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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A. F. 차머스, <과학이란 무엇인가?> 1-4장 요약

A. F. 차머스, 신중섭•이상원 옮김, ⟪과학이란 무엇인가?⟫, 서광사, 2003, 모든 강조는 필자.

참 재밌게 읽은 과학철학 교과서

 후설에 따르면 생활세계에서 통용되는 독사는 과학의 에피스테메를 정초한다fundieren. 오류 가능한, 언제나 수정에 열려 있는 연약한 독사가 과학의 정밀한 방법론과 그 결과로 도출되는 '즉자'에 대한 지식을 정초한다는 것이다. 이때 정초의 의미가 무엇인지가 무척 중요하다. 후설의 진의는 생활세계적 독사가 과학적 에피스테메에 ①시간적으로/역사적으로 선행하며 ②후자는 전자를 그런 의미에서 미리 주어진vorgegeben 것으로서 전제한다는 것이다. 나의 언어로 풀이하면, 생활세계적 독사는 곧 과학적 에피스테메가 발생하기 위한 가능조건 중 하나다.* 예를 들어 한갓된 독사에 불과한, 농지의 면적에 대한 눈대중 같은 것이 시간상 선행하고, 그것은 수학을 동원한 이념화Idealisierung를 거쳐 비로소 정밀한 계산값을 산출하기에 이른다. 눈대중이 없었더라면, 그리고 애초에 그런 눈대중이라도 요구하는 생활상의 필요가 없었더라면 정밀한 계산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이상의 예는 ⟪기하학의 기원⟫에 관한 나의 엉터리 요약). 후설은 이와 같은 주장을 통해 실증주의에 경도된 과학이 자신의 근원인 생활세계를 파괴하고 인간의 실존 자체와 그 의미를 위협하게 된 위기상황을 타개하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과학은 자신의 근원**을 망각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적 삶과 세계가 지니는 의미의 유효성을 수호할 수 있다.***

*여기에 지도교수님의 해석을 더할 경우 생활세계적 독사는 과학적 에피스테메의 발생의 근거일 뿐만 아니라 그 타당성의 근거마저 되어준다. (나는 선생님의 해석을 과학에서의 관찰과 실험이 오감을 이용한 지각의 타당성을 요구하고 전제한다는 테제로 한 단계 번역하여 내면화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독사가 에피스테메의 근거가 되어주는 것은 당연히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후설이 과학의 근원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은 생활세계적 독사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주체의 의식 구조 및 그 성취(e.g. 수동적이고 능동적인 종합들)도 있다. 둘은 엄연히 다른 것이므로 따로 따로 다룰 것...이라고 써놓고는 스스로를 의심한다. 종합들의 결과가 곧 생활세계적 독사인 것 같기도 하고.

***생활세계 및 인간 주체의 주관적 성취가 과학의 발생상의 그리고 타당성상의 가능조건임이 초월론적 현상학에 의해 알려진다고 해서 과연 실질적으로 달라질 것이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후설은 초월론적 현상학에 너무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서론이 길었는데, 상술한 후설의 주장을 공부하면서 나는 현대 과학철학의 논의를 따라가야 할 필요를 느꼈다. 후설이 생활세계적 독사라고 부르는 것에 상응할 만한 무언가가 현대 과학철학에서도 주제화되고 있는지, 그런 무엇이 과학적 지식을 정초한다고 만일 그들도 주장하고 있다면 그때 정초의 의미는 어떻게 구체화될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책의 전부를 요약할 수는 없고, 나의 공부와 유관하게 맞닿아 있는 지점들만을 정리해두려고 한다.


 과학적 지식은 다른 종류의 지식보다 믿을 만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갓된 의견이나 취향이 아닌 경험적 사실에, 풀어 말해 관찰과 실험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념은 사실의 본성에 대한 다음의 상식적 믿음들로부터 기인한다.

"(a) 사실은 감각을 통해 주의 깊고, 편견 없는 관찰자에게 직접[무매개적으로] 주어진다.
(b) 사실은 이론보다 앞서 있고 이론에서 독립되어 있다.
(c) 사실은 과학적 지식의 견고하고 신뢰할 수 있는 기초를 구성한다."(29)

 

 그러나 차머스에 따르면 세 주장 모두가 문제적이다. 먼저 "관찰자가 어떤 대상이나 장면을 보게 될 때 그들이 갖는 주관적인 경험은 망막에 맺힌 상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고 관찰자의 경험, 지식, 기대에 의존한다."(32) 달리 말해 (a)의 주장과 달리 경험적 사실은 무매개적으로 주어지지 않고 관찰자의 경험, 지식, 기대의 매개를 거쳐 주어지기 때문에, 모두가 동일한 지각 경험을 갖지 않는다.*, ** 물론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대로 볼 수 없다. [...] 우리가 보는 것은 비교적 안정성을 지니고 있다 [...] 의사소통이나 과학을 불가능하게 할 정도로" 차이가 생겨나지는 않는다(35). 

*대상은 언제나 이미 해석된 대상이다. 

★**이때 관찰자의 경험을 규정하는 관심사와 상식, 배경 지식, 기대와 필요 등등 모두가 후설적 생활세계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다음으로, 지식은 경험 자체가 아닌 사실에 대한 언명statement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러므로 경험적 사실은 언명으로 번역되어야 하는데, 이때 과학자는 "적절한 개념 도식과 그것을 어떻게 적절하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37) (b)의 주장과 달리 날것으로서의 사실로부터 지식이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 전제된 상태에서 사실이 파악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관찰자는 리기다소나무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어야 리기다소나무를 알아보고 그에 대해 탐구할 수 있다. 식물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관찰자는 단순한 나무만을 보고 말 것이다. "[...] 어떤 사람에게는 관찰 가능한 사실처럼 보이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45)

 나아가 그러한 개념 도식 혹은 사전 지식 일반에 결함이 있다면, 그로부터 도출되는 지식 역시 오류 가능하다. 애초에 "무엇이 관찰 사실로 여겨져야 하는가"마저 지식의존적인데, 이를테면 우리는 '지구는 정지해있다'는 관찰보다 '지구는 움직인다'는 관찰을 더 신뢰하기 때문이다(43).

 그렇다고 해서 경험적 사실이 폐기되어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를 보이기 위해 차머스는 관찰이 수동적이고 사적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한다. 관찰에 적합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능동적이고 공적인 개입 및 실천이 요구된다.* 이렇게 관찰의 상황을 조정한다면, 과학적 지식의 형성에 개입하는 주관적 요인들을 통제할 수 있다.

"관찰은 직접적인 절차에 의해 공적으로 시험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객관적이고, 과학과 기술의 진보에 의해 가능하게 될 새로운 종류의 시험에 의해 폐기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오류 가능하다."(54)

 

★*과학자들의 학문공동체 역시 후설에게는 생활세계에 해당한다. ➔ Q. 너무 많은 세계가 생활세계가 되는 것은 아닌가? 어디까지가 생활세계인가? 이를테면 실험실은 생활세계의 공간인가, 학문세계의 공간인가?

 관찰된 모든 사실이 과학과 유관한 것은 아니다. 원하는 목표와 무관한 효과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실험이 요구된다. 사실은 단순한 관찰 언명보다는 실험의 결과가 오늘날의 과학적 사실들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실험 결과는 감각을 통해서 단순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실험 결과는 그것을 얻기 위한 작업이 있어야 하며, 그런 결과의 수립은 유효한 기술의 활용은 물론, 상당한 비결과 실천적 시행착오를 포함한다."(62) 적절한 실험을 계획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교란 요인이며 그것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론적인 앎이 필수적이다(62). 이는 그와 같은 사전적 앎에 오류가 있을 경우 실험의 결과도 오류 가능하다. 실험의 결과는 기술의 진보, 이해의 진보 등으로 갱신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무시 가능한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 에테르의 존재를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해석되었던 실험이 에테르의 존재가 반증되자 다른 해석을 낳게 된 것을 일반적인 예로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c)는 사실이 과학적 지식을 구성한다고 믿는 귀납주의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우선, 사실들로부터 과학적 지식이 연역될 수는 없다. 수행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귀납적인 논증일 뿐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무엇이 정당한 귀납 논증을 구성"하느냐는 물음일 것이다(81). 그런데 그 기준을 세우기가 쉽지 않다. 먼저 얼마나 많은 사례가 관찰되어야 정당한 귀납 논증이 탄생할 것인가? 그 수는 자의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많은 사례라는 요구가 적절해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 핵폭탄이 광범위한 파괴를 가져 오고 고통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위해 여러 번 핵폭탄을 떨어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83). 나아가 정당한 귀납 논증이 다양한 조건의 변화를 견뎌야 한다고 말할 때는, "무엇을 상황을 의미 있게 변화시킨 것으로 여길 것인가"가 문제가 되며, 이 앎을 위해 다른 귀납논증이 또 요구된다(83). 이에 더해 다음의 세 가지 사실을 추가적으로 지적할 수 있다. 첫째, 관찰 사실만을 활용하는 귀납 논증은 관찰 불가능한 것, 이를테면 양성자나 유전자 등에 대한 지식을 가져다줄 수 없다. 둘째, 오류 가능한 측정값들로부터 수학적으로 표현되는 엄밀한 과학 법칙이 도출된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셋째, 흄이 지적했듯이 귀납 원리 자체가 정당하다는 것을 순환 없이 입증할 수 없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모든 형태의 지식의 획득이나 승인에 앞서서 사실을 수집하는 것은 가능하며, 수집해야만 한다는 생각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오스트레일리아의 숲에 있는 식물에 대한 나의 관찰이 훈련받은 생물학자의 관찰보다 더 가치 있다고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생물학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90-91)

 이어지는 포퍼의 반증주의, 쿤의 패러다임 이론, 파이어아벤트의 무정부주의 과학철학에 대한 내용도 재미있게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