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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2부 2장 3문, 4문 1-4절

Summa Theologiae II-II q. 3, q. 4 a. 1-4(원문의 역서로는 St. Thomas Aquinas, trans. by Mark D. Jordan, On Faith,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90을 따랐고, 성서의 번역은 대한성서공회 역, 새한글성경을 따랐다.)

콘웨이에서


3문: 신앙의 고백에 관하여

 3문의 직전까지 아퀴나스는 신앙의 정의와 세부적인 규정들을 주로 그것의 내적인 작용인 지성과 의지의 합작으로서의 믿음을 중심으로 서술해왔다. 그러나 3문에서 아퀴나스는 신앙의 외적 행위에 해당하는 고백confession에 초점을 맞추어 애초에 (i) 고백이 신앙의 행위가 맞는지 그리고 (ii) 고백이 구원을 위해 필수불가결한지를 묻는다.

3문 1절: 고백이 신앙의 행위가 맞는지

 ◆ Obj.: 고백은 신앙의 행위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 Sed Contra: “[...] 신앙의 행위라고 적절하게 말해지는 것인 고백 [...]”(cf. 데살로니가 후서 1:11에 대한 Glossa)

 ◆ Corpus

 <요약> 고백은 신앙의 내용에 대한 믿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주는 행위로서, 고백의 주체를 신앙의 내용에로 인도해주기에 신앙의 행위가 맞다.

 <세부> 외적인 행위란 그 행위의 목적들이 행위 주체가 속한 종에 따라 상이하게 가리키는 덕을 실천하는 행위이다. 이를테면 금식은 육신을 통제한다는 목적 하에 금욕의 덕을 실천한다. 그런데 신앙의 내용을 고백하는 외적 행위 또한 마찬가지로 고백의 주체를 고백의 목적인 신앙의 내용에로 인도해준다. [풀어 말해, 고백은 신앙을 갖춘다는 목적 하에 신앙의 덕을 실천한다.] 고백은 [단지] 마음속에 받아들여진 것을 표출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적 행위인 믿음과 마찬가지로 외적 행위인 고백 역시 [믿음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한] 신앙의 행위에 속한다.

반론(arg.) 반론에 대한 답변(ad)
 동일한 행위가 상이한 덕에 귀속될 수는 없다.* 그런데 고백은 이미 참회의 덕에 귀속되어있다. 따라서 고백은 신앙의 덕에 귀속될 수 없다.   성서에 따르면 고백은 여러 대상을 가질 수 있다. 죄에 대한 고백은 죄를 제거하는 목적을 지향하는 것으로서 속죄, 곧 참회의 덕에 귀속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신앙의 내용에 대한 고백은 신앙을 갖춘다는 목적을 지향하는 것으로서 신앙의 덕에 귀속된다.
 두려움이나 혼동confusion으로 인해 신앙의 고백을 철회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두려움이나 혼란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좋음을 지향하는 것은 용기—무모함과 두려움의 중용—에 귀속된다. 따라서 고백은 용기나 지조를 표현하는 행위이지, 신앙의 외적 행위가 아니다[달리 말해, 용기가 고백의 원인이지, 신앙이 고백의 원인은 아니다].  용기는 고백의 장애물, 곧 두려움이나 수치심을 제거함으로써 고백을 야기한다. 즉, 용기는 그 자체로per se [또는 직접적으로] 고백을 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부수적으로per accidens 고백을 야기하는 것이다. [반면, 신앙은 그 자체로 또는 직접적으로 고백을 야기한다. 그런 의미에서 고백은 신앙을 외부로 드러내는, 신앙의 외적 행위이다.]
 신앙의 정열fervor은 고백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외적 행위들을 유발한다. 그런데 그와 같은 행위들은 신앙의 행위가 아니다. 따라서 고백 역시 신앙의 행위가 아닐 것이다.  내적 신앙은 [신앙이 아닌] 다른 덕들을 매개로 온갖 덕스러운 외적 행위들을 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고백만큼은 다른 덕을 매개로 야기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신앙이 고백을 직접 야기하는 만큼, 고백은 신앙의 외적 행위가 맞다.]

*Q. 어째서 동일한 행위가 여러 덕들에 동시에 귀속될 수 없는가? 신앙을 고백하는 행위가 신앙의 덕과 용기의 덕에 동시에 귀속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퀴나스에게 왜 문제적인가?

A. 오히려 아퀴나스가 반론의 전제를 안 받아들인다고 독해할 여지가 있다.

3문 2절: 신앙에 대한 고백이 구원을 위해 필수불가결한지

 ◆ Obj.: 신앙에 대한 고백은 구원을 위해 필수불가결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 Sed Contra: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입니다.”(로마서 10:10)

 ◆ Corpus

 <요약> 신앙에 대한 고백은 특정한 상황적 조건들 하에서 구원을 위해 필수불가결하다.

 <세부> 무엇이 구원을 위해 필수불가결한지는 신법divine law이 명하는 계율이 정한다. 신앙의 고백은 적극적인affirmative 행위[, 즉 무언가를 하지 않고 삼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적극 수행하는 행위]이므로, 만일 신앙의 고백이 신법의 계율에 속한다면 적극적으로 특정한 행위를 명하는 계율들의 일부일 것이다. 그런데 적극적으로 특정한 행위를 명하는 계율들은 모든 시점과 공간에서 명해지지 않고 상황에 따라 특정한 시점과 공간에서 명해진다. 그러므로 신앙을 고백하는 행위도 모든 시점과 모든 공간에서 구원에 필수불가결한 것은 아니지만, 특정한 시점과 공간에서는 필수불가결하다.

 구체적으로 말해, 신앙의 고백은 그것을 수행하지 않을 경우 신으로부터 그가 누려야 마땅한 영광을 박탈할 때, 또는 이웃으로부터 그에게 유용한useful 무언가를 박탈할 때 필수불가결하다. 예를 들어 신앙을 고백하지 않음으로써 침묵의 주체가 신앙을 가지지 않는 것으로 믿어질 때나 신앙의 내용이 거짓된 것으로 믿어질 때나 다른 이들로 하여금 신앙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드는 때라면, 이와 같은 경우들에는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구원을 위해 필수불가결하다.

반론(arg.) 반론에 대한 답변(ad)
 인간의 정신이 신적 진리와 합치하는 것만으로도 신앙의 목적, 즉 구원은 충분히 달성된다. 그러므로 신앙에 대한 고백은 구원을 위해 필수불가결하지 않다.  신앙 역시 다른 덕들과 마찬가지로 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charity*과 결부되어야만[그것으로 이어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신앙을 고백해야만 그러한 사랑이 달성되는 경우들에는 정신과 신적 진리 사이의 합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타인의 믿음을 지도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타인에게 자신의 신앙을 명료하게 밝히는 고백의 행위는 요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남을 지도할 위치에 있지 않은 하급자들의 경우 신앙을 고백할 필요가 없다.  신앙을 고백하지 않을 경우 신앙이 위협 받는endanger 상황, 이를테면 타인을 믿음에로 인도해야 하거나 불신자들을 물리쳐야 하는 상황에서는 누구나 신앙을 고백할 필요가 있다. 물론 모든 신자가 타인을 지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추문을 일으키거나 타인을 불편하게 만드는 행위는 신앙을 위해 필수불가결하지 않다(cf. 고린도전서 10:32). 그런데 신앙의 고백은 추문을 일으키거나 타인을 불편하게 만들곤 한다.  신앙 또는 신자를 위해 아무 유용성이 없는 채 신앙의 고백이 불신자를 불편하게 만들 경우, 공적으로 신앙을 표현하는 것은 칭찬할 만한 행위가 아니다. 그러나 신앙에 기여하거나 [상황에 따라] 고백이 필수불가결할 경우에는 불신자를 불편하게 만들더라도 신앙을 공적으로 표현해야 한다(cf. 마태복음 15:14).

*본고에서 ‘사랑’은 모두 애덕으로서의 사랑을 가리킨다.


4문: 신앙의 덕에 관하여

 이어 4문에서 아퀴나스는 신앙을 그것이 일종의 덕인 한에서 탐구한다. 그리하여 아퀴나스는 (i) 신앙이 무엇인지, (ii) 신앙이 주체의 영혼의 어떤 능력에 내재하는지, (iii) 신앙의 형상이 사랑인지, (iv) 형상화된 신앙과 형상화되지 않은 신앙의 수가 동일한지 등을 묻는다.

4문 1절: “신앙은 희망되는 것들의 실체로, 나타나지 않는 것들을 위한 논증이다”가 신앙을 위해 적절한 정의인지

 ◆ Obj.: 바울이 히브리서 11장에서 제시한 신앙의 정의—“신앙은 희망되는 것들의 실체로, 나타나지 않는 것들을 위한 논증이다”—는 신앙의 적절한 정의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 Sed Contra: 바울의 권위만으로 해당 정의의 적절성은 충분히 보장된다.

 ◆ Corpus

 <요약> 바울이 제시한 정의는 신앙의 대상 및 신앙의 인식론적 지위를 적절하게 설명하므로 신앙의 적절한 정의가 맞다.

 <세부> 신앙은 습관habit의 일종으로서 그에 적합한 행위 및 해당 행위의 대상과 관련해서 정의되어야 한다. 신앙에 적합한 행위는 믿음, 구체적으로 말해 의지의 명령imperium에 따라 [특정한] 하나의 선택지를 택하도록 규정된[이끌려진] 지성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의지와 지성의 합작으로 이루어지는 신앙의 행위란 이중의 대상을 가진다. 한편으로 신앙은 (i) 의지의 대상으로서 좋음과 [의지의] 목적을, 다른 한편으로 신앙은 (ii) 지성의 대상으로서 참된 것을 자신의 대상으로 가진다. 

 (i) 의지 편에서 신앙은 덕의 일종이므로, 그것의 목적과 그것의 대상이 상응해야 한다. [모든 덕은 그 목적과 그 대상이 상응하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직관될 수 없는[, 따라서 나타날 수 없는] 신적 진리가 신앙의 대상이자 목적이다. 그런데 그처럼 직관될 수 없는 신적 진리는 희망의 대상이 맞다(cf. 로마서 8:25). 무언가를 직관한다는 것은 그것을 소유한다는 의미인데, 이미 소유한 것에 대해서는 희망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희망되는 것을 신앙의 [목적이자] 대상으로 규정함은 부적절하지 않다.

 나아가 희망되는 것들의 실체가 신앙이라고 말해질 때에 실체란 첫 번째 시작 또는 첫 번째 원리를 가리킨다. 희망되는 것들의 첫 번째 시작 또는 첫 번째 원리는 신앙의 동의로부터 온다. [풀어 말해, 우리는 신앙이 앞서 동의한 것에 대해 희망한다.] 그러므로 희망되는 것의 시작점으로서의 실체가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 역시 부적절하지 않다.

 (ii) 지성 편에서 신앙은 특정한 논증을 대상으로 가진다. 지성은 논증을 통해 특정한 진리를 붙들도록 유발된다. 상술한 정의에서 ‘논증’은 그와 같은 논증의 효과를 지시하는데, 이때 논증으로서의 신앙의 효과란 나타나지[직관되지] 않는 신앙의 진리에 대해 지성이 견고하게 붙드는 것adhesion, 달리 말하면 일종의 신념conviction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신앙이 지성이 가지는 일종의 신념이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듯이, 논증이라고 말하는 것 역시 적절하다.] 

 요컨대 신앙이란 그를 통해 우리 안에 영생이 시작되며 지성으로 하여금 나타나지 않는 것에 동의하게 만드는 정신의 습관으로 정의된다. ‘논증’을 신앙의 정의에 포함시킴으로써 신앙은 신념을 함유하지 않는 한갓된 의견이나 추측, 의심과 차별화된다. ‘나타나지[직관되지] 않는 것’을 신앙의 정의에 포함시킴으로써 신앙은 나타나는[직관되는] 것에 대한 직관을 함유하는 지식이나 이해로부터 차별화된다. 마지막으로 ‘희망되는 것의 실체’를 신앙의 정의에 포함시킴으로써 신앙은 희망되는 것인 지복을 가리키지 않는 다른 한갓된 믿음들로부터 차별화된다. 결국 신앙에 대한 어떤 규정이든 바울이 말한 바를 명시적으로 풀이해줄 뿐이다.

반론(arg.) 반론에 대한 답변(ad)
 그 어떤 성질도 실체는 아니다. 그런데 덕의 일종으로서 신앙은 성질이다. 따라서 신앙을 실체라고 부를 수 없다.  바울이 제시한 정의에서 ‘실체’는 다른 유로 분류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유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다. 바울이 제시한 정의에서 ‘실체’는 어떤 유에 속한 것이든 그것의 제1원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은 희망되는 것의 제1원리가 맞다.]
 상이한 덕들은 상이한 대상을 가진다. 희망되는 것은 신앙이 아닌 희망의 대상이다. 따라서 희망의 대상을 신앙의 정의에 포함시키는 일은 부적절하다.  의지의 작용이기도 한 신앙은 의지를 완성시켜주는 덕들을 목적[이자 대상]으로 가진다. 그리고 희망은 그와 같은 덕들 가운데 하나다.
 신앙은 희망보다도 사랑에 의해 보다 완성된다. (뒤이어 밝혀지겠지만, 신앙의 형상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희망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 받는 것이 신앙의 정의에 포함되어야 한다.  사랑의 대상은 실재하는 것과 부재하는 것 모두일 수 있다. 반면 희망의 대상은 부재하는 것만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마찬가지로 부재하는 것[신적 진리?]만을 대상으로 가지는 신앙을 정의함에 있어 사랑보다는 희망을 신앙의 정의에 포함시키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
 동일한 것이 상이한 유genera에 귀속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실체와 논증은 서로 다른 유에 귀속되는 것이며,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자신의 유 하에] 귀속시키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실체인 동시에 논증일 수는 없다.   바울이 제시한 정의에서 ‘실체’와 ‘논증’은 서로 다른 신앙 또는 서로 다른 작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라는 하나의 작용이 상이한 대상(i, ii)을 가질 적에 각 대상에 맞는 정의를 규정해줄 뿐이다. 
 논증은 그것이 인도하는 진리를 명명백백하게 나타내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타나지 않는 것을 논증한다는 말은 모순적이다.  사물의 원리로부터 도출되는 논증과 신적 권위로부터 도출되는 논증을 구분해야 한다. 후자는 그것이 인도하는 진리를 명명백백하게 나타내주지 않아도 된다.

4문 2절: 신앙이 주체에게 내재할 때에 지성에 내재하는 것이 맞는지[=신앙의 성취가 지성의 것이 맞는지]

 ◆ Obj.: 신앙은 지성이 성취하는 무엇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 Sed Contra: 신앙은 [영적인] 고향에 대한 직관으로 이어지는데, 직관은 지성이 성취하는 무엇이다(cf. 고린도전서 13:12).

 ◆ Corpus

 <요약> 무언가를 믿는 행위는 그 대상이 진리이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지성의 소관이 된다. [손은실 선생님: 신앙의 대상은 진리이기 때문에 신앙의 '궁극적인' 주체는 의지가 아닌 지성이다.]

 <세부> 신앙이 덕이 맞다면, 신앙의 행위는 완전해야complete 한다. 그런데 행위가 완전하려면 행위의 기술skill과 행위에 대한 성향disposition을 행위 주체가 갖추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이 요구되는 기술과 성향은 행위가 습관이 됨으로써 갖추어진다. 이때 신앙이 의지와 지성 모두의 작용이라면, 의지와 지성 모두가 습관을 통해 완전해져야 할 것이다.* 마치 욕망의 작용이 완전해지기 위해 이성의 습관적 신중함과 욕구능력의 습관적 절제가 모두 요구되는 것처럼 말이다. [나아가?] 무언가를 믿는 행위는 그 대상이 진리이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지성의 소관이 된다.

*Q. 습관에 대한 아퀴나스의 논의가 잉여적인 것처럼 보인다. 믿음의 본질을 논하는 것만으로 대답이 완료되지 않는가?

반론(arg.) 반론에 대한 답변(ad)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신앙은 신자들의 의지가 성취하는 무엇이다. 그런데 의지와 지성은 정신의 상이한 능력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앙’으로써 신앙의 행위를 논할 때에 그것은 신자들의 의지로 구성되는 것이 맞지만, 그 의지는 지성의 동의를 명하는 그런 의지이다.
 신앙에서 칭찬할 만한 것은 신에 대한 순종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런데 순종은 [지성이 아닌] 의지가 성취하는 무엇이다.   의지가 신에게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는 것도 맞지만, 지성이 의지의 명령을 따르고자 해야 하기도 한다. 순종은 의지뿐만 아니라 지성의 동의함에 있어서도 덕스러운 습관이 깃들기를 요구한다.
 지성의 이해는 사변적[이론적]이거나 실천적이다. 그런데 첫째, 신앙은 사변적 지성이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사변적 지성은 무엇을 따르거나 피할지에 대해 말해주지 않기에 [신앙과 달리] 행위의 원리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 신앙은 실천적 지성이 성취하는 것도 아니다. 실천적 지성의 대상은 우연적인 진리인데, 신앙의 대상은 영원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대상은 우연적 진리가 아니므로 그런 측면에서] 신앙은 실천적 지성이 성취하는 무엇이 아닌 게 맞다. 이때의 신앙은 [그것이 지성이 성취하는 무엇이 맞다면] 사변적 지성의 소관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신앙의 대상이 되는 영원한 제1진리는 우리의 모든 욕망과 행위의 목적이 되므로, 사변적 지성이 실천적인 것으로 확장된다. [풀어 말해, 신앙의 경우 사변적 지성이 헤아린 바가 실천까지 주재하게 된다.]

4문 3절: 사랑이 신앙의 형상forma*이 맞는지

*현실화시키는 원리(cf. Thomas lexicon)

 ◆ Obj.: 사랑은 신앙의 형상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 Sed Contra: 모든 것은 그것의 형상에 따라 작동한다work. 그런데 갈라디아서에 따르면 신앙은 사랑에 따라 작동한다. 따라서 사랑이 신앙의 형상이다.

 ◆ Corpus

 <요약> 사랑은 신앙의 목적인데, 목적과 형상은 특정한 의미에서 동일하다. 따라서 사랑은 신앙의 형상이다.

 <세부> 의지의 행위 또는 작용이 어떤 종에 해당할 것인지는 그것의 목적, 의지의 경우 그 대상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신앙에서 의지의 대상은 신적 좋음divine good이고, 이는 사랑의 고유한proper 대상이다. [따라서 사랑이 신앙의 목적이다.]

 그런데 형상 역시 목적과 마찬가지로 형상이 적용되는 것의 종을 규정하고, 형상의 효과란 형상이 적용되는 것의 목적에 비례하여 나타난다. 따라서 이와 같은 특정한 측면에서 형상은 목적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사랑이 신앙을 완전하게 만들고 형상화하는 한에서[, 즉 사랑이 신앙의 목적으로 기능하는 한에서] 사랑은 신앙의 형상이 맞다.

반론(arg.) 반론에 대한 답변(ad)
 동일한 유에 속하되 다른 종인 것은 서로의 형상이 될 수 없다[하나가 다른 하나에 종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앙과 사랑은 모두 덕이라는 동일한 유에 속하는 다른 종이다.  사랑은 신앙에 형태를 부여하는(cf. informar) 한에서 신앙의 형상이다. 그런데 서로 다른 습관들[, 곧 습관이나 덕이라는 동일한 유에 속하는 종들]이 하나의 [덕스럽고 습관적인] 행위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라는 문제를 취급함에 있어서 이상하지 않다. [달리 말해, 인간 행위의 문제를 취급함에 있어서는 반론의 전제가 틀렸다.]
 형상과 형상이 적용되는 것은 동일한 능력의 소관이어야 한다. 후자는 전자의 결과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랑은 의지의 소관인 반면, 신앙은 지성의 소관이다.  본래적intrinsic 형상*의 경우, 형상과 형상이 적용되는 것은 동일한 능력의 소관이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사랑은 신앙의 본래적 형상이라는 의미에서 신앙의 형상인 것이 아니라 신앙에 형태를 부여한다는 의미에서[즉, 신앙의 작용인이 된다는 의미에서 cf. ST II-II q. 23 a. 8 ad 1] 신앙의 형상인 것일 뿐이다.
 형상이란 형상이 적용되는 것의 원리principle이다. 그런데 의지 편에서 신앙의 원리는 사랑이 아닌 순종인 것 같다(cf. 로마서 1:5).  순종마저 사랑에 의해 형상화된다. 사랑이야말로 순종을 비롯한 모든 행위를 그것의 목적에로 인도하고 다른 덕에 형태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본래적 형상’으로서 아퀴나스는 범례나 본질 따위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이어지는 절에서 상술되겠으나, 사랑은 신앙의 본질을 이루지 않는다는 점이 여기서 이미 드러난다.

**ST II-II q. 23 a. 7 c.에 따르면 인간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은 신 향유함fruitio이며, 이는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사랑 없이는 그 어떤 덕도 자신의 목적을 실현할 수 없다. [그리고 어떤 것의 목적의 실현을 가능케 하는 그것이 바로 그 어떤 것의 형상이다. 신앙도 사랑을 통해서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4문 4절: 형상화되지 못한[=사랑이 없는] 신앙이 형상화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역도 성립하는지

 ◆ Obj.: 형상화되지 않은 신앙은 [수적 그리고 본질상의 동일성을 유지하는 채로] 형상화될 수 없으며, 그 역도 성립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 Sed Contra: 형상화되지 않았던 신앙이 ‘부활’했음을 암시하는 성서의 구절과 그에 대한 주석이 있다.

 ◆ Corpus

 <요약> 형상화된 신앙의 습관과 형상화되지 않은 신앙의 습관은 [수적으로 그리고 그 본질상] 서로 동일한 습관이다. [이때 하나가 다른 하나로 변화하는 것은 실체상의 변화(e.g. 씨앗이 나무가 되는 경우)가 아닌 부수적 변화(e.g. 나무가 온전했다가 상처를 입는 경우)이다. 달리 말해 사랑은 신앙의 형상이 맞지만, 실체적 형상(vs. 부수적 형상)*은 아니다.]

 <세부> 형상화된 신앙의 습관이 생겼을 때 형상화되지 않았던 신앙의 습관이 완전히 제거되는 것도, 제거되지 않는 것도 부적절하다. 차라리 형상화된 신앙의 습관과 형상화되지 않은 신앙의 습관이 [수적으로 그리고 그 본질상] 동일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두 습관이 차별화되는 것은 각 습관에 그 자체로 귀속되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 신앙은 지성의 완벽한 모습(cf. perfectio intellectus)이기 때문에, 지성에 귀속되는 것은 신앙에 그 자체로 귀속된다. 반면 의지에 귀속되는 것은 그 자체로는 지성에 귀속되지 않기 때문에, 의지에 귀속되는 것은 여러 신앙의 습관을 서로에게서 차별화시켜주지 못한다. 그런데 형상화된 신앙의 습관과 형상화되지 않은 신앙의 습관 사이에는 의지에 귀속되는 것상의 차이—사랑의 유무—만이 자리할 뿐이다. 따라서 두 습관은 상이한 습관이 아니다.**

*사물의 본질을 이루는 성질(e.g. 사람에게 이성)과 그렇지 않은 성질(e.g. 사람에게 머리색) 사이의 차이로 이해할 수 있다.

**Q. 반대로, ‘신앙은 의지의 완벽한 모습이기 때문에, 의지에 귀속되는 것은 신앙에 그 자체로 귀속된다. 그런데 형상화된 신앙의 습관과 형상화되지 않은 신앙의 습관 사이의 차이는 의지에 귀속되는 것상의 차이이다. 따라서 두 습관은 상이한 습관이다.’라는 논증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은가? 아니면 신앙은 의지의 완벽한 모습과는 상관이 없는가?

반론(arg.) 반론에 대한 답변(ad)
 형상화되지 않았던 신앙이 형상화되는 것이 아니다. 둘은 서로를 배제하는 [수적으로 그리고 본질상] 상이한 습관이기 때문이다(cf. 고린도전서 13:10).  신앙이 무엇인지 규정함에 있어서 그것이 사랑으로써 형상화되었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비본질적이다. 따라서 [수적으로 그리고 본질상] 동일한 신앙이 단지 형상화되지 않았다가 형상화된 것뿐이다.
 죽은 것은 생명에로 되돌려질 수 없다. 그런데 형상화되지 않은 신앙은 죽은 것이다(cf. 야고보서 2:20).  생물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인 영혼은 생물의 본질적 형상[실체적 형상]이기에, [수적 그리고 본질상의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생명이 없는 상태에서 생명이 있는 상태로 이행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맞다. 그러나 사랑은 신앙의 본질적 형상[실체적 형상]이 아니다. 따라서 유비가 성립하지 않는다.
 신의 은총이 신앙이 없는 이에게 부여될 때 그는 [수적으로 그리고 본질상 상이한] 신앙의 습관을 새로이 갖추게 된다. 신의 은총이 사랑이 없는 신앙을 가진 이에게 부여될 때에도 마찬가지다. [달리 말해, 신의 은총은 신앙의 습관에 있어 실체적인 변화를 야기한다. 두 신앙의 습관은 상이한 습관이다.]  은총은 신앙을 [아직은 사랑이 없는 것으로서?] 최초로 새로이 야기할 때에도, 기존의 신앙을 보다 완전하게 해줄 때에도 똑같이 작동한다. [달리 말해, 형상화되지 않은 신앙을 가진 상태나 형상화된 신앙을 가진 상태를 가르는 데 있어 은총의 역할은 본질적이지 않다. 즉, 은총의 유무가 두 신앙의 습관 사이의 수적 그리고 본질상의 상이성을 빚어내지 않는다.]
 [하물며] 이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성향을 규정함에 있어서, 은총이 신앙을 [새로이] 야기하지 않는다는 성질은 [본질적인 성질이 아닌] 부수적인 성질이다. 같은 이유로, 이미 선행하는 죄로 은총을 박탈당한 이가 두 번째 죄를 저지른다고 해서 은총이 새로이 박탈당하지는 않는다. [풀어 말해, 은총을 이미 갖춘 한 그것은 추가되지 않고, 은총을 이미 상실한 한 그것은 새로이 제거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형상화되지 않은 신앙의 습관을 가졌던 이가 형상화된 신앙의 습관을 가지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는 적어도 신앙을 가지는 은총을 이미 갖춘 상태에서 새 형상을 획득하는 데 불과하므로, 은총의 유무에 있어서 변화를 겪는 것은 아니다.]
 동일한 신앙이 때때로 형상화되었다가 형상화되지 않을 수는 없다.  신앙은 그것이 형상화되었다가 형상화되지 않는 식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주체인 영혼이 변[함으로써 변하는] 것이다. 영혼은 사랑 없이 신앙을 가지기도 하고 사랑과 더불어 신앙을 가지기도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