항에 부딪히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그리고 이는 물론(wohl) 그 자체로 다시금 다양한 의미들을, 다양한 방식들을 가진다. 예를 들어: ‘반복’ 속에서의 충동, 다시 일깨워진, 키네스테제적 실망(Enttäuschung)의 해소, ‘다르게 일어난다(Es kommt anders, it turns out differently)’, 마침내 충족, 실망 속에서의 억제 그리고 마지막 충족의 ‘극복’. 또는 완전히 다르게: 키네스테제가 충족의-진행(Erfüllunsgang)을 함께 데려온다, 그러나 갑자기 ‘마비(Lähmung)’ 또는 다른 ‘저항’[,] 억제[가 일어난다]; ‘힘의 긴장’을 통해 하나의 거리(Strecke)를 극복하고 나서 가만히 서있기(stehen bleiben); 힘의 긴장이 도움을 주지 않는다 등.

 충동들(영양충동, 성충동 등)은 서로-나란히(miteinander) 지속적으로 거기 있지만, 상이한 양태들 속에서 그렇다; 그러나 발효됨(Sich-Auswirken) 속에서 한 충동은 다른 충동을 억제할 수 있다, 하나의 충동이 다른 충동을 배제할 수 있고, 그러므로 현행적인 발효 속에서 [그럴 수 있다.]

 ‘근본충동’, 근원적인 ‘욕구들’은 언제나 나에게 고유하다[나 자신의 것이다](sind immer zu mir eigen). 여기서 무엇이 양태들의 다양성과 나의 각자성의 구체화 속에서 영양충동들‘의’ 동일성을 만드는가?

 상호적인 ‘억제’, 상이한 욕구들의 충족으로서의 현행적 발효의 정립-밖에-두기(경우에 따라서 하나의 총일적인 욕구 내에 특수한 것), 충족이 수동적인 정립-밖에-놓임을 통해 끊기는 대신 상응하는 포화에 이르기까지 일관적으로(konsequent) 진행되어감(Fortgang)으로서의 현행적인 발효, 다른 욕구가 분산-됨(Abgelenkt-Werden)의 방식으로 수동적으로 활동에 들어설 때. 자아-의식의 양상성 속에서: 나는 다른 방식으로(anderweitig) 촉발된다, [나는] 억제 없이 촉발을 따라가고 그로써 나의 길을 [내버려두고] 떠난다, 내가 이러한 것에 의해 아직 촉발되고 있을 동안. 여기서 촉발적 사건은 그 자체로 충동적이지 않다.

 ‘능동적인’ 욕망, 자아적인 것, 본래적인 능동성이 아닌 것, 충족이 수동적으로 들어설 때. 의지함, 명령(fiat), 행위함(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1) 중단시키는(arretierend) 자기금욕(Sich-Enthalten): 수동적인 경과의 금지의 활동, 이러한 정지점에서(in diesem Stillstandspunkt).

 2) 나아가: 일어나는 욕구, 올라가는 욕망을 ‘억누르기’, ‘억압하기(verdrängen)’. 이러한 충동 속에 나를 내맡기지 않기, 내가 다른 [충동]에 나 자신을 맡기면서, 다른 방향을 가진 행위에로 돌입하면서, 낡은 목표, 계속해서-타당한 관심을 다시 현실화하면서, 그러나 수동적인 분산되게-놔둠의 방식이 아닌 방식으로, 도리어 욕망하는 촉발 그 자체의 충족과정을 삭제함 속에서 하나의 능동적인 자기금욕(하나의 행함으로서)으로서. 그리고 이로써 이어지는 것(ein weiteres)이 배제된다. 나는 이러한 촉발을 통해서 하나의 행위 속에서 분산된다, 이는 여기서 다음을 의미한다: 나의 자아적인 지향성(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주의)의 방향빛살(Richtungsstrahl)이 더 이상 일차적인(primär) 형태를 가지지 않는다; 의지적인 행함 속에 있는 것을 향해서 나는 이제 이차적으로 향해져있으며, 그것[Tun]은 그것의 발효 속에서 약해지고, 억제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의지 속에 [있다]. 내가 금욕함으로써, 그것을[욕망을] 제쳐놓음으로써(zurückschieben), 나는 내 행위의 일차적인 지속(Fortführung)의 목적을 따르고자 한다. 이는 근원적으로 생각되었을 때 어떤 종류의 의지인가(Was ist das für ein Wille in Ursprünglichkeit gedacht)? 긍정하는 보상(Restitution)으로서의 여전히 생존해있는 행위하는 명령의 반복과 하나인 욕망하는 촉발의 부정.

 모든 경우에서, 억압된 욕망은 여전히 다른 양태에 있는 나의 욕망이다; 내가 따르지 않는 하나의 촉발은 계속해서 여전히 촉발이다.

 3) 금욕하기, 그것을[욕망을] 하나의 본질적으로 새로운 의미에서 금지하기: 욕망을 삭제하기, 욕망 속에 놓여있는 것, 그것을 오히려 이루는 ‘타당성’ 삭제하기, 무화하기(das Begehren durchstreichen, die in ihm liegende, es vielmehr ausmachende „Geltung“ durchstreichen, zunichte machen).

 4) 마찬가지로 그것이[하나의 의지목표가] 여전히 계속해서-유효한 동안, 자아적인 배경의 양태에서의 의지가, ‘무의식’ 속에서, 여전히 계속해서-살아있고 끊기지 않은 채로 계속해서-의지하는 동안, 하나의 의지목표를 한갓되게 젖혀놓지(zurückstellen) 않기, 도리어 의지를 ‘지양하기’, 의지목표를 삭제하기, 그것을-더-이상-원하지-않기와 상관적으로.

 ‘체념하기(entsagen)’—후회하면서(bedauern)—술과 담배 등을, 이를테면 그것이 건강에 위험을 가져오기 때문에 등, 그것은 단지 계속해서 존속하는 욕망을 행위로 전환하지 않는 것, 그러므로 단지 욕망의 수동적이고 숙고되어-행위하는 충족을 삭제하기(의지하지 않기, 행위하지 않기)이다. 욕망 자체는 삭제되지 않는다.

 완전히 다른 체념, 더 근본적인, 왜냐하면 모든 상응하는 행위를 통째로(mit) 무화시킨다는 것은 단도직입적으로 욕망 자체를 삭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로써 그것[욕망]이 모든 방식으로 사라진 것은 아니며, 그것은 ‘삭제된’ 욕망, 비유효성변양(Ungültigkeitsmodifikation) 속에서의 [욕망이다].

 그러나 이는 얼마나 멀리에까지 이를 수 있는가?[금욕을 얼마나 할 수 있는가?] 진정한 금욕주의는 그와 같은 삭제이며 [삭제의] 개별적인 경우가 아니라 보편적인 것과 관계한다.

 그러나 얼마나 멀리에까지? 인생은 그럼에도 그 자체로 충동삶이며, 노력하면서, 욕망하면서, 행위하면서 [사는 삶이다]. [욕망의] 보편적인 부정을 통해 전체 삶은 하나의 변화(Umwandlung, transformation), 모든 본능적인 충동들, 모든 변화들(Umbildung)의 근원적 핵을 구성하는 그런 변화를 발견하는가? 어떻게 변화하는가(verwandeln)? 하나의 ‘새로운 삶’ 일반을 항하여, 그 속에서 모든 근본충동들이 파괴될 수 없는 것으로서 여전히 기능하는, 그러나 모든 것이 ‘타당성-전환(Umgeltung)’을 통해 하나의 새로운 ‘더 고차적인’ 형태를, 더 고차적인 의미를 가지는 [그런 새로운 삶을 향하여]. 거절과 뒤돌아섬의 능동성[활동]으로부터 [나오는] 새로운 삶, 그 속에서 소박한 삶의 총체가 주제적이 되고 그 과정에서 하나의 능동적인 삭제를 통해 새로운 형태를 획득하는 [그런 새로운 삶]. 그리고 이제: 이것이 현상학적 에포케로부터의 전체 인간, 전체 인류의 새로운-형성과는 어떤 관계를 맺는가?


부록 XVI. 자연적 세계성의, 생의지의 체념, 부정(1934.4.25): "Flüchtig und wohl unbrauchbar. Nur durchsehen."(s. 129 각주)


부록 XVII. 본능과 촉발. 생활세계에서의 본능행위(1937 1)[후설이 삭제하지 않은 일부](s.132)

 내가 철학하면서 나의 에고로 되돌아갈 때 이미 구성된 것*:

 1) 감성적 경험 속에서의 세계, 그 속에 물체적 세계가 자체부여되어있고, 원초적인 자기부여된 기관으로서의 신체와 함께 원초적인 것이 본래적으로 자체부여되어있다. [또한] 그 속에는 환문을 통해 비로소 순수한 물체세계가, 그러므로 미리-주어진 세계로의 환원이 있다.

 2) 원초적으로 주어져서 또는 지평적으로 함께-타당한 물체적 육체(낯선 육체)를 통해 나를 위해 타인경험에-걸맞게 존재하는 인격들의 우주—인격들로서 그들의 원초적 물체세계에 대한, 그들의 기관으로서의 신체에 대한 자아주체들. 모든 자아가 타자의 원초성과 관련하여 그의[타자의] 원초성으로부터 발원하는 것으로서 소유하는 존재타당성 속 원초성들의 합치. [저 발원은] 모든 추이해하는 원초성 속에서 발원이 스스로 반복되는 [그런 발원이며] 모든 타자가 다른 타자를 그의 원초성의 주체로서 이해하는 한에서 [그러하다]. 그것은 고유한 선호된 원초성(‘나의 것’)[Die je als selbsteigen bevorzugte Primordialität („meine“)]으로서 ‘나를’ 위해 모든 나의 타자에게 추이해 가능한 그리고 타인경험에-걸맞게 경험 가능한 그리고 그렇게 모두를 위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원초성이라는 의미를 획득한다: 나를 위해 유효한 것은 모든 사람에게 유효하다.

*세계와 타인을 원초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