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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ise

District of Columbia 3

 D.C.의 미술관들에서 느꼈던 바들을 끼적여본다. 더 어렸을 때는 그림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거나 이론에 대한 영감을 습득하려고 애썼었다. 생산성에 대한 강박을 무겁게 느꼈던 것 같다. 지금은 그림에 관한 한 거의 확고한 쾌락주의자가 되었다. 가르침을 주기보다는 즐거움을 주는 그림들이 더 좋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기록에 대한 욕망을 느끼는 것을 보면, 무상성의 우위에 대해 완전히 동의하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D.C.의 심장부에 위치해있는 국립미술관. 건물의 외면은 웅장한 것치고 밋밋하지만 내부가 정말 멋지게 꾸며져있었다. 실내의 중앙정원에서 웨딩 촬영을 하고 있던 커플이 떠오른다. 부디, 마치 미래만이 있는 양 행복하세요.

엘 그레코의 그림은 개인이 시대의 중력 한가운데서도 얼마나 우뚝 설 수 있는지를 느끼게 해준다. 신화적인 주제를 다뤘다고는 해도, 실재에 가까운 재현에 대한 요구가 강력했을 시대에 이토록 비현실적인 육체의 이미지를 정립하고 동시대인들에게 설득시켰다는 게 놀랍다. 물론 그의 스타일도 특정한 영향력 하에서 형성되었겠지만, 17세기의 그림치고 지나치게 현대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의 파란 하늘은 400년이 지나서도 섬뜩하다.
수태고지라는 주제는 정말 매력적이다. 어느 날 천사가 찾아와서 '당신은 신의 아들을 임신했습니다'라고 통지한다면 나는 무엇보다도 너무 부담스럽고 무서워서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은데, 거의 모든 수태고지 그림들 속의 마리아는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다. 라파엘 전파의 그림 정도에 와서야 마리아는 조금씩 당황한 기색을 내비친다. 과거의 그림들이 인간의 감정에 인색했음을 실감한다. 오늘날에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면 현대의 마리아는 어떻게 반응할까?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여성에게 어느 날 천사가 나타나 '당신은 신의 아들을 뱄다'고 일방적으로 통지한다. 그녀는 지금의 삶이 좋고, 경력이 단절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임신을 중단하고 싶다고 답한다. 천사는 그녀를 설득하느라 애를 먹는다. 당신의 아들이 세계를 구할 거라니까요.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사람들을 위로해줄 거라니까요. 하지만 저는 아들을 키울 여력도 마음도 없는데요...라는 반응에 천사는 속으로 '이런 이기적인 여자!'라고 생각하면서도, 천사이기 때문에 화를 감추고 설득을 이어나간다. 이런 이야기는 희극일까, 비극일까.
이 그림 속의 유리병은 마치 '틀린' 것 같다. 오른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잔은 이것이 도리어 있는 그대로라고 말한다. 우리는 부산스럽게 움직이면서 그때그때마다 우리만의 관점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1인칭의 시점에서는 왜곡이 오히려 진실하다. 그러나 그 진실을 화폭, 세계를 3인칭으로 재현해줄 것이 요구되는 매체에 옮기면 거짓이 도출된다. 세잔이 그린 유리병의 기이한 굴곡을 따라 인식과 존재 사이에 얽힌 신비가 흐른다.
Henri de Toulouse-Lautrec, Marcelle Lender Dancing the Bolero in "Chilperic", 1895-1896, oil on canvas. 레비나스에 따르면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불만족에 시달리는 인간은 쾌락을 추구함으로써 존재로부터 오는 불안을 잊고자 한다. 그러나 쾌락의 정점에서 인간은 오히려 존재로부터의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장 강력한 쾌락조차 그를 그가 아닌 존재자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쾌락의 끝에 이어지는 것은 그가 여전히 자기 자신이라는 데 따르는 수치심이다. 로트렉이 구사하는 에메랄드빛에서 나는 쾌락주의자의 수치심을 느낀다. 작품 왼편의 왕은 거의 절망하고 있다. 그의 얼굴은 나의 얼굴과 별반 다르지 않다.
피사로가 그린 이 양배추는 양배추가 아니라 솔직히 털복숭이 몬스터 같다. 쓰다듬어주거나 꼭 껴안고 함께 자고만 싶다. 피사로의 관심은 더 이상 객관성에 구애되지 않는다. 인상파 화가들이 당대에 어째서 경멸당했는지, 그리고 왜 위대한지 느낄 수 있게 해준 그림이었다.


 국립미술관에서 멀지 않았던 허쉬혼 박물관. 내부에 전시된 작품들 중에서는 솔직히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나의 취향에 대해 반추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나는 통통 튀는 아이디어들의 화려한, 그러나 산만한 불꽃놀이보다 오랜 시간 숙성된 사고가 장인적인 기술에 의해 겨우 겨우 실현되어 있는 모양새들을 훨씬 좋아하는 것 같다. 한 층의 절반을 잡아 먹고 있던 Laurie Anderson의 작품들은 정말 별로였다. 나는 아이디어보다는 프로젝트를, 기지보다는 솜씨를 사랑한다.

Jean Arp, Evocation of a Form: Human, Lunar, Spectral(1950, enlarged and cast 1957), Bronze. 누군가 나를 사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안아주고 있을 때, 그의 뒷모습은 이런 모습이 아닐까 꿈꾸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보다 키가 크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표면이 매끈한 청동상은 (아무런 개념의 매개 없이) 그냥 좋다. 사고보다도 감각이 먼저 반응한다.
스마일


 가장 좋았던 필립스 컬렉션. 집에서 걸어서 1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곳에 있었다. 그림을 다 보고 나서, 곧 출국을 하는 엄마와 찻집에 들어가 이 동네의 분위기가 집약된 이미지들에는 무엇이 있는지 이야기했다. 배롱나무와 라일락(또는 이것들처럼 보이는 식물 x). 그 외에 무수히 많은 나무. 그 아래 무수히 많은 강아지똥. 남녀불문 탱크톱을 입은 바리스타들, 무지개 깃발을 내건 교회들. 갑자기 쏟아지는 비, 그러다가도 갑자기 밝아지는 길, 그리고 대마 냄새.

보스턴에서도 눈에 띄었던 이름을 다시 만났다. '오딜롱 르동'이란 이름의 상징주의 화가인데, 유화인데도 왠지 수채화 같은 느낌이 나는 화풍을 구사한다. 그림에 입체감이 최소화되어있고 색채도 옅다. 더 어렸을 때는 이렇게 어딘가 빈약한, 힘을 뺀 그림들을 선호하지 않았는데 취향도 점점 바뀌는가 싶다. 따뜻하고도 무서운 그림이었다. 성냥팔이 소녀의 마지막 성냥들처럼 곧 사라져버릴 듯한 꽃들. 그러모을수록 오히려 흐트러질 것 같은. 종합을 허락하지 않는 밤의 상념들처럼.
Honore Daumier, To the Street, 1840-1850, oil on wood panel. 하이데거가 말한 세인이 연상되는 그림이었다. 세인은 얼굴 대신 질량과 힘을 가지고 있다.
다른 그림들, 이를테면 바로 위의 도미에의 그림 등에 비해 왜 이렇게 부자연스러운가 했더니 재현이 너무 세세한 나머지 화면이 정지된 것처럼 보여서였다. 완벽한 재현이 역설적이게도 정확성을 상실하는 이유는 현실의 본질적인 운동성 때문이다. 실재가 그 자체로 그렇건 아니건 주체는 언제나 변화에 대한 본능적인 예감을 가지고 현실과 마주한다. 창밖의 나무 한 그루에 시선을 던질 때, 나뭇잎이 미세하게나마 움직이기를 기대하며, 그 변화를 통해서 도리어 동일자를 감지한다. 그 결과 우리의 그런 예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화면들은 현실이 아닌 이념을 묘사하는 듯이 이해된다. 앵그르의 여성은 이 세상에 없다.
필립스 컬렉션에서 가장 좋았던 그림이다. 육체는 단일하지만, 그 안에 깃든 자아는 복수다. 복수의 자아들이 서로 다른 가치관과 세계상을 가지고 하나뿐인 육체의 주인이 되고자 쉼 없이 경쟁한다. 프로이트는 내면의 분열을 지적한 데 대해서는 옳았지만, 내면이 오직 에고와 이드, 슈퍼에고만으로 나뉜다고 생각한 데서 오류를 범했는지도 모른다. 더 많은 파편들이 한 데 모여있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내가 원하는 그것을 나는 원하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소설을 써서 내 상상의 세계를 겉으로 드러내 보이고 싶지만, 동시에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이 무섭고 수치스럽다. 반대로 내가 원하지 않는 그것을 나는 원할 수 있다. 나는 사람들 눈에 튀고 싶지 않지만, 솔직히 내 마음에 안 드는 관습들이 너무 많다. 니체의 말마따나 자아들 가운데 우선순위가 정립되면 한 사람의 성격이 탄생할 것이다. 그러나 분열이 장기화되면 자기확신의 부족이 신경증으로 번진다. 결정하지 못하는 데서 불안이 일고, 겨우 결정한 뒤에도 후회하는 데서 자책이 시작된다. 거듭된 자책 끝에 이르는, 앞으로 다시는 좋은 결정을 내리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은 우울을 낳는다. 스스로를 불신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방법서설⟫에서 데카르트가 권유했듯, 학문이 아닌 영역에서는 조금만 확실한 것도 완벽하게 확실한 양 행동하는 자세다. 나는 조금이라도 강한 자아의 말을 마치 진리인 것처럼 생각해야 한다. 스스로를 믿고 뒤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나는 잘했거나,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란 쉽지 않고, 언제나 옳지도 않다.
폐지 위에 그려진 자유의 여신상이 싸구려 금장을 두르고 있다. 내가 경험한 미국을 가장 잘 보여준 작품이었다. 거리들은 말한다. '누구에게나 자유가 주어져있었으므로, 실패한 사람은 자신의 무능 또는 의지박약으로 실패한 것이다. 따라서 사회는 노숙자에 대해 책임이 없다.' 공원에 나란히 놓인 텐트들이 낮에는 비둘기와, 밤에는 쥐와 공생할 때, 5성급 호텔의 수많은 창문들은 어둡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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