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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핀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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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 <바늘과 가죽의 시> 구병모, ⟪바늘과 가죽의 시⟫, 현대문학, 2021 경장편소설이 현실적인 목표로서 삼을 수 있는 모든 최선들의 육화. 신화와 역사가 교차하고, 무한자와 유한자가 마주치며, 철학과 서사가 조화되어있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한국어 표현들에 길을 잃을 뻔도 하지만, 고요하면서도 흥미진진한 플롯이 나른해진 독자를 다시 일으켜세운다. 구두를 짓는 구체적인 일상에 대한 치밀한--소설가적 양심에 따라 상당한 연구와 취재가 이루어졌음에 분명한--묘사가 자극하는 이미지적 상상력이 고갈될 즈음에는, 이해하기 전혀 어렵지 않은 말로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존재론적 성찰이 전개된다. 쑥스러운 고백이지만 내가 소설가가 되기를 꿈꾸면서 쓰고 싶었던 소설이 이런 소설이었던 것 같다. 줄거리를 줄줄 읊는 식의 독후감은 이 책의 품위에 ..
김성중, <이슬라> 김성중, ⟪이슬라⟫, 현대문학, 2018 수려한 한국어로 된 ⟪백년 동안의 고독⟫을 읽는 기분이었다. 학교로 가는 지하철에서부터 읽기 시작해, 결국 해야 하는 과제들을 제쳐두고 하루만에 끝까지 읽어내고 말았다. 그만큼 이야기가 나를 매료시켰고 몰입도가 강했다. 몇 달만에 집어든, 그만큼 마음을 굳게 다진 뒤에 꺼내든 한국 소설이었는데, 용기를 내길 정말 잘했다고 느낀다. 김성중 소설가의 작품은 사실 단편소설 '쿠문'과 '정상인'을 읽어본 것이 전부였다. 그 둘은 너무 다른 내용과 주제의식을 담고 있었기에 이 작가가 소화할 수 있는 이야기의 스펙트럼은 어디까지인가, 불현듯 놀랐던 기억이 있다. 젊은 나이 탓인지 내 마음에 더 든 쪽은 환상적 요소가 강했던 '쿠문'이었는데, ⟪이슬라⟫는 감사하게도(?) '쿠..
김혜진, <불과 나의 자서전> 김혜진, , 현대문학, 2020 "그쪽으로는 아예 발길도 마라(140)." "그러게. 내가 남일동에 가지 말라고 했잖니. 그 동네는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남일동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동네야(169)."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세세하게 묘사하기보다 홍이('나')의 내면을 따라가는 데 더 집중하는 서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읽는 내내 남일동의 풍경이 내 마음의 눈 앞으로 스쳐지나갔다. 남일동은 재개발 계획이 몇 차례나 무산되고, 산사태가 산 아래 집들을 덮치기도 하며, 바로 옆동네인 중앙동 사람들의 무시의 대상이 되는 허름한 동네다. 남일동의 주민들은 서로에게 정을 기대하고 실제로 어느 정도는 온기가 있는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지만, 다른 주민을 대함에 있어 세간의 편견이나 억측을 넘어설 만큼의 사랑은 품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