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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프로슬로기온>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박승찬 옮김, 『모놀로기온 프로슬로기온』, 아카넷, 2012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 

 1. *10세기 들어 서방 라틴 세계는 정치적으로 안정되었을 뿐 아니라, 경제 면에서는 물적인 자원이 충분히 확보됨에 따라 자신들의 문명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 자신감은 인간이 자신의 지성을 통해 세계를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낙관론과 일종의 선택친화력을 가졌다. 그러나 이 낙관론이 전제한 주지주의는 서방 라틴 세계의 심적 지주였던 그리스도교의 주의주의적 전통과 마찰을 빚었다. 안셀무스가 태어났을 때 그리스도교 내부에서는 과연 이교--희랍--철학의 논리학이나 문법, 즉 '순수하게' 이성적인 도구들을 신을 이해하는 데 사용해도 되는가에 대한 논쟁이 일었다. 문법적인 이유로 성변화transsubstantiation가 축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베렝가리우스와, 전통의 권위를 내세웠던 안셀무스의 스승 랑프랑쿠스 사이의 논쟁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성과 신앙 사이의 간극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안셀무스에게만 고유한 문제의식이었다기보다 시대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신앙이 이해를 추구한다는 기획은, 증언에 의존하기에 그 타당성의 정도가 인식론적으로 열등한 신앙을 인식론적으로 우월한 이해로 대체하는 것도, 이미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만 의미있는 것도 아니다(Williams, Thomas, "Saint Anselm",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Spring 2016 Edition), Edward N. Zalta (ed.), URL = <https://plato.stanford.edu/archives/spr2016/entries/anselm/>.) 신앙은 이해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라 이해되기도 하는 것이며--즉 이미 믿고 있던 것을 지적으로도 소화하는 것이며--안셀무스는 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신의 존재를 거부할 수 없게 만들 논증을 꿈꾸고, "마치 그리스도와 기독교 신앙이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것을 제쳐놓아야(안셀무스, 이은재 역,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하 CDH), 한들출판사, 2015 151)" 한다는 방법론을 고집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해가 신앙을 전복하지는 못한다는 데서 그의 빈틈이 보여진다고 생각한다. 이해되지 않는 영역에 있어서는 신앙에 우선권이 주어지며(모놀로기온 1장, 프로슬로기온 15장 등지) 결과적으로는 신앙을 거스르지 않는 내용에 대해서만 이해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해는 추구되지만 결국 신앙의 한계 내에서 추구될 뿐인 것이다. 다시 말해 이성은 그것의 힘이 미치는 범위가 신앙에 의해 제한되어있다는 의미에서 신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나아가 이성을 애초에 발휘하는 목적, 또는 이성이 발휘되도록 허락된 토대가 신앙이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안셀무스에게서 믿는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라는 아이디어를 종종 접하게 되는데(CDH 1권 1장 등지) 이때의 이해란 굳건한 믿음의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읽힌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성의 활용이 신앙생활의 기쁨을 더하기 때문에/그런 한에서 의미있다는 아이디어 역시 접할 수 있다(CDH 1권 1장 등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이슬람 문명권이 철학 일반을 배척했던 것과 비교하면 안셀무스의 기획은 지성사적으로 "여타 문명으로부터 그리스도교 문명을 차별화"(강상진 선생님)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 모놀로기온과 달리 프로슬로기온은 그 형식이 안셀무스의 독백이 아니라 그가 가공의 인물의 입장을 취해(sub persona, "입장" 212) 쓰인 일종의 문학이다. 맥마헌에 따르면 프로슬로기온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과 마찬가지로 "'중세 명상적 상승'이라는 중세의 문학장르에 속한다. [...] '중세 명상적 상승'[은] '영혼의 내적 여행'이라는 개념으로 파악"된다(김영원, 「폴 리쾨르의 텍스트 이론을 바탕으로 살펴본 프로슬로기온의 문학적 형태」, 2015.12, 종교연구 제75집 4호 中 pp.265-66). 따라서 프로슬로기온에는 철학으로만 환원되지 않는 문학적 의미가, 드라마적 요소가 있다. 예컨대 '나'가 등장한 이후 '마음'이 'mens(이성)'에서 'cor(heart)'로 변하는 것을 통해 단순한 로고스를 넘어 진리에 대한 열망의 파토스를 읽을 수 있다.

3. 원글은 하나로 쭉 이어져있었으므로 챕터를 상관하지 않고 쭉 읽어나가는 것이 저자가 의도한 독해법이라고 한다. 그 결과 프로슬로기온 (신 존재 증명이 제시되는 2장이 아니라) 전체를 하나의 논증unum argumentum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하는 내용 정리.


1장 왜 영혼은 신을 찾지만 보지 못하는가? 그가 "가까이 갈 수 없는 빛(216)"이기 때문이다. 신은 너무 강렬해서, 존재하지만 인식할 수 없기에 부재로 느껴진다. <모놀로기온>을 통해 "논리적, 철학적, 명제적으로 표현[되었던] 것 이상(김영원 선생님)"이 <프로슬로기온>의 탐구 대상이다. <모놀로기온>의 화자는 신앙의 도움을 받지 않고 명상을 시작하지만, <프로슬로기온>의 화자는 신앙을 가졌음에도 신을 발견하지 못해 탄식하면서 명상을 시작한다. 신에 대한 완전한 인식의 불가능성은 원죄의 발로로, "아담의 자녀들의 보편적인 통곡(218)"이다. 요컨대 하느님의 위대함과 인간성의 타락으로 인해, 신을 열망할 수밖에 없음에도 완전한 인식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비극적 인식을 거쳐 안셀무스는 신에게 도움을 요청한다(221).

 여기서 제기되는 근본적 질문은 신에 대한 인식이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디까지 가능한지이다. 또한 그 가능성은 신에 의해 보장되는 것인가, 인간의 이성에 의해 보장되는 것인가 역시 물을 수 있다. (나아가 가능하다는 그 앎은 이성적인 것인가, 체험적인 것인가?)

2장-3장 그 유명한 신 존재 증명은 아무런 전제 없이 시작되는 게 아니다. 1장을 통해 화자가 이미 신자임이 밝혀져있기에, 이미 믿고 있는 것을 이해까지 하려는 시도로 읽혀야 한다. 2장이 "그러므로ergo"로 시작되는 것, "우리가 믿는 것처럼 당신이 존재(225)"함을 증명하겠다는 도입부가 그 근거다. 순수한 논증이 갑작스레 시작되는 게 아니라, 1장의 기도가 이어지는 셈이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서처럼 기도는 논증들의 사족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논증이 기도들 사이에 끼어있거나, 둘 사이 별도의 상호작용이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신 존재 증명에서 안셀무스가 신을 '최고선/가장 큰 것'이 아닌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아무것도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nonconcept(마리옹)/anticoncept(김영원)/limit-expression(리쾨르)]'으로 개념적, 부정적으로 정의하면서 시작함은 논증의 방향성을 기존의 담론들과 차별화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 정의는 우선 신을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다른 존재자들의 영역 속에 포섭시키는 것을 금지한다.

 2장이 신의 실존existence을 증명했다면, 3장은 신의 필연적인 실존을 증명한다. 2장은 신에 대해 생각하는 '당장의' 존재만을 증명하고 있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이에 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때도 존재함을 증명하기 위해 3장을 끌어들이는 게 아닌지 물을 수 있다. 

4장 신의 참된 실재를/"사물 자체를(232)"/"정확하게(233)" 이해하는 것과 단어만을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구분(의미세계와 실제 세계 사이의 구분으로서, cf. Frege Sinn und Bedeutung 구분의 맹아)된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마음속으로 말해볼 수는 있지만(거짓된 명제) 실제에 있어서의 존재esse in res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김영원 선생님에 따르면 서구 인식론은 생각과 존재 사이의 관계성을 규정짓는 학이다.

 Q. 존재는 속성인가? cf) 디오니시우스: 선>존재>기타 '속성(생명, 지혜, ...)'

6장 안셀무스는 신이 "육체를 지니지 않으신다면 [...] 어떻게 지각하실 수 있습니까?(235)"라고 물은 뒤 지각을 단지 인식의 수단으로만 규정한다. 그 결과 '지각한다'는 말은 '인식한다'는 말로 바꿔 쓰일 수 있는데, 신은 모든 것을 인식하므로 지각/느끼기 역시 수행한다고 결론 짓는다. 여기서 개인적으로 더 흥미로웠던 테제는 육체 없음과 지각 능력 사이의 표면적 모순보다는 "고통받지(영향을 받지) 않는 것(235)"impassibilem과 지각 능력 사이의 양립 가능성이었다. 대상으로부터 영향 받지 않으면서--후썰 식으로 표현하면 대상을 원본적으로 부여받지 않으면서--어떻게 대상을 인식한단 말인가? 신에게는 모든 대상이 자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기에 그러한가?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선행적으로 알고 있는 무언가로부터는 영향 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인가? (과연 꼭 그럴까?)

7장 소멸되는 능력은 왜 능력이 아니라 무능인가? 능력 자체를 선함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해 논점을 선취beg the question하는 것은 아닌지 물을 수 있다.

8장 신이 불쌍한 사람들을 동정하면서도 "감정적으로 사로잡히는 일이 없(241)"고, 단지 "우리와 관련해서는 자비로우시고, 당신께 관련해서는 그렇지 않은 것[...]우리의 느낌에 따라서는 자비로운 것이고, 당신의 느낌에 따라서는 그렇지 않은 것(240)"이라면--여기서도 죄인의 악행이나 불쌍한 사람의 고난은 신에게 이미 알려져있었기에 소위 놀랄 것도 없어서 영향이 가지 않았으리라고 추론할 수 있다--신의 자비는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적 해석의 결과에 불과한가? 

9장 안셀무스에 따르면 악인에 대한 용서 및 자비는 의롭지 않지만(증명되지 않은 전제) 선하다(선인에게만 선한 것보다 악인에게도 선한 것이 더 선하므로). 그러나 신은 정의로운/정의인 동시에 자비롭고 선한 존재다. 정의와 자비 사이의 이 표면적인 충돌에 대해 안셀무스는 의로워보이지 않는 악인에 대한 용서 및 자비가 정의와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 믿어야(244)" 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신이 선하고 힘있다는 사실 자체가 의로움을 들어, 신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의롭게 이루어졌을 수밖에 없음을 들어 충돌을 해결하려고 한다. (인간의 눈에 정의는 자비와 충돌하지만) 신의 자비는 신의 선함과 힘 있음을 보이므로 그 자체로 정의로운 것이다.

10장 '신은 그냥 자기 일을 하는데 그에 대해 우리가 괜히 이름을 붙이고 그것들끼리 모순된다는 평가를 내리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본래적으로 그리고 단순히 당신 자신(268)"일 때, 신의 '정의'나 '자비'는 따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인간의 해석에 불과한가? 중요한 것은 신을 이해하려면 인간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이해(e.g.개념으로서의 정의/자비의 카테고리)를 무너뜨려야 하지만, 신은 그 전진된 이해마저 초월하기 때문에 끝끝내 신은 인간에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김영원 선생님에 따르면 마치 방 안에 나방이 날아다닐 때 나방이 우리를 인식하긴 하지만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15-16장 "그러므로 주님, 당신은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일 뿐만 아니라 <생각될 수 있는 모든 것보다 더 큰 어떤 것>입니다. 그러한 종류의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만일 당신이 그것 자체가 아니라면, 당신보다 더 큰 어떤 것이 생각될 수 있었을 터인데, 이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255)" 사정이 이렇다면 신은 생각될 수 있는가, 없는가? 2장서부터 신은 존재론적으로 규정될 수 있다고 우선 가정된 뒤 논의가 진행됐으나 15장에 가서는 그 가능성이 의심된다. 사실 이는 1장의 "lux inaccessibilis"라는 표현에서 이미 암시된 의심이다. 이처럼 인간은 신을 이해함에 있어서 완전한 인식(원죄로 인해 상실됨)과 완전한 무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된다. "당신께 이렇게 가까이 있는 나로부터 당신은 얼마나 멀리 떨어져 계십니까? [...] 당신이 내 안에 계시고, 내 주위에 계시지만 나는 당신을 느끼지 못합니다.(258)"

22-23장 신만이 부분으로 해체될 수 없이 단순하고 불변하므로 그 본질과 실존이 일치한다. (시간에 구애되어 단순치 못하고 여러 순간들로만 이루어지는 데다 가변적인 인간에게는 그 실존이 본질을 포괄할 수 없을 것이며 본질과 마찰하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존재론적으로 충만한 철학자의 신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성경의 신)과 동일하다. 

24-26장 여태까지의 논의 진전, 즉 조명의 결과는 완벽한 지식이 아니라 기쁨이다. 1장에서는 안셀무스가 인간의 원죄, 절망적인 갈망에 주의했다면 24장부터는 종말 후의 기쁨, 희망적인 갈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프로슬로기온>이라는 정신적 여정을 거쳐 결국 이 영혼이 겪은 것은 무엇일까? 지식의 차원에서 딱히 진전된 바가 없다면, 더 알려진 게 없는데도 왜 슬픔에서 기쁨으로 파토스가 변화하는가?

 cf) 현세에서는 상상될 수 없는, 내세에서만 달성 가능한 어떤 기쁨/지식이 있다는 파이돈적 아이디어. 안셀무스는 내세에서만큼은 신적인 것을 온전히 알고 사랑하게 된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행되리라는 것을 자신이 믿게 해달라고 끊임없이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