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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2024년 6월의 독서

 


1. Waldenfels, Bernhard. (2002). Bruchlinien der Erfahrung, Suhrkamp 중 'Getroffensein'과 'Traumatisierung'.

 베른하르트 발덴펠스가 전개한 응답의(또는 반응적responsive) 현상학의 기본 테제들이 소개되어 있다. 독일어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데, 기본적으로 간결하게 쓰기보다 같은 말을 여러 번 달리 반복해서 표현하는 스타일의 작가다. 발덴펠스의 철학에는 놀랍게도 고전적 현상학자들 모두의 사상이 오롯이 녹아들어가 있다. 세계와 주관을 잇는 지향성이라는 사태의 의미와 한계에 대한 통찰, 그리고 수동성에 대한 천착은 후설을 따른다. 한편 촉발(Affekt 또는 당함, Widerfahrnis, 경우에 따라 호소Appell)에 (a)불가피하게 그러나 (b)늘 한발 늦게, 나아가 (c)소여에 못 미치게 잇따르는 응답(Antwort)에 대한 사유는 전기 하이데거의 양심 개념과 데리다의 후설 비판을 연상시킨다. 응답에 따르는 책임에서는 레비나스의 색채가 다분히 묻어나며, 상황성에 대한 때로는 은밀하고 때로는 노골적인 강조는 보부아르 및 메를로-퐁티를 연상시킨다. 

2. Waldenfels, Bernhard. (2011). Phenomenology of the Alien, A. Kozin & T. Stähler (Trans.).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경험의 단층선들⟫이 지적 인식과 가치론적 욕망의 차원에서 발생하는 소여의 불가피한 잉여(Überschuss)를 다뤘다면, Grundmotive einer Phänomenologie des Fremden을 번역한 이 책은 실천적 의지의 차원에서 발발하는 타자와의 만남을 조명한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물론 내 문해력 부족 탓일 수 있지만, ⟪경험의 단층선들⟫에서 돋보였던 촉발의 발원지(그로부터 촉발이 발원하는 그곳, Wovon, from which)가 지니는 양가성이 축소된 듯해 아쉽다. 분명 전작에서 촉발의 발원지는 소수자와 타 문화의 인간과 같은 존중의 대상뿐 아니라 폭력이나 재해처럼 어떤 식으로든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대상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책은 주로 전자만을 다룬다. 하지만 사태 자체에로 돌아간다면 모든 타자성이 레비나스가 암시하듯 성스러운 현상인 것은 아니다. 나에게 부당한 힘을 휘두르는 자 역시 나의 이해력을 넘어서고 내 규범을 무너뜨리는 타자이기 때문이다. 

 발덴펠스의 철학을 소개하는 한국어로 된 철학 논문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그의 응답의 현상학을 국내에 소개할 수 있을 만한 글을 써보면 좋을 것 같은데, 단지 해설만 하자니 내가 생각하기에 논문다운 논문의 퀄리티에 못 미치고, 비판적 독해까지 하자니 내가 아는 게 별로 없다. 우선 ⟪경험의 단층선들⟫을 마저 더 읽고 싶다.

3. Scheler, Max. (1921). Vom Ewigen im Menschen: Erster Band: Religiöse Erneuerung, Neue Geist.

 아직은 읽는 중인데, 엄청 재밌다. 다 읽고 나서 평을 남겨야지. 다만 셸러 아저씨의 글에는 종교적 아우라가 너무 강하게 배있다. 저번에는 Ordo Amoris를 조금 읽다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가치들 사이의 객관적인 위계가 있다는 주장에서 튕겨나왔다. 아무튼 박사논문을 양심을 주제로 써도 좋을 것 같다. 후설과 하이데거의 양심 개념에 대해 연구해둔 것도 좀 써먹고...

4. Pihlström, Sami. (2011). Transcendental Guilt, Lexington Books.

 죄의식이 도덕적 행위자로서 인간의 경험에 구성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즉 죄의식은 초월론적이라는 주장이 담긴 책이다. 이때의 죄의식은 일어날 수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경험적 죄의식이 아니라 우리는 어떻게 살든 결코 도덕의 요구 모두에 대해 온전한 책임을 질 수 없다는 형이상학적 죄의식에 해당한다. 시간이 부족해 처음 두 챕터밖에 읽지 못했는데 언젠가 나머지도 읽을 수 있기를.

 'Guilt'의 번역어로 무엇이 좋을까. 영어에는 죄책감과 죄책 자체의 의미가 혼재되어있는데, 한국어에는 그 혼재됨을 살릴 만한 역어가 없다. 분석철학 논문들에서는 정동을 콕 집어 논할 때 'guilt-feeling'이라 명시하는 편이다.

5. Long, A.A. & Sedley, D.N. (1987). The Hellenistic Philosophers, Vol. 1, Translations of the principal sources, with philosophical commenta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제논의 제자이자 후대에 의해서는 스토아주의 내 이단으로 평가받았던 키오스의 아리스톤에 대해 페이퍼를 썼다. 무차별자에 대해 아리스톤이 내세운 소수파 이론이 왜, 이를테면 키케로의 비난에 반해, 오히려 스토아주의의 덕 개념에 더 충실한지 논증하는 글이었다. 교수님께서 전혀 예상치 못하게 과분한 칭찬들을 해주셔서 기분이 좋았다. 전공 분야가 아니다 보니 오히려 힘을 빼고 쓴 덕 같다.

 글을 쓰기 위해 초기 스토아주의자들에 대해 보고된 문헌을 쭉 훑었는데, 렉톤(lekton, sayable, 말해질-수-있는-것) 개념을 통해 하이데거를 잘 이해하게 된 것이 특히 보람찼다. 하이데거가 존재자와 존재를 구분할 때, 후자는 존재자를 관통하는 심오한 기운이나 이데아 따위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언어화될 경우 술어부를 갖게 되는 사태, 즉 존재자가 처하거나 가하는 또는 그저 '있는' 사건(S being P)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존재가 스토아주의자들의 렉톤에 해당한다면, 존재자는 소마(S 또는 P-ing S)에 상응한다.

6. Fuchs, Thomas. (2013). Existential Vulnerability: Toward a Psychopathology of Limit Situations. Psychopathology 46, pp. 301-308. (Trans. by Alexander T. Englert)

 끝장나게 재미있는 논문이었다. 인간의 유한한 실존을 이루는 근본적 사실들(e.g. 죄의식과 육화, 죽음의 필연성, 자유는 가능성들의 배제를 통해서만 비로소 실현된다는 역설 등)이 생각의 안전한 집(Gehäuse, housing)을 무너뜨리고 의식에 주어지고 말 때 발생하는 충격과 고통을 일컫는 야스퍼스의 한계상황 개념을 정신병리에 적용한 논문이다. 모두에게 한계상황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트라우마에 대한 분석(전반부)과 '실존적 취약성'을 지닌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인 일상사도 한계상황처럼 경험되고 그리하여 정신병리가 발병할 수 있다는 분석(후반부)으로 이루어져있다. 건강염려증과 거식증, 병리적 우유부단에 대한 사례 분석이 특히 통찰력 있었다.

7. G. Stanghellini, M. R. Broome, A. V. Fernandez, P. Fusar-Poli, A. Raballo, R. Rosfort (ed.) (2019). The Oxford Handbook of Phenomenological Psychopathology, Oxford University Press.

 정신의학 내에서 현상학적 정신병리학의 위치와 필요성을 주장하는 인트로덕션을 다시 읽었는데, 큰 감동을 받았다. 증상에는 생물학적인 원인뿐만 아니라 의미도 있다. 그리고 이 의미(e.g. 억압된 욕망, 외로움, 두려움...)를 환자와 임상의가 함께 이해하는 것은 치유를 위해 무척 중요하다. 따라서 단순히 진단이라는 목적에만 국한된 협소한 시야는 환자의 고통을 실질적으로 돌보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① 정신의학은 애초에 인터디시플리너리한 필드다(신경과학, 사회학, 유전학, 내분비학, 역학 등등). 현상학적 정신병리학은 이론적 전제들을 최소화하고 환자가 겪는 경험의 형식과 내용에 온전히 집중함으로써 여러 분과학문들 사이를 잇는 공동의 언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3-4).

[설령 정신건강이 오롯이 신경이나 내분비계의 문제라 하더라도 그와 같이] 생물학의 언어로 번역되는 현상/경험이 무엇인지(e.g. 약물이 무엇을 타게팅하느냐) 윤곽지을(delineate)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현상학적 정신병리학은 개별 진단을 용이하게 만들고 [잠정적 관습일 뿐인] 진단 분류 체계를 개선하는 데 기여한다(4).

③ 정신적 고통이란 퍼스널한 것[개인사를 가진 인격의 것/저마다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병리를 이해하려면 환자의 체험을 환자의 입장에서 기술할 필요가 있다. 정신의학을 생체의학의 분과학문으로 축소하여 이해한다면 환자의 입장에서 중요한 사항이 임상 현장에서 누락될 수 있다(4). [정신병리에서 치료는 협동의 과정이지, 의사의 일방향적 처방이 아니다.]

④ 수치화 가능한 현상에 대한 양적 파악을 넘어 [환자의] 가치관, 동기[부여체계] 등과 같은 질적 면모를 간과하지 않기 위해 현상학적 정신병리학이 요구된다. "If the crucial task of psychiatry is understanding mental suffering, then its project should be to articulate the life-world of each person and identify the conditions of possibility for the emergence of pathological phenomena in human existence." (5, emphasis in the original)

⑤ "Psychiatry is also about caring for troubled human existence, rather than judging, marginalizing, punishing, or stigmatizing it." (5, emphasis added) 그리고 그와 같은 케어링(e.g. 환자와 임상의가 대화로써dialogically 고통에 대한 의미있는meaningful 서사 구축)을 가능케 하는 인식론적, 윤리학적 프레임워크를 형성하는 데 현상학적 정신병리학이 기여한다.

⑥ 현상학적 정신병리학의 기술은 환자의 1인칭 시점에서의 체험과 [3인칭 시점에서의] 인과적 설명 사이의 가교 역할을 수행한다. 논리적으로 보았을 때도 설명하고자 한다면, 먼저 무엇이 설명되어야 하는지 기술할 필요가 있다(5).

 이외에 흥미로웠던 사실: "In fact, to date, there are no established and validated biomarkers for clinical use in psychiatry (Kapur, Philips, and Insel 2012; Fusar-Poli and Meyer-Lindenberg 2016)." (2)


 저번 달 학교에서 진행했던 두 번의 발표('From Being-courageous to Becoming-courageous: Husserlian Contribution to Virtue Ethics'와 'Guilt Phenomenologized')에서 디자인상 마음에 들었던 ppt. 고등학교 때 프레젠테이션 동아리를 일군 친구들이 있었는데, 경영대에 갈 게 아닌 이상 필요가 없으리라 생각했었다. 생각이 짧았다. 그래도 나는 나의 디지털 심미안(?)이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