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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게르망트 쪽 1 발췌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5: 게르망트 쪽 1

효창공원 앞 노츠에서

  여태까지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신성시의 계속된 실패로 특징지어졌다. 발베크 성당의 신성함이 전단지와 선거 포스터에 의해 훼손되었고, 배우 라 베르마의 재능에 대한 몽상이 현실에서의 연극 관람에 의해 흩어졌으며, 게르망트 공작 부인에 대한 환상이 사교계에서의 은밀한 권력다툼 가운데서 깨어졌다. 발췌한 부분은 라 베르마에 대한 화자 마르셀의 생각을 보여준다. 모든 강조는 나의 것이다.


 "⎡페드르⎦와 '고백 장면'과 라 베르마는 당시 내게 있어 어떤 절대적인 실존을 의미했다. 일상적인 경험의 세계로부터 물러난 그 실존은 그 자체로 존재하여 내가 그쪽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아무리 내 눈과 영혼을 크게 뜨고 깊숙이 그 안으로 꿰뚫고 들어간다 해도 나는 여전히 적은 것밖에 흡수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삶은 얼마나 상쾌해 보였던가! 옷을 입거나 외출 준비를 하는 순간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보내는 삶의 무의미함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저 너머에는 절대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는, 그 선하고 접근하기 힘들며 전부를 소유하는 게 불가능한 보다 견고한 현실인 ⎡페드르⎦와 '라 베르마가 말하는 방식'이 있었으니까. 무대 예술의 완벽함에 대한 몽상으로 포화상태에 빠진 나는--만약 누군가가 당시 낮이나 또는 어쩌면 밤의 어느 순간에라도 내 정신을 분석했다면, 그러한 몽상의 상당량을 추출할 수 있었으리라.--마치 충전 중인 배터리와 흡사했다. 그래서 몸이 아파 병으로 죽을 거라고 믿으면서도 라 베르마를 들으러 가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런 순간까지 이르렀으리라. 그런데 지금은 멀리서 보면 창공의 푸른빛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평범한 사물의 시계 안으로 들어오는 언덕과 마찬가지로, 이 모든 것들이 절대의 세계를 떠나 그저 내가 거기 있음으로 해서 인식하는, 다른 것들과 비슷한 그런 것에 지나지 않았고, 배우들도 내가 아는 이들과 똑같은 본질로 만들어져 그저 ⎡페드르⎦의 시구를 더 잘 낭송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 시구 역시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숭고하고도 개별적인 본질을 이루지 못한 채 다소간에 성공적인, 그것이 끼어 있는 방대한 프랑스 시 목록 안에 다시 들어가려고 준비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직도 내게 영향을 미치는 그 집요한 욕망의 대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지만, 반대로 해마다 모습을 바꾸면서 어떤 위험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갑작스러운 충동적 행동으로 몰고 가는 그 변하지 않는 몽상, 이런 몽상에 쓸리기 쉬운 성향은 여전히 존재했으므로 나는 그만큼 더 깊은 절망감을 맛보았다. 아픈 몸을 이끌고 어느 성으로 엘스티르의 그림이나 고딕풍 장식 융단을 보려고 외출했던 날은 내가 베네치아로 떠나려고 했던 날이나 라 베르마를 관람하려고 외출했던 날, 또는 발베크로 떠났던 날과 얼마나 흡사했던가! 내가 지금 희생의 대가를 치르는 대상도 얼마 안 가면 무관심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지금은 그토록 잠 못 이르는 수많은 밤과 고통스러운 통증의 순간을 보내면서도 보러 가고 싶어 하지만, 그때 가서는 바로 그 옆을 지나치면서도 성안에 있는 그림이나 장식 융단을 보러 갈 생각조차 하지 않으리라고 예감했다. 이처럼 대상의 불안정한 성질을 통해 나는 내 노력의 덧없음을 간파했고, 동시에 예전에는 주목하지 않았던, 마치 다른 사람으로부터 피로해 보인다고 지적받으면 피로가 두 배로 커 보이는 신경 쇠약 환자마냥, 그 노력이 엄청났다는 것도 깨달았다. 하지만 그동안 내 몽상은 내 몽상과 관계되는 거라면 뭐든지 매력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항상 어느 한쪽을 향해 가는, 이를테면 동일한 꿈 주위에 집중된 관능적인 욕망에서조차, 나는 그 첫 번째 동인으로 하나의 관념을, 그걸 위해 내 삶을 희생해도 좋은 그런 관념의 존재를 인식했으며, 또 그 중심에는 언제나 콩브레 정원에서 오후 나절 책을 읽으면서 했던 몽상에서처럼 완벽함의 관념이 있었다."(74-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