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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현상학

칼 심스, <해석의 영혼 폴 리쾨르>

칼 심스, 김창환 옮김, ⟪해석의 영혼 폴 리쾨르⟫, 앨피, 2009.

 

 과장을 보태지 않고 성인이 된 이래로 하루도 빠짐없이 악의 문제에 대해 생각했다. 인간이 악 앞에서 얼마나 연약한지, 왜 그렇게 연약한지. 반성은 어느 정도까지 악을 만회할 수 있게 해주는지. 같은 잘못을 한 번 더 저지른다면 기존의 반성은 무의미해지는지. 죄인은 자신을 사랑해도 괜찮은지. 마땅한 죄의식의 양은 어떻게 측정되는지.

 그런가 하면 악에 대한 복수는 어디까지 윤리적인지. 국가의 공적 복수인 형벌은 죄수의 자유를 어떤 방식으로 빼앗아야 하고, 죄수의 인권을 어떤 방식으로 보호해야 하는지. 무지 때문에, 생계 때문에, 정신장애 때문에, 폭력적인 환경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저질러진 죄들은 얼마나 동정 받아야 마땅한지. 아니면 그저 똑같이 죄스러운지. 잘못에는 대개 개연적 맥락이 있다는 사실과, 잘못은 그럼에도 잘못이라는 엄연한 사실은 어떻게 조화되어야 하는지. 흄의 말마따나, 설령 자유의지가 없어 악행이 미리 결정된 채로 저질러졌다 해도 그에 대한 본능적인 불쾌감은 잔존하므로 이 조화에 아무 무리가 없는 것인지.

 한편 악에 대한 용서는 규범화될 수 있는지. 가해자가 아닌 자가 구하는 용서는 얼마나 의미있는지. 무고한 자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사실이, 그가 신의 아들이라 한들 다른 인간의 죄까지도 덜 수 있는지. 혹시 죄는 철저히 사적인 것이 아닌지. 무릎 꿇은 빌리 브란트가 홀로코스트의 처참함을 조금이라도 덜어내는지.

 보다 근본적인 물음으로 나아가면, 니체의 말마따나 애초에 악이 있기는 한 것인지. 있다면 누가 무엇을 악이라고 규정할 수 있고 하는 것인지. 악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매일 같이 미덕과 순수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주변의 몇몇 사람들의 강인함과 인내심은 어디에서 오는지. 나 또한 정신을 수련하면 그들처럼 될 수 있는지. 항상 선을 향해있으려면 정신은 어떻게 수련되어야 하는지.

 처음에는 악을 행하기도 당하기도 한 나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로부터 비롯된 의문들이었다. 하지만 끊임없이, 달리 말해 쉴 틈 없이 공인의 악행에 대한 기사들이 터져나오고, 그에 대한 해명과 비판과 반박과 비난 댓글이 쇄도하는 미디어의 영향으로 인해 어느새 악의 문제는 나 자신만의 문제가 아닌 한국 언론과 사회 일반의 문제이자 인류 전체의 문제로 여겨지게 되었다.

 나는 악의 문제를 사유함에 있어 높은 확률로 매우 유용했을 시작점을 의도적으로 놓쳤다. 21살 때 종교학과에서 개설된 어느 전공수업을 홀리듯 신청해 듣고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기독교 신앙을 저버리게 된 것이다. 신을 믿지 않게 되자 저 의문들은 복잡성과 모호함의 베일을 몇 겹씩 더 입게 됐다. 저 의문들 가운데서 지금의 내가 확신을 가지고 대답할 수 있는 의문은 단 한 개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대답하기를 포기해도 괜찮은 의문 또한 단 한 개도 없다. 살아가는 한 나는 악의 현상과 본질을 고민해야 한다. 왜냐하면 악은 도처에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가장 깨끗하기를 절실하게 바라는 내 가슴속에조차 악은, 슬프게도 항상적인 가능성으로서 이따금은 저주스러운 현실성으로서 자리잡아왔다.

 그랬으므로 폴 리쾨르에 대한 SEP 아티클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약간의 전율을 느꼈다. 내가 가졌던 의문들이, 물론 내가 의문시해온 방식 그대로 제기된 것은 아니었지만 거의 고스란히 취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쾨르는 현상학자들 가운데서 레비나스 못지않은 진지함으로 인간의 유한성과 그에 대한 책임의 문제를 받아들인 사상가였다. 게다가 그는 2차 세계 대전의 포화 속에서 ⟪이념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후설리안이자, 삶의 의미를 좋은 이야기와 연결지어 생각한 문학 애호가였다. 그에 대한 입문서를 내가 언젠가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칼 심스의 ⟪해석의 영혼 폴 리쾨르⟫는 리쾨르의 저서들을 차례대로 하나씩 요약해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방식으로 쓰여있다. 이런 종류의 입문서에는 장단이 있다. 장점은 저자의 특수한 해석이 가미되었을 확률이 농후한 빅 픽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되는 대신, 철학자 본인이 실제로 무엇을 말했느냐를 비교적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단점은 각 저서마다의 구체적인 디테일에 집중하게 되는 나머지, 독자가 능동적으로 이해의 큰 틀을 정비해가며 독해하지 않는 이상 저서들 사이의 통일성을 간파하기가 쉽지 않고, '그래서 리쾨르가 해결하고 싶어했던 철학사적 아포리아는 뭐지?'라는 중대한 물음에 답하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물론 역자 그리고 저자 모두 리쾨르의 목표는 기존 철학사의 전통을 해체하기보다 존중하는 가운데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는 또는 이야기가 될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을 윤리학적으로 탐구하는 데 있다고 강조하지만 솔직히 말해 추상적이고 막연하게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직접 리쾨르의 저서들을 읽고자 하는 나의 입장에서는 개별 저서들에 대해 전문가가 공들여 작성한 요약문을 하나 간직하는 편이 추후 오해의 가능성을 현저히 줄여주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감사하고 만족스럽게 읽었다.

 말했듯이 리쾨르 사상의 세부사항까지 파고들어가는 책이기 때문에 전체를 요약하기는 부담스럽고, 서두에 내가 장황하게 던졌던 악의 문제와 관련해서 기억해두고 싶은 리쾨르의 답변들 위주로 내용을 정리하려 한다. 


 악에 대한 리쾨르의 접근은 선악의 기준을 객관적인 시선에서 공식화하려는 규범윤리학의 그것과 다르다. 대신 리쾨르는 예측 불가능한 세계에 살아가는 오류 가능한 인간의 주관을 현상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탐구의 첫 발판으로 삼는다. 그는 인간의 존재를 의지적인 것--결정, 몸의 움직임, 동의--과 비의지적인 것--동기 부여, 심신의 비의지적 습관, [정신 외적인 압력의] 필연성의 통일체로 정의한다. 이어 전자, 즉 자유의지와 후자, 즉 육화에 따르는 비자발적 정념이 불균형을 이룰 때 혹은 전자가 후자에 굴복할 때 악이 발생한다는 낡았지만 여전히 설득력 있는 설명을 내놓는다. 그리고는 인간이 악을 체험하는 경로들을 '흠([오염]defilement)'과 '죄(sin)', '허물([양심의 가책]guilt)'로 나눈다. 흠은 일종의 더럽혀짐 즉 불순해짐에 따르는 두려움과, 죄는 특히 신과의 관계에 따르는 규범의 위반과, 허물은 악행에 따르는 양심적 자기비난과 연관된다. 허물의 계기는 앞선 계기들인 흠과 죄를 거쳐서만 비로소 등장한다.

 "양심이 중요한 이유는 악을 측정하는 감각을 도입하기 때문이다. 죄는 절대적이다. 즉,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죄는 있거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일단 허물로 나아가면 우리는 악의 다양한 '정도'를 느낄 수 있으며, 허물의 정도를 측정함으로써 우리가 저지른 악행을 느낄 수 있다. 더 나아가 허물은 종교적인 것에서 윤리적인 것으로의 움직임을, 신에게 대답할 수 있는 존재에서 타인에게 대답할 수 있는 존재로의 움직임을 표시한다."(56)

 흥미로운 것은 리쾨르가 '몸의 소유' 또는 '정신의 육화'라는 사태를 철학적 문제가 아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신비'로 사유한다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정념은 몸에서 기인하고 몸은 존재에서 본질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타락의 가능성은 [...] 인간의 구성 자체에 내재한다."(65, 강조는 필자) 이와 같은 결론은 아담과 이브의 실낙원 신화에 반영되어 있다. 인간의 비의지적인 면모에 대한 리쾨르의 관심은 그로 하여금 데카르트적 코기토를 비판할 수 있게 해준다.

Q.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 사이의 불균형의 정도를 측정할 수 있게 해주는 비지성적 척도라고 소개된 상상력, 성격, 감정에 대한 서술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cf. "상상력을 통해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듯이 나 자신을 본다. 성격을 통해 나는 나머지 인류에게서 나 자신을 구별해 낸다. [그럼에도 성격은 인간성의 한 단면이다.] 감정을 통해 나는 타인의 좋고 나쁜 특성을 인식한다."(66)

 악에 반대해 리쾨르는 "정의로운 제도 속에서 타인들과 함께 그리고 타인들을 위하여 '좋은 삶'을 목표로 삼는" 윤리를 주장한다(189). 리쾨르 철학의 핵심적인 탐구 주제 중 하나인 '이야기'--문학적 허구든, 역사적 서술이든, 타인의 삶이라는 서사이든--는 이 윤리의 실현을 가능케 한다. 특히 이야기 속 영웅들과 자아 사이의 동일시는 충성심과 성실함을 가르쳐주며, 도덕적 존재의 전제 조건인 "자기-항구성[성격의 지속]을 입증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약속 지키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게 만든다."(194, 강조는 필자) 

 "이야기가 기술description과 규정[규범화]perscription을 매개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무엇을 의미하는가]? 행동하기 위해서 나는 먼저 세계 속에 주어진 상황을 기술해야만[이야기해야만] 한다. 그 이후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결정해야 한다. [...] 이야기는 상황을 [반드시 윤리적 편파성을 가지고, 비중립적으로, 특수하게] 평가하고, 도덕적 의미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한다."(192)

 약속 지키기의 중요성을 구성하는 더 심층적인 요소는 바로 그것이 타인을 소외시키지 않게 해준다는 데 있다. 이야기를 통해 자기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탐구하는 일, 즉 이야기를 통한 자기이해에의 노력은 결국 이야기 속 다른 타인들을 돌보겠다는 책임감으로 귀결된다. 나의 삶과 타인의 삶은 한 이야기의 상이한 가닥들로서 서로 얽혀 공동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리쾨르는 개개인의 윤리학에서 그치지 않고 사랑의 계율을 앞세우는 정치사상을 확립한다. 공리주의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 사회의 약자들을 그들이 약하면 약할수록 더욱 무자비하게 희생시킨다.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과 '네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새 계명은 이러한 희생을 막는다. 그러나 황금률은 철저히, 말하자면 '기브 앤 테이크'를 정의의 원칙으로 내세운다는 한계가 있다. 황금률 하에서는 시민들이 받는 대로만 줄 것이고, 받으리라 기대하지 않으면 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새 계명'은 등가의 논리라기보다는 넘침의 논리이고 관용의 논리이다. 그래서 나는 나와의 관계에서 받아야 하는 것 이상으로 주는 것이고, 내가 돌려받아야 할 만큼만 주는 것이 아니다. [...] 결국 이것은 사랑이다."(216) 요컨대 리쾨르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복수를 뛰어넘어 저마다의 마땅한 몫을 국가가 대신 분배하는 정의를, 정의를 뛰어넘어 마땅한 몫 이상을 주는 사랑을 주장한다. 사랑을 통해 "나는 나의 몫에 대한 욕망을 포기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위한 정의를 수락한다."(219)

Q. 책의 흐름을 고려하면 리쾨르가 공리주의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복수'를 연결짓는 것 같은데 연결의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다.

 사랑의 정치사상의 끝에는 리쾨르 특유의 용서론이 자리한다. 리쾨르는 "피해를 입은 측에서 가해자가 자기들이 당한 만큼의 대가를 치르지 않을 것임을, 다시 말해 처벌이 그들이 당한 범죄에 상응하지는 않을 것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 복수가 될 것"이라고 말하며 "모든 정의는 적어도 범죄의 희생자에게 일정 정도의 용서를 [긍정적 계율로서] 요구한다"고 주장한다(219-220).* 즉 리쾨르에게 용서는 전적으로 피해자의 자의에 달린 것이 아니라 사랑의 계율에 의해 당위성을 부여받는다. 한편 용서를 구하는 일 역시 기억의 의무에 의해 당위에 속하게 된다.

 "홀로코스트는 집단 기억, 즉 역사의 입장에서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의무에 관한 사례이다.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이 그들에게 가해진 범죄를 용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후에 용서를 구한 독일 정부는 옳았다. 이는 정확히 말해서 용서를 빌 수 있다는 것을, 때로는 용서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222-223, 강조는 필자)

*Q. 복수가 어째서 그 자체로 부정의이거나 미성숙인지에 대해, 심정적으로는 동조하지만 논증이 필요한 것 같다.

 그러므로 '복수냐, 용서냐'라는 인간사의 오랜 물음에 리쾨르는 흔쾌히 후자를 택한다. 이는 그가 신자로서 기독교적 사랑인 아가페를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으로 이해될 수 있겠지만 무신론자의 관점에서도 충분히 매력적인 입장이다. 리쾨르의 이와 같이 매력적인 만큼 용기있는 결단은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이해와 양심에 대한 신뢰에서 오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연약한 만큼 스스로의 삶을 끊임없이 검토해야 하고, 책임감을 가지고 타인을 돌봐야 하며 심지어는 용서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악의 문제와 다소 연관성이 덜했던 챕터들 가운데서도 내가 특별히 기억하고 싶었던 바들을 기록한다.

① 심리적 체험뿐 아니라 텍스트 또한 믿음--후설 식으로 표현하면 '의견적 정립[doxische Setzung]'--을 동반하고 특정한 의도를 가진다는 의미에서 지향적이라는 분석이 인상적이었다(75-76). 텍스트의 의미론적 의미에 괄호를 친 뒤 상징적 의미를 현상학적 잔여물로서 분석하면 텍스트의 지향적 구조가 밝혀진다는 것 같다(82 참고).

② 해석학적 순환*을 논함에 있어 믿음과 이해의 상호전제에 대한 리쾨르의 견해는 안셀무스의 모토인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을 연상시켰다(81).

*우리는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 세계에 대한 전이해('미메시스1')를 가져야 하고, 시간적으로 형상화('미메시스2')된 텍스트를 우리 자신의 삶에 적용하며 재형상화('미메시스3')함으로써 (어떤 의미에서는) 다시 세계에 대한 이해에 도달한다.

③ 담론이 세계를 성실하게 반영한다는, 언어에 대한 리쾨르의 신뢰--"드러나기 원하는 것을 드러내고, 대상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으로 인도하는 언어의 진실성"(98)--에는 안일한 면모가 있어 보인다. 그의 철석같은 신뢰를 뒷받침해줄 논증이 있는지 궁금하다. 사실상 똑같은 비판이 하이데거에게 겨눠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오래된 언어가 사태의 근원을 잘 보여주리라고 생각하면서 '어원'을 곧잘 주장의 근거로 들기 때문이다.

④ 리쾨르에 따르면 텍스트가 제안하는 세계에 대한 전유적 해석을 거치면 자기이해가 가능하다(87). 이는 대상 해석이 곧 자기 해석이 된다는 인상적인 테제로 읽혔으며, 후설이 중시한 노에시스-노에마 상관관계를 상기시켰다. "텍스트는 자아라는 주관성과 세계라는 객관성을 잇는 다리이다."(91)

cf. 전유(남의 것 가져오기) <-> 창출(내가 내 것 만들기)

Q. 텍스트 이해가 (독자와 텍스트 사이의 거리를 만드는) 역사성 덕분에 자기이해를 가능케 하는 경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⑤ 정신분석학과 현상학적 해석학이 고백과 해석이라는 진행 양태 그리고 데카르트적 에고에 반해 이드/육체에 대한 중시를 공유한다는 통찰이 재미있었다(101, 104 등지). 리쾨르(또는 칼 심스)는 현상학을 '몸을 가진 (반)데카르트주의'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⑥ 오이디푸스는 신탁이 점지한 운명이나, 어머니를 차지하겠다는 무의식적 콤플렉스에 비의지적으로 굴복한 것이 아니라 자신만큼은 아무런 죄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그래서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에 도는 전염병의 원인이 된 사람을 저주한--의지적 오만 때문에 몰락한 것이라는 해석이 무척 재미있었다(112-113). (feat. 신화는 진리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밝혀주는 것이라는 반-정신분석학적 견해)

⑦ 은유는 창조적이고, 살아있는 것으로서 해석과 사유를 건설적으로 강제하며, "미메시스[행동의 모방]를 [...] 정당하게 설명되어 본 적이 없는 실재의 차원을 가리키는 지표로 만든다"는 주장이 흥미로웠다(128). "따라서 은유는 세계의 객관적 사실이 그것을 해석하는 개인의 주관적 해석과 만나는 언어 속의 한 지점, 즉 현상학적 진리가 도달하는 지점이다."(143) 이와 같은 "은유적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 그 진술의 축어적[의미론적] 진리에 관한 독자의 판단을 유보하거나 괄호치기 해야" 가능하다(146). 상징에 대한 리쾨르의 논의와 은유에 대한 논의가 일관된 것으로서 통하게 해주는 구절이었다.

Q. 모든 기술은 그저 보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관점과 방식에서 보는 것이므로 "모든 기술이 은유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133). 리쾨르가 생각하는 '은유'는 내가 생각하는 '은유'보다 외연이 넓은 것일까?

A. "어떤 관념이든 다른 것의 이미지를 통해 자유롭게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이란 구절을 생각하면(133), x를 x가 아닌 y로 보는 언어 사용 일반을 '은유'의 외연에 포함시키는 것 같다. 그러므로 "어떤 발화자도 단어의 함축적 가능성을 남김없이 탕진해서 다 드러낼 수는 없다"(140의 인용문, 강조는 필자). x를 다르게 보게 해주는 y들의 개수는 무한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⑧ 역사를 허구처럼, 허구를 역사처럼 읽기. 곧 역사와 허구의 상호직조(182-4). 여기서 리쾨르는 역사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 일반이 서사적이라는 더 근본적인 주장으로 나아간다. 그에 따르면 개인과 공동체는 '이야기 정체성(narrative identity)'이라는 것을 가진다. 이 부분을 읽었을 때 호텔 텔레비전에서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4번이 흘러나왔다. 무척이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⑨ "삶에 종결을 부여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을 자세히 검토하는 [타인의] 행위의 수행이다."(198)

⑩ 칼 심스에 따르면 리쾨르는 데리다에게서 언어의 지시기능을, 롤랑-바르트에게서 저자를 구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