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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장 그롱댕, <현대 해석학의 지평> 요약

장 그롱댕, 최성환 옮김, ⟪현대 해석학의 지평⟫, 동녘, 2019. 

귀여운 크기의 책

 짧지만 결코 쉽거나 친절한 책은 아니다. 번역도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많다. 모든 강조는 내것이다.


서론 우리의 시대는 해석의 보편성이라는 테제, 곧 모든 것이 해석의 문제라는 테제에 친숙하다. 그러나 이것이 자의를 물리치는 진리론과 양립 가능할 것인지, 아니면 상대주의로 귀결될 것인지에 관해서는 해석학적 견해가 갈라진다(9-10). 가다머와 리쾨르에 의해 수행된 철학적 해석학의 정체를 규명함에 앞서, 그롱댕은 '해석학'이 가질 수 있는 세 가지 의미를 구분한다. 첫째, "'해석학'은 고전적 의미에서 [...] 텍스트들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기예"이며, "좋은 텍스트 해석학을 가능하게 하는 규칙들, 지침들, 규범들을 제시한다. 이 규칙들 대부분은 수사학에서 유래한다."(12) 이때에는 성서 등의 텍스트를 어떻게 읽고, 해설해낼 것인가가 문제다. 둘째, 해석학은 "정신과학(문학, 역사학, 신학, 철학, 그리고 오늘날 불리는 '사회과학')의 기초"로서 "정신과학의 진리요구와 학문적 위상에 대한 방법론적 기초반성"이다(14). 이때에는 정신과학에 방법론을, 그러므로 학문으로서의 지위를 제공하는 것이 문제다. 셋째, 해석학은 "삶 자체의 한가운데서 발견[되]는 기초적 사건"으로서 해석 및 이해의 현상을 취급할 수 있다(15). 이때에는 우리의 실존을 해석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해석의 언어와 사태 자체의--그런 것이 있다면--진리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이 문제다.

1장. 해석학의 고전적 이해 고전적으로 해석은 이해의 수단으로서의 지위를 가졌다. 그리스인들에게 해석이란 "사상의 표현과 번역"이라는, 의미가 산출되고 수용되는 두 가지 방향 모두를 가리키는 것이었다(21). 그러나 의미의 산출, 곧 내적 담화를 외적 담화로 변경하는 규칙은 수사학이, 의미의 수용, 곧 외적 담화로부터 내적 담화를 추적하는 규칙은 해석학이 고유하게 관장하게 되었다.*

*내멋대로 정리하기는 했는데, 그리스인들의 '해석' 이해와 라틴어 화자들의 '해석' 이해 사이의 공통점 및 차이,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행 등이 친절하게 설명되어있지 않아 자신이 없다. 

2장. 슐라이어마허, 딜타이: 19세기, 더 보편적인 해석학의 성립

1. 슐라이어마허 17세기에 플라톤의 전 대화편을 독일어로 번역한 슐라이어마허는 해석학을 "수사학의 역전"으로, 즉 표현된 것으로부터 표현의 의도를 읽어내는 작업으로 이해했다(32). 슐라이어마허는 언어에 대한 문법적 해석과 심리학적 해석을 구분함으로써, 후자를 통해 저자의 예술적인 개성을 읽어내고자 하는 시도를 도입했다. 나아가 그는 특수한 텍스트에 대한 해석의 기술을 넘어, 보편적인 "이해의 기예"로서 해석학을 정립하고자 했다(34). 이때 그는 이해가 아닌 오해가 기본적으로 더 자연스럽다고 전제한다. 이해는 오히려 예외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해석학은 "이해의 필수조건"으로서, 엄격하게 준수되어야 할 해석의 규칙들을 제공한다(36). 해석학은 텍스트의 재구성을 통해 해석자가 저자보다도 텍스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재구성은 발생의 재구성, 곧 텍스트의 기원을 추적하는 작업까지 포함한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허는 단순히 문자 텍스트에 대한 해석을 넘어 "이해의 모든 현상들에 대해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해석학'을 꿈꾸었다(39). 이를테면 우리는 작품의 객관적인 배경으로서의 시대정신을 해석하고자 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객관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작품의 장르를 이해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작가라는 주관적 존재를 이해하고자 할 수도 있다.

2. 딜타이 슐라이어마허와 달리 딜타이는 "정신과학의 방법론적 정당화 문제"를 고민했다(42). 딜타이는 ①콩트와 밀의 "경험적 실증주의", 곧 정신과학은 그것이 "과학이고자 한다면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②헤겔의 "역사 형이상학", 곧 "역사의 흐름을 [철학적 체계의 조건에 상응하도록] 선험적으로 재구성"하는 "사칭"의 시도 사이에서 양편 모두와 투쟁했다(43).

"딜타이는 정신과학의 방법론적 특수성을 논증하기 위해 역사가 드로이젠이 제기한 '설명과 이해 사이의 구별'을 받아들이고, 이를 기반으로 자신의 계획을 전개해나간다. 자연과학이 현상들을 가설과 보편적 법칙으로부터 이끌어냄으로써 현상들을 설명하는 반면, 정신과학은 외적인 현상들로부터 역사적 개별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정신과학의 방법론은 그렇게 이해의 방법론이 된다."(44)

"이해의 경과과정은 자신 안에서 저자의 표현들로부터 출발해 저자의 체험을 '새롭게 창출하는 것'이다. 표현에서 체험으로, 외부에서 내면으로 되돌아감으로써 이해는 창조 과정을 역전시킨다. [...] 체험, 표현, 이해의 세 화음은 정신과학의 해석학에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된다."(46)

 그러나 후기의 딜타이는 정신과학의 방법론을 넘어 삶 자체에 대한 해석학을 설립하기를 추구한다. 삶 자체가 근원적으로 이해와 설명으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이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보편적으로 해석적이다. "그러나 해석학적 경험의 이러한 보편적 차원[은] 정신과학의 인식론적 기초놓기라는 딜타이의 꿈을 문제시하게 만든다."(48) [해당 인식론적 기초 자체가 해석의 산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3장. 하이데거: 해석학의 실존론적 전회 하이데거에 이르러 해석학은 더 이상 텍스트 해석의 기술이 아닌, 실존에 대한 (자기)해명이 된다. 그롱댕은 하이데거가 수행한 현사실성의 해석학의 원천을 "삶 자체가 해석학적이라고 주장하는 [딜타이의] 이념"(53), 대상성의 의미 구성을 해명하는 후설의 지향성 개념, 해석의 대상으로서의 불확실한 실존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기독교 철학"(54)으로 정리한다. "하이데거에[게]서의 현사실성은 인간 실존의 토대적인 '존재방식'과 그가 또한 '현존재'라고 부르는 것의 존재방식, 즉 '이러한 거기에 피투되어 있음 그리고 그것을 감당해야만 한다는 것(In-dieses-da-geworfen-sein-und-damit-fertig-werden-müssen)'의 현상"을 가리킨다(55). "현사실성은 ①해석의 능력이 있으며, ②해석이 필요하며, ③항상 이미 해석(Auslegung)에서, 특정한 현존재 해석(Daseinsinterpretation)의 한가운데 생존했다.* [...] 현사실성의 해석학이 해결해야 할 과제는 [...] 현사실성을 자기망각성에서 구해내는 것", 곧 "자기소외"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56). 이는 다른 말로, [좋은] 실존[이 무엇인가]에 대한 그릇된 해석을 해체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세인과 여론에 굴복하는 비본래적 현존재와 대비되어 본래적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 해석을 규정하는 능력"을 능동적으로 발휘할 줄 안다(58).

*한국말로 매우 어색한 번역문인데, 인간의 삶 자체가 끊임없는 해석의 과정이라는 뜻 같다. 그렇다면 현사실성의 해석학은 해석에 대한 해석을 수행하는 셈이다.

 [단순한 현존재의 존재론을 넘어?] ⟪존재와 시간⟫의 기초존재론은 기존의 서양철학이 근본적인 존재물음을 망각해왔다고 진단한다. 이에 "결코 직접적으로[는] 드러나[주]지 않는" 존재(60)에 철학자를 접근시켜줄 수 있는 현상학은 해석학으로의 전회를 통해 비로소 "존재주제(Seinsthema)를 억압함으로써 무엇보다도 자신의 유한하고 사멸적인 존재로부터 도주하려" 하는 "현존재의 자기은폐"를 폭로할 수 있다(61).* 이때의 폭로는 "은폐된 현상을 해방시키려 시도하며 겹겹이 쌓인 층위들을 허"무는 해체의 양상을 띤다(62). 현존재의 해석학은 비본래적 존재 방식을, 존재 일반의 해석학은 서양 존재론의 역사를 해체한다.**

*Q. 존재의 은폐가 우연이 아닌 필연이기 때문에 현상학만으로는 부족하고 해석학이 요구된다는 식의 서술의 근거는 무엇인가?

A. 해석=탈은폐이기 때문(66) ➔ 그러나 이는 지평 개념을 운용하는 한 현상학에서도 마찬가지 같다.

**존재 일반과 현존재 사이의 관계는 ⟪존재와 시간⟫을 직접 읽어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현존재의 해석학에서 현존재는 이해하는 존재, 곧 하이데거의 어법에서는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현존재는 언제나 '자기이해(Sich-Verstehen)'를 실천하면서 살아간다. 해석 역시 결국은 "이해의 형성"이다(66). 이로써 하이데거는 기존의 해석학에서의 해석 개념에 두 가지 변화를 불러온다. 첫째, 해석의 대상은 텍스트를 쓴 "저자의 의도"가 아니라 현존재의 기투[기획투사]의 의미다(66). 둘째, 해석이 이해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이해가 있고, 그 다음에 해석이 있다. 이때 이해는 [...] 자신의 전제들을 지각하는 것에 도달한다."(67) 이와 같은 이해는 '앞서 가짐(Vorhabe)'으로 표현되는 이해의 지평[에 대한 선취], '앞서 봄(Vorsicht)'으로 표현되는 이해의 의도 혹은 방향[에 대한 선취], '앞서 잡음(Vorgriff)'으로 표현되는 이해에서의 개념적 선취를 보유한다. 하이데거는 이때 존재와 실존의 개념에 대한 기존의 잘못된 선취를 해체하고자 한다.

"어디에서 존재와 인간인 것에 대한 이러한 선이해가 유래하는가? 그것들은 그 자체로 언제나 명백하게 만들어졌는가?"(69)

 그런데 이와 같은 선취의 구조는 딜타이가 해석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요구한 "이해의 백지상태(tabula rasa)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준다(70). 모든 해석은 "해석자의 사전 기획"으로부터 독립될 수 없다는 순환에 빠진다(70).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러한 필연적 순환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철학적인 숙고의 대상으로 삼는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규준은 이해의 기대구조를 그러한 것이 전혀 없는 것처럼 행하지 않고, 오히려 드러내는 데서 성립한다."(72)

 한편 하이데거의 후기 해석학은 유럽 형이상학이 "존재를 '근거율[충족이유율]'('근거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에 예속"시키며, 기술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고 비판한다. 그롱댕은 하이데거가 이제 존재망각이라는 문제를 현존재의 비본래성 및 본래성 분석이 아닌 충족이유율 비판을 통해 접근한다고 이해한다. "덜 독재적이고, 덜 패권주의적이며, 근거율로부터 덜 지배되는 [...] 존재이해를 추적"하기 위해 하이데거는 시적 언어의 의의를 높이 산다(73).

4장. 불트만: 하이데거 이후 해석학의 성립에 대한 암묵적인 기여 불트만은 저자의 심리를 이해함으로써 텍스트를 이해하고자 한 딜타이의 시도를 평가절하하면서, "저자의 주관적인 창작과정이 아니라 텍스트가 다루는 주제[사태](Sache)"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82). "불트만이 보기에, 한 텍스트가 다루는 주제[사태]를 목표로 하는 이해는 해석자의 선이해에 의해 주도된다는 점을 피할 수 없다. [...] 이해는 여기서 [...] 텍스트의 주제[사태]와 독자의 사정[사태이해](Sachverhältnis) 사이의 대화로서 사유되었다."(82-83) 이로써 이해는 참여를 특징으로 가지게 되고, 텍스트가 독자에게 미치는 작용은 해석 대상이 되는 사태의 일부로 편입된다. 이처럼 불트만은 이해를 "나의 실존으로부터 출발"해 "텍스트를 통해 [...] [내] 실존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것으로 재개념화함으로써 리쾨르에게 영향을 미친다(84). 그롱댕은 불트만을 "해석학적 순환에 대한 하이데거의 견해를 해석학의 전통적 물음에 특수하게 적용한 최초의 인물"로 평가한다(86). 

5장. 가다머: 이해사건의 해석학 한스-게오르그 가다머는 "어떤 선이해로부터 자신의 출발점을 취하지 않을 수 있는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다"(91)고 통찰한 하이데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음으로써, "어떤 백지상태의[백지상태라는] 객관주의적 이상"에서 "이해의 장애"(90)로 이해되어온 해석학적 순환을 재평가하고자 하면서 정신과학의 방법론 정초라는 딜타이의 문제의식을 계승한다. 그에 따르면 "객체에 대한 관찰자의 거리에 기반을" 두는 방법은 정신과학적 진리를 발견하게 해줄 수 없다(92). 왜냐하면 "관찰자는 항상 어떤 방식으로든 그가 이해하는 것에 연결되어" 그것에 참여하기 때문이다(92). 그러므로 정신과학은 자연과학의 방법과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진리를 찾아나서야 하며, 그 방식 역시 모종의 정당성을 지닌다.

"이해를 이런 방식으로 파악하는 견해는 하이데거로부터 계속 유래하는 것이다. 이해는 항상 자기이해를 포함한다."(92)

 그롱댕은 ⟪진리와 방법⟫을 요약하는 방식으로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을 해설한다. 가다머에 따르면 딜타이는 "주관성의 모든 함축을 객관성의 침해로 혐오"함으로써 결국 정신과학의 고유한 진리 추적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연과학의 이상에 굴복하고 만다(93). 가다머는 자연과학의 이상에 인본주의[인문주의](Humanismus) 전통을 대비시킨다. 인문주의는 (주체 자신의 인품이나 능력과 무관한) 방법의 적용이나 측정이 아닌, (주체 자신의) 보편적 관점 획득 또는 교양 축적, 공통감각의 형성, 판단력의 향상을 이상으로 삼는다. "해석자로부터 독립적인 인식"이 아닌, 말하자면 해석자의 지평과 혼융되어 생겨나는 인식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94).

 진리 일반을 자연과학적 진리로 제한하기를 거부하는 시도의 연장선에서 가다머는 과학적 방법론뿐만 아니라 예술작품 역시 진리에 대한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술작품의 경험에서 주관은 예술작품이 가능케 하는 놀이(Spiel)에 참여하지만, "작품이 자신의 객관성 안에서 자신에게 강요하는 것에 정확히 복종함으로써만" 그럴 수 있다(97). 작품은 표현된 대상의 본질을 드러냄으로써, 그 대상의 존재를 그것이 현실에 있을 때보다 증대시킨다. 이와 같은 진리경험의 과정에서 주관은 자기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획득한다. "작품이 나의 시각에 굴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반대로 나의 시각이 예술작품의 현재에서 확장되어야만 하고, 심지어 변화되어야만 한다."(98) 가다머는 이렇게 예술작품에서 경험되는 진리가 정신과학에서 고유하게 경험되는 진리와 같다고 상정한다. "정신과학에서 진리는 산정할 수 있는 방법의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엄습하며 우리에게 진리를 발견하도록 하는) '사건'의 사태이다."(99)

 기존의 정신과학은 선입견에 대한 계몽주의적 반감을 이어받아 그것을 무조건적인 제거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가다머가 생각하기에 "전통과 권위에 기반을 둔 [...] '정당한 선입견들'"이 존재한다(101). 애초에 그 어떤 전통으로부터도 독립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선입견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인식의 이상"은 우리의 이해에 강력하게 작용하는 역사성을 망각하기 때문에 헛되다(102). 물론 정당한 선입견과 비판되어야 할 선입견 사이의 변별이 요구되며, 이 요구에 가다머가 일차적으로 내놓는 대답은 시간적 간격이다. 선입견의 정당성은 충분히 시간이 흐른 다음 증명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다는 것이다.

 비슷한 견지에서 가다머는 있는 그대로의 과거에 대한 객관적인 역사적 이해가 가능하며, 그 이해는 과거가 현재에 미치는 영향의 역사와 독립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도 거부한다. 모든 역사적 이해는 영향사 속에서 이루어지며, 우리가 바로 그것의 영향 아래에 놓이게 되는 영향사의 정체는 전적으로 투명하게 파악될 수 없다. "가다머가 제시하는 희망의 본질은, 우리 의식의 본질에 합당한 제한성과 유한성을 인식하는 것이 바로 우리를 자기교정과 새로운 경험에 개방적으로 유지되도록 인도한다는 것이다."(107) 그러므로 "이해는 주관의 [완벽히 자유로운] 활동성[능동성]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영향사적 사건", 전통의 전승에 대한 참여이다(108).

"과거와 현재 사이의 이러한 지속적인 매개'지평혼융'이라는 가다머 구상의 원천이다. 과거를 이해한다는 것은 현재의 지평을 그 편견들과 더불어 넘어선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과거를, 그 안에서 과거와 현재의 지평들이 서로 융합하는 현재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다. [...] 그러나 현재와 과거의 이러한 융합은 또한, 더 근본적으로 해석하는 자와 그가 해석하는 것의 융합이다. 예술 경험은 우리에게 예술작품의 이해가 융합의 사건이라고 가르쳤다 이때 더 이상 무엇이 객체로부터 자라나며, 그리고 무엇이 이해하는 주체로부터 자라나는지 올바로 구별되지 않는다. 이 둘은 주체와 객체의 (하나의) 성취된 만남[주체의 지성에 대한 객체의 충전 또는 걸맞음(Angemessenheit)]에서 융합한다."(109)

 융합으로서의 이해는 반드시 적용을 동반한다. 왜냐하면 "이해란 어떤 [과거의 조건에서 발생한] 의의(Bedeutung)를 현재에 적용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기 때문이다(110). 이해에서 현재성의 관여는 슐라이어마허나 딜타이의 생각과 달리 이해의 타당성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의 가능조건에 해당한다. 가다머가 주목하는 적용의 대표적인 예시는 번역이다. 번역은 언어적 대상에 대한 언어적 조작이다. 그런데 가다머에 따르면 번역뿐만 아니라 모든 이해가 언어적이다. "어떤 방법으로든 언어화(Versprachlichung)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는 이해란 존재하지 않는다."(113)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만 세계에 대한 인식을 획득할 수 있으며, "언어가 이미 사물 자체의 존재를 나타내는 표현"이다(117). 나아가 언어는 개방적이기에*, "번역과 대화는 원칙적으로 항상 가능하다. [...] 언어의 한계에 대한 모든 비판은 심지어 언어의 내부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114)

*매우 큰 주장인데, 근거 제시가 빈약하고 적어도 해설만 읽어서는 설득력이 없었다.

"이해될 수 있는 모든 것[세계]은 언어로 공표되는 하나의 존재이다. 내가 무엇이 어떤 것이라고 이해하려 시도하자마자, 이미 언어인 동시에 그로부터 이해될 수 있는 어떤 존재를 찾는 것이다."(115)

6장. 베티, 가다머, 하버마스: 해석학과 이데올로기 비판 이탈리아의 법학자 에밀리오 베티는 선이해에 대한 가다머의 옹호가 주관주의 또는 자의적 해석의 가능성을 낳는다고 비판한다. "그는 가다머가 어떤 작품의 의의, 즉 저자의 관점으로부터 형성되는 근원적인 의미를 유의미성(Bedeutsamkeit)과 혼동한다고 비난한다. [...] 그의 눈에 해석학의 본질적인 과제는 (주관주의로 인도하게 되고 마는) 현재에 의미를 적용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저자의 의도를 다시 수립하는 데 있다."(123) 그러나 가다머는 과연 "작품의 (근원적인) 의의와 (현행적인) 유의미성"이 정말 구별될 수 있는지 되묻는다(124).

 한편 위르겐 하버마스는 사회과학이 가질 수 있는 비판 및 해방의 역량을 강조하면서 "순수한 실증주의적 견해에 굴복하는 사회학자들과 투쟁"(125)한 학자로 사회탐구자와 탐구 대상인 사회가 독립적일 수 없으며, 모든 사회적 행위는 언어적이고, 서로 다른 언어들이 서로 통할 수 있는(porös)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는 점에서 가다머와 연대한다. 그러나 하버마스에 따르면 가다머는 "인식의 전통 혹은 어떤 주어진 공동체가 지탱하는 이미 존립하는 합의를 근거로"(128) 언어적 의사소통의 힘을 지지한다면서, 그와 같은 합의들은 "전통에 대한 비반성적 귀속성을 동요"(129)시키는 이데올로기 비판의 대상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하버마스의 지적은 두 가지 관점에서 문제적이다. 그롱댕은 "사람들이 주어진 전통의 경계들을 이데올로기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넘어설 때, 정말로 해석학적 우주를 떠나야만 하는지" 그리고 "반성을 통해 어떤 전통을 의식하는 것이 전통의 결정을 완전히 위반하는가"를 묻는다(131). 가다머 역시 "'사태에 적절한' 선입견들을 만들어내는" 비판의 과제를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31). 이데올로기 비판을 수행한다고 해서 전통을 완전히 초월하는 오만한 조망의 지위를 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열심히 이데올로기 비판의 시야를 방어한 사람은 아마 자신의 담화가 가장 명백하게 이데올로기화된 사람일 것이다."(134) 하버마스는 가다머의 비판을 건설적으로 수용해, 후기에 고안한 의사소통적 행위의 이론 및 담론 윤리에서는 이데올로기 비판보다 "언어의 화용론적 전제들"에 주목한다(135).

7장. 리쾨르: 해석들의 갈등에 직면해 제시된 역사적인 자기의 해석학 폴 리쾨르는 반성을 통한 자기인식의 한계를 강력하게 주장함으로써 (후설 역시 그에 귀속되는 것으로 판단되는) 반성철학에 반대한 뒤, 현상학을 해석학적으로 전회할 것을 요구한다. 리쾨르의 해석학적 현상학은 의미물음의 중요성과 의식과 [의식에 낯선] 의미 사이의 거리, 사태에 비한 언어의 파생성을 기존의 현상학으로부터 계승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현상학의 전제들은 포기된다.

"이때 해석학이 포기하는 것은 ①연역적인 기하학의 이상에 따라 배열된 학문성을 지향하는 후설적인 이상, ②현상들에 대한 접근에서 직관의 우위, ③스스로 내재적이며, 그것으로 투명한 의식의 데카르트적이고 후설적인 우위, ④의식에서 최종적 기초놓기(Letztbegründung)[궁극적 정초]의 이념, ⑤후설 현상학의 한가운데서 자기반성을 여전히 지나치게 이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 존재자에 대한 모든 질문은 이 존재자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다 [...] 그러나 이 의미는 처음에 은폐되어 있고, 투명하지 않으며, 해석학적 노력을 통해 규명되어야 한다."(145-146)

 세계경험의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은 신뢰의 해석학(Hermeneutik des Vertrauens)의혹의 해석학(Hermeneutik des Misstrauens)으로 나뉜다. 신뢰의 해석학은 해석학을 통해 그 심오한 목적론적 진리가 비로소 드러나게 될 의미의 소여를 신뢰한다.* 반면 의혹의 해석학은 "의미가 의식을 오도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제시된 것과 같은 의미에 직면해 경계"심을 보인다(149). 의혹의 해석학의 대가들에는 "포이에르바하,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그리고 구조주의"에 개입하는 학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신뢰의 해석학의 목적론에 반해 환원주의적 설명 방식을 추구한다(149).** 리쾨르에 따르면 이들의 "파괴는 의식에 대해 치료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그 경우에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자아가 의혹의 해석학에서 [다른 것으로 환원되어] 사라진다면, 단지 그렇게만 스스로를 더 명백히 재발견하고자 그의 환상들로부터 벗어난다."(150) 이런 점에서 리쾨르는 "의미와 이해하는 사람[주관] 사이의 혼융"을 말하는 가다머에 반해, "해석의 과제를 두말없이 [정신분석, 구조주의 등 의혹의 해석학자들이 추구한] 객관화로서 맞세운다."(151)

*어떤 의미에서 신뢰의 해석학이 의미의 목적론을 표방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빈약하다.

**의혹의 해석학과 환원주의적 설명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설명이 빈약하다. 의혹의 해석학이라고 해서 꼭 환원주의적 설명 을 선호할 이유는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리쾨르가 두 해석학 중 한 편에 서는 것은 아니다.] 리쾨르는 두 유형의 해석학을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보며 '해석의 해석학적 아치(Bogen)'에 대해 말한다. 의미를 이해하고자 하는 가다머적 신뢰와 "의미의 직접적 명백성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 "의식의 환상을 폭로하는 설명"과 같은 [초기] 하버마스적 비판변증법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152). 리쾨르는 "설명과 이해의 이러한 변증법"을 텍스트 해석에 적용한다(153). 텍스트는 일차적으로는 구조주의적으로 해석되어야 하지만*, 구조주의는 텍스트를 폐쇄된 통일체로 본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왜냐하면 텍스트는 "의식이 거주할 수 있도록 만드는 어떤 세계를 개방하기 때문이다."(154) 여기서 "의미를 확장하려는" 신뢰의 해석학의 역할이 두드러진다(154). 의미에 대한 신뢰를 통해 주관은 자기 자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획득할 수 있다**.

*, ** 이 두 과정 모두에 대한 설명이 빈약하다.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텍스트로 간주될 수 있다. 문건들뿐 아니라 개인적인 것부터 집단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인간적 역사와 행위도 텍스트이다. 이는 텍스트처럼 읽힌다는 정도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로부터 추론되는 이념은 인간적 현실에 대한 이해가 텍스트들과 이야기들을 통한 우회로 위에서 성장한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정체성은 본질적으로 서사적 정체성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1980년대에 전개된 이야기(récit, Erzählung) 이론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모든 반성적 철학의 선도적인 물음에 새로운 대답을 가능하도록 만들었다."(156)

 리쾨르에 따르면 주체는 자기 자신에게 투명하지 않지만, 서사를 매개로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여기서 리쾨르는 인간과 관련된 하나의 아포리아에 집중한다. 바로 인간이 스스로를 투명하게 꿰뚫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유한 세계를 형태화하는 겸손하지만 실제적인 '능력들'"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157). 리쾨르에게 인간은 "능력 있는 동물(homo capable)"이다(158). 역사의식의 해석학은 이 아포리아를 봉합하고자 하는 시도다. 우리는 언어적, 역사적 세계의 상속자이기 때문에, 가다머가 지적한 것처럼 최초에는 해석 대상과의 거리두기를 시행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전통의 상속자인 만큼 우리가 역사로부터 물려받는 서사적인 정체성은 결코 한꺼번에 확립되거나 종결된 것이 아니다. 이 정체성은 또한 거기에 기여할 수 있는 응답에 달려 있다. 여기서 강조는 응답하는 능력과, 그것을 특징짓는 행동주도력initiative에 놓여 있다. 이때 사유되는 것은 응답하기를 요구받는 '능력 있는' 인간의 윤리적 차원이다. [...] 반성철학의 출발 물음으로서 '나는 누구인가'는, 윤리적인 물음보다 더 적지 않은 해석학적 물음인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자리를 비켜주게 된다."(160) 요컨대 우리는 역사를 상속받지만, 그 안에서 [해체의 능력을 발휘하고] 주도적으로 행동하며 스스로의 정체성과 세계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에 수동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생각에 입각해 리쾨르는 "인간의 능력들에 관한 현상학"(161)을 시도하고, 궁극적으로는 "가능성과 코나투스의 형이상학[존재론]"(163)을 목표로 삼는다.

8장. 데리다, 가다머: 해석학과 해체(주의) 자크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해체주의적 이념과 소쉬르의 구조주의를 받아들여, 유럽의 현재중심적 형이상학을 비판한다. 기의는 기호를 통해서 사유될 수밖에 없지만, 둘 사이에는 단순한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기호가 기의에 도달하는 데에는 (무한한) 시간적 지연이 있다. "데리다에게 존재는 단지 차연(différance)의 성과에 불과"하며, "텍스트 외부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169). "기호들의 외부에서 의의(Bedeutung)의 실제적 현실이라는 이념"은 불신 및 해체되어야 한다(170). 기호는 자기 자신만을 지시하며, 따라서 기호들의 세계는 기의에 가닿는 일 없이 폐쇄되어있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이유에서도 기존의 이념은 해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현실에 대한 타당한 해독이 가능하다고 맹신하는 기존의 이념은 "타자에게 자신의 사고방향을 전적으로 강요하며 그를 점유하고자 하기 때문이다."(170)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철학마저 "존재의 의미, 의의, 진리에 대한 물음을 꾸준히 제기하고, 아울러 존재의 의미와 진리를 어디에선가 찾을 수 있는 하나의 소여성으로 간주"한다는 이유로 해체하고자 하고, 대신 "해석은 어떤 의의의 발견이 아니라, 오히려 관점과 가면의 놀이에 대한 동의"라는 니체적인 사상에 개입한다(177).

"하나의 완전하며 직접적인 현재라는 이념은 구조주의 이래로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172)

 자신이 수행한 강연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데리다의 입장에 대해 가다머는 첫째, 모든 해석은 "결코 완결되지 않는 어떤 영향사에서 전개되므로" 데리다의 차연 개념과 영향사에 대한 자신의 강조 사이에 서로 접합되는 지점이 있다고 응수한다(177). 둘째, "하이데거의 탁월함은 그가 니체의 가치 개념을 서양 형이상학의 연속성으로 환원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에 놓여 있"으므로, "측정할 수 있는 가치와 기술적인 유용성에 제한되지 않는 존재에 대해 반성함으로써 니체보다 더 멀리 나아갔"다는 점에서 하이데거는 니체를 능가한다고 지적한다(179).

 데리다의 비판은 그럼에도 이어진다. 데리다는 가다머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 대화에서 명증한 상호이해를 가능케 하는 선한 의지의 상정은 [그 자체로 해체의 대상이 돼야 하는] 형이상학이 아닌가? 둘째, 가다머가 목표로 삼는 이해는 이해의 대상을 "하나의 체계로 동화시키는 것이 아닌가?"(182) 셋째, 그리하여 타자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타자의 타자성을 훼손하고 그를 지배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이에 가다머는 데리다의 비판의 대상이 된 자신의 강연은 대화의 성과와 무관하게 "형이상학이 아니라 다만 이해되기 위해 입을 여는 사람,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려고 귀를 여는 사람이 지니는 기초적인 이해의 준비자세와 이해 능력"이라고 반응한다(184).

"여기서 데리다는 이해를 다른 사람들에게 행사되는 폭력의 어떤 형식과 동일하게 설정한다. 이해하려는 의지가 다른 사람들을 굴복시키기를, 내가 그에게 부과하며 그의 특수성을 무시하는 사고구성에 적응하기를 강요하는 것은 아닌가? [...] 가다머에게 이해는 적어도 항상 가능한 것으로 머무는 반면, 데리다에게 이해는 진실로 언제든 제대로 가능하지도 않으며, 대개는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184-185)

 그러나 궁극적으로 가다머는 데리다의 비판을 건설적으로 수용한다. 그는 자신의 이해 개념이 타자의 특수성, 이질성을 해치지 않는지 검토한다. 그리하여 "이해는 전유라기보다 오히려 타자와 그들의 배경들에 대한 개방"이 된다(188-189). 1981년 파리에서 성사된 데리다와의 만남을 경유해 언어의 보편성보다 [또는 언어와 보편성만큼이나] 언어의 한계에 더 주목하게 된 것이다. 데리다 역시 가다머가 사망한 후 "생존자가 죽은 친구의 음성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표현해야만 하는, 사후 대화라는 이념"을 내세운다(191).

9장. 로티, 바티모: 탈근대적(포스트모던적) 해석학 리처드 로티와 잔니 바티모는 모두 가다머의 언어 이해에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우리의 이해가 우리 언어를 통해 도달될 수 있는 어떤 존재 또는 실재에 관계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망상"이라는 탈근대적 철학에 개입한다(197). "그들은 모든 것이 [...] 우리가 초월할 수 없는 언어에 종속적이라는 이유로 [...] 사고와 현실의 일치라는 이념을 포기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로티를 실용주의로, 그리고 바티모를 쾌활한(fröhlich) 허무주의로 이끈다."(197)

 로티는 콰인과 쿤, 가다머에게 골고루 영향을 받아 인식이 실제 세계에 가닿을 수 있다는 신뢰를 폐기하고 "인식론과 과학이론의 영역과 그 전체 시도가 해석학적 사고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99). "해석학은 우리가 (현실과의 일치라는 의미에서) 진리라는 이념이 없는 채로 살도록 가르친다. 진리를 향한 추구가 교양과 대화의 이상들을 높이 평가하는 하나의 문화에 자리를 비켜"주기 때문이다(201). 그러나 로티는 모든 존재론을 거부하고 유명론에 개입함으로써 가다머와 결별한다. 가다머에게는 언어가 현실에 대한 사고를 가로막지 않았으며 "오히려 반대로 언어는 그 안에서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요소"였기 때문이다(204).

 로티가 가다머의 철학을 동원해 반존재론적 유명론에 이르는 한편, 바티모는 상대주의에 이른다. 그에 따르면 해석학은 허무주의적 존재론으로 추동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허무주의는 각각의 진리가 해석, 전통, 언어에 종속적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 존재 자체는 무이다. 존재는 철두철미하게 우리의 언어와 해석들에 환원되기 때문이다."(206-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