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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현상학

마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1부 요약

Martin Heidegger, Sein und Zeit, Max Niemeyer Verlag Tübingen, 1967. (별도의 메모가 없는 한 모든 강조는 나의 것이다.)

참고: Martin Heidegger, trans. by Joan Stambaugh, Being and Time, SUNY press, 2010. & 박찬국,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 그린비, 2014(이하 ⟪강독⟫)

독일 책이니까 독일 음식 호호

1. 시간성에 의거한(auf) 현존재 해석과 존재에 대한 물음의 초월론적 지평으로서의 시간에 대한 해설

1. 현존재에 대한 예비적(vorbereitend) 근본분석[기초분석]

1. 현존재에 대한 예비적 분석의 과제에 대한 설명(Exposition)

§9 현존재 분석학의 주제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 속에서 스스로 자신의 존재와 관계하고 그것을 문제시한다. 이에 따라 현존재의 특성은 두 가지, “에센티아에 대한 ‘엑시스텐티아’의 우위 그리고 각자성”으로 갈무리된다(43).*

*박찬국(2014)은 저 문제시함을 “자신의 삶을 자신이 긍정할 수 있는 삶으로 형성하고 싶다는 절박한 관심”으로 특징짓고, “자신의 삶이 구현해야 할 이상적인 모습을 기투하는 […] 이해”로써 이루어지는 것으로 해설한다. 나아가 이어질 두 특성들은 실존의 구성계기로, 각각을 “‘현존재는 가능존재다’와 ‘현존재에게 문제되는 존재는 각자 나의 존재다’”로 해설한다(⟪강독⟫, 77-79).

 첫째, 현존재의 ‘본질’ 또는 무엇임[Was-sein], 에센티아는 그의 존재인 실존, 엑시스텐티아로부터 개념화되어야 한다. 이때 현존재의 본질이자 존재의미로서의 실존은 눈앞의-존재[Vorhandensein, objective presence]를 가리키는 전통적인 실존 개념 및 엑시스텐티아와 차별화된다. 따라서 현존재가 가지는 이런저런 성격은 눈앞에 존재하는 대상적 존재자의 특성과 같은 것이 아니라 “존재할 수 있는 가능한 방식들”에 해당한다(42). 그러므로 ‘현존재’라는 표현은 인간적 존재자의 무엇임이 아닌 어떠어떠하게 존재함[Sosein]으로서의 존재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적절하다).*

*레비나스는 하이데거가 ‘존재’를 동사화했다고 옳게 평가한다.

“Das »Wesen« des Daseins liegt in seiner Existenz. […] Alles Sosein dieses Seienden ist primär Sein.”(42)

 둘째, “현존재가 그의 존재 속에서 문제시하는 존재란 언제나 나의 것[je meines]이다.”(42) 눈앞의-존재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존재자들에게 그들의 존재는 아무래도-좋은[gleichgültig] 것이다. 반면 현존재는 제 존재함과 관계(하면서 그것에 신경을 쓴)다. 이때 “현존재는 언제나 그의 가능성이지[으로 존재하지], 눈앞에-존재하는-것[ein Vorhandenes]으로서 그것을[그 자신의 가능성을] 단지 특성적으로[eigentschaftlich] ‘가지는’ 것이 아니다.”(42) 한 마디로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그저 속성으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으로서 직접 살아내고, 그것도 자신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과 관련해 이런저런—구현 또는 도피 및 망각—태도를 취하면서 살아낸다.

 현존재가 본질상 자신만의 가능성으로 존재함에 따라—즉 현존재가 ‘각자성[Jemeinigkeit]’을 가짐에 따라—현존재는 스스로를 획득하거나 상실할 있다. 전자의 존재양상은 본래성[자신됨, Eigentlichkeit]으로, 후자의 존재양상은 비본래성[자신-아님, Uneigentlichkeit]으로 표현된다. “현존재에게는 명시적으로는 아니어도 자신의 고유한 존재가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개시되어 있기에, 현존재는 이러한 가능성의 빛 아래서 자신의 현재의 삶 전체에 대해서 회의와 불만을 가질 수도 있으며 [비본래적 삶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가능성을 구현해야 한다는 [과제의] 부담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강독⟫, 83) 

 이러한 현존재의 존재는 그의 존재방식이 눈앞의-존재가 아닌 실존이라는 점으로부터, 곧 그는 자신을 상실하거나 획득할 있다는 점으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강독⟫, 83-84). 이때, 현존재에 대한 실존론적 분석의 올바른 출발점[Ansatz]은 그의 평균적인 모습이 어떠한지이다.* 현존재는 우선 대부분의 경우 “평균성[Durchschnittlichkeit]”**, 곧 “일상성의 무차별성[Indifferenz der Alltäglichkeit]”이라는 존재방식[Seinsart] 속에서 살아간다(43). 달리 말해, 평균적 일상성은 현존재의 현실에서 우선적으로 발현된다[현존재의 존재적 우선성을 이룬다]. 바로 그 이유로 평균적 일상성은 현존재에 대한 기존의 해설에서 늘 건너뛰어져 왔다.

*Q. 이에 대한 근거가 충분한가? 굳이 비본래적 실존으로 출발할 필요는 없지 않나? 왜 그렇게 해야 하나? 현존재 분석학이 비본래적 실존에서 시작되어야 이유는 무엇인가?

cf. Das kann jedoch nicht heißen, das Dasein aus einer konkreten möglichen Idee von Existenz konstruieren. Das Dasein soll im Ausgang der Analyse gerade nicht in der Differenz eines bestimmten Existierens interpretiert, sondern in seinem indifferenten Zunächst und Zumeist aufgedeckt werden. (43)

A. 비본래적 실존이 존재적으로 우선이지만 그 이유로 자명하게 여겨지고 해설되지 않았기 때문에(S씨): 접근성의 문제

A2. Diese leitende Hinblicknahme auf das Sein entwächst dem durchschnittlichen Seinsverständnis, in dem wir uns immer schon bewegen, und das am Ende zur Wesensverfassung des Daseins selbst gehört. (8) ➔ 모든 해석은 실마리를 요하는데, 현존재 해석의 가능한 실마리가 일단 이것이다(vs 이것뿐이다, 따라서 이런 시작이 필연적이다?). (J씨): 필연성의 문제

A3. 필연적인 게 맞는 것 같다. 그게 당장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존재이해이기 때문에?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구체화하는 작업이 해석이니까? cf. 자연적 태도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후설

A4. ‘차이, 차별성(Differenz)’의 문제다. 비본래적 실존에서 출발 안 하면 ‘보편적’ 분석이 될 수 없다. (T씨): 보편성의 문제

A6. 그러나 본래적 실존들의 공통성/보편성도 추출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지금 비본래적 실존이 일종의 부정적 결여태로 서술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 결여태가 결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로부터 출발해도 되지 않나? (보편성/필연성 모두 공격) (J씨)

A7. 세계내존재에 퇴락해있는 독자에 대한 고려 (H씨): 수용의 문제

**맥락상 평균성이란 현존재가 다른 현존재와 차별화되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성격, 즉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그가 각자적인 존재자로서 그 자신이라는 점에 대해—아무래도-좋게 생각하면서 존재하는 성격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평균적 일상성 속에도 “비본래성의 양상으로 실존성의 구조가 아프리오리하게 놓여 있다”고 지적한다(44). 앞서 말했듯 비본래적으로 실존하는 현존재는 역시, 다만 자신의 존재로부터 도피하고[Flucht vor seinem Sein] 망각하는 양상으로 여전히 자신의 존재를 문제시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존재의 평균적—비본래적—존재(방식)에 대한 존재론적 규정은 현존재의 본래적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규정과 그 구조가 다르지 않다. (둘 다 동일한 ‘실존’의 구조인 것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존재성격들 또는 “현존재가 자신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방식, 즉 현존재의 존재를 구성하는 구조계기들”을 ‘실존주들[실존범주들, Existenzialien]’이라고 부르며, 현존재가 아닌 존재자들의 공통적 존재규정들을 일컫는 범주들[Kategorien]과 구별한다(⟪강독⟫, 85). 고대의 존재론은 노에인 또는 로고스—“인식과 진술”(⟪강독⟫, 86)—를 통해 접근된 세계 내 존재자의 존재를 존재해석의 “범례적 토대”로 삼았다(44). 이때 이 존재자들의 존재에 대해 공적으로[öffentlich], 모두를 위해 보여질 수 있고 말해질 수 있는 아프리오리한 규정들이 곧 범주였다. “그러나 나중에 보겠지만 하이데거는 인식과 진술이 존재자들을 드러내는 근원적인 방식이라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하이데거는 존재자들은 근원적으로는 현존재가 그것들을 도구로 사용하면서 그것들과 온몸으로 관계하는 가운데서 일차적으로 개시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존재를 파악할 경우에도 인식과 판단을 통해서 개시된 현존재가 아니라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삶의 현장에 입각해야 한다고 본다.”(⟪강독⟫, 86) 그런 의미에서 현존재의 존재는 세계 내 존재자의 존재와 다르고*, 범주가 아닌 실존범주에 구애된다. “범주가 Es ist의 ist가 갖는 존재론적 구조라면, 실존주란 bin이 갖는 존재론적인 구조를 가리킨다.”(⟪강독⟫, 87)

*따라서 존재물음에서 심문의 대상이 되는 존재자는 실존의 존재방식을 가지는 ‘누구’이거나, 눈앞의-존재의 존재방식을 가지는 ‘무엇’이다.

§10. 인류학, 심리학, 생물학에 맞서(gegen) 현존재-분석학의 경계-획정하기(Die Abgrenzung der Daseinsanalytik)

 인간에 대한 아프리오리를 탐구하는 현존재 분석학은 심리학이나 인류학, 생물학보다 정초의 관점에서 앞서는 학이다. 현존재에 대한 기존의 학문들은 현존재에 대한 이런저런 사실들을 풍요롭게 전달해주지만, 자신들이 언제나 이미 전제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선이해가 무엇인지 해명하지 않고 또 해명할 수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에 대한 경험과학은 “본래적인, 철학적 문제[에 대한 해소]”를 결여하고 있으며, 그런 한에서 “[사실은] 그것들이 [그] 근본에서[im Grunde] [얻고자] 대개 노력하는 것을 수행할 수 있다고 주장해선 안 된다.”(45) 이제는 해당 학문들의 학문구조 자체가 의문스러워졌으며[fragwürdig] “존재론적 문제설정으로터 발원해야 하는 새로운 자극들”을 요구한다(45).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현존재 분석학의 의도[Absicht, intention]는 데카르트가 놓친 것(을 비판하는 데)로부터 오는 것처럼 보인다. 데카르트는 근대철학의 출발기초[Ausgangsbasis]로서 ‘코기토 숨’을 내걸지만, ‘코기토’만을 분석하고 그만큼이나—어쩌면 그보다도—근원적인 ‘숨’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따르면 ‘숨’이 어떤 것인지 규정되어야만 코기타치오네스의 존재방식(Seinsart)도 포착 가능하다. “현존재의 지각이든 기억이든 상상이든 모든 것은 현존재가 세계 내에서 자신이 선택한 가능성을 구현하는 실존적인 삶에서 동원되는 것이다. […] 비본래적인 실존으로 사느냐 본래적인 실존으로 사느냐에 따라서 의식작용의 방식도 달라지는 것이다.”(⟪강독⟫, 88)*

*Q. 정말 그러한가? 본래적으로 사나 그렇지 않나 지각의 형식적 구조나 본질은 동일하지 않은가?

A. 후설에게도 환원 이전의 지각과 이후의 지각은 동일하지 않지 않냐? (J씨)

 현존재 분석학은 데카르트의 철학뿐만 아니라, 자아나 주체를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는 모든 철학적 시도를 문제삼는다. 왜냐하면 “‘주체’에 대한 모든 이념[관념]은 […] 기체[subjektum](휘포케이메논)을 존재론적으로 공동정립”하기 때문이다(46). 의식이라는 기체에 대한 내적 반성은 우리가 눈앞의-존재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물화된 존재자를 파악하고자 할 때에나 유효하다(⟪강독⟫, 89-90). ‘주체’, ‘의식’, ‘영혼’, ‘정신’, ‘인격’, ‘생’, ‘인간’의 개념 모두 현존재의 “물화되지 않은 존재”의 방식에 대해 가르쳐주지 못하고, 심지어는 그와 같은 존재물음을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한다(46). 그러나 하이데거는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철학에 의해서 드러난 의식과 자아는 현존재의 구체적인 삶을 사상한 토대 위에서 드러나는 파생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강독⟫, 90). 예컨대 모든 진지한 소위 생철학은 현존재의 존재에 대한 이해를 암묵적으로나마 추구하지만, ‘생’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문제시되어야 함을 놓친다.

 체험 개념에 기반한 딜타이의 생철학 또는 ‘정신과학적 심리학’뿐만 아니라 후설과 셸러 등의 인격주의[Personalismus]도 같은 것을 간과한다. 예를 들어 셸러는 작용의 통일적인 수행 주체 또는 체험의 통일체로서의 인격(의 구성)을 심리적인 대상(의 구성)과 날카롭게 구별하(고 바로 그 점에서 뛰어나)지만, 그와 같은 수행 또는 체험이라는 존재 방식의 존재론적 의미를 탐구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인격적 통일체를 이룬다는 신체나 영혼 또는 정신에 대한 개념들도 존재론적으로 미규정적인 개념들이다. 오히려 신체, 영혼, 정신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서 인간의 존재에 대한 파악이 선행되어야 한다(⟪강독⟫, 91-92).

 그런데 현존재의 존재에 대한 물음과 관련하여 근대철학을 근본적으로[grundsätzlich] 막거나 오도한 것은, 근대철학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고대-기독교적 인류학[인간학, Anthropologie]이었다. 전통적 인류학은 첫째,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정의하지만, 이때 동물의 존재방식은 “눈앞의-존재 그리고 발생함[Vorkommen, occurring]의 의미에서 이해된다.”(48) 로고스(를 가진 존재자)의 존재방식 역시 동물의 존재방식보다 고차원적인 것으로 이해될 뿐 해명되지는 않는다. “아울러 이렇게 동물성과 로고스가 함께 결합된 존재자의 존재성격도 모호하다.”(⟪강독⟫, 92)

 전통적 인류학은 둘째, 신학을 실마리 삼아 인간을 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진 존재자로 규정하지만, 무한자인 신의 존재도 유한자인 인간의 존재도 모두 (존재 일반을 눈앞의-존재로 규정하는) 고대 존재론에 입각해 해석한다. 인간에 대한 상술한 규정은 근대에 이르러서는 노골적으로 신학적인 성격을 벗게 되나 ‘인간은 자신을 넘어 초월하는 존재’라는 관념 속에 여전히 보존된다. 초월의 관념으로써 근대의 인간은 단지 이성적이기만 한 동물 이상이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적 (존재물음을 결여하고 있다는 의미에서의) 도그마는 비판되지 않은 채 그대로 전해지고 말았다.

 요컨대 저 “그리스적 정의”와 “신학적 실마리”는 모두 존재물음을 망각한 채 인간이라는 존재자의 존재를 “‘자명하게’ 나머지의 창조된[geschaffen] 사물들의 눈앞의-존재라는 의미에서” 포착한다(49). “그리스적 정의”와 “신학적 실마리” 모두를 삼킨[verschlingen] 레스 코기탄스, 의식, 체험연관으로서의(—초월하는 존재자로서의—)인간 정의 역시 코기타치오네스를 “다시금 비명시적으로 ‘자명하게’ 주어진무언가[etwas ‘Gegebenes’] 취”하지 그 주어진 무언가의 ‘존재(함)’과 관련해서는 묻지 않는다(49).

 존재론적 미규정성, 곧 존재론적 기초[Fundament]의 결여는 인간에 대한 심리학에서도 나타난다. 일반 생물학 하에 인간 심리학을 포섭시킨다고[einbauen] 해도 문제는 마찬가지다. (현존재 존재론을 경유하지 않은 기존의) 생에 대한 존재론은 생의 존재를 (존재론적으로 미규정적인 것이나 다름없는) ‘단지-숨만-붙어있는-것[Nur-noch-leben, just-being-alive, 단지 살아 있기만 한 것]’으로 규정하며, 구체적인 생물체의 존재의 경우 단지-숨만-붙어있는-것 위에 무언가를 추가함으로써 규정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존재는 결코 이러한 방식으로—날것의 생에 인간에게 개성적인 무언가를 더하는 방식으로—규정되어선 안 된다. “가능한 포착함과 해석함의 순서에서 ‘생에 대한 학문’으로서의 생물학은 현존재 존재론 속에 정초되어 있”는데, 왜냐하면 ‘생’이란 존재방식 역시 현존재에게만 접근 가능하기 때문이다(49-50).**

* “[…] 하이데거는 생물은 현존재의 존재론으로부터 결여적인 방식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생물은 현존재가 갖고 있는 존재이해와 실존적 성격을 결여한 존재자로서 ‘단지 살아 있기만 한 것’인바 […]””(⟪강독⟫, 94)

**Q. 나의 이해가 맞는가?

A. (1) 예컨대 동물은 이성이 ‘없다’ 이렇게 이야기할 때는 현존재가 기준임. (2) 현존재만 생물학할 수 있음. (J씨)

cf. “현존재의 독특한 존재 방식을 제대로 파악할 경우에만 생물의 존재방식도 그에 대조하면서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 생물학주의적인 환원주의는 현존재의 존재방식에 대한 올바른 파악을 저해할 뿐 아니라 생물의 존재방식에 대한 올바른 파악도 저해한다.”(⟪강독⟫, 94) ➔ 대조의 기능은 현존재 존재론이 우선되어야 할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반대로 생물의 존재론에 대조해가며 현존재 존재론을 사후적으로 수행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자신이 인류학, 심리학, 생물학의 실증학문으로서의 성과들에 대해 어떤 (부정적인 평가라는 의미에서의)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히면서도, 현존재의 존재론적 기초들은 “사후적으로 경험적인 재료로부터 가설적으로 개시될 수 없다”고 못박는다(50). 현존재의 존재론적 기초들은 현존재에 대한 경험이 단지 (가설적으로 분석되지 않고 자료로서) 수집되기만 했을 때조차 “언제나 이미 ‘거기’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50). 경험적 실증학문은 그것의 근거의 차원에 놓여 있으며 철저한 의미에서 문제적이[problematisch] 되어야 하는 현존재의 존재론적 기초들을 보지 못하고 다만 자명한 것으로 취할 뿐이다.*

*cf. 하이데거는 후설의 학문론의 구조를 가져오면서도, 근원을 세계 내 주관으로 만듦으로써 심리학주의에 대한 후설의 대결을 무효화한다(H씨)?

§11 실존론적 분석학과 원시적(primitiv) 현존재에 대한 해석. ‘자연적인 세계개념 획득하는 [놓인] 어려움들.

 나아가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일상성과 원시성을 구별한다. 일상성 속에서의 현존재에 대한 해석은 원시적 현존재에 대한 해석과도 같지 않다. 현존재의 일상성은 매우 발달한 문화에서도 실현되는 존재의 양상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원시적 현존재 역시 제 나름의 고유한 비일상적 존재양상과 일상적 존재양상을 가진다. 민속학[Ethnologie]이 제공하는 그 존재양상들은 (시간이 흐르고 문화가 발달하면서 추가되었을) 자기해석들에 의해 덜 은폐되고 덜 복잡하다는—순수하다는—점에서 오히려 현존재에 대한 존재론을 수립하는 데 유용할 수 있다. 그러나 민속학 역시 (존재론이 아닌 존재적[존재자에 대한, ontisch] 연구로서) 자료의 수령[수집, Aufnahme] 및 선별[거르기, Sichtung], 가공[Verarbeitung]에서 이미 현존재의 존재에 대한 선개념들[Vorbegriffen]과 해석들을 전제하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학적 진보는 이룩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자신도 현존재 존재론에 의해 정초되어야 한다.

“Ethnologie setzt selbst schon eine zureichende[adequate] Analytik des Daseins als Leitfaden voraus. Da aber die positiven Wissenschaften auf die ontologische Arbeit der Philosophie weder warten »können« noch sollen, wird sich der Fortgang der Forschung nicht vollziehen als »Fortschritt«, sondern als Wiederholung und ontologisch durchsichtigere Reinigung des ontisch Entdeckten.”(51) cf. 민속학을 칸트의 초월철학에 기반해 철학적으로 토대 지은 에른스트 카시러 ⟪상징형식의 철학⟫ 2권에 대한 비판

 그러나 이렇게 존재론과 (민속학 등의) 존재적 연구 사이의 차이가 획정되어도, 철학의 오랜 숙제인 “자연적 세계개념 관념[이념] 작업수행[Ausarbeitung, working out]”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존론적 분석학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기가 어렵다(52, 강조는 하이데거). 무수한 문화 및 현존재의 형식들에 대한 지식이 넘쳐나고 있고, 그것들을 둘러싼 비교 및 유형화, 도표화가 성행하고 있지만 이는 (생활)세계의 본질이 인식되었음을 뜻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본래적인 문제를[원래 문제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오인하도록 유혹한다. “[…] 세계이미지들의 질서화[Ordnung]를 위해서는 세계 일반에 대한 명시적 관념[이념]이 요구된다. 그리고 ‘세계’ 자체가 현존재의 구성물[Konstitutivum, “현존재의 존재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강독⟫, 97)]일 때, 세계현상에 대한 개념적 작업수행은 현존재의 근본구조들에 대한 통찰을 요구한다.”(52)*

*마치 ‘세계 자체’ 이전에 ‘초월론적 주관의 세계’부터 봐야 한다는 후설처럼.

2 현존재의 근본구성틀로서의 세계--존재 일반

§12 -존재(In-Sein) 자체에 대한 지향에 의거한(aus der Orientierung) 세계--존재의 묘사(Verzeichnung)

 요컨대 현존재는 ①특정한 이해를 통해 자기 자신의 존재와 관계한다는 의미에서 실존하며 ②“본래성과 비본래성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각자성”을 가진다. “현존재는 언제나 이러한 [두] 양상들 중 하나로 실존하거나, 그로부터의 양상적 무차별성 속에서 실존한다.”(53) 그러나 이러한 존재규정들은 ‘세계-내-존재’라는 존재구성틀로부터 아프리오리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이로써 ‘세계-내-존재’라는 현존재의 아프리오리한 존재구성틀의 해석(Auslegung)이 이어진다.

 ‘세계-내-존재’는 하나의 통일된 현상이지만, 다음의 세 가지 “구성적 구조계기들”을 가진다(53).

①‘세계-내’[Das »in der Welt«] ➔ 이와 관련해서는 ‘세계’[»Welt«]의 존재론적 구조, 세계성의 이념이 규정되어야 한다.

②(세계-내-존재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존재자 ➔ 이와 관련해서는 현존재의 평균적 일상성의 양상에서 존재하는 것이 누구인지가 규정되어야 한다.

③내-존재 자체 ➔ 이와 관련해서는 내에-있음[Inheit]의 존재론적 구성이 규정되어야 한다(12-13절).

 하이데거는 ③내-존재에 대한 탐구에 먼저 착수한다. (일반적으로) 내-존재는 옷이 옷장 ‘속에’ 있다고 말할 때처럼 “공간속에연장되어 있는 존재자들이 이 공간 속 그들의 위치[Ort]와 관련하여[, 즉 특정한 위치에서(an)] 서로[zueinander] [맺고 있는] 존재관계”를 가리킨다(54). 특별히 범주적[kategorial]’인 존재론적 성격을 가지는 이러한 존재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자는 현존재와 달리 모두 “세계내부에[innerhalb]’ 나타나는[vorkommend] 사물들로서 눈앞의-존재라는 같은 존재방식”을 공유한다(54).

 반면 현존재의 존재구성틀로서의 내에-있음은 범주가 아닌 실존주다. 그러므로 현존재가 세계 내에 있다는 것은 연장을 가지는 현존재의 인간적 육체가 (공간으로 특징 지어지는) 눈앞의-존재라는 존재방식을 가지는 존재자—이를테면 도서관 등—안에 있음을 가리키지 않는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독일어 ‘in’은 어딘가에 거주함[wohnen]머무름[sich aufhalten]의 의미를, ‘an(at)’은 무언가에 (내가) 익숙하고 그것을 신뢰하며 돌본다는 의미를 가진다. 한편 ‘bin’은 ‘bei’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세계 내에) ‘내가 존재한다[ich bin]’는 “이러저러하게 신뢰된 것[Vertrauten]으로서의 세계 곁에[bei] 내가 거주하고 머무른다”를 뜻한다(54).

Q. 독일어 어원 분석을 통해 (비독일인에게까지 적용되는!!!) 실존주의 의미를 구체화하는 방법론은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달리 말해, 고대 언어가 현대의 언어 또는 존재론은 더 이상 담지하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진리를 보존하고 있다는 전제는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A. 다른 언어라고 해서 다른가? + 어원이 직접적 근거가 되는 게 아니라 방증하는 것에 불과하다. (K씨) 

 여기서 곁에 있음[Sein bei]’ 또는 세계에 몰두함[Aufgehen in der Welt]은 ‘내에-있음’에 의해 정초되어 있는 (또 다른) 실존주다. ‘곁에 있음[Sein bei]’은 사물들이 ‘함께 눈앞에 있음’과 같은 전통적인 존재론적 범주와 차별화된다. 현존재가 세계 곁에 있다는 것은 현존재라는 사물과 세계라는 사물이 함께 있는 사태를 가리키지 않기 때문이다. 눈앞에-있음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사물은 무세계적[weltlos]인 반면, 현존재에게는 (언제나) 이미 “세계와 같은 것”이 발견되어 있다(55). 무세계적 사물은 다른 존재자를 ‘만질[berühren, touch]’ 수도, ‘만날[begegnen, encounter]’ 수도 없다.

 물론, 현존재 역시 그것의 실존론적 근본구성틀을 도외시하는 채 눈앞에-있음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사물로서 파악[auffassen]될 수 있다. 사실은 이러한 파악이 기존의 현존재 이해[vorherige Verstehen]를 지배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파악 하에서 드러나는 사실적인[tatsächlich] 눈앞에-있음은 현존재만의 독특한 눈앞에-있음이 아니라 다른 모든 무세계적 사물과 공유되는 눈앞에-있음이다. 단, 현존재의 존재사실의 사실성과 무세계적 사물의 존재사실의 사실성은 근본적으로 상이하다.* 전자를 하이데거는 ‘현사실성[Faktizität]’이라고 부른다. “현사실성의 개념은 자신 안에 다음을 포함한다. ‘세계내적[innerweltlich, 세계-내-존재하는]’ 존재자가 그의 고유한 세계 내부에서 자신의 ‘운명’에 의해 그와 만나는 존재자의 존재에 구애되어 있는 으로서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세계-내-존재함[das In-der-Welt-sein eines »innerweltlichen« Seienden, so zwar, daß sich dieses Seiende verstehen kann als in seinem »Geschick« verhaftet[bound up] mit dem Sein des Seienden, das ihm innerhalb seiner eigenen Welt begegnet].”(56)

*Q. 직전의 내용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A. 존재이해 없는 눈앞의-존재자 vs 있는 눈앞의-존재자.

A2. 돌은 존재자 사이에서 태어나는(?) 것을 운명적 구속으로 느끼지 않을 것.

 그런데 이처럼 실존주로서의 현존재의 내-존재를, 범주로서의 눈앞의-존재자들(눈앞의-존재라는 존재방식을 가지는 존재자들) 간에 성립하는 ‘내부성’[»Inwendigkeit«, “insideness”]과 구분한다고 해서 현존재가 공간성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현존재는 “세계-내-존재 일반의 근거 위에서만 가능한 […] 고유한 ‘공간-내-존재’를 가진다.”(56) 하이데거는 이를 “현존재의 실존론적 공간성”이라고 부르며, 현존재를 “우선은 정신적인 사물[이지만] 사후적으로 하나의 공간 ‘내에’ 옮겨지는 [사물]*”로 생각하는 소박한 형이상학에 반대한다(56). 이러한 소박한 형이상학은 현존재의 공간성을 물질성[육체성, Körperlichkeit]에 의해 정초된 신체성[Leiblichkeit]의 한 구성요소[Beschaffenheit]로, (물질적 공간성과 달리) 정신적인 특성인 ‘세계-내에-있음’과 공동정립되는 그런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인간의 존재 방식을 정신적 사물과 물질적 사물의 함께-눈앞에-있음으로, 따라서 인간을 일종의 합성적 산출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해하다(dunkel).

 현존재가 현사실성에 따라-존재하는 방식, 곧 ‘이러저러하게 신뢰된 것[Vertrauten]으로서의 세계 곁에[bei] 거주하고 머무’르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하이데거는 무언가를 생산함[herstellen, produce], 사용함, 떠맡음, 고찰함 등을 예로 들며 이때 현존재의 존재방식을 ‘고려함[Besorgen, to take care]’이라고 부른다. 심지어는 생략함[Unterlassen, to omit], 간과함[Versäumen, to neglect] 등등조차 고려함의 결여태로서 결국은 고려함의 일종이다.* 이때 ‘고려’는 선학문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존재론의 용어로, 하나의 실존주의 명칭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고려’가 현존재의 내-존재방식을 가리키는 용어로 채택된 이유는 “현존재의 존재 자체가 염려[Sorge, care]로서 가시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57, 강조는 하이데거). 염려 역시 존재론적 구조개념으로, 선학문적인 의미에서의 ‘염려’, 곧 피로나 우울, 삶의 이런저런 걱정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염려는 아무 걱정이 없거나[sorglos] 명랑할[heiter] 때조차 작동한다.

*Q. 고려의 결여태가 아닌 것과 고려의 결여태인 것 사이의 구분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를테면 고려의 결여태가 아닌 ‘Aufgeben’과 고려의 결여태인 ‘verzichten’은 어떻게 다른가? cf. “Weisen des Besorgens sind auch die defizienten Modi des Unterlassens, Versäumens, Verzichtens, Ausruhens, alle Modi des »Nur noch« in bezug auf Möglichkeiten des Besorgens.”(57)

A. 작위로써 존재자와 만나기 vs 부작위로써 만나기

“Weil zu Dasein wesenhaft das In-der-Welt-sein gehört, ist sein Sein zur Welt wesenhaft Besorgen.”(57)

 현존재는 우선 단순히 존재한 다음 내키는 대로 세계와의 ‘관계’를 취하거나 말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현존재의 존재함은 반드시 세계-내-존재함이다. 눈앞의-존재로서의 사물 역시 세계 내부의 존재자로서 드러나야만 현존재와 ‘만날’ 수, 그에 의해 고려될 수 있다. 한편 이상의 분석은 ‘인간이 그의 환경[Umwelt]을 가진다’고들 말해질 때의 ‘가짐’을 규정해준다. 이 ‘가짐’은 “내-존재의 실존론적 구성틀 속에 정초되어 있다.”(57-58) 생물학은 인간이 환경을 가지는 사태의 의미를 계속 활용하면서도 (현존재 분석학과 달리) 그것을 발견하지도, 규정하지도 못하며, 그저 전제할 수만 있다. “존재적으로도 존재론적으로도 고려로서의 세계-내-존재는 우위를 가진다.”(58)

 이어 하이데거는 이제껏 내-존재함을 규정한 방식이, 그것이 아닌 것을 규정하는 부정적인 방식으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냐는 잠재적 비판에 응수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러한 부정적 접근은 접근하고자 하는 현상—현존재의 세계-내-존재함—의 고유성에 오히려 적합하다. 세계-내-존재는 현존재의 근본구성틀로서 그의 존재이해를 위해 ‘보아질’ 수 있게끔 늘 개시되어 있지만, 대개의 경우(zumeist) 위장과 은폐 가운데서 “근본적으로 오해되거나 존재론적으로 불충분하게만 해석된다.”(58) 현존재는 우선 자신이 아닌 것, 세계의 ‘내부’에서 자신이 만나는 것—눈앞의-존재자들—에 입각해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이처럼 사태에 부적합한 자기이해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구체화한다. 현존재는 세계-내-존재라는 자신의 존재구조에 대해 명시적으로는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현존재는 세계에 대해 인식함(노에인)* 또는 세계 대해 말함(로고스)을 자신이 세계와 관계하는 가장 대표적인 방식으로서, 곧 세계-내-존재의 일차적인 양상으로서 암묵적으로 경험해[erfahren] 왔다. 이때 세계인식(이라는 관계)는 눈앞의-존재라는 존재 방식을 가지는 하나의 존재자(세계)와 다른 존재자(영혼) 사이의 ‘관계’—곧 주객관계—로 파악되기 때문에 내-존재의 진면모는 비가시적인[unsichtbar] 것이 되고 만다. 주체와 객체 사이의 인식적 관계는 내-존재의 여러 양상들 중 하나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부당한 우위를 점하는 채 인식론의 자명한 출발점으로 여겨졌다.

*Q. 이때는 왜 꺾쇠가 붙지 않았는가?

§13 정초된 양상에서의 -존재의 예화. 세계인식함(Das Welterkennen)*

*인식은 세계-내-존재의 범례일 뿐, 근거가 아니다. 정초하는 근원적 작용이 아니라 존재에 의해 정초된 작용이다.

 세계-내-존재가 현존재의 근본구성틀인 한, 그것은 현존재에게 완전히 가려질 수는 없고 미규정적으로나마 “언제나 이미 존재적으로[현실적으로] 경험”되어야 한다(59). 세계-내-존재가 그렇게 앞 절에서 말해진 것처럼 세계, 정확히 말해 자연이라 불리는 존재자에 대한 인식으로 경험될 때 인식함은 자연이 아닌 인식하는 존재자인 ‘인간사물[Menschending]’ 쪽에 귀속된다. 그러나 이 인식함은 마치 신체의 특성처럼 인간사물에 외부적으로 부착되는 눈앞의-존재자 또는 구성요소가 아니다. 그렇다면 인식함은 인간사물의 ‘내부에’[»innen«] 있지, 물리적 또는 심리적 존재자의 존재방식이 아니어야 한다.* 인식함이 물리적 또는 심리적 존재자의 존재방식이라는 ‘외부적인[äußerlich]’, 형식적인 편견이 걷힐 때 비로소 “어떻게 이러한 인식하는 주체가 그의 내적인[inner] ‘권역’으로부터 ‘[자신과] 다른 그리고 [자신에게] 외적인 것’으로 도달하게[kommen] 되는가, 어떻게 인식함 일반이 하나의 [자기 외부의] 대상을 가질 있는가, 주체가 다른 권역으로 감히 비약할 필요 없이 그것을 결국 인식하려면 대상 자체는 어떻게 생각되어야 하는가” 등의 문제가 비로소 발원할 수 있다(60).

*Q. 이 부분의 논리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했다.

A. äußerlich=>자연과학적 관찰을 통해 얻어지는/나와 거리를 둘 수 있는 심리적 원자로서 인식능력 vs 내적=>현상학을 통해 얻어지는/바로 내것인 그런 인식능력 (H씨). ‘물리적 또는 심리적’은 그냥 눈앞의-존재자가 취할 수 있는 존재양태일 뿐이고, 요지는 눈앞의-존재자의 존재방식이 아니어야 한다는 뜻.

cf. 하이데거에 대한 예상 반론: 주체가 초월해야만 얻을 수 있는 세계에 주체가 이미 들어가있다는 것인가? “Diesem Hinweis auf den phänomenalen Befund – Erkennen ist eine Seinsart des In-der-Welt-seins – möchte man entgegenhalten: mit einer solchen Interpretation des Erkennens wird aber doch das Erkenntnisproblem vernichtet; was soll denn noch gefragt werden, wenn man voraussetzt, das Erkennen sei schon bei seiner Welt, die es doch erst im Transzendieren des Subjekts erreichen soll?”(61)

 그러나 인식에 대한 이상의 물음들에서는 “이러한 인식하는 주체의 존재방식에 대한 질문”이 결여돼있다[unterbleiben, omit](60). 인식함을 주제화하는 모든 탐구가 해당 존재방식의 주제화를 “암묵적으로 언제나 이미” 전제할 수밖에 없음에도 그렇다(60). 그러므로 소위 초월의 수수께끼 (내-존재함이 무엇이고) 인식이 어떤 방식의 -존재함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앎이 선행되어야만 해소될 수 있다.* “인식함은 세계-내-존재함의 하나의 존재방식”이며, 이러한 자각은 인식의 문제를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가능케 한다(61).

*이 수수께끼는 후설이 ⟪현상학의 이념(1907)⟫에서 제시한 바 있다. 후설은 초월의 수수께끼를 해소하기 위해 세계의 존재를 괄호 쳐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하이데거는 세계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주체가 어떻게 그 ‘내에’ 존재하는가를 탐문한다. 후설의 입장에서 하이데거는 (초월의 메커니즘은 어찌어찌 설명할 수 있을지언정) 초월 결과의 명증성은 설명하지 못하고 회의주의에 빠질 것이다. 반면 하이데거의 입장에서 후설은 현존재의 이미-바깥으로-나와있음을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Q. 세계-내-존재를 해명한다고 해서 인식론적 문제들이 해결될까? (K씨)

 그런데 눈앞의-존재자에 대한 (인식적인) 응시[Begaffen]는 이미-세계-곁에-있음[Schon-sein-bei-der-Welt]’ 우선적인 양태가 아니다. “고려함으로서 세계-내-존재는 [우선은] 고려된 세계에 의해 넋을 빼앗긴 채[benommen] 있[음이]다.”(61) 그러므로 세계에 완전히 몰두해 있는 고려에서 어떤 결핍[Defizienz] 생긴 후에야 비로소 현존재는 “눈앞의-존재자를 고찰하는 규정함으로서의 인식함”을 발동시킨다(61). 다시 말해 (사물을) 생산함이나 다룸[hantieren, manipulation] 등의 여타 내-존재 양상이 삼가져야만 비로소 세계내적으로 만나지는 존재자를 “단지 그것의 순수한 외양[Aussehen](에이도스)”과 관련해서 만날 수 있는 것이다(62). 이때의 만남은 특정한 관점[Gesichtspunkt]에서의 쳐다봄[Hinsehen, looking at]이자 인지함[Vernehmen, perception]으로서, 물론 그 자체로 세계내적 존재자 곁에 머무르는 하나의 방식이다. “인지함은 무언가에 무언가로서 말걺[Ansprechen] 그리고 무언가를 무언가로서 논함[Besprechen]의 수행방식을 가진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이러한 해석함의 토대 위에서 인지함규정함[Bestimmen, definition]이 된다. 인지된 것과 규정된 것은 명제들로써 표현될 수 있고, 그와 같은 표현된 [Ausgesagtes]으로서 유지되고[behalten] 보전될[verwahren] 수 있다.”(62, 강조는 하이데거)

Q. 기존 철학에서의 인지함, 이를테면 후설의 지각 개념은 정말 대상의 순수한 외양을 거리를 두고 쳐다보는, 말하자면 능동적인 관조에 불과한가? (허수아비 때리기가 의심된다.) 후설은 지각을 수동적 종합으로 규정하는데, 이는 결코 하이데거가 말하는 ‘넋을 빼앗긴 채로의’ 실천의 개념보다 이차적이지 않다. ‘도구를 사용하다가 그것이 이를테면 고장이 날 때 비로소 도구를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도구의 사용이 도구의 지각을 이미 전제하는 것 같다.

A. 이론/실천과 능동/수동은 다르다. + 후설은 적어도 ⟪논리연구⟫에서는 지적 인식이 감정적, 실천적 인식을 근거 지우는 것으로서 앞선다고 본다. 하지만 지적 인식에 앞서는 본능이나 기분, 쾌나 고통과 같은 감성적 감정에 대해 후설이 언급하기는 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A2. 고장에서는 도구가 지각되는 게 아니라 도구의 지시연관이 지각되는 거라서, 도구의 사용을 분석하는 대목에서 지각과 관련된 문제가 반박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H씨).

 하이데거는 이러한 인지를 표상주의에 입각해 이해해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무언가에 향해있음 그리고 그 무언가를 포착함이란, 현존재가 우선 그 속에 들어있는 캡슐로서의 내면의 권역으로부터 비로소 벗어나는 (또는 그리로 되돌아가는) 과정이 아니다. 현존재는 “그의 일차적인 존재방식에 따라서 언제나 이미바깥에’[,] 항상 이미 발견되어있는 세계에서 만나지는 존재자 곁에 있다.”(62) 현존재는 무언가에 대해 순전히 생각할 때조차—후설의 표현으로는 ‘한갓되게 사념할 때’조차—그것을 원본적으로 포착할 때만큼이나 밖으로 나와있는 채 세계 내에 존재한다. 무언가에 대한 망각, 기만됨, 오류[Irrtum]조차 “근원적인 내-존재의 변양”일 뿐이다(62).

 “언제나 이미 발견되어있던 세계”에 대한 “새로운 존재위치[Seinsstand, perspective of being]”을 제공하는 인식함은 독자적으로 하나의 과제가 되어 “학문으로서 세계-내-존재를 위한 인도의 기능[die Führung]을 떠맡을 수 있다.”(62)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식함이 비로소 처음으로 주체와 세계를 한 데 모이게 해주는 것도 아니고, 세계가 주체에게 미치는 효과[Einwirkung]로부터 발생하는[entstehen] 것도 아니다.* “인식작용은 세계-내-존재에 기초를 둔 현존재의 한 양상”에 불과한 것으로서, “세계-내-존재를 인식작용으로부터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식작용에 앞서서 세계-내-존재를 해석할 필요가 있다.”(⟪강독⟫, 112)

*Q. 촉발과 같은 개념을 염두에 두고 비판하고자 하는 것 같은데, 정당한 비판인가? 촉발로써 지각을 설명하는 것이 현존재의 ‘언제나-이미-밖에-있음’에 대한 주장과 상충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A. 촉발 개념도 주체의 내부와 외부를 구분한다. 그와 같은 구분을 전제하기 때문에, 기존의 인식론의 ‘전제’를 공격하는 하이데거 입장에서는 똑같이 비판 대상이다. (K씨)

“Erkennen ist ein im In-der-Welt-sein fundierter Modus des Daseins. Daher verlangt das In-der-Welt-sein als Grundverfassung eine vorgängige Interpretation.”(62)

3 세계의 세계성

§14 세계 일반의 세계성이라는 이념

 ‘세계-내-존재’라는 현상을 탈은폐하기 위해서는 ‘세계’라는 구조계기부터 현상학적으로 해명되어야 한다. ‘세계’라는 현상에 대한 기술은 전혀 어려울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나열한 뒤, 그것들의 외양을 드러내고 그것들과 관련된 사건들을 설명하면 그만일 것 같기 때문이다(63). “그러나 현상학이 탐구하는 것은 존재이다.”(⟪강독⟫, 114) 이러한 기술은 존재자를 단지 존재자로서 주제화하는 존재적인 기술에 불과하며, 존재자의 존재 및 존재구조를 보여줘야 하는 현상학적 해명이 되기에 부족하다.

 그렇다면 세계내부적 존재자들(이를테면 돌, 책상 등)의 존재로서의 사물성을, 그리고 그것이 가치를 가지든, 가지지 않든 토대로 삼고 있는 자연사물성[Naturdinglichkeit] 즉 실체성[Substanzialität]을 주제화하면 충분할까? 이는 물론 존재론의 차원으로 나아간 해명이기는 하지만, (세계내부적 존재자에 대한 존재론일 뿐) ‘세계’에 대한 존재론은 아니다. 자연 역시 현존재가 만나고 발견하는 세계내부적 존재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에서 직접적인 가치를 가지는 사물들도 사정은 매한가지다. 세계내부적 존재자의 ‘객관적 존재’에 대한 해명은 ‘세계’ 개념을 전제하기에 ‘세계’ 개념을 올바르게 해명해줄 수가 없다.*

Weder die ontische Abschilderung des innerweltlichen Seienden, noch die ontologische Interpretation des Seins dieses Seienden treffen als solche auf das Phänomen »Welt«. In beiden Zugangsarten zum »objektiven Sein« ist schon und zwar in verschiedener Weise »Welt« »vorausgesetzt«.”(64, 강조는 하이데거)

*세계 내 대상/존재자의 존재와 세계 자체의 존재 사이의 간극 그리고 후자의 선행성은 후설에게서 학습한 것으로 보인다.

 세계 개념에 대한 올바른 해명은 이 또는 저 (주관적) 세계가 아니라, 모두에 의해 공유되는 세계 일반의 세계성[Weltlichkeit]과 관련해 이루어져야 한다. 이때 세계성은 현존재에 대한 실존론적인 규정, 따라서 실존주 중 하나이다.

“»Welt« ist ontologisch keine Bestimmung des Seienden, das wesenhaft das Dasein nicht ist, sondern ein Charakter des Daseins selbst.”(64)

 그런데 ‘세계’의 개념은 다의적이다. ‘세계’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사태들을 동시에 의미한다.

①존재적 개념으로서, 세계내부적 눈앞의-존재자의 총체[All] ➔ 이하 <세계>[»Welt«]*

②존재론적 개념으로서, 눈앞의-존재자의 존재[Vorhandensein](본질). 이를테면 ‘수학자의 세계’와 같이 다수의 존재자들을 포괄하는 영역**

③존재적이고 선존재론적인 실존적 의미에서, 현사실적 현존재가 속에 사는 그곳[worin]으로, 우리 모두의 ‘공적인[öffentlich]’ 세계 또는 저마다의 ‘고유한[eigen]’ 세계, 가까운 주위의 환경 등 ➔ 이하 세계[Welt]***

④존재론적-실존론적 개념으로서, 세계성의 개념(세계의 본질). 세계성 일반의 아프리오리 속에 포함되는 것으로서의 특수한 ‘세계들’로 변양 가능함

*이는 후설이 ⟪이념들⟫ 1권(1913)에서 명시적으로 채택하는 ‘세계’ 정의다(cf. Hua III/1, 3). 그러나 후설은 동일한 책에서 지평으로서의 세계 개념을 통해 암묵적으로 ③ 역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①의 정의를 거부한다고 해서 후설이 비판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Q. 이는 존재적 개념이 아닌가?

A. 단순한 집합이 아니라, 특정한 (공통적) 본질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로부터 나온 그런 본질(이 구현되어 있는 영역).

***이는 후설의 ‘생활세계’ 개념과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하이데거는 자신이 이어지는 분석에서 ③을 주로 사용할 것이라 알리며, ①을 사용할 경우 꺾쇠 안에 넣겠다고 덧붙인다. 나아가 세계적’[»weltlich«]현존재의 존재방식을 가리키는 용어로, 세계귀속적[weltzugehörig]’ 또는 세계내부적[innerweltlich]’눈앞의-존재자의 존재방식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할 것이라 알린다.

 전통적인 존재론은 세계성의 현상을 뛰어넘은 채[überspringen, skip over] 세계를 눈앞의-존재자의 존재에 의거해, 구체적으로 ‘자연’에 의거해 잘못 풀이해왔다[해석해왓다, interpretieren]. 그러나 “현존재는 자연으로서의 존재자를 오직 그[자신]의 세계-내-존재의 특정한 양상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함은 세계에 대한 특정한 탈세계화[Entweltlichung]라는 성격을 가진다.”(65) 달리 말해, (자연과학 및 기존의 철학이 세계라는 표현으로서 지칭하는) 자연으로서의 세계는 세계의 진정한 세계성이 탈각된 그런 (추상적, 파생적) 세계를 가리킨다. “자연과학에 의해서 발견되는 [그리고 데카르트의 레스 엑스텐자 분석이나 칸트의 시공간론에서 취급되는] 자연은 세계-내-존재와 그것이 일차적으로 살고 있는 생활세계를 전제한다.”(⟪강독⟫, 116) 그렇기 때문에 자연에 의거해서는 결코 세계성의 현상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없으며, 반대로 현존재 분석학의 일환으로서의 세계성 현상에 대한 현상학적 해석에 의거해서 자연이 올바르게 해석된다. 낭만주의의 비수학적인 자연 역시 생활세계를 전제할 뿐이다(⟪강독⟫, 117).

 세계성 현상에 대한 해석은 현존재가 세계를 인식하면서 “왜 존재적으로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세계성의 현상을 뛰어넘는지”—즉 세계성의 현상이 어째서 은폐되는지*—그리고 그것을 뛰어넘지 않으려면 어떤 접근법을 취해야 하는지를—즉 세계성의 현상을 어떻게 탈은폐할 것인지를—고민해야 한다(65-66). 세계성의 현상에 대한 적절한 접근법은 “현존재의 가장 가까운 존재방식으로서 평균적 일상성의 지평에서 세계-내-존재를 그리고 그러므로 또한 세계를 분석학의 주제”로 삼는 것이다(66).** 이때 분석학의 직접적인 분석 대상, 곧 “일상적 현존재의 가장 가까운 세계는 주위세계[환경, 주위세계, Umwelt]이다.”(66)

*이는 추후 세계가 암묵적으로, 비주제적으로 남을 때에야만 세계답기 때문인 것으로 밝혀진다. 이러한 사유는 세계를 지평의 일종으로 취급한 후설 철학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라난 것으로 보인다.

**가장 일차적으로 경험되는 근원적 세계가 곧 생활세계, 곧 주위세계이므로(⟪강독⟫, 117).

Q. 인식이 좋은 접근 통로가 아니며, 그것이 세계의 탈세계화된 형태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정답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지 않나? 자연이 ‘이차적’인 데 불과하고, 생활세계를 전제한다는 것을 어떻게 미리 아나? 후설처럼 환원을 하는 것도 아니고.

A. 인식으로 시작하면 세계 자체가 아닌 세계내부적 존재자(자연)를 보게 되기 때문에 인식으로 시작하면 안 된다, 정도이지, 근원성에 대한 주장이 지금 나오는 것 같지는 않다(H씨). ➔ ★나는 여전히 왜 이 현존재 분석이 필연적으로 평균적 일상성에서 시작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후설에게서처럼 객관적 학문의 인식의 가능근거를 탐구하는 데 객관적 학문의 인식을 쓰면 안 되기 때문에 선학문적 세계로 돌아가서 탐구를 시작하는 것도 아니고.

 주위세계성에 대한 분석은 주위세계내부적 존재자에 대한 존재론적 풀이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이때 ‘주위세계’란 표현을 구성하는 ‘Um’ 또는 ‘Umherum’의 계기는 세계성의 구조에 의거해서만 이차적으로 공간적인 의미를 부여받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존재론은 이차적일 뿐인 “공간성으로부터 <세계>의 존재를 레스 엑스텐자로서 풀이하고자 시도했다. 그와 같은 <세계>의 존재론[,] 그리고 존재적으로도 존재론적으로도 현존재와는 합치되지 않는 레스 코기탄스와[ <세계>] 대립[Gegenorientierung] 속에서[의 존재론]의 가장 극단적인 경향은 데카르트에게서 보여진다.”(66) 하이데거는 “데카르트의 이러한 존재론이 근대 존재론의 그 후의 전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강독⟫, 118)

*Q. 이는 절의 초반부에 내세운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 아닌가?

A. 경유해갈 뿐이다(⟪강독⟫, 117-118).

A. 주위세계성과 세계성 일반에 대한 분석

§15 주위세계 내에서 만나지는 존재자의 존재

 주위세계 내에서 만나지는 존재자의 존재는 세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그리고 세계내부적 존재자를 가지고 이루어지는 실천[Umgang (mit), dealing (with), 왕래]*을 실마리로 삼아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익숙한] 실천의 종류는 “단지 인지하기만 하는 인식함”이 아니라 “그 자신의 고유한 ‘인식’을 가지는 다루는[조작하는, hantieren], 사용하는 고려”이다(67). 그렇다면 고려의 과정에서 세계내부적 존재자의 존재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Q. 어째서 ⟪강독⟫에는 ‘교섭[Verhalten]’으로 소개되어 있는가?

 현존재 분석의 “선현상학적 토대”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사물[die Dinge]” 즉 ‘레스’라고 답하는 것은 자명한 일로 보일지언정, 은밀하게 작동하는 존재론적 선입견 하에서 고려의 현상을 은폐한다(67). 레스의 존재에 대한 분석은 사물성이나 실재성, “물질성, 연장성, 서로 나란히 있음 등”과 관련되지만, 이는 고려되는 존재자들의 존재방식을 드러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강독⟫, 119). 사물을 (인식에서) ‘우선 주어지는’[»zunächst gegebenen«] 존재자* 또는 ‘가치가 붙은’[»wertbehaftete«] 그런 사물로 규정한다고 해도 진정한 존재론적 해명이 결여되기는 마찬가지다. 한편 그리스인들은 ‘사물들’을 프라그마타, 즉 (인식이 아닌) 실천에 해당하는 프락시스에서 만나지는 대상으로 적합하게 명명했지만, 프라그마타의 특별히 ‘실용적인’[»pragmatisch«] 성격을 “존재론적으로 애매한 채로 방치해 두었으며 그것을 단순한 사물로 규정해 버렸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이러한 규정이 전통형이상학이 그 이후에 전개되는 방식을 결정했다고 본다.”(⟪강독⟫, 120)

*Q. 왜 그러한가?

A. ‘우선 주어[져서 인식된 다음에 실천이 덧붙거나, 말거나 하]는’의 의미인 것 같다.

 하이데거는 (이처럼 그 존재방식이 ‘사물’의 그것으로 잘못 파악되어온) “고려에서 만나지는[begegnen] 존재자”를 “도구[Zeug, useful thing]”이라 명명하며, 도구의 실용성을 본격적으로 해명하고자 한다(68).* 하이데거는 “도구를 도구로 만들어주는”존재성격인 도구의 도구성[쓸모, Zeughaftigkeit, utility]을 실마리로 삼아 도구의 존재에 대해 묻는다(68).

*Q. 이러한 개념화에서 하이데거는 비본래적으로 실존하는 현존재는 실용성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힌 채 모든 사물을 도구화한다고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이는 일상에서 매우 자주 발견되는 순수한 호기심이나 소위 맹목적인 사물 사용의 사례들을 간과하는 것 같다. 그와 같은 교섭 방식이 어째서 이차적이어야만 하는가?

Q. 인식의 지위가 정확히 무엇인가? 이차적인가, 아니면 실천과 수평적인가?

A. 눈앞의-존재에 대한 학문적 인식, 아니면 눈앞의-존재에 대한 선학문적 인식(H씨)

Q. 그러면 근대 존재론에 대한 비판이 약해지지 않는가? 

A. 근대 존재론도 다 틀린 게 아니라 전제 검토를 안 했을 뿐이다(H씨). / 수평성을 어떻게 해석하든, 근대 존재론이 인식을 실천보다 밑에 놓는 건 특별히 잘못됐다.

 하이데거가 도구의 존재 또는 존재방식을 드러내는 데 있어 주목하는 첫 번째 사태는 바로 하나의 도구는 결코 외따로 떨어져있지 않고 하나의 도구연관[ein Zeugganzes] 속에서만 비로소 존재한다는 것이다. “[목적에] 봉사하는 성격[Dienlichkeit, serviceability, 유용성], 기여하는 성격[Beiträglichkeit, helpfulness], 사용가능성[Verwendbarkeit, usability], 편리성[다루기 쉬움, Handlichkeit, handiness]과 같은 무엇을-위하여’[»Um-zu«, …… 하기 위한]의 상이한 방식들이 도구연관성[Zeugganzheit]을 구성한다.”(68)*

*Q. ‘[목적에] 봉사하는 성격[Dienlichkeit, serviceability, 유용성], 기여하는 성격[Beiträglichkeit, helpfulness], 사용가능성[Verwendbarkeit, usability], 편리성[다루기 쉬움, Handlichkeit, handiness]’이 어째서 무엇을-위하여’[»Um-zu«]의 상이한 방식들인가?

A. 무엇을 위해 봉사한다는 성격, 무엇을 하는 데 기여한다는 성격, 무엇을 위해 사용 가능하다는 성격, 무엇을 하는 데 편리하다는 성격이므로.

 (그런데 도구를 구성하는 첫 번째 계기로서의) “‘무엇을-위하여’의 구조에는 무언가로부터 무언가를 향하는[가리키는] 지시[Verweisung, reference]가 있다.”(68)* 하이데거는 도구연관 내 지시의 다양한 가능성을 보이기 위해, 도구는 언제나 그것이 다른 도구에 귀속된다는[zugehörig] 성격을 부각시킨다. 예를 들어 펜과 잉크, 종이, 책상, 조명, 창문, 문, 서재는 각각 외따로 보여지지[zeigen] 않고 하나의 서재 전체로서 가장 먼저 포착[erfassen](되며, 개별 도구들은 이 전체에 귀속)된다.** 이러한 포착으로부터 개별 도구들이 그 속에서만 비로소 스스로를 보여줄 수 있는[드러낼 수 있는] ‘질서’[»Einrichtung«, orgnaization]가 드러난다. 달리 말해, 개별적인 도구에 앞서 “하나의 도구연관이 언제나 이미 발견되어 있다.”(69)

*Q. ‘무엇을 위하여’의 구조와 단순 지시구조 사이에는 균열이 있는 것 같다. 전자는 일종의 수직적 관계(목적-수단 관계)지만, 단순 지시는 수평적인 상호지시까지 포함한다. 나아가 지시의 예로 제시된 사태도 목적-수단 관계에 의해 지배되어있지 않다(서재는 펜의 목적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무엇을-위하여’가 (도구들 간) 지시 일반을 포괄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가?

A. 하이데거는 동일한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 사용되는 여러 도구들 사이의 상호지시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의 구조를 여러 지시관계들이 구성하고 있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 서재는 펜의 목적이 아니지만, 둘은 협력하여 집필의 목적을 지탱한다.

**Q. 하이데거는 ‘포착[Erfassen]’을 어떤 뜻으로 쓰고 있는가? 줄곧 눈앞의-존재자에 대한 인식의 의미로 사용했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는 아닌 것 같아 혼란스럽다.

A. 해당 예시에서는 방을 관찰하고 있기 때문에, 비일관성이 없다.

 (도구가 그에 속하는 ‘무엇을-위하여’의 구조를 염두에 둔다면) 각 도구에 맞춰진[zugeschnitten], 그로써 도구를 가장 자신답게 드러내주는 실천의 방식은 주제적인 포착이나 도구구조에 대해 아는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도구가 스스로를 가장 자신답게 드러내는 (일차적인 또는 자연스러운) 사용에서 고려함은 도구 자체가 아니라 도구 사용의 목적에 몰두한다. 예를 들어 망치질을 하는 경우, 망치 사용자가 망치를 응시할수록, 망치가 지시하는 목적에 집중할수록 망치는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unverhüllt] 망치로서, 즉 도구로서 현존재에게 자신을 가장 자신답게 드러내보인다. “그 속에서 도구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밝히는[나타내는, 계시하는, offenbaren] 그런 도구의 [일차적인 또는 자연스러운] 존재방식을 우리는 손안에-있음[도구성, Zuhandenheit]이라고 부른다.”(69)* 도구의 손안에-있음은 우리가 도구를 인식한다고 해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물을 단지 ‘이론적으로’ 쳐다보는 시선은 손안에-있음에 대한 이해를 결여한다.”(69)

*“하이데거는 이렇게 망치를 비롯한 도구들이 도구로서 제대로 기능할 경우에는 우리의 주목을 끌지 않고 자신을 부각시키지 않는다는 도구의 존재 성격을 그 자체에 즉해 있음(즉자존재, An-sich-sein)이라고 부르고 있다.”(⟪강독⟫, 122)

 그렇다고 해서 도구적인 실천이 도구를 전혀 ‘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도구적인 실천이 도구에게 겨누는 시선은 (도구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함께 속해있는 지시연관을) 둘러봄[Umsicht, circumspection]이다. 주지하다시피 “도구적 실천[Der Umgang mit Zeug]은 ‘무엇을-위하여’의 지시다양체 하에서 성립하기[sich unterstellen] 때문이다.”(69)

 이와 같은 둘러봄에서 손안에-있는 도구는 본래적으로 손안에-있기 위한 바로 그 이유로 “흡사 뒤로-물러난다[sich gleichsam zurückziehen]. 일상적인 실천이 그 곁에 먼저 머무르는 지점은 작업도구 자체가 아니다. 도리어 [도구의 목적이 되는] 작업물[Werk, work, 제작되어야만 하는 제품], 그때그때마다 생산되는 것이 일차적으로 고려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또한 손안에-있는-것[손안의-존재자, Zuhandene]이다. 작업물은 [작업자가] 그 내부에서 도구를 만나는 지시전체성[Verweisungsganzheit]을 담지한다.”(69) 반면 대상을 쳐다보는 관찰과 같은 이론적 행위는 관찰 대상을 볼 때 해당 대상이 속해있는 전체 지시연관을 둘러보지 않는다[unumsichtig]. 그렇기 때문에 (그처럼 직접적인) 쳐다봄은 일종의 규칙을, 방법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도구의 목표물[사용처, Wozu, what-for]로서의 생산물 또는 작업물[Das herzustellende Werk] 역시 (특정한 목적에 봉사하는 존재자이므로) 도구의 존재방식을 공유한다. 작업의 과정(e.g. 수제화 제작)에서 작업도구보다도 일차적으로 현존재와 관계하는 작업물(e.g. 신발)은 언제나 그것의 사용 및 사용 가운데서 발견될 수 있는 존재자들의 지시연관을 근거로 가지면서만 존재한다. 당장은 궁극적인 목표인 것처럼 보이는 작업물 역시 다른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어 하이데거는 작업물의 존재근거가 되는 지시의 다양한 방향과 범위를 제시한다. 작업의 과정은 우선 그것이 의존하는 (자연적) ‘재료들을 지시한다[»Materialien«]. 예를 들어 신발은 신발을 만들기 위해 쓰이는 가죽을 지시한다. 그런데 이 가죽은 그 가죽의 원래 주인이었던 동물을, 해당 가축을 기른 사육자를 지시한다. 특별한 사육이나 (인위적인) 생산의 과정 없이도 이미 손안에-있는 존재자들도 있다(e.g. 나무에서 바로 따서 먹을 수 있는 산딸기). 이처럼 도구의 지시연관 하에서 자연으로부터 온 생산물들에 의해[im Lichte der, in the light of] 발견되는 것이 (일차적으로 경험되는 것으로서의) ‘자연이다. 이때의 자연은 눈앞에-있는, 객관적 인식의 대상이 되는 과학적 자연이 아니라, 환경으로서 인간을 둘러싸고 인간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그런 자연이다. 자연의 한갓된 눈앞에-있음은 (일차적으로 경험되는 자연으로부터) 추상해낸 산물, “도구적 존재양식으로서의 자연의 존재양식을 도외시할 경우에야” 드러나는 것에 불과하다(⟪강독⟫, 124).

“Die Pflanzen des Botanikers sind nicht Blumen am Rain, das geographisch fixierte »Entspringen« eines Flusses ist nicht die »Quelle im Grund«.”(70)

 생산물 또는 작업물은 그의 사용처[Wozu]와 원재료[어디로부터?, Woraus, whereof]뿐만 아니라 사용자 역시 지시한다. 예를 들어 신발은 그것의 착용자가 되는 (특정한 또는 특정되지 않은) 현존재를 지시한다. 나아가 사용자와 착용자가 그 속에 살고 있는, 그리고 작업자 역시 공유하는 공적 세계[öffentliche Welt, 공공적 세계]가(e.g. 공동체의 유행을 의식하면서 만들어지는 신발), 그리고 공적 세계에서 발견되는 환경으로서의 자연[Umweltnatur]이 함께 지시된다. (예를 들어 공적 세계 내의 다리는 그 다리가 건너야 하는 시냇물을 염두에 두고 지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다리를 건너는, 곧 도구로서 사용하는 과정에서는 다리뿐만 아니라 자연 역시 현존재의 손안에-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지시들은 물론 지시되는 것의 발견을 가능케 한다.*

*‘발견’이라는 표현 자체가 발견되는 것이 평소에는 은폐되어있음을 잘 드러내준다.

 “[…] 사람들은 흔히 자연은 자연과학에 의해서 파악된 것으로서 먼저 존재하고 우리가 그것에 우리의 주관적인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비로소 도구나 여타의 유의미한 것들이 생기게 된다고 생각한다. […] 그러나 하이데거는 자연과학자도 일차적으로는 존재자들을 도구로서 사용하면서 고려하는 세계-내-존재로서 존재하며 자연과학은 그러한 세계-내-존재의 파생적인 사유방식이라는 데 주목한다.”(⟪강독⟫, 125)* (자연스러운) 세계--존재에서 (도구의) 손안에-있음은 (그것의) 눈앞에-있음보다 우선적이다. “손안에-있음은 그것이 자체로[an sich]’ 존재하는 대로의 존재자에 대한 존재론적-범주적 규정”이기 때문이다(71). 요컨대 존재자들이 “도구를 사용하는 고려”를 통해 세계 내에 이미 근원적으로 개시되어있어야만 그에 대한 이론적인 고찰도 가능하다(⟪강독⟫, 125). 그러나 하이데거는 ①손안의-존재자는 오직 눈앞의-존재자에 근거해서만 존재하게 되는[주어지는] 것 같다는 잠재적 반박**, 그리고 ②설령 손안에-있음이 눈앞에-있음보다 근원적임이 입증되더라도, 손안에-있음에 대한 분석이 세계의 현상에 대해 무언가를 알려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는 문제를 지적한다.

*이러한 주장은 1925-6년에 행해진 후설의 ⟪현상학적 심리학⟫ 강의에서 선취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과학이 형성되는 근원적인 장소는 ‘순수 자연’이 아닌 단적으로 경험되는 상호주관적 세계이다(Hua IX, 58). 이어 후설은 자연과학자의 순수 자연이 경험세계로부터 지난한 추상의 절차를 거쳐 비로소 획득되는 과정을 해설한다(Hua IX, 118-121). 일차적으로는 주관적인 양상으로, 그리하여 무궁무진한 시간적, 관점적 차이 가운데서 주어지는 세계로부터 정신성 일체를 제거한 뒤에야 과학의 대상으로서의 참된 자연이 얻어진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후설의 ‘경험’ 개념을 ‘존재가능성의 실현’으로 재이해하고 있으며, 다양한 경험들의 가능근거로서 (초월론적 주관성의 구조가 아닌) 인간적 현존재의 실존의 구조를 탐구하고 있다. 나아가 세계가 단순히 경험의 전제이자 지평이라고 주장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이 도구들의 지시연관으로서 존재함을 세밀하게 지적하고 있다.

cf. “Die Ursprungsstätte aller objektiven Tatsachenwissenschaften oder, was dasselbe, aller WeItwissenschaften ist ein und dieselbe. Die eine Welt, auf die sie alle bezogen sind, ist ursprünglich gegeben als die schlichte Erfahrungswelt, also die von uns geradezu und unmittelbar wahrgenommene in ihrer Gegenwart und als wahrgenommengewesene und wiedererinnerte hinsichtlich ihrer Vergangenheit. Von der Welt haben wir oder gewinnen wir mannigfaltiges Wissen und Wissenschaften; aber erst muß, sagten wir, eine Welt, erst müssen Dinge, Vorgänge und dergleichen schlicht erfahren sein, damit Denktätigkeit ins Spiel treten und Wissen über die Dinge zu höchst wissenschaftlichen Theorien über sie (die Idealität der Wahrheit) gestalten kann.”(Hua IX, 58)

**“Aber Zuhandenes »gibt es« doch nur auf dem Grunde von Vorhandenem.”(71) / cf. “Was so aufleuchtet[=주위세계], ist selbst kein Zuhandenes unter anderen und erst recht nicht ein Vorhandenes, das das zuhandene Zeug etwa fundiert.”(75)

§16 세계내부적 존재자로부터(an) 알려지는 주위세계의 세계적합성[Weltmäßigkeit, worldly character, 세계연관성*]

*“도구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가 거주하는 주위세계로부터 의미를 부여받음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도구로서 존재하게 된다는 것”(⟪강독⟫, 126)

 그 자체로 세계내부적 존재자인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세계내부적 존재자를 비로소 발견되게 해주는 (유일한 지평인) “세계는 어떻게 ‘주어지는가’?”[wie »gibt es« Welt?](72) 하이데거는 거듭, 현존재가 존재적으로 세계-내-존재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면, 그가 세계 내부의 존재자들을 가지고 이런저런 실천을 일삼는 가운데 해당 존재자들의 세계성이 어떤 것인지, 세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선존재론적 그리고 선현상학적 이해를 (미규정적으로나마)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어 하이데거는 이와 같은 선행적인, 그러나 암묵적이고 무엇보다도 무의식적인 가까운 세계이해언제 명시적으로 탈은폐되는지를 탐구한다.) 다음에서 해명되는 고려의 세 양상들은 고려되는 세계-내부-존재자[das Innerweltliche], 곧 도구의 세계적합성을 (그리고 그로써 세계 자체의 존재방식*을) 드러내준다.

*세계 자체의 존재는 실천의 지평으로서의 지시연관인 것으로 추후 밝혀진다. 엄밀히 말해, “세계는 존재자가 아니기 때문에 존재한다(ist)고 말하지 않고 ‘주어져 있다’(es gibt)라고 말”해야 한다(⟪강독⟫, 126).

 ①우리의 손안에-있는 도구는 고려의 와중에 사용에 부적합하거나 사용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이 같은 도구의 사용불가능성[Unverwendbarkeit]이 실천하는 둘러봄이라는 사태를 개시해준다고 분석한다. “사용불가능성에 대한 그와 같은 발견에서 도구는 두드러진다. 두드러짐[현저함, Das Auffallen]은 손안에-있는 도구를 특정한 손안에-없음[Unzuhandenheit, unhandiness] 속에서 부여한다[나타낸다, geben, present].”(73) 이렇게 두드러진 도구는 “그저 거기 있”는 것, 곧 눈앞의-존재자로 보여지며, 도구가 수리의 대상으로서 고려될 때까지 그렇다(73).* 

*그렇다고 해서 눈앞에-있는 사용이-불가능해진 그런 도구가 눈앞의-존재자로서 단순히 특성상의 변화[Wechsel von Eigenschaften]를 겪었다거나, 손안에-있음이라는 (근원적인) 존재성격을 상실하게 된 것은 아니다. 고장 등으로 인해 당장 손안에-없어진, 말하자면 손에-잡히지-않게-된(unzuhanden werden, become unhandy)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손안의-존재라는 존재성격이 그것의 본래적인 존재성격이다.

 ②두드러짐뿐만 아니라 필요한데-없음[Das Vermissen] 역시 (원래는) 손안에-있는 것이어야 할 도구를 단순한-눈앞의-존재[Nurvorhandensein]를 담지하는 것으로서 발견한다. 이처럼 필요한데-없는 그런 “손안의-존재자는 손안에-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속에서 절실성[Aufdringlichkeit]의 양상으로 나타난다.”(73)

 ③고장난 도구가 두드러지는 경우에서처럼 사용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필요한데 없기는커녕 내 손안에-잘 있지만, (내가 원하는) 고려의 ‘길을 막는’[»im Wege liegt«], 곧 고려를 방해하는[stören] 도구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방해는 해당 도구를 손안에-없는 것, 그것도 도구 사용자에게 저항[반항]하면서 눈앞에-존재하는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저항성[Aufsässigkeit]은 도구 사용자로 하여금 (눈앞에) 우선적으로 놓여있는 그 도구를 얼른 해치우도록[erledigen], 그 도구부터 고려하도록 요구한다.**

*Q. “Das, woran das Besorgen sich nicht kehren kann, dafür es »keine Zeit« hat”(73)이 어째서 이런 도구인가?

A. 나로 하여금 정말 해야 할 것을 할 시간을 뺏어서…? 제작에 방해가 되고 제작을 중단시키니까? ➔ 방해하는 것뿐 아니라 그래서 방해되는 것(기존의 목표물)까지 손안에-없어짐(H씨)

**Q. 여기서 내게 저항하는 저 도구는 ‘없어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방해되는가(Nichthergehörig), 아니면 ‘내가 정말 원하는 바를 얻으려면 잘 처리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방해되는가(Unerledigt)? 후자의 경우에는 손안에-없지 않은 것 같아서 이상하다.

A. 두 의미가 다르지 않다. 후자의 경우, 나의 목적에 부적합하기 때문에 해당 목적연관 하에서는 손안에-없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Q. ①, ②, ③이 상호배타적인지 모르겠다. 모든 경우에 ①현저성이 성립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또 고장으로 인한 ①현저성에서도 ③저항성은 성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A. 현저성은 사용 불가능성으로 인한 현저성만을 지시한다.

Die Modi der Auffälligkeit, Aufdringlichkeit und Aufsässigkeit haben die Funktion, am Zuhandenen den Charakter der Vorhandenheit zum Vorschein zu bringen. Dabei wird aber das Zuhandene noch nicht lediglich als Vorhandenes betrachtet und begafft, die sich kundgebende Vorhandenheit ist noch gebunden in der Zuhandenheit des Zeugs.”(74)

 하이데거는 “현저성, 절실성, 저항성[두드러짐, 절실해짐 그리고 해치우고-싶음] 속에서 손안의-존재자는 특정한 방식으로 그의 손안에-있음[도구적 성격]을 상실한다[verlustig gehen]. 그러나 이것[이 사태] 자체는 손안의-존재자와의[손안의-존재자를 가지고 이루어지는] 실천 속에서, 비주제적이긴 하지만, 이해되는 것”이라고 말한다(74). 하이데거는 상술한 고려의 양상들에서 손안의-존재방식이 소멸하는[verschwinden] 것이 아니라, 잠시 (도구와) 이별하는[sich verabschieden] 것이라고 비유한다(74). 역설적이게도, 이 같은 이별 가운데서 도리어 해당 도구의 손안의-존재성격이, 그리고 그와 더불어 손안의-존재자의 세계적합성이 비로소 보여진다.

 물론 주지하다시피, 도구는 그것이 두드러지지도, 필요한데 없지도, 해치워야 것으로 짜증을 불러일으키지도 않을 도구의 지시연관으로서의 세계가 비주제적으로 남을 가장 -자체[an-sich, in-itself] 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비현저성, 비절실성, 비저항성과 같은 결여적인 성격들이야말로 우리 주위의 도구의 존재가 지닌 적극적인 현상적 성격들”이며, “도구의 ‘그 자체에 즉해 있음’을 구성한다.”(⟪강독⟫, 130) 추상적인 인식으로서 “둘러보지 않는, ‘주제화하는’ 포착”에서는 도구가 그 자체로 있는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75).

 도구의 사용불가능성은 도구를 구성하는 “무엇을-위하여[하기-위한]로부터 그래서-함[what-for]으로의 구성적 지시[die konstitutive Verweisung des Um-zu auf ein Dazu]”*를 방해함으로써 오히려 해당 지시를 명시적인 것으로 만들어준다(74). 단, 도구의 사용불가능성을 통해 명시되는 지시는 존재론적 구조로서 명시되는 것이 아니라, 둘러봄의 과정에서 존재적[현실적] 사태로서 명시된다(존재론적 구조로서 지시를 탈은폐하려면 별도의 현상학적 해명이 요구될 것이다). 도구가 관여되어있었던 전체 작업연관, 도구 사용자가 그에 (무의식적으로) 머물러왔던 “전체 ‘작업소’”가 비로소 (의식적으로)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다. 세계는 이렇게 밝혀진 도구연관 전체로써 스스로를 알린다.**

*Q. 어떤 지시관계를 가리키는지 잘 모르겠다. + 더 좋은 번역어가 없을까?

A. 강철을 때려서 평평하게 만들려는 목적(um-zu), 검(dazu) (J씨)

**Q. 이 전체 내용은 ①현저성과 관련해서만 해당되는가? 아니면 ①, ③ 모두에 해당되는가?

A. ①과만 관련된 내용 같다.

“Der Zeugzusammenhang leuchtet auf[빛난다, 반짝거린다] nicht als ein noch nie gesehenes, sondern in der Umsicht ständig im vorhinein schon gesichtetes Ganzes. Mit diesem Ganzen aber meldet sich die Welt.”(75)

 필요한 도구가 없는 경우에도, 그렇게 지시연관에 생겨난 단절[Bruch, breach]은 오히려 해당 지시연관을 드러내준다. 도구 사용자는 당장 없는 그 도구가 무엇을 위해 필요했고, 무엇으로써 만들어졌으며, 무엇과 함께 존재해야 하는지 또는 존재했었는지[wofür und womit das Fehlende zuhanden war]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로써 “다시금 주위세계가 자기 자신을 알린다.”(75)

 “이제까지의 해석에 따르면, 세계-내-존재란 ‘주제화하는 파악이 아닌 둘러봄에 의해서 도구들 전체의 도구적 성격을 구성하는 지시들 속에 몰입해 있는 것’을 의미한다.”(⟪강독⟫, 131) 주위세계는 “모든 확정과 고찰에 앞서 ‘거기’에[im »Da«] 있다”는 의미에서 도구 사용자의 둘러보는 시선을 위해 언제나 이미 [상이한 정도의 명시성으로] 개시되어있다[erschlossen 또는 “vorerschlossen”(76)].”(75) (단, 세계의 이와 같은 개시성 자체도 특정 도구가 세계성을 상실함으로써 주제화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전문용어로서 ‘개시성[Erschlossenheit]’이 잠기지-않음[개방성, Aufgeschlossenheit]을 의미한다고 덧붙인다. 

“Daß die Welt nicht aus dem Zuhandenen »besteht«, zeigt sich u. a. daran, daß mit dem Aufleuchten der Welt in den interpretierten Modi des Besorgens eine Entweltlichung des Zuhandenen zusammengeht, so daß an ihm das Nur-vorhandensein zum Vorschein kommt. […] Die privativen Ausdrücke wie Unauffälligkeit, Unaufdringlichkeit, Unaufsässigkeit meinen einen positiven phänomenalen Charakter des Seins des zunächst Zuhandenen.”(75)

★Q. “Das Besorgen ist je schon, wie es ist, auf dem Grunde einer Vertrautheit mit Welt. In dieser Vertrautheit kann sich das Dasein an das innerweltlich Begegnende verlieren und von ihm benommen sein.”(76)에서, 세계에 몰두하는 것이 어째서 바로 현존재의 자기상실과 동치되는가?

A. 현존재를 오롯이 보려면 Umsicht가 아닌 다른 봄의 방식이 요구된다. 세계에 대한 몰두에서는 자기가 자기를 이해하고 있다는 사태가 안 드러난다.

§17 지시와 기호(Verweisung und Zeichen)

 세계현상을 보다 광범위하고 확실하게 (그것의 은폐로부터 꺼내) 노출시키기 위해 하이데거는 지시의 본질을 탁월하게 보여주는 도구인 기호[Zeichen, sign]를 분석한다. 본격적인 분석에 앞서 하이데거는 지시를 ‘관계[Beziehung]’의 일종으로 분석하는 것을 경계한다. ‘관계’의 개념은 그로부터 모든 실질적 내용[Sachhaltigkeit]이 제거된, 그러므로 지나치게 형식적인 개념이어서 (지시가 관계이기는 하지만) 지시 자체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표시하는[zeigen] 도구로서의 기호의 특수한 지시구조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은 기호가 “손안에-있음의 존재론적 구조, 지시전체성 그리고 세계성”을 드러내주는[anzeigen]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을 밝혀줄 것이다(82). 이로부터 궁극적으로는 관계 개념이 지시 개념을 자신의 존재론적 근원으로 가진다는 점, 즉 지시에 대한 형식화가 관계를 산출한다는 점이 드러난다.*

*“Am Ende muß sogar gezeigt werden, daß »Beziehung« selbst wegen ihres formal-allgemeinen Charakters den ontologischen Ursprung in einer Verweisung hat.”(77)

 기호특별히 표시함으로써 지시하는 도구다. 기호의 예로는 차량의 방향표시등이 있다. 차량의 방향표시등은 해당 차주의 도구일 뿐만 아니라 다른 운전자들에게도 의사결정을 도와주는 도구로 기능하며, 교통과 관련된 도구 및 규칙 일반의 지시연관에 속한다는 의미에서 “세계내부적으로 손안에-있는[innerweltlich zuhanden]” 존재자다(78). 여기서도 “도구로서 이러한 표시도구는 지시에 의해 구성된다. 그것은 무엇을-위하여의 성격을, 특정한 봉사성[유용성]을 가진다. 그것은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78)*

Q. “Von diesen »Zeichen« sind zu scheiden: Spur, Überrest[residues], Denkmal, Dokument, Zeugnis[certificates], Symbol, Ausdruck, Erscheinung, Bedeutung. Diese Phänomene lassen sich auf Grund ihres formalen Beziehungscharakters leicht formalisieren […]”(78)을 이해하지 못했다.

A. 기호의 지시: 직접적 지시, 반면 상징이나 표현의 지시는 비유적이거나 숨겨진 지시. 대응관계 쉽게 리스트업 가능, 맥락에 따라 변하지 않음. 반면 기호는 구체적인 맥락에 의존해 무엇을-위하여 구현.

 그런데 하이데거는 표시로서의 ‘지시’가 기호로서의 도구를 (존재론적 구조로서) 근거 지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기호로서의 도구의 존재(론적) 구조—특정한 목적을 위한 유용성—가 표시로서의 ‘지시’를 근거 지운다고 지적한다. 표시로서의지시는 유용성이 그를 위한 것인 그런 목표[Wozu einer Dienlichkeit]가 특정한 도구(기호)와 관련하여 존재적으로 구체화된 것[Konkretion]인 반면*, 무언가를 위한 유용성이라는 지시는 모든 도구를 도구로 만들어주는 존재론적 범주 곧 “도구구성틀[Zeugverfassung]”이다(79). 두 관계집합 사이의 교집합에 속해있는 존재자는 곧 표시도구로서의 기호뿐이다. 기호 즉 “표시도구[Zeigzeug]는 고려하는 실천 속에서 우월한[보다-선호되는, vorzüglich, eminent] 사용을[사용처를] 가진다.”(79)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이는 기호가 “손안에-있음, 지시전체성, 그리고 세계성의 존재론적 구조를 보고해주는[anzeigen] 것으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82).

*Q. 어째서 표시가 목적의 구체화라는 건지 모르겠다.

A. 표시하고자 한다는 목적은 목적 일반이 구체화된 것으로 볼 만하다. “[…] 기호의 표시작용은 유용성의 ‘……을 위해서’의 특정한 구체화로서 도구의 구조 일반, 즉 ‘하기 위한’(지시)에 구조를 두고 있다.”(⟪강독⟫, 137)

 기호가 무언가를 표시함은 어떤 사태를 가리키는가? 표시도구 및 그것의 손안의-존재를 살펴보면, 표시도구에 가장 적합한[angemessen] 실천방식은 바로 해당 기호가 표시하는 대로 고려하는 실천의 방향을 설정하기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방향표시등의 옛날 버전인, 앞 차의) 화살표라는 표시도구를 본 운전자에게 적합한 행위는 피하기[Ausweichen] 또는 가만히-있기이다. 이 둘은 모두 세계-내-존재함으로서 ‘특정한 방향으로 계속 가고 있기(“irgendwie ausgerichtet und unterwegs[sein]”(79))’의 상이한 방향성들이다. 다시 말해, 현존재는 해당 표시도구를 통해 주위세계 내에서 자신이 계속 나아가야 할 (이 경우 공간적인) 방향을 부여받는다.

 이때 현존재는 해당 기호를 순전히 인식적으로 포착하지 않는다. 그는 기호를 (단지) 둘러보면서 내려다보며[übersehen], 그로써 “주위세계 내부에서 하나의 방향설정[Orientierung] 획득”할 뿐이다(79). 존재자가 아닌 올바른 태도나 방향성이 포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호는 (적어도 일차적으로는) “다른 사물과 표시하는 관계를 맺는 사물이 아니라**, 하나의 도구전체를 명시적으로 둘러봄 속으로 부각시켜[in die Umsicht heben], 부각과 함께 손안의-존재자들의 세계적합성[도구의 세계연관성] 스스로를 알리도록 하는 도구다.”(80, 강조는 하이데거)

“Die Zeichen zeigen primär immer das, »worin« man lebt, wobei das Besorgen sich aufhält, welche Bewandtnis[relevance] es damit hat.”(79-80)

 기호의 제정[Zeichenstiftung]은 기호의 이 같이 탁월한 도구성격을 잘 보여준다. “기호의 제정은 둘러보는 예견(Vorsicht)에 의해서 수행”되는데, “이러한 예견은 언제든지 어떤 도구를 통해서 주위세계가 눈에 띄게 하는 것을 목표한다.”(⟪강독⟫, 134) 그런데 하이데거에 따르면 손안의-존재자의 존재에는 “자신(만을)-붙드는 밖으로-나오지-않음[ansichhaltende Nicht-heraustreten, not emerging and keeping to itself]의 성격이 속한다.”(80) 그렇기 때문에 그처럼 두드러지지 않는 것을 두드러지게 하고, 둘러보는 실천[umsichtige Umgang]을 가능케 하는 도구가 별도로 요구되는데, 그것이 바로 표시도구로서의 기호다.* 이미 있는 사물이 기호로 취해지는 경우는 특히 주목할 만한데, 기호의 제정을 통해 기호화된 존재자(e.g. 비가 올 것을 알리는 남풍)의 존재가 처음으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남풍의 경우 먼저 특정한 (물리학적) 운동이 있고 그 다음에 문화적인 의미가 덧붙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농사의 둘러봄[…]이 비로소 남풍을 그것의 존재에서[in] 발견한다.”(81)**

*기호가 현저할 수 있는 것은 도구의 전체 연관이 현저하지 않은 덕분이다(81).

Q. 표시의 기능을 떠안기 이전의, 그 유용성이 불분명한 그러나 분명히 그것과의 만남은 이미 성취되어 있는 그런 손안의-존재자를 어째서 눈앞의-존재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가? cf. “Man darf auch hier wieder nicht die umsichtig noch unentdeckten Zeugcharaktere von Zuhandenem interpretieren als bloße Dinglichkeit, vorgegeben für ein Erfassen des nur noch Vorhandenen.”(81)

A. “그것은 순수하게 우리 눈앞에 존재하는 사물로서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아직 이해되지 않은 어떤 도구로서 발견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어떻게 다룰지 몰랐고 따라서 아직까지는 그 도구적 성격이 은폐되어 있는 그런 도구로서 발견되는 것이다.”(⟪강독⟫, 136)

★**Q. 남풍의 존재를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가?

A. 인간에게 세계가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이상하지 않다. + 지금은 ‘기호’를 분석하고 있으므로 더욱이 이상하지 않다. + 동물들도 제 나름의 기호작용을 통해 세계를 도구화하며(특정한 목적 하에서 활용하며) 살아간다(H씨).

Q. 관조도 일차적일 수 있다?

 이어 하이데거는 고려에서 기호가 수행하는 역할을 이해하는 것이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원시적 현존재의 기호 사용—페티시즘, 마법 등과 관련하여—을 근거로 들려는 유혹을 경계한다. “[…] 기호 일반의 이념을 실마리로 해서 우상이나 주술을 해석하는 것은 원시적 세계에서의 존재자들이 갖는 도구적 존재방식을 파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강독⟫, 136). 원시적 현존재에게 기호는 기호가 표시하는 것을 대신하지 않고 도리어 그것과 일치한다[zusammenfallen]. 이러한 일치는 기호가 아직 기호화된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그리로부터 떨어져나오지[ablösen, detach] 못한 사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일종의 동일화나 객관화가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작용의 부재로부터 기원한다.*

*Q. “Das besagt aber, daß Zeichen überhaupt nicht als Zeug entdeckt sind, daß am Ende das innerweltlich »Zuhandene« überhaupt nicht die Seinsart von Zeug hat.”(82)를 이해하지 못했다.

A. “그러나 이것은 기호 일반이 아직 도구로서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것, 결국 세계 내부적 도구 일반이 아직 도구적인 존재양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 세계성의 형식적 이념[…]이 분명하게 밝혀졌을 경우에만, 우리는 원시적인 세계를 아직 그러한 세계성을 실현하지 않은 것으로 보면서 그것이 갖는 특성을 분명히 할 수 있다.”(⟪강독⟫, 137)

Q. 그렇다면 세계성은 모든 세계의 공통속성이 아닌, 일종의 이상/이데아인가?

A. 원시세계도 세계성을 가지는데, 미분화 상태일 뿐. 기호가 있긴 있는데, 지시항이랑 구분이 안 됐을 뿐. 공통속성 맞고, 이상은 아님(H씨).

Q. 하이데거는 원시적 세계를 현대세계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원시세계를 결여태로 보는 게 문제적이다.

A. 위계 설정이 되고 있지는 않다. 다만 특정한 가능성이 실현되지 않고 있을 뿐(R씨). 결여가 있다 —> 열등하다(x). 가치판단(x), 사실판단(o)

 하이데거는 기호와 (도구의 존재로서) 지시 사이의 관계를 세 가지 측면에서 정리하면서 절을 마무리한다. 첫째, “표시함은 도구구조 일반 내에서 한 유용성의 목표[Wozu]가 가능하게 구체화된 것[mögliche Konkretion]으로서 무엇을-위하여[Um-zu](지시) 속에서 정초된다.”(82) 둘째, “손안의-존재자의 도구성격으로서 기호의 표시함은 하나의 도구전체성에, 하나의 지시연관에 속한다.”(82) 셋째, “표시함은 다른 도구와 함께 손안에-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손안에-있음 속에서 주위세계가 언제나 둘러봄을 위해 명시적으로 접근 가능해진다.”(82) “지시는 도구의 존재론적 성격 자체를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기호와 같은 어떤 특정한 도구들의 존재적 규정성은 아”니다(⟪강독⟫, 138).

Q. 기호가 왜 둘러봄을 특별히 잘 보여주는지 모르겠다. (H씨)

A. 다른 도구: 암묵적 지시/기호: 명시적 지시

Verweisung ist nicht die ontische Bestimmtheit eines Zuhandenen, wo sie doch Zuhandenheit selbst konstituiert. In welchem Sinne ist Verweisung die ontologische »Voraussetzung« des Zuhandenen, und inwiefern ist sie als dieses ontologische Fundament zugleich Konstituens der Weltlichkeit überhaupt?”(82)

§18 유관성(Bewandtnis, relevance, affordance, tournure, 용도, 사용사태, 적소성) 유의미성(Bedeutsamkeit); 세계의 세계성

Q. ‘Bewandtnis’=유관성 vs 용도?

A. 수평적인 상호지시도 가리켜야 하기 때문에 ‘용도’라고 번역하면 너무 적극적이다? / 전체 연관이 배후로서 끌려온다는 걸 잘 가리켜줘야 한다(H씨).

 손안의-존재자를 둘러싼 실천에서 세계는 비주제적이기는 하지만 언제나 이미거기’”있는 것으로서 사전에[vorgängig] 발견되어있다(83). 세계는 지시라는 도구구성틀[Zeugverfassung]을 가지는 세계내부적 존재자를 현존재의 고려를 위해 비로소 개방해주는[개현해주는, freigeben]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개방[개현]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이데거에 따르면 각각의 도구가 자신의 사용처 또는 목적과 관련하여 가지는 구체적인 지시의 기능은 해당 도구적 존재자의 존재론적 구조이지, 한갓된 특성[속성, Eigenschaft]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도구는 그것이 어떤 특성을 가지든지 간에 다른 무언가를 지시하는 채로 존재한다(지시성[Verwiesenheit]). 그러므로 “손안의-존재자의 존재성격은 유관성[용도]이다. 유관성 속에는 무언가를 다른 무언가를 함에 있어 [그것과] 관련지음[bewenden lassen mit etwas bei etwas]이 놓여 있다.”(84)** 그러므로 개방은 (다른 것과의) 유관성이라는 세계내부적 존재자의 존재 근거해서[darauf] 성립한다. 어떤 도구가 어디에 유용하고 무엇을 위해 사용되는지 등의 개별적인 유관성은 유관성의 총체[Bewandtnisganzheit, total relevance, 용도 전체성]에 의해 ‘미리’[»früher«] 윤곽지어져 있다[vorgezeichnet].

*Q. ‘특성 ➔ 적합성[Geeignetheit] ➔ 지시성’으로 이어지는 논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A. 도구의 특성은 도구의 적합성 또는 부적합성에 구속되어 있으며(또는 그것에 의해 정초되며), 이 적합성 또는 부적합성이란 도구가 지시하는 목적에 의거해 판단되는 것이다.

**“용도에는 ‘어떤 것을 가지고 어떤 경우에 쓴다’는 사실이 함축되어 있다. ‘……을 가지고 ……에’라는 관계가 지시라는 말이 실질적으로 가리키는 것이다.”(⟪강독⟫, 139) 

 그런데 유관성의 총체는 궁극적으로 더 이상 자신을 넘어서서는 다른 것과 유관하지 않은 하나의 목적[어디로, Wozu]을 소급지시한다.* “일차적인 ‘어디로’는 누구를-위해서[궁극목적, Worum-willen, for-the-sake-of-which]이다.”(84) 이 누구를-위해서는 언제나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는 현존재의 존재, 곧 그가 어떤 ‘누구’가 될 것인가—나중에 밝혀지겠지만, 비본래적으로 존재하는 현존재가 될 것인가,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현존재가 될 것인가—와 관련되어있다.

*Q. 현존재 자체가 유관성의 총체를 한 데 묶어주는 궁극목적인가, 아니면 현존재의 존재가능성 중 하나가 궁극목적인가? 애매하게 서술되어 있다.

A. 현존재의 비본래적 존재 또는 본래적 존재가 곧 궁극목적이기 때문에 결국 둘 다 맞는 말 같다. cf. “도구들은 궁극적으로는 현존재의 특정한 존재가능성을 위해 존재하며, 어떤 도구가 어떤 용도를 갖는가는 최종적으로는 현존재의 존재가능성 지시하는 용도 전체성에 의해 규정된다.”(⟪강독⟫, 139-140)

 하이데거는 이 같은 궁극목적의 개념을 세계성과 관련하여 해명하기 위해서는 관련지음’[das »Bewendenlassen«, letting something be relevant, (도구를) 그것이 쓰일 용도에 따라서 존재하게 함]에 대해서부터 논해야 한다고 말한다. 관련지음이란 존재적으로는 특정한 사실적인 고려 가운데서 무언가로 하여금 그것 자신으로 그리고 그것 자신이 되도록 ‘존재하게[존재할 수 있게] 함[sein lassen]’이다. “망치를 못을 박는 데 사용하는 것”이 이런 존재적 의미의 한 예화이다(⟪강독⟫, 141). 다른 한편 존재론적으로 ‘존재하게’ 함이란 최초의 생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기는 하)는’ 것을 비로소 “그것의 손안에-있음 속에서[그것의 도구로서의 성격에 입각해] 발견하고 […] 만나지게 함[begegnen lassen, letting something be encountered]”을 가리킨다(85). 그러므로 관련지음은 모든 손안의-존재자가 그것의 존재에 걸맞게 현존재와 만나지게 해주는 것, 즉 고려의 아프리오리한 존재론적 가능조건이다. 달리 말해, 존재론적 아프리오리로서의 관련지음은 존재적인 (곧, 존재적으로 특정한 방식의) 관련지음을 가능케 하는 바로 그것이다. 

 나아가 존재론적 아프리오리로서의 관련지음은 특정한 도구가 존재적으로 당장은[gerade] 유관하지[용도를 가지지] 않더라도, 또는 현존재가 해당 도구를 그것이 존재하는 그대로 고려하지 않고 그것의 존재방식을 변경하고자 하는 경우에도 그것을 개방시킨다. 쉽게 말해, 관련지음이 비로소 존재자를 도구로서 (현존재에 의한) 고려를 위해 개방한다.*

*“Aus dem Wobei des Bewendenlassens her ist das Womit der Bewandtnis freigegeben.”(85) 여기서 관련지음을 도구화로, 개방[Freigabe]을 ‘(특정한 목표를 지시하는) 사용을 위해 주어지게 또는 주어져있음정도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다.

 이때 고려하는 현존재의 존재방식은 “유관성을 근거로[auf Bewandtnis hin] [도구적 존재자를] 개방해주는 언제나-이미[-무언가를-다른-무엇()-]관련지어놓았음[Je-schon-haben-bewenden-lassen]”이라는 “아프리오리한 완료사[Perfekt]”로 특징지어진다.* 관련지음은 이처럼 늘 완료되어있는 무엇이기 때문에 ‘존재자’란 (그 자체로) “언제나 이미 주위세계적으로 손안에-있는-것”이며, 결코 우선은 눈앞에-있는 질료인, 그리고 사후적으로 도구가 되거나 되지 않거나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85).

*Q. 18절의 서두와 내용이 배치돼 혼란스럽다. 관련지음은 세계의 역할인가, 아니면 현존재의 소행인가? cf. 하이데거가 관련지음의 주체에 대해 명시하지 않고 수동태로 서술을 일관하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A. 이어 상술되겠지만, 그 세계가 현존재의 세계다. “[…] 현존재가 어떤 도구를 특정한 용도에 사용하기 위해서 현존재는 모든 존재자들을 어떤 용도를 갖는 도구로서 이미 발견해야 하며, 이는 다시 현존재가 […] 용도 전체성을 이미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하이데거는 이러한 용도 전체성이 현존재의 궁극목적에서 시작되는 목적연관의 전체성에 근거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이렇게 현존재의 궁극목적에서 시작되는 목적연관의 전체성이야말로 세계의 본질에 해당하는 […] 세계성이라고 보고 있으며 그것을 유의의성이라고 부르고 있다.”(⟪강독⟫, 141)

 관련지음이 늘 완료되어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내부적 존재자가 그것을 지시하면서 우선 개방되어있는 그런*) 유관성의 총체[전체 정황] 또한 늘 미리 발견되어있다[vorentdeckt]. 그런 의미에서 손안의-존재자는 ‘발견되어있음[Entdecktheit]’이라는 존재 가능성을 가진다. 반면 현존재는 그 본질상 발견 가능한[entdeckbar] 무엇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유관성의 총체[전체 정황, 용도 전체성] 사전적인 개시[vorgängige Erschließen]현존재의 세계이해와 동일하다. 요컨대 세계--존재에 대한 현존재의 이해란, 그가 특정한 궁극적인 목적 하에 이런저런 도구적인 실천을 도모하는 지평으로서의 도구연관 전체에 대해 암묵적으로, 그리고 모든 구체적 실천에 앞서 가지고 있는 이해와 다르지 않다.

*“das, worauf innerweltlich Seiendes zunächst freigegeben ist”(85)

 이때 현존재가 자신의 실천 지평에 대해 가지는 이해는 현존재의 자기지시를 전제한다. 유관성의 총체로서 도구연관 전체에 대한 이해의 근거에는 모든 (하위) 목적[Wozu]이—그리고 더욱더 하위에 있을 목적[Dazu], 그때그때마다의 해당 목적의 수행함[Wobei, e.g. beim Hämmern] 수행의 수단[Womit, e.g. mit dem Hammer]도 당연히—궁극적으로 그리로 소급되는 누구를-위해서[das Worum-willen]에 대한 이해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cf. “예를 들어 현존재가 거주할 집을 지을 경우 현존재가 안전하게 거주한다는 것이 궁극목적(Umwillen)에 해당하는 것이고 안전하게 거주하기 위해서는 집이 필요한바, 집이 바로 ‘……을 위하여’(Um-zu)에 해당한다. 그리고 다시 집을 짓기 위해서는 판자를 고정하는 것이 필요한바, 판자를 고정하는 것이 ‘그것을 위해서’(Dazu)에 해당한다. 판자를 고정하기 위해서는 못을 박는 것이 필요한바, 못을 박는 것이 ‘무엇에’(Wobei)에 해당하고, 못을 박기 위해서는 망치가 필요한바, 망치가 바로 사용되는 도구(Womit)에 해당한다.”(⟪강독⟫, 142)

 그런데 현존재가 그를-위해서 존재하는 그것이란 그의 본래적인 또는 비본래적인 존재잠재태[Seinskönnen]이다. 현존재는 둘 중 하나의 존재잠재태에 의거하여 특정한 궁극목적에로 그리고 그에 봉사하는 손안의-존재자들에로 언제나 이미 지시되어있다[verwiesen]. 현존재의 (본래적 자기 또는 비본래적 자기, 그리고 그에 의거한 특정한 궁극목적을 향한) 사전적인 자기지시의 장소[Worin]이자, 그로 하여금 유관성이라는 방식으로 도구적 존재자 전체 연관과 만날 있게 해주는 가능근거[Woraufhin des Begegnenlassens]가 곧 세계다.

 현존재는 자신의 세계를 언제나 이미, 근원적으로 신뢰한다[vertrauen]. 이러한 신뢰를 근거로 비로소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이루는 것이기도 한) “관련들[Bezüge]로서의 세계”에 대해 존재론적-실존론적 해석을 수행할 수도 있는 것이다(86). 하이데거는 지시연관으로서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현존재의 자기지시이해로 규정한다. 여기서 이해함은 곧 “사전적인 개시성 속에서[의] […] 관련들”을 (의미있는 것으로) 취함[halten]이다(87). 풀어 말해, 세계 관련들의 관련성은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의미를 부여함[bedeuten, signifying, 유의의화]’으로 포착될 수 있다.

 하나로 완결된[verklammert] 관련들에 대한 신뢰[Vertrautheit] 속에서 현존재는 자기 자신에게부터 (특정한) 의미를 부여한다. 나아가 이 ‘누구를-위해서(현존재의 존재잠재태 가운데 하나)’는 ‘무엇을-위하여[Um-zu]’에, ‘무엇을-위하여’는 ‘그리로[Dazu]’에, ‘그리로’는 ‘유관성의 (그것을-하면서[Wobei]와) 그것을-가지고[Womit]’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러한 의미함의 관련 전체”가 곧 유의미성[의미있음]이다(87).

 유의미성은 세계의 구조를 이루는 것으로, 곧 세계성에 해당한다. 목적연관의 전체성이 “우리의 구체적인 행위와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들에게 각각의 의의를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강독⟫, 142) 따라서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세계에 의존하면서 존재한다(의존성, Angewiesenheit). 한편으로, 의미부여연관과 그것들의 유의미성에 대해 친숙한 현존재는 도구적 존재자의 발견을 위한 존재적 가능조건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미 개시된 유의미성은 현존재가 (개별) ‘의미들을 개시할 수 있는 존재론적 가능조건인데, 이 의미들은 단어나 언어[Sprache]를 정초한다. 마지막으로 “개시된 유의미성은 현존재의, 그의 세계-내-존재의 실존론적 구성틀로서 유관성의 총체의 발견 가능성을 위한 존재적 가능조건”이기도 하다(87).*

*Q. 이를 쉬운 말로 풀어쓰면 어떤 사태를 가리킬까? 

A. 이것, 저것이 무엇, 무엇을 위해 의미있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곧 존재적으로 알려져있어야만, 인간이 자신의 실존을 구성하는 것이 용도들의 연관임을 (존재론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로써, 여태까지의 존재론적 문제설정은 세 종류의 존재—①손안의-존재, ②눈앞의-존재(이상 범주), 그리고 세계의 세계성에 대한 발견 가능성의 존재적 조건으로서의 (현존재의) ③세계-내-존재(실존주)—를 다루었다. 절을 마무리하면서 하이데거는 손안의-존재자 및 세계의 존재를 일종의 관계, 연관으로 규정할 경우 손안의-존재자 및 세계의 ‘실체적인 존재’가 휘발되지는[verflüchtigen] 않는지 묻는다. 이러한 반론에 따르면 관계, 연관이란 실체라기보다는 순수 사고의 형식적인 산물이다. 그러나 세계성을 구성하는 지시연관은 그것의 풍부한 현상적 내용물로 인해 수학적 형식화로는 결코 충분하게 파악될 없다. 세계성을 구성하는 지시연관은 순수 사고의 산물이 아니라 “그 속에서 고려하는 둘러봄이 그 자체로 언제나 이미 머무는 관련들”이다(88). 세계성은 세계 내부적 존재자들의 존재를 휘발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그것들을 그것들로서—손안의-존재자로서—존재할 수 있게 해주며, 나아가 (눈앞의-존재로서의) 그것들의 ‘실체적 존재’ 그리고 함수적인 개념들로서의 수학적인 특성들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해준다.

B. 데카르트의 세계 해석에 반하여 세계성에 대한 [우리의] 분석을 대조시키기(Abhebung)

 이어 하이데거는 세계내부적 존재자로부터 착수되는 세계 해석의 극단적인 사례로서 »세계«에 대한 데카르트의 존재론이 가지는 근본특징들과 전제들을 분석한다. 데카르트의 세계존재론은 연장성[Ausdehnung], 곧 공간성을 세계의 존재론적 근본규정으로 제시한다.

§19 레스 엑스텐자(연장된 사물, res extensa)로서의세계규정

 하이데거에 따르면 자연과 정신 사이의 존재론적 구분—그리고 그것의 해명되지-않음[Ungeklärtheit]—은 데카르트가 수행한 레스 코기탄스와 레스 코포레아[res corporea] 사이의 구분으로부터 온 것이다. 둘을 구분하는 데카르트의 존재론 하에서 존재 일반은 숩스탄티아[substantia]로 규정된다. 그런데 숩스탄티아는 존재자로서의 실체를 가리키기도, 실체의 존재로서의 실체성을 가리키기도 한다. “고대적 개념인 우시아 [또한] 이미 소지했던[bei sich führen] 숩스탄티아의 이러한 애매성[Doppeldeutigkeit]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90)

 데카르트는 레스 코포레아의 존재론적 규정으로서의 실체성, 레스 코포레아의 존재를 해당 실체의 속성인 연장성으로 이해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철학의 원리⟫에 따르면 실체들은 그것들의 ‘속성’[»Attributen«]을 통해 접근 가능하며, 각 실체는 그것의 본질을 알게 해주는 “하나의 탁월한 특성”을 가진다(90). 레스 코포레아의 경우 그 탁월한 특성은 “길이, 폭, 깊이에 따른 연장”이며, 그것이 “우리가 »세계«라고 부르는 육체적 실체의 본래적 존재를 이룬다.”(90)

 연장은 다른 모든 존재규정성(또는 속성)이 그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먼저 ‘존재해야’ 하는 존재구성틀이라는 점에서 탁월하다. 물체[Köperding]에 연장이 우선 일차적으로 ‘할당되어’[»zugewiesen«] 있어야 그것이 연장의 양태들[양상들, Modi]로서 분할[divisio], 형태[figura(Gestalt)]나 운동[motus(Bewegung)]* 같은 것을 가질 수 있다. 그 자체로는 어떠한 형태나 운동도 가지지 않는 연장의 분배[Verteilung] 방식에 따라 하나의 물체는 같은 사물이되 다른 모습을 가지는 것으로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사물의 단단함의 정도나 무게, 색깔과 같이 “우리가 지각하는 성질들”로서의 양태들은 제거되어도 사물의 존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강독⟫, 147). 이러한 다종의 양태들의 변화에도 지속적으로 남는 으로서 연장성 자체가 곧 실체의 실체성을 규정한다.

*운동은 그것을 추동하는 힘[Kraft]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고—데카르트에게 힘은 연장실체의 존재를 규정하지 않는다—“순수한 장소변경”으로 개념화된다(91).

§20 »세계« 존재론적 규정의 기초들[Fundamente]

 그런데 데카르트에게 실체는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 다른 존재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그런 존재자이다. “‘실체’의 존재는 불필요성을 통해 성격규정된다.”(92) “엄밀한 의미의 실체”, 곧 존재함에 있어서 단도직입적으로[schlechthin] 그 어떤 다른 존재자도 필요하지 않는 절대적인 존재자는 엔스 페르펙티시뭄, (무한실체로서의) ‘이다(⟪강독⟫, 148). 반면 신 이외의 다른 존재자는 모두 신에 의한 산출[Herstellung]과 보존[Erhaltung]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엔스 크레아툼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에게는 산출-불필요성[Herstellungsunbedürftigkeit] (또는 산출-필요성)—따라서 “제작”의 모델(⟪강독⟫, 148)—이 ‘존재’를 이해하게 해주는 지평으로 기능한다. 

 이처럼 엔스 페르펙티시뭄과 엔스 크레아툼 사이에는 ‘무한한’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창조주와 피조물은 모두 ‘존재자’라 불린다. “[…] 우리는 그것의 의미가 ‘무한한’ 차이를 포괄할 수 있는 그런 범위[Weite]의 존재를 활용한다[gebrauchen].”(92) 피조물만의 영역, 즉 »세계« 내부의 실체에는 레스 코기탄스와 레스 엑스텐자가 있다. 데카르트는 하나의 무한실체와 두 유한실체를 위해 ‘공통된’ 의미의 존재[»gemeinsame« Sinn von Sein]를 적용하는 셈이다.

 그러나 ‘신이 존재한다’와 ‘세계가 존재한다’에서 ‘존재한다’의 의미가 과연 하나냐는 의문은 남을 수밖에 없다. 그 경우 신과 피조물의 지위가 동등해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스콜라주의자들은 두 존재를 유비적인 것으로 취급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반면 데카르트는 애초에 문제 자체를 회피함으로써[der Frage ausweichen] 실체성과 그것의 보편성(이 낳는 문제)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두 사상 모두 ①존재의 의미를 충분히 해명하지 않고 자명한 것으로 취급한 고대 존재론에 뿌리를 두고 있음은 물론이다. 뿐만 아니라 “실체 자체[als solche], 즉 그것의 ②실체성[ 의미는] 처음부터[vorgängig, from the very beginning] 그 자체로[an ihr selbst] 그리고 대자적으로[für sich] 접근 불가능하다고 명시”된다(94). ‘존재’ 자체가 우리를 ‘촉발’하는 것이 아니므로—“그저 있다는 것만으로는 우리의 감각을 촉발하지 않”으므로(⟪강독⟫, 149)—존재로서의 실체는 존재자와 달리 관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칸트 역시 데카르트의 존재론을 따라 존재한다는 것은 실재적인 술어가 아니라고 말한다.* ①과 ②로써 데카르트의 사상체계 내에는 진정한 존재론이 들어설 자리가 사라졌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진단이다.

*이 주장은 “존재는 사물이 공간과 시간과 같은 우리 인간의 직관 형식에 대해서 갖는 관계만을 가리킬 뿐이지 사물 자체에 속하는 성질은 아니라는 말이다. 즉 우리는 어떤 사물이 시간과 공간 상에 나타나 있을 때 그것이 존재한다고 […] 말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칸트 이전의 형이상학은 존재를 사물에 속하는 성질로 보면서, 신의 존재도 신이라는 존재자가 갖는 완전성이란 성질로부터 연역해 내려고 했다. 즉 신은 완전한 존재자이기 때문에 존재라는 속성도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강독⟫, 149, 각주 6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동할 수밖에 없는) 존재에 대한 암묵적인 이해는 대신 존재자의 속성 가운데서 탁월한 것인 연장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표현된다[ausgedrückt]. 레스 코기탄스와 관련해서도, 그것을 사유하는 실체로 생각하는 것이 더 쉽지 사유하지도, 연장돼있지도 않은 어떤 실체 일반으로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물론 이 [연장돼있거나 사유한다는] 속성들은 데카르트가 암암리에 전제하는 존재와 실체성의 의미를 가장 순수하게 충족시키는 속성들이다.”(⟪강독⟫, 149)

 그러므로 해명되지 않은 선입견으로서 “실체성을 눈앞의 존재로 보는 존재이해”가 곧 “데카르트가 세계를 연장적 사물로서 [그리고 인간을 사유하는 사물로서] 규정하는 존재론적 기초”이며, ‘실체’라는 표현의 애매성도 근거 지운다(⟪강독⟫, 149). “데카르트는 실체성을 겨냥하면서도 그것을 실체가 가지는 존재적인 속성에 의해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론적인 것의 근저에 존재적인 것이 놓여 있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강독⟫, 149-150). “따라서 실체라는 표현은 때로는 존재론적 의미로, 때로는 존재적 의미로 쓰이며 대부분의 경우는 막연한 존재적∙존재론적 의미로 기능한다.”(⟪강독⟫, 150)

 데카르트와 달리 존재와 존재자를 올바르게 구분하기 위해서는 존재물음이 수행되고 그에 따라 존재의 의미가 해명되어야 한다. 이 해명은 언어 분석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고 사태 자체로의 진입을 요구한다.

cf. 그러나 데카르트로부터 처음으로 (개별 사물들이 공통적으로 속하는 그런) ’세계’ 개념이 대상화되었다. ‘연장성’ 개념을 통해. 어떤 대상이든 상관없이 동일한 논리/코기토의 탐구 방식에 따라 탐구할 수 있다는 생각에 따른 “체계”의 확립, 보편수학의 확립도 데카르트가 처음(R씨).

§21 »세계« 대한 데카르트적 존재론에 대한 해석학적 토의[Diskussion]

 이상의 세계존재론은 세계의 현상(진상)에도, 세계내부적 존재자의 세계성에 대한 규정에도 이르지 못한다. 달리 말해, 데카르트의 세계 해석은 그 둘 모두의 존재를 간과한다[überspringen, pass over]. 하이데거는 이러한 실패의 이유를 데카르트가 존재를 자명하게 눈앞의-존재로 이해했기 때문으로 진단한다.

 데카르트는 기본적으로 인텔렉티오(지성)를 통해 세계의 존재에 접근하며, 그에 따라 세계내부적 존재자의 존재를 연장성으로 규정한다. 그런데 인텔렉티오는 특별히 수학적 인식을 가능케 한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에게는 “자신의 존재방식에 따랐을 때[seiner Seinsart nach], 수학적 인식을 통해 접근 가능한 존재에 걸맞은[genügen] 그런 [존재를 담지하는] 존재자가 본래적인 의미에서 존재한다.”(95)

 그런데 수학적 인식이 포착하는 존재자는 (눈앞에-있는) “영속적으로 남는 [das immerwährend Bleibende]”이다(96). 따라서 데카르트의 존재론에서 본래적인 의미에서 존재하는 “[…] 존재자는 (변화의 능력을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그런 [눈앞의-]존재자이다[das, was immer ist, was es ist].”(95, 강조는 하이데거) 인텔렉티오에 의해 간파되는 “지속적으로 남아있음[Verbleib]”이라는 존재성격은 세계내부적 존재자뿐만 아니라 »세계«에도 부과된다[zudiktieren](96).

Q. 영속적으로 남는 것이라는 존재방식은 어째서 필연적으로 눈앞의-존재자의 존재방식인가?

A. 눈앞의-존재=일반적인 대상 인식에서 포착되는 존재. 그런데 일반적인 대상 인식은 지속하는 동일자를 겨냥함.

 이때 하이데거는 수학이 먼저 그저 우연한 이유로 고평가되어 데카르트의 세계존재론을 규정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 눈앞에-있음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정향[Orientierung]”이 오히려 데카르트로 하여금 수학을 (그것이 눈앞의-존재를 포착하는 데 걸맞은 학문이기 때문에) 높이 사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96). 데카르트는 세계내부적 존재자 그것들의 총체( 세계) 하여금 자신의 존재방식을 스스로 드러내게 하지 않고, 그 대신 해명되지도, 입증되지도 않은 존재이념—존재란 지속적 눈앞에-있음이라는 선입견 세계를 위해 미리-지정했다[vorschreiben].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하이데거의 눈에 데카르트는 ①존재란 눈앞의-존재라는 선입견에 따라 ②눈앞의-존재를 포착하는 데 유능한 수학적 인식을 고평했고 ③수학적 인식을 통해 포착되는 연장성을 세계의 존재로 규정했다. 데카르트는 탐구의 이전에 세계내부적 존재자에 적합한 접근로[Zugang]가 무엇일지를 세심하게 물을 필요가 없었다. 전통적인 존재론에 따라 ‘(눈앞의-존재자를) 직관함으로서의 노에인’이 곧 일차적인 접근로로서 미리 결정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존재가 세계내부적 존재자와 관계맺는 우선적인 방식은 직관적 수용 (사물의 단단함이나 무게, 색깔 등을 알려주는) 감각[die Sinne]이라는 (추가적인?) 선입견 하에서 데카르트는 센사티오(또는 아이스테시스)를 인텔렉티오와 대비시켜 비판에 처하게 한다. 해당 비판에 따르면 감각은 세계내부적 사물이 신체를 가진 인간에게 유용할지 아닐지만을 알려줄 뿐, 세계내부적 사물의 본래적 존재인 연장성을 드러내주지는 않는다. (쉽게 말해, 인간은 일차적으로 감각을 통해 세계와 교통하지만, 감각은 세계의 존재를 드러내주지 못하며, 지성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감각을 통해 선소여되는[vorgeben] 세계내부적 존재자의 진정한 존재방식을 올바르게 규정하는 데 실패한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는 단단함[Härte]을 위치 변화의 부재에 불과한 저항[Widerstand, resistance]으로 포착하는데, 단단함도 저항도 “현상적 의미에서, 그 자체로 경험된 것 그리고 그러한 경험 속에서 규정 가능한 것으로서 이해되지 않는다. […] 무언가에 대한 인지[직관적 수용, Vernehmen, perception]는 눈앞에-있는 두 레스 엑스텐자들의 특정한 나란히-눈앞의-존재함[Nebeneinander-Vorhandensein]”에 대한 인식으로 자의적으로 치환되고 만다[übersetzen](97). 쉽게 말해, 데카르트에게 “어떤 것을 감각한다는 것은 눈앞의 연장적 사물이 서로 접촉하는 이”다(⟪강독⟫, 152). 그러나 단단함이나 저항은 그것을 감각하는 생명체 없이는 드러날 수 없다.

Q. ‘현존재가 세계내부적 존재자와 관계맺는 우선적인 방식은 감각이다’라는 테제에 대한 하이데거의 입장을 모르겠다. 그 테제는 맞는데 그걸 지성으로 치환시키는 게 잘못되었다는 것인가, 아니면 그 테제도 틀렸지만 설령 맞다고 해도 문제적이라는 것인가?

A. 일단 그 테제를 데카르트가 활용한 것은 맞다. 일단은 감각으로 세계를 인식하지만, 지성을 통해서만 세계 및 세계내부적 존재자에 대한 참된 인식(영속적인 것에 대한 인식)을 가질 수 있다는 식(R씨).

Q. 감각 역시 지성과 마찬가지로 눈앞의-존재자에 대한 포착 방식으로 간주되어있는가?

A. 감성도 정초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실천이 더 일차적. 실천 < 감각, 지성.

A2. 그러나 하이데거가 적어도 이 장에서 감각을 파생적인 데 불과한 것으로 비판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데카르트의 지성 개념이 감각세계를 설명해주는 데 불충분하며, 순서가 거꾸로됐다는 것뿐(R씨).

 지속적 눈앞에-있음과 존재를 동일시하는 이 이념은 세계내부적 존재자의 존재뿐만 아니라 현존재의 태도들[Verhaltungen, attitudes]을 존재론적으로 적합하게 드러내는 데도 방해가 된다. 데카르트는 현존재 역시 (그에게 고유한 존재구성틀인 세계-내-존재가 아닌) 일종의 실체로 이해한다. “모든 감성적이고 지성적인 인지*의 정초된 [고로 파생적인] 성격을 보고 [그와 같은 현존재의] 태도들을 [근원적인] 세계-내-존재의 한 가능성으로 이해하는” 길은 그에게 원천봉쇄되어있다(98).

*데카르트에게 “[…] 지성적 인식사유하는 실체로서의 우리 내부에 이미 존재하는 본유관념을 전개하는 ”이다(⟪강독⟫, 152). 

cf. 데카르트에게 영속성은 실체의 특성일 뿐, 본질일지는 모르겠다(R씨).

 하이데거는 자신이 혹시 데카르트에게 그의 과제가 아닌 것을 부과한 뒤 그가 해당 과제를 수행하는 데 실패했다는 식의 부당한 비판을 가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한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레스 코기탄스와 레스 엑스텐사를 통해 ‘자아와 세계’라는 문제를 제기하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해결하기까지 하고자 했기 때문에 상술한 비판은 부당하지 않다. 전통적인 존재론에 입각한 데카르트의 선입견은 현존재 존재론의 수행에도, 세계 현상의 탈은폐에도 실패했으므로 ‘자아와 세계’를 해명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혹자는 ‘데카르트는 적어도 다른 존재자를 정초하는 근본층위로서 질료적 자연[der materiellen Natur]이라는 세계내부적 존재자의 존재론적 성격은 올바르게 규정한 것이 아닌가? 질적인 규정성들—이를테면 아름다움, 적합함, 사용 가능함 등—은 연장적 사물이 가지는 양적인 규정성들로 환원될 수 있지 않은가? 그리하여 소위 손안의-존재자는 우선은 눈앞에-있는 자연사물 위에 (수량화될 수 없는) 가치술어들[Wertprädikate]이 사후적으로 구축된[ausgestattet/ausgebuat] 산물이 아닌가?’라고 물을 수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와 같은 반론은 손안의-존재자의 도구적 존재성격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못하고, 손안의-존재자를 이미 눈앞에-있는 것으로 전제하며, 그 결과 가치마저 눈앞에-있는 규정으로 만들어버린다. 해당 관점은 (가치의) ‘부착’[»Haften«]과 그를 통한 자연사물의 ‘보충’[»Ergänzung«, “roundings-out”, 보완]—“사용물을 자연물로부터 재구성하는 ”(⟪강독⟫, 154)*—이 가지는 존재론적 의미, 도구가 손안에-있다는 사태를 올바르게 해명하지 못한다.*

*“[…] 우리는 그러한 재구성을 통해서 다시 회복되어야만 하는 현상 그 자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현상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 미리 적합하게 파악되고 있지 않다면, 재구성이라는 것도 설계도가 없는 건축과 다름없게 된다.”(⟪강독⟫, 154)

cf. 하이데거의 직관: 존재론을 거면, 현상학으로 해야 한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자아와 세계의 존재론을 현상학이 아닌 객관주의적 입장에서 수행했다. ➔ 저 볼드처리한 전제가 맞아야, ‘왜 하이데거 너 식으로 봐야 하는데?’에 대답 가능.

 주지하다시피 세계성에 대한 간과는 우연이 아닌, 현존재의 존재의 본질에 근거를 두고 있는 사태다. 따라서 데카르트적 존재론에 대한 상술한 비판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①세계 현상이 파르메니데스에게서 특히 (체계적으로) 간과되어온 이유, ②세계 현상 대신 세계내부적 존재자가 존재론의 주제가 된 이유, ③세계내부적 존재자가 우선 ‘자연’ 속에서 발견되는 이유, ④자연사물에 기초한 세계존재론의 보충, (그것도) 필연적인 것으로서 경험되는 보충이 가치라는 현상의 도움으로 수행되는 이유에 답해야 한다. 해당 작업은 1부의 3장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C. 주위세계의 주위성[Das Umhafte der Umwelt] 현존재의 공간성

 현존재가 공간 속에 존재하는 방식은 ‘내부성’[»Inwendigkeit«, “insideness”]으로 규정되어선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내부적 존재자의 공간성은 현존재의 세계-내-존재의 구조계기인 세계와 존재론적 연관을 맺기 때문에, 현존재에게 고유한 공간성을 규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어지는 절들에서 하이데거는 세계 내부적 존재자의 공간성에 대한 논의에서 출발해, 세계의 구성자[Konstituens]로서의 공간*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해명하고자 한다. 그로써 그는 세계가 텅 빈 공간의 내부에 눈앞에-있는 것이 아니라 주위세계에서 만나지는 존재자의 공간성이 도리어 세계성에 의해 정초됨을 밝히고자 한다. 이러한 접근 하에서만 그러한 세계 내에 존재하는 현존재의 공간성에 대한 해명이 완료될 수 있다.

*vs. 세계 이전의 순수한, 동질적인 연장실체로서의 공간(데카르트?**), 주관적 틀(순수직관 또는 직관형식)로서의 공간(칸트)

**데카르트에게는 허공이 없다. 공간은 물질로 이미 꽉 차있기 때문에, 불가침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허공론은 뉴턴의 것에 가깝다. 다만 데카르트가 좌표계를 만든 것은 맞다(R씨).

§22 세계내부적인 손안의-존재자들의 공간성

 하이데거에 따르면 도구, 곧 “일상적인 실천에서의 손안의-존재자는 가까움[Nähe]이라는 [공간적] 성격을 가진다.”(102, 강조는 하이데거) 이때 손안의-존재자가 지니는 가까움이란 물리적인 거리의 측정이 아니라 “둘러보면서 ‘헤아리는[계산하는, berechnen] 조종함과 사용함”, 곧 실천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102). 둘러봄의 과정에서 손안의-존재자의 위치는 눈앞의-존재자가 가지는 것과 같은, 이를테면 좌표상의 임의의, 절대적인 위치가 아니라 전체 도구연관에 상대적으로 규정되는 무엇이다. “[도구의] 자리는 언제나 한 도구의 귀속됨의[귀속됨에 입각한] 특정한 ‘거기’ 그리고 ‘여기’이다[das bestimmte »Dort« und »Da« des Hingehörens eines Zeugs].”(102, 강조는 하이데거) 

 도구의 위치 지정, 곧 공간적인 귀속의 가능조건을 하이데거는 방역[Gegend]이라고 부른다. 방역이란 쉽게 말해 도구가 용도에 걸맞게 놓이는 자리가 있는 어디들의 전체 선택지 범위또는 “우리가 어떤 도구를 어디에 놓을 것인지를 물을 때의 그 어디로”이다(⟪강독⟫, 157).* 하이데거의 표현을 가져오면 방역은 “그 속으로 하나의 도구연관에 자리전체성[Platzganzheit]이 배정되는[angewiesen werden] 어디로[das Wohin] 일반”으로, 고려하는 실천에서 사전적으로 개시되어있는 무엇이다(103). 방역이 현존재에게 미리 알려져있지 않다면, 그는 방역 내에 도구들을 질서있게—목적의 달성을 위해 바람직한 자리에—위치시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Q. 도구가 방역 내에 정적으로 머무르는 것이지, 방역을 동적으로 향하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어째서 계속해서 방향[Richtung, direction]과 관련된 설명이 나오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A. 하이데거는 3인칭의 시점으로 도구들을 조망하는 게 아니라, 현존재의 입장에서 1인칭 시점으로 ‘어느 쪽에 도구를 둘 것인지’를 기준 삼아 서술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 같은 이건 쪽에 두고, 저건 쪽에 두기가운데서 근원적인 의미의 공간이 펼쳐진다는 서술 같다. cf. “Das Zuhandene der Umwelt ist ja nicht vorhanden für einen dem Dasein enthobenen ewigen Betrachter, sondern begegnet in die umsichtig besorgende Alltäglichkeit des Daseins.”(106)

Q. 여전히 방역의 의미를 이해하기가 어렵다.

cf. “Wir verstehen sie[Gegend] als das Wohin der möglichen Zugehörigkeit des zuhandenen Zeugzusammenhanges, der als ausgerichtet entfernter, das heißt platzierter soll begegnen können.”(110-111)

 도구가 놓일 수 있는 잠재적인 자리들이 특정한 방역 내에 규정된다는, 그런 방향설정[Orientierung]이 비로소 도구들의 “주위임[das Umhafte, the arroundness], 우리-주변에[-있음]을 이룬다.”(103) 그러므로 다시금, 무엇인가가 우리의 주위 가운데서 위에 있다거나, 아래에 있다거나, 뒤에 있다는 등의 공간적 성격은 3차원 공간의 측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도구적인 실천의 맥락에서 규정된다.

 같은 견지에서, 한 도구의 위치는 다른 나머지[übrig] 도구들의 위치에 상대적으로 규정된다. 예를 들어 ‘태양이 동쪽에, 중천에, 서쪽에 떠있다’는 사태는 단순히 ‘특정 천체가 다른 물체들과 독립적으로 어떤 절대적인 지리적 위치를 가진다’는 사태가 아니다. 태양은 다른 손안의-존재자들이 그것들의 용도에 따라 놓여야 할 방역을 가리켜주는 일종의 도구로, 교회와 무덤 같은 특수한 도구들의 배치를 결정하는 데 쓰인다. (다시 말해, 교회나 무덤의 공간성은 태양의 공간성에 상응하는 것으로서만 성립한다.)

 세계성을 구성하는 이 같은 공간성은 현존재에게 두드러지지 않고 친숙하다[vertraut, 신뢰된다]. 어떤 도구가 제 자리에 없을 때, 즉 현존재의 ‘손안에-없을’ 때 비로소 해당 자리와 그것이 귀속된 방역이 눈앞에-있는 공간으로서[허공으로서] 비로소 발견된다. 요컨대 공간이란 특정한 도구 연관에 속하는 도구가 그에 귀속되는 개별적인그러므로 분절된[aufgesplittert]—자리들의 질서 잡힌 통일체이지, 우선은 텅 비어있는 것으로서 사후적으로 눈앞의-존재자들이 그 부분을 채워나가는 한갓된 허공[der bloße Raum]이 아니다.

“Die »Umwelt« richtet sich nicht in einem zuvorgegebenen Raum ein, sondern ihre spezifische Weltlichkeit artikuliert in ihrer Bedeutsamkeit den bewandtnishaften Zusammenhang einer jeweiligen Ganzheit von umsichtig angewiesenen Plätzen.”(104)

 그런데 손안의-존재자의 공간성은 현존재의 공간성과 독립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가 그만의 고유한 공간성을 (존재론적으로) 가지기 때문에 비로소 손안의-존재자는 주변세계 내 특정 공간을 차지하는 것으로서 존재적으로[현실적으로] 만나질 수 있다.

§23 세계--존재의 공간성

 현존재 역시 공간 속에 존재하지만, 손안의-존재자(또는 그것의 추상태로서의 눈앞의-존재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렇다. 현존재의 공간성은 그것의 세계-내-존재, 특히 -존재[In-Sein]를 근거로 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공간적인 존재방식을 거리제거[거리-없애기, Ent-fernung, de-distancing]방향잡기[방향에 맞게 정돈하기, Ausrichtung, directionality]로 규정한다.

 ①거리제거는 현존재의 존재구성틀의 일부로서, 현존재가 둘러보는 실천 가운데서 자신과 다른 도구 사이의 거리를 소멸시키는, 곧 도구적 존재자를 자신에게 가까이-끌어당기는[nähern] 활동적[aktiv] 존재양태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체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편리한 곳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강독⟫, 159) 현존재가 아닌 존재자의 범주적 규정성인 멀리-있음[Entferntheit, remoteness]은 실존주적 규정성인 거리제거를 통해 발견된다. 현존재가 거리제거의 과정에서—‘목이 마르니 차를 마셔야겠다.’—세계내부적 존재자들을 현존재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져있는 것으로 먼저 발견하기 때문에—‘아, 찬장에 올려져있네.’—비로소 세계내부적 존재자들 사이의 간격이나 거리와 같은 것이 측정될 수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손안의-존재자를 둘러싼 실천에 있어서든, 눈앞의-존재자에 대한 한갓된 인식에 있어서든) 세계내부적 존재자를 자신에게 가까이 끌어당기려는 경향성[Tendenz auf Nähe]을 본질적으로 가진다고 주장한다(105). 예를 들어 현존재는 라디오를 발명함으로써 (타 세계로부터 오는 소식이 전해지는 속도를 훨씬 높였고,) 원래는 자신과 멀리 있었던 »세계«를 자신에게 가까이 끌어당겼다. 과거와 대비해 현대인의 생활을 특징짓는 온갖 방식의 속도 증가는 ‘거리의 극복’을 위함이다. 

 (일상적인 실천 가운데서) 특정 존재자의 멀리-있음은 (현존재와 해당 존재자 사이의) 간격[Abstand]에 대한 정밀한 평가[Abschätzen] 같은 것을 통해 포착되지 않는다. 현존재의 일상적인 거리제거에서 이루어지는 거리[멂, Ferne]에 대한 평가는 정밀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고유한 규정[eigene Bestimmtheit](의 행위)로서 충분히 기능한다. 예를 들어 ‘담배 한 대 피우는 사이 갈 수 있는 거리’와 같은 일상적인 기준들[Maße]은 “평가된 멀리-있음[Entferntheit]이 사람들이 고려하면서 둘러보며 그리로 접근하는[zu dem man besorgend umsichtig hingeht] 존재자에 속한다는 것을 표현해준다.”(105-106)

 평가에 있어서 고정된[fest] 단위들을 사용한다 할지라도—예를 들어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라고 말하는 경우—그 단위들은 양적으로 정밀하게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손안의-존재자의 멀리-있음에 대한 평가는 어디까지나 둘러보는 시선에 의해[umsichtig] 이루어진다. 따라서 객관적으로는 언제나 동일한 거리만큼 떨어져있는 존재자도 일상적인 실천의 맥락이 달라지면 더 가깝거나 멀리 놓인 것으로 재규정될 수 있다. (원래는 걸어가야 했던 곳으로 가는 버스가 새로 운행을 시작한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겠다.)

Die objektiven Abstände vorhandener Dinge decken sich nicht mit Entferntheit und Nähe des innerweltlich Zuhandenen. Jene mögen exakt gewußt sein, dieses Wissen bleibt jedoch blind, es hat nicht die Funktion der umsichtig entdeckenden Näherung der Umwelt […]”(106)

 거리에 대한 이와 같은 일상적인 해석은 간격에 대한 객관적인 측정과 대비해 ‘주관적인’ 데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와 같은 주관성이야말로 비로소 세계의 (진정한) ’현실성’을 발견하게 해주며, 자의나 (즉자적으로는 전혀 다르게 존재하는 것에 대한) 주관주의적 파악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현존재의 일상성의 둘러보는 거리제거는 ‘참된 세계’의, 실존하는 것으로서의 현존재가 언제나 이미 그 곁에 있는[그에 몰두하고 있는] 존재자들의 그런 참된 세계의 즉자존재[An-sich-sein]를 발견한다.”(106) 그에 반해 멀리-있음을 측정된 간격의 차원에서 보려는 경향[Neigung, Orientierung]은 “내-존재의 근원적인 공간성을 은폐”할 뿐이다(106). 객관적으로 가깝다고 해서(e.g. 안경/보도블럭) 근원적으로 가까운 것이 아니며—그런 것들의 존재는 일반적으로 두드러지지조차 않는다—객관적으로 멀다고 해서(e.g. 안경을 통해 보는 그림/보도블럭으로 만들어진 길 위 나와 마주해서 다가오고 있는 친구) 근원적으로 먼 것이 아니다.*

*Q. 안경이 왜 근원적으로 먼 것인지 모르겠다. 친숙하게 사용하고 있으니 객관적인 거리상으로뿐만 아니라 실천의 맥락에서도 가까운 것 아닌가?

A.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멀다(R씨). / 전 절과 달리 ‘(개별 대상에 대한) 주목’ 현상을 끌어들이고 있고, “Das Ent-fernen ist zunächst und zumeist umsichtige Näherung, in die Nähe bringen als beschaffen, bereitstellen, zur Hand haben. Aber auch bestimmte Arten des rein erkennenden Entdeckens von Seiendem haben den Charakter der Näherung.”(105)에서 맥락 전환이 됐다(H씨). 

“In der Nähe besagt: in dem Umkreis des umsichtig zunächst Zuhandenen.”(107)

 현존재 역시 공간 내 특정한 자리를 차지하지만[einnehmen], 그것의 공간성은 그의 신체의 객관적인 위치로써 규정되지도 않고, 손안의-존재자의 경우에서처럼 특정한 방역과 관련하여 규정되지도 않는다. “[현존재의] 자리-차지함은 둘러보면서 미리-발견되어-있는 방역 속으로* 주변세계적으로 손안에-있는-것과의 거리를-제거함으로[als Entfernen des umweltlich Zuhandenen in eine umsichtig vorentdeckte Gegend hinein] 개념화되어야 한다. 현존재는 자신의 여기[sein Hier]를 주변세계적인 저기[Dort]로부터 이해한다.”(107) 현존재가 자신의 여기로 되돌아오는 것은 고려함으로서의 그의 존재를 “‘저기 있는 도구’를 근거로 해서’ 해석”하고자 할 때만인데, “예를 들어 우리가 망치를 사용하려고 할 때 망치가 너무 멀리 떨어져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있는 곳을 망치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서 이해한다.”(⟪강독⟫, 161-162) 쉽게 말해, 일상적으로 현존재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사용하는 도구들에 몰두해있기 때문에 그 도구들의 자리에 ‘가있’지, 자기 몸의 자리에 ‘와있’지 않다.

*Q. 저 ‘속으로’가 이해되지 않는다.

A. 도구의 적절한 사용은 언제나 도구를 집어서—도구와의 거리를 제거해서—특정한 방향으로 옮기는 행위, 즉 도구의 목적에 걸맞은 방역 속으로 집어넣는 행위이다.

A2. “[…] 현존재가 어떤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둘러봄에 의해서 미리 발견된 방역 안에서 각각의 도구들에게 적합한 자리를 부여하는 것”(⟪강독⟫, 161) ➔ (그러므로 현존재의 공간성은 동적인 성격을 가진다.)

★Q. 현존재는 자신과 손안의-존재자 사이의 거리를 건너갈[kreuzen] 수 없다는 내용으로 시작된 문단의 취지를 잘 모르겠다.

cf. “Das Dasein hält sich als In-der-Welt-sein wesenhaft in einem Entfernen. Diese Ent-fernung, die Ferne des Zuhandenen von ihm selbst, kann das Dasein nie kreuzen. Die Entferntheit eines Zuhandenen vom Dasein kann zwar selbst von diesem als Abstand vorfindlich werden, wenn sie bestimmt wird in Beziehung auf ein Ding, das als an dem Platz vorhanden gedacht wird, den das Dasein zuvor eingenommen hat. Dieses Zwischen des Abstandes kann das Dasein nachträglich durchqueren, jedoch nur so, daß der Abstand selbst ein entfernter wird. Seine Ent-fernung hat das Dasein so wenig durchkreuzt, daß es sie vielmehr mitgenommen hat und ständig mitnimmt, weil es wesenhaft Ent-fernung, das heißt räumlich ist. Das Dasein kann im jeweiligen Umkreis seiner Ent-fernungen nicht umherwandern, es kann sie immer nur verändern. Das Dasein ist räumlich in der Weise der umsichtigen Raumentdeckung, so zwar, daß es sich zu dem so räumlich begegnenden Seienden ständig entfernend verhält.”(108)

A. 거리를 제거해야 한다는 건, 또는 가깝다는 건 거리가 잔존한다는 거다. 완전히 공간적으로 합치될 수 없다. 자리를 바꿀 수만 있지. 따라서 주객 구분 또는 자아-비자아 구분이 없을 수는 없다(H씨). / 아무리 가까워지려고 해도, 거리는 계속 남아있다. 그리고 그래서 거리를 없애려는 성향이 또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R씨).

 ②방향잡기 역시 현존재의 내-존재의 존재론적 성격이다. 현존재의 거리제거 또는 가까이-끌어당김[Näherung]은 언제나 어느 방역 내에서 특정한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둘러보는 고려는 방향을-잡는 거리-제거이다[ausrichtendes Ent-fernen].”(108) 풀어 말해, 현존재는 언제나 어떤 공간적 정향을 가지는 채로 이런저런 도구를 사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존재의 존재론적 구조는 방향을 명령해주는[angeben], 그리고 그로써 영역의 개방성을 유지시켜주는[offen halten] 기호를 (모든 실천에 앞서) 사전적으로 요구한다.

*남동쪽으로 가야지(x), 화장실 쪽으로 가야지, 오 저기 표지판 있네(o)

 오른쪽과 왼쪽(의 관념) 또한 근원적인 방향잡기 덕분에 생겨나는 것이다. 오른쪽과 왼쪽(의 관념)은 특히 현존재의 신체성과 관련해 중요하다. 신체에 장착되는 도구들에 대한 거리제거의 경우, 거리제거의 방향이 오른쪽과 왼쪽에 민감하게 잡혀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도 하이데거는 “거리제거에 속하는 방향잡기는 세계-내-존재에 의해 정초되어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오른쪽과 왼쪽은 현존재의 주관적인 느낌[Gefühl]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미 손안에-있는 세계 속으로 방향-잡혀있음[Ausgerichtetheit]의 [정초된] 방향들”이라고 말한다(109). 어느 쪽으로든 방향을 틀기 위해 현존재는 이미 특정한 도구연관을 자신에게 미리 주어진 것으로서 가져야 하며, 세계 내에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좌우가 먼저인 것이 아니라, 도구들의 위치에 대한 친숙성이 먼저다.) 칸트 역시 유사한 주장을 펼친 바 있지만, 자아의 방향설정에 대한 그의 심리학적 해석은 “그 근본에서는 세계-내-존재의 실존적 구성틀을 의미”한다(109).

cf. 주관적인 설명에 불과한 게 아닌 이유는, 도구 연관이 ‘사전적으로 규정’되어있기 때문. 자의적으로 규정되는 게 아니라(H씨).

§24 현존재와 공간의 공간성

 앞서 상술된 도구들의 개방[Freigabe]은 이제 “하나의 방역 내에서 거리제거하며-방향-잡는 관련지음[Bewendenlassen]”으로서 “손안의-존재자의 공간적 귀속성의 개방”이기도 하다는 점이 밝혀진다(110). 공간은 현존재가 이미 그와 친숙한 유의미성과 함께 (그리고 그것에 의거해) 개시되어있다. 이렇게 개시된 공간은 삼차원의 공간이 아니다. 공간이 삼차원이라는 사실은 일상에서는 아직 은폐된다. 오히려 “유관성의 총체에 […] 방역에 상응하는[gegendhaft] 공간-유관성[Raumbewandtnis, spatial relevance]이 속한다.* 이를 근거로 손안의-존재자는 형태와 방향에 따라 발견되고[vorfindlich] 규정 가능해진다.”(111)

*“도구가 귀속되어야 할 방역은 고려의 궁극목적을 정점으로 하는 용도들의 전체를 통해서 그 윤곽이 그려진다. 이는 그러한 용도들의 전체에는 방역의 용도도 속하기 때문이다.”(⟪강독⟫, 163) 쉽게 말해, 공간성은 용도전체성과 함께, 심지어는 용도전체성에 의해 개시된다.

 현존재는 손안의-존재자에 공간을 부여함으로써, 곧 그것을 공간화함으로써[einräumen, make room, 공간 마련] 그것과 만난다.* 공간화함 역시 하나의 실존주로서 현존재의 세계-내-존재를 이룬다. 이와 같은 공간화함의 은밀한[unauffällig] 작동에 근거해서만 공간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이 이차적으로 가능하다. 예컨대 집을 짓거나 토지를 측정할 때에는 (도구가 그에 귀속되는 공간으로서가 아니라) 공간 그 자체가 현존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경우, (손안의-존재자에 대한) 둘러봄이 아닌 (눈앞의-존재자에 대한) 순수한 쳐다봄[Hinsehen, 주시]이 작동한다. 그로써 “주변세계적 방역들은 순수한 차원들로 중립화되고” 그에 따라 순수하고 균일한[동질적인, homogen] 공간을 탐구하는 일련의 학문들이 생겨난다(112). 중립화 과정에서 도구들의 공간성은 (유의미성과 더불어) 유관성을 함께 상실하고, “도구가 차지하는 자리들은 임의의 사물을 위한 다양한 위치들로 변하게 된다.”(⟪강독⟫, 165) 그렇게 “주변세계는 자연세계가 된다. […] 균일한 자연공간은 [고려에서] 만나지는 존재자에 대한[,] 손안의-존재자의 세계연관성을 구체적으로 탈세계화시키는[entweltlichen] 발견의 방식의 도중에만 드러난다.”(112)

*Q. “Dieses Einräumen ermöglicht als entdeckende Vorgabe einer möglichen bewandtnisbestimmten Platzganzheit die jeweilige faktische Orientierung.”(111)을 쉬운 말로 어떻게 풀어쓸 수 있을까?

A. 공간을 마련한다는 것은 용도에 따른 자리들을 미리 지정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지정된 자리들이 있어야 방향을 잡든 말든 할 수 있다.

 이처럼 “공간이 [무세계적] 주체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세계가 공간 속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하이데거는 칸트와 데카르트 모두를 논박하려는 것처럼 보인다(111). “현존재는 근원적 의미에서 공간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공간성은 현존재에게 일종의 아프리오리가 맞다(⟪강독⟫, 164). 즉 공간은 감각을 통해 경험적으로 알려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공간은 무세계적 주체에 먼저 귀속되어있다가 바깥으로 말하자면 투사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가 세계내부적 존재자를 언제나 이미 특정한 방역 내에서 만나는 가운데 사전적으로 개시되어있는 무엇이다. 나아가 공간의 존재는 레스 엑스텐자와 존재론적으로 차별화되지 않는 것으로 개념화돼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레스 코기탄스와 존재론적으로 동일시돼서도 안 된다. 공간의 존재는 존재 일반에 대한 물음의 도정에서 세계의 세계성을 근거로 해서만 온전히 이해될 있다. “[…] 실체적인 것으로 파악되든 직관형식으로 파악되든 수학적으로 계산 가능한 동질적인 공간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생활세계적인 공간에서 추상된 것이다.”(⟪강독⟫, 166)

“[…] Räumlichkeit ist überhaupt nur auf dem Grunde von Welt entdeckbar, so zwar, daß der Raum die Welt doch mitkonstituiert, entsprechend der wesenhaften Räumlichkeit des Daseins selbst hinsichtlich seiner Grundverfassung des In-der-Welt-seins.”(113)

4 함께-있음(공동존재) 그리고 자기로-있음(자기됨)으로서의 세계--존재. ‘세인[das Man, 세상 사람]’

 이어 하이데거는 일상성 속에서 “우선 그리고 대개 자신의 세계에 넋을 빼앗긴 채로 있”는[benommen sein, 무반성적으로 몰입해있는] 그 현존재는 누구인지 묻는다(113). 이번에도 탐구는 현존재의 존재구조—함께-있음과 함께-거기-있음—가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현상에 입각해 이루어져야 한다. 세계--존재만큼이나 근원적인 함께-있음[Mintsein] 함께-거기-있음[Mitdasein]이라는 존재방식은 현존재의 자기로-있음을 근거지우는데, 이에 대한 해명은 곧 일상적인 ‘주체’인 세인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 일상적인 현존재의 진정한 주체는 자기의식적이고 자립적인 현존재라기보다는 누구도 아닌 익명의 세상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다.”(⟪강독⟫, 167-168)*

*현존재는 누구인가? ➔ 사실 그는 ‘누구’도 아니다.

§25 현존재의 누구임에 대한 실존론적 물음의 착수

 일반적으로 ‘누구’에 대한 물음은 실체성[Substanzialität]을 존재론적 실마리로 삼아, 체험 등의 변화에도 동일하게 남는 기체[Subjektum]’주체[Subjekt]’자기[Selbst]’에 대한 언명을 통해 답변되어왔다. “현존재는 암묵적으로[unausgesprochen] 미리 눈앞에-있는 으로 [잘못] 개념화되었다.”(114)*

*Q. 자아를 주체로 보는 해석이나 신체와 정신의 종합체로 보는 해석은 어떤 의미에서 자아를 눈앞의-존재로 보는 해석인가? 존재론적인 지속 때문인가?

A. ‘자기동일적 대상화’가 관건인 것 같다.

 현존재에 대한 기존의 해석은 ‘나는 언제나 현존재인 그것이다’라는 명제의 자명성에 속아, “일상적 현존재의 누구임”과 나 자신을 곧바로 동일시한다(115). 그에 따르면 현존재의 누구임에 대한 해명은 그것과 동일한 ‘나’에 대한 해명으로써 이루어지고, ‘나’에 대한 해명은 이런저런 작용들의 주체로서 미리 주어지는 자아의 소여를 반성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반성은 오히려 일상적 현존재의 진상을 은폐하며, 그것도 현존재의 존재 자체에 근거한 이유로 그렇게 한다.* 달리 말해, 현존재의 구성틀 자체가 현존재로 하여금 우선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아닌 살도록 만든다. “‘나’가 현존재다”라는 언명은 단지 형식적으로만 성립하기 때문에, 현존재는 “자기상실[Selbstverlorenheit]의 예에서와 같이 ‘나’ 자신의 특정한 존재방식”에 해당하기는 하지만 현상적으로는 ‘나가-아닌-것’[»Nicht-Ich«]으로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다. 그러므로 »세계«도, 다른 »자아들«도 도외시하는 채로 주어지는 “단적인, 형식적인, 반성적인 자아에 대한 인지” 및 그를 통해 이루어지는 의식에 대한 형식적 현상학”—이를테면 후설의 작업 일상에서의 현존재의 삶의 본질을 개시해주지 못한다(115).

*Q. “Vielleicht sagt das Dasein im nächsten[가장 가까운] Ansprechen seiner selbst immer: ich bin es und am Ende dann am lautesten, wenn es dieses Seiende »nicht« ist.”(115)에서 ‘dieses Seiende’는 현존재인가, ‘나’인가?

A. ‘나’ 같다. 일상적 현존재, 그게 나(Ich=진정한 자신)야! 라고 사람들은 쉽게 생각하지만, 사실 일상적 현존재는 진정한 자신이 아니다. “현존재는 일상적으로 자신을 모든 생각과 행위의 주체로 생각하면서 매사에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행위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 일상적 현존재의 이른바 주체는 사실은 각각의 나 자신이 아닐 수도 있다”고 하이데거는 생각한다(⟪강독⟫, 168). ➔ 정말 (세상 사람들이 아닌) ‘나’가 그렇게 생각하고 행위하는 걸까?

 자아에 대한 형식적인 해석이 현존재에 대한 충분한[zureichend] 현상학적 해석이 될 수 없음은 세계-내-존재에 대한 앞선 해명에서도 이미 드러난다. 앞선 해명에 따르면 “세계를 결여한 한갓된 주체[ein bloßes Subjekt ohne Welt]”는 우선적으로 ‘존재하지도’, 결코 주어지지도 않는다(116). 타자를 결여한 고립된 주체 역시 마찬가지다. “‘타자’는 세게-내-존재 속에서 언제나 이미 함께 거기에 존재”하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nächsten, 가장 익숙한] 일상성에서의 이러한 함께-거기-있음의 방식”을 현상학적으로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이 급선무다(116).

 하이데거에 따르면 (세계내부적 존재자와 달리) 현존재의 경우, 그의 누구임은 존재론적으로도 문제일 뿐만 아니라 존재적으로도 은폐되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물음 일반에 대한 실존론적-분석적 대답”을 위한 실마리가 없지는 않다(117). “‘나’가 현존재의 본질적[essentiell] 규정성이라면, 그 규정성은 실존론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면 누구임은 오직 [실존하면서만 자기 자신인] 현존재의 특정한 존재방식에 대한 현상학적 제시[Aufweisung]을 통해서만 답변될 수 있다.”(117)

*Q. 이는 어떤 사태를 가리키는가? 자기가 누군지 모른다?

A. 현실에서 현존재는 자기의 누구임을 반성하지 않는다.

A2.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한다.’(R씨)

“Allein die »Substanz« des Menschen ist nicht der Geist als die Synthese von Seele und Leib, sondern die Existenz.”(117)

§26 타자의 함께-거기-있음(공동현존재, Das Mitdasein) 그리고 일상적인 함께-있음

 주지하다시피 손안의-존재자는 그것이 그 자체로 존재할 때[in seinem An-sich-sein] 주위세계 내 해당 도구와 관련된 현존재들—생산자, 사용자, 관리자 등—을 지시한다. 타인을 향한 지시는 사물에 대한 관조에 단지 덧붙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해당 사물은 나의 세계 속에서 누군가의 사용을 위해 손안에-있는 것으로 존재한다. 이렇게 “세계내부적으로 만나지는[begegnend] 타인의 현존재의 존재방식은 손안에-있음과 눈앞에-있음으로부터 차별화된다.”(118) 현존재의 세계가 자유롭게 개방하는 존재자에는 도구나 눈앞의-존재자뿐만 아니라 해당 개방을 수행하는 현존재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며 그와 함께 거기 존재하는[공동현존하는] 존재자들—즉 타인—역시 포함된다. 

 하이데거는 타인을 그로부터 구분되어 고립된 ‘자아’ 또는 주체로부터 출발해 그리로 비로소 이행해야 하는 무언가로 이해해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타인은 자아의 외부에 있는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타인은 심지어 자아와 구분되지 않는다. 자아는 타인들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똑같이—“둘러보면서-고려하는 세계-내-존재”(118)의 방식으로—존재한다. “이러한 똑같이-거기-있음[Auch-da-sein]”은 다시금 나란히-눈앞에-있음[»Mit«-Vorhandensein]과 구별된다(118). 여기서 ‘함께’와 ‘똑같이’는 범주가 아닌 현존재의 실존주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타인은 아무리 가만히 머물러있다고 할지라도 눈앞의-존재자로서가 아니라 그의 세계-내-존재에 입각해 실존하는 현존재로, 다만 “고려하고 있지 않고, 둘러보고 있지 않으면서” 실존할 뿐이다(120). 그러므로 눈앞에-있는 자아가 눈앞에-있는 타인에게로 이행하는 과정에 대한 이론적설명 현존재와 타인 사이의 우선적이고 기초적인 만남의 방식을, 사이에 세계가 공유되는 사태를 간과한다. “현존재의 세계는 함께하는-세계[Mit-welt, 공동세계]이다. 안에-있음[내-존재]은 타인과의 함께-있음이다. 타인의 세계내부적인 즉자존재는 함께-거기-있음이다.”(118)

 현존재가 언제나 이미 타인과 함께 도구들을 사용하며 세계 내에 존재한다는 현상의 힘은 너무나 강력해서, 그는 자신을 발견하고자 할 때조차 우선 대부분 이루어지는 자신의 경험들로부터 거리를 두어야만 한다. 자아에 대한 반성은 (후설의 생각과 달리) 오히려 “‘체험들작용중심[Aktzentrum]’ 아직[noch] ‘보지않으면서이루어져야 하는 이다(119). 자아의 공간적 위치의 인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당장의 논의에서 현존재의 규정성[Daseinsbestimmung]으로 소개되고 있는 ‘여기’나 ‘거기’ 등은 일반적인 장소부사도, 그러한 장소부사와 관련해서 이해되는 대명사도 아니며 그것들 모두에 선행한다.

Das »hier«, »dort« und »da« sind primär keine reinen Ortsbestimmungen des innerweltlichen an Raumstellen vorhandenen Seienden, sondern Charaktere der ursprünglichen Räumlichkeit des Daseins. […] Im »hier« spricht das in seiner Welt aufgehende Dasein nicht auf sich zu, sondern von sich weg auf das »dort« eines umsichtig Zuhandenen und meint doch sich in der existenzialen Räumlichkeit.”(119-120) 

 함께-있음은 현존재가 당장 혼자 있지 않다는 존재적 사실이 아니라, 현존재가 당장에는 혼자 있더라도 근원적으로 성립하는 존재론적인 규정성이다. “현존재의 혼자-있음조차 세계 내에서의 함께-있음이다. 타인은 오직 함께-있음에 즉해서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만 결여될 수 있다[Fehlen kann der Andere nur in einem und für ein Mitsein]. 혼자-있음은 함께-있음의 결여태이며, 혼자-있음의 가능성은 함께-있음에 대한 증거이다.”(120) 그런데 함께-있음의 결여태로서 사실적으로[faktisch] 혼자-있음은 누군가가 실제로 나의 눈앞에-있게 된다고 해서 곧바로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그때 내 곁에 있는 타인들이 그의 누구임의) 무차별함[Gleichgültigkeit]과 낯섦의 양상에서 경험된다면* 고독감은 그대로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함께-있음이라는 실존주가 단순히 타인의 사실적인 다수성으로부터 근거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준다.

*⟪강독⟫에 따르면 이 같은 무관심은 공동존재의 비본래적인 방식이다. 반면 공동존재의 본래적인 방식은 서로를 독자적인 현존재로 인정하면서도 친밀감을 느끼는 것에 해당한다(⟪강독⟫, 173).

Q. 어째서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공동존재의 비본래적인 방식인가? 본래성 대한 하이데거의 정의가 무엇인지 의문스럽다. 여태까지는 ‘x의 본래성’을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비롯한 성격’으로 이해해 본래성에 규범적인 색채를 가하지 않고도 읽을 수 있었는데, 본래성/비본래성의 구분이 공동존재에도 적용되는 것이라면 해당 정의와도 딱 들어맞지 않을 뿐 아니라 ‘공동성’의 이상에 대한 하이데거의 가치평가가 입증되지 않은 편견으로 개입되고 만다.

A. 타인에게 무관심하면 그를 사물과 다를 바 없이 간주하게 되기 때문에, 그의 가장 고유한/본래적인 모습으로 대하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해당 정의와도 잘 들어맞는다.

A2. 뛰어듦/개입함을 하이데거가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기 때문에 꼭 공동성을 이상화하고 있지는 않다(R씨).

A3. ⟪존재와 시간⟫은 현존재에게 독자적인 고유성을 요구하는데, 공동존재 자체가 그 자체로 부정적으로 보인다.

 함께-있음이 실존주라면, 그것은 도구적 실천과 마찬가지로 현존재 일반의 존재를 규정하는 “염려[Sorge, care]의 현상으로부터 해석되어야 한다.”(121) 다만 현존재와 함께-있는 다른 현존재는 도구의 경우에서처럼 고려되는 것이 아니라 배려된다[in der Fürsorge stehen, concern]. 타인에게 무관심한 것조차 배려의 결여적인 양태인데, 그것은 오히려 “일상적이고 평균적인 서로-함께-있음[Miteinandersein]”을 특징지으며, 타인에게 “두드러지지-않음과 자명성의 성격을 부여한다.”(121) 그 결과 타인은 눈앞에-있는 존재자로 잘못 해석되기 쉬우며 그 경우 사물이 그저 눈앞에 있는 사태와 타인이 그저 눈앞에 있는 사태 사이의 차이가 존재론적으로 과소평가될 수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배려는 (결여의 양태가 아닌 경우) 두 가지 극단을 가진다. 일상에서 배려는 다음의 두 극단 사이 적당한 혼합의 형태로 발현된다. 한편으로 나는 다른 사람이 고려해야 할 모든 사물들을 내가 미리 준비해주면서, 그리고 그가 신경써야 할 일들을 내가 대신 처리해 없애주면서 그를 나에게 의존적이고 예속된 존재자로 만들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이를 “(타인의) ‘염려’를 빼앗아가는[abnehmen] 배려” 또는 “뛰어듦[Einspringen, 개입함]”으로 표현한다(122). 다른 한편으로 나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스스로] 구현하도록” 즉 그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돌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데, “이러한 배려는 다른 사람의 실존에 관심을 가질 뿐,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는 사물들에 관심을 갖지는 않는다.”(⟪강독⟫, 174) 하이데거는 이를 타인에게 그의 염려와 자유를 되돌려주기[zurückgeben] 위해 “앞서가줌[Vorausspringen]”으로 표현한다(122).*

*니체의 ‘벗’ 개념과 유사해 보인다. ➔ Q. 니체의 경우, 경쟁적이고 훨씬 거칠고, 타인에 대한 안내의 동기는 없는 것 같다. 부수적인 결과로 상호발전이 따라나오는 것이지, 근본 기조 자체가 ‘배려’는 아니다(K씨).

 함께-있음은 보통 여럿에 의해 함께 사용되는 것이 있을 때 그에 의해서 근거 지워지곤 한다. 같은 일에 함께 종사하는[betreiben] 경우 대개 사람들은 서로로부터 간격을 두면서 상대를 불신한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이 같은 일에 헌신하는[sich einsetzen] 경우, 사람들은 상대에게 그의 자유와 본래적인 삶의 가능성을 개방해줄 수 있다.

 배려에서 타인을 발견하는 방식은 되돌아봄[사려, Rücksicht]좋게-봐줌[관용, Nachsicht]으로 규정된다. 되돌아봄은 그것의 결여태로서 사려-없음[Rücksichtslosigkeit]을, 좋게-봐줌은 상관-없음[Nachsehen, das die Gleichgül- tigkeit leitet]을 가진다. 하이데거는 사려-없음의 예시로 함께-있는 타인들이 누구인지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단순히 그들의 숫자를 세는 경우를 든다(125). 

 한편, 주지하다시피 세계내부적인 도구연관의 정점에 현존재 자신의 존재가 있고, 타인과의 함께-있음이 현존재의 존재를 구성하는 계기이기 때문에 현존재는 타인(과 함께-삶의 특정한 방식) 역시 자신의 궁극목적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타인 역시 함께-있음을 통해 세계 내에서 언제나 이미 개시되어있으며, 세계성을 구성한다.

Q. 어째서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나아가 타인의 ‘가장 고유한[eigenst]’, 곧 본래적인 존재가 그의 궁극목적이라고 말하는가? 비본래적인 존재방식을 목적으로 삼을 때조차 본래적 존재방식이 암묵적인 목표로 지향된다는 주장인가? 이는 지나치게 목적론적인 것처럼 보인다.

A. 일단 이 부분에서는 자구에 집착하지 말고, 자기이해가 타인이해를 포함한다에 집중하는 게 현명할 듯하다(K씨).

“Daher läßt die so konstituierte Weltlichkeit der Welt, in der das Dasein wesenhaft je schon ist, das umweltlich Zuhandene so begegnen, daß in eins mit ihm als umsichtig Besorgtem begegnet das Mitdasein Anderer. […] Der Andere ist so zunächst in der besorgenden Fürsorge erschlossen.”(124)

 현존재의 존재이해 속에는 타인에 대한 근원적인 이해 역시 포함된다. 물론 타인을 적극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함께-있음에 기반해 그를 소개받아야[sichkennenlernen] 할 것이다. 나아가 타인의 심리적인 삶에 대한 주제적, 이론적인 이해 역시 함께-있음에 기반해야 할 테지만, 종래의 감정이입[타인경험, Einfühlung]’ 이론감정이입이 마치 고립된 자아-주체와 원래는 접근 불가능했던 자아 외부의 타인을 비로소 최초로 연결해주는 현상인 것처럼 잘못 표상한다. 유사한 견지에서, 혹자는 타인에 대한 근원적인 존재이해가 결국은 저만의 고유한 존재이해를 가지는 한 현존재의 존재를 구성하는 것이므로, 타인과의 존재관계[Seinsverhältnis]란 자기의 투사를 통해 성립하며, 따라서 “타인은 자기의 복사본[Dublette]”이라고 말할 수 있다(124).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그 전제부터—“그 자신에게 향하는 현존재의 존재는 타인에게 향하는 현존재다”(124-125)—정당하지 못하며 불가해하다.* 감정이입은 함께-있음을 비로소 가능케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정이입이 함께-있음을 통해 가능하다. 감정이입은 오히려 타인이 접근 불가능한 경우에 해당하는 함께-있음의 결여태에 의해 동기화된다.** 단, 감정이입의 해석학은 “현존재의 다양한 존재가능성들 자체가 어떻게 서로-함께-있음과 그에 대한 자기지식[Sichkennen, self-knowledge]을 오도하고 방해하는지, 그리하여 진정한 ‘이해함’이 억제되고[niederhalten] 현존재가 [자신의] 대리자들로[zu Surrogaten] 도피하도록 하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는 의의를 가진다(125).

*Q. 이는 하이데거도 공유하는 전제가 아닌가?

A. 뉘앙스가 조금 다른 것 같다. 해당 전제는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가 곧 다른 사람에 대한 관계”와 완벽하게 동일하다는 것인데, “다른 사람에 대한 관계는 다른 것[이를테면 자기관계]으로 환원될 수 없는 독자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다(⟪강독⟫, 176).

cf. ⟪강독⟫의 해석이 옳다면,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타자를 자기에게 동화시킨다는 레비나스의 비판은 설득력을 잃을 것 같다.

cf. 타인-현상을 자아-전체[Ichall]의 일부로 표상하는, 그럼에도 타인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후설의 감정이입이론이 해당 비판에 정확히 들어맞을지는 고민해볼 문제다.

**Q. 그렇다면 하이데거는 함께-있음을 그것의 가능성에 대한 추가적인 해명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그저 현상적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인가? ‘우리는 왜/어째서/어떤 과정을 거쳐/무엇 덕분에 함께-있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 자체가 봉쇄되는 것처럼 보인다.

A. 세계 안에, 함께-거기-있음으로 해명하지 않는가?

A2. 문제 자체를, 잘못 제기된 것으로 지적하고 소멸시키는 전략. 감정이입의 해석학의 소극적 의의를 언급할 때조차, 그게 퇴락을 얼마나 잘 보여주는지 중심이다(K씨).

A3. 하이데거는 순서가 중요한 사람. e.g. 눈앞의-존재보다 손안의-존재 먼저. 근원적인 구도 설정을 잘 하자는 것이고, 그 구도 위에서는 소통의 가능성에 대한 영역적 존재론(e.g. 뇌과학)을 수행할 수 있다(R씨).

§27 일상적인 자기로-있음 그리고 세인

 하이데거에 따르면 서로-함께-있음은 격차의식[Abständigkeit, distantiality, 격차성, 비교의식]의 성격을 가진다. 풀어 말해,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염려함에 있어 부지중에 언제나 타인과 자신 사이의 차이를 의식한다. 이로써 현존재는 “타인의 지배[Botmäßigkeit] 속에” 있게 된다(126). 이처럼 모든 현존재가 그에게 귀속된 그런 ‘타인’[»Die Anderen«]이야말로 “일상적인 서로-함께-있음에서 우선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거기 존재하는’ 자이다.”(126) 그는 단순한 세상 사람[세인, das Man]이지, 이 또는 저 특정한 사람, 인간 자체, 몇몇 인간도 인간 전체도 아니다.

 “Wer ist es denn, der das Sein als alltägliches Miteinandersein übernommen hat? […] Das »Wer« ist das Neutrum, das Man.”(126)

Q. 차이를 벌리려는 의식(잘 나가려는 의식)인가, 그렇다면 평준화일 수 있는가?(K씨)

A. 이를테면 돈을 많이 벌려고 해도, 같은 규범을 공유하기 때문에 평균성을 준수하는 것이다. 양적인 차이보다는 질적으로 어떤 기준을 따르느냐(J씨).

 대중교통을 타고, 신문을 읽는 등의 일상에서 현존재는 고유성을 상실하며, 나와 차이를 가지는 타인, 나와 다른 자로서 부각되는 타인 역시 소멸한다.* 이 같은 세인의 독재는 두드러지지 않는 채, 그리고 불확정성[Nichtfeststellbarkeit] 속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세인이 사용하고 읽는 것을 똑같이 사용하고 읽고, 세인의 평가에 맞춰 평가하고, 대다수의 생각으로부터 거리를 때조차 세인을 따라 그렇게 한다.** 세인은 아무도 아니지만 모두이기도 함으로써 현존재의 “일상성의 존재방식을 미리 지정한다[vorschreiben].”(127)

*Q. 신문은 그럴 수 있다 쳐도 대중교통은 무슨 잘못인가? 본래적으로 살아도 버스는 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A. 탄 사람 중 아무도 모르고, 누가 탔는지 무차별하므로 / 현대사회의 초기를 경험하는 사람에게는 공동체의 상식을 깨는 것(R씨)

**“[…] wir ziehen uns aber auch vom »großen Haufen« zurück, wie man sich zurückzieht.”(127) ➔ 스놉이나 힙스터의 전형이 떠오른다.

 함께-있음이 ①격차에 대한 의식으로 특징지어지는 이유는 “서로-함께-있음 자체가 평균성을 고려하기 때문”이다(127). 세인의 실존론적 성격인 ②평균성에 따르면, 무엇이 허용되고 타당하며 성공적인지의 기준은 바로 무엇이 평균적인지이다. 이로써 평균성을 염려하는, 쉽게 말해 평균이 무엇인지에 마음을 쓰는 현존재는 “모든 존재가능성들의 ③평준화[Einebnung, leveling down]”라는 “본질적인 경향성”을 가진다는 점이 드러난다(127).* 세인의 상술한 세 가지 존재방식은 (세인의 존재에 해당하는) 대중[die Öffentlichkeit, 대중성, 공공성]을 이룬다. 대중은 언제나 옳은 것으로 간주되어 모든 세계해석과 현존재해석을 규제한다.

*“Jeder Vorrang wird geräuschlos niedergehalten. Alles Ursprüngliche ist über Nacht als längst bekannt geglättet. Alles Erkämpfte wird handlich. Jedes Geheimnis verliert seine Kraft.”(127)을 통해 하이데거는 이 같은 평준화가 단순한 평준화가 아닌 하향평준화라는 의견을 드러낸다. 대중의 평균적인 선택을 근본적으로천박한 기준으로 간주하는 것이다(⟪강독⟫, 180). ➔ Q. 엘리트주의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남을 따라서 판단하는 게 문제인 건가, 남과 결론이 같은 게 문제인 건가?

A. 그런 것 같다. 결론이 대중과 같더라도, 판단의 과정이 다르기만 하면 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본래적으로 돈을 쫓는 삶’ 불가능하다(K씨).

A2. 세인을 대중사회를 사실적으로 읽어내는 데 도움이 되는 개념으로, 가치판단 없이 활용할 수 있다. 우리가 대중성을 표상할 때 소환되는 존재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올바른 분석(R씨). ➔ 그때 그 존재자에 대한 부정적인 가치판단이 경험적으로가 아니라 선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 부분은 비판될 여지가 있다.

Q. 세인의 존재론적인 지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세인은 누구인가? 무엇인가?

A. 세인이 꼭 다수는 아니다. 이를테면 나치에 대한 그의 판단. 그는 나치를 대중운동이 아닌, 민족의 고유성을 발현하는 운동으로 생각했다. 세인의 핵심은 다수가 아니라 익명적 ‘남’이다. , 우리가 아닌 타자. ‘세인’이라는 말을 언제 사용하는가가 핵심. 엘리트주의냐, 아니냐(R씨).

 현존재의 결정은 우선 대개 세인이 내려주기 때문에 현존재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세인은 그때그때마다 현존재의 짐을 그의 일상성 속에서 덜어준다.”(127)* 모든 것을 쉽게 받아들이고, 쉽게 만들어버리고 싶은 현존재의 경향성**과 융합해 세인은 현존재의 존재의 짐을 덜어줌으로써[Seinsentlastung] 자신의 지배를 공고히 만든다. 세인의 지배 하에서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비자립성과 비본래성의 양상 속에 있다.”(128) 이러한 존재방식이야말로 현존재의 현실을 구성한다.

*Q. ‘Entgegenkommen(accommodation)’의 사태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A. 국역에서는 영합하다(소광희), 환대하다(이기상), aller au-devant de lui(불역, ‘마중 나가다’), se porte(불역2)

A2. 짐을 덜고자 하는 사람에게 그가 원하는 것을 해주는 사태. 이를테면 니체 식으로 말하면 약자에게 기독교를 주는(R씨).

A3. ‘맞춰주다’

**Q. 이러한 경향성이 현존재에게 있다는 것을 먼저 입증해야 하지 않을까? 학술적인 주장이 아닌 것 같다.

A. 경험적으로 그런 경향성이 있다는 가벼운 주장은 아닌 것 같다(J씨).

A2. 애초에 입증될 수 있는 경향성이 아니다. 사회과학을 할 수도 없고. 증명 부담이 없기 때문에 더 대담한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 철학자가 이런 것까지 입증할 책임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과도한 입증 요구(R씨).

 세인의 작동은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더욱 은밀하게 ‘보여진다’. 세인은 당연히 눈앞의-존재자가 아니며, 눈앞의-존재에 대한 분석의 결과로 해명될 수 있지도 않다.* (그렇기 때문에) 세인은 “다수 위에 부유하는 ‘보편적 주체’”와 같은 것이 아니다(128). 풀어 말해 “세인은 그때그때마다의 현존재의 유가 아니며” 현존재의 (눈앞에-있는) 특성[Beschaffenheit]으로서 발견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128-129). 따라서 전통적인 논리학 그에 대한 정신과학적인 개혁을 통해 세인을 규정하려는 시도는 존재론적인 혼란만을 낳을 이다.** 세인은 범주가 아니라 “하나의 실존주이며*** 근원적인 현상으로서 현존재의 실정적[positiv, 적극적] 구성틀에 속한다.”(129) 물론 세인의 지배는 역사적으로 달리 구체화될 수 있다.

*Q. 그렇다면 어째서 세인에게서 영향 받은 선존재론적 존재이해가 현존재를 눈앞의-존재로 이해하게 만드는가? 세인의 지배력과 존재론적 편견 사이의 연결고리를 잘 모르겠다.

A. “일상적 현존재는 자기의 존재에 대한 선존재론적 해석을 세상 사람이라는 가장 가까운 존재양식에서 이끌어 낸다. 그리고 세상 사람은 세계 내부적 존재자에 빠져 있기 때문에, 존재론적 해석도 보통 세상 사람의 이러한 경향에 따라서 현존재를 세계 내부적 존재자로부터 이해하게 된다.”(⟪강독⟫, 182)

**Q. 해당 맥락에서 전통 논리학과 정신과학적 개혁의 이야기가 왜 나왔는지 잘 모르겠다.

A. 전통 논리학도, 정신과학을 통해 전통 논리학을 개혁하려는 시도도 존재를 눈앞의-존재로 배타적으로 해석하는 편협함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에, 존재론 자체를 개혁하지 않는 이상 현존재의 실존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확신은 없지만, 정신과학을 통해 전통 논리학을 개혁하려는 시도란 심리학주의와 후설의 논리연구에서의 성과를 동시에 일컫는 듯하다.

***범주의 개수가 엄격하게 한정되는 것과 달리, 실존주는 남발되는 것처럼 보인다.

 일상적인 현존재의 자기는 세인-자기[das Man-selbst], 비본래적 자기이다. 비본래적으로 존재하는 현존재는 세계에의 몰두 가운데서 기본적으로 산만하기[zerstreut, dispersed] 때문에 스스로를 비로소 찾아야만 한다. 우선 대부분 세인으로 머무는 현존재가 세계를 재발견하고 본래적인 자기를 개시함은 그러므로 진상을 은폐하는 방해물들을 치워버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본래적인 자기됨은 세인으로부터 단절된[abgelöst, detached] 주체의 예외상태가 아니라, 본질적인[wesenhaft] 실존주 중 하나로서의 세인의 실존적 변양에 근거한다.”(130)

Q. “Das Sein des Seienden, das mit-da-ist, wird als Vorhandenheit begriffen. So ermöglicht der Aufweis des positiven Phänomens des nächstalltäglichen In-der-Welt-seins die Einsicht in die Wurzel der Verfehlung der ontologischen Interpretation dieser Seinsverfassung. Sie selbst in ihrer alltäglichen Seinsart ist es, die sich zunächst verfehlt und verdeckt.”(130)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A. 평균적 일상성 내에서의 존재구성틀의 자기은폐를 지적하는 것 같다. 비본래적인 실존에서 실존의 구조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Q. 마지막의 “Die Selbigkeit des eigentlich existierenden Selbst ist aber dann ontologisch durch eine Kluft getrennt von der Identität des in der Erlebnismannigfaltigkeit sich durchhaltenden Ich.”(130)는 기존의 논의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A. 자아를 체험다양체 내에서의 존속물로 보는 견해는 자아를 눈앞의-존재자로 왜곡한다(⟪강독⟫, 182).

5 -존재 자체

§28 -존재에 대한 주제적 분석의 과제

 현존재에 대한 실존론적 분석학의 다음 과제는 현존재의 존재에 대한 마찬가지로 근원적인[gleichursprünglich] 현상인 내-존재에 대한 보다 심화된 분석이다. 현존재와 세계 사이의 관계는 종래에 “눈앞에-있는 주체와 눈앞에-있는 객체 사이의[zwischen] 눈앞에-있는 만남[commercium]”으로 이해되었다(132). 이와 같은 ‘사이’에 입각한 이해에는 대안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이데거에 따르면 사이-이해는 오히려 현상들을 ‘흩뿌려[sprengen]’ 놓으며, 그렇게 흩뿌려진 현상들을 조합하게[zusammenfügen] 해줄 도식조차 제공해주지 않는다. 기존의 “‘인식문제들’에 대한 전수된 취급 방식”은 “비가시적이 될 때까지 위장된” 존재론적인 전제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현 논의에서 이는 이제 해체의 대상이 된다(132). 

★“Die Unableitbarkeit eines Ursprünglichen schließt aber eine Mannigfaltigkeit der dafür konstitutiven Seinscharaktere nicht aus. Zeigen sich solche, dann sind sie existenzial gleichursprünglich. Das Phänomen der Gleichursprünglichkeit der konstitutiven Momente ist in der Ontologie oft mißachtet worden zufolge einer methodisch ungezügelten[unbridled] Tendenz zur Herkunftsnachweisung von allem und jedem aus einem einfachen »Urgrund«.”(131)

 세계-내-존재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존재자는 언제나 이미 ‘거기[da]’ 있다. ‘여기’와 ‘저기’는 ‘거기’에 존재하는 존재자가 공간성을 개시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이 존재자, 곧 현존재는 닫혀있지-않음[Unverschlossenheit], 즉 본질적인 개시성[Erschlossenheit]을 존재성격으로 가진다. ‘인간 속의 자연의 빛’이라는 비유가 보여주듯이, 현존재는 다른 존재자에 의해 비로소 빛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광원[Lichtung, cf. 성긴 틈]으로서 눈앞의-존재자를 보거나 보지 않거나 할 수 있다. “현존재는 그의 개시성이다.”(133, 강조는 하이데거) 그러므로 이어지는 절들에서는 그와 같은 개시가 이루어지는 ‘거기’에 대한 논의가 요구된다. ‘거기’에 대한 현상학적 탐구는 우선 처해있음, 이해, 그리고 말[Rede]에 대한 탐구로 나뉜다. 그런데 이러한 현존재의 존재성격은 실존론적인 분석, 곧 현존재의 특정한 존재방식들을 염두에 두는 분석이기 때문에 그것이 일상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또한 탐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퇴락’이라는 존재방식 하에 묶이는 잡담[Gerede], 호기심[Neugier], 그리고 애매성[Zweifeldeutigkeit]이 그것이다.

A. 거기(Da, there) 실존론적 구성

§29 처해있음(심정성, 정황성, Befindlichkeit, attunement, disposition, situatedness)으로서의 현존재

 현존재의 ‘거기’ 있음을 보여주는 기초적인 실존주로서 처해있음(심정성)이란* 기분[die Stimmung] 또는 기분듦[기분에 젖어있음, das Gestimmtsein, being in a mood]이다. 기분이 아무리 쉽게 동요할지라도 현존재는 언제나 이미 기분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아무 기분이 들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는) 상태[Ungestimmtheit]는 다만 현존재가 자기 자신에 대해 피곤해진[überdrüssig] 상태일 뿐이다. 근본기분으로서의 불안(Angst als Urstimmung)과 동일한(⟪강독⟫, 184) 이 피로 가운데서 “존재는 짐으로 드러났다. 왜인지는 알지 못한다[Das Sein ist als Last offenbar geworden. Warum, weiß man nicht].”(134)** 이는 기분 자체에 비해 인식이 가지는 개시성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기분의 고양은 존재의 짐을 덜어주지만, 이 사태는 그 짐을 “덜어줄 때조차[wenngleich enthebend] 현존재의 짐으로서의 성격[Lastcharakter des Daseins]을 개시해”줄 뿐이다(134).

*독일어 단어 ‘Befindlichkeit’은 일차적으로 심적인 상태를 의미하지만, 형용사형 ‘befindlich’는 장소적인 규정성 또는 상황에 처해있다는 성격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상태에-처해있음’이 가장 포괄적인 번역어인 것처럼 보인다.

**영역본에 따르면 이 부분은 초반본과 재판본에서 상이하다. 재판본은 “The being of the there has, in such a bad[tiring] mood, become manifest as a burden.”으로 번역된다(Stambough(1995), 131).

***“Erschlossen besagt nicht, als solches erkannt.”(134) ➔ Q. 하이데거는 그가 비판하는 후설과 서로 다른 외연의인식개념을 운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후설에게는 모든 지향이 곧 인식이기 때문에, 지평지향성을 통한 암묵적인 이해 역시 인식에 포함된다. 그 경우, 하이데거의 비판은 허수아비 때리기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 혐의를 벗기 위해서는 하이데거는 지향과 구분되는 개시 정의를 명확하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A. ‘열려있음, 따라서 들어갈 수 있음’(R씨) ➔ 인식은 실제로 들어가는 거니까 다르다. 인식의 존재론적 가능조건으로서 개시되어있음 vs 그때그때마다의 인식

A2. 특정 대상을 개시함, 보다는 개시되어있음. 문법적으로(K씨)

“Die Stimmung macht offenbar, »wie einem ist und wird«. In diesem »wie einem ist« bringt das Gestimmtsein das Sein in sein »Da«.”(134)

 기분을 가지는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책임을 떠안게 된[überantwortet, 인수받은], 실존하는 존재자이다. 그가 존재하며, 존재해야 하지만, 그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는[daß~] 벌거벗은[nackt] 사실은 언제든 그의 삶 속으로 침투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현존재는 존재적으로-실존적으로 기분 속에서 개시된 존재로부터 도피한다.** 이는 존재론적-실존론적으로 다음을 의미한다. […] 도피 자체 속에서 거기는 개시된 것으로 존재한다.”(135)**

*“오른쪽에서 헐떡거리며 걷고 있는 늙은 의사와 동행하며 어딘지도 모른 채 어둠 속을 걸으며, 광장에서 들려오는 한줄기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 베이야르의 웃음과 고집 센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리고 또 폭발의 소리가 들리자 파랗게 질리던 어머니의 얼굴을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정다움과 슬픔과 함께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가 오랜 세월의 어둠을 뚫고 걸어가는 그 망각의 땅에서는 저마다가 최초의 인간이었다. 또 그 땅에서는 그 역시 아버지 없이 혼자서 자랐을 뿐, 이야기를 해도 좋을 만한 나이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서 집안의 비밀을, 혹은 오랜 옛날의 고통을, 혹은 자신이 겪은 경험을 이야기해주는 그런 순간들, 우스꽝스럽고 가증스러운 폴로니어스조차 레어티스에게 말을 함으로써 돌연 어른이 되는 그런 순간들을 그는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었다. 열여섯 살이 되어도 스무 살이 되어도 아무도 그에게 말을 해주지 않았고 그는 혼자서 배우고 혼자서 있는 힘을 다하여, 잠재적 능력만을 지닌 자라고, 혼자서 자신의 윤리와 진실을 발견해 내고 마침내 인간으로 태어난 다음 이번에는 더욱 어려운 탄생이라고 할, 타인들[…]에게로 또 새로이 눈뜨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고장에서 태어나 뿌리도 신앙도 없이 살아가는 법을 하나씩하나씩 배우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이, 결정적인 익명성으로 변한 나머지 자신들이 이 땅 위에 왔다가 간 단 하나의 거룩한 흔적인, 지금 공동묘지 안에서 어둠에 덮여 가는 저 명문을 읽을 수도 없는 묘석들마저 없어져 버릴 위험이 있는 오늘, 모두 다 함께 다른 사람들의 존재에 눈뜨며 새로이 태어나는 법을, 자신들보다 먼저 이 땅 위를 거쳐 갔고 이제는 종족과 운명의 동지임을 인정해야 마땅할, 지금은 제거되고 없는 정복자들의 저 엄청난 무리들에 눈뜨며 새로이 태어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듯이.”(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최초의 인간⟫, 열린 책들, 2009, 203-204, 강조는 필자)

**레비나스는 ⟪탈출에 관하여⟫에서 ‘구역질(la nausée)’을 분석하며 비슷한 주장을 펼친다. 하이데거가 ‘존재의 짐(Seinslast)’ 또는 ‘불안(Angst/angoisse)’로 표현한 사태를 레비나스는 ‘불안(malaise)’을 통해 개념화한다. 구역질 가운데서 “우리는 그저 거기에 있으며(On est là), 있는 것 이상의 아무것도 행하지 못한다. [...] 이것은 [...] 순수한 존재에 대한 경험 자체이다(c'est l'expérience même de l'être pur).”(에마뉘엘 레비나스, 김동규 옮김, ⟪탈출에 관해서⟫, 지식을만드는지식, 2011, 58-59) 하이데거는 인간의 조건으로서 이러한 피투의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불가능한 것으로 표상하는 데 반해, 레비나스는 타자를 섦김으로써 존재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하이데거와 레비나스가 (레비나스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동일한 ‘존재’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한편 레비나스의 타자로의 탈출과 하이데거의 (본래적 자기로부터의) 도피—곧 퇴락—사이의 관계 역시 철학적으로 탐구해볼 만해 보인다.

**Q. “[…] in dem, woran solche Stimmung sich nicht kehrt, ist das Dasein in seinem Überantwortetsein an das Da enthüllt.”(135)을 이해하지 못했다.

A. “현존재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가 이렇게 은폐되어 있을수록, 현존재의 존재성격, 즉 ‘그 자신이 아무런 이유도 근거도 주어지지 않은 채로 존재하며 또한 존재해야만 하는 존재’라는 사실은 오히려 더욱더 또렷하게 분명해지면서 현존재를 짓누르게 된다.”(⟪강독⟫, 185) 그의 존재에 아무런 이유도 근거도 없기 때문에 그것은 짐이 된다. 그리고 이 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기 때문에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다(⟪강독⟫, 185).

 현존재가 상술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성격을 하이데거는 피투성이라고 부른다. 피투성은 현존재가 “세계-내-존재로서 거기[Da]이도록” 그가 “그의 거기로 내던져짐[die Geworfenheit dieses Seienden in sein Da, thrownness, 피투성]”에 해당한다(135). “피투성이라는 표현은 떠안음[Überantwortung, being delivered over, 넘겨받음, 책임의 인수]의 현사실성[Faktizität]을 가리킨다.”(135) 이때 처해있음(심정성)을 통해 개시되는 저 ‘Daß’—그가 존재하며, 존재해야 하지만, 그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는 진실—은 물론 눈앞의-존재자에 대한 범주적 사실의 표현이 아닌 실존론적 규정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현사실성의 진실[Das Daß der Faktizität]’*은 눈앞의-존재자에 접근하는 쳐다봄이나 직관[Anschauen], “내면에 대한 의식적인 반성”을 통해서는 접근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강독⟫, 185-186).

*Q. 더 나은 번역이 있을까?

A. “현실성이라는 것은”(소광희 역) / 현사실성이 맞다는 것은(K씨)

Faktizität ist nicht die Tatsächlichkeit des factum brutum eines Vorhandenen, sondern ein in die Existenz aufgenommener, wenngleich zunächst abgedrängter Seinscharakter des Daseins.”(135, 강조는 하이데거)

 요컨대 현존재는 자신이 특정한 기분을 가지는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데 대한 자각을 통해 스스로를 내던져진 존재자, 존재의 짐을 지고 있는 존재자, “자신의 존재에 책임이 있는 존재자[Seiendes, das seinem Sein überantwortet ist, being that is entrusted to its being]”로 발견한다(135).* 이러한 발견에 주의를 기울이든[ankehren], 기울이지 않든[abkehren]** 현존재는 “언제나 이미 스스로를 발견한” 채인, 즉 스스로의 존재를 이해하고 있는 존재자이다(135). 이러한 발견과 이해, 즉 개시는 “모든 인식함과 의지함에 앞서 그리고 인식과 의지의 개시범위를 넘어서” 이루어진다(136). 현존재가 자신의 미래에 대해 확신에 차있을 때조차 그가 ‘거기’ 내던져져 있다는 사실은 “고갈되지 않는 수수께끼 같음 속에서 그를 노려보고 있다.”(136)*** 기분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사람조차 기분으로부터 자유로운[stimmungsfrei]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때 심정성은 이와 같이 ①“현존재의 내던져져있음을 개시하지만 우선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것을 현존재가 그것에서 회피하고 등을 돌리는 식으로 개시한다”고 말해야 한다(⟪강독⟫, 189). Cf. “Die Befindlichkeit erschließt das Dasein in seiner Geworfenheit und zunächst und zumeist in der Weise der ausweichenden Abkehr.”(136, 강조는 하이데거)

**“[…] sie[Befindlichkeit] ist selbst die existenziale Seinsart, in der es sich ständig an die »Welt« ausliefert, sich von ihr angehen läßt derart, daß es ihm selbst in gewisser Weise ausweicht. Die existenziale Verfassung dieses Ausweichens wird am Phänomen des Verfallens deutlich werden.”(139)

★***Q. “Existenzial-ontologisch besteht nicht das mindeste Recht, die »Evidenz« der Befindlichkeit herabzudrücken durch Messung an der apodiktischen Gewißheit eines theoretischen Erkennens von purem Vorhandenen. Um nichts geringer aber ist die Verfälschung der Phänomene, die sie in das Refugium des Irrationalen abschiebt. Der Irrationalismus – als das Gegenspiel des Rationalismus – redet nur schielend von dem, wogegen dieser blind ist.”(136)을 통해 후설에게 중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취지를 정확히는 모르겠다.

A. 심정성의 명증성이 이론적 인식의 명증성보다 낮고 필증적이지 못하다는 반박은 실존론적이고 존재론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 심정성의 명증성은 “그 어떠한 이론적인 확실성보다도 더 분명하게 우리의 현사실적인 근본상황을 드러내는 것이다.”(⟪강독⟫, 189) 또한 “기분은 비합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현존재의 존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현상이다.”(⟪강독⟫, 189)

 처해있음은 반성을 통해 접근되는 단순한 심리 상태와도 구별된다. (후설이 자아인식 및 세계인식의 첫걸음으로 상정한) 내재적인 반성이 ‘체험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처해있음 가운데서 ‘거기’가 이미 개시되어있기 때문이다. 다시금, 내성은 그것이 현상학적 내성이라 할지라도 자아, 더욱이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접근로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진실이 여태까지 밝혀지지 않은 것은 자연스러운데, 왜냐하면) “‘한갓된 기분’은 […] 모든 지각하지-않음보다도 고집스럽게 거기[Da]를 은폐하기[verschließen]” 때문이다(136). 현존재가 나쁜 기분[Verstimmung, bad moods]에 처해있을 때를 생각해보자. 이를테면 분노와 같은 나쁜 기분은 “현존재의 외부에서도, 내부에서도 오지 않고 세계-내-존재의 방식으로서 그것 자체에서 일어”나면서 현존재를 공격하는데[überfallen, assail], 그 가운데서 현존재는 세계에로 무반성적으로 몰두당한다[Hin- und Ausgegebensein](136).

 하이데거는 이로부터 기분의 개시 기능과 ‘내부’에 대한 반성적 포착 사이의 실정적인[positiv] 차이가 드러난다고 말한다. “기분은 언제나 이미 세계-내-존재를 전체로서 개시한 채이고[hat je schon […] erschlossen] 무언가를 향한 자기정향[Sichrichten auf …]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allererst] 가능케 한다.”(137) 기분은 우선은 영혼적인—곧 ‘주체 내부적’인—것이었다가 “수수께끼 같은 방식으로 바깥에 뻗어나가[hinauslangen] 사물과 사람들을 채색하는” 무엇이 아니라, ②세계 자체가 근원적으로 개시되는같은 뜻으로, 현존재가 세계--존재하는—“실존론적 기초방식[Grundart]”이다(137).

 ③이미 개시된 세계 위에서의 사물과의 만나게-[Begegnenlassen] 만남-당함[Betroffenwerden, being affected or moved, 충격받음]의 성격, 정동적인 촉발의 성격을 가진다는 것—사물은 “우리를 위협하거나 우리에게 기꺼이 호응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강독⟫, 190)—또한 기분을 통해 분명해진다. 현존재가 실존적으로 (즉, 경험적으로) 이를테면 손안의-존재자에 의해 위협을 당할 수 있는 것은 실존론적으로 (즉, 선험적으로 또는 근원적인 가능조건으로서) 손안의-존재자들이 내-존재(하는 현존재에게) 애초에 그와 같은 방식으로 와닿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daß es[das In-Sein] in dieser Weise von innerweltlich Begegnendem angegangen werden kann]. 이와 같은 “와닿음[Angänglichkeit, mattering]”은 세계를 특정한 방식으로 개시하는 “처해있음에 의해 근거 지워진다.”(137) 쉽게 말해, 현존재가 어떤 기분에 처해있을 수 있어야만 세계 내의 사물들이 (해당 기분에 상응하는) 특정한 모습으로 그에게 와닿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두려움을 느낄 수가 없는데 사물이 위협적인 것으로 나타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처해있음의[처해있음에 의한] 기분듦은 실존론적으로 현존재의 세계개방성을 구성”하며, 현존재가 개시된 세계에 의존한다는 것을 밝혀준다(137).

 ‘감각[Sinne]’ 역시 현존재가 세계 내에 처해있기 때문에 비로소 작동할 수 있다. 현존재에게 사물들이 이미 와닿아있지 않다면, 촉발[Affektion]이 일어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만의 가능성[Täuschbarkeit]** 역시 기분의 세계 개시 기능에 입각해서 이해해야 한다.*** “이론적 응시[Hinsehen, 쳐다봄]”는 세계를 눈앞에-있는 일형적인[einförmig] 것으로 감광해버리지만[abblenden, flatten out, dim], 사실 세계는 “항상적이지 않은, 기분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깜박거리는 시선[unsteten, stimmungsmäßig flackernden Sehen]”에 의해서만 비로소 보아지며, 그렇기 때문에 손안의-존재자 역시 결코 매번 동일하지 않다(138). “가장 순수한 테오리아조차 모든 기분을 제쳐두고 이루어질 수는 없다.”(138)**** 이처럼 “인식적 규정의 실존론적-존재론적 구성”을 진술한다고 해서 “학문을 존재적으로 ‘느낌’에 맡겨버리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138).

*Q. 기분을 가지는 것이 감각의 선행조건이라는 주장은 매우 반직관적이다.

A. 기분을 가짐 ⇔ 세계가 개시됨 ⇒ 감각이 작동함. / 감각은 본질적으로 감정적 색채가 묻은 감각이기 때문에, 감각의 주체는 ‘patient’여야 한다.

**Q. ‘절대적 »세계« 인식이라는 가치판단’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A. 세계의 동일성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며, 그것이 변동성에 대한 인식보다 탁월한 인식의 방식이라는 편견을 가리키는 것 같다.

***“[…] 우리는 두려움에 빠져서 위험이 크지 않는데도 지레 겁을 먹고 혼비백산해서 달아날 수 있다.”(⟪강독⟫, 192)

****테오리아는 유유자적한 기분 가운데서만 가능하다(⟪강독⟫, 192).

 역사적으로도 정동[Affekt]과 느낌에 대한 논의는 심리학 이전에 철학의 소관이었다.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에서 진행한 파테에 관한 논의를 “서로-함께-있음의 일상성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 해석학”으로 평가한다(138). 대중으로 존재하는[공공성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세인의 수사는 기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만 성공할 수 있다. 그런데 정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해가 스토아주의, 교부 신학 및 스콜라 철학을 거쳐 근대에까지 전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동적인 것[Affektiven]에 대한 근본적인 존재론적 해석”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한 걸음도 진보하지 못했다(139). 오히려 정동과 느낌은 표상함과 의지함과 마찬가지로 심리적인 현상으로서만, 표상함과 의지함 옆 제3의 영역으로서만 주제화되었다. “정동과 느낌은 부수현상으로 절하된다[Sie sinken zu Begleitphänomenen herab].”(139) 현상학의 공적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그릇된 해석의 방향성을 바로잡았다는 것이다. 일찍이 셸러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파스칼의 영향을 받아 표상의 작용과 관심의 작용 사이에 성립하는 정초연관을 탐구한 바 있다.* 그러나 그때에도 “작용현상들의 실존론적-존재론적 기초들”은 해명되지 않았다(139).

*“여기서 하이데거는 [파스칼을 언급함으로써] 진리라는 현상은 감정이나 기분과 무관한 순수한 이론적 태도에 의해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존재자들에게 우리 자신을 여는 사랑의 감정을 통해서만 주어질 있다는 사실을 시사하려고 한다.”(⟪강독⟫, 193)

 처해있음은 ①현존재 자신의 존재, ②세계, ③세계내부적 존재자를 현존재에게 개시할 뿐 아니라 실존론적 분석학을 수행함에 있어 방법론적으로도 유용하다. 세계내부적 존재자들이 현존재의 피투성을 통해 그에게 이미 와닿아있어야만 존재자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존론적 분석학은 “개시된 것의 현상적 내용물을 단지 실존론적으로 개념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in den Begriff heben] 위해” 이루어질 뿐이다(140).

§30 처해있음(심정성) 양태(Modus)로서의 두려움(Die Furcht)

 하이데거에 따르면 두려움은 “두려움의 대상, 두려움을 느낌 그리고 두려움의 이유[das Wovor der Furcht, das Fürchten und das Worum der Furcht(that about which are afraid)]”라는 세 가지 측면[Hinsicht]에서 분석된다(140). 이러한 측면들은 두려움뿐만 아니라 모든 심정성에서 발견되는 구조이다.

 (1) 두려움의 대상은 손안의-존재자, 눈앞의-존재자, 함께-거기-있는 존재자 중 하나이며, 위협의 성격[Charakter der Bedrohlichkeit]을 지닌다. 이때 ①두려움의 대상은 특정 용도연관 내에서 그 용도상 유해하다[hat die Bewandtnisart der Abträglichkeit]. ②두려움의 대상은 그때그때마다 특정한 존재자들에게만 유해하며—이를테면 밀폐된 공간은 폐쇄공포증 환자에게 유해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유해하지 않다—따라서 유해성 자체도 특정한 방역에서만 발현된다. ③“방역 자체와 그로부터 유래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은[안심할 수 없는, nicht »geheuer«] 그런 것으로 알려진다.”(140) ④유해한 것은 (아직) 다가오는 중의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위협적이다. ⑤아무리 유해한 것도 멀리 있으면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으므로, 두려움의 대상은 우리 “주변의 내부에 있는 무엇[ein solches innerhalb der Nähe]”이다(140). 그러나 그렇게 유해한 것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결국에는 미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이중의 가능성은 두려움의 대상이 우리에게 다가올수록 강해진다. “[그때] 그것은 두렵다고 우리는 말한다.”(141) ⑥두려운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두려움을 오히려 가중시킨다[ausbilden].

 (2) 두려움을 느낌은 두려움의 대상을 위협적인 것으로 개시함을 의미한다. “두려움을 느낌 자체란 위에서처럼[so] 성격규정된 위협적인 것을 개방하되, 스스로가-(그에 의해)와닿아지도록-허락하는 그런 개방이다[Das Fürchten selbst ist das sich-angehen-lassende Freigeben des so charakterisierten Bedrohlichen].”(141) 두려운 것[das Furchtbare]은 두려움의 심정성 가운데서만 둘러봄을 통해 비로소 나타나며, 그러한 둘러봄 이후에야 쳐다봄[Hinsehen, 응시]을 통해 대체 무엇이 두려운지가 명료해진다. 쉽게 말해, 두려움의 대상보다 두려움의 심정성이, 즉 그로부터 두려운 것이 가까이 도래할 수 있도록 세계를 미리 개시해놓는 사태가 선행한다. 저 “가까이-도래함[Das Nahenkönnen] 자체가 세계-내-존재의 본질적인 실존론적 공간성을 통해 개방되어있”는 것은 물론이다(141).

 (3) “두려움이 그것을 위해 또는 그것에 대해 두려워하는 바로 그것[Das Worum die Furcht fürchtet]”, 즉 두려움의 이유는 현존재의 존재다(141).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는 존재자만이 두려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이러한 존재자를[현존재를] 그의 위험해짐[Gefährdung, jeopardization] 속에서[위험에 처해있는 자로], 그 자신에게 홀로 남겨짐 속에서[홀로 남겨진 자로] 개시한다[erschließt […] in der Überlassenheit an es selbst]. 두려움은 언제나 […]현존재를 그의 거기에서의 있음 속에서 드러낸다[in Sein seines Da enthüllen].”(141) 두려움 가운데서 현존재는 스스로를 상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자신의 내존재[Insein]를 자각하게 된다.

 요컨대 심정성의 양태로서의 두려움은 등근원적으로 첫째, 세계내부적 존재자를 위협적인 것으로서 개시하고 둘째, -존재를 위협받는 존재로서 개시한다. 그런데 우리는 타인을 위해 대신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타인의 몫의 두려움이 줄어들지는 않는데, 우리는 타인이 자기 몫의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무모하게 굴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로 그를 대신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종류의 두려움을 “타인과의 함께-처해있음[Mitbefindlichkeit]”의 일종으로 규정하면서, 나로부터 떨어져나갈[entrissen] 수도 있는 타인과의 함께-있음, 함께-있음의 특정한 실존론적 양태가 곧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고 기술한다(142). 결국 타인을 위해 대신 두려움을 느끼는 경우에도 현존재는 자신이 마주한 위험—자신이 영위하는 공동존재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는 것이다(⟪강독⟫, 197).

 두려움의 현상이 가지는 구조적 계기들은 변동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위협적일 수 있는 것이 ‘갑작스럽게’ 가까워지면 두려움은 동요[Erschrecken, alarm, 경악]로 나타난다. 또 만일 위협적일 수 있는 것에 대해 우리가 전혀 친숙하지 못하면 두려움은 공포[Grauen, horror, 전율]로 나타난다. 공포스러운 것이 갑자기 도래할 경우에는 두려움은 혼비백산[Entsetzen, terror]으로 나타난다. 그 외에도 소심해지거나 안절부절 못하게 되는 것 등도 두려움의 변양태이다. “두려움의 모든 변양태들은 스스로-처해있음[을-발견함, Sich-befinden]의 가능성들로서 현존재가 세계-내-존재로서 ‘두려움을 느끼며[furchtsam]’ 존재한다는 것을 가리킨다.”(142)

Q. 두려움은 비인간 존재자에게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감정이 아닌가?(K씨) / 굳이 여기서 (다른 것도 아니고) 두려움을 분석하고 넘어가는 것이 어색하다(R씨).

A. 동물의 ‘빈약한’ 세계[weltarm]/뒤의 근본기분으로서의 불안과 구분하기 위해

§31 이해함으로서의 거기-있음(Das Da-sein)

 심정성과 등근원적으로 현존재의 존재를 ‘거기’에 묶어두는[halten] 현존재의 실존론적 구조로 이해[Verstehen]가 있다. “심정성은 언제나 자신의 이해를 가지며 […] 이해함은 언제나 기분에 젖어있다.”(142) 심정성과 이해는 “현존재의 존재의 근본양태”로서, [학적] 인식의 한 종류로서 일반적으로 [자연과학적] 설명[Erklären]과 함께 언급되는 [정신과학적] 이해는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이해현상의 실존론적 파생태로 간주되어야 한다(143).*

*⟪강독⟫은 여기서 하이데거가 딜타이의 사상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해설한다(⟪강독⟫, 199).

cf. 심정성과 이해가 같은 현상의 양면인 것 같다. 3인칭 vs 1인칭(H씨). / 특별히 ‘이해’를 내세운 것은 정신과학과 자연과학 사이의 대비에 대한 당대의 논쟁을 염두에 둔 개념화인 것 같다 + 명제적 타당성, ‘타당성 현상’의 조건으로서의 선지식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R씨) / 칸트의 ‘Verstand’ 개념에 대한 비판?

 이해란 우선 현존재가 ①자신의 궁극목적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궁극목적에 대한 이해 속에서는 언제나 (목적연관 전체의) 유의의성이 함께 개시되므로*, 이해는 ②의미로서의 세계에 대한 이해이기도 하다. “궁극목적 속에서 실존하는 세계-내-존재 그 자체가 개시되며[Im Worumwillen(that for the sake of which Dasein is) ist das existierende In-der-Welt-sein als solches erschlossen], 이 개시성이 이해라고 불린다.”(143) 이와 같은 궁극목적과 유의의성에 대한 등근원적인 이해, 또는 현존재에게[현존재 속에서] 궁극목적과 유의의성이 함께 개시되는 사태는 현존재가 세계-내-존재하는 존재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문제삼는 존재자임을 의미한다.

*하이데거에게 개시는 언제나 무엇 속에서(in) 일어나는 사태다. 이 ‘속에서’는 ‘-에게’와 ‘를 통해’의 의미를 모두 담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존재가 (자신의 궁극목적과 의미연관으로서의 세계를) 이해하는 존재자라는 것은 그가 “일단 존재하고 나서 ‘어떤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부가물로 가지고 있는 눈앞의 사물과 같은 것이 아니라”(⟪강독⟫, 199) 일차적으로[primär] 가능존재[Möglichsein]임을, 즉 그는 존재하는 한 무언가가 있는[kann sein] 존재자, 이런저런 존재가능성을 실현할 있는 존재자임을 가리킨다. “실존주로서의 이해함 속에서 알려지는 것[Gekonnte]은 [특정한] 무언가가 아니라 실존함으로서의 존재함[das Sein] (자체)이다. 이해함 속에는 실존론적으로 --있음[Sein-können, potentiality]으로서의 현존재의 존재방식이 놓여있다.”(143)

 현존재의 실존론적 될-수-있음과 눈앞의-존재자에게 이런저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식의 우연성과 같은 논리적인 무모순성은 (모두 ‘가능성’이기는 하지만) 서로 구분되어야 한다. 눈앞에-있음의 양상적 범주로서의 가능성은 “단지 가능한 것”, “현실성과 필연성보다 존재론적으로 낮은 것[niedrig]”을 규정한다(143). 반면 실존주로서의 가능성은 “현존재의 가장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실정적 존재론적 규정성”이다(143-144).

 실존주로서의 가능성은 무차별성의 자유와도 구분된다. 현존재는 심정적인 존재자이기 때문에 (심정에 따라서) “언제나 이미 특정한 가능성들에 닥쳐있[hineingeraten sein]”다. 그때그때마다 그는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특정한 존재가능성에 대해 그것을 실현할 수도, 실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그가 자의적으로 살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철두철미 내던져진 가능성” 그 자체임을, 쉽게 말해 그게 무엇이든 언제나 무언가가 있는 (또는 있었던 것이 ) 존재자로밖에 있지 못함을 의미한다(144). 그리고 그는 자신이 실현하고 있는 그 가능성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현존재는 [자신의] 가장 고유한 될-수-있음[잠재성] 위해 자유롭게 존재할 가능성이다.”(144) 즉 현존재에게는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성을 실현할 자유가 있다. 그리고 사실 그는 이미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양한 가능한 방식과 정도로 투명하게-꿰뚫고 있다.”(144) 그러나 현존재가 자신의 삶이 어느 방향으로[woran] 흘러가고 있는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와 같은 ‘앎’[»Wissen«]은 내재적인 자기지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의 본질적 존재구조로부터 오는 것이다. “오직 현존재가 이해하면서 그 자신의 거기이기[Dasein […] ist sein Da] 때문에 그가 길을 잃거나 스스로를 오인할[verkennen]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해가 심정적인 것이며 이러한 것으로서 실존론적으로 피투성[의 상태]에 떠넘겨진[der Geworfenheit ausgeliefert] 것인 한, 현존재는 언제나 이미 길을 잃고 스스로를 오인해[왔]다.*”(144) 그러나 그 같은 방황이 있기 때문에 현존재는 역설적으로 스스로를 되찾을 가능성 그리고 책임을 가진다.

*Q. ⟪강독⟫은 이 피투성을 “세상 사람들의 해석에 내던져진” 상태로 해석하며, 현존재가 스스로를 오인한다는 이어지는 말을 생각하면 하이데거 역시 비슷한 취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강독⟫, 200). 하지만 현존재가 심정적인 존재자라는 사태와 그가 세인에 의해 휘둘린다는 사태는 의미상 동일시되기 어려워 보인다. 예를 들어 세인에 의해 휘둘리지 않는 인간도 기분만큼은 가질 것이다. 그렇다면 두 사태는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가?

cf. “Die Befindlichkeit erschließt das Dasein in seiner Geworfenheit und zunächst und zumeist in der Weise der ausweichenden Abkehr.”(136, 강조는 하이데거)

A. 평균적 일상성에서의 삶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피투 ➔ 곧바로 세론에의 피투

 요컨대 자신이 나아가는 방향[Woran]에 대한 개시인 이해가 현존재의 본질적 존재구조인 한에서 “될-수-있음으로서 내-존재는 언제나 세계-내에서-될-수-있음이다.”(144) (이처럼 이해를 통해 세계가 개시됨과 더불어) 세계내부적인 손안의-존재자들 그리고 눈앞의-존재자들의 통일체로서의 자연 일반 역시 가능적인 것으로서—이를테면 사용가능성[Verwendbarkeit]을 가지거나 유해할 가능성[Abträglichkeit]을 가진 것으로서—개방된다. 칸트가 자연의 존재에 대한 탐구를 자연의 가능조건들에 대한 탐구로써 수행했을 때는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자연의 가능조건이 존재한다는 전제는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을 통해서만 증명될 수 있다(⟪강독⟫, 201).

 “이해는 […] 자신의 존재와 세계 그리고 존재자들을 왜 가능성들을 향해서[가능성들과 관련해서] 개시하는가?”(⟪강독⟫, 201) 이해가 특별히 가능성에 대한 개시인 이유는 “이해 자체가 우리가 기투[Entwurf, project, 구상, 윤곽지음, 초벌그림]라고 부르는 실존론적 구조를 가지기 때문이다.”(145) 쉽게 말해, 현존재는 존재하는 한 언제나 자신의 모습이 무엇이 될지를 자신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들에 입각해 언제나 비주제적으로 미리 그려보면서, 구상해보면서 존재한다. (그는 존재하는 언제나 기대하거나 걱정한다.)

Q. 기투는 기본적으로 미래지향적인 행위인가? 즉 구상은 언제나 미래에 대한 구상인가? 아니면 현재 또는 과거에 대해서도 그것이 어떤 모습이며 어떤 모습이었는지가 언제나 이미 구상되어있는 것인가?

A. 미래지향적인 것 같다.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언제나 자신이 아직 그것이 아닌 존재자로 또는 나중에 그것이 존재자로 존재한다고 쓴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 역시 언젠가의 미래였기 때문에, 모든 순간에 대해서 그에 상응하는 구상은 있을 것이다.

*논리의 법칙과 실존의 법칙이 상호배치되는 부분이다. cf. “[…] das, was es in seinem Seinkönnen noch nicht ist, ist es[das Dasein] existenzial. Und nur weil das Sein des Da durch das Verstehen und dessen Entwurfcharakter seine Konstitution erhält, weil es ist, was es wird bzw. nicht wird, kann es verstehend ihm selbst sagen: »werde, was du bist!«.”(145)

 구체적으로 이해는 현존재의 존재를 ①그의 궁극목적[Worumwillen]에로 기투하는데[entwerfen]**, [현존재의 존재를] 그의 그때그때마다의 ②세계의 세계성으로서의 유의의성에로 기투하는 것과 똑같이 근원적으로 그렇게 한다.”(145) 현존재는 어쩔 수 없이, 경험적으로 어떤 계획을 세우며 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처럼 자신의 궁극목적과 그에 따라 질서 잡히는 유의의성을 구상하는 존재자로만 존재할 수 있다.

 기투란 하나의 가능성이 특정되기 이전에 가능성 일반을 존재케 해주는—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가능성을 가능성으로서 미리 던져주는[vorwerfen]—“현사실적인 있음의 활동공간의 실존론적 존재구성틀”(아프리오리)이다(145). (그렇기 때문에) 기투의 목표지점[woraufhin]은 특정한 가능성으로서* 주제적으로 포착되지 않는다.

*Q. 포착될 경우 그것은 기투된 것으로부터 가능성-성격을 빼앗고 단순히 주어지거나 사념된 무엇으로 격하된다는[herabziehen]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를테면 자신이 바라던 것을 자각하고 구체화한 산물이 왜 사전적 구상의 격하된 버전이 되는가? 해석과 무엇이 다른가?

A. 여러 가능성들 중 하나로 제한/축소된다(H씨) + 저 ‘격하’가 별로 부정적이지 않을 수 있다(R씨). / 제한보다는 주제화, 암묵적이었던 것의 주제화가 더 초점에 맞춰져야 할 것 같다(K씨). / (일반적으로 능동적으로 간주되는) 꿈꿈이 사실 수동적으로도 늘 이루어지고 있다는 데 초점?

 이해는 세계에 근거하는 비본래적인 것이거나, “스스로를 일차적으로 궁극목적에로 내던짐으로써” 현존재가 그 자신으로 실존할 수 있도록 해주는 본래적인 것이다(146). 쉽게 말해, 현존재는 자신의 삶을 세론에 입각해 구상할 수도 있고, 자신만의 궁극목적에 입각해 구상할 수도 있다. 나아가 이해는 본래적인 것이든, 비본래적인 것이든 진정하거나[echt, genuine]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어느 경우에서든 이해는 세계 전체의 개시,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의 완전한[voll] 개시성”에 상응한다(146). 쉽게 말해, 이해는 특정한 사물에 대한 앎이 아니라 세계 세계 내에서의 전체에 대한 구상이다.

*Q. 무슨 뜻인가?

A. 핵심은 비본래적 이해도 진정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맥락상 자신과 관련된/자신에게 무심한 정도로 나뉠 수 있을 것 같다. 이를테면 눈앞의-존재자에 대한 이해는 진정한 이해가 아닐 수 있다(K씨).

 또한 이해는 현존재의 시야[시선, 봄, die Sicht]를 구성한다. 현존재의 시선에는 고려함의 둘러봄, 배려함의 돌아봄[돌봄, Rücksicht], 그리고 자신의 존재인 실존 전체에 대한 투명하게-꿰뚫어봄[Durchsichtigkeit, transparency, 통찰]이 있다. (스스로의 궁극목적에 대한) 투명한-꿰뚫어봄은 “세계-내-존재의 완전한 개시성에 대한 이해하는 파악[Ergreifen, grasping]”으로 세계에의 곁에-있음[Beisein]과 타인과의 함께-있음을 구조적으로 포함하기 때문에 한갓된 자기인식과는 차별화된다(146). (예를 들어) 현존재는 자신의 궁극목적을 불투명하게밖에 통찰하지 못할 수 있는데, 이는 ‘자아중심적인’ 자기기만만큼이나 세계에 대한 무지[Unkenntnis, ignorance] 때문이기도 하다. (진정한 자기이해를 위해서는 세계에 대한 이해가 요구되는 이다.)

 여기서 ‘시선’은 “거기의 개시성” 즉 “밝혀져있음[Gelichtetheit]”에 상응하는 것이지 육안을 통한 감각적 지각도, “눈앞의-존재자에 대한 순수한 비감성적 인지[Vernehmen]”도 아니다(147). (‘ 비유에서) 핵심은 해당 시선 하에서 존재자가 은폐되지 않은 채로[unverdeckt] 만나진다는 이다.* 전통철학에서는 순수한 직관[das pure Anschauen]이 (눈앞의-존재가 가져온 존재론적 우위에 상응해) 모든 ‘봄’들 가운데서 우위를 점해왔었다. 그러나 직관사유 실존론적 이해의 파생태일 이다. “현상학적 ‘본질 직관’ 역시 실존론적 이해에 의해 근거 지워져 있다.”(147)** 본질에 대한 직관은 진정한 현상학적 의미에서 현상이 될 수 있는 존재 및 존재구조에 대해 명시적인 개념을 확보한 다음에야 이루어질 수 있다.

*철학사에서 시각이 지녀온 특권 “Das leistet freilich jeder »Sinn«[모든 감각기능] innerhalb seines genuinen Entdeckungsbezirkes. Die Tradition der Philosophie ist aber von Anfang an primär am »Sehen« als Zugangsart zu Seiendem und zu Sein orientiert. Um den Zusammenhang mit ihr zu wahren, kann man Sicht und Sehen so weit formalisieren, daß damit ein universaler Terminus gewonnen wird, der jeden Zugang zu Seiendem und zu Sein als Zugang überhaupt charakterisiert.”(147)

**쉽게 말해, 철학적인 사유도 그것이 인간의 것인 한 삶에 대한 특정한 근본적 신념의 산물, 어떻게 것인가에 대한 구상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해 및 기투에 의한 거기의 개시에는 존재 일반에 대한 개시도 포함된다. 현존재는 자신이 되고 싶거나 것인 그런 모습에 대한 구상에 의거해서 자신의 존재, 타인의 존재, 세계내부적 존재자의 존재를 말하자면 해석하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존재는 기투 속에서 이해되어있지, 존재론적으로 개념화되어있지 않다.”(147) 이로써 존재가 언제나 이미 선존재론적으로 이해되어있다는 명제가 뒤늦게나마 증명되었다[aufweisen]. 그러나 이와 같은 존재이해에 대한 해명은 이후 존재시간성[Temporalität]에 대한 논의를 필요로 한다. 일단 뒤에 이어지는 것은 “심정적인 이해와 거기의 완전한 개시성의 일상적 존재방식”에 대한 추가적인 현상학적 탐구이다(148).

“Befindlichkeit und Verstehen charakterisieren als Existenzialien die ursprüngliche Erschlossenheit des In-der-Welt-seins. In der Weise der Gestimmtheit »sieht« das Dasein Möglichkeiten, aus denen her es ist. Im entwerfenden Erschließen solcher Möglichkeiten ist es je schon gestimmt. Der Entwurf des eigensten Sein-könnens ist dem Faktum der Geworfenheit in das Da überantwortet.”(148)

§32 이해와 해석(Auslegung)

 이해를 통한 “가능성에로의 존재[Sein zu Möglichkeiten]”는 그 자체로 현존재의 한 잠재성[Seinkönnen]이다(148). 기투로써 구상된 내용은 저마다 다르게 발전될[ausbilden, ausarbeiten] 수 있다. “이해를 구체화하고 완성하는 을 하이데거는 해석이라고 부르고 있다. 해석을 통해서 이해는 자신이 이해한 것을 [타인의 것이 아닌] 자기 것으로 한다.”(⟪강독⟫, 205)* 물론 이때에도 이해가 해석보다 앞서는 근원적인 사태다. 하이데거는 이어지는 분석이 비본래적이지만 진정한 이해에 대한 것임을 미리 밝힌다.

*같은 용어 ‘해석(Auslegung)’을 후설은 인식작용의 지향적 함축을 현상학적으로 들춰내는 해명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우리는 어떤 도구가 어떤 용도를 가지고 있는지를 언제나 이미 이해한 채로 특정한 도구들을 고려한다. 그렇기 때문에 둘러봄은 언제나 이미 알려진 것을 발견하는 시선이다. “둘러봄이 발견한다는 것은 이미 이해된 »세계«가 해석됨[밖으로-꺼내짐]을 의미한다.”(148) 그 과정에서 손안의-존재자는 그것의 무엇을-위하여[Um-zu]에 따라 명시적으로 이해되고 분간된다[auseinandergelegt]. 이렇게 분간된 손안의-존재자는 이해의 아프리오리한 구조상 “무언가로서의 무언가[Etwas als Etwas]라는 구조를 가진다.”(149) 이는 단순한 명명[Nennen]의 구조가 아니라 해당 도구의 (세계 내에서의) 목적에 대한 이해에 근거한 해석의 구조이다.

 둘러봄이 해석을 수행할 때—“이것을 책상, 문, 차, 다리로 ‘보는’” 등(149)—해석의 결과가 꼭 진술될[aussagen, 명제화될] 필요는 없다. “손안의-존재자에 대한 모든 선술어적인 단적인 도 그 자체로 이미 이해하면서-해석하는[해석된] 이다.”(149) 이로써 하이데거는 순수한 지각은 아직 존재자를 무엇‘으로서’ 보는 해석의 과정을 내포하지 않고, 그에 대한 진술이나 주제화가 비로소 해석을 성립시킨다는 견해에 반대한다. 도구에 대한 지각이란 순수한 눈앞의-존재자가 먼저 경험된 그것이 사후적으로 무엇으로서 파악되는 , 뒤늦게 그에 의미나 가치가 부여되는 작용이 아니다. 이러한 견해*는 “해석의 구체적인 개시기능에 대한 오해”일 뿐이다(150).

*이러한 견해는 후설이 ⟪이념들⟫ 1권에서 펼치는 지각이론에 상응한다. 후설에 따르면 지각이라는 체험은 ①시시각각 변화하는 주관적인 질료[hyletischer Gehalt]의 다양체에 ②혼을 불어넣음으로써[beseelen] 해당 다양체를 하나의 통일적이고 객관적인 노에마로 종합해내는 노에시스적 파악[Auffassung] 또는 의미부여[Sinngebung]로써 이루어진다(cf. Hua III/1, 227). 

 분절하는 해석이 결여된 순수한 포착을 지각의 토대나 근원으로 보는 것은 부적절하다. (존재자를) 단지-눈앞에-두는 응시는 (진정한 의미에서) ‘단적으로[schlicht]’ 이해하는 시선으로부터 파생된 것이자 결여태이기 때문이다. “세계내부적 존재자는 그 자체로 언제나 이미 세계이해 속에서 개시된 용도를 가지고 있다. 이 용도는 해석을 통해 바깥으로 드러난다[herausgelegt].”(150) 이 해석이 주제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없는 것은 물론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무언가를 무언가로서 해석함은 삼중의 구조로 이루어져있다. ①해석적 시선으로서의 둘러봄은 늘 용도전체성에 대한무엇이 어디에 쓰이는지에 대한암묵적[unabgehoben] 이해를 기초[토대, Fundament]로서 미리-가진다. 하이데거는 이 앎을 미리-가짐[Vorhabe, 예지]이라고 부른다. ②해석의 탈은폐[Enthüllung] 기능은 늘 “이해된 것이 어떤 식으로[im Hinblick worauf] 해석되어야 하는지를 확정해주는 관점[Hinsicht]의 인도 하에서 이루어진다.” 하이데거는 이를 미리-[Vorsicht, 선견, 예시]이라고 부른다. 미리-봄은 “미리-가짐에서 취해진 것을 특정한 해석 가능성을 위해 ‘잘라내준다[anschneiden, 절단한다]’.” ③해석은 해석된 존재자에 그것에 걸맞거나 걸맞지 않은, 최종적이거나 잠정적일 뿐인 개념을 부여한다. 하이데거는 이를 미리-붙잡음[Vorgriff, 선개념화, 예파]라고 부른다.

 미리-가짐, 미리-봄, 미리-붙잡음은 모든 해석을 본질적으로 정초한다[fundieren]. “해석은 결코 미리-주어진-것에 대한 무전제적인 포착이 아니다.”(150) 텍스트에 대한 정밀한[exakt] 해석조차 “해석자의 자명한, 논의되지 않은 선견[Vormeinung]”으로, 해석에 앞서 설정된[schon gesetzt] 미리-가짐, 미리-봄, 미리-붙잡음 하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다(150).

 이때 형식적인 아프리오리와는 차별화되는 저 ‘미리’의 성격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저 ‘미리’는 어떤 의미에서 이해의 구조에 해당하는가[eignen]? 이해가 미리-’ 구조[Vor-Struktur]를 가진다면, 그것은 해석의 ‘-로서구조[Als-Struktur]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 이 두 구조가 현존재의 근원적인 존재구성틀인 기투와 맺는 관계는 또 무엇인가? 이 물음들에 답하기에 앞서, 하이데거는 이해의 ‘미리-’와 해석의 ‘-로서’가 이미 하나의 통일적 현상인지 확인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현존재가 세계내부적 존재자를 발견하고 이해하면 그것은 의미[Sinn]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 이해된 것은 의미가 아니라 존재자 또는 존재이다. 의미란 그 속에 무언가에 대한 이해 가능성이[Verständlichkeit] 머무르는[sich halten, 간직되는] 곳이다. 이해하는 개시함 속에서 분절 가능한 그것을 우리는 의미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 세계내부적 존재자가 말하자면 가지는 여러 이해 가능성들 중 하나가 특정 관점 하에서 선택되어—분절되어—특별히 무엇으로서 해석될 무엇이 곧 의미이다.*) “의미는 미리-가짐, 미리-봄 그리고 미리-붙잡음을 통해 구조화된 기투의 목표[Woraufhin]이다. 이 기투로부터 무언가가 무언가로 이해 가능해진다.”(151)

*33절에 제시되는 의미의 정의: “Das in der Auslegung Gegliederte als solches und im Verstehen überhaupt als Gliederbares Vorgezeichnete ist der Sinn.”(153) / “[…] das gekennzeichnete, existenziale Phänomen, darin das formale Gerüst des im Verstehen Erschließbaren und in der Auslegung Artikulierbaren überhaupt sichtbar wird”(156)

 하이데거는 이러한 의미를 “이해에 속하는 개시성의 형식적-실존론적 뼈대[Gerüst]”로 기술하면서*, 존재자에 부착되거나 그 배후에 놓여 있는 속성[특성, Eigenschaft]도, (현존재와 존재자 사이) 중간영역[Zwischenreich]에서 부유하는 것도 아니라 현존재만의 실존주로 본다(151). 하이데거에게 의미는 현존재만이 가질 있는 이다.** “그러므로 오직 현존재만이 의미로 충만하거나 의미를 상실할[sinnvoll oder sinnlos] 수 있다. 이는 다음을 말해준다[besagen]. 그의 존재와 그 존재와 함께 개시된 존재자는 이해 속에서 전유될[zueignen] 수도 있고 몰이해[Unverständnis] 속에서 [이해가] 금지된[versagt] 것으로 남을 수도 있다.”(151)***

*Q. 저기서 ‘형식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A. 모든 이해는 의미 부여의 과정이다. 이해가 어떤 형식에서 주어지느냐에 대한 대답으로 의미라 답하는 것(H씨)

**Q. “Sinn »hat« nur das Dasein, sofern die Erschlossenheit des In-der-Welt-seins durch das in ihr entdeckbare Seiende »erfüllbar« ist.”(151)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향이 아닌) 개시가 ‘충족’된다는 표현이 의미심장하다.

***그렇다면 하이데거에게 의미란 이해의 성공으로부터, 무의미란 이해의 실패로부터 온다.

 이와 같은 “‘의미’의 개념에 대한 존재론적-실존론적 해석”에 따르면 현존재가 아닌 존재자는 의미를-결여한[unsinnig, 비의미적인] 존재자로 개념화된다(152). 여기서 의미를-결여했다는 기술은 가치 절하가 아닌 순전한 존재론적 규정일 뿐이다. “그리고 오직 의미를-결여한-것만이 부조리할[widersinnig, 반의미적일] 수 있다.”(152)*

*Q. 자연재해의 예를 이해하지 못했다. 자연재해란 손안의-존재자여야 할 존재자가 현존재가 그에 부여한 존재에 반해 파괴적인 눈앞의-존재자가 된 사건이란 의미인가?

A. 도구연관에 대한 소박한 이해, 기존의 의미 부여 질서가 깨지는 순간. 전체 연관으로부터 동떨어져서 두드러지는(H씨).

★“Der Sinn von Sein kann nie in Gegensatz gebracht werden zum Seienden oder zum Sein als tragenden »Grund« des Seienden, weil »Grund« nur als Sinn zugänglich wird, und sei er selbst der Abgrund der Sinnlosigkeit.”(152)

 ★문헌학적인 해석이 이미 주목한 바대로, 해석은 해석의 대상에 대한 이해를 사전적으로 요구한다. 물론, 문헌학적 해석과 같은 학적인 인식은 “근거지우는 증명[begründenden Ausweisung]의 엄밀성을 요구한다. 학문적인 입증은 그것을 근거지우는 것이 자신의 과제일 그것을 먼저 전제해서는 안 된다.”(152) 그러나 해석이 언제나 특정한 이해에 입각해서만 이루어진다면, 해석에 기반한 학적인 인식들은 전제된 이해로부터 자신의 결론인 해석을 이끌어내는 순환에 휘말리게 된다. 논리학에서는 순환이 악순환으로 취급되어, “역사적인 해석은 아프리오리하게 엄밀한 인식의 권역으로부터 추방되었다.”(152) 이에 역사학은 엄밀성의 결여를 자신의 탐구 대상의 ‘정신적 의의’로 보충하고자 했으며, “추정컨대 자연과학적 인식처럼 관찰자의 관찰지점[Standort]으로부터 독립적일 역사학”을 희망했다(152).

 그러나 순환을 피하고자 하거나 불가피한 불완전성으로 보는 것은 이해에 대한 오해이다. “결정적인 것은 순환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순환 속으로 올바르게 진입하는 이다[Das Entscheidende ist nicht, aus dem Zirkel heraus-, sondern in ihn nach der rechten Weise hineinzukommen].”(153) 이해의 순환은 단순히 특정한 또는 임의의 인식방식에만 관여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 자체의 실존론적 미리-구조”이기 때문이다(153). 해석의 과제는 “그때그때마다 미리-가짐, 미리-봄, 미리-붙잡음을 우연과 통속적인 개념을 통해 미리 주어지도록 하지 않고, 그것들을 완성해나감[Ausarbeitung] 가운데서 사태 자체로부터 학문적인 주제를 확보하는 것이다.”(153)*

*하이데거는사태 자체마저 무전제적으로 직관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미리-가짐, 미리-, 미리-붙잡음에 입각해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 ➔ Q. 과연 그것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태 자체라고 볼 수 있을까?

★이로써 하이데거는 환원으로써 선입견을 제거한 뒤 직관을 통해 명증을 획득하는 것이 엄밀성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한 후설에 반대한다. 하이데거의 입장에서는 저 ‘선입견의 제거’ 자체가 불가능하므로, 후설의 엄밀성 개념은 애초에 실현 가능한 목표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저 ‘선입견’이야말로 학적 인식을 포함해 모든 해석을 가능케 하는 인식의 존재론적 근거이다. ➔ Q. 에피스테메의 지위가 어떻게 되는가? 포기되는가? 아니면 후설 역시 관점주의를 취하면 하이데거와 견해가 그다지 다르지 않은가?

cf. “Weil Verstehen seinem existenzialen Sinn nach das Seinkönnen des Daseins selbst ist, übersteigen die ontologischen Voraussetzungen historischer Erkenntnis grundsätzlich die Idee der Strenge der exaktesten Wissenschaften. Mathematik ist nicht strenger als Historie, sondern nur enger hinsichtlich des Umkreises der für sie relevanten existenzialen Fundamente.”(153)

★자연성과 초월(론)성 사이의 구분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부터 생각해보자.

“Seiendes, dem es als In-der-Welt-sein um sein Sein selbst geht, hat eine ontologische Zirkelstruktur.”(153)*

★*Q. 하이데거는 이해, 해석 등 기존에는 인식론의 탐구 대상이었던 현상을 존재론의 탐구 대상으로 재조명하고 있다. 그에게 인식은 존재의 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반면 후설에게는 존재가 인식의 성취[Leistung], 노에시스적 정립[Setzung]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누구의 직관에 손을 들어줘야 하는가?

§33 해석의 파생적(abkünftig, derivative) 양태로서의 진술

 진술, 판단, 명제 역시 해석의 파생태로서 이해를 근거로 가진다면 의미를 가질 것이다. 이때 판단의 의미는 판단의 자리에[an], 그리고 판단함에 나란히[neben] 일어나는[vorkommen] 것이 아니다. 진술에 대한 이어질 분석은 첫째, -로서의 구조가 변양될 수 있는 방식을 보여줌으로써 해석과 이해에 대한 해명을 돕고 둘째, 근본존재론[기초존재론] 자체에 기여하는데, 고대 존재론의 경우 (명제에 해당하는) “로고스가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의 접근의 그리고 이러한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규정의 유일한 실마리로서 기능했기 때문이다. 종국에[Schließlich] 진술은 오래 전부터 진리의 일차적이고 본래적인 ‘장소’로 간주되었다[gelten als].”(154) 진술에 대한 분석을 통해 건드리게 될 진리의 문제와 존재의 문제는 매우 긴밀하게 결합되어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진술은 세 가지 의미[Bedeutung]를 가진다. 진술은 일차적으로 ①(존재자 또는 사태 자체를) 나타내보임[드러냄, Aufzeigung]이다. 로고스의 근원적인 의미[Sinn]가 아포판시스였음을, 즉 존재자를 그 자신으로부터 보게 하는 것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망치가 너무 무겁다’는 명제에서는 손안의-존재자 자체가 있는 그대로 발견되지, 존재자의 한갓된 표상이 또는 진술하는 자의 한갓된 심리상태로서의 표상함이 나타나지 않는다.

 진술은 또한 ②술어화[Prädikation]이다. 술어화에서 주어는 술어에 의해 규정된다[bestimmen]. 위의 예시명제에서 진술된 은 이제 (①의 경우에서와 달리) 망치가 너무 무거운 사태가 아니라 ‘망치 자체’이며, 한편 진술하는 또는 규정하는 것은 ‘너무 무겁다’이다. 그러나 진술의 ②술어화로서의 의미는 ①나타내보임으로서의 의미에 기초를 두고 있다. 왜냐하면 “주어와 술어는 나타내보임의 내부에서 자라나기 때문이다.”(155) 나타내보임의 양태로서 규정함은 현존재의 시선을 특정한 (규정성 속에 있는) 주어 자리의 존재자(위의 예에서는 망치)에로 제한한다. 진술은 이러한 주어정립또는주체정립을 통해 주어 자리의 존재자—드러난 것[das Offenbare, the manifest, 명명백백한 것]—을 특정한 규정성 속에서 보여주기 위해 손안의-존재자에서 눈앞의-존재자로 감광시킨다[abblenden, entblenden, dim].

 마지막으로 진술은 ③전달[Mitteilung, 함께-나눔] 또는 터놓고-말함[Heraussage, 고백]이다. 전달로서의 진술은 “나타내보여진 것을[존재자를] 규정함의 방식으로 [타인으로 하여금] 함께-보게-[Mitsehenlassen]”이다(155). 전달에서 “‘나뉘어지는’ 것은 나타내보여진 것을 향한 공통적으로 보는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전달로서의 진술은 (공적으로) 표명되었다는 성격[Ausgesprochenheit]을 가진다(155, 강조는 하이데거). 이때 전달은 (글의 경우에서처럼) 당장 옆에 있는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전달의 과정에서 한때 있는 그대로 나타내보여진 것이 다시금 은폐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하이데거는 타당성[Geltung, validity]의 현상을 다루는 로체의 판단이론을 비판적으로 조망한다. 로체 이후로 타당성의 현상은 그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 없는 ‘근원현상’으로 이해되었지만, 이는 필요한 존재론이 명료하게 정립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로체의 판단이론에서 우선 ‘타당성’은 판단의 내용물이 준수하는 현실성의 ‘형식’으로, 심리적인 판단작용에 반해 불변하는 것으로—곧 ①이념적인 것의 존재방식으로—간주된다. 타당성은 동시에 ‘객체’에 대한 판단의 ②객관적 유효성을, 이성적으로[vernünftig] 판단하는 모든 이들에게 무시간적으로[zeitlos]’ 유효함을 뜻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타당성은 객체의 ‘참된[wahr] 의미’로부터 오는 일종의 ③구속성[Verbindlichkeit, bindingness], 보편적 유효성[Allgemeingültigkeit]을 뜻한다. 그러나 타당성에 대한 이러한 세 정의는 모두 존재론적으로 불투명하다. 의미[Sinn] 개념은 판단내용의 말뜻[Bedeutung] 아니라 실존론적 현상으로서 해명되어야 한다.

 요컨대 “진술이란 전달하면서 규정하는 나타내보임[Aussage ist mitteilend bestimmende Aufzeigung]이다.”(156) 이렇게 정의된 진술은 어떤 의미에서 해석의 한 양태인가? 달리 말해, 그것은 해석의 본질구조를 어떤 방식으로 담지하고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진술이 언제나 세계-내-존재를 기반으로, 이미 발견된이해된존재자들을 근거 삼아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태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진술 또한 미리-가짐, 미리-, 미리-붙잡음이라는 해석의 실존론적 기초들로 구조화되어있다.

 첫째, 현존재가 진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가 규정함의 방식으로 나타내보일 존재자가 앞서 그에게 개시되어있어야, 그것을 그가 미리-가져야 한다. 둘째, 진술 대상이 되는 존재자 자체에 비명시적으로 내포되어있는 술어[Prädikat in seiner unausdrücklichen Beschlossenheit im Seienden selbst]가 말하자면 내포의 속박으로부터 풀어져야[auflockern, loosen] 하는데, 이를 위해 규정의 (해방적인) 수행을 방향잡아주는 미리-봄이 요구된다. 셋째, 진술의 분절 기능은 특정한 개념성(의 기반) 위에서 수행되기에 그 개념에 대한 미리-붙잡음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망치가 무겁다는 명제를 진술하려면 무거움의 속성[Eigenschaft]에 대한 개념화가 선행되어있어야 한다. 단, “언어가 언제나 이미 완성된[ausgebildet] 개념성을 자신 속에 숨기고 있기 때문에, 진술 속에 언제나 또한 함께-놓여있는 미리-붙잡음은 대개 두드러지지 않는 채로 남는다.”(157)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론(De interpretatione)⟫ 역시 현대 논리학과 달리 명제(로고스, 아포판시스)를 규약된 현실을 근거로 해서 이해한다. 하이데거의 고대철학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지점.

 그러나 진술은 미리-가짐, 미리-봄, 미리-붙잡음이라는 해석의 실존론적 기초들을 변양된[modifiziert] 방식으로 가지기 때문에 해석의 파생된[abkünftig] 양태에 해당한다. ‘망치가 무겁다’는 진술은—논리학에서는 이런 종류의 판단을 판단의 가장 단순한 정상사례[Normalfall]로 간주하지만, 사실 이 판단은 매우 이론적인, 따라서 정상에서 먼 성격의 것이다—그 진술이 겨냥하고 있는 “‘망치-사물이 무거움의 특성을 가진다’”는 사태를 자신의 의미로서 전제한다(157). 그러나 해당 사태는 고려하는 둘러봄에서 결코 발견되지 않는다. 고려하는 둘러봄에서 현존재는 차라리 이를테면 ‘아, 이거 다른 망치보다 너무 무거운데?’ 같은 (비언어적일 수 있는) 해석을 수행하면서, 이론적인 진술을 표명하기보다 새 망치를 구하러 갈 것이다. 

“Aus dem Fehlen der Worte darf nicht auf das Fehlen der Auslegung geschlossen werden. Andererseits ist die umsichtig ausgesprochene Auslegung nicht notwendig schon eine Aussage im definierten Sinne.”(157)

 진술의 과정에서 현존재가 미리-가지는 “손안에-있는 무엇을-가지고[Womit]”는 “나타내보이는 진술의 ‘무엇에-대하여’”가 되고, “미리-봄은 손안에-있는 것에서[an] 눈앞에-있는 것을 겨냥한다[zielen, aim].”(158) 이처럼 진술의 과정에서 둘러봄이 쳐다봄으로 변화함에 따라 손안의-존재자의 도구성은 은폐되고, 눈앞에-있는 대상이 이러저러하게 눈앞에-있다는 진술이 대신 부상하며, 이로써 비로소 속성에 대한 담론이 가능해진다. 해석의 ‘-로서’는 주변세계성을 구성하는 유의의성의 소급지시관계들이나 용도전체성으로부터 잘려나오고[abschneiden], “단지 눈앞에-있는 것의 일형적 평면으로 되밀린다[in die gleichmäßige Ebene des nur Vorhandenen zurückgedrängt].”(158) 요컨대 진술은 손안의-존재자를 눈앞의-존재자로 평면화하며[nivellieren]*, 존재론적으로 보았을 때 둘러봄에서의 이해하는 해석으로부터—헤르메네이아로부터유래한 파생적 해석형태이다. 헤르메네이아와 이론적 진술 사이에는 상황 보고나 사물 묘사,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기[erzählen] 등의 다양한 중간 단계들이 있다. 이것들이 모두 존재론적으로 헤르메네이아로부터 유래함은 물론이다.

*Q. 평면과 입체의 대비는 어떤 의미에서 눈앞의-존재와 손안의-존재 사이의 대비에 상응하는가?

“Das »Als« […] sinkt herab zur Struktur des bestimmenden Nur-sehen-lassens von Vorhandenem. Diese Nivellierung des ursprünglichen »Als« der umsichtigen Auslegung zum Als der Vorhandenheitsbestimmung ist der Vorzug der Aussage. Nur so gewinnt sie die Möglichkeit puren hinsehenden Aufweisens.”(158)

 철학적인 고찰의 시선에서는 로고스 역시 눈앞의-존재자로, 여러 단어들의 함께-눈앞에-있음[ein Zusammenvorhandensein mehrerer Wörter]의 구조를 가진다. 이렇게 함께-눈앞에-있는 단어들의 통일성은 플라톤이 알아차린 것처럼 로고스가 언제나 무언가에 대한 로고스(로고스 티노스)라는 사실로부터 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보다 급진적으로 그것이 (주어와 술어를 종합하는) 긍정판단이든 (주어와 술어를 분리하는) 부정판단이든, 참이든 거짓이든 등근원적으로 “모든 로고스가 신테시스인 동시에 디아이레시스”라고 천명한다(159).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로고스의 구조 내부에 있는 어떤 현상이” 로고스의 나타내보임을 “함께-취함 그리고 따로-취함[Zusammen- und Auseinandernehmen]”으로 특징 짓게 해주느냐는 분석적 질문에 이르지 못했다(159). 이 질문에 대한 하이데거의 대답은 “‘①무언가로서의 ②무언가’라는 현상”이다(159). ②무언가를 ①무언가로 (술어적) 규정, 해석, 분절해내는 과정에서 ①무언가와 ②무언가는 종합되는 동시에 분리되기 때문이다. 해석학적 ‘-로서’ 구조에 대한 현상학이 없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성과는 피상적인 ‘판단이론’에 불과한 것으로 격하된다.

 한편 묶어줌과 떨어뜨림[Verbinden und Trennen]은 (한갓된) ‘관계’로서 형식화될 수도 있다. 그로써 판단은 (관계에 입각한) 질서짓기[Zuordnung, coordination]이자 특정한 계산[Rechnen]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화는 판단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을 방해한다. 다른 한편 로고스와 판단 개념에 대한 위와 같은 재조명이 전체 존재론적인 문제설정에 미치는 영향은 계사[Copula]의 현상에서 드러난다. 계사라는 ‘끈[Band, bond]’에서는 종합의 구조 및 그것의 해석학적 기능이 이미 전제되어있다. 그러나 판단에 대한 한갓되게 형식적인 관점을 거부하면 사실 계사는 끈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밝혀진다. 하이데거는 자신이 3부에서 이 문제로 되돌아올 것임을 암시한다.

 이로써 진술이 보다 근원적으로 해석으로부터 파생되었다는 것, 로고스의논리학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이 드러났다. 고대의 존재론은 로고스를 눈앞의-존재자로 경험하면서[erfahren] 다른 존재자들 역시 그와 무차별한 존재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잘못 단언했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 존재 일반이 눈앞의-존재와 동일시된 것이다.

§34 거기-있음과 (Rede). 언어(Die Sprache)

 진술의 세 번째 의미인 전달의 사태가 해명됨과 더불어 말함[Sagen]과 언표함[Sprechen]의 개념, 곧 언어[Sprache, language]의 주제가 함께 소개되었다. 이때, “언어의 실존론적-존재론적 기초[Fundament]는 [Rede, discourse]이다.”(160) 하이데거에 따르면 언어는 말이 밖으로 표현된 것[Hinausgesprochenheit]이다.* “말은 심정성 및 이해와 더불어 실존론적으로 등근원적[인 실존주]이다. 이해 가능성[Verständlichkeit] 또한 전유하는 해석 이전에 언제나 이미 분절되어있다[gegliedert, 마디지어져있다]. 말이란 이해 가능성의 명료화[Artikulation]이다. 그러므로 말은 이미 해석과 진술의 근거에 놓여있다.”(161) 다시 말해, 세계 내에서 발생하는 이런저런 사태는 현존재에게 해석을 통해 비로소 분절되고 명료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언어적으로 분절되고 명료해진 채로 이해된다.

*Q. 언어와 말 사이의 구분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언어와 차별화되는 것으로서의 말은 정확히 무엇인가?

A. 이해 가능성을 가지는 단어 체계(말) vs 말이 언표된 것(언어)(H씨) / 불역본에서는 parler(말, speak) vs parole(말해진 것, what is spoken)(R씨)

A2. 데리다의 음성중심주의 비판을 염두에 두면 말은 음성언어가 특별히 고려된 것 같다(R씨).

Q. 내가 혼자 머릿속에서 말하는 것은 언표에 해당하는가?

A. 언표된 것은 전달 가능해야 하는데, 혼자 말하는 것은 그렇지 않으므로 안 해당할 것 같다(H씨).

“Die befindliche Verständlichkeit des In-der-Welt-seins spricht sich als Rede aus. Das Bedeutungsganze der Verständlichkeit kommt zu Wort.”(161)

 나아가 “해석에서, 그러므로 더 근원적으로는 이미 말에서 명료화-가능한 을 우리는 의미라고 불렀다. 말하는 명료화에서 분절된 것 그 자체를 우리는 말뜻전체성[Bedeutungsganze]이라고 부른다. […] 말뜻이란 […] 언제나 의미를 담지하고 있다.”(161) 그리고 “말뜻으로부터 단어들이 자라난다.”(161) 한편 현존재의 실존을 구성하는 말은 세계적인 존재의 방식을 가지며, 그것이 표현된 언어 역시 손안의-존재자로 발견된다. 물론 언어는 ‘부수어져’[zerschlagen] 눈앞의-존재자로서의 한갓된 단어사물[Wortding]로 보아질 수도 있다.

 말함이 세계-내-존재의 개시성을 구성하는 한, 그것은 첫째, 여러 현존재가 함께-있는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둘째, 구조상 언제나 (세계 내에 있는) 무언가에 대한 말함이다. 그렇다고 해서 말함이 진술에서 주제에 해당하는 것과 같은 것을 명시적으로 가질 필요는 없다. 말의 주제가 아무리 불분명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세계의 무언가에 대한 말인 것이다. 

 이로써 전달[communication]은 이제 존재론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데, “전달 속에서 이해하는 서로-함께-있음[Miteinandersein, being-with-one-another]의 명료화가 구성된다. 이 명료화는 함께-처해있음[함께-느낌, 공동심정성] 함께-있음의 이해의나눔[Teilung, sharing]’을 수행한다.”(162) 이때 전달은 주체의 내면에서 특정한 체험이 타인의 내면에로 운송되는 과정이 아니라, 함께-처해있음 및 함께-이해함에 의해 이미 개시되어있는, 그러나 처음에는 개념화되어있지도, 전유되어있지 않은 함께-있음이란 존재방식을 말로써 공적으로 명시하는 과정이다.

 모든 말함은 스스로-표현함[Sichaussprechen, expressing itself]의 성격을 가진다. 예를 들어 현존재는 말로써 자신을 표현하는데, 이는 원래는 내부에 갇혀있던[abgekapselt] 현존재가 말로써 비로소 바깥으로 나가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세계-내-존재로서 이해하면서 이미바깥에존재하기 때문이다.”(162) 말에서 결국 표현되는 것은 바깥에-있음[Draußensein]으로서의 현존재의 특정한 심정성, 곧 기분이다. 언어적으로 기분은 말의 억양이나 속도 등에서 드러난다. 실존을 개시해주는 것으로서의 기분의 표현은 시작[Dichtung, poetry]의 목적이 될 수도 있다.

 요컨대 “세계-내-존재의 심정적인 이해 가능성에 대한 말뜻에-걸맞는[bedeutungsmäßig] 분절[Gliederung, structuring]”인 말의 구성적 계기로는 말의 주제[das Worüber, das Beredete(what is discussed)], 말해진 자체, 전달과 알림[Bekundung]이 있다(162). 이 계기들은 언어에 대한 경험적인 탐구에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언어라는 것을 애초에 존재론적으로 가능케 하는 현존재의 실존론적 성격들로서 알려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계기들 중 하나 혹은 둘이 사실적으로 발생하지 않는 말의 사례에서조차 말의 일반적인 구조는 준수된다. 또한 이 계기들 중 하나 혹은 둘에 집중하여 말의 본질을 포착하고자 해온 기존의 시도들—말의 상징적 형식이나 진술의 전달, 체험의 표현, 삶의 언어적인 형태화 등등에 대한 탐구—은 말에 대한 학으로서 충분할 수 없다. 말의 본질은 말의 모든 구성적인 계기들이 종합적으로 그리고 현존재의 분석학에 근거해 탐구될 때에만 확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들음과 침묵함[Hören und Schweigen]의 가능성은 말의 구성적 기능 및 구조를 해명하는 데 특히 탁월하다. 우선 “들음은 말함을 위해 구성적이다. 그리고 언어적인 발화[Verlautbarung]가 말 속에 근거 지워져 있듯이, 청각적인 인지 역시 들음 속에 근거 지워져 있다. 무언가에 대해 들음은 타인에 대한 공동존재로서의 현존재의 실존론적 열려있음[Offensein]이다.”(163) 예를 들어 현존재가 그를 통해 일차적이고 본래적으로 공동세계에 열려있는 존재방식은 자신과 타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런데 “현존재가 듣는 것은 그가 이해하기 때문이다.”(163) 현존재가 서로의 목소리를 듣는 사태는 순수한 감각적인 지각의 범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따라감, 함께-감, 반발함 등의 구체적인 가능성들로 실현되어 공동존재를 완성해나간다[ausbilden].

 이러한 일차적인 들음의 능력[Hörenkönnen] 덕분에 이해하는 들음의 한 방식으로서 귀기울임[Horchen, hearkening, 경청] 또한 가능하다. 귀기울임은 심리학자들의 생각과 달리 음[Ton]에 대한 감각 및 소리의 인지보다도 앞선다. 예를 들어 우리는 우선 오토바이의 그르릉거림을 듣지, (무세계적인) 소리의 복합체[Lautkomplex]를 먼저 들은 뒤 사후적으로 그것에 세계내부적 의의를 부여하지 않는다. ‘순수한 소음’을 듣기 위해서는 오히려 인위적이고 복잡한 태도를 새로이 취해야만 한다. 현존재는 언제나 이미 이해된 것으로서의 세계내부적 존재자들 곁에 우선 머무르는 존재자이지, 감각을 통해 비로소 ‘세계’에 도약하는 내면의 주인이 아닌 것이다.

 세계내부적 존재자의 소음이 아니라 다른 현존재의 말을 들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외국어를 들을 때조차 현존재는 “소리-자료들의 다양체[eine Mannigfaltigkeit von Tondaten]가 아니라 이해 불가능한[unverständlich] 단어들을 먼저* 듣는다.”(164) 또 타인의 딕션 같은 것에 특별히 주의할 수도 있지만, 이 역시 말의 주제에 대한 사전적인 공동의 이해를 기준으로 이루어지는 일이지 순전한 감각자료의 수용이 아니다. 이로써 하이데거는 현존재 존재론에 입각해 후설의 감각이론을 직접적으로 비판한다.

*이남인(2004)의 후설 해석은 이 ‘먼저’의 의미를 둘로 구분함으로써 하이데거의 비판에 응수할 수 있다. 이남인(2004)에 따르면 선행성에는 타당성의 관점에서의 선행성과 발생의 관점에서의 선행성이 있다. 전자의 관점을 취할 경우, ‘소리-자료들의 다양체’는 여전히 구체적인 오토바이의 그르렁거림보다 앞선다. ‘저 소리는 오토바이의 그르렁거림이다’라는 해석의 타당성이 의문시될 경우 되돌아가야 할 근거 지점이 바로 저 다양체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하이데거의 경우 타당성의 정초에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그는 예컨대 29절 등에서 이미 명증성과 존재론적 의미를 구분하고, 후자의 목표에 집중한다. 진리의 문제는 후설에게서와 달리 의심 불가능성으로서의 필증성, 진리의 정도와 관련된 문제의식이 아니라 개시성, 진리의 현현 방식과 관련된 문제의식을 통해 제기된다.

“Das Nur-herum-hören ist eine Privation des hörenden Verstehens. Reden und Hören gründen im Verstehen. Dieses entsteht weder durch vieles Reden noch durch geschäftiges Herumhören. Nur wer schon versteht, kann zuhören.”(164)

 다음으로 하이데거는 침묵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침묵한다고 해서 이해가 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이해가 확장되는 것도 아니다. 지나치게 많은 말은 도리어 진정한 명석성[Klarheit]을 저해한다. 침묵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사태와도 구분되어야 하는데, 침묵 역시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서 수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진정한 말함 속에서만 본래적인 침묵이 가능하다.”(164)*

*이런 언명들은 학술적 주장으로 받아들이기에 부담스러운 면이 있다.

A. 잡담, 가십 등과 대비하면 본래적인 것 같다(H씨).

 따라서 그리스인들이 인간을 로고스를 가진 동물로 정의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초온 로곤 에콘’이 ‘아니말 라치오날레’로 번역되면서 해당 정의의 현상학적 토대, 즉 인간이 말을 하는 존재자로 스스로를 내보인다는 근본적인 사태는 은폐되었다. 인간이 말하는 존재자로 스스로를 내보인다는 사태는 그가 단순히 목소리를 가지고 발화할 수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로서 세계를 (이해 곧) 발견해나간다는 진실을 가리킨다.

 철학사적으로 로고스가 진술 또는 명제로 주제화됨에 따라, 전통철학은 말의 현상을 명제로서의 로고스를 실마리 삼아 분석해왔다. 예를 들어 “문법학은 그것의 기초를 이러한 로고스의 ‘논리학’에서 찾았다.”(165) 이에 반해 하이데거는 언어에 대한 학문이 존재론적으로 보다 근원적인 기초 위에 다시 수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법학은 실존주로서의 말에 대한 선행적인 이해에 근거하여 논리학으로부터 해방돼야 한다. 의미론[Bedeutungslehre, a doctrine of significance] 역시 현존재의 존재론에 입각해 이해 가능한 것 일반의 말뜻에-걸맞은 분절의 근본형식들을 탐구해야 한다. 경험적인 관점에서 생소하고 다양한 언어들을 최대한 포괄적으로 비교한다고 해서 의미에 대한 이론이 자동적으로[von selbst, automatically] 생성되는 것이 아니다. 철학적 탐구는 궁극적으로 언어의 존재에 대해 물음으로써, 예를 들어 언어가 ‘죽거나’ 흥하고 망하는 가능성의 의미를 해명해낼 수 있어야 한다.

B. 거기의 일상적 존재와 현존재의 퇴락(Verfallen)

 세인의 세계-내-존재의 개시성의 실존론적 성격은 무엇인가? 세인에게 특별하게 부합하는 심정성, 이해(될-수-있음), 말과 해석은 무엇인가? 현존재가 내던져진 세계-내-존재로서 우선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세인의 공공성[대중성]—세인의 특수한 개시 방식—속으로 던져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의 중요성이 따라 나온다. 세인이 개시하는 존재가능성은 “일상성의 본질적인 존재경향성”을, 나아가 피투성의 현상을 구체화해줄 “현존재의 근원적인 존재방식”을 드러내 보여줄 것이다(167). 이어질 해석은 오직 존재론을 수행할 의도에만 부합하며, 일상적 현존재에 대한 도덕적이거나 문화철학적 비평과는 무관하다.

§35 가십(Das Gerede, 빈말, 수다)

 가십이란 일상적 현존재의 이해 및 해석의 방식을 일컫는다. 말은 언제나 이미 이해와 해석 가능성을 담지하는 채, 언어로서 바깥으로-말해진[ausgesprochen, 표현된] 무엇이다. “바깥으로-말해짐으로서의 언어는 자신 안에 현존재이해의 해석됨[Ausgelegtheit, 완료된 해석]을 숨기고 있다.”(167)* 풀어 말해, 특정한 언어에는 세계, 타인과의 함께-거기-있음, 각자의 내-존재 모두에 대한—전수되어온 존재론 및 앞으로 가능할 (존재)해석 및 개념적 명료화에 대한 것도 포함해—특정한 이해 해석이 상응한다. 그러므로 일상적 현존재의 언어는 “평균적인 이해와 그에 속하는 심정성의 가능성들을 규제하고[regeln] 분배한다[verteilen].”(167-168)

*언어는 눈앞에-있는 것이 아닌, 실존에 걸맞은 것이다. “Diese Ausgelegtheit ist so wenig wie die Sprache nur noch vorhanden, sondern ihr Sein ist selbst daseinsmäßiges.”(167)

 “스스로-표현하는 언어는 전달이다. 전달의 존재경향성은 듣는 이로 하여금 말의 말해진 것을 향한 개시된 존재에 참여하도록 데려오기를 목표한다.”(168) 그러나 평균적인 이해를 표현하는 말은 말해지는 주제에 대한 근원적인 이해를 담지하지 못한다. 가십 가운데서 사람들은 말해지는 존재자에 대해, 그것과 자신과의 존재관계에 대해 진정으로 이해하기보다, 그저 무엇이 말해지는지를 거칠고 표면적으로 듣는 데 그친다. 일상적 현존재에게 중요한 것은 말이 존재자에 부합하는지[zueignen, 말이 존재자를 잘 전유하는지]가 아니라, 그 말이 그저 사람들 사이에서 (많이) 말해지고 있는지일 뿐이다. 이에 따라 같은 것에 대한 추가적이고 사후적인 가십[Weiter- und Nachreden]이 생산되고, 그 결과 가십은 권위를 갖추게 된다. 이는 가십이 음성언어로 이루어져있든, 문자언어로 이루어져있든지 간에 마찬가지이다. 텍스트를 해석할 때조차 일상적 현존재는 근원적인 창조와 수확을 단순히 따라-말해진[nachgeredet] 것과 구분하지 못한다. 애초에 이러한 구분을 원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을 것인데, 일상적 현존재는 자신이 언제나 이미 모든 것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빈말만으로 충분하다는 오만. cf. ★공허한 지향 vs 충족된 지향

 요컨대 “가십이란 모든 것을 사태와의 사전적인 부합[Zeeignung, appropriation] 없이 이해하는 가능성이다.”(169) 그러나 가십은 토대를 가지지 않는다는[bodenlos] 바로 그 이유로 오히려 대중의 인기를 사는데, 말이 사태와 부합하는 데 실패할 위험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가십은 일상적 현존재를 “진정한 이해의 과제로부터 해방시켜줄[entbinden] 뿐만 아니라, 그 어느 것에도 닫혀있지 않은 무차별한 이해 가능성을 형성한다.”(169) 그리하여 가십은 기만의 의도 없이, 의식적인 표명[Ausgeben] 없이도 존재자의 진정한 존재를 은폐한다.

 발견의 기능을 상실한 말은 존재를 진정으로 개방하기보다 추정적인[vermeintlich] 해석에로 가둔다. 가십에 특유한 추정성은 새로운 질문과 토의를 억압하거나 지연한다.* 일상적 현존재는 이 추정적인 해석(의 지평) 속으로 자라나기[hineinwachsen] 때문에, 그로부터 벗어나 (순수한) ‘세계 자체 없다. 대중에 의해 일찍이 완료된 해석은 현존재의 기분까지도 지배하면서 그가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지를 미리 규정한다.

*가십이 이해의 구체적인 내용물을 무차별한 것으로 만드는 동시에 획일적으로 제한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Das Gerede ist sonach von Hause aus, gemäß der ihm eigenen Unterlassung[생략] des Rückgangs auf den Boden des Beredeten, ein Verschließen. […] In ihr[der alltäglichen Ausgelegtheit] und aus ihr und gegen sie vollzieht sich alles echte Verstehen, Auslegen und Mitteilen, Wiederentdecken und neu Zueignen. Es ist nicht so, daß je ein Dasein unberührt und unverführt[undeceived] durch diese Ausgelegtheit vor das freie Land einer »Welt« an sich gestellt würde, um nur zu schauen, was ihm begegnet.”(169)

 그러므로 가십이란 단지 부유하는[schweben], “뿌리뽑힌[entwurzelt] 현존재이해의 존재방식이다.”(170) 가십에 사로잡힌 현존재는 “세계와의, 함께-거기-있음과의, -존재 자체와의 일차적이고 근원적으로-진정한 존재관계로부터 절단되어 있다.”(170)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내-존재의 존재방식을 가진 존재자만이 이러한 뿌리의 상실을 자신의 ‘현실’로서 경험할 수 있다. 일상적 현존재는 완료된 해석이 자명하고 확실하다는 생각 덕분에 가십 가운데 토대 없이 부유하는 자신의 현실이 얼마나 섬뜩한[unheimlich] 것인지를 모르고 산다. (세론에 기실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외면하고, 세상의 격언들을 무반성적으로 준수함으로써 진실과 마주하는 일의 공포를 피할 수 있는 것이다.)

§36 호기심(Die Neugier)

 현존재는 개시하면서 밝히고, 자신이 밝힌 빛을 통해 본다. 봄이란 (본래) 존재자에 대한 올바른[genuin] 전유로서, 현존재는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에 입각해 자신의 존재가능성을, 어떻게 처신할[verhalten] 것인지를 결정한다. 일상적 현존재의 경우 현존재의 , 나아가 현존재가 그에 기대 세계를 수용하고 인지하는 경향성호기심으로 특징지어지며, 호기심의 작용 범위는 인식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따라 인간은 본질적으로 에 마음을 쓴다[sorgen]고 주장한다. 학문적인 탐구 또한 실존론적인 염려로부터 발생한다. 왜냐하면 파르메니데스가 암시했듯이, “존재란 순수한 직관하는 인지에서 스스로를 보여주는[zeigen] 것이며, 오직 이러한 봄만이 존재를 발견”하기 때문이다(171). “근원적이고 진정한 진리는 순수한 직관 속에 놓여 있다”는 이러한 생각*은 헤겔의 변증법**을 포함해 서양철학의 기초로 자리잡아왔다(171).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인식 일반의 기관을 눈으로 설정하는데, 예를 들어 우리는 후각적 인식에 있어서도 ‘어떤 냄새가 나는지 보라’는 식으로 말한다. 이에 따라 (모든 인간적 인식, 곧) 체험은 눈의 욕망[Augenlust]이, 즉 호기심이 실현된 것이다. 이에 하이데거는 “단지-수용하려는[Nur-Vernehmen] 경향성”, 호기심을 통해 현존재의 어떤 실존론적 구성틀이 드러나는지 묻는다(172).

*봄의 우위를 이야기하는 차원이기에 이 생각 자체를 비판하는 것 같지는 않다.

*헤겔에게서는 이를테면 ‘내가 있다’가 개념화 이전의 심지어는 비감각적일 수도 있는 순수 직관에 해당한다(H씨). 

 일상적 현존재는 둘러봄을 통해 처신의 범위와 수단, 기회 등을 획득한다. 현존재가 일[Werk]을 중단하거나 완료함으로써 휴식에 돌입하게 되면 “자유로워진 둘러봄[의 시선]”에 염려[Sorge]가 들어선다(172). 삶의 절박한 필요들로부터 자유로워진 시선은 그 어떤 존재자도 고려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둘러봄으로서 무언가와의 거리를 제거하고자 하기 때문에 “멀고 낯선 세계에의 손안의-존재자”로 향하면서 »세계«를 단지 그 외양에서만 취한다(172). 이처럼 현존재가 자신에게 낯선 존재자들을 표면적으로 훑는 시선이 바로 호기심이다.

 호기심은 고려되는 존재자를 이해하려고, 즉 그것에로의 존재에 진입하려고[in ein Sein zu ihm zu kommen] 아니라 단지 보기 위해서만 본다. 쉽게 말해, 호기심에 사로잡힌 현존재는 진리가 아닌 휴가[Sichüberlassen an die Welt, 세계에로 스스로를 내맡김]에 관심이 있다. 그는 이해되지 않은 존재자에 대한 고찰 및 관조로부터 오는 경이가 아니라 ①새로운 것과 변화에 대한 앎에서 일 수 있는 없는 흥분을 꾀한다. 이로써 호기심은 ②“산만함[Zerstreuung, distraction]의 지속적인 가능성”을 제공한다(172). 궁극적으로 호기심은 ③정처-없음[Aufenthaltslosigkeit]이라는 본질을 가진다. “호기심은 도처에 있으며 어디에도 없다.”(173) ①, ②, ③은 호기심 특유의 싸돌아다님[Unverweilen]이 성립하는 방식들을 특징짓는다.

 호기심은 가십에 의해 인도되고 또 다른 가십을 낳는다. 일상적 현존재는 분주한 시선과 수다의 와중에 자신이 ‘생생한[lebendig]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착각한다[vermeinen, 추정한다, 잘못 생각한다]. 이 착각이 곧 일상적 현존재의 개시성의 세 번째 특징적 현상인 애매성에 대한 논의를 이끈다.

§37 애매성(Zweideutigkeit, ambiguity)

 애매성이란 우선 세계에 대해서든, 서로-함께-있음에 대해서든, 현존재 자신에 대해서든 “무엇이 진정한 이해에서 개시되어있고 무엇이 아닌지” 결정할 수 없는 성격을 가리킨다(173). 세인에게는 그의 번지르르한 말과 빈곤한 실천이 서로 따로 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진정한 이해, 곧 묵묵한 실천이 겉으로는 진정하지 않은 것처럼, 시류에 뒤처진 것처럼 드러날 수 있고, 진정하지 않은 이해, 행동력이 결여된 백일몽이 겉으로는 진정한 것처럼, 독창적인 것처럼 드러날 수 있다.

 애매성은 그때그때마다의 (도구의) 사용이나 향유에서뿐만 아니라, 기투 및 그에 따른 존재가능성들의 미리-주어짐[Vorgabe] 이미 확실하게 깃들어있다[festgesetzt]. 모두가 저마다 무엇이 궤도-위에-있음[유행-중에-있음, Auf-der-Spur-sein, being-on-the-track]에 해당하는지 아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 그 증거이다. 그러나 궤도의 구성성분은 단지 풍문[Hörensagen]에서 온 것일 뿐이다. 실제로 누군가 풍문을 실천에 옮기자마자 현존재의 관심은 실천된 것으로부터 멀어진다. 그의 관심은 호기심과 가십의 한가운데서만, “구속력-없는 그저-생각해봄[das unverbindliche Nur-mit-ahnen]의 가능성으로 주어진 한에서만” 존속하기 때문이다(174). 호기심과 가십은 자신이 추측해보았던 것이 실현되었을 때 도리어 분노한다[ungehalten, indignant]. 이리저리 추측해볼 기회를 빼앗겼기 때문인데, 동시에 그는 타인에 의해 실현된 것의 가치에 대해, 자신도 같은 일을 일찍이 생각해보았으므로 어차피 (쉽게) 실천했을 수 있었으리라고 깎아내린다. 남들이 그저 생각해보기만 한 것에 대해 묵묵히 실천하거나 실패하는 은 대중의 시선에서 볼 때 ‘느린’ 삶이다. 호기심과 가십은 애매성에 사로잡힌 채 그러한 과묵한 시도들을 뒤처진[veraltet, outdated] , 뒤따라오는[nachträglich, subsequent] , 사소한[belanglos] 으로 치부하고 더 최신의 것으로 관심을 옮긴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처럼 공동의[gemein, common] 호기심과 가십의 대상으로부터 멀어졌을 때 오히려 그 시도들은 자유로이 빛을 발하게 된다.

Q. 애매성은 옳고 그름에 대한 혼란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관심의 진정성 결여를 가리키는가?

A. 후자 같다. 핵심은 말만 하고 행동에는 옮기지 않는 것, 진실 및 진실한 삶에 대한 은밀한 무관심에 있다. 모두가 좋은 삶을 꿈꾼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아무도 좋은 삶을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호기심과 가십을 쫓아 사는 현존재는 스스로의 진정한 존재가능성을 오인한다[sich versehen, go astray]. 세계-내-존재하는 현존재가 ‘거기’에 있다는 사태는 이제 두 가지를 의미하게 되는데[애매한데, zweideutig], 한편으로 그는 가장 시끄러운 가십과 풍성한 호기심 가운데서 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작 아무런 사건도 없는 일상을 영위한다. 그의 ‘거기’는 “일상적으로 모든 것이 그러나 근본적으로는[im Grunde]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곳”이다(174).

“Diese Zweideutigkeit spielt[tosses] der Neugier immer das zu, was sie sucht, und gibt dem Gerede den Schein, als würde in ihm alles entschieden.”(174)

 애매성은 타인과의 서로-함께-있음 역시 지배한다. 일상적 현존재는 타인을 볼 때 (그가 누구인지를 직접 확인하지 않고) 그에 대해 무엇이 말해지고 있는지를 신경쓴다[aufpassen, watch, 조심한다]. 이에 따라 일상적인 서로-함께-있음은 무차별한 나란히-있음이 아니라, 애매한 긴장으로 넘치는 서로를-조심함으로, 비밀스럽게 상대를-엿들어봄[abhören]으로 점철되어 있다. (타인이 누구인지 몹시 궁금해 하지만, 그가 가지는 평판에 신경쓸 뿐 실제로 그가 누구인지는 안중 밖이기 때문이다.) “서로를-위함의 가면 아래에 서로를-적대함이 작동한다.”(175)

 그러나 애매성은 누군가의 의도적인 위장과 왜곡[Verdrehung]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 속에 내던져진 서로-함께-있음으로서 서로-함께-있음 안에 이미 놓여 있다.”(175) 그리고 세인은 결코 상술한 존재해석이 자신에 대한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가십, 호기심, 그리고 애매성은 하나의 통일적인 구조적인 존재연관을 형성하면서 ‘일상적 현존재는 어떤 방식으로 ‘거기’ 실존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한다.**

*반박을 원천봉쇄한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방어적인, 치졸한 무브 같다.

A. 세인은 ‘그들’로 호명되기 때문에 ‘내 얘기 아냐!’라고 되는 게 자연스럽다(R씨). / 누군가 ‘너는 잡담만 하고 진정성도 없어!’ 하면 누구나 기분 나쁠 것이다(K씨).

**퇴락의 존재방식에 대한 하이데거의 서술은 감동적이지만 학술적 주장으로서는 미약하게 느껴진다. 일시적이고 현대인에게 우연하며***, 따라서 경험적인 데 불과한 것을 보편적이며 선험적인 것으로 포장해서 내보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바로 그 점을 노리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즉 그는 경험적인 것으로만 알려져온 가십, 호기심, 진정성의 부족이 사실은 우리네 일상적 존재의 선험적인 구성계기라는 주장을 하고 싶은 것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자신의 서술이 사회비평이 아닌 존재론의 층위에 놓인다고 미리 변한 것 아닐까.

***원시적 현존재보다 오늘날의 현존재가 현존재의 구성계기를 ‘더 잘 드러내준다’는 말을 상기하면 이 우연성은 크게 문제시되지 않을 것 같다(H씨).

Q. 하지만 정말 그럴까? 현대인의 생활세태에 대한 부정적인 가치평가를 하이데거의 서술로부터 떼어낼 있을까? 잠재적인 반박에 대한 비겁한 방어조치인 것은 아닐까?

§38 퇴락과 피투성

 상술한 서술을 종합하면, “일상성의 존재의 근본방식”은 퇴락[Das Verfallen, entanglement, falling prey]인 것으로 밝혀진다(175). 하이데거는 우선 ‘퇴락’이란 용어가 그 어떤 부정적 가치평가도 담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퇴락은 “현존재가 우선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고려된 세계 곁에 [몰두하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175, 강조는 하이데거).* “이러한 … 곁에 몰두해있음은 대개 세인의 공공성[대중] 속에 [스스로를] 상실해있음이라는 성격을 가진다.”(175) 현존재의 비본래성은 퇴락에 대한 서술로써 비로소 구체적인 규정성을 획득하게 된다. 현존재의 비본래성은 더-이상-세계-내에-있지-않음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에-완전히-취해있음[benommen sein]에 해당한다. “그-자신이-아님[Nicht-es-selbst-sein]은 본질적으로 고려하면서 하나의 세계에 몰두해있는[aufgehen] 존재자의 긍정적인 가능성으로 기능한다.”(176, 강조는 하이데거) 따라서 퇴락은 “순수하고 고차적인 근원적인 상태로부터의”(176) 타락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빠져있음에 대한, 어디까지나 중립적인 기술이다. 그러한 근원상태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경험된 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존재론적으로도 관련된 해석의 가능성과 실마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또한 퇴락이 특정한 존재자, 특히 눈앞에-있는 것에 사로잡힘이 아니라 세계에의 사로잡힘에 해당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퇴락은 현존재가 어떤 존재자와 관계하든 그에 사로잡히게 되는 실존론적 규정성이기 때문에, 그가 당장에서와 다른 존재자를 고려하게 된다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운동이 아니다. 퇴락은 특정한 부정적인 존재적 특성과 결부되는 것 역시 아니므로, 인류의 문화가 진보한다고 해서 퇴치될 수 있는 운동도 아니다.

*퇴락의 개념은 후설의 자연적 태도 소박성의 개념과 유사하다.

**이 부분이 후설의 초월론적인 것에 대한 반박으로 읽힐 수 있을까?

Q. “Trotzdem mußte der Schein bleiben, das In-der-Welt-sein fungiere als starres Gerüst, innerhalb dessen die möglichen Verhaltungen des Daseins zu seiner Welt ablaufen, ohne das »Gerüst« selbst seinsmäßig zu berühren. Dieses vermutliche »Gerüst« aber macht selbst die Seinsart des Daseins mit. Ein existenzialer Modus des In-der-Welt-seins dokumentiert sich im Phänomen des Verfallens.”(176)의 함의를 모르겠다. 모든 세계-내-존재는 퇴락이라는 뜻인가?

A. ‘순수 세계-내-존재’가 있고 그 형식을 준수하면서 본래적으로 살거나 비본래적으로 살거나가 아니라, 모두가 현사실적으로는 비본래적 세계-내-존재의 방식으로 산다?

A2. 세계-내-존재가 정적 형식이 아니라 운동이라는 것?(H씨)

“Das Gerede erschließt dem Dasein das verstehende Sein zu seiner Welt, zu Anderen und zu ihm selbst, doch so, daß dieses Sein zu... den Modus eines bodenlosen Schwebens hat. Die Neugier erschließt alles und jedes, so jedoch, daß das In-Sein überall und nirgends ist. Die Zweideutigkeit verbirgt dem Daseinsverständnis nichts, aber nur, um das In-der-Welt-sein in dem entwurzelten Überall-und-nirgends niederzuhalten[supress].”(177) ➔ 퇴락의 본질은 인간으로 하여금 실재와의 접촉을 차단하고 실없는 수다의 차원에 부유하게 하는 것, 삶과 세계의 민낯을 외면하게 하는 것에 있다.

 퇴락은 (정적인 상태이기보다) 운동[Bewegtheit, movement]으로 특징지어진다. 퇴락의 운동은 현존재를 유혹하고, 안주시키고, 소외시키며, 사로잡아-가두는 존재방식[Seinsart]으로 구체화된다.

 ①특정한 인물이나 상황에서 비롯한 것도 아니고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는 실재하는 것도 아닌 대중적인 해석에 휩쓸려 현존재는 스스로를 상실하는데, 이때 “현존재는 퇴락에의 지속적인 유혹을 스스로 마련한다[das Dasein bereitet ihm selbst die ständige Versuchung zum Verfallen]. […] 세계-내-존재는 자체로 유혹적이다[versucherisch, tempting].”(177)* 쉽게 말해 세계에의 몰두는 외부에서 유발되는 것이 아니다.

*Q. 그렇다면 정말 모든 세계-내-존재가 퇴락인가?

A. 세계내존재=퇴락은 아니지만, 세계내존재는 퇴락의 근거다. 퇴락의 현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세계내존재임이 드러난다. 세계내존재하는 존재자만이 퇴락할 수 있기 때문. 본래태는 비본래태의 ‘변양’일 뿐(K씨). ➔ 그러나 동일시하는 서술이 너무 많은 것 같다. ➔ 본래적으로 사는 존재자도 퇴락에서 출발한다. 또 본래적으로 사는 존재자도 기분을 가지고 말을 하고 염려를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한다(K씨).

 ②모든 것을 이미 잘 알려지고 친숙한 것으로 깎아내리는 퇴락의 존재방식은 현존재에게 삶의 확실성과 진정성, 충만성을 헛되이 약속한다. 실속 없는 자기확신(이자 일종의 자기기만)에 취해 현존재는 본래적인 심정적 이해를 점점 더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처럼 자신이 완전하고 진정한 살고 있다는 착각[Vermeintlichkeit, 추정, 한갓된 사념]은 현존재를 안주시킨다[beruhigend]. 안주 가운데서 현존재는 휴식[Ruhe]도 없이 계속해서 이런저런 비즈니스[Betrieb]에 종사한다. “유혹적인 안주는 퇴락을 강화한다[steigern].”(178)

 ③쉼없이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부산스러움, 특히 낯선 문화의 인류를 ‘이해’하고 그것을 자기 자신과 비교 및 종합함으로써 스스로를 이해하려는 (근래의 학술적) 시도들은 “그럴싸한 보편적인 현존재해석을 가장한다[vortäuschen].”(178) 그러나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러한 부산스러움 가운데서는 “무엇이 본래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지”가 규정되지도, 물어지지도 못한다(178). 다양한 문화에 대한 지식이 아무리 고집스럽게 수집된다고 해도 “이해 자체가 그저[einzig] 가장 본래적인 현존재 속에서 자유로워져야 하는 하나의 잠재력[될-수-있음]이라는 점은 이해되지 못한 채로 남는다.”(178) 타자와의 끊임없는 비교는 현존재를 그의 본래적인 잠재력으로부터 소외시킬 뿐이다.

 ④하이데거는 이 소외가 현존재 자신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 특히 주목한다. 현존재는 자신이 아닌 존재자에게로 떠넘겨지는[ausgeliefert]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능한 존재방식으로서 그 자신의 비본래성”에로 떠밀린다[drängen]. […] 현존재는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혀-갇힌다[sich verfangen, entangle oneself].”(178)

 현존재를 유혹하고, 안주시키고, 소외시키며, 사로잡아-가두는 퇴락의 구체적 존재방식[Seinsart]을 하이데거는 추락[Absturz]이라고 부른다. 현존재는 공공적인 해석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토대-없음과 비본래적 일상성의 허무[Nichtigkeit] 속으로 추락한다.”(178) 그의 추락은 ‘고양[Aufstieg]’과 ‘구체적인 삶’으로 잘못 해석되고 은폐된다. 풀어 말해, 현존재는 자신의 본래적인 가능성들을 기투해보지 못하고 그보다는 자신이 이미 모든 것에 도달했다고, ‘본래적으로’ 살고 있다고 그릇되게 추정한다. 그러면서 점점 더 자신의 본래적인 가능성으로부터 찢겨나와[losreißen] 세인의 삶으로 끌어들여진다[hineinreißen].* 하이데거는 이와 같은 퇴락의 운동을 소용돌이[Wirbel]**라고 부른다.

*독일어에서 ‘reißen’은 ‘찢다’와 ‘끌다’의 뜻을 모두 가진다.

**독일어에서 ‘Wirbel’은 ‘인파’, ‘혼란스러운 군중’이라는 뜻 역시 가진다.

 퇴락은 세계-내-존재를 실존론적으로 규정할 뿐만 아니라, “현존재의 심정성 속에서 그 자신에게 부과될[강요될, aufdrängen, force/impose] 수 있는 피투성”의 운동성격 역시 규정해준다(179). “피투성은 하나의 ‘완료된 사정[fertige Tatsache]’이 아닐 뿐만 아니라, 완성된 사실[ein abgeschlossenes Faktum]인 것도 아니다. 피투성의 현사실성*에는 현존재가 그가 그 자신으로 존재하는 한 던짐[Wurf] 속에 남으며 세인의 비본래성 속으로 휘말려들어간다는[hineingewirbelt] 점이 속한다.”(179) 따라서 “현존재는 현사실적으로 실존한다[Dasein existiert faktisch]”는 하이데거의 언명은 일상을 사는 인간이 스스로의 본래적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져 세론에 빠져드는 지속적 운동 속에 언제나 이미(‘사실상’) 휘말려있는 사태를 뜻한다(179).**

*피투성이란 현사실성을 현상적으로 보여주는 사태이며, 오직 스스로를 문제삼는 존재자만이 피투성을 가질 수 있다.

Q. “실존의 형식적 이념”(179)은 무엇에 해당하는가?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형식적’인가? cf. “Aber ist mit diesem Aufweis des Verfallens nicht ein Phänomen herausgestellt, das direkt gegen die Bestimmung spricht, mit der die formale Idee von Existenz angezeigt wurde? Kann das Dasein als Seiendes begriffen werden, in dessen Sein es um das Seinkönnen geht, wenn dieses Seiende gerade in seiner Alltäglichkeit sich verloren hat und im Verfallen von sich weg »lebt«?”(179)

**Q. 그렇다면 모든 피투성은 비본래성과 동치인가? 본래적으로 사는 현존재는 피투성으로부터 벗어나 있는가?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현존재는 일상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는 바로 그 운동 속에서조차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의 잠재적인 가능성들을 문제삼는 존재자이다. 퇴락은—그 속에서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문제삼기보다 세인에게 맡겨버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현존재의 실존이론성[Existenzialität]을 오히려 가장 기초적으로[elementar] 증명한다. “현존재는 그에게 이해하면서-심정적인 세계-내-존재가 문제시되기 때문으로만 퇴락 있다.”(179, 강조는 하이데거) 그에 따라 본래적인 실존은 비본래적인 실존에 대한실존론적으로 단지 변양된 포착[ein modifiziertes Ergreifen]”일 뿐이다(179). 퇴락이 현존재의 실존이론성을 반증하는 듯이 보이는 유일한 경우는 현존재를 고립된 자아-주체, 점적인 자기[Selbstpunkt]로 가정할 때, 그리고 그에 따라 세계가 하나의 객체가 되고 세계-내-존재 역시 세계내부적 존재자의 눈앞에-있음의 일종이 될 때뿐이다. (왜냐하면 그 경우 주체의 실존은 고립된 지적인 캡슐의 내면적 삶으로, ‘이미 세계에로 나서있는’ 퇴락은 실존에 반대되는 삶의 양태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퇴락은 현존재에게 존재적으로 나타나는—따라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는—어떤 특성, 특정한 ‘암면[Nachtansicht, 어두운 이면]’에 대한 기술이 아니다. 퇴락은 밝든 어둡든 “현존재 자신의 본질적인[wesenhaft] 존재론적 구조를 해명한다.”(179, 강조는 하이데거) 그러므로 위에서 이루어진 실존론적-존재론적 해석은 인간본성의 부패[Verderbnis, 타락] 따위와는 전적으로 무관하다. 퇴락은 본성의 부패와 부패하지 않음, 이를테면 원죄를 가지거나 가지지 않음, 존재적으로 은총을 받거나 받지 않음 이전에 일어나는 존재론적인 사태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신앙[Glaube]과 ‘세계관’이 특정한 ‘개념적’ 이해로서 유효하고자 하는 한 그것은 현존재의 실존론적인 구조에로 소급되어야 한다.* 이로써 현존재의 존재를 염려로 ‘포괄적으로[zusammenfassend]’ 해석할 현상적인 토대가 확보되었다.

*Q. 어째서 하이데거는 ‘개념적’을 강조하는가?

A. 모든 개념화는 현존재의 실존론적인 구조의 작동을 전제하기 때문이 아닐까?

작가의 친절한 요약: “Thema wurde die ontologische Konstitution der zum Dasein wesentlich gehörenden Erschlossenheit. Ihr Sein konstituiert sich in Befindlichkeit, Verstehen und Rede. Die alltägliche Seinsart der Erschlossenheit wird charakterisiert durch Gerede, Neugier und Zweideutigkeit. Diese selbst zeigen die Bewegtheit des Verfallens mit den wesenhaften Charakteren der Versuchung, Beruhigung, Entfremdung und des Verfängnisses.”(180)

6 현존재의 존재로서 염려(마음씀)

§39 현존재의 구조전체(Strukturganze) 근원적 전체성에 대한 물음

 세계-내-존재는 여러 구성적인 계기들로 이루어져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단 하나의 구조이다. 이제 물어야 할 것은 위에서 “나타내보여진 구조전체의 전체성이 실존론적-존재론적으로 어떻게 규정되는가?”이다(181). 그러므로 요구되는 것은 평균적인 일상성에서 드러나는 “현사실성과 실존이론성 간의 존재론적 통일성 또는 현사실성이 실존이론성에 본질적으로 귀속됨”에 대한 해명이다(181). 이러한 통일은 요소들 하나하나를 존재적으로 모아 조립하는 방식으로 해명되어선 안 된다. 관건은 해당 요소들을 존재론적으로 정초해줄 수 있는 근원이다. 따라서 체험에 대한 내재적인 지각도, 인간에 대한 이념으로부터의 연역도 적절한 접근법이 될 수 없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존재론적 구조에는 존재이해가 속한다”는 점, 현존재는 심정적인 이해를 통해 존재를 개시하는 존재자라는 점을 실마리로 삼는다(182). 이어지는 과제는 현존재에게 자신의 존재, 나아가 그것을 구성하는 세계 전체를 탁월하게 개시해주는 특정한 기분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 기분에서 현존재는 그 자신 앞으로 데려와지며, 그것도 “특정한 방식으로 단일화되어[vereinfacht]” 그렇게 된다(182).

 현존재의 존재의 구조전체성을 드러내줄 수 있는 ‘근본심정성’으로서 하이데거는 불안[Angst]의 현상을 제시한다. 불안은 앞서 분석한 두려움과 가깝지만[verwandt] 후술할 이유로 철저히 구분되어야 한다. 불안에 대한 분석은 퇴락의 현상으로부터 출발해, 궁극적으로는 현존재의 존재가 염려[Sorge, 마음씀]임을 탈은폐한다. 실존론적 근본현상으로서 염려는 의지, 소망, 성향, 충동[Wille, Wunsch, Hang und Drang]과도 차별화된다. “염려는 이것들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 이것들 자체가 염려 속에서[염려에 의해] 정초되어있기 때문이다.”(182)

 현존재의 존재를 염려로 규정하는 것은 부자연스럽고[gesucht, far-fetched] 이론적인 데 불과해 보일 수 있다. 무엇보다 그와 같은 규정은 인간에 대한 전수되고 보존되어온 오랜 정의—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테제—와 충돌한다. 이에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존재가 염려라는 해석에 대한 선존재론적 증명[Bewährung, confirmation]을 덧붙이겠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현존재는 자신에 대해 무언가를 표현할[aussprechen] 때마다 선존재론적으로나마 이미, 일찍이 스스로를 염려로서 해석한 채 존재한다.

 현존재의 존재를 규정하는 과제는 아프리오리한 인간학을 넘어서 존재 일반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겨냥한다. 기존의 존재론은 모든 존재를 눈앞의-존재, 즉 »실재«, »세계«-현실성의 의미로 일반화시켜 이해해왔기 때문에 이제는 “염려, 세계성, 손안에-있음과 눈앞에-있음(실재) 사이의 존재론적 연관에 대한 논의[Erörterung]”가 요구된다(183). 이 과정에서 실재론과 관념론의 대립이라는 인식이론적 문제와 더불어 실재의 개념이 새롭게 조명될 것이다.

 진리[Wahrheit]의 현상 역시 개시성, 피발견성[발견되어있음, Entdecktheit], 해석, 진술에 대한 상술된 분석을 토대로 새롭게 해명된다. 존재자는 그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존재는 오직 존재자에 대한 [현존재의] 이해 속에만 ‘존재한다’.”(183)* “존재와 이해 사이의 필연적인 연관”으로 인해 하이데거의 문제설정에서 존재와 진리는 서로 분리될 수 없다(183).

*“Seiendes ist unabhängig von Erfahrung, Kenntnis und Erfassen, wodurch es erschlossen, entdeckt und bestimmt wird. Sein aber »ist« nur im Verstehen des Seienden, zu dessen Sein so etwas wie Seinsverständnis gehört. Sein kann daher unbegriffen sein[be unconceptualized], aber es ist nie völlig unverstanden.”(183)

§40 현존재의 탁월한 개시성으로서 불안이라는 근본심정성

 퇴락해있는 현존재는 “본래적인 자기-자신이-될-수-있음[Selbst-sein-können]으로서의 자신으로부터 도피[Flucht]”를 감행한다(184). 도피 가운데서 현존재는 실존적으로, 즉 존재적으로 자기됨의 본래적인 가능성으로부터 차단되고[verschlossen] 멀리-떼어져[abgedrängt] 있다. 그럼에도 이 차단은 어디까지나 개시의 일종이다. 개시의 결여태로서 이 차단되어-있음은 현존재의 도피가 다른 무엇도 아니고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도피임을 드러내준다. 그리고 그가 자신으로부터 고개를 돌릴[abkehren] 수 있는 이유는 그에게 이미 자기 자신(의 본래적 가능성)이—비록 포착되지는 못하지만—개시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존재 분석학은 (방법론상) 현존재의 도피를 실마리로 삼음으로써 오히려 그가 무엇으로부터[das Wovor] 도피하는지에로 고개를 향할[hinkehren] 수 있다. 현존재의 비본래적 실존에 대한 탐구가 역설적으로 그의 본래적인 가능성에 대한 현상학적 해석을 가장 인위적이지[künstlich] 않은 방식으로 가능케 하는 것이다.

 두려움과 불안은 둘 다 도피를 추동하는 등 서로간에 현상적인 친화력을 가진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면 둘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들을 짚어낼 수 있다. 두려움의 대상[das Wovor]은 특정한 방역으로부터 오며, 현존재의 가까이에서 그에게 점점 다가가는—그러나 그와 만나지 않을 수도 있는—위협적이며 유해한 세계내부적 존재자였다. 불안의 대상 역시 위협적이라는 성격을 가지지만, 그것은 세계내부적 존재자가 아닌 현존재 자신이다. 현존재 자신에 대한 불안은 세계내부적 존재자에 대한 두려움을 정초한다. 현존재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고개를 돌려 세계내부적 존재자에로 향하기 때문에 두려움과 같은 심정성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려움에서와 달리 불안의 대상은 그 어떤 용도[Bewandtnis]도 가지지 않는 세계--존재 자체이며, 결코 세계 내부에서 손안에-있거나 눈앞에-있는 것 일반이 아니다. 불안의 대상이 가하는 위협 역시 “특수한 사실적인 될-수-있음”을 위협하는 특정한 유해성과 무관하다(186). 한 마디로 “불안의 대상은 완전히 무규정적이다[unbestimmt].”(186) 불안 속에서 기존의 용도전체성은 한꺼번에[zusammen] 그 중요성을 잃고 “세계는 완전한 무의의성의 성격을 가진다.”(186)

cf. 하이데거가 종종 심정성의 주체를 심정성 자체로 명시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E.g. “Nichts von dem, was innerhalb der Welt zuhanden und vorhanden ist, fungiert als das, wovor die Angst sich ängstet.”(186)

“Die innerweltlich entdeckte Bewandtnisganzheit des Zuhandenen und Vorhandenen ist als solche überhaupt ohne Belang. Sie sinkt in sich zusammen. Die Welt hat den Charakter völliger Unbedeutsamkeit. In der Angst begegnet nicht dieses oder jenes, mit dem es als Bedrohlichem eine Bewandtnis haben könnte.”(186)

 공간의 언어로 살펴보았을 때, 불안의 대상은 어디에도 없으며 그것이 그리로부터 출발해오는 특정한 방역도 없다. 하이데거는 “그러므로 불안은 또한 특정한 ‘여기’와 ‘저기’를 ‘보지’ 않는다”고 말한다(186). 요컨대 불안은 자신이 불안해하는 대상이 어느 쪽에서 오는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불안의 대상이 무[Nichts]인 것은 아니며, 그것은 이미 ‘거기’ 있다. 불안이 지배하는 공간은 “방역 일반, 본질적으로 공간적인 내-존재를 위한 세계의 개시성 일반”이다(186).

 이러한 아무것도 아니고 어디에도 없음[Nichts und Nirgends]’은 현상적으로 “불안의 대상은 세계 그 자체”임을 알려준다(187). 불안에서 세계는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내부적 존재자들의 전적인 의의 상실로 인해 오히려 단독으로 부상한다[die Welt in ihrer Weltlichkeit sich einzig noch aufdrängt]. 또한 여기서의 세계는 눈앞의-존재자의 총체도 (손안의-존재자의 총체도) 아니라, “손안의-존재자 일반의 가능성 일반”이다(187, 강조는 하이데거). 그런데 세계는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의 존재에 존재론적으로 본질적으로 속하”기 때문에 불안의 대상은 결국 세계-내-존재 자체가 된다(187). 심정성으로서의 “스스로-불안해-함[Das Sichängsten]은 근원적이고 직접적으로 세계를 세계로서 개시한다.”(187)

“Wovor die Angst sich ängstet, ist nichts von dem innerweltlichen Zuhandenen. Allein dieses Nichts von Zuhandenem, das die alltägliche umsichtige Rede einzig versteht, ist kein totales Nichts. Das Nichts von Zuhandenheit gründet im ursprünglichsten »Etwas«, in der Welt.”(187)

 불안은 무엇에 대한[vor, 무엇 앞에서의] 불안일 뿐만 아니라, 무엇을 둘러싼[um, 누구에 대한] 불안이기도 하다. 이때 불안이 둘러싸는 것은 주지하다시피 “현존재의 특정한 존재방식과 가능성이 아니라 […] 세계-내-존재 자체이다.”(187) 불안한 현존재는 더 이상 공공연하게 완료된 해석에 입각해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의 책임이기도 한 “본래적인 세계-내에서-될-수-있음[In-der-Welt-sein-können]으로 되던져진다.”(187) 달리 말해 “불안은 현존재를 단독자화[vereinzeln]”하며 그가 단독으로 “이해하는 자로서 본질적으로 가능성들에로 스스로를 기투하는” 순수한 가능존재[Möglichsein]임을 개시한다(187).* 요컨대 불안은 “현존재 속에서 가장 본래적인 될-수-있음을 향한 존재”를, 즉 “스스로-선택함과 스스로-파악함[Sich-selbst-wählens und -ergreifens]의 자유를 위해 열려있음[Freisein]”을 드러낸다(188).

*그렇다고 해서 이 “실존론적 ‘유아론’”이 현존재를 무세계적이고 고립된 주체사물로 평면화시키지는 않는다(188). 왜냐하면 “현존재는 단독자화되지만, 세계-내-존재로서 단독자화되기 때문이다.”(189, 강조는 하이데거) 이로써 모든 세계-내-존재가 퇴락은 아님을 알 수 있다.**

**cf. 현대어로 불안은 ‘고독’에 가까운 것 같다(R씨). (고독과 퇴락 자체는 양립 불가하지 않을 수 있다,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조차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있는 것이다?) ➔ 만일 세계내존재 자체가 퇴락이라면, 비극적인 세계관이 연출된다. 가능한 것은 내 실존이 비본래적임을 ‘인지’하는 데 불과하다? ➔ 개성이 아닌 자율이 관건이다? ➔ 진정한 자율이 가능한가? 순환, 전거가 있는 상황에서. 임의적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게 여전히 전부? 하이데거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고 하고 있는 것 같다. 해석적 순환과, 모든 해석을 무너뜨릴 수 있는 가능성의 제시. ➔ 하이데거도 불안의 지속이나 환골탈태를 권유하는 게 아니라, 불안을 직시하는 데 불과할 수 있다. 하이데거가 보여주려는 비전이 무엇인지 불분명하다(R씨).

“Die Angst bringt das Dasein vor sein Freisein für... (propensio in...) die Eigentlichkeit seines Seins als Möglichkeit, die es immer schon ist. Dieses Sein aber ist es zugleich, dem das Dasein als In-der-Welt-sein überantwortet ist.”(188)

 그런데 불안의 대상과 불안이 둘러싸는 것, 심지어는 스스로-불안해-함 자체는 모두 똑같이 세계-내-존재이다. “개시함과 개시된 것 사이의 실존론적 동일성”이 바로 불안을 탁월한 심정성이자 해석의 주제로 만들어준다(188). 일상적인 언어 사용에서 불안이 현존재를 ‘집을 잃은 듯이[unheimlich, 섬뜩하게]’ 만든다고 표현되는 것은 불안이 특유한 근본심정성임을 잘 드러내준다. 세인이 그를 대신해 이미 완료해준 공공연한 해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현존재는 안주를 가능케 하는 자기확신과 (자신이 가는 길이 옳다는) 자명성을 누리며 마치 집에 있는 것처럼 느낀다. 그러나 불안 속에서 이러한 일상적인 친숙성은 무너지고, 현존재의 내-존재는 집에-없는-듯함[Unzuhause]으로 양태화된다. 퇴락은 이러한 집에-없는-듯함, 곧 집을-잃은-듯함[Unheimlichkeit, 섬뜩함]으로부터 공공성의 집에-있는-듯함[Zuhause]으로 도피하는 이다.

 불안은 모든 일이 잘 되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전적으로 무해한 상황에서조차 발발할 수 있다. 하지만 일상을 사는 현존재는 이러한 섬뜩한 기분을 외면한다.* 그러므로 “안주된-친숙한 세계-내-존재는 현존재의 집을-잃은-듯함[섬뜩함]의 한 양태이지, 그 역이 아니다. 집에-없는-듯함이 [집에-있는-듯함보다] 실존론적-존재론적으로 근원적인 현상으로 개념화되어야만 한다.”(189)** 이처럼 일상성이 사실은 언제나 이미 잠재적인 불안으로부터의 도피로 규정되는 한에서만 현존재가 특정한 존재자를 고려함에 있어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두려움은 »세계«에 퇴락한, 비본래적이고 […] 숨겨진 불안이다.”(189)

*인간은 자신의 실존적인 조건들을 직시하지 않기 위해 오락을 추구하며, 모든 것을 가진 듯 보이는 왕조차 그렇게 한다는 파스칼의 현실인식이 연상된다. 이 인식으로부터 신앙을 연역하는 파스칼과 달리 하이데거는 자유를 결론으로 내놓으면서 사르트르의 철학을 예견한다.

**Q. 그 반대는 왜 안 되는가?

 현사실적으로 ‘본래적인’ 불안은 드물게 일어난다. 이는 현존재가 평소에 얼마나 세인의 세계해석에 묻혀 사는지를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불안은 그것의 원인과 경과형태에 입각해 ‘심리학적으로’ 이해될 뿐이다. 하지만 불안의 심리학적인 해소는 오직 현존재가 그의 존재상 스스로를 불안해하는 존재자이기 때문에만 가능하다. 불안이라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존재론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불안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는 불안 자체보다도 더 드물다. 이는 부분적으로 불안이라는 심정성에 대한 오해, 이를테면 두려움과의 동일시 등등 때문이다.

 불안뿐만 아니라 모든 심정성은 본질상 “완전한 세계-내-존재를 그것의 모든 구성적 계기들(세계, 내-존재, 자기)을 따라 개시”해준다(190). 다만 불안은 모든 세계내부적 존재자의 방해를 치우고 현존재를 단독자화해준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이러한 단독자화는 현존재를 그의 퇴락으로부터 되돌아오게 해주고[zurückholen] 그에게 본래성과 비본래성을 그의 존재의 가능성들로서 드러내준다.”(191) (비본래적 실존이 필연적이지 않다는 교훈을 주는 것이다.)

§41 염려로서 현존재의 존재

하이데거의 친절한(?) 요약: “Das Sichängsten ist als Befindlichkeit eine Weise des In-der-Weltseins; das Wovor der Angst ist das geworfene In-der-Welt-sein; das Worum der Angst ist das In-der-Welt-sein-können. Das volle Phänomen der Angst demnach zeigt das Dasein als faktisch existierendes In-der-Welt-sein. Die fundamentalen ontologischen Charaktere dieses Seienden sind Existenzialität, Faktizität und Verfallensein. […] Das Dasein ist Seiendes, dem es in seinem Sein um dieses selbst geht. Das »es geht um...« hat sich verdeutlicht in der Seinsverfassung des Verstehens als des sichentwerfenden Seins zum eigensten Seinkönnen. […] Das Freisein für das eigenste Seinkönnen und damit für die Möglichkeit von Eigentlichkeit und Uneigentlichkeit zeigt sich in einer ursprünglichen, elementaren Konkretion in der Angst.”(191)

 불안에 대한 분석은 현존재에게 그의 가장 본래적인 존재를 향한 존재의 가능성이 언제나 이미 이해되어있음을 알려주었다. 이처럼 그가 자신의 본래적인 존재 가능성을 이해하고 있음은 현존재가 언제나 이미 당장의 스스로를 넘어서 자신을-앞질러-존재[das Sich-vorweg-sein]한다는 점을 알려준다. 이것이 바로 현존재는 자기 자신을 문제삼는 존재자라는 테제를 풀어쓴 것이다. (그는 명멸하지 않고 미래를 가지는 존재자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이 연장선에서, 현존재의 존재가 (지금과 달리 있는) 자유로 규정되기 때문에 비로소 현존재는 부자유스럽게[umwillentlich] 존재할 수도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현존재는 부자유스러우며, 그가 앞질러 존재하는 저 자신은 자기 자신이 아닌 세인-자기[Man-selbst]이다.*

*“Auch in der Uneigentlichkeit bleibt das Dasein wesenhaft Sich-vorweg, ebenso wie das verfallende Fliehen des Daseins vor ihm selbst noch die Seinsverfassung zeigt, daß es diesem Seienden um sein Sein geht.”(193)

 자신을-앞질러-존재함이라는 구조는 현존재의 일부가 아닌 전체에 관여하기 때문에 현존재를 무세계적 주체로 고립시키지 않으며, 도리어 세계-내-존재 전체를 특징짓는다. 그런데 세계-내-존재하는 현존재는 언제나 하나의 세계에 내던져진 스스로에 대한 책임을 떠안고 있다. 따라서 자신을-앞질러-존재함은 이미-하나의-세계-내에서-자신을-앞질러-존재함[①Sich-vorweg-②im-schon-sein-in-einer-Welt]이다. 이로써 세계성을 구성하는 유의의성의 지시관계 전체가 하나의 궁극목적 하에 고정된다는[verklammern, festmachen] 점이 다시금 명백해진다. 이 고정은 (원래는 서로에게서 떨어져있던) 주체와 객체가 마치 함께 용접되는[zusammenschweißen] 것과 같은 사태가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의 전체로서 통일적이었던 현존재의 구성틀을 가리켜 보인다. 달리 말해, “①실존함은 언제나 현사실적인 이다.”(192)

 나아가 현사실성은 “일반적이고 무차별하게 내던져진 세계-내에서-될-수-있음”이 아니라 “무언가의 곁에 퇴락하는[그 속으로 빠져드는] 존재”이다(192). 그러므로 이미-하나의-세계-내에서-자신을-앞질러-존재함은 본질적으로 또한 ③고려된 세계내부적 존재자들에 몰두하는 퇴락한 존재이다.

 ①, ②, ③을 포괄하는 전체적인 구조가 바로 현존재의 존재인 염려[Sorge]를 특징짓는다. 염려는 실존론적인 현상으로서, 존재적인 걱정이나 걱정-없음과는 차별화된다. 염려가 현존재의 존재를 규정하기 때문에 도구는 고려의 대상이, 타인은 배려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염려는 단순히 실존이론성을 (형식적으로) 고려하지 않고 현사실성과 퇴락함과의 통일체를 포괄한다[umgreifen].

“Das Sein des Daseins besagt: Sich-vorweg-schon-sein-in-(der-Welt-) als Sein-bei (innerweltlich begegnendem Seienden).”(192)

 한편 현존재의 존재를 염려로 규정하는 작업이 마치 이론보다 실천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처럼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소위 순수한 직관의 행위 역시 이를테면 정치적인 행동만큼이나 염려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다른 한편 염려를 의지, 소망, 충동 또는 성향으로 소급하려는 시도 역시 잘못되었다.* 이 네 가지 현상들은 모두 존재론적으로 염려에 기초해있지, 염려를 기초해주지는 못한다. 이를테면 단순한 생존의 본능조차 세계 내에서의 염려의 결여태로 분석되어야 한다.

*Q. 이 대목에서의 하이데거는 어떤 의미에서 현존재의 존재를 체험의 완전히 무규정적인 흐름으로 규정하는 (후설적) 시도를 ‘존재론적으로 무차별하다’고 비판하는가?(194) 존재론적 무차별성이라는 성질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A. 존재론적 성찰이 결여되어있다는 뜻 같다.

 의지는 언제나 의지되는 것[ein Gewolles]과 짝지어져 있으며, 현존재의 특정한 존재 가능성과 관련해서만 발동한다. 따라서 의지는 (의지 동기로서) 궁극목적 일반의 개시, (의지 대상으로서) 고려되는 것의 개시, 그리고 (의지함으로서) 그것을 향한 현존재의 이해 및 자기기투를—곧 염려를—전제한다. 세인에 의해 이미 공공연하게 완료된 해석에 따라 자신의 가능성들을 제한당하고, 안주에로 유혹 받는 현존재는 의지함에 있어서도 ‘현실적으로’ 도달 가능한 것만을 의지한다. 그는 자신이 바랄 수 있는 무한에 가까운 선택지들에는 눈이 멀어있는[möglichkeitsblind] 채, 실제로는 그 어떤 혁신도 일어나지 않는데도 자신의 의지가 갱신됨에 따라 새로운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다고 착각한다.

 나아가 “가능성들을 향한 존재는 대부분의 경우 한갓된 소망으로 보여진다.”(195) 현존재는 당장 손안에-있는 것들에 불만족스러워 하면서, 사실은 자신이 실현하리라 생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는 가능성들을 그저 꿈꾸어본다. 그러나 한갓된 소망은 오히려 가능성들을 닫아버린다. “소망하는 매달림[Nachhängen, indulgence]에서 ‘거기’ 있는 것이 ‘현실적 세계’가 된다. 소망은 존재론적으로 염려를 전제한다.”(195)*

*Q. 소망의 폐쇄 효과는 세계 내에서의 존재 가능성들이 일찍이 제공되어있을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A. 소망에서는 소망된 것 외의 다른 현실적인 가능성들이 닫히며 그런 의미에서 매달림이 성립한다. 염려가 먼저 이루어져있어야 그 중 하나에 매달릴 수 있다.

 그 같은 매달림 속에서는 “세계에 의해 […] ‘[대신] 살아지고’ 싶은 성향[Hang, inclination]”이 드러난다(195). 이는 현존재가 자신의 ‘외부에’ 있는 무엇인가를 향해서 존재하고자 하는 성향을 가리킨다[Ausseins auf …]. 현존재는 자신의 모든 존재 가능성들을 저 외향성이 이끄는 대로 처분한다. 반면 ‘살고자 하는’ 충동[Drang, urge]은, 그것 역시 일종의 정향이지만 그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특정한 존재 가능성만을 제한적으로 겨냥한다. 그러나 성향도, 충동도 심정성과 이해가 제한하는 범위 하에서 발동하기 때문에, 염려를 전제한다.

Q. “Im puren Drang ist die Sorge noch nicht frei geworden, obzwar sie erst das Bedrängtsein des Daseins aus ihm selbst her ontologisch möglich macht. Im Hang dagegen ist die Sorge immer schon gebunden.”(196)을 이해하지 못했다.

A. 이미 주어진 방향을 따르려는 의지(Hang) vs 기존의 방향으로부터 돌출되어 단절되려는 의지(Drang) (R씨)

 하이데거는 염려가 가지고 있는 존재론적인 구조가 단순하지 않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염려라는 근본현상은 ①(궁극목적에 의거해) 자신을-앞질러-존재함과 ②(피투를 뜻하는) 이미-내에-존재함과 ③(자기상실을 뜻하는) 곁에-존재함[몰두해-존재함]으로 분절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분절된 마디들을 통일시켜줄 수 있는 보다 근원적인 현상을 알아내야 한다고 하이데거는 논증한다. (그 근원현상은 후술하겠지만 시간이다.) 이러한 해석적 탐구가 제 아무리 새로워 보일지라도, 그것은 “존재적으로-실존적으로 이미 개시되어있던” 것을 바깥으로 드러내 보이는 작업에 불과하다(196).

§42 현존재에 대한 선존재론적 자기해석을 통해 현존재를 염려로서 실존론적으로 해석한 대해 입증하기

 그러나 상술된 현존재 해석은 전수되어온 존재론에 익숙한 이에게 낯설 것이다. 염려는 여전히 단지 걱정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이에 하이데거는 순전히 ‘역사적인’ 증명에 불과할지라도 상술된 현존재 해석을 선존재론적으로도 입증할 필요를 느낀다.

 이를 위해 하이데거가 가장 먼저 제시하는 증거는 염려를 인격화해 등장시키는 한 우화[Fabel]이다. 이 우화에서 쿠라[cura➔Sorge/care]는 흙을 빚어 인간을 만들어내고, 그가 살아가는 한 그에 대한 소유권을 가진다. 즉 인간의 근원은 염려이며, 그는 세계 내에 존재하는 한 염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그런데 쿠라의 소유권은 사투르누스[Saturnus➔Zeit/time]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사투르누스는 인간의 정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주피터와, 인간의 질료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텔루스 그리고 쿠라 사이에서 인간의 근원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권한을 가진다. 요컨대 인간의 본질은 “세계 내에서의 시간적 변화[zeitlichen Wandel in der Welt]”로 특징지어진다(199).

 한편 부르다흐[Burdach]는 염려에 헌신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세네카는 인간의 좋음이 염려를 통해 완성된다고 쓴다. 즉 인간의 본래적인 가능성은 (헌신적인) 염려를 통해 성취된다. 그러나 염려는 등근원적으로 (자기상실에 이르는 지나친 헌신으로서) 퇴락을 규정하기도 한다. “‘쿠라’의 이중적인 의미는 내던져진 기투의 본질적으로 양면적인 구조 속 하나의 근본구성틀을 가리킨다.”(199, 강조는 하이데거)

 존재적인 헌신은 존재론적인 염려에 의해 기초 지어진다. 이제까지의 해석은 경험적인 일반화[Verallgemeinerung]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에 하이데거는 염려가 무려 “초월론적인 ‘보편성’”을 띤다고 기술한다(199).*

*Die transzendentale »Allgemeinheit« des Phänomens der Sorge und aller fundamentalen Existenzialien hat andererseits jene Weite, durch die der Boden vorgegeben wird, auf dem sich jede ontisch-welt-anschauliche Daseinsauslegung bewegt, mag sie das Dasein als »Lebenssorge« und Not oder gegenteilig verstehen.”(199-200)

§43 현존재, 세계성 그리고 실재(Realität)

 그동안 현존재의 존재를 비롯한 모든 존재는 실재와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리하여 실재의 개념은 기존의 존재론에서 “특유의 우위[Vorrang]”을 가지게 되었으며, 현존재에 대한 진정한 해석학을 방해했고, 다른 모든 존재의 양태들을 실재가 아닌 것이거나 실재를 결여한 것으로 정의되도록 만들었다(201). 그러나 “실재는 여러 존재방식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현존재, 세계 그리고 손안에-있음과 존재론적으로 하나의 특정한 정초연관 속에 성립한다[stehen].”(201) 이를 위해서는 의식에 초월적인 존재자의 존재 여부, 그러한 ‘외부세계’의 실재의 입증 가능성 그리고 실재가 그 자체로 어디까지(inwieweit) 인식될 수 있는지를, 그에 따라 실재성의 의미가 궁극적으로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a) 존재의 문제로서의 실재성과외부세계’[»Außenwelt«] 입증 가능성

b) 존재론적 문제로서의 실재성

c) 실재성과 염려

Q. 내성은 어째서 눈앞에-있음에 대한 성찰인가?

cf. 일상의 철학적 권위 회복: 세계-내-존재의 생활세계적 실천이 인식보다 근원적이며, 이를 깨달으면 주객의 분리 및 그로 인한 사이비 문제들은 불필요한 것으로서 해소된다. 세계-내-존재인 현존재가 세계의 존재를 의심할 수는 없다. —> Q. 한 단계 아래로 내려간다고 해서 그 윗단계에서의 문제들이 사라지는가? 철학의 수행적 층위와 내용적 층위를 혼동하는 것은 아닌가? 또는 철학적 상상력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것은 아닌가?

Q. 자연은 어떤 의미에서 눈앞의-존재자도, 손안의-존재자도 아닌가?

§44 현존재, 개시성 그리고 진리

a) 전통적인 진리개념과 그것의 존재론적 기초

b) 진리의 근원적인 현상과 전통적 진리개념의 파생성

c) 진리의 존재방식과 진리전제(Wahrheitsvoraussetzung)

cf. 진리는 주관(적 표상)과 객관(적 존재자) 사이의 일치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드러남/개시/발견됨이다. 표상은 어디서도 관여하지 않는다. —> Q. 개시성과 (후설의) 지향성 개념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A. 후설은 여전히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Q. 은닉이 전제하는 발견을 진정한 발견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Q. 명제적 진술과 대상 사이의 비교는 어째서 눈앞의 존재자들 사이의 비교인가? 실천적 계기가 제거되어있으므로?

Q. 진리가 현존재에 의존한다는 결론은 ⟪논리연구⟫에서의 이념적인 것에 대한 논의와 어떻게 양립 가능한가?

A. 진리의 내용은 dasein-independent, 반면 진리가 진리임을 알아보는 것은 dasein-dependent, 그런데 알아봐지지 못하는 진리는 개념상 진리가 아님 —> Q. 진리를 처음부터 현존재에 의해서만 성립할 수 있는 것으로서 정의해버린 것은 아닌가?

Q. 본래성과 비본래성, 자기 자신의 것과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 정말 구분 가능한가? 

Q. 후설의 초월론적 주관을 현사실성을 갖춘 주관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