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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르네 데카르트, <성찰> 요약

르네 데카르트, 이현복 옮김, <성찰(또는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 문예출판사, 1997. 번역이 정말 매끄러워서 감사히 잘 읽었다.

본문 요약

소르본의 신학자들에게 바치는 헌사 줄여서 ‘헌사(Epistola)’는 소르본의 신학자들에게 “인간 영혼은 신체와 더불어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 신은 현존한다는 것”(심지어는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도 신이 더 쉽게 인식된다는 것)을 “자연적 근거/이성(ratio naturalis)에 의해 증명”하는 자신의 성찰을 보호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쓰인 글이다.(15) 헌사에는 자신의 성찰이 기독교의 본질과 상충하지 않는다는 데카르트의 굳은 믿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선입견으로 인해 해당 저술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묻어난다. 이곳에서 데카르트는 이어지는 성찰이 신학도, 기하학도 아닌 철학에 속하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철학은 “확실하고 명증적인 논증”(18)을 활용하는 과정에서 신앙이 아닌 이성에 호소하므로 비신자나 무신론자에게도 진리를 깨우쳐줄 수 있다. 나아가 자신이 신의 현존과 인간 영혼의 불멸성, 심신의 상이성 증명이라는 난제를 푸는 일에 진리에 닿게 해주는 특수한 철학적인 방법들*을 적용했다고 겸손하게 시인한다.

*명증성의 규칙("의심을 품을 여지가 전혀 없을 만큼 분명하게 정신에 나타나는 것 이외의 사항은 아무것도 나의 판단 속에 포함시키지 말 것"), 분석의 규칙(풀고자 하는 문제를 "필요한 만큼의 작은 부분으로 분할할 것"), 종합[조직]의 규칙("가장 단순하고 가장 인식하기 쉬운 것부터 시작하여, 조금씩 계단을 올라가는 식으로 가장 복잡한 것들의 인식에까지 올라"갈 것. 즉 특정한 순서를 정하고 그에 따라 탐구를 수행해야 한다는 규칙), 열거[포괄]의 규칙("모든 경우에 [...] 재검토를 하여, 아무것도 빠뜨리지 않았음을 확신할 것") 르네 데카르트, 김진욱 옮김, <방법서설>, 범우사, 2002, pp.37-38

Q.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인식이 '쉽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연스러움 vs 판명함)

독자를 위한 서언 줄여서 ‘서언(Praefatio)’에서 데카르트는 자신의 여섯 성찰들을 향한 두 개의 주된 반론을 제시하고 그에 반박한다. 첫 번째 반론은 “스스로를 반성하고 있는 인간 정신은 자신이 사유하는 것이라는 사실 이외에 어떤 것도 지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에서, 그 본성 혹은 본질이 오직 사유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귀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24) 뼈대만 남겨놓으면, 누군가 x를 지각한다고 해서  x가 실제로도 참이라는 것이 귀결되느냐는 반론이다. 이에 데카르트는 사후에 <명석판명하게 인식되는 바는 실제로도 참>이라는 진리규칙을 제시한다. 인식의 방식이 실제적인 참, 거짓의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세계에서 사유와 실재 사이의 간극은 예컨대 칸트에게서보다 훨씬 작다. 두 번째 반론은 “나보다 더 완전한 사물의 관념을 내가 갖고 있다는 것에서 이 관념이 나보다 더 완전하다는 것, 더구나 이 관념에 의해 표현된 것이 현존한다는 것은 귀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24) 이 반론은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에 대한 가우닐로의 반박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에 데카르트는 ‘관념’을 이중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고 반박한다. 관념을 “질료적으로, 즉 지성의 작용으로라는 뜻으로 사용”하면 어디까지나 불완전한 인간에게 귀속되지만, 관념을 “표상적으로(objective), 즉 지성의 작용에 의해 표현된 것으로라는 뜻으로 사용”하면--즉 관념의 내용이 무엇인지 따지면--그 관념은 인간의 불완전성을 뛰어넘는 것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신이 없다고 확신하는 무신론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인간의 유한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cf. "우리가 발견했다면, 그것은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박승찬 옮김, <모놀로기온 프로슬로기온> 중 <프로슬로기온> 18장, 2002,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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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성찰 의심할 있는 것들에 대하여

 “학문에 있어 확고하고 불변하는 것을 세우려 한다면 일생에 한 번은 이 모든 것을 철저하게 전복시켜* 최초의 토대로부터 다시 새로 시작해야 한다 […] 그러나 이를[전복을] 위해 모든 의견이 거짓임을 증명해 보일 필요는 없다”.(34, 강조는 필자) 의견이란 무수하고 얼마든지 터무니없을 수 있으므로 이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카르트는 두 가지 전략을 통해 저 전복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첫 번째 전략은 “아주 확실하지 않은 것 그리고 의심할 수 없는 것이 아닌 것에 있어서도 명백히 거짓인 것에서처럼 엄격하게 동의”하지 않는 것, 이에 따라 어느 의견에 “의심할 만한 이유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거부하는 것이다.(34-35) 이 전략은 '아주 확실하지 않은 것 그리고 의심할 수 없는 것이 아닌 것'을 암묵적으로 배제함으로써 검토의 대상이 되는 개별 의견들의 수를 현저하게 줄여준다. 그럼에도 잔존하는 모든 개별 의견들을 일일이 검토할 수는 없기 때문에, 두 번째 전략은 “토대가 무너지면 그 위에 세워진 것도 저절로 무너질 것이기에, 기존의 의견이 의존하고 있는 원리들 자체를 바로 검토”하는 것이다.(35, 강조는 필자) 이와 같은 전략들 하에서 데카르트는 기존에 참되다고 생각되어온 경험들—①감각을 통해 얻어진 경험, ②일반적인 것에 대한 경험, 나아가 말하자면 ‘일반적인’ 일반적인 것보다도 ③더 단순하고 보편적인 것에 대한 경험—의 참됨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②와 ③은 정신의 능력 가운데 오성(intellectus)을 통해 얻어진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존의 이론을 디딤돌로 삼기보다 전복하는 것이 옳다고 보는 접근법조차 상식적이거나 널리 퍼진 견해(endoxa)를 존중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차별화된다.

 ①데카르트에 따르면 기존의 의견들이 의존하는 저 원리 자체는 감각이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감각은 종종 우리를 속인다”. 그리고 “한 번이라도 우리를 속인 것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아야 한다.(35) 언제 우리를 다시 속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각을 통해 얻어진 모든 경험은 전복의 대상에 포함된다고 주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Q. '감각'이 아닌 감각에 대한 오성적 판단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닌가? (S씨)

 그러나 데카르트는 “감각으로부터 알게 된 것 가운데는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것도 많이 있다”고 말한다(35) 예컨대 당장 생생하게 주어지는 감각들은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처럼 우리를 속이지 못할 것 같은 감각들조차, 그것이 꿈속에서 감각되는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감각되는 것인지 확실하지 못하다. 다시 말해 “깨어 있다는 것과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구별해 줄 어떤 징표도 없다”.(36)* 감각은 경험적으로 기만적일 뿐 아니라 그 개념상 1인칭의 경험에서는 기만적일 가능성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감각을 통해 얻어진 모든 경험은 실제로 전복의 대상에 포함된다.

*Q. 정말 그런가?

A. 리처드 프랭크스에 따르면, 저 구별의 징표는 "경험의 내용이 아니라 맥락" 즉 "감각을 적절하게 배열하는" 능력의 발휘다. "깨어있을 때의 경험은 꿈에서의 '경험'에 비해 훨씬 선명하고, 체계적이고, 일관성을 지"니며 그에 대한 일관적인 말하기가 가능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반박(처럼 보이는 것)은 꿈 논증을 무효화시키지 않는다. "데카르트가 꿈 논증을 형성한 궁극 목적은 우리의 삶이 모두 꿈이라거나 우리가 주변의 세계를 인식할 수 없다는 점을 보이려는 것이 아니다. 그의 목적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우리가 흔히 가정하는 바나 동물의 경우와는 달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감각하거나 느끼는 능력[내용 파악 능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들을 해석하고 이들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작업[내용의 맥락화]에 달려있음을 보이려는 것이다."(리처드 프랭크스, 김성호 옮김, <데카르트 <성찰> 입문>, 서광사, 2020, pp.71-73. 이하 <입문>)

Q2. 프랭크스의 해석은 타당한가?

A1. 프랭크스는 꿈과 현실이 구별 가능하다는--저 이해 작업이 꿈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식--전제를 끌어들인 채로 데카르트를 자비롭게 독해하려는 무리수를 둔 것 같다.

A2. 프랭크스는 경험과 경험에 대한 추론적 이해를 구분하려 하는 것이고, 전자는 꿈과 현실 모두에서 동일하지만 후자는 현실에서만 가능하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자를 논하는 방향으로 서사의 전개를 바꿔보려는 것이다.

cf. 데카르트적 회의주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거나 아무것도 참이 아니라거나 어떤 실재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e.g. 경험의 원인] 오직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만을 인식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입문>, 74)

 ②다행스럽게도, 실제로 꿈을 꾸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꿈 속의 개별적인 것(particularia)—‘이’ 신체—은 참된 것 즉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일반적인 것(generalia)—‘신체’—은 실제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꿈 속에 나타나는 모든 개별적인 것은, 제 아무리 허구적이라 해도 일반적인 것(을 따라 그려진 견본들)이 뒤섞여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세이렌은 실존하는 새와 여성(의 일반적인 것)을 뒤섞어 만든 허구다.

Q. 여기서 데카르트는 보편자 같은 것을 염두에 두는가?

A1. 개별 밀랍으로부터 '밀랍 자체'를 이끌어내려는 이후의 시도들을 생각하면, 데카르트에게서 이 일반적인 것은 개별적인 것과 분리되지 않는 존재론적 지위를 가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A2. 일반적인 것이란 개념 또는 언어가 의미하는 바에 대한 지식일 수 있다. 이는 본유적인 관념들로, 수학과 같은 아프리오리한 학문의 기초가 된다. <입문>, pp.54-55

 ③그 어떤 일반적인 것도 참조하지 않은 채 그려진 듯한, “극히 허구적이고 거짓된 어떤 새로운 것”(37) 속에서도, 즉 말하자면 ‘일반적인’ 일반적인 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도 “더 단순하고 보편적인 것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 우리 사유 속에 있는 사물의 상들은 모두 […] 이 단순하고 보편적인 것이 뒤섞여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37-8) 데카르트에 따르면 ‘이 단순하고 보편적인 것’에는 “물질적 본성 일반 및 그 연장” 등이 속한다.(38)

Q. 데카르트는 여기서 이 일반적인 것은 감각을 통해 인식되지 않는다고 전제하는가? 나아가 데카르트는 여기서 ‘일반적인 것’과 ‘단순하고 보편적인 것’을 종적으로 구별하는가? 아니면 후자는 전자의 하위종인가?

A. 리처드 프랭크스에 따르면, 둘 모두 '개념적이고 아프리오리한 지식', 즉 감각이 아닌 지성 또는 이성을 통해 획득된 지식에 속한다. (<입문>, pp.52-56 참고)

Q. 꿈의 가설도 통과해내는 것으로 합의된 '수학적 지식'은 어떤 의미에서 단순하고 보편적인가?

 ①, ②, ③에 따라 그 존재가 의심 가능한 것들을 자신의 고찰 대상에 포함시키는 자연학과 같은 학문은 모두 의심스러운 반면, “대수학, 기하학 및 극히 단순하고 일반적인 것을 다루는, 그래서 자연 속에서 이런 것들의 존재 여부를 문제 삼지 않는 학문들은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을 담지하고 있다.”(38) 학문에서 확고하고 불변하는 것을 찾고자 한 최초의 목표를 달성한 것처럼 보이는 이 시점에서 그러나 데카르트는 두 개의 치명적인 질문을 던진다. 첫째, 저 단순하고 보편적인 것조차 참된 것이, 실제로는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신이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도록 속일 수도 있지 않은가? 둘째,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을 담지하고 있다’고 언젠가 믿었던 것에 대해서조차 “잘못을 범할 수도 있지 않은가?”(39)* 신이 선하다면 이 질문들은 치명적이지 않게 되겠지만, 우리의 불완전성은 (우리가 의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로 의심스럽지 않도록 보장해주는) 신의 선함 나아가 그의 전능함마저 의심스럽게 만든다. 신에게는 우리를 오류 가능한, 말하자면 잠재적 또는 현실적 바보로 창조할 능력만 있고, 완벽한 인식자로 만들어줄 능력은 없단 말인가? 마침내 신이 전적으로 선하고 유능하며, 그에 따라 우리가 항상 오류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라는—어떤 경우에는, 예컨대 단순하고 보편적인 것의 실제적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참된 인식에 도달한다는—인식을 포함해 “이전에 참된 것으로 간주한 […] 모든 것을 의심할  있다.”(39, 강조는 필자) 그렇다면 전적으로 선하고 유능한 신이 아니라 “유능하고 교활한 악령[또는 전능한 악마, malignus genius]이 온 힘을 다해 나를 속이려 하고 있다고 가정”하자.(40) 인식자는 가끔만 실수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실수하도록 하는 본성을 부여받았다. 이와 같은 가정은 아주 힘들고 두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가정의 끝에서 그 어떤 참된 인식도 발견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일종의 판단 중지에 해당하는 “거짓된 것에 동의하지 않는 것, […] 내가 속임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은” 확실히 수행할 수 있다.(41)

*Q. 너무 상이한 질문들인 것 같은데, 어째서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하는 듯이 서술돼있는가?

A. 리처드 프랭크스에 따르면, 둘 모두 (감각뿐 아니라 이제는) 지성을 회의하는 '본성에 기초한 논증'으로 수렴한다. 바로 신이 우리로 하여금 본성상 가끔 속는 존재로 창조한 만큼 항상 속는 존재로 창조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가 이성적으로 확신하는 바는 세계 안에 있는 무엇과도 아무 관계가 없다 [...] 나의 개념들은 지시 대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거짓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입문>, pp.57-58 참고. 이 경우 신은 악령이 되고, 남는 것은 "주관적인 믿음뿐이며, 객관적인 지식에 도달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61)** 왜냐하면 "[...] 우리에게는 서로 대립하는 지식의 근거들 사이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62)

Q. 상대주의로 이어질 만한 '주관적인 믿음'이라는 것도 없지 않나?

A. 프랭크스는 데카르트가 믿음 자체, 사고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한 적은 없다고 견지한다.

**이와 관련해서, 프랭크스에 따르면 악령의 가설의 귀결은 '누구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i)보편적 회의주의가 아니라--이러한 종류의 회의주의는 역설을 낳으므로 무의미하다--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는 (ii)상대주의이다. 이는 철학자들이 흔히 (iii)'데카르트적 회의주의'라고 부르는 것, 사실은 모든 실재가 통 속의 뇌가 벌이는 체계적인 착각과 환상, 환영일지도 모른다는 종류의 회의와도 다르다. --> 저 통 속의 뇌 문제도 포함하지 않는가?(J씨) / 둘이 큰 차이를 가지는가?(S씨) 상대주의가 훨씬 약하다.(J씨) --> 데카르트의 적은 상대주의가 아니라 회의주의가 아닌가? 상대주의가 적이라면, 배제돼야 할 다른 인간존재들의 발언권 또는 역사 등등이 고려돼서 소위 인식비판적 순환이 발생한다. 프랭크스는 틀린 것 같다. 현재로서는 저 데카르트적 회의주의가 데카르트의 의도가 맞는 것 같다.

Q. 프랭크스는 저 데카르트적 회의주의는 꿈의 가설의 귀결이지, 악령의 가설의 귀결은 아니라고 말한다.(<입문>, pp.75-76 각주 참조.) 이행남 선생님의 꿈 가설 해석과도 충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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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성찰 인간 정신의 본성에 관하여; 정신이 물체보다 쉽게 인식된다는

 제1성찰의 결론은 “(모든 것은 의심 가능하기 때문에)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나’에 의해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주 유능하고 교활한 기만자[…]가 나를 속인다면, 내가 [속임 당해 무언가를 생각하게 되는 자로서]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 내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동안, [그 생각이 틀리다 할지라도] 그는 결코 내가 아무것도 아니게끔은 할 수 없을 것이다.”(43) 그러므로 “가장 확실하고 명증적”인 인식은 ‘내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인식이다.(44) 그런데 그 인식 속의 ‘나’는 대체 무엇, 누구인가?

 이에 데카르트는 먼저 '나'에 대한 개념적인 정의를 시도하지만 그것이 무한소급의 오류에 빠진다고 지적한다.(각주 39번 참조) 그 대신 '나'의 모든 가능한 후보들을 찾아낸 뒤 검토하는 다소간 귀납적인 전략을 취한다. 이 작업을 위하여 그는 "전에 내가 무엇인지를 고찰할 때마다 내 생각 속에 자연스레 떠올랐던 것"을 나열한다. 첫 번째 후보는 신체인데, 흥미로운 것은 데카르트가 살아있는 인간의 신체와 죽은 인간의 신체를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체는 기계로서 "이 기계는 시체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영양 섭취, 운동, 감각, 사유의 활동을 담당하는 영혼인데, 데카르트의 영혼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을 따르지만 욕망을 사유의 활동으로 포섭시킨 형태를 띤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영혼의 진정한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서사의 전개상 잘 모르고 있는 척 넘어간다. 그가 대신 주목하는 것은 신체가 그에 속해있는 물체의 본성이다. 물체는 "한정된 모양을 갖고 있고, 제한된 공간을 갖고 있으며, 다른 물체를 배제하는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고, 또 그것은 [ ... 오감을 통해 ... ] 지각되는 것이며" 스스로 운동하지도, 감각하지도, 사유하지도 못한다.(45) 그런데 이와 같은 본성들 "가운데 [유능하고 교활한 악령의 기만을 당하고 있는 지금] 어느 하나라도 내가 지금 갖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다시 말해 신체를 포함하는 물체는 그 비존재를 상상할 수 있으므로, 물체의 존재 일반은 필연적으로 참이 아니다. 영혼의 활동들 가운데서도 영양 섭취, 운동, 감각의 경우 신체 없이는 "허구적인 것(figmenta)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마지막으로 남은 '나'의 후보인 사유(cogitatio)"만이 나와 분리될 수 없다." 이에 데카르트는 '나는 내가 사유하는 동안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놓는다. "그러므로 나는 정확히 말해 단지 하나의 사유하는 것(res cogitans), 즉 정신, 영혼, 지성 혹은 이성"으로서 필연적으로, 참되게 현존한다.(46, 강조는 필자) 이제 데카르트에게는 인식 주체의 현존과 그의 사유활동의 현존이 곧 모든 지식의 제1토대로 작동하게 된다.

Q. 고전적인 질문이지만, 사유가 있다고 해서 사유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가?

A. <입문> pp.138-143 사고의 원인이 아닌 사고의 맥락, 사고가 영향을 미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마치 속성이 그 자체로는 존재할 수 없고 사물을 필요로 하고, 행위가 행위자를 필요로 하듯.

Q. 실제로는 사유하고 있지 않은데 사유하고 있다고 속는 사태는 왜 상상 불가능한가? --> 이후의 질문과 연계*

A.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이 사유다.

 이어서 데카르트는 혹시 상상을 통해서도 ‘나’의 무엇임을 알 수 있는지 자문한다. 그러나 교활한 악령의 기만에 따라 상상된 모든 것은 무라고 가정된 상태이므로 그럴 수 없다. 물론 무라고 가정할 수 있다고 해서 무일 수 있다거나 무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물의 진리 상에서”가 아니라 인식자의 입장에서 필연적으로 참인, 즉 무라고 가정할 수 없는 ‘나’의 본성은 정신으로서 사유하는 것일 뿐이다.(47) 그런데 어째서 상상은 ‘나’의, 정신의 본성을 인식하게 해줄 수 없는 것일까? 바로 “상상한다는 것은 물질적인 것의 형태나 상을 보는 것”인 반면 정신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48) 풀어 말하면 '나'의 '나'됨, '나'의 본성, 정신의 본성은 오직 오성을 통해서만 판명하게 인식될 수 있다.

 이제 데카르트는 ‘사유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리하고자 한다. 사유한다는 것은 의심, 이해, 판단, 의욕, 상상, 감각하는 등 현상학적으로 말하면 의식의 작용을 수행함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사유 작용들은 “비록 내가 항상 잠자고 있더라도, 또 나를 창조한 자가 온 힘을 다해 나를 속이고 있더라도 […] 내 현존처럼 확실한 것”이다. 상상된 모든 것이 참되지 않다고 하더라도 상상하는 힘만큼은 내 사유, 나 자신과 구별 또는 분리될 수 없으며 감각 또한 마찬가지다. 설령 x에 대한 감각이 오류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나’가 x를 느낀다는 것만큼은 오류일 수 없는 필연적 참, 곧 판명한 인식이기 때문이다.(49)

Q. 데카르트는 ‘나’의 본성을 찾고자 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을 따라 감각과 사유를 구분했던 것을 여기서 폐기하는가? 달리 말해, 감각은 신체의 존재에 의존하므로 신체가 없다고 가정되면 함께 무효화된다는 이전의 주장은 폐기되는가?

A. 각주 44번에 따르면 상상된 것 및 감각된 것과 달리 상상하는 능력 및 감각하는 능력은 "실제로 현존"하는 데다 "신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으로, 사유의 한 부분으로 파악될 수 있다".(221) 사유되는 물질적 형상은 정신적인 것이 아니지만, 형상화함은 사유의 작용으로서 정신적인 것이다. 감각능력이 틀릴 수는 있겠지만, 감각능력의 존재 및 그 활동은 의심하지 않는다.

*Q. 여기서 밝혀진 것은 <‘나’가 실제로 이렇게 저렇게 사유한다>인가, 아니면 <‘나’가 실제로 이렇게 저렇게 사유한다고 생각한다(=고 속는 것일 수도 있다)>인가? 의심, 이해, 판단, 의욕, 상상, 감각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속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사태상 후자여야 할 것 같은데, 데카르트의 서술은 전자에 가까워 보여서 헷갈린다.

A. 속는 것도 사유의 한 양태여서 둘이 다르지가 않다.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은 바로 우리에게 친숙하지만 의심스러운 물질적 사물보다 정신으로서의 참된 나 자신이 더 판명하게 인식된다는 것이다. 이는 물질적 사물이 가장 판명하게 파악된다고 상정하는 상식에 반하는 주장이다. 그는 이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밀랍에 대한 인식을 예로 든다. 인식자가 밀랍이라는 물체를 판명하게 인식하게 되는 것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인가? 밀랍이라는 물체가 “감각에 의해 포착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51) 감각에 의해 포착될 수 있는 것은 모두 외부의 조건 등에 따라 유연하게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는 것은 유연성, 가변성, 그리고 연장성인데, 이와 같은 것들은 이해될 뿐, 상상을 통해 인식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상상을 통해서 이것들을 인식하려면 상상 가능한 모든, 변화무쌍하기 짝이 없는 후보들을 죄다 상상해봐야 할 텐데 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밀랍이 무엇인지는 [나아가 물체 일반의 본성은] 상상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정신에 의해(sola mente) 지각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52) 일상적인 언어 사용이 물체는 정신적 이해가 아닌 감각이나 상상을 통해 인식되는 것이라고 호도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53)

*Q. 변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판명한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숨은 전제가 작동하는가? 서양철학사를 배회하는 파르메니데스의 유령~~~

**후설은 본질 직관에서 상상의 지위를 높이 사는데 신기하다.

Q. “물체는 만져서 혹은 보아서가 아니라 이해함으로써 지각된다”(55)고 데카르트가 말할 때, 물체의 본성뿐만 아니라 개별 물체까지도 포함해서 말하는 것인가? 각주 47번을 통해서는 아닌 것 같은데, 서술의 맥락에서는 개별 물체의 무엇임이 논해지고 있어 헷갈린다. 만일 개별 물체까지도 포함되는 것이라면 이 '이해'는 후설의 '파악(개별 물체의 의미 통찰)'과 비슷한 것인가?

A1. 데카르트는 개별 물체와 물체의 본성을 구분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후자와 전자가 유리되어있다기보다는, 후자가 전자에 깃들어있다고 보는 것 같다.

A2. <입문> pp.106-113. 감각의 수용은 동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정신의 능력을 발휘해 그렇게 수용된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 감각을 의식한 후 이를 인지하고 해석해 세계에 대한 정신적인 상을 구성하고 그 안에서 우리의 자아를 과거와 미래를 지니는 존재로 자리매김하는 일은--이런 일들 모두는 어떤 종류의 기계론적 과정에 의해서도 설명될 수 없다고 그는 생각한다.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는 능력에 비추어보면 우리 인간에게는 신체를 구성하는 물체 이상의 무언가[정신과 자아]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111-112)

 그렇다고 해서 데카르트가 물체에 대한 감각적 인식 또는 상상의 가능성과 현실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물체는 물론 감각적으로 인식되거나 상상될 수 있지만 그와 같은 인식은 필연적으로 참인 것은 아니다(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모자를 쓰고 옷을 입은 자동기계의 예). [우연적인 양태는 인식할 수 있지만 사물 자체가 무엇인지는 통찰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그와 같은 방식의 물체 인식에서는 판명한 것이 없으며, 게다가 인간인 ‘나’에게 고유한 능력이 발휘되는 것도 아니므로 당장 문제시되고 있는 ‘나’의 본성 탐구에도 보태주는 것이 없다. 나아가 모든 감각적 인식 또는 상상은 그와 같은 인식의 주체인 ‘나’의 현존을 전제한다. ‘나’가 무언가를 감각하고 상상하려면 ‘나’가 어떤 것이기는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각적 인식 또는 상상의 대상보다 ‘나’ 자신이 훨씬 판명하고 명증적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이것[물체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모든 근거들] 외에도 내 정신을 더 판명하게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이 정신 안에 많이 있기 때문에, [‘나’ 또는 정신의 본성을 탐구하기 위해] 물체로부터 정신에 들어온 것을 고찰할 필요는 전혀 없다.”(55) 

Q. 만약 정신적 이해라는 인식의 ‘방식’이 명증성과 판명성을 보장해주는 것이라면 판명성에 위계가 있을 수가 있는가? 그러니까 개별 물체(의 본성) 및 물체 일반의 본성도, 나 자신도 오성을 통해서만 이해된다면 후자가 전자보다 판명할 이유가 있는가?

A. 우선 판명한 인식과 필연적으로 참된 인식은 구분되어야 한다(설령 이후에 진리규칙의 제시를 통해서 둘이 합치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x에 대한 판명한 인식은 x에게 고유하게 또 본질적으로 귀속되는 것에 대한 인식으로 일종의 본성 인식이다. 그리고 이 인식은 감각과 상상으로는 불가능하며, 정신적 이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정신적 이해가 판명한 인식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것이지, 모든 정신적 이해가 판명하다는 (또는 필연적으로 참되다는) 뜻은 아니다(54쪽을 참고하면 정신적 이해도 틀리거나 애매할 수 있다고 말해진다). 그러므로 만약 정신적 이해라는 인식의 ‘방식’이 명증성과 판명성을 보장해주는 것이라면'이라는 전제가 틀렸다. 나아가 물체의 본성에 대해서도 판명한 인식이 가능한 게 맞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가능한 게 맞는데, 다만 후자가 전자에 논리적으로 선행한다는 의미에서 '훨씬 더' 판명하다는 식의 엄밀치 못한 언어를 데카르트가 구사했을 뿐이다. 그가 설정한 위계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cf. "Descartes characterizes these epistemically impressive cognitions in terms of their being perceived clearly and distinctly. The Meditations never defines these terms; indeed, it sometimes uses them in confusing ways (e.g., sometimes using clarity-talk as a shorthand for the conjunction of clarity and distinctness). The Principles offers the following definitions:

<I call a perception “clear” when it is present and accessible to the attentive mind … I call a perception “distinct” if, as well as being clear, it is so sharply separated from all other perceptions that it contains within itself only what is clear. (Prin. 1:45, AT 8a:21f, CSM 1:207f)>

Other texts indicate that clarity contrasts with obscurity, and distinctness with confusedness. Though having clear and distinct apprehension is epistemically impressive, we’ll see that it is merely a necessary condition of perfect knowledge, not a sufficient condition." (Newman, Lex, "Descartes’ Epistemology",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Spring 2019 Edition), Edward N. Zalta (ed.), URL = <https://plato.stanford.edu/archives/spr2019/entries/descartes-epistemology/>. 이하 <SEP>)

*

제3성찰 신에 관하여; 그가 현존한다는 것

 제2성찰을 통해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의 시험을 통과하는 인식의 제1토대로서 코기토를 내세운다. 외부 세계는 그 실재마저 불확실하지만, (i)사유하는 것으로서의 '나'의 현존과 (ii)내 안에서 수많은 사유 양태들이 발생하고 있음은 어떤 경우에도 확실하다. 그런데 이 확실성은 "명석판명한 지각"에서 온 것이다. 따라서 그는  "내가 극히 명석 판명하게 지각하는 것은 모두 참이라는 것을 일반적 규칙으로 설정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일반화한다.(57) 이 규칙이 바로 데카르트로 하여금 선한 신의 존재 증명을 경유해 악령의 가설을 물리치고 이후 꿈 가설을 통해 부정되었던 외부세계까지 재건하게 해주는 진리규칙이다. 그러나 이 규칙에 대한 의심은 불가능한가? "전에 아주 확실하고 분명한 것으로 간주했지만 나중에 의심스러운 것으로 발견된 것이 많이 있다."(57) 그 예로 데카르트는 감각적 인식의 수확물들을 든다. 감각은 사물의 표상을 정신에 심어주지만, 그 표상이 외부에 실재하는 사물로부터 그것과 유사한 것으로서 유래한다는 지각은 의심스럽다. 정신적 통찰의 수확물은 이보다 사정이 낫기는 하지만 "나에게 아주 명백하게 보이는 것에 있어서도 어떤 신이 나에게 잘못할 수 있는 본성을 부여할 수도 있다는" 악령의 가설이 아직 물리쳐지지 않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의심스럽다. 다시 말해 악령의 가설은 저 진리규칙이 참인지, 주관이 x를 명석하고 판명하게 지각한다고 해서 x가 실제로도 참됨이 보장되는지를 묻게 만든다.

cf. 프랭크스는 "만일 우리가 무엇이 진리인지 모른다면 우리는 결코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고 밝힌 플라톤의 대화편 <메논>을 상기시키며 "기준의 문제는 사실상 진리의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귀착된다"고 지적한다. "무언가가 참임을 미리 알 수 있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무엇이 참된 기준인지를 인식할 수 없다."(<입문>, pp.165-166) 이 지점에서 제기되는 그의 흥미로운 해석은, 여기서 데카르트가 "진리의 기준[또는 진리 판정의 근거]을 제시하려 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우리가 진리를 거짓과 구별해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실제로 지닌다"고 말하고 싶어할 뿐이라는 해석이다.(166, 강조는 필자) 이 능력은 곧 "그 자체만으로, 곧 더 이상 어떤 종류의 증거나 근거가 없이도 내가 참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것으로 성립"하는 자명한 것을 직관하는 능력이다.(167) 그는 명석함을 일종의 생생함, 흄 식으로 말하면 인상의 강력함 등의 심리적인 규정으로 이해하는 한편 판명함은 습관으로부터 자유로운, 제대로된 이성적 분석을 거쳤다는 의미의 규정으로 이해하는 것 같다. 예컨대 코기토는 제대로된 이성적 분석을 거칠 경우 명석하고 판명하게 (별도의 논증을 요하지 않고) 직관된다.

Q. 데카르트는 진리규칙에 대한 의심을 제기하기 직전 코기토, 갈릴레오의 지동설, '2+3=5' 등을 모두 명석판명한 지각으로 동일시한다. 그러나 코기토의 확실성은 악령의 가설마저 통과하는 반면 나머지 두 지각의 확실성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명석판명한 지각 내에도 확실성의 위계가 있는가? 예컨대 직관과 추론/해석의 결과는 서로 다른 수준의 확실성을 지니는가?

 그러므로 진리규칙에 대한 의심을 제거하기 위해 "가능한 한 빨리 신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기만자일 수 있는지를 고찰"해야 한다. 더 큰 틀에서 보면 이 고찰은 '코기토로서의 '나'를 제외하고도 존재하는 게 있는가?'를 문제삼는 작업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데카르트는 자신이 가진 생각들의 종류를 구분하고 각각의 참됨을 따지고자 한다. 이와 같은 접근은 일견 비약적으로 보인다. 주관이 가진 생각을 유형화하는 전략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우리는 제2성찰이 그를 위치시킨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이 상황에서는 "자신의 사고들을 자세히 검토해 그것들이 자신의 정신 외부의 세계에 관해 무언가를 말해주는지를 결정하는" 수뿐이다.(<입문>, p.176)

 사람의 생각은 관념(idea, 사물의 표상), 정념 또는 의지(affectiones/voluntas), 그리고 판단(judicia)으로 나뉜다.* 이 중에서 관념과 정념 또는 의지는 거짓일 수 없다. 주관의 안에 어떤 상이 있다는 것, 또는 그가 어떤 것을 원한다는 것은 참된 것으로서 그에게 투명하게 알려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판단, 특히 "내 속에 있는 관념이 내 외부에 있는 사물과 유사하거나 일치한다"는 판단, 즉 사물의 표상을 외부의 실재하는 사물과 연관시키는 판단이다.(60) 이러한 판단의 대상이 되는 관념은 본유적(innatae)이거나**, 외래적(adventitiae, '우연한'이란 뜻도 있음)이거나 조작된(factae) 것이다. 사물이나 사유, 진리의 무엇임 등은 본유적인 관념이고 해리포터 asmr의 소리는 외래적 관념이며, 바실리스크 및 아라고그는 주관이 스스로 고안해낸 것이다. 물론 이 단계에서 이와 같은 분류는 아직 가설적이다. "나는 아직 관념의 참된 기원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61)

*이후 데카르트는 여기서와 달리 판단(관념에 대한 동의, 긍정, 부정, 믿음 또는 믿기로 하는 선택 일반)을 의지의 능력 중 하나로 귀속시킨다.

**cf. 프랭크스는 본유관념이 "그것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도록 타고"난 관념이 아닌, 주관의 "내부에서 만들어진다는 점, 곧 자신의 정신 안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한다는 점"으로 특징지어진다고 단언한다. 본유관념의 예로는 경험이나 혼자만의 조작으로 얻어질 수 없는 신의 관념, 무한의 관념, 완벽한 원의 관념, 자아의 관념 등이 있다.(<입문>, pp.178-179)

cf2. "Descartes’ commitment to innate ideas places him in a rationalist tradition tracing back to Plato. Knowledge of the nature of reality derives from ideas of the intellect, not the external senses. [...] On one plausible understanding, Descartes’ official doctrine has it that ideas are innate insofar as their content derives from the nature of the mind alone, as opposed to deriving from sense experience (cf. Newman 2006)."(<SEP>)

 그는 이것들 가운데서도 특히 외부에 실재하는 사물로부터 그와 유사한 것으로서 나타나는 것으로 간주되는 관념들의 참됨을 따져보고자 한다. '나'의 관념들은 정말 "(이 관념을 유발한) 것으로 실재하는 외부의 어떤 사물에서 유래"(H)하는가? 성급하게 판단하면 그러하다. 감각적 관념과 외부 사물 사이의 유사성은 첫째, 무엇보다도 자연스러운 것처럼 여겨지고, 둘째, 주관은 저 관념들이 "내 의지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 스스로 경험하"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 바깥의 사물로부터 왔으리라고 생각하게 된다.(61) 그러나 저 유사성은 자연의 빛, 즉 이성이나 명석판명한 지각이 아니라 자연적 충동에 의해 믿어지는 것이다. 이 충동은 사람을 나쁜 쪽으로 부추기기도 하므로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 쉽게 말하면 이성적으로 근거 지워질 수 있는 유사성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믿어지는 유사성일 뿐이다. 나아가 "나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런 관념을 산출하는 능력이 내 안에 있을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이런 관념이 설령 나와 다른 사물에서 유래한다고 하더라도, 이로부터 그 관념이 이 사물과 유사해야 한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62) 예컨대 태양에 대한 외래적 관념은 그것이 매우 작은 물체라고 알려오지만, 태양에 대한 본유적 관념을 기반으로 한 천문학적 탐구는 그것의 참된 크기를 알려온다. 따라서 "감각 기관을 통해 혹은 그 밖의 다른 방식으로 나에게 관념 혹은 상을 전달해 주는 나와 다른 어떤 것이 현존하고 있다는 지금까지의 믿음은 확실한 판단이 아니라 단지 맹목적인 충동에 의한 것이"다.(63)

 그렇다면 '나' 이외에 다른 것이 현존할 수 있다는 희망 일체를 버려야 하는가? 아니다. “내 안에 그 관념이 있는 사물 가운데, 내 외부에 현존하고 있는 것이 있는지를 검토할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있다.”(63) 이 다른 길은 곧 ①관념들 사이의 표상적 실재성의 위계 및 ②결과가 되는 관념의 표상적 실재성은 그 관념의 원인이 가진 형상적 실재성보다 클 수 없다는 인과원리를 통해 취해진다. 이를 각각 따져보자.

 ①모든 관념은 그저 유한한 인간의 관념인 한에서 동일한 형상적 실재성을 가진다. 형상적 실재성(Formal reality)이란 실제로 또는 현실적으로 무언가가 '얼마나' 실재하느냐를 따진다. 이처럼 존재에 정도와 위계가 있다고 전제하는 데카르트의 체계*에서 (존재하기 위해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서) '무한실체'인 신은 (존재하기 위해 신에게 의존하는) '유한실체'인 정신 및 물체보다, 유한실체는 (존재하기 위해 유한실체에 의존하는) "두 유한 실체 각각의 본성 및 본질적 성질"인 "사유와 연장" 등의 '[본질적] 속성(principal attribute)'보다, 속성은 (존재하기 위해 속성에 의존하는) "속성이 구체적으로 띠는 여러 개별 형태들"인 '양태[우연적 속성]'보다 큰 형상적 실재성을 가진다. 그런데 관념은 언제나 그것으로써 표상하는 바를 가진다. 따라서 그렇게 관념으로써 표상된 대상은 그것이 만일 현실에 실재했을 경우 가졌을 형상적 실재성에 비례해 표상적 실재성(Objective reality)을 가진다. 그러므로 동일한 형상적 실재성을 가지는 관념들이라고 해도 표상적 실재성에 따라 위계가 발생한다. 예컨대 무한실체인 신에 대한 관념은 유한실체에 대한 관념보다 표상적으로 더 실재한다.

*라틴어 단어 'realitas'가 문자 그대로 해석될 경우 '실체성'을 의미한다는 프랭크스의 주석은 이 체계를 좀 더 이해할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입문>, p.181)

 ②"다른 한편, 자연의 빛에 의해 분명한 것은, 전체 작용 원인 속에는 적어도 그 결과 속에 있는 것만큼의 [또는 그보다 큰] 실재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결과의 실재성은 원인의 실재성에서 오는 것이므로, 전자는 후자보다 작거나 같을 수만 있지 클 수는 없다. 이것이 바로 일반적인 인과원리이며, "이 원리가 무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다는 우리의 믿음에 근거를 제공한다". 거꾸로 말하면 "무로부터는 무언가가 등장할 수 없"기 때문에 인과원리가 참이다.(<입문>, p.184 각주 13번, 강조는 필자) 이로부터 "더 완전한 것, 즉 더 많은 실재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덜 완전한 것에서 생길 수 없다는 것이 귀결된다".(64)

 이 원리는 결과가 관념일 경우에도 적용되는데, 그 경우 "관념이 어떤 특정한 표상적 실재성을 갖고 있다면, 이는 그 관념이 갖고 있는 표상적 실재성과 적어도 동등한 형상적 실재성을 갖고 있는 원인에 의해서만 가능하다."(65, 강조는 필자) 그렇지 않다면, 즉 결과의 표상적 실재성이 원인의 형상적 실재성보다 크다면 그 여분은 대체 어디서 왔겠는가? 이에 특정한 '표상적 실재성'을 가지는 관념의 원인이 꼭 그 관념보다 크거나 적어도 동등한 '형상적 실재성'을 가져야 하냐는 반론이 가능하다. 데카르트는 "한 관념이 다른 관념으로부터 생길 수는 있지만, 이런 소급은 그러나 무한히 계속될 수 없으며, 마침내 제일의 관념에 도달하게 되는 바, 이 관념의 원인은 이른바 원형과 같은 것이며, 관념 속에 그저 표상적으로만 있는 모든 실재성이 이 원형 속에는 형상적으로 내포되어있는 것"이라 응수한다.(66)*

*Q. 여기에는 이 원형이 관념 바깥에 존재하리라는 가정, 즉 관념의 출처는 소급하다보면 관념이 아닌 것이어야 한다는 가정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있지는 않은가? 어째서 "관념의 [표상적] 실재성은 [...] 사물 자체의 형상적 실재성으로 귀착"되는가?(각주 74번) 표상적 실재성에서 형상적 실재성으로 비약해가는 과정이 매끄럽지 못하게 느껴진다.

Q. 코기토만을 확실하게 취급하는 상황에서 소위 현상과 사물 자체의 구분을 전제하는 '형상적 실재성'과 같은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 타당한가? 차라리 형상적 실재성을 표상적 실재성으로 환원시키는 버클리 식의 서사 전개가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cf. 데카르트는 '관념의 원인'에 대해 아예 함구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관념이 외부에 실재하는, 그것과 유사한 사물로부터 왔다는 검토되지 않은 선입견을 믿지 않겠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예컨대 물고기에 대한 관념이 물고기에 대한 관념과 유사한 실제 물고기로부터 와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최소한 물고기 정도의 실체성을 지닌 무언가를 원인으로 삼아야 한다는 정도에 그친다."(<입문>, p.185)

 그렇다면, 만일 "내 안에 있는 관념 가운데서 그 표상적 실재성이" '나'의 형상적 실재성보다 우월한 것이 있다면 "나 자신이 그 관념의 원인이 될 수 없음이 확실하"고, 따라서 "이 세상에는 나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관념의 원인이 되는 다른 사물도 현존하고 있음이 필연적으로 귀결"된다.(66) 이제 데카르트는 그처럼 커다란 표상적 실재성을 가지는, 그래서 내게서 올 수 없는 관념들의 후보를 검토한다. 우선 "다른 인간, 짐승 혹은 천사"의 관념은 "나 자신, 물질적인 사물 및 신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관념으로부터 합성될 수 있다."(67) 둘째로 물질적이고 생명이 없는 것의 관념에도 '나'의 형상적 실재성보다 우월한 무언가가 포함되어있지는 않다. 물질적 사물의 관념(i+ii+iii)에서 명석 판명하게 지각되는 것은 (i)사물의 제1성질에 대한 관념 및 (ii)그 실체, 지속, 수에 대한 관념뿐이다. 반면 (iii)사물의 제2성질에 대한 관념은 "나에게 아주 애매 모호하게 생각되므로, [...] 관념이 사물이 아닌 것을 사물로 나타"내는 질료적 허위를 범하게 만들 수 있다.(67-68) 예컨대 무언가의 결여에 불과한 것을 마치 "실재적이고 적극적인 어떤 것으로 나에게 나타"내는 관념이 '나'에게 있다면 "그것은 무에서 나"온 것이거나, "극히 적은 [표상적] 실재성만을 나에게 나타"낼 것이다.(68) 따라서 제2성질은 충분히 '나' 자신으로부터 나올 수 있다.* (저런 허위를 범한다는 사실로부터 인간인 '나'가 유한하고 불완전한 존재라는 점이 따라나온다.) (ii)실체, 지속, 수에 대한 관념의 경우 '나' 역시 비록 물질적 사물과 그 속성은 다르지만 동등한 형상적 실재성을 지니는 실체이므로, 나아가 '나'의 지속과 내 생각의 다수성을 이해(직관?)할 수 있으므로 충분히 '나' 자신으로부터 나올 수 있다. (i)사물의 제1성질에 대한 관념의 경우 이 성질들은 모두 "실체의 양태에 불과하므로 그리고 나는 하나의 실체이므로, 그것은 우월적으로 내 안에 포함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69)

*Q. 방금 전만 해도 무로부터는 아무것도 나오지 못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나아가 모든 제2성질이 질료적 허위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무엇보다 허위의 가능성이 크고 애매모호하게 인식된다고 해서, 즉 명석판명한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실재성까지 떨어져야 하는가?

A. 앞의 무는 형이상학적 무, 형상적 무인 반면 지금의 무는 인간의 유한성에서 기인하는 종류의 무, 관념의 조작 가능성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나아가 제2성질에 대한 인식은 말하자면 일종의 사유 양태에 대한 인식이기 때문에 표상적 실재성이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말이 되는 편이다.

 "그러므로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신의 관념뿐"인데, "신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이해하고 있는 바는, 무한하고 비의존적이며, 전지전능하며, 나 자신을 창조했고, 또 다른 것이 존재한다면 그 모든 것을 창조한 실체"이므로 "나 자신에서 나온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 신은 필연적으로 현존한다".(69) 무한실체의 관념은 유한실체에게서 올 수 없기 때문이다. 프랭크스는 "단지 자연적 존재들의 관념을 결합하는 것만으로는 비자연적인 존재의 관념을 형성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정리해낸다. 신의 관념이 본유관념이라고 데카르트가 말할 때 "그의 주장은 모든 사람들이 초월적 존재의 관념을 형성할 수 있는데, 이 관념은 경험을 통해서 발견되거나 우리가 경험을 통해 이전에 얻었던 다른 관념들로부터 형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초월적 존재의 관념을 소유한다는 사실은 자연 세계를 넘어선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증거--그의 표현에 따르면 증명--이다."(<입문>, pp.193-194)

 이에 데카르트는 이와 같은 결론에 반론이 될 만한 이의들을 스스로 열거하고 반박해낸다. 첫째, 무한한 것은 유한한 것의 부정으로서 지각되는 것이 아니다(cf. 흄은 이 반대로 생각한다). "무한한 것에 대한 지각은 유한한 것에 대한 지각보다, 즉 신에 대한 지각은 나 자신에 지각보다 어떤 의미에서 더 앞선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보다 더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이, 다시 말해 나 자신을 이것과 비교하면서 내 결함을 알게 되는 관념이 내 안에 있지 않다면, 내가 [...] 완전한 것이 아님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즉 신에 대한 인식은 정신이 스스로의 유한성을 인식하기 위한 함축된 조건이다.

 둘째, 무한실체의 관념은 무로부터 나올 수도 없다. 무한한 실재성을 포함하는 관념"보다 허위의 의혹을 덜 받는 관념도 없기 때문이다."(70) 모든 실재성을 표현하는 관념이 아무것도 표현하지 못할 리가 없다.(각주 84번 참고) 이제 "실재적이고 참된 것으로, 또 어떤 완전성을 동반하는 것으로 내가 명석 판명하게 지각하는 것은 모두 전적으로" 신의 관념 속에 포함되어있다. 내가 신에 대해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없다고 해도 말이다. 심지어 신에 대한 관념이 "내 안에 있는 관념들 가운데서 가장 참되고 가장 명석 판명한 관념"이다.(71) 내가 명석판명하게, 또 완전성을 동반하는 것으로 지각하는 모든 것이 신 속에 포함되어있기 때문이다.*

*Q. 이 논증은 믿을 만한가? 신에 대한 인식이 어째서 코기토에 대한 인식보다도 명석판명한가? 

A. 보편자와 개별자 같은 관계를 떠올리면 좋을 것 같다. 삼각형의 보편자가 가장 삼각형다운 것처럼, 완전성 자체인 신이 가장 완전하다는 식이 아닐까? 신 안에/신의 존재에 대해 대체 무엇이 불완전하거나 모호, 의심 가능할 수 있겠는가? 또한 만약 x에 대한 판명한 인식이 곧 x에 귀속되는 것과 귀속되지 않는 것을 판별함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라면, 신에게는 그에게 귀속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신의 관념을 직관하는 순간 그것이 판명하게 드러날지 모르겠다. 

 셋째, 무한실체가 가지는 것으로 간주되는 완전성 및 "무한한 정도의 인식"은 잠재적일 뿐 유한실체인 정신에게도 내포되어있다는 이의가 가능하다. 다시 말해 유한실체가 당장은 불완전하지만 완전한 존재가 될 가능성은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신의 관념에는 가능적인 것이란 전혀 없으며, 또 점진적인 증가라는 것도 불완전성의 가장 확실한 징표"이다. "신은 그 완전성에 그 어떤 것도 추가될 수 없을 정도로 현행적으로 무한"한 반면 나의 인식은 "더 이상 증가할 수 없는 데까지 [...] 결코 이르지 못할 것"이다.(72) 마지막으로 "관념의 표상적 존재는 [...] 가능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 즉 형상적인 것에 의해서만 산출될 수 있"다.(73)*

*Q. 이는 왜 그러한가?

cf. 여태까지의 논의를 단순화하면, 데카르트의 (첫 번째) 신 존재 증명은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될 수 있다. ①나에게는 신의 관념이 있다. ②결과가 관념일 경우, 그것이 가지는 표상적 실재성은 그것의 (궁극적) 원인이 가지는 형상적 실재성보다 작거나 같다. ③신의 관념이 가지는 표상적 실재성은 무한하다. ④그러므로 신의 관념의 원인이 가지는 형상적 실재성은 무한하다. ⑤따라서 신은 형상적으로 실재한다(그것도 무한하게, 그러므로 전능, 전지, 전선하게). 많은 연구자들은 신 존재 증명을 경유해 진리규칙의 참됨을 보이려는 데카르트의 시도가 'Cartesian circle'이라 불리는 순환논증에 빠진다고 지적한다. 진리규칙이 참이려면 선한 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데, 선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면 진리규칙이 참이어야--다시 말해 명석판명하게 지각되는 ①과 ②가 실제로도 참이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랭크스는 이와 같은 지적이 데카르트의 논증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다고 일갈한다. 데카르트의 논증은 문제적이지만, 순환적이어서 문제적인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입문>, pp.240-243 참고.

 데카르트는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을 고안해낸다. 일전의 인과론적 신 증명이 "신의 관념[정신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신의 현존을 증명"했다면, 두 번째 인과론적 신 증명은 "정신의 현존에서 신의 현존을 증명"한다.(각주 87번 참고, 강조는 필자) "두 번째 인과론적 신 증명은, 신이 현존하지 않았을 때도 신의 관념을 갖고 있는 정신이 현존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시작된다. 나아가 신 없이도 정신이 현존할 수 있다면 그 현존의 근거 혹은 원인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데카르트는 다시 열거와 제거의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각주 88번 참고)

 이제, "[...] 나는 무엇에서 나왔는가?" 우선 '나' 자신, 정신 자신은 아니다. "내가 만일 내 자신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 그 어떤 것도 나에게 결여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 안에 있는 관념이 지닌 모든 완전성을 나에게 주었을 것이고, 이로써 나 자신이 신이 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나에게 결여되어있는 것이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것보다 더 획득하기가 더 어렵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데카르트는 여기서 재미있는 새로운 반론을 제기한다. 바로 내가 무언가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항상 있었으며, 그래서 내 현존의 작자를 찾을 필요가 없"을 수도 있지 않은가?(74) 그러나 나의 한 순간의 현존은 다른 순간의 현존을 보장해주지 않으며 "이를 위해서는 어떤 원인이 [... 계속해서 ...] 나를 새롭게 창조해야, 즉 나를 보존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 존재하고 있는 나를 조금 뒤에도 존재하게 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지 않다. [...] 그런 힘이 내 안에 있다면 나는 분명히 의식했을 것"인데, 그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존재자에게 의존하고 있다.

*Q.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A. 나에게는 신의 관념 즉 무한실체의, 무한한 완전성의 관념이 있다. 내가 만일 나의, 나아가 이 관념의 원인이라면 내가 그 무한실체일 것이다. 왜냐하면 완전성의 관념의 원인은 완전성 그 자체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완전성 그 자체가 아니다. 따라서 나는 나의 원인이 아니다.)

**Q. 이와 관련된 74쪽을 통째로 이해하지 못했다. 프랭크스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은 이미 존재하는 무언가를 발전시키는 일보다 훨씬 어렵다. 따라서 내가 나 자신을 만들 수 있었다면 나는 나 자신을 완전하게 만들었을 것이다"라고 의미심장하게 요약하는데, 이건 또 무슨 뜻인가?(<입문>, p.196)

A. 내가 신의 관념의 원인으로서 신이라면 신의 관념 속에 들어있는 이런저런 완전성들을 거부하지 않고, 어렵지 않게 획득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Q. 이러한 논증은 주관이 자신이 지닌 능력을 전적으로 투명하게 파악할 수 있음을 전제하는데, 이는 "나에게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런 관념을 산출하는 능력이 내 안에 있을 수도 있"(62)다는 이전의 서술과 모순되지 않는가?

A. 이전의 서술에서의 '나'는 감각하는 나 등 다른 '나'의 다른 정체성들을 함께 고려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사유하는 것이라는 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75)

cf. "지금 존재하고 있는 나를 조금 뒤에도 존재하게 할 수 있는 힘"으로서 파지의 종단지향성

cf2. "신의 활동에는 매 순간 세계가 유지되도록 능동적으로 재창조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리고 세계가 어떤 법칙에 따라 운행된다는 말은 세계 자체가 [신의 지속적인 개입 없이 저절로] 그런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창조 활동을 통해 세계에 부여한 일련의 법칙에 따라 신 자신이 세계를 재창조한다는 말이다."(<입문>, p.201)

 '나', 그것도 신의 관념을 가진 정신을 만들었을, 저 '내가 아닌 다른 존재자'는 누구일까? 이 존재자는 우선 사유하는 것이어야 할 테고, "신이 갖고 있는 모든 완전성의 관념을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다.(75) 이런 존재자는 자신에게서 유래했다면 스스로 신이어야 하고, 다른 곳에서 유래했더라도 마침내는 자신의 궁극적인 원인으로서 신에 이를 것이다. 이 존재자는 '나'가 가진 관념화된 완전성을 "현실적으로 소유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가 저마다 상이한 종류의 완전성의 관념을 부여할 수 있는 이런저런 원인들의 '협력'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그래서 이런저런 완전성들이 꼭 "신이라고 하는 한 존재자 속에 결합되어 있지[는] 않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나'가 가진, 신 속에 있는 완전성의 관념에는 "통일성, 단순성 혹은 분리불가능성"이 포함되기 때문이다.(76) 나의 작자는 따라서 통일성의 관념을 내게 부여할 수 있을 만큼 통일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신의 모든 완전성들에 대한 통일성의 관념은 다른 완전성들의 관념을 마찬가지로 나에게 주는 원인에 의하지 않고는 나에게 넣어질 수 없"다.(76-77)* 마지막으로 '나'가 사유하는 것인 한 그가 부모에 의해 만들어졌거나 보존되고 있을 수는 없다. 부모는 정신이 그에 내재하는 물질에 특정한 성향들을 불어넣어줄 뿐이다. 이렇게 '나'의 현존의 가능한 모든 근거들에 대한 검토를 통해, 신의 관념을 가진 '나'가 현존한다면 "신 또한 현존한다는 것이 아주 명증적으로 증명된다."(77) 그런데 애초에 나는 이런 신의 관념을 어떻게 가지고 있는 것인가? 신의 관념은 외부로부터 와서 감각된 것이 아니고, 내가 조작한 것도 아니다. "나는 이 관념에서 어떤 것도 제거할 수 없고, 추가할 수도 없기에 말이다."(77) 그러므로 신의 관념은 정신 자신에 대한 관념과 마찬가지로 본유적이다.

 *Q. 이 문단을 통째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 논증은 무슨 뜻이며,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 신의 관념만 신에게서 오고, '나' 자신은 다른 존재자에게서 왔을 수는 왜 없는가?

A. 예컨대 전선하지만 전지하지는 않은 조금 모자라는 신이 있고, 전지하지만 전선하지는 않은 또 다른 조금 모자라는 신이 있을 때 전자에게서 전선함의 관념을, 후자에게서 전지함의 관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이 가진 완전성들 중에는 이 완전성들 간의 통일성이 포함되어있고, 나 역시 신이 가진 완전성들의 통일성에 대한 저 관념을 (표상적 실재성이 무한한 관념으로서) 가지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 관념의 원인 역시 실제로 여러 완전성들을 통일적으로--하나의 존재로서--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cf. 프랭크스는 이 대목 전체가 신의 관념이 본유적임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입문>, p.197

 신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완전성을 갖고 있으므로, 기만자일 수 없다. "모든 사기와 기만은 어떤 결함에 의거한다는 것은 자연의 빛에 의해 명백하기 때문이다."(78) 이처럼 선한 신의 참된 존재 덕분에 진리규칙 또한 증명된다. [물론 이 두 번째 증명도 Cartesian circle이 가지는 문제에 노출된다.]

cf. 프랭크스에 따르면 이상의 증명은 데카르트가 단지 검열 당국을 피하기 위해 급조한 것이 아니다. 우선 시대적으로, "과거에 신 존재 문제에 관한 저술은 [...] 신은 존재한다고 전제하고, 이성이 신의 존재를 보이는 데 실패한다면 이는 인간 이성의 부족함을 [...]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입문>, pp.212-3) 이와 같은 생각은 보기보다 비이성적이지 않다. 현대 철학자들이 유물론에 대해 보이는 태도도 이와 비슷하다. "따라서 그[데카르트]의 증명은 이성을 통해 신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신을 확립할 수 있음을 보임으로써 이성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도를 지닌다."(같은 책, p.214) 프랭크스는 데카르트가 실제로 (다만 기계론과 결합하는) 신을 믿는다고 결론 짓는다. 또한 "신 존재 문제는 우리가 이미 아는 것과 같은 수준의 또 다른 무언가가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문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존재의 질서에 속하는 무언가의 존재를 믿을 필요가 있는가라는 문제 또는 세계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문제"이고, 나아가 "세계를 구성하는 부분들이 모두 존재하는가 [...] 보다는 모든 부분들에 더해 전체가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묻는 문제에 더욱 가깝다". 여기에 세계의 보존이 창조와 같은 것이므로 "세계의 창조는 태초에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행되는 과정"이라는 데카르트의 믿음이 더해지면(같은 책, p.219) "신과 창조된 세계 사이의 관계는 정신과 사고 사이의, 또는 물질과 구체적인 물질들 사이의 [...] 관계와 유사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나아간다. "우주는 신의 피조물 또는 생산물이 아니라 신의 계속되는 활동이다. 따라서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계는 중심이 없는 기계론의 체게로 남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가 없는 행위, 소유자가 없는 속성과 같은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 자연법칙은 창조된 물질의 본질이 아니라 신의 창조 행위를 기술하는 것이 된다."(같은 책, p.221) 데카르트에게 과학적 탐구와 신에 대한 인식(심지어 도덕적 인간이 되기 위한 여정도)은 분리되지 않는다.

*

제4성찰 참과 거짓에 관하여

 신은 선한 존재이므로 주관을 기만하지 않을 것이다. 신이 주관에게 부여한 판단 능력 역시, "올바로 사용하기만 한다면 [...] 결코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이렇게 "극단적인 회의주의의 관점이 반박되었으며, 우리가 객관적 지식을 지닐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입문>, p.2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관은 스스로가 무수한 오류를 저지르고 있음을 발견한다. 왜 그러한가? 선한 신이 나에게 "잘못하는 능력"이라도 줬다는 말인가?(81) 이처럼 인간 정신이 저지르는 오류의 원인을 고찰하는 것이 제4성찰의 목표다.

 인간 정신이 저지르는 오류의 근본적인 가능조건은 정신의 존재론적 지위에 있다. 인간 정신은 유한한 실체로서 "신과 무, 즉 최고의 존재자와 비존재자의 중간자(medium)"이다. '나'는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기는 하지만 "무 즉 비존재를 어느 정도 분유하고 있기 때문에, 즉 [...] 많은 것을 결여하고 있"다. 오류 역시 [악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가 신에 의존하는 어떤 실재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결여일 뿐이며, 따라서 내가 신으로부터 잘못을 범하는 능력을 받아서가 아니라 참과 거짓을 구별하기 위해 신이 나에게 부여한 능력[bon sens/raison]이 무한하지 않기 때문에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82, 강조는 필자)

Q. 오류가 결여(있을 것이 없음)일 뿐이며 부정(순수한 없음)이 아니라는 점은 무엇을 보태주는가? 애초에 둘의 차이가 무엇인가?

A. 오류는 결여인 게 맞지만, 단순한 결여 이상으로 <잘못된 판단>, 즉 말하자면 자격 없는 것의 설립을 의미한다. 반면 부정은 <무지>로서, 이와 같은 설립이 없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항상 최선을 원한다는 것은 분명한" 신이 어째서 "내가 결코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나를 창조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는지 묻는다.(82) 이 물음에 대해 그는 무려 다섯 가지 방식으로 인간 정신을 불완전하게 창조한 신을 변호한다. 먼저 ①"그 이유를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e.g.인식의 결핍을 가지는 존재자]을 신이 만들었다고 해서 놀라서는 안" 된다. 인간 정신은 유한하기 때문에 신이 무엇을 왜, 어떻게 만들었는지 투명하고 포괄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에 따라 "[인간 정신에게 투명하고 포괄적으로 파악되지 않는] 신의 목적을 알아내려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기 때문"에, (자연세계를 설명함에 있어 목적인을 활용하기를 거부해야 함과 더불어) 신이 인간 정신을 불완전하게 창조한 목적에 대해서도 비관하거나 나아가 그의 현존을 의심해선 안 된다.(83, 강조는 필자) [이와 같은 겸손함은 인간 정신이 신을 개념화하고 정의할 수 있다는 사실과 양립 가능하다. <입문> pp.198-199 참고] ②"신이 만든 작품들이 완전한 것인지 아닌지를 탐구할 때에, 피조물 하나하나를 따로 분리해서가 아니라 그 전체를 함께 고찰해야 한다".(83, 강조는 필자) 신이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나'는 이 세계의 유일한 존재자가 아니라 작은 일부일 뿐임이--적어도 그럴 가능성이 있음이--분명하므로, 작은 일부인 내가 불완전한 것이 "우주 전체의 관점"(각주 104번)에서는 더 좋은 일일 수 있다. [①과 ②는 모두, 당장 그리고 좁은 시야에서는 불완전해보이는 것이 <사실은> 더욱 진정한 완전성의 일부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기대는 논증 같다.]

Q. 의도적으로 결여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은 신의 '선함'에 위배되지 않는단 말인가? 같은 논리로 신의 사기와 기만 또한 큰 그림 속에서는 악이 아니라 논증할 수 있지 않을까?

A. 물론 신에 대해 알 수 있는 것과 알 수 없는 것, 특히 선악에 대한 인간의 기준이 신에게도 적용되는가 하는 문제--'신인동형론'의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신이 자신의 것만큼이나 광대하고 무한한 의지를 주려다 어쩔 수 없이 오류의 가능성을 열었다고 변호할 수 있을 것 같다.

 ③인간 정신이 저지르는 오류는 (감각을 포함한 인식 능력 일반인) 오성과 의지에 근거하는데, 오성을 통해서는 관념을 지각하고, 의지를 통해서는 지각한 관념에 대해서 판단을 내린다.* 이때 오성 그 자체는 오류의 원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오류는 인식의 결여인데, 오성의 한계--"내가 그것에 대해 어떤 관념도 갖고 있지 않은 사물이 많이 있[음]"--는 결여가 아닌 순수한 부정이기 때문이다. "신이 나에게 준 것보다 더 큰 인식 능력을 주어야 했다는 것을 증명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다.** ④"[...] 신이 몇몇 작품에게 줄 수 있는 모든 완전성을 자기 작품 각각에게 모두 주어야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예컨대 천사는 가진 것을 왜 인간에게는 주지 않았느냐고 떼 쓰는 것은 탐욕스러울 뿐 정당하지 못하다. ⑤나아가 "신이 나에게 충분히 광대하고 완전한 의지 즉 자유의지를 주지 않았다고 불평해서도 안 된다." 오성에 속하는 이해 능력과 기억력, 상상력 등은 유한한 데 비해 의지는 무한한 것으로서 "지금 있는 것보다 더 완전하고 더 큰 것으로 생각할 수 없"게 경험된다.(84) 인간 정신의 무한한 의지는 신이 그것을 자신과 유사한 모습으로 창조했다는 증거다. "의지는 다만 우리가 어떤 것을 할 수 있거나 할 수 없다는 데에 [...] 오성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을 우리가 긍정하거나 부정하고 또 추구하거나 기피할 때에 외부의 힘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면서 그렇게 하는 데에 존립하는 것이기 때문"(85)에 신 속에 있는 의지나, 인간이 가진 의지나 형상적으로는 다를 바가 없다. 이처럼 결정되어있지 않은 것을 정신이 스스로 결정할 때에, 그는 근거나 확실한 경향성을 가지고 그렇게 할 수도 있고 가지지 않은 채로 그렇게 할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에 경험되는 "저 비결정성(indifferentia)은 가장 낮은 단계의 자유이며, 의지의 완전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식의 결함, 즉 일종의 부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참되고 선한 것을 항상 분명히 보고 있다면, 나는 [...] 주저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내가 설령 전적으로 자유롭다고 하더라도 결코 비결정의 상태에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85-86) 쉽게 말해 만일 무엇이 더 낫다고 명석판명하게 인식된다면, 비결정성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으로부터 받은 내 의지력 그 자체는 [아주 광대하고 그 이유에 있어 완전하므로] 내 오류의 원인일 수 없다."(86, 강조는 필자) 인식력도 마찬가지로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기에 그 자체로는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 [③, ④, ⑤는 모두, 신이 우리에게 특정한 능력들을 부여한 과정 및 부여된 능력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는 방향의 논증이다. 다시 말해 신이 잘못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데카르트는 어떤 때에는 의지와 판단을 정신의 서로 다른 능력으로, 어떤 때에는 전자가 후자를 포함하는 것으로 설정한다.

**Q. "지성은 본성상 [진리와 정의 추구를 위해 필요한 도구, 신이 인간 정신에게 준 도구로서] 완벽하지만 범위가 제한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입문>, p.234)

A. 위에서 잘못된 판단으로서의 오류와 무지로서의 부정을 대비했던 것의 연장선에서, 잘못된 판단의 설립을 지성이 명령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따라서 지성은 (사실 완벽하다기보다는)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고 온전하다. 그러나 인간의 지성은 그에 대해 무지한 지점들을 가지고, 그런 의미에서는 신의 지성과 달리 범위가 제한된다.

***Q. ③에서 부정으로 설정된 오성의 한계와, 여기서 부정으로 설정된 근거 없음으로 인한 비결정성 사이의 유사성은 대체 무엇인가?

A. 비결정성 역시 무지로 인한 것이다. 마치 A약초와 B약초 중 무엇이 내 병을 치료해줄 수 있을지 몰라서 결정하지 못하는 상황에서처럼. 비결정의 상태, 즉 무지의 상태에서 섣불리 두 약초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그때는 비로소 오류가 성립할 것이다.

****Q. 비결정성의 문제를 갑자기 왜 논하는가? 비결정성이 자유의지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라는 데카르트의 주장이 그의 논증에 보태주는 것은 무엇인가?

A. 비결정성이 관여되어있는 사태, 즉 판단의 근거 및 명석판명함의 정도가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말하자면 무작정 의지하고 판단해버리는 것이 오류의 원인이므로. / 나아가 제한적인 오성과 무제한적인 의지 사이의 간극을 미리 부각하는 효과가 있다. 비결정성이야말로 오성이 제한되어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 현대인만의 통념일 순 있겠지만, 비결정성[의 느낌]이야말로 자유의지의 진정한 모습이라는 통념을 반박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자유의지의 진정한 모습은 명석판명하게 지각하는 것을 선택하는 경우에 드러난다.

*****Q. ③과 차이가 있는가?

A. 다른 논증 같다. ③은 표면적으로 불완전, 즉 그 적용 범위가 (일시적으로) 제한된다고 해서 오류의 원인인 것은 아니라는 논증이고 여기는 신의 선물이기 때문에 오류의 원인이 아니라는 논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류는 신의 잘못이 아니라 "의지의 활동 범위가 오성보다 더 넓기 때문에, 내가 의지의 활동을 오성에 의해 인식된 범위 안에 묶어 놓지 못하고, 오히려 인식하지도 않은 것을 향해 의지를 작동시키는 데에서 비롯된다. 이런 것에 대해 의지는 비결정성의 상태에 있으므로 참된 것과 선한 것에서 쉽게 벗어나고, 이로써 나는 오류를 범하고 죄를 짓는 것이다."(86) 쉽게 말해 잘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서 성급하게 의지하고 판단해버리기 때문에, 즉 그 자체로는 아무 문제가 없고 완전한 오성과 의지를 인간 정신이 잘못 사용하기 때문에 오류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은 앎은 제한되어있지만, 의지 자체는 무엇에 대해서든 의지할 수 있는 탓에 가능하다. 반면 인간 정신이 잘 아는 것, 즉 명석판명하게 지각하는 것--예컨대 감각적 지식이나 기억 등과 달리 "이성적 탐구를 통해 확립한 자연의 불변하는 ㅅㅏ실들 또는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들--곧 자연법칙이나 신과 인간 그리고 세계의 본질에 관한 기본적인 형이상학적 진리"(<입문>, p.237)--에 대해서는 비결정적인 태도를 덜 취하게 되고, 도리어 "더 자발적이고 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 [애초에 명석판명하게 지각하거나] 어떤 것이 참인지를 내가 충분히 명석 판명하게 지각하고 있지 않을 때에는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자, 오류를 피하는 방법이다.(87, 강조는 필자) 인간 정신은 의지의 결정보다 오성의 지각을 먼저 충분히 확보하려는 습관을 길러야 자유의지를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다.

cf. 일단 의지해봄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는 것들도 있지 않을까?(S씨) --> 의지와 인식 사이의 현상학적 순환. 낮은 능동성의 단계에서 본능을 발휘하며 의지해야 비로소 지성적 지향성을 발휘할 수 있으며, 지성적 지향성을 발휘 즉 객관화적 작용을 행해야만 높은 능동성의 단계에서의 의지를 포함하는 비객관화적 작용을 행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신을 변호하는 여정이 마무리되고, 이제 데카르트는 그처럼 변호된 신이 내린 결정--인간이 오류를 범하는 것을 내버려두기로 한 것--에 대해 불평할 이유가 없음을 논증한다. [오류의 원인이 인간에게만 있다는 논증과, 오류의 원인이 인간에게만 있다는 데 대해 불평할 수 없다는 논증은 상이한 논증이다.] 첫째, "신이 지금의 것보다 더 큰 이해력 혹은 자연의 빛[오성]을 나에게 주지 않았다고 불평할 이유는 없다." 누군가 나에게 말하자면 순수한 선의로 가나 초콜릿을 주었는데, 어째서 고디바 초콜릿으로 주지 않았느냐고 불평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시쳇말로, 호의의 산물과 권리를 구분하며 살자!) 둘째, "[...]신이 활동 범위가 오성보다 더 넓은 의지를 나에게 주었다고 불평할 이유도 없다. 의지는 한 가지 것, 이른바 분할될 수 없는 것이고, [...] 사실 의지가 광대하면 할수록 그것을 나에게 준 신에게 더욱 감사해야 한다." 셋째, "내가 잘못을 범하는 의지 작용 즉 판단을 불러일으키는 일에 신이 협력하고 있다고 불평해서도 안 된다."(89) 판단 작용 그 자체는 신에 의존하는 것으로서 참되고 선하며, 주관이 그것을 가진다는 것은 주관의 완전성을 더하는 일인 데다, 애초에 신은 내 오류와 죄에 협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류와 죄는 결여로서 실재적인 것이 아닌데 어떻게 신이 그것의 원인일 수 있겠는가?

cf. 모든 존재자는 선한 조물주의 피조물로서 참되고 선한데, 다만 더 선한 것이 아닌 덜 선한 것으로 향하는 '의지의 전도/배향'이 곧 악이라는--그러므로 악은 (마니교도들의 생각과 달리)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고 오직 인간에게만 귀속된다는--아우구스티누스의 변신론이 연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는 신이 어째서 명석판명한 지각을, 적어도 명석판명한 지각이 없으면 판단을 보류하는 습관이라도 인간 정신에게 주지 않았는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만일 주관이 결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면 지금보다 더 완전한 존재자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제기한다. 그러나 우주의 일부는 오류를 범하고, 일부는 범하지 않는 것이 모든 부분들이 "한결같이 비슷할 때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주 전체에 있어 그 완전성이 더 크"다.*(89) 게다가 '나'가 가장 완전한 존재자라는 역할을 부여받지 않았다고 해서 불평할 권리도 없다. 요컨대 인간 정신에게 주어진 유한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온전하며 신에게 (불평은 가당치도 않고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이유가 되는 오성과 의지의 능력들을 활용함에 있어 "오성이 명석 판명하게 보여주는 것에만 판단을 내리도록 의지를 묶어" 두고 그것을 "애매 모호하게 파악한 것과 분리시키"는 것이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이다.(90)

*Q. 어떨 때는 통일성이 완전성의 증거이고, 어떨 때는 다양성이 완전성의 증거란 말인가?

A. 신은 통일된 존재여야 완전하지만, 세계는 다양성을 품는 편이 더 완전하다?

 요컨대 4성찰은 악령의 가설, 가장 극단적인 회의주의를 물리친다. 그리고 "우리가 이성의 길에, 달리 말해 과학의 길에 따를 경우 그리고 오직 그럴 경우 어떻게 객관적인 지식이 가능한지를 보인다."(<입문>, p.23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프리오리적인', 반경험적인, 반과학적인, '이성주의적' 인식론을 지니고 있지 않"은데, 경험적 증거들로부터만 비로소 자연의 사실들이 발견될 수 있으며 "과학적 사고에 포함된 논리적 추론 [능력] 자체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지만 이런 추론을 통해 도출된 결론은 이 추론과 같은 정도의 확실성을 지니지 않는다는 점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같은 책, p.253)

*

제5성찰 물질적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그리고 다시 신이 현존한다는 것에 관하여

 이제 데카르트는 주관이 가진 물질적 사물의 관념 가운데 판명한 것을 찾아내 주관 외부의 물질적 사물에 대해서도 확실한 지식을 찾고자 한다. 물질적 사물의 관념 가운데 판명한 것은, 그 사물들이 연장을 가진다는 것이다. 주관은 그것의 "다양한 부분들을 셀 수 있고, [...] 크기, 모양, 위치 및 장소 운동을, 또 이 운동에게 온갖 지속을 귀속시킬 수 있다."(91) 이때 물질적 사물이 (만일 실제로 현존한다면) 연장을 가지는 것(res extensa)이라는 인식은 본유적인 관념이다.

cf. 프랭크스에 따르면 유의할 것은 물질의 본성에 대한 논의가 외부 물질세계의 존재에 대한 증명 이전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데카르트에게는 전자가 이루어지기 위해 후자가 선행될 필요가 없었다. "우리가 물질세계를 경험하기 위해 그 세계가 실제로 존재할 필요가 없"으며 "물질의 존재에 대한 나의 지식과 전혀 무관하게 [물질세계에 대한] 나의 경험에 대한 지식을 지닐 수 있"다. 과학을 위해 요구되는 관찰은 물질세계가 실존하지 않더라도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꿈의 가설에서 "물질세계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인정하면서 직면했던 상황과 동일하다."(<입문>, p.262)

 데카르트는 잠시 주의를 돌려, 연장을 가지지 않을 수도 있고 "외부 어디에도 현존하지 않을 수 있으나" 그럼에도 어떤 것이기는 한 것들에 대한 관념에 주목한다.* 예컨대 삼각형 같은 도형은 그 현존과 독립적으로 "특정한 본성, 본질, 형상이 있고, 이것은 불변하고 영원한 것이지 내가 고안해서 만들어 낸 것도, 나에게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92) 이런 도형에 대한 관념을 비롯해 "모양이나 수에 관한 진리나, [...] 수학에 속하는 진리 모두는" 감각 기관을 통해 들어온 것이 아닌--왜냐하면 결코 감각을 통해 접했을 리 없는, 예컨대 클라인의 병과 같은 말하자면 이념적 대상들에 대해서도 그것의 이런저런 특성을 증명해낼 수 있으므로--확실하고 참된 지식이다.

*프랭크스는 이를 "세계를 파악하면서 사용하는 범주들"(<입문>, p.257)로 개념화하고, 이것들이 본유적인 관념임--감각된 것도, 조작된 것도 아님--을 강조한다.

 데카르트는 이처럼 x에 대한 관념이 주관에게 있고, x는 y를 본질로 가질 수밖에 없음이 명석판명할 경우 y가 실제로 x에 속한다는 논리를 신에게도 적용한다. 주관은 신, 최고로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을 가지고 있으며 "항상 현존한다는 것이 신의 본성에 속하고 있음도 마찬가지로 인식한다. 그러므로 내가 지난 며칠 동안 성찰했던 것이 모두 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신이 현존한다는 것은 수학적 진리가 갖고 있는 것과 적어도 동등한 확실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94) [최고로 완전한 존재자가 존재를 결여한다는 것은, 즉 이 의미에서 불완전하다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존재론적 신 증명에 데카르트는 가능한 반박들을 스스로 제기한다. 첫째, 일반적으로 현존과 본질은 분리되므로 신에게서도 마찬가지라는 반박이다. 그러나 신의 경우 그의 현존은 그의 본질과 분리될 수 없다. "현존하지 않는 [...] 신을 [...] 생각하는 것은 골짜기 없는 산을 생각하는 것 못지않게 모순이다."(95) 둘째, "신을 현존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신이 현존한다는 것은 귀결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내 생각은 사물[사태]에 어떠한 필연성도 부과하지 않기 때문이다."(96, 강조는 필자) 쉽게 말해 '저렇게 생각하는 것'이 모순일 뿐 실제로도 그러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그러나 데카르트는 신의 경우 "신을 현존하는 것으로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에서는 현존은 신과 분리될 수 없으며, 따라서 신은 실제로 현존한다는 것이 귀결"된다고 말한다. "현존이 없는 신을 [...] 생각하는 것은 내 자의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귀결은 자의적이지 않고 사태의 필연성에 따른 것이다.(96)** 셋째, "현존은 완전성 가운데 하나"라고 가정할 경우에만 증명이 성립하는데, 그 가정이 필연적으로 참되지 않다는 반박이다. 즉 타당하지만 건전하지 않은 논증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존은, 언제 그것을 깨닫게 되든지 간에***, 완전성에 포함된다.

*적어도 진리규칙은 참이어야 할 것 같다.

**Q. 신만 예외적으로 그러한 것인가, 아니면 현존을 본질로 가지는 모든 대상에 대해 실제적 현존이 귀결되는가? cf. 가장 완전한 섬 아틀란티스(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신 증명에 대한 가우닐로의 반박)

A. 안셀무스는 (가우닐로가 그렇게 이해한 것처럼) '최고로 완전한 모든 것은 존재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원리를 주장한 적이 없다. 다만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생각될 수 있으며, 그렇다면 그것은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Williams, Thomas, "Saint Anselm",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Winter 2020 Edition), Edward N. Zalta (ed.), URL = <https://plato.stanford.edu/archives/win2020/entries/anselm/> 참고. (저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섬 따위일 리는 없다.)

A2. (항상) 현존함을 본질로 가지는 것은 신뿐이라거나, '가장 완전한데 신은 아닌 x'가 성립한다는 식의 반론이 가능하지 않을까? 5성찰을 더 세심히 읽어보기는 해야 할 것 같다.

 cf. 데카르트는 안셀무스, 신플라톤주의를 따라 신을 (성경에서 종종 인격화되는 신과 달리) '존재 자체'와 동일시한 것 같다. (<입문>, p.277 참고.) 최고로 완전한 '존재자'가 존재 자체라는 생각은 꽤 설득력 있기도 하다.

***Q. 이 논증을 위해서 깨달음의 시점에 대한 언급이 왜 요구되는 것인가?

A. 가정의 참됨을 따지는 일이 요구된다면, 그 따짐/증명의 시점이 요구된다. 그러나 그 가정의 내용은 본유적인 관념에서 오므로, 언제든 생각하기만 하면 증명할 수 있다, 즉 증명의 부담이 덜하다.(J씨) / 신에 관해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는 필연성은 없지만, 실제로 주의깊게 생각하게 된다면, 신이 유일하게 현존함을 알 수 있다.(<입문>, p.263 참고)

cf. 존재론적 신 증명에 따른다면 무신론자는 단지 신의 개념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사람에 불과해진다.(<입문>, p.267 참고)

 신의 관념은 본유적인 것으로서 "내 생각에 의존하는 어떤 허구적인 것이 아니라 참되고 불변하는 본성의 상"이다.(98) 나는 신에게서 내가 자의적으로 고안하거나 조작할 수 없는 많은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의 본질에는 현존함, 유일함, 영원히 현존함이 필연적으로 포함되며, 완전한 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가장 우선적이고(아무것에도 의존하지 않음) 쉬우며 분명한(가장 판명함) 인식이다. (코기토에 대한 인식마저 신에 대한 인식에 의존한다.*) "나아가 다른 모든 것의 확실성도 이것에 의존하며, 이것 없이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완전하게 알 수 없"다.(99, 강조는 필자.)** 이와 관련해 데카르트는 정신의 본성 두 가지를 언급하는데 첫째는 "어떤 것을 아주 명석 판명하게 지각하고 있는 동안은 그것이 참임을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둘째는 그럼에도 시간이 흘러 주의력 또는 집중력이 떨어지면 "전에 내린 [명석판명하지 않은] 판단의 기억이 종종 다시 나타난다는 것"이다.(99) 둘째 특성으로 인해 주관은 다시 회의에 빠져들 수 있지만, 이전의 성찰들의 결론을 상기하면 그 "어떤 반대 입장이 제시될 수" 없는 명증한 증명들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100) 이와 같은 기억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도 신 덕분이다. 신의 존재가 비로소 단순한 의견을 가지는 일 이상으로 진리에 대한 인식을 가능케 한다.

*Q. 코기토의 특성 중 하나인 유한성 말고 코기토의 '존재' 자체는 신의 존재만큼이나 똑같이 명석판명하지 않은가?

A. 신이 그를 창조하지 않으면 코기토가 현존할 수 없기 때문에 위계가 있지 않을까? / 데카르트에게서는 유한성과 존재함을 서로 분리할 수 없을 것 같다. 인간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유한실체로서의 존재이다.

Q2. 정말 그런가? 신이 당장 사유하고 있는 나를 '창조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가정할 수 있을까? 가능해 보이면서도 불가능하게 보인다.

A. 2성찰의 단계에서는 가능하겠지만, '나'의 기원의 작자를 알아낸 3성찰 이후부터는 불가능하다.

**Q. 이는 진리규칙 때문인가?

A. 그런 것 같다. 실제로도 참된 것이어야--즉 창조되었어야--명석판명하게 지각할 수 있을 테니 신의 창조에 의존해야만 어떤 것에 대해서든 완전한 앎이 가능하지 않을까?

cf. 프랭크스에 따르면 데카르트는 제1성찰에서 회의된 "일상적 경험의 [...] 세계"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세계를 전적으로 새로운 눈, 정신의 눈, 신의 관점에서 보기를 촉구한다. 이제 세계는 "기계론적 상호작용을 규정하는 세 개의 결정론적 법칙을 통해 모든 물리적 현상이 설명되는 물질적 연속체"로서 그 안에는 분리된 물리적 대상도, 진공도 없다. 주관적으로만 지각되는 성질 또는 가치도 더 이상 고려되지 않으며, 세계는 오직 제1성질들과 관련해서만 기술되고 수학적 용어로만 표현된다.(<입문>, p.259) 그러므로 제5성찰은 세계가 객관적으로는 어떤 모습을 가지는지에 대해 개괄하고, 신 존재 증명을 통해 (아프리오리한 개념들의 세계뿐만 아니라) 자연세계에 대해서마저 객관적 지식의 가능성을 확보하는 작업이다.(같은 책, p.267 및 287 참고)

*

제6성찰 물질적 사물의 현존 및 정신과 물체의 실재적 상이성에 관하여

 5성찰의 논의를 통해 "물질적 사물이 순수 수학의 대상[연장 등 제1성질만 가지는 대상]인 한에서는 현존할 수 있음"이 밝혀졌다. 이는 주관이 명석판명하게 지각하는 것은 실제로 참이라는 진리규칙 덕분이었다. 그렇다면 물질적 사물의 본성뿐 아니라 물질적 사물의 현존 일반 또한 증명될 수 있을까?

 우선 데카르트는 물질적 사물 일반은 상상력을 통해 고찰된다고 지적한다. 상상력은 "인식 능력에 직접 현전하는, 따라서 현존하는 물체에 대한 인식 능력의 한 적용"으로 정의된다.(102, 강조는 필자) 상상력은 순수오성과 구별되는데, 순수오성 또는 지성을 발휘할 때와 달리 "어떤 것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어떤 각별한 영혼의 긴장이 필요하"며, 그와 같은 긴장을 동원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상상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천각형처럼 정신의 눈으로 이해하기는 해도 마치 눈앞에 "현전하는 것처럼 직관할 수는 없"는 대상들이 그 증거다.(103)* (반면 개념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무엇이든 언제든 그에 대해 순수오성을 통해 인식할 수 있다.)

*같은 개념에 대해 서로 다른 상을 떠올리는 경우나, 상을 떠올리기 힘든 개념들(e.g. 수요일)의 존재 역시 두 능력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게 해준다. <입문>, p.281 참고.

 그런데 상상력은 "그것이 이해력과 구별되는 한, 나 자신 즉 내 정신의 본질에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103) 상상력 없이도 나는 동일한 존재로 남기 때문이다. 상을 만드는 것은 근본적으로 "육체의 사건"이다.(<입문>, p.281) "따라서 상상력은 나와는 다른 것에 의존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정신 외부에 현존하는 물체이다. "정신 자신에게로 향하여 자신 속에 내재되어 있는 어떤 관념을 고찰하는" 순수오성과 달리 상상력의 작용은 "물체로 향하여 자신에 의해 이해된 관념이나 감각에 의해 지각된 관념과 상응하는 어떤 것을 물체 속에서 바라본다".(103, 강조는 필자) 이처럼 상상력의 성립은 물체의 현존을 전제하므로, 그리고 상상력은 성립하므로 "이로부터 나는 개연적으로 물체가 현존한다는 것을 추측하지만, 이는 단지 개연적일 뿐이다."(104)

Q. (사유 일반이 아닌) 이해력이 언제부터 내 배타적인 본질이었나?

A. 이해력이 없으면 정신이 자신이 정신임을, 나아가 진리규칙을 명석판명하게 인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실제로 참되게 존재함을 인식할 수 없다.

Q2. 그건 인식의 문제지, 존재로까지 이어지는가?

Q. 2성찰까지만 해도 감각능력과 상상능력을 내 본질로 인정하지 않았나?

A. 사유의 양태로서 인정해주는 것과, 정신의 본질이라는 것은 다른 문제다. / 지성과 감각, 상상력 사이의 관계에도 유의해야 한다. 지성 덕분에 나머지 두 능력이 작동하고 인식 가능하다. 

Q. 왜 개연적일 뿐인가?

A. 상상력이 그에 의존하는 '나' 아닌 무언가가 외부의 물체라는 가정부터가 아직 필연적 참이 아니다. 최선의 추론일 뿐.

 데카르트는 물체의 현존을 확실하게 증명하기 위해 상상력이 아닌 감각능력으로 관심을 돌린다. 주관의 감각능력은 신체, 그에게 이롭거나 해로운 여러 물체들, 쾌락과 고통, 허기나 갈증 등의 욕망, 정념 등을 감각할 수 있게 해준다. 특히 제2성질에 대한 감각을 통해 상이한 물체들을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데, 이 감각들이 "내 동의 없이 주어진다는 것" 즉 수동적이며*, 조작된 관념보다 "더 생생하고 선명하며 또 그 나름대로 더 판명했기 때문에 그런 관념이 나 자신에게서 유래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 그래서 그런 관념은 나와는 다른 사물로부터 [그 사물과 유사한 것으로서]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106)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 및 스콜라철학자들은 심지어 "감각 속에 먼저 있지 않았던 어떠한 관념도 지성 속에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107) 이에 데카르트는, 앞서 이미 반박했듯이, 감각적 인식은 외적 감각이든, 내적 감각이든(e.g. 환상지) 의심스러운 데다 꿈의 가설과 악령의 가설을 거치면 완전히 믿을 만하지 못한 것으로 전락한다고 지적한다.

*프랭크스는 내가 감각내용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 내가 감각내용의 원인이 아니라는 증명이 되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입문>, pp.288-289)

 그러나 코기토와 신의 존재에 대한 명석판명한 지각 및 그에 기반한 진리규칙의 설립을 경유한 현재의 단계에서는 감각적 인식의 신뢰성을 재검토해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 데카르트는 첫째로 물질과 정신 사이의 상이성을 증명한다. "어떤 것을 다른 어떤 것 없이 명석 판명하게 인식하기만 하면, 어떤 것이 다른 것과 상이하다고 충분히 확신할 수 있다. [...] 한편으로 내가 오직 사유하는 것이고 연장된 것이 아닌 한에서 나는 나 자신에 대한 명석 판명한 관념을 갖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물체가 오직 연장된 것이고 사유하는 것이 아닌 한에서 물체에 대한 명석 판명한 관념을 갖고 있으므로, 나는 내 신체와는 실제로 다르고, 신체 없이 현존할 수 있다".(109)* [따라서 영혼은 불멸하고 신체에서 해방된 영혼들의 동네인 내세도 존재하니 도덕적으로 살자.]

*Q. x와 y가 다르다고 해서 x가 y 없이 또는 y가 x 없이 현존할 수 있다는 것이 귀결되는가?

A. 단순히 다른 게 아니라, y 없이도 x의 존재가 성립 가능하며 vice versa라는 것이다.

Q2. 현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렇게 현존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까? 후자에 이르지 못해도 데카르트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 "둘 중 하나가 다른 것 없이도 존재하는 일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는" 주장은 너무 약하다.(<입문>, p.286)

A. 데카르트는 단일속성테제, 즉 충족이유율에 따라 하나의 실체는 하나의 (본질적) 속성만을 가져야 한다는 테제를 옹호했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만일 사유가 정신의 본질적 속성일 경우, 연장은 본질적 속성이 아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예 아니다.

 둘째, 상상과 운동, 감각능력은 사유하는 것으로서의 '나'에 의해서만 비로소 인식되기는 하지만* '나'와 구별되고 분리 가능하다. 특히 수동적인 감각 능력이 작동하는 경우, "감각 관념을 산출하거나 야기하는" 무언가가 그 감각관념의 원인이어야 할 텐데, 주관에게는 그와 같은, 주관의 지성과도 의지와도 무관한 능동적 산출 능력이 없기 때문에--이를 알리기 위해 물질과 정신 사이의 상이성을 증명한 셈이다--그런 능력은 "나와는 다른 실체 속에 있어야 한다. [...] 이 실체는 이 능동적 능력에 의해 산출된 관념 속에 표상적으로 있는 실재성 전체를 형상적으로 혹은 우월적으로 내포하고 있"어야 하기도 하다. 감각관념의 원인으로서 이와 같은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실체는 무엇일까? 먼저 신은 아니다. 그는 기만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감각관념의 표상적 실재성을 형상적으로 혹은 우월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다른 피조물(e.g. 물질의 천사 😇)도 아니다. "신은 이런 것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을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물질적 사물이 곧 감각 관념의 원인이라는 "커다란 경향성을 주었기 때문에, 감각 관념이 만일 물질적 사물이 아닌 다른 것에서 유래한다면, 신이 기만자가 아니라고 이해될 수 있는 까닭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각관념의 원인으로서] 물질적 사물은 현존"한다.***(111, 강조는 필자) 

*"감각들의 집합은 우리의 정신이 두뇌의 상태를 의식한 것"이다. 즉 감각능력은 지성에 의존한다. <입문>, p.282, 강조는 필자.

**이 논증은 바로 이어지는 논증과 별도로 성립하지 않고 그에 기대는 것 같다.

***Q. 이 경우 모든 경향성이 (신을 기만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 인정되어야 한다는 위험한 귀결을 낳지 않는가? 어째서 어떤 자연적 충동은 거부되고 어떤 자연적 충동은 인정되는가?

cf. 이 증명은 전반적으로 불만족스럽다. "제6성찰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어떤 상황에서 어느 범위로 자연스러운 것[물체의 존재에 대한 자연스러운 믿음]이 우리를 속일 수 있는가가 논의의 대부분을 차지한다."(<입문>, p.289)

 이제 데카르트는 물체의 본성과 존재로부터 나아가, "특수한 물리적 사실에 대한 지식" 역시 확보 가능한지 따진다.(<입문>, p.290) 감각관념은 "종종 애매 모호"하므로, 관념대로 그 관념의 원인이 실재하지 않을 수 있다. (나의 정신은 육체를 오성적으로 관찰하지 않고, 도리어 느끼며 감각한다. 감각은 육체의 사건들에 대한 정신의 인식 결과일 뿐인데, 그것이 세계의 모습을 실제로 반영한다고 생각하면 오류가 생길 수 있다. <입문>, p.290 참고) "그렇지만 적어도 내가 명석 판명하게 인식하는 것, [...] 순수 수학의 대상에 속하는 것은 실제로 물질적 사물 속에 있는 것이다." 명석판명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제2성질 등의 경우에도 "내 의견 속에 어떤 허위가 있으면, (지성을 통해) 이를 교정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선한 신이] 나에게 부여했을 것"이다.(111) 나아가, 자연 일반은 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서 그 안에 진리에 대한 희망과 나름의 가치가 놓여있다. 자연에 따르면 (i)'나'는 신체를 가지며, (ii)"고통, 허기, 갈증 등과 같은 감각을 통해 [...] 신체와 일체를 이루고 있"다.* 나아가 (iii)어떤 물체들은 "추구해야 하지만 또 어떤 것은 피해야" 한다.(112) 물체들은 모두 똑같지 않은데, 각각으로부터 "내 전체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롭거나 이롭지 않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물론 자연의 가르침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섣부른 판단의 산물로서 주관을 속이는 것들이 많다(e.g. 진공). 이에 데카르트는 이 맥락에서의 '자연'을 세계 일반도, 논리 또는 자연적 법칙도 아닌 "신이 정신과 신체의 합성체로서 나에게 부여해 준 것"이라는 의미로 한정한다.(113) 이 자연은 "고통의 감각을 초래하는 것[유용치 못한 것]을 기피하고, 쾌락의 감각을 가져다 주는 것[유용한 것]은 추구하라고 나에게 가르쳐"줄 뿐, 잘못된 판단을 야기하는 후천적 습관과도, 순수오성과도 구별된다.(각주 165번 참고) 다시 말해 "감각적 지각이란 본래 정신을 한 부분으로 갖고 있는 합성체에게 무엇이 이롭고 이롭지 않은지를 정신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물체의 본질에 대해선 애매 모호한 인식만을 가져다주므로 그것을 통찰하기 위한 도구로 쓰면 안 된다.(114, 강조는 필자)

*Q. 허기나 갈증의 감각은 왜 '애매'한가? 충분히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지 않은가?

A1. 모호하다, 즉 의심 가능하단 뜻으로 쓰인 게 아닐까?

A2. 생생해도 주의되지 않을 수 있단 뜻으로 쓰인 게 아닐까?(S씨)

 그러나 이로운 것은 추구하고, 해로운 것은 기피하도록 하게 해주는 자연[적 경향성]은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인간의 본성적 유한성으로 인해 자연은 종종 사실은 해로운 것을 이로운 것으로 착각하고 추구하게 만든다. 예컨대 수종에 걸려 물을 마시면 안 되는데 자꾸 갈증을 느껴 물을 마시는 환자의 경우, 그의 자연[적 경향성]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하는/하면 좋은 바대로 하지 않고 있으므로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자연'으로부터 빗나가있다. 그럼에도 자연법칙은 완벽하게 따르고 있으므로 신이 기만을 행하고 있다거나, 사물 자체의 진리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저 빗나감 또는 타락은 말하자면 신체의 관점에서 유래한 은유에 불과하다. 하지만 정신과 신체의 합성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진정한 오류"가 맞다.* "따라서 이제 고찰해야 할 것은, 신이 선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이해된 자연이 잘못을 범하는 것을 신은 왜 방치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117, 강조는 필자)

*Q. 두 관점의 차이=? 

A. 신체는 완전히 수동적인 기계로서 타락하고 자시고 할 여지가 없다. 반면 정신이 포함된 합성체는 오류판단을 내릴 수도 있고 물론 교정의 능력도 있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데카르트는 자신이 깨달은 바 네 가지를 열거한다. 첫째, 물체와 정신의 상이성을 새로이 증명하는데, "물체는 본성상 언제나 가분적인 데 반해, 정신은 전적으로 불가분적이다."(118) 사유하는 것인 '나'는 그 어떤 부분도 가지지 않으며, 부분들로 구별될 수도 없고, 신체와 합일되어있다고는 하나 신체의 부분을 떼어낸다고 해서 특정한 능력을 잃지도 않는다. 상이한 능력들을 발휘할 때조차 일자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둘째, 경험적으로 봤을 때 "정신은 신체의 모든 부분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뇌로부터, 혹은 아마 뇌의 아주 작은 부분, 즉 공통 감각이 들어 있는 뇌 부분으로부터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셋째, 신체의 한 부분(A)이 중간의 어느 부분(B)을 거쳐 다른 부분(C)에 영향을 미칠 때, B만 자극되어도 마치 A로부터 자극이 온 것처럼 신체는 느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발을 절단하여 실제로는 발에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닌데, 발은 아니지만 발이 뇌에 영향을 미칠 때 거쳤던 경로의 중간지점을 자극하면 마치 발에 고통이 있는 것처럼 느끼는 일이 가능하다. 넷째, 뇌의 각 운동은 정신에 저마다 하나의 감각을 전달하는데, 뇌가 "인간의 건강 유지에 가장 도움이 되는 감각만을 전달해 준다면"(119) 바람직할 것이고 실제로도 '대체로' 그렇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물을 마시는 것이 건강에 유익할 경우 뇌는 갈증의 감각을 정신에 전달해준다. "따라서 감각들 속에는 신의 능력과 선성을 보여주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과 신체의 합성체인 인간의 본성은 종종 잘못을 저지른다"만, 잘못을 저지를 때보다 저지르지 않을 때가 더 많고, 때때로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항상 잘못을 저지르는 것보다는 사정이 낫다.(120) 

 감각이 인간을 보존하는 데 기여할 뿐 아니라 대체로 신뢰할 만하다는 것은 이제 오성과 기억력 등을 통해 언제든 재인식할 수 있다. 이제 이전 성찰들의 과장된 회의는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치부할 수 있다. 예컨대 꿈의 가설도 논박될 수 있는데, "깨어 있을 때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기억에 의해 다른 모든 삶의 활동과 결부될 수 있지만, 꿈 속에 나타나는 것은 결코 그럴 수가 없다". 그 자체로 지속하고, 삶의 다른 토막들과 자연스럽고 정합적으로 연결되며, 그 등장을 판명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들은 꿈이 아닌 현실에서 지각된 것이다.* "그리고 내가 모든 감각, 기억, 오성을 동원하여 이것들[지각들]을 검토하고 난 뒤에도, 이것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나머지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면, [신은 기만자가 아니므로] 이런 것의 진리성을 의심할 필요가 조금도 없다."(122) 요컨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충분한 양의 자료들을] 주의깊게 검토한다면 나는 내 주변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특수한 사실과 사건에 대해서도 신뢰할 만한 [객관적인] 지식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입문>, p.291)" 그러나 실생활에 있어 긴박하게 행동해야 하는 우리는 이런 것들을 세심하게 검토할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하므로 삶의 개별적인 일에 있어 오류를 범하게" 되며 따라서 우리의 본성은 약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122) <성찰>은 이렇게 새롭게, 객관적 이성으로써 재정의된 세계 내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여전히 미미한 위치에 대한 자각으로 막을 내린다.

*Q. 이 논증은 왜 이제야 성립하는가? 전에는 기억을 신뢰하지 못했어서?

A. <입문>, pp.293-4 참고. 이제 와서는 별다른 문제거리가 안 된다는 것이 프랭크스의 답변이다.

cf. 후설과의 차이 ①판단 중지가 아닌, 적극적인 부정이나 가정을 감행한다는 점. ②‘나’의 인간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 ③... 궁금한 게,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정말 후설이 비판하는 대로 세계 속의 심리적인 주관에 불과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