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 김난주 옮김, ⟪인간실격⟫, 열린책들, 2021.

"불행. 이 세상에는 불행한 온갖 사람이, 아니 불행한 사람들뿐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 사람들의 불행은 세상을 향해 당당히 항의할 수 있는 것이고, 또 <세상>도 그 사람들의 항의를 쉽게 이해하고 동정합니다. 그러나 나의 불행은 모두 나의 죄악에서 비롯된 것이니 누구에게 항의할 수도 없고, 또 우물쭈물 한마디라도 항의 비슷한 말을 하면 넙치는 물론이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느냐며 가당치 않아 하겠지요. 나는 속되게 말해 <막되어 먹은> 것인지, 반대로 마음이 너무 약한 것인지 나도 도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죄악 덩어리인 듯하니 한없이 불행해지기만 할 뿐 막을 구체적인 방안이 없습니다."(129)

세 번째인가 네 번째로 다시 읽은 것인데도 슬픔은 여전하다.

 얼마 전 대학원 사람들이 노는 자리에 슬쩍 끼어들었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조합이었던 데다 왁자지껄한 수다 같은 것에 파묻혀서 잠시 머리를 비우는 게 좋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여느 때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는 에소테릭할 것이고 우리에게는 철학 사분지일, 헛소리 삼분지일이 섞인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기억나지 않는 맥락에서 '지인지조'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게 뭐냐는 물음에 옆에 계시던 분께서 "지 인생 지가 조진다"의 줄임말이라고 알려주셨다. 나 혼자 알콜이 들어있지 않은 음료를 마시고 있었기 때문에 멀쩡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로는 완벽하게 침울해졌다. 그 말이 왜 그렇게 슬펐지, 돌이켜보면 ⟪인간 실격⟫을 읽고 있었기 때문 같다.

 현실의 눈에 ⟪인간 실격⟫은 지 인생 지가 조지는 이야기가 맞다. 요조는 어려서부터 자신의 속내를 철저히 숨기고, 광대로서의 역할을 자처하며 세계와 상식으로부터 폐쇄된 내면의 삶을 개시한다. 성인이 되어서는 성실한 다른 형제들이 보내주는 돈으로 술을 마시고 존재하는 모든 유혹에 망설임없이 응한다. 알콜이든, 모르핀이든 제 속의 음울한 목소리들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수단을 끊임없이 찾고 그렇게 자기 손으로 파놓은 함정에 빠져버리는 악순환을 지속한다. 안정된 삶의 기회가 찾아올 때마다 제 발로 뻥뻥 차버리는데, 그를 도우려는 여자의 신뢰를 끝내 저버리는 형식으로 그렇게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게--요조 자신마저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본인만의 탓일까. 그가 아버지의 권위와 집안의 답답한 분위기에 짓눌리지 않았더라면. 어린 시절에 하인들이 그를 후안무치로 괴롭히지 않았더라면. 넙치가 고까운 위선을 부리지만 않았더라면. 호리키 같은 이기주의자가 요조를 이용해 먹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그는 스스로를 위하는 법을 늦게나마 배우고, 자신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최소한의 자기애나마 장착해 구원의 손길을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과거의 아픔이나 실수를 기준으로 자신을 규정하지 않고서 말이다. 요조는 인간으로서의 자격이 없었던 게 아니라 '자기애를 이유로, 새로 시작하는 마음'을 가지는 데 서툴렀을 뿐이다.

 분명 할 말이 더 있었는데, 감정이 잘 언어화되지 않고 있다. 알 수 없는 벽에 막혀서 문장들이 부스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