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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장이지, <레몬옐로>

장이지, ⟪레몬옐로⟫, 문학동네, 2018.

 

 논문을 쓰고 있기 때문에 '여유'를 부려선 안 된다고 생각해서 당분간 문학을 손에 쥐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능률이 더 오른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공허해진 마음에 가만히 누워만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억눌려있던 무엇인가를 분출하듯, 굳이 가던 길을 틀어 역내 서점의 문학 코너를 뒤졌다. 밝고 맑은 이미지를 주는 표제어에 이끌려 이 시집을 집어들자마자 왠지 마음이 놓이는 것처럼 느꼈다. 문학은 마치 저녁밥처럼, 내가 생업으로 가장 바쁠 때조차 시간을 내서 향유해야 하는 일종의 생필품이 된 것인가 하고 생각해본다. 나에게 철학은 노동이고, 문학은 노동의 이유 같다.

 블로그에서 시집에 대한 독후감을 쓸 때마다 앵무새처럼 덧붙이지만, 나는 시를 잘 모른다. 전문적인 비평을 할 재간이 없으니 그저 내가 느낀 바를 간명하게 이야기하고 말고자 한다. 좋았던 점부터 말하면, '원로 위원회의 내정간섭'이 존재하는 자기의심 또는 자기검열의 공간인 '플랫'의 형상화가 인상깊었다. 시적 화자, 아마 시인의 내밀한 공간이었을 텐데도 머나먼 타인인 내게까지 무척 설득력이 있었다. 내 안에도 플랫의 변양태가 부지불식중에 나의 "세계가 꾸는 꿈"으로서 작동하고 있을까?(12). 그렇다면 나 역시 대형 전광판에 나의 사적인 생각들을 광고당하고, 이어지는 원로들의 손가락질을 피해 달아나느라 바쁜 시절을 보내왔고 또 보내고 있겠지? 자연스럽게 가장 좋았던 시는 ⟪암시-플랫⟫와 ⟪관통당한 사람-플랫⟫이었다.

 "대형 전광판에는 내 생각이 기입되고, 당연히 내가 어디로 갈 것인지도 기입된다. 위원회는 나를 추격할까? 아마도! / 나는 생각을 감출 수 없다. 아니, 나는 내 의지를 의심한다. '구체 관절 인형'만 해도 그렇다. 그것은 혹시 표절이 아닐까?"(⟪관통당한 사람⟫ 중, 28)

 그러나 시인의 남성적인 시선에 압도당하는 시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남자를 집으로 초대하면 당연히 섹스를 하자는 뜻인 것으로 단정지어지거나(58), 미인을 눈앞에 두고 밥을 먹이는 게 가난으로부터의 탈피와 성공의 징표인 듯이 서술된 장면(84) 등이 시집 전체에 대한 몰입과 일종의 신뢰성을 깨뜨렸다. 시인이 시집 말미에서 문단 내 성폭행 사건들을 언급하며 싣기가 조심스러웠다고 말한 ⟪수유리 흰 달⟫에 대해서는 오히려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다. 남성이 자신과 모텔에서 잔 여성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문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당연히 어떤 권리를 가지고 문학 속으로 편입될 수 있는 흔하디 흔한 사태다. 한국 사회와 문단이 지향하는 페미니즘이 '남성이 섹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상황' 자체를 금기시하고자 한다면 건전하지 못할 뿐더러, 애초에 달성이 불가능한 목표를 관철하는 것일 테다. 다만 남성의 시선에 의해 여성의 생각과 존재가 완전히 압도되고 손쉽게 재단되는 것은--이 또한 흔하디 흔한 사태임에도--관조하고 말기 힘들다. 남성 작가는 여성이 대상화되지 않고도 사랑의 참여자로서 재현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물론 페미니즘도 하나의 관점이고, 애초에 여성이니 남성이니 하는 것은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수많은 방식들 중 하나일 뿐이다. 세계는 여러 관점들을 향해 열려있다.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그것도 각 가능성에 고유한 정당성을 할애하면서 담지한다는 점이 (유한한 인간에게는 자주 아리송한) 세계의 본질이다. 자아와 자아가 겪는 수많은 체험들 또한 세계와 구성적 관계를 맺는 만큼 마찬가지로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담지하며, 그 체험들은 페미니즘과 부합하지 않는 시선에서 이해되고 표현될 수 있다. 시인 또한 "선한 것만이 문학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변론을 펼친다(122). 그러나 그런 리스크를 떠안을 거면 더 큰 윤리를 겨누거나 적어도 그러고 있는 것처럼은 보여야 하는 게 아닌가. 이 시집에서는 그런 기획을 보지 못해, 몇몇 대목들에 대해서는 자비로운 해석을 수행하기가 힘들었다.

 한자어가 자주 사용되는 무거운 문체와 라이트노벨, 게임 등에서 차용된 듯한 내용 사이의 부조화 또한 독서의 흐름을 종종 끊었다. 서브컬쳐적 요소를 소위 순수문학의 장 안으로 끌어들이는 시도 자체는 재미있었다. 그러나 그처럼 통통 튀는 것이 자연스럽게 녹아들 만한 생기발랄한 토대가 더불어 조성되어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인상 비평에 그쳐 아쉽지만 인상들이라도 정리해두는 것이 어딘지. 가끔은 독서 자체보다도 독서한 바에 대해 쓰는 일이 더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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