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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ise

Boston

20220623 원래는 22일 저녁에 도착할 예정이었지만, 비행기가 8시간 남짓 연착되는 바람에 새벽 4시 반이 넘어서야 보스턴에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위탁한 수하물이 D.C.를 아예 떠나지도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고,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려 했건만 빌린 에어비앤비의 문마저 열리지 않아서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 아침 8시까지 꼬박 하룻밤을 새웠다. 9시에 바로 독일어 시험이 있었기 때문에도 스트레스가 컸지만, 중간에 엄마와 나 사이에 있었던 실랑이들이 유달리 아픈 기억으로 남았다. 철학 공부를 하더라도 교수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가, 그러면 지금이라도 진로를 바꾸라는 말을 듣고 그에 예민하게 응수하고 만 것이다. 그 대화가 어찌저찌 마무리된 뒤에는 위탁수하물의 행방과 에어비앤비 출입과 관련한 나의 태도 때문에 다퉜다. 수하물이 오지 않은 것도, 자물쇠가 열리지 않은 것도 전적으로 사측의 잘못인데, 대처를 요구함에 있어 왜 화를 내지 않고 공손하게, "Thank you"를 섞어가며 말하냐는 것이었다. 그렇게 부드럽게 나갔다가는 상황이 급하지 않은 것으로 오해 받을 수 있다는 게 엄마의 주장이었다. 일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성격상, 그리고 내가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영역에 있어서는 웬만하면 남을 책망하거나 불만을 표시하지 않는 편이다. 착해서가 아니다. 화를 냄으로써 기분이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사후적인 자책 등으로 인한 심적인 비용이 더 크게 들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미 문제가 일어난 이상, 그리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대처를 약속받은 이상 내가 언성을 높인다고 해서 서로 기분 상하는 것 외에 무엇이 달라지나 싶었고, 아무리 같은 회사의 직원이라 할지라도 내가 항의를 할 수 있는 상대가 잘못을 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최소한의 요구를 하고 나서는 그에게 뭐라뭐라 쏘아붙이는 일이 부당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엄마의 눈에는 그런 내가 당신의 안위보다도 잘못한 회사 직원의 마음을 먼저 배려하는 것처럼, 무엇보다도 몹시 미련한 것처럼 보였던 것 같다. 누군가 나를 공격해도 스스로 방어하지 않을 것이냐고 물어왔을 정도로... 그렇지 않아, 라고 답하기는 했지만, 내가 소심한 게 꼭 틀린 말은 아니어서 주눅이 들었다. 내가 세상 사람들 대부분과 다른 자극-반응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는 게 분명해지는 대화였고, 그로부터 온 동요는 지금까지도 가시지 않았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솔직히 살아가는 일에 대해 겁을 먹는다. (그렇지만 나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반박을 해낸다구... 무례한 일을 당했을 때는 사과를 요구한다. 한편 이따금씩 내 안의 공격성을 발견하면 화들짝 놀라고...)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문화원에 도착했지만, 다행히 평소와 다르지 않은 집중력으로 시험을 마쳤다. 내가 고른 니보의 응시자는 4명뿐이었기 때문에 대기 시간도 없이 모든 모둘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모둘 슈프레헨에서 짝을 짓게 된 파마 머리의 파트너린이 생각난다. 그녀는 시험 내내 심사자들을 향해 등을 뒤로 젖힌 채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고, 자기소개를 하면서는 '독일에서 일을 해볼까 싶어서 응시했는데, 지금은 그러지 않기로 해서 솔직히 내가 여기 왜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미국식 당당함인지, 아니면 문화와는 관계 없는 거만함인지 판단하기 어려웠지만, 흥미로운 인물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비콘 스트리트를 따라 걸었고, 세븐 일레븐에서 간단한 세면도구를 사는 김에 닭꼬치를 사먹었다. 엄마와 나란히 누워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아침의 첫 비행기로 보스턴에 도착한 우리의 짐이 건물 앞까지 배송되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우리 둘 다 피로를 조금 녹이고 외출할 힘을 냈다. 등 뒤로 야구 경기가 벌어지는 바에서 타코와 매쉬드 포테이토, 따뜻한 브로콜리를 먹었다.

20220624 부족한 잠을 몰아자느라 하루를 이미 잃었기 때문에 부지런히 다니자! 라는 마음으로 보스턴 커먼 - 뉴버리스트리트 - 트리니티 교회 - 이자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뮤지엄 - 보스턴 미술관 순의 강행군을 뛴 날이었다. 좋은 것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하면서 엄마와 추억을 많이 쌓았다. 보스턴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었던 스테인드 글라스들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내가 철학 공부로 부자가 되는 가능세계가 있다면, 거기서는 집 안에 꽃과 식물이 재현된 스테인드 글라스를 들일 것이다.

20220625 엄마가 한국의 친구들에게 하버드 굿즈를 선물하고 싶다고 해서 캠브릿지 쪽으로 이동했다. 유학 준비를 마음 한 켠의 짐으로 두고 있었기 때문에 명문대 탐방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불안과 질투가 7:3쯤 섞여 산출된 불쾌감을 안고 택시를 탔다. 그래도 근처에서 들른 아침 식사 다이너가 무척 맛이 있었고--타란티노 영화에서 터무니없는 살인 같은 것을 모의할 때 나올 법한 식당이었다--하버드 코앞의 중고서점 철학 코너를 둘러본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비콘 힐로 돌아가 에어비앤비의 짐을 빼고 나서는 퀸시 마켓에 가봤는데, 관광객이 너무 많아서 하나도 정신이 없었다. 여기를 돌아다닐 바에야 벤치에 앉아서 사람 구경이나 하겠다는 엄마를 두고 나 혼자 세포라에서 화장품을 구경했다. 최애 블러셔인 베네피트의 블러셔들이 한국과 미국에서 색상 옵션도, 디자인도 다르다는 것을 알고 바로 눈이 돌아갔다. 여담이지만 미국 사람들은 옷과 화장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모두가 적어도 일상에서는 운동복에 화장기 없는 얼굴로 편하게 돌아다닌다. 문득, 나를 포함한 한국 사람들이 외모와 타인의 시선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는 자각이 찾아왔다. 좋아하는 후배에게 언니 연구왕이 돼야지, 연구실 패션왕이 되려고 하면 어떡하냐는 핀잔을 들었던 기억을 부끄럽게 상기했다. 그렇지만 베네피트 블러셔는 꼭 사고 싶었다고 말한다면 모순일까? 마켓 쪽으로 돌아가 보니 엄마가 수박 주스를 들고 꼬박꼬박 졸고 계셨다. 바이크 숍에 맡겨놓았던 캐리어를 끌고 공항에 가 D.C.행 비행기를 탔다. 날씨는 화창했고, 연착은 없었다.


 D.C.로 도착하고 나서 며칠 지나지 않아 독일어 시험 결과가 바로 나왔다. 레젠과 슈라이벤 83, 회렌 77, 슈프레헨 94로 듣기 점수가 조금 아쉬웠지만 네 모둘 모두 과락은 가뿐히 넘겨 합격했다. 부랴부랴 준비한 것치고는 행운이다. 그것도 Viel Glüc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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