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순수 현상학의 방법과 문제들에 관하여
1장: 방법론적으로 미리 고려해야 할 사항들
§63 현상학을 위한 방법론적 고려사항들의 특수한 의미 현상학의 방법론은 다른 학문의 방법론과 달리 탐구 대상의 영역 자체--초월론적 순수 의식--를 파악 가능한 장으로서 열어내야 한다.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과 초월론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서로 엮여있음에도(interwoven) 불구하고 혼동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현상학은 제일철학으로서 가능한 모든 이성적 비평의 수단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완벽에 가까운 무전제성과 "자기 자신 속으로의 절대적, 반성적 통찰"을 요구한다. "현상학의 고유한 본질은 그것으로 하여금 자신의 고유한 본질에 대한 가장 완벽한 명석함(clarity)을 실현하도록 요구하며 그로써 자신의 방법론의 원리들에 관련해서도 그러기를 요구한다."(117, 강조는 필자)
§64 현상학자의 자기-배제(self-suspension) 후설은 환원을 수행하는 현상학자 자신의 자아는 배제가 가능한 것인지 묻고, 그것에 조금의 어려움도 없다고 답한다. 다만 "우리는 우리들 자신에게 현상학적 환원의 규범을 부과한다. [바로] 우리들의 경험적 실존을 포함하고 우리들로 하여금 저 자연적인 종류의 명시적이거나 함축적인 정립들을 담고 있는 그 어떤 명제들에[도] 돌입하는 것을 막아주는 규범 말이다."(118, 강조는 원저자)
§65 현상학의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시(reference) 현상학의 탐구 대상뿐 아니라 탐구하는 체험 자체 역시 초월론적 순수 의식의 영역에 속한다. 후설은 이와 같은 속성을 자기지시성(self-referentiality)이라고 부르면서, 현상학 자신 그리고 현상학의 방법론이 현상학적 영역에 속한다는 것은 자명하다고 말한다. 현상학에 고유한 방법론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역시나 반성을 통해 그 본질에 대한 명석한 통찰을 획득하면 된다. 그러므로 현상학을 개시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 역시 현상학이다. [현상학을 예비하는 보다 근본적 학문이나 절차는 없다.]
Q. 그렇다면 어째서 후설은 후기에 오이겐 핑크와 함께 '현상학[함]의 현상학'을 펼친 것인가? 볼드친 명제는 정말 자명한가?
A. '현상학적 영역을 세계 최초로 여는 작용이 이미 현상학적이었다' 같은 주장이 아니라, 현상학함 역시 의식 흐름 가운데서 이루어지므로 현상학의 영역이라는 사소한 주장.
§66 일의적인 용어들과 명석하게 주어진 것에 대한 충실한 표현 현상학은 순수 직관에만 관여하는 본질학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직관적으로 파악된 본질에 대한 학이 성립하려면 통찰된 바가 판단의 형태로 언어화돼야만 한다. 그러므로 직관된 바의 본질의 의미를 충실하게 반영하는 용어들이 사용돼야 할 것이다.
§67 해명(clarification)의 방법들: "소여성의 근친성[Gegebenheitsnähe]"과 "소여성의 원격성[Gegebenheitsferne]" 본질을 직관함에 있어서도 명석함의 정도차가 존재한다. 한 극단에서는 "절대적인 근친성"이 있어 "순수한 자기부여" 가운데서 즉자적인 객체 자체가 완전하게(completely) 직관된다. 다른 극단에는 "명석함의 완전한 결핍"이 있어 아무런 직관도 주어지지 않고 의식은 모호함(obscurity)의 상태에 빠진다(122). 직관적 의식과 비직관적 의식, 명석한 의식과 모호한 의식 사이의 구분이 일치하는(coincide[decken]) 것이다.
Q. 마지막에서 세 번째 문단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째서 상술한 경우 '원본적' 주어짐이 논의되지 않는다는 것인가?
A. 원본적이지 않은 주어짐도 있다. 지각만 원본적이고 현전화는 모두 원본적이지 않음.
§68 진정한(genuine[echt]) 그리고 진정하지 않은 수준[Stufe]의 명석함, 그리고 정상적 해명의 본질 후설은 나아가 진정한 수준의 명석함과 진정하지 않은 수준의 명석함을 구분한다. 이 구분은 "명석함의 범위의 외연상의(extensive) 확장(123)"과 관련되며, 특정한 범위 내 명석함의 내적 향상 또는 감소와 동시적일 수 있으므로 지난 절의 구분과 양립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로써 '정상적 해명'이란 사태의 본질을 규명할 수 있다. 정상적 해명의 본질이란 무언가를 애초에 직관화하는 과정과 이미 직관되고 있는 것의 명석함을 향상시키는 과정의 결합이다. 그러나 물론 완전히 순수하지도 완전히 공허하지도 않은 직관을 만나는 것이 보통의 경우다.
Q. '진정하지 않은 수준의 명석함'=? empty한 게 채워지는 건 가까워지는 건가 진정해지는 건가?
A. 사념만 하고 있다가 처음 직관이 되면 그게 진정성. 0에서 양수로 가는 것과, 양수에서 양수로 가는 것 사이를 구분하는 거다.
§69 본질들을 완벽하게 명석한 방식으로 파악하는 방법 완벽하게 명석한 파악은 의심 불가능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게 해준다. 본질 직관 역시 완벽하게 명석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여기서도 사물 또는 사태를 점점 더 사태 자체에 근친하게 가져오는 과정이 요구된다. 이 과정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는 사실이 바로 아직 규정되지 않았지만 언제든 규정이 가능한 지평이 모든 소여를 둘러싸고 있다는 점이다. 또 유의해야 할 점은, "본질의 파악을 위한 모든 명증이 그 [본질] 아래의 개별적 경우들에 대한 그들의 구체성 속에서의 완전한(full) 명석함을 요구한다고 말하는 것은 과하"다는[무리라는] 것이다(125).
§70 본질을 해명하는 방법에 있어 지각의 역할과 자유로운 상상[Phantasie]의 특권 후설은 본질의 파악 방법에 대한 여태까지의 논의를 이어간다. 외부지각의 원본성은 현상학자로 하여금 지각의 보편적 본질에 대한 명석한 파악을 어렵지 않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지각이 아닌 상상 역시 중차대한 역할을 수행하는데, 심지어는 지각의 현상학적 본질을 해명함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어째서 그러한가? 이에 답하기 위해 후설은 기하학자의 작업을 예로 든다. 기하학자는 종종 명석한 직관을 위해 스케칭을 활용하지만, 사실은 도형을 훨씬 자유롭게 변양 및 재형성할 수 있는 것은 상상 가운데서다. 상상이 가능케 하는 이 자유는 그에게 본질에 대한 지식을 획득할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열어주며, 사실상 많은 스케칭은 상상의 이후에 그로써 획득된 형상적으로 순수한 사유를 보존하기 위한 목적에 종속된다. 이는 현상학자에게도 마찬가지다. 원본적인 소여는 오직 제한된 지식만을 허락한다. [만날 수 있는 원본적인 소여가 제한돼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많은 개별자들을 취급할 수 있기 위해, [그로써 본질 직관의 명석함의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자유로운 상상은 권장될 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요구되기까지 한다. 이 연장선에서 후설은 역사와 예술, 특히 문학작품이 현상학적 탐구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 모든 형상적 학문에서 그러하듯, "허구(fiction)"가 현상학의 핵심적인 요소를 이루며, 허구[야말로] "영원한 진리들"에 대한 지식이 자신의 자양분을 얻는 원천이다."(127, 강조는 원저자)
cf. 반성을 통해 반성되는 사태가 변화할 수 있느냐 변화하지 않느냐를 기준으로 외적 지각의 대상과 내적 지각의 대상을 구분한 분석이 흥미롭다(125-126, '분노'의 예시)
Q. 상상이 원본적인 부여인지 아닌지가 헷갈리게 서술돼있다. '원본성'은 어떤 조건 하에서 성립하는가?(127)
A. 상상의 현상학을 펼치기 위해서는 나의 상상을 반성해야 하고 주어진 것을 범례화해야 한다. 상상작용이 원본적인 소여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반성하는 내 상상은 원본적으로, 지각과 같이[prezeptiv] 주어진다는 뜻.
§71 경험들에 대한 기술적 형상학의 가능성이란 문제 방법론에 대한 탐구를 심화하고, 현상학의 정체성을 그로써 명시하기 이전에 후설은 다음과 같이 자문한다. "현상학을 오직 기술이라는 목표들에 구속하는 것이 옳은가(correct)? 기술적 형상학--이것은 총체적으로 잘못된 것(altogether perverse)이 아닌가?" 이는 달리 말해 기술적 성격을 견지하면서 동시에 형상과 순수대상을 취급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질문이다. 후설은 참고할 만한 유일한 형상학인 수학을 언급하면서 그렇다면 과연 "수학적이지 않은 형상적 분과들"이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떤 모습인지 따져야 한다고 말한다. "경험의 본질들에 대한 교설에 반해 수학적 분과들에는 무엇이 특유한가, 그리고 그로써 경험의 영역에 어떤 종류의 목표들과 방법들이 실제로 필연적으로 원리상 어울리지 않는지 해명"해보아야 한다고 말이다(128, 강조는 원저자).
§72 구체적, 추상적 "수학적" 학문들 "현상학은 당연히 [형식적이지 않고] 질료적인(material), 형상적 학문에 속한다(128)." 기하학도 마찬가지이므로, 후설은 현상학이 그렇다면 "경험들의 "기하학"으로서 구성될 수 있는지" 궁금해한다(129). 이에 답하기 위해 그는 잠시 학문 일반에 대한 교설을 펼친다. "학문들은 구체적이거나 추상적이다. 최고유(supreme genera)가 영역적(구체적)인지 아니면 단지 그와 같은 유의 구성요소들에 불과한지에 따라서 그렇다." 구체적 학문은 자연의 본질과 같은 구체적 대상을 취급하고, 추상적 학문은 시공간이나 운동의 형태와 같은 추상적 대상을 취급한다. 존재론뿐 아니라 경험과학들도 마찬가지의 기준으로 나뉠 수 있다.
Q. 자연의 '본질'이 '구체적'이라는 직관이 잘 와닿지 않는다. 후설은 '구체성'을 어떤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가?
A. 형상학 내에서 구체적 형상학과 추상적 형상학을 나누는 것이므로 좀 유연하게 봐라.
그런데 그들 가운데 우리에게 익숙한 형상적 학문들은 기술적이지 않다. 예컨대 기하학은 개별적인 직관들을 일일이 파악하거나 가장 낮은 형상적 차이들을 기술 및 분류하기보다는 "근본적인 형태들, 형체(body), 표면, 점, 각과 같은 관념들"을 이용해 "공리들 즉 원초적 본질적 법칙들"을 형성한다. 이러한 공리들이 모든 가능한 형태나 관계들에 실제로 그리고 정밀하게(exactly) 적용 가능하다는 것이 곧 기하학의 본질이다. "유한한 수의 개념들과 명제들"이 "모든 가능한 형태화들(configurations[Gestaltungen])의 총체를 순수하게 분석적인 필연성의 방식으로 완전하게 그리고 일의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130, 강조는 원저자). 그러므로 기하학에서는 규정되지 않은[규정될 수 없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나아가 참과 거짓은 공리와의 모순됨 여부를 통해 단순하게 가려진다. 후설은 기하학 그리고 수학 일반이 이 같은 "공리들의 규정된[한정된] 체계(definite system of axioms)"로부터 연역적으로 도출되었다고 본다(131, 강조는 원저자).
§73 현상학의 문제에의 적용: 기술과 정밀한[exakt] 규정 한편 짐작 가능하듯, 현상학은 수학과 달리 구체자를 다루는 구체적-형상적 분과이다. 후설은 현상학에서도 기하학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과 같은 공리들의 규정된 체계들을 찾아야 하는지, 새로운 형태화들을 그로부터 연역해내야 하는지 자문한다. 그러나 후설은 연역을 통해 도출된 결과들은 원리상 직접적인 직관을 통해 파악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Q. '현상학 역시 자신의 다양체들을 기하학과 같이 규정적으로 취급하려면 ""개념-형성[Begriffsbildung]"의 정밀성"이 보장돼야 하는데, 이는 어차피 직접적 직관을 통해 증명돼야 하는(demonstrable[ausweisbar])"가정된 공리적 개념들과 관련하여 파악된 본질들 자체의 정밀성"을 요구한다(132).' <-- 이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A. 동어반복이다. 정밀한 개념 = 규정적으로 취급된 개념. 반면 현상학적 개념은 엄밀하지, 정밀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한정된 공리들로부터 사태를 연역적으로 도출하지 않고 무한한 사태를 '발견'하는 방식으로 탐구하기 때문이다.
cf. 엄밀성(Strengheit)과 정밀성(Exaktheit)은 구분돼야 한다. 정밀성=사태를 한정된 공리들로부터 연역함으로써 알 수 있다는 성질, 엄밀성=그렇지 않은 영역에서의 사태적합성. 여기서는 Definit(규정적, 한정적) = Exakt
§74 기술적이고 정밀한 학문들 후설은 기술적인 학문과 설명적인(explanatory) 학문들 사이의 차이를 규명해보겠다는 전 절의 기획에 계속 응답하며 기하학과 자연에 대한 기술적 학문을 대비시킨다. 기하학적 개념들은 후설에 따르면 '이념적(ideal)' 개념들이며 "직접적인(straightforward) 직관으로부터 취해진 본질들을 무매개적으로(immediately)* 표현하는" 기술적 개념들과 그 근원이 구별된다. 이처럼 직관을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는 형태학적이고 수학적이지 않은 개념들은 수학의 개념들에 비하면 모호(vague)하다. 이념적 개념들은 기술적 개념들이 오직 점근할 수만 있는 이념적인 한계치--가장 엄밀한 수준의 진리를 말하는 것 같다--에 실제로 도달할 수 있으며, 짐작할 수 있듯이 감각적 직관을 통해서는 획득될 수 없다.
*기존의 모든 'immediate'는 '직접적'으로 번역했다. 이번에만 'straightforward'와 구분하기 위해 '무매개적'이란 역어를 택한다.
Q. 현상학은 이념적 개념이 아닌 기술적 개념을 취급한다는 논지 같은데, 어째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학보다도 엄밀하고 필증적인 지식을 얻는 통로가 될 수 있는가?
§75 순수한 경험들의 본질에 대한 기술적 교설로서의 현상학 현상학은 "하위구조를 이상화하고 그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 다른 [모든] 기술적 교설과 같이 즉자적으로[그 자체로] 자신의 정당성을 가진다. 환원된 경험들에서 얻어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순수한 직관에서 형상적으로 얻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에 후설은 현상학의 장에서 실제로 학적 기술이 성립할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묻는다. 현상학이 의식의 흐름 속의 모든 개별적 구체자들을 형상적이고 일의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술적 구역 안에서는 형상적 특이성들의 일의적 규정을 말할 수 없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높은 수준의 종적 성격(specificity[Spezialität])을 가지는 본질들의 경우 사정이 완전히 달라진다."(135, 강조는 원저자) 그러므로 그들에 대해서는, 예컨대 지각 일반, 기억 일반, 타인지각 일반, 의지 일반등의 본질과 관련해서는 학적 기술이 가능하고 엄밀한(rigorous[streng]) 개념을 확립할 수 있다.
이때 상위 수준의 탐구 성과들은 하위 수준의 탐구 성과들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현상학의 탐구는 귀납적이지 않다. 반면 연역적인 이론화, 매개적인(intermediate) 추론들은 현상학자를 본질의 소여로 이끌어주는 기능을 수행하는 한에서--예컨대 그럴 듯한 추측을 내어준다든지--허락된다. 그러나 결국 그런 추측들은 직관을 통해 분별돼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현상학의 방법론과 정체성을 그 어떤 기존의 아프리오리한 학문과의 유비를 통해서 성립시키지 않는 것이다. "본질들의 기술적 학문으로서 [...] 초월론적 현상학은 수학적 학문들이 속하는 형상적 학문과는 완전히 다른 형상적 학문들의 기본적 계급에 속한다."(136, 강조는 원저자)
2장 순수 의식의 보편적 구조들 (생략)
3장 노에시스와 노에마
§87 예비사항들 초월론적 관계들은 아프리오리하게 알려질 수 있지만, 단순히 초월론적 환원만으로 초월론적 영역에 대한 충분한 앎이 가능한 것은 결코 아니다. 특히 기본적인 구분들을 확립해두지 않았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후설은 "무언가에 대한 의식"이란 것은 자명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선언한다. 현상학적 분석은 예컨대 지각 속에 사는 대신, 즉 지각된 것을 향하는 대신--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대상에 퇴락해있는 대신--"지각함 또는 지각된 것의 주어짐의 방식(manners)이 가지는 속성들"에 초점을 맞추며 현전하는 것, 부여되는 것을 현전하고 부여되는 그대로 취한다. 이로부터 도출되는 직접적, 실체적 결론들은 같은 태도에 있는 이에게라면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다만 기술에 대한 상호주관적인 검토 및 수정이 가능할 뿐이다(173, 강조는 필자).
Q. 초월론적 경험에 대한 기술에 있어 분석의 난이도가 있다는 것, 그리고 수정이 가능하다는 것과 그에 대한 의심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은 어떻게 서로 양립 가능한가? 후자는 이념에 불과한가? 정확히 어디까지가 엄밀한, 철저히 객관적이고 '수정 불가능한' 명증이 가능한 영역인가? cf. Kern(1962), 불변하는 시간형식
A. 기초적인 사실들, '나는 생각한다' 등은 의심할 수 없으나 그에 기반해서 분석되는 것은 의심 가능할 것 같다. 일단 모든 직관이 맞냐, 틀리냐의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직관 이후의 추론만 틀리다는 생각도 가능하다. 필증적 명증은 주로 논리적, 수학적 명증에 대해서 말해지며, 본질 직관이나 지각에서 주로 동원되는 용어는 아니다. 현상학적 지식이 반드시 의심 불가능해야지만 유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J씨).
Q. 그러면 현상학이 다른 학문을 정초할 수 있나? 비필증적이라면.
§88 경험의 내실적이고 지향적인 구성요소들(components): 노에마 지향적 체험에 고유한 구성요소와 그것의 지향적 상관자 (또는 그것의 구성요소)는 서로 구별돼야 한다. 이에 따라 현상학적 분석이 전개되는 경로 또한 양분된다. 하나는 체험을 대상화하는, 체험에 대한 내실적 분석이다. 다른 하나는 지향적 체험의 상관자에 대한 분석이다.
모든 지향적 체험은 "자신 안에/그 자체로 "의미[Sinn]"와 같은 것을 담는다(contain[in sich zu bergen])"는 의미에서 노에시스적[noetisch]이다. 반면 체험에 내실적으로 속하지 않는 자료의 다양체도 존재한다(174, 강조는 필자). 이와 같은 노에마적 내용이 곧 광의로 이해된 의미, 또는 노에마이다. 예컨대 지각의 노에마는 "그러그러하게* 지각된 것(the perceived as such)"이다. 이때 노에마는 "체험 속에 "내재적으로" 놓여있는 방식 정확히 그대로 취해져야 한다."(175)
자연적 태도에서는 지각의 대상이 우리에게 "공간의 초월적 현실성(actuality)" 속에 현존하는 것이고 지각은 "실재하는 인간 존재에게 속하는 심적 상태"에 해당한다(175). 그러나 환원이 가해지면 저 둘 사이의 실재적인 관계[의 성립에 대한 판단]은 보류되며, 초월론적으로 환원된 지각체험만이 남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예컨대 환각이나 기만적인 지각과 같은 현상에 대해 현상학이 기여하는 바가 많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서 무언가 현실성 "그" 안에 놓여있는 무언가가 그것[지각체험]에 상응하는지 여부를 묻는 종류의 질문을 묻지 않는다."(176) 어차피 현실적이었던 대상, 속성, 특징 등은 모두 자그마한 뉘앙스까지 박탈됨 없이 다만 환원된 채로 잔존할 것이다.
*'그러그러하게'란 주어짐의 방식, 대상이 어떠어떠하게 주어지는진다는 감각[의미]--"sense of How it is given, its manner of being given"(187)--를 가리킨다.
cf. Zahavi (2004), p.55 on objectless intentions and Husserlian phenomenology
§89 노에마적 명제들(assertions[Aussagen])과 현실성에 대한 명제들: 심리학적 영역에서의 노에마 이제 예컨대 단적인 나무와 그러그러하게 지각된 나무, 즉 지각의 순수하게 초재하는 대상과 지각의 의미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전자는 불타거나 용해될 수 있지만, 후자는 그렇게 될 만한 화학적 원소들도, 힘도, 실재적 속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같은 구분은 심리학에도 매우 유용한, 지향적 체험의 심리학적 본질이다.
*Q.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향적 대상과 순수하게 초재하는 대상은 동일하다고(Hua XIX/2, 439), 환원은 순수 초재로부터 아무것도 박탈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A. 서부 연안 해석에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노에마는 의미로서 대상에 대응하는 것이지 대상 자체는 아니다. (J씨)
Q. 대상은 가만히 내버려두고 주관만 태도를 변경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어디까지 동일하고 어디까지 차이가 있는지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90 "노에마적 의미" 그리고 "내재적 [대상들]"과 "현실적[wirklich] 대상들" 사이의 구분 지각뿐 아니라 모든 지향적 체험이 지향적 대상을, 즉 체험의 객관적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노에마 전체(full noema)가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노에마 전체 내에서 의미는 핵심적 층위(core layer[Kernschicht])이기는 하지만, 다른 추가적인 층위들[181쪽 참고]과 늘 함께이다. 다만 후설은 아직 노에마의 핵심적 층위에 대한 분석을 계속하기를 원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것은 우리 앞에 무엇이 그것의 현상학적 순수성 속에서 현행적으로 놓여있는지에 대한 절대적으로 충실한 기술 그리고 주어진 것을 초월하는 모든 해석들의 제거이다."(178)
물론 지향적 대상이 지향 속에 내실적으로 거한다고(inhabit[einwohnen]), 즉 지향적 대상에 상응하는 '현실적 대상'이 실존하지 않든 파괴되었든 상관 없이 지향적 대상은 실존하고 잔존한다고 말할 만한 유혹이 있다. 그러나 이는 서로에 맞서있는 두 개의 현실이 존재하는 것이라는 오해를 낳는다.* 존재하는 현실은 하나뿐이며, 그렇다고 해서 현실적 대상의 내적 이미지[Bild]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미지 표상을 얻고 싶다면 별도의 심리작용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지향적 대상에 대한 표상주의적 이해는 무한퇴행을 낳는다. 왜냐하면 대상을 이미지적으로 복제하는 의식은 "이미 내재적 대상과 지향적 대상 사이의 구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179, 43절 참고).
*Q. 앞선 나무의 연소와 용해에 대한 예시와 어떻게 양립가능한가? 두 주장들을 각각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까?
초월론적 환원은 지각된 현실성에 대한 판단을 중지시키지만, "지각이 현실성에 대한 의식이라는 데 대한 판단을 막지는 않는다." 현상학자는 현실성의 정립을 삼가고 후설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과 함께 가지 않지만" 또한 "그것을 옆으로 치워두지도 않는다. [현실적 대상에 대한] 정립들(positings[Setzungen])은 당연히 그곳에 있다. 정립들 또한 현상에 본질적으로 본래적이다(inheret[=gehören wesentlich mit]). [...] 정립들과 함께 가는 대신, 우리는 그것들을 대상으로 만들고, 현상의 핵심적 부분으로 취한다."(180, 강조는 필자)
Q. 인용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Wir werfen sie[Setzungen] darum nicht weg, wenn wir uns "nicht auf ihren Boden stellen", sie "nicht mitmachen". Sie sind ja da, gehören wesentlich mit zum Phänomen. Vielmehrwir sehen sie uns an ; statt sie mitzumachen, machen wir sie zu Objekten, wir nehmen sie als Bestandstücke des Phänomens, die Thesis der Wahr nehmung eben als ihre Komponente."(Hua III/1, 209)
A. 정립을 긍정하지도 않고(함께 가지 않고) 부정하지도 않는다(치워버리지도 않는다).
§91 지향성의 가장 넓은 영역으로의 이행(carryover[Übertragung]) 지각뿐 아니라 다른 모든 지향적 체험에 대해서도 그러그러하게 지향된 대상이 상응한다. 노에마적 의미의 핵심적 구성이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어떤 작용의 지향적 대상이냐에 따라서 노에마적 상관자는 달라진다. 예를 들어 같은 나무라고 해도 그것이 지각될 때와 상상될 때, 기억될 때의 의미는 각각 상이하다. 그러므로 전체 노에마 내에서, ①작용의 변화에 따라서도 달라지지 않는 중심적 "핵심" 즉 "객관적 의미"의 층위와 ②작용의 변화에 따라서 달라지는 층위를 구분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동일한] 노에시스와 노에마 사이의 상관관계 또는 상관적 구조가 모든 지향적 체험들에서 반복되고 그것들을 가로지르며 포섭한다는 것이다.
§92 노에시스의 면[Hinsicht] 그리고 노에마의 면에서 주의의 변동들(shifts[Wandlungen]) 주의의 자유로운 변동 가능성, 즉 우리가 한 대상에 계속 주의를 기울일 수도, 그로부터 주의를 철회하고 다른 대상--또는 같은 대상의 부분 등--에 주의를 기울이기로 마음을 바꿀 수도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노에시스적 핵심 및 그에 본래적인 계기들(aspects[Momente])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또 주의가 동일한 대상에 계속해서 향해진다고 하더라도 주의가 기울여지는 정도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주의의 대상은 1차적인 주의의 대상일 수도, 다른 대상과 함께 '그저' 알아차려질 수도, 완전히 주의되지 않을 수도 있다. 처음 두 경우는 현실화의 양상들(modes of actualization[Aktualitätsmodi])에 해당하는 반면 마지막 경우는 "죽은 의식"의 양식을 가리킨다(183).
그런데 이와 같은 변양은 경험의 노에시스적 구성뿐만 아니라 노에마들[noemata]에까지--다만 늘 자기동일적으로 남는 노에마적 핵심은 건드리지 않는 채로--영향을 미친다. 조명의 비유를 불러오자면 노에마는 완전히 밝은 빛에 놓여있을 수도, 반은 그림자에 잠겨있을 수도, 완전한 어둠 속에 침잠당할 수도 있다. 나타나는 그것은 변하지 않더라도, "그러그러하게 나타나는 것(what is appearing[Erscheinende] as such)" 즉 현상의 방식이 주의의 정도에 따라 변화를 겪는 것이다(183). 그러므로 "구체적 노에마는 끊임없이(through and through) 변동한다. 그것[구체적 노에마]은 동일한 무언가의 주어짐의 방식에서의 필연적 양상들의 문제[에 의해 결정된]다."(184) 후설이 이와 같은 분석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주의의 다양한 변동 가능성 하에서도 노에시스와 노에마 사이의 상관관계가 굳건하며 둘은 공-변동한다는 사실 같다.
자아가 현행적으로 어떤 작용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은 작용 대상에 실제적인[positiv] 주의가 향해지고 있음을, 나아가 자아가 그와 같은 작용 "속에" 살고 있음을 뜻한다. 이 '삶'이란 의식 내용의 현존[Sein]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존재자(entity)"로서의 순수 자아가 "기술 가능한 방식들을 가지는 다양체 속에서" 특정 체험 속에 살아있음을 가리킬 뿐이다. 여기서 순수 자아의 자유란 그것이 자신의 바깥으로 나가는 것도, 자신의 안으로 돌아오는 것도 모두 자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가리킨다(184).
§93 고차원적 의식(higher sphere of consciousness)에서의 노에시스-노에마 구조들로의 이행 고차원적 의식의 구조란 "구체적 체험의 통일체 속에서 다수의 노에시스들이 서로의 위에 세워져 있고, 노에마적 상관자들도 마찬가지로 그에 따라 정초되어있는" 의식의 구조를 뜻한다. 여기서도 노에시스 속 [노에마]의 핵심은 "그러그러하게 의미된 대상성[vermeinte Objekitivität als solche]"이며, 이에 반성이 가해질 경우 새로운 종류의 대상성이 획득된다(185).
§94 판단의 영역에서의 노에시스와 노에마 후설은 노에시스와 노에마 사이의 상관관계가 고차원적 의식 중 하나인 술어적 판단의 영역에서도 유지됨을 보이고자 한다.* 술어적 판단에서 노에시스는 판단함이고, 노에마는 "그러그러하게 판단된 것"이다. 여기서 후설은 특별히 판단된 것[Geurteilte]과 그에 대해 판단이 이루어지는 그것[Beurteilte]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립"하는 현전의 작용 위에 판단작용이 정초돼있을 경우, 전자의 노에마는 "그에 대해 판단이 이루어지는, [그러그러하게 현전하는] 그것[Beurteilte]"이고 후자의 노에마는 "[그러그러하게] 판단된 것[Geurteilte]"이기 때문이다(186). 물론 다른 지향적 체험에서와 마찬가지로 경험적 체험으로서의 판단과 본질로서 판단의 "관념" 사이, 그리고 노에시스와 노에마 사이의 구분이 유지돼야 할 것이다.
*Q. 후설은 여기서 판단을 고차원적 의식의 일종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논리연구에서는 판단이 지각과 마찬가지로 가장 기본적인 작용의 지위를 가지지 않았던가? 직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판단 또한 사태연관에 대한 객관화적 작용으로서 고차원적 의식이 아니지 않은가? 이미 지각된 것에 새 술어를 붙인다는 의미에서 판단이 고차원적 의식이라 설정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저차원적 판단도 존재할까?
A. <논리연구>에서도 판단은 고차원적 의식이었다. 범주적 직관은 감성적 직관에 의해 정초돼있어야 했다.
술어적 판단의 영역에서 역시--궁극적으로 다른 모든 지향적 체험에서--노에마적 핵심은 유지되면서도 작용의 종류는 달라지는 사태가 가능하다. 예컨대 같은 사태 'S는 P다'에 대해 자아는 명증을 바탕으로 확신을 가질 수도, 맹목적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확신과 추측의 경우에서 노에마는 다르지만, (형식논리학적 사항들을 결정짓는) 의미의 핵심은 동일하다. 이는 동일한 구체적 내용을 현전시켰을 때와 현전화시켰을 때의 차이와 유사한 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하자면 노에마의 내부, 또는 거칠게 말해 작용의 '내용'을 양분할 수 있다. 한 쪽은 ①어떤 작용에서도 동일하게 유지되는 의미 내용[Sinngehalt]이자 핵심부에 해당하고, 다른 한 쪽은 ②다양한 "성격 규정(characterization)"에 의해 변양을 겪는 비자립적인 부분에 해당한다(189). 전체 노에마는 이 둘이 합쳐져야 비로소 생성되기 때문에 모든 노에마는 의식 성격의 변화에 상관적으로 함께 변화할 수밖에 없다.
§95 감정과 의지의 영역에서의 유비적 구분들 만족과 불만족 그리고 가치평가를 주재하는 감정, 그리고 소망, 결단, 결단에 따른 실천을 주재하는 의지 또한 다수의 지향적 층위를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체험으로서 술어적 판단과 유사한 노에시스-노에마 구조를 가진다. 이 경우 전체 현상의 가장 높은 층위가 완전히 제거돼도 남아있는 층위(들)만으로도 그 자체로 완전한 지향적 체험을 성립시킬 수 있다. 반대로 단순히 구체적인 현전이었던 것이 가치평가라는 새 노에시스적 층위를 자신 위에 말하자면 얹게 될 수도 있다.
감정의 영역에서 중요한 삼중의 구분은 바로 "가치의 의식을 정초하는 현전, 판단 등등에 상응하는 노에마들"과 "그 자체로 [하나의] 대상으로서의 가치, 그 자체로 [하나의] 사태연관으로서의 가치, 또는 그에 상응하는 노에마적 변양들" 마지막으로 "가치에 대한 구체적 의식에 대한 완결된 [전체] 노에마"의 구분이다(190). 다시 말해 가치있는 대상 및 사태연관과 그 자체 대상 및 사태연관으로서의 가치를 구분해야 하며, 가치있는 속성과 가치-속성[werte Eigenschaft und Werteigenschaft]을 구분해야 한다.* 물론 근본적으로, 환원 이전의 초월자로서의 가치--그 존재에 대한 질문은 제기되지 않는다--와 노에마로서의 가치가 구분돼야 할 것이다.
*Q. 이 마지막 부분은 "가치에 대한 구체적 의식에 대한 완결된 [전체] 노에마"에 어떻게 연결되는가? 나아가 가치-속성이 그 자체로 이중의 의미를 가진다는 후설의 서술은 어떻게 이해돼야 하는가?
A1. 아름다움의 속성과 예컨대 어떤 인형이 아름다움의 속성을 가진다는 속성은 다르다. 여기서는 인형이 그 전체 노에마다.
A2. werte Eigenschaft=e.g. 검음. Werteigenschaft=검음의 아름다움, 흑요석이 검음의 아름다움을 가짐
A3. 그냥 서로가 ambiguous하다.
동일한 구분들이 의지의 영역에서도 성립한다. 결정하는 작용과 결정[된 바]가 각각 노에시스와 노에마로서 자리하며, 이 결정된 바는 "명백히 다른, 유사한 종류의 노에마적 대상성에 의해 정초되어있다. 만일 현상학자로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정립들을 보류한다면, 의지의 현상으로서 남는 것은 [...] 의지에 적합한 노에마로서 "그러그러하게 의지된 것" 즉 의지 속에서 "사념된 무언가"이기에 정확하게 "의지적 지향[의지적 사념, Willensmeinung] [...] 그리고 이와 더불어 의지된 모든 것과 의지가 "향해 있는 그것" 모두다." (191, 후설은 환원된 x를 말할 때 "x"라는 기호를 도입한다.)
cf. 의미와 사념의 구분(191-2)
★<이념들> 1권에서 후설은 지각을 가장 기본적인 차원의 의식으로, 그리고 술어적 판단, 감정, 의지(각각 지, 정, 의 구분에 해당)를 지각을 기반으로 성립하는 고차원적 의식으로 간주하는 것 같다. 다만 가치평가가 단순히 감정의 소관이 맞는지, 애초에 지/정/의 구분이 후설이 희망하는 것처럼 그렇게 딱 떨어지는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이 구분은 솔직히 말해 후설이 무전제성의 원칙을 어기고 자의적으로 설정한 것처럼 생각된다.
A. 후설에게 'Werten'은 통상적 가치평가와 다르다. 무엇은 아름답다는 판단보다는 아름다움에 대해 느끼는 즐거움에 해당한다. 대상을 사용하면서 대상의 가치를 향유하는 것으로, 인식과 구별되는 것이다. 그러나 Hua XXXI에서 의지는 인식과 감정과 동일하게 취급될 수 없다는 자체적 반성이 있다(J씨).
§96 다음 장들로의 이행: 결론적 사항들 노에시스와 노에마 사이의 구분과 차이는 현상학에 있어 그 정당화와 확립의 기제로서 가장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현상학은 아직 시작하는 단계에 있다. 여기서의 분석이 궁극적으로 타당한지는 오직 미래의 계속되는 탐구만이 밝혀줄 것이다. 그럼에도 매 단계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을 최대한 충실하게 기술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
4장 노에시스-노에마 구조의 문제들에 대하여
§97 체험의 내실적 계기로서의 본래적 질료적 그리고 노에시스적 계기들, 본래적 비내실적 계기로서의 노에마적 [계기들] 이어 완수해야 할 과제는 환원 이후에 남는 순수 내재 가운데서 무엇이 순수체험에 내실적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기술하는 것이다. "[...] 한편으로, "그러그러하게 지각된 나무" 또는 전체 노에마[...]는 그 자체로 지각적 체험의 본질의 부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노에마[...]는 현실적 나무가 그러하지 않은 만큼이나 지각 속에 내실적으로 담겨있지 않다."(194, 강조는 필자.)
cf. 지향적 내재=내실적 초재(Hua IX)
cf. [정의] 내실적=전체의 환원 불가능한, 본래적 부분으로서 담겨있음(194)
순수 체험의 내실적 계기들은 [순수 초재나 노에마가 아닌] 질료[Stoff]와 노에시스적 구성에 기여하는 부분들로 이루어져있다. 먼저 질료에 대해서부터 논하자. 예컨대 나무의 색깔을 지각하고자 할 때, 특정한 관점에서 지각된 '이' 색깔은 지각의 노에마에 해당하지만 "말하자면 "색채-감각", 그 안에서 노에마적 또는, 더 낫게는, "대상적[객관적]" 색깔이 "다양한 범위의 명암(shades)을 선보이는" 구체적 체험의 본래적 질료적[hyletisch] 계기"는 노에마 속에서 발견됨에도 불구하고 체험의 내실적 계기이다(196, 강조는 필자).* 계속해서 변화하는 지각적 의식의 다양체 가운데서, 동일자로 의식된 노에마적 색깔은 불변하는 통일체로 남는다.**
특정한 대상은 특정한 질료 가운데서만 비로소 현출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후설은 "여기서 "통일체"와 "다양체"는 완전히 다른 차원들에 속하며, 그리고 물론, 모든 질료적인 것은 구체적 체험 속에 내실적인, 필수불가결한 부분으로서 속하고, 반면 다양체로서 스스로를 "선보이고" 그리고 "음영짓는" 그것은 노에마에 속한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의심 불가능하다"고 결론 짓는다(196, 강조는 필자).
*Q. 어째서 감각이 노에마 속에서 발견됨에도 불구하고 순수하게 노에시스적인 것으로 취급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근거가 필요하다.
A. 당시 심리학의 영향이 크다. 감각자료/내용은 심적인 대상이라는 것이 주류였다. cf. Stumpf / 착각일 수도 있기 때문에 감각자료/내용을 설정한 게 아닐까? (J씨) --> SEP 'sense data' / 감각자료 이야기는 '수동적 종합(1925)', C 원고(1930s)에서도 이어진다.
A2. 지각이 성공하면, 지향적 대상만 보이고 지각이 실패했을 때 비로소 비지향적 감각내용을 설정하게 되는데, 중요한 건 감각내용이 전자의 경우에도 토대로서 작동한다고 보는 게 이상하다. 사실상 표상주의랑 다를 바가 없어진다. 시간의식에서 말하는 내재적 대상도 감각내용 같고... 그렇다면 비지향적이라는 것도 이상하다.
**Q. 노에마로서의 색깔 역시 감각적 색조(sensory hues)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가? 모든 노에마가 동일자라는 것이 아니라 '동일자로 의식된' 노에마만 동일자라는 의미인가?
cf. 두 종의 노에마가 있는 것 같다. "The latter reference [about the correlate of consciousness] to essense includes, however, the kind of object pertaining to consciousness as such and, at the same time, the forms of the noematic manner of being meant or being given."(197)
그러나 질료[Stoff]는 본래적으로 노에시스적인 면모들에 의해서 혼이 불어넣어진다. 자아는 질료를 파악하고 그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비로소 대상을 지향한다. 이 같은, 혼을 불어넣는 파악 역시 체험의 내실적인 구성에 속한다. 그러므로 초월적으로 구성되는 대상은 질료에 대한 체험"을 기반으로" 하여 노에시스적 기능"을 수단으로 삼아" 비로소 주어지고, 이 주어짐을 순수 직관에서 충실하게 기술한다면 명증을 획득할 수 있다(196, 강조는 필자). 그럼에도 이 초월자가 의식에 내실적인 부분이 아님은 두 말할 것도 없다.
§98 노에마의 존재 방식, 노에시스의 형식들에 대한 교리[Formenlehre], 그리고 노에마의 형식들에 대한 교리 현행적인 작용과 그에 대한 반성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현상이다. 예컨대 작용 속의 내실적 내용은 현행적 작용에서는 지각되지 않지만, 반성 속에서 비로소 대상화된다. 작용에 대해 반성될 수 있는 각 부분들--예컨대 노에마, 내실적 내용, 전체 노에시스 등--은 그 자체로 완결적이지 않다(non-self-sufficient[unselbständig]). "노에마의 형상[eidos]은 노에시스적 의식 자체를 가리킨다. 둘은 형상적으로 상호소속되어있다."(198) 이와 같은, 자족성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물론 각 부분에 대한 형상학--노에마의 형상학, (질료적이거나 구체적으로(specifically, [spezifisch]) 노에시스적인 구성요소로 이루어지는) 노에시스의 형상학--이 성립할 수 있다. 다만 두 형상학은 서로에 대한 거울이미지로서, 즉 단순한 역으로서 성립하지 않는다. "노에마적인 것은 통일체들의 영역이며, 노에시스적인 것은 그것들을 "구성하는" 다양체들의 영역이다." 구성하는 의식 즉 구체적 노에시스들은 결코 동일성을 보이지 않는 반면, ""대상"의 동일성은 노에마적 상관자 속에서 주어진다."(199)
Q. (확인 질문) 후설에게 "그러그러하게 나타나는 대상"은 이미 구성된 자기동일적 대상으로 간주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자기동일적 대상들이 한 번 더 통일의 과정을 거쳐 시간에 따라서도 동일한 궁극적 통일체를 이루는 셈인가?
cf. 최일만(2008), p.136의 문제 제기
Q. 마지막에서 두 번째 문단을 이해하지 못했다.
A. 첫 번째 평행: 노에마의 핵심과 노에시스 사이의 평행(일 대 다의 평행), 두 번째 평행: 주변적 성격까지 고려된 노에마와 노에시스 사이의 평행(다 대 다의 평행)
§99 노에마적 핵심[Kern]과 무언가를 현전적으로-현전함과 현전화함[재현함]의 영역에서 그것의 성격들 동일한 "그러그러하게 나타나는 대상"은 서로 다른 주어짐의 방식에서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채 인식될 수 있다. 이 상이한 성격들의 예로 후설은 세 가지 현전화의 양상을 제시한다. 첫째는 지각에 대한 재생산적 변양으로 기억[그리고 예상]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는 이미지의식으로, 이미지의식에서는 ""이미지(picture, [Bild])"와 "표현된 것" 사이의 [...] 구분"이 중요하다(201). 따라서 이미지의식의 노에마는 서로를 지시하는, 그러나 서로 다른 그러그러한 대상-현전에 속하는 한 쌍의 성격들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 셋째는 기호의 현전[에 대한 의식]으로, 기호의식에서는 기호와 기호화된 것(signified) 사이의 구분이 중요하다.
Q. '성격[Charakter]'으로 후설이 정확히 지시하는 바가 무엇인가?
A. 핵심이 아닌 모든 것. 논리연구에서의 작용성질 + 직관적/비직관적(주목/잠재) 여부=이념들의 Charakter. 논리연구에서의 Materie가 이념들의 Kern.
§100 노에시스와 노에마에서 현전의 수준[Stufe]의 본질적 형성 여태까지 취급된 현전의 변양태들은 여러 수준에 걸쳐 노에시스와 노에마 상관관계를 이루며 서로를 말하자면 '감쌀(envelope[ineinanderschachteln])' 수 있다. 그 예로 후설은 기억에 대한 기억, 상상에 대한 상상, 이미지의식에 대한 이미지의식, 그 조합의 수가 무한한 혼합체들을 든다. 수준들의 개수는 이념적으로 무한하게 뻗어나갈 수 있다(e.g. 기억에 대한 기억에 대한 기억에 대한 기억 [...]).
§101 수준의 특징: "반성"의 다양한 종류 각 현전의 수준에서 노에마는 상이한 노에시스에 상관적으로 상이하게 규정된다. 각 수준에 따라 상이한 반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향성들의 다양체 내에서 초점은 어디에든 맞춰질 수 있으며, 반성이 번갈아 일어나는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Q. 이 가능성이 초월론적 현상학의 목표를 위하여 후설이 이야기하는 만큼 그렇게 중요한가?
A. 오이겐 핑크의 제6성찰이 결국 반성에 대한 반성이다. 반성에 대한 반성의 가능성은 후설에게 중요하다. (J씨)
§102 성격규정의 새로운 차원으로의 이행 후설은 계속해서 노에시스와 노에마의 구분을 순수직관의 결론으로서 현상학적 탐구의 전제이자 이정표로 삼는다. 이 연장선에서 그는 경험의 내실적 구성물[내실적 내재] 그리고 의식됨에도 불구하고 체험을 초월하는 통일체들[내실적 초재=지향적 내재] 사이의 구분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지향적 대상에 해당하는 후자는 "노에마적 "성격들"의 개별적(respective) 담지자인 노에마적 핵심, "그러그러한 지향적 대상""을 포함한다(205, 강조는 필자).
★ 지향적 대상은 노에마적 핵심(=의미)과 노에시스에 따라 상관적으로 달라지는 각종 성격들(존재성격, 작용성격, 주의 정도* 등)의 통합체인 것 같다. cf. 완전한 "정립들[명제들, Sätze]"이란 "의미의 핵심과 존재성격의 통일체들"에 해당한다(207).
*Q. (확인) 주의 정도 역시 성격에 포함되는가?
A. 포함된다. §92를 보면 노에시스와 노에마의 '주의적 변양(attentionale Abwandlung)'이 있다(J씨).
Q. 상술한 정의가 맞다면, '노에마적 핵심'과 '노에마 자체'를 동일시하는 의미적 해석은 사소하지만 간과하기 어려운 부조리를 낳지 않는가? 이념적 대상으로서의 의미는 그에 부착될 수 있는 각종 성격과 독립적으로 불변해야 할 것 같은데, 노에마는 상술한 성격들과 함께 변화하기 때문이다.
cf. "In unseren bisherigen Analysen spielte eine universelle noema tische Struktur ihre beständige Rolle, bezeichnet durch die Abscheidung eines gewissen noematischen "Kerns" von den wechselnd ihm zugehörigen "Charakteren", mit denen die noematische Konkretion in den Fluß verschiedenartiger Modifi kationen hineingezogen erscheint."(Hua III/1, 297)
§103 믿음성격과 존재성격 이어지는 절들에서 후설은 노에마적 핵심에 말하자면 부착될 수 있는 새로운, 현상학적으로 탐구가치가 있는 성격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자 한다. 존재의 양상에 상관적인 노에시스적 성격은 의견성격[doxische Charakter] 또는 믿음성격[Glaubenscharakter]이라 불릴 수 있다. 예컨대 같은 작용은 상이한 수준의 확신과 함께 수행될 수 있고, 그에 따라 노에마적 상관자의 현실성의 수준 또한 상이해진다. 확실한 믿음은 단순한 제안, 추측, 심지어는 의문시나 회의로 바뀔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존재의 양상[Modalität] 역시 "가능하게 존재하는", "개연적으로 존재하는", "의문시할 수 있게 존재하는", "의심스럽게 존재하는" 등으로 나뉜다.
§104 변양으로서의 의견적 양상 상술된 일련의 믿음 양상들[Glaubensmodalität]은 지향적 변양의 결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때 변양의 근원형식이 되는 존재 양상은 양상화되지 않은 "단적인 존재성격[der Seinscharakter schlechthin]"으로, 어떤 것이 "노에마[적으로] "확실하게" 또는 "현행적으로" 존재하는" 양상을 가리킨다(207, 강조는 필자). 이와 같은 양상을 가리키는 믿음을 우리는 근원믿음[Urglaube] 또는 근원의견[Urdoxa]이라 부를 수 있다.
cf. Nicholas de Warren은 근원의견을 “anchoring sense of “being,” that something, and the world, is”라고 정의한다. Nicholas de Warren (2015), Concepts without pedigree: The noema and neutrality modification, Commentary on Husserl’s Ideas I(Ed. by Staiti, A.), de Gruyter, p.248)
Q. (확인) 확신의 믿음성격을 가지는 노에시스가 확실한 존재성격을 가지는 노에마를 낳는 구도인가?
A. 그렇다. 믿음 - 존재 (J씨)
§105 믿음으로서의 믿음양상, 존재로서의 존재양상 그렇다면 이차적인, 즉 변양된 양상들은 근원의견을 소급지시하며[sich auf die Urdoxa zurückbeziehen], 그러한 변양이 나타나는 작용에 대해서는 고차원적 지향성들에서처럼 초점을 다양한 지점에 맞출 수 있다. 예컨대 초점은 추측하는 의식에도, 개연적인 바로 그것에도, 존재성격으로서의 개연성 자체에도 맞춰질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개연성-성격과 함께 구성적 의미를 가지는 "대상"이 존재로서 주어지"는 까닭에 "그와 관계해서는 [...] 변양되지 않은 의미에서 단적인 믿음"인 의식에도 맞춰질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체험은 [...] 근원의견이란 의미에서 믿음에 대한 의식으로 기능한다." 한편 노에시스와 노에마의 상관관계는 여기서도 근본적인 영향력을 발휘해서, 노에시스적 성격의 추가 또는 변양은 새로운 노에마적 성격을 산출할 뿐 아니라 "새로운 존재대상[Seinsobjekte]"을 산출한다(209).
*Q. '개연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단적인 믿음을 가진다는 뜻인가? 아니면 그저 개연적 존재 양상은 단적 존재 양상의 파생태이기 때문에 근원을 함께 의식할 수밖에 없다는 뜻인가?
A. (이 대목에서는) 개연성에 대해서는 확실한 믿음을 가진다(J씨).
§106 동의와 반대[Bejahung und Verneinung] 그리고 그것들의 노에마적 상관자들 동의와 반대 또한 특정한 믿음의 양상을 소급지시하는 고차원적 변양이다. 이 같은 변양은 지향적 체험으로서의--따라서 특정한 믿음성격을 지시하는--동의와 반대를 산출한다. 그러므로 부정[Negation]은 동의의 변양이 아니라, 어떠어떠한 "정립"에 대한 "변양"["Modifikation" irgendeiner "Position"]이다. 부정의 노에마적 성취는 [변양 이전의] 정립 성격에 대한 "X표시하기[Durchstreichung]"이자 단적인 "존재" 성격에 [비했을 때의] "비-존재"*의 산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연장선에서 예컨대 "불가능한[불가능하게 존재하는]" 등은 "가능한[가능하게 존재하는]"으로부터 부정변양되어 산출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부정이 동의의 변양이 아니라는 앞선 주장이 폐기되는 것은 아니다. 부정이 기존의 특정한 정립을 "X표시"해버리듯, 동의 또한 고차원적 변양으로서 기존의 특정한 정립에 "밑줄을 긋고[unterstreichen]" 또한 그것을 "승인[bestätigen]"한다. 이와 같은 작용들에서도 [반성 또는 주의의] 초점은 다르게 맞춰질 수 있다.
*Q. 후설은 여기서 '존재'(또는 '정립')에 역시 큰따옴표를 붙이며 '지향적 존재'(또는 '지향적 존재 정립')에 대한 개념화를 활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후설이 일의적이지 않은 또는 맥락에 의존하는 존재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cf. 그저 설명하는 차원에서 큰따옴표를 친 것일 수도 있다. 큰따옴표가 꼭 환원된 지향적 차원에서의 논의를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① 210쪽에서 제시되는, 부정 속에 살며 부정을 "수행"하는 예시는 현상학적 태도에서도 정립작용이 다만 환원을 거친 채로 (탐구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수행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특정한 작용--예컨대 지각--이 정립을 요구하는 한, 현상학적 태도에서는 다만 과거에 자연적 태도에서 이루어진 작용에 대한 반성만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물리치는 것 같다.
*해당 주장은 Beyer, Christian, "Edmund Husserl",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Winter 2020 Edition), Edward N. Zalta (ed.), URL = <https://plato.stanford.edu/archives/win2020/entries/husserl/>가 제시한 딜레마 중 첫 번째 해결책에 해당한다. (+Beyer의 의견과 달리 나는 중립성 변양과 환원이 서로 다른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자는 반복 불가능하지만, 후자는 반복 가능하기 때문이다(Hua VIII, §47).)
"However, this lands him in a methodological dilemma. If, on the one hand, the phenomenologist leaves the “natural attitude” and brackets his corresponding existence-belief, he cannot at the same time perform the perceptual experience he wishes to investigate. (This is the first horn of the dilemma.) For, as Husserl himself stresses (cf. Ideas, sec. 90, 109), the existence-belief is an indispensable part of the perceptual phenomenon: such experiences are essentially thetic, i.e., there can be no such thing as a perceptual experience without “belief-character” (cf. 5th Logical Investigation, sec. 23). If, on the other hand, our phenomenologist makes use of that belief, then he is bound to violate the constraints put upon him by the local epoché: he cannot but fail to assume the phenomenological attitude. (This is the second horn.)
There are at least three possible ways out of this dilemma. First, the phenomenologist could choose the first horn of the dilemma, but analyse an earlier perceptual experience of his, one that he now remembers. He just has to make sure here not to employ his earlier (and perhaps still persisting) belief in the existence of a perceptual object. Secondly, he could again decide in favour of the first horn and analyse a perceptual experience that he merely intuitively imagines himself to have. (For Husserl’s view on imagination see esp. Husserliana, vol. XXIII.) Thirdly, he could instead choose the second horn, keep employing his existence-belief, but make a kind of “pragmatic ascent” and describe the perceptual experience in such a way that the description, i.e., the speech act thus performed, does not presuppose the existence of a perceptual object. (The following sort of description may serve that function: “I am demonstratively identifying a so-and-so”; “I am performing an act of this-meaning under the aspect so-and-so”.) In any case, Husserl regards “bracketing” as what he calls the “neutrality modification” of a positing act, to be distinguished both from a corresponding supposition (hypothesis) and from what is commonly referred to as suspension of judgment, as in a case of serious doubt (cf. Hua III/1, 247 ff.)."(강조는 필자)
cf. 정립에 '참여하지' 않으면 되는 거지 정립이 없어야 하는 건 아니다. 따라서 애초에 딜레마가 생기지 않는다(J씨).
② '지향적 존재'에 대한 나의 단상(2020.12.26 작성, 2021.7.10 수정)
I. 지지난 주 수업 시간에 ‘(특정 대상을 직관 또는 사념하는 작용에 대하여) 현상학적 환원을 수행하는 동안에도 (해당 대상에 대한) 존재 정립을 현행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제기되었습니다. 특정 대상을 직관 또는 사념하는 작용에 대한 현상학적 환원은 해당 대상의 존재 여부에 대한 모든 믿음을 억제하는 작용인데, 대상에 대한 존재 정립이란 대상이 존재한다고 믿는 작용이므로, 두 작용을 동시에 수행한다는 것은--즉 대상의 존재에 대한 믿음의 문제에 관심을 끄면서 동시에 그 동일한 대상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모순이라는 잠정적 결론이 도출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II. 그러나 ⟪제일철학⟫ 2권 51강에서 후설은 대상의 존재를 정립하는 작용 역시 대상의 존재 여부에 대한 모든 믿음을 억제한 후에 또는 억제하면서 얻어지는 “순수하게 주관적인 것”에 포함된다고 말합니다. 현상학적 태도에서도 계속해서 유지되는 존재타당성이 있으며, (모든 타당성은 그 타당성을 부여하는 정립적 의식에 의해 부여되므로) 그와 같은 존재타당성을 비로소 부여하는 정립하는 의식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43강에서 제시되는 "변양된 타당성"이라는 표현도 같은 결론을 내리는 데 일조합니다.
이처럼, 만일 현상학적 환원 이후에도 모종의 변양된 존재타당성이 성립할 수 있고, 그와 같은 존재타당성을 성립하게 하는 정립 작용이 가능하다면, ‘(특정 대상을 직관 또는 사념하는 작용에 대하여) 현상학적 환원을 수행하는 동안에도 (해당 대상에 대한) 존재 정립을 현행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주장이 반드시 모순적인 것은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여기서 저는 존재 정립과 타당성 정립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타당성 정립은 결국 타당성의 존재에 대한 정립이며, 존재 정립은 결국 존재함이 타당하다는 정립이기 때문입니다.)
III. 그렇다고 해서 후설이 믿음의 문제에 관심을 끄면서 동시에 믿는다는, I에서 제기한 모순을 안고 가리라 예상되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확립된 명제 또는 개념에 특수한 조작을 가함으로써, 모순을 피하는 동시에 현상학적 환원과 정립적 의식의 동시적 수행 가능성을 열어주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이 문제가 앞서 확립된 명제 또는 개념에 특수한 조작을 가함으로써 해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대상에 대한 존재 정립이란 대상이 존재한다고 믿는 작용"으로 정의되었습니다. 만일 환원 이후에도 수행 가능한 존재 정립 작용에서 믿어지는 존재가 대상의 현실적 존재, 즉 의식으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라면 모순은 불가피할 것입니다. 하지만 환원 이후에도 수행 가능한 존재 정립 작용에서 믿어지는 존재가 대상의 지향적 존재, 즉 의식에 의존하는 존재라면 현상학적 환원과 모순을 빚을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때 존재 정립은 '현상(으로서의 존재) 정립'으로 재개념화됩니다.
IV. 만일 현상학적 환원의 수행 중에 이루어지는 존재 정립이 현상 정립으로서 새로이 이해된다면, 이 이해의 틀 하에서는 현상학적 환원이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억제하는지에 대한 해명이 요구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첫눈에 그럴듯해보이는 응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로 비현상학적인 태도에서의 작용들은 '(i)현상 정립+(ii)현상하는 바가 의식에 독립적으로 실재한다는 실존 믿음'의 구조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환원을 통해, 비현상학적인 태도의 거부를 통해 함께 거부되는 것은 (ii)이며, (i)이 환원의 수확물로 남아 의식의 지향성과 (환원이 초월론적인 성격의 것일 경우) 의식의 구성기능을 밝혀줄 것입니다. 문제는 지향성의 구조가 은폐돼있는, 이에 따라 세계가 즉자적 세계가 아닌 현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진실을 밝히지 못하는 비현상학적인 태도에서 위에서 제시한 구조대로 작용이 수행되리라고 확언하기는 어렵다는 점입니다.
V. 만일 IV의 가설을 기각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상학적 환원에서 나름의 존재 정립적 의식이 유지된다는 III의 결론을 보존한다면, 우리는 현상학적 환원이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억제한다는 것인지 재차 해명하라는 요구에 직면할 것입니다. 해결책이 될 수 있는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인 것 같습니다. 바로 자연적 태도에서의 작용들에서 이루어지는 존재 정립은 현실적 존재에 대한 믿음인 반면, 현상학적 환원이 이루어진 현상학적 태도에서의 작용들에서 이루어지는 존재 정립은 현상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기에, 후설이 현상학적 환원의 일종의 필요충분조건으로서 소개하는 '존재 믿음의 억제'는 사실상 '존재 믿음의 종류 변화'를 가리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현상학적 태도에서 대상을 지향하는 모든 체험이 곧 지향적 대상을 (변양된 의미에서) 타당하게 직관 또는 사념하는 체험이자 지향적 대상을 (변양된 의미에서) 정립하는 체험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방금 내려진 결론은 비단, 특정한 작용에 대한 현상학적 환원 중에 동일한 작용이 현행적으로 수행되는 굉장히 드문 경우들에서뿐만 아니라 현상학적 태도에서 작용이 반성되는 모든 일반적인 경우들에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I의 (표면적) 모순과 그에 대한 해결이 현상학적 환원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물음과 관련해 중요한 문제라고 여기고 있는데, 수업시간에 구두로 의견을 개진하기엔 사정이 복잡한 것 같아 글로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P1. 순수한 삶에는 정립작용이 포함된다. (후설은 적지 않은 곳에서 현상에 대해서도 정립이라는 술어를 사용한다. ⟪현상학의 이념(박지영 역, 필로소픽, 2020)⟫ 22쪽, Hua VIII §53b-2 등지를 예로 들 수 있다. 필자는 이것이 (초월론적 관찰자와 달리) 대상의 현상적 존재에 대한 정립을 수행하는, 즉 대상에 존재함이라는 의미를 비로소 부여하는 초월론적 주관의 활동을 잘 드러내줄 수 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후설이 이러한 활동의 존재를 인정함은 다음 인용문에서 드러난다. “[초월론적 환원 이후] 단지 세계는 판단중지가 일관되게 철저히 수행되는 가운데 세계에 존재의미를 부여하는 주관성—이것의 타당성을 통해 세계는 어쨌든 존재한다—의 상관자로서 순수하게 우리의 시선 속에 위치한다.”(Hua VI §41, 강조는 원저자)) P2. 모든 작용에는 그 작용의 대상적 상관자가 있다. (지향성 테제로부터) P3. 정립작용의 대상적 상관자는 대상의 존재타당성이다. (정립의 정의로부터) C1. 그러므로 순수한 삶에도 정립되는 존재타당성이 있다. (P1, 2, 3으로부터) P4. 현실적인 존재의 타당성 여부는 순수한 삶에서 배제된다. (환원의 개념으로부터) P5. 존재는 (주관의 태도에 따라) 현실적이거나 지향적이다. 다시 말해 존재는 의식으로부터 독립적인 존재이거나 의식에 의존적인 존재이다. 이에 따라 존재타당성 역시 의식으로부터 독립적인 존재타당성이거나 의식에 의존적인 존재타당성이다. C2. 그러므로 지향적인 존재의 타당성이 곧 순수한 삶에서 정립되는 존재타당성이다. (C1, P4, P5로부터) |
§107 반복되는[Iterierte] 변양들 존재성격의 변양은 이념적으로 무한한 연쇄를 이룰 수 있다. 예를 들어 '비-비-존재하는[존재하지 않지-않게-존재하는]', '불가능하지-않게-존재하는' 등의 존재 성격이 이념적으로 가능하다. 변양에 대한 논의는 변양되지 않은 근원적 형태를 (발생적 근원으로서가 아니라, 즉 발생의 문제와 독립적으로) 소급지시하는 노에시스와 노에마의 본질적인 독특성을 보여준다.
§108 "반성"의 규정들이 아닌[,] 체험의 노에마적 성격들 후설에 따르면 체험의 노에마적 성격들이 순전한 반성적 규정들로 취급될 심리학주의적 위험이 있다. 지향적 대상의 규정[으로서의 노에마적 성격]이 의식의 방식들을 소급지시하는 것으로[daß diese auf die Bewußtseinsweisen zurückbezogen werden], 다시 말해 순수하게 노에시스적인 것으로 잘못 환원될 수 있다는 뜻 같다. 예컨대 '부정된 것'이라는 지향적 대상은 특정한 "판단"의 대상을 부정작용에 대한 반성 과정에서 부정된 것이라고 규정했기 때문에만 비로소 성립하는 것이라고 잘못 취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정된 것'과 같은 지향적 대상들은 반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대상적 상관자에 대한 직접경험을 통해 주어지므로, 그와 같은 취급은 부조리하다.
cf. 존재성격과 믿음성격을 동일시하면 안 된다는 요지다. 노에시스에 대한 반성을 통해서 존재양상을 발견할 수 없다(J씨).
Q. "Damit hängt zusammen, daß auch vom Standpunkte der Wahrheit Nichtsein offenbar nur äquivalent und nicht identisch ist mit "gültig Negiertsein", Möglichsein mit "in gültiger Weise für Möglich-gehalten-sein" u. dgl."(Hua III/1, 247)에서 'äquivalent'와 'identisch'의 차이는 무엇인가?
A. 등가적이지만 동일하지 않다 --> 등가=논리학적으로 필요충분이다. Nichtsein-gültig Negiertsein / Möglichsein-in gültiger Weise für Möglich-gehalten-sein (J씨) 존재성격과 믿음성격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
§109 중립성변양[Die Neutralitätsmodifikation] 그러나 믿음의 영역과 관련해서 아직까지 해명되지 않은 가장 중요한 변양이 있다. 이 변양은 특정한 믿음의 영역에 속하지 않지만, "의식의 보편적인 변양"이라는 특수성을 가진다. 바로 "특정한 방식으로 [자신]과 관련된 모든 의견적 양상을 완전히 지양하고(cancel),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변양"이다. 후설이 '중립화[Neutralisierung]'라 부르는 이 변양은 부정의 변양과 구별돼야 한다. 후자는 결국 일종의 존재 양상에 속하는 비-존재를 실질적으로[positiv] 성취하지만 전자는 아무런 존재 양상도 "성취하지[leisten]" 않기 때문이다(213, 강조는 원저자).
cf. 중립화를 나타내는 다양한 표현들: "Sie liegt beschlossen in jedem sich-des-Leistens-enthalten[수행-그만두기], es-außer-Aktion-setzen[그것을-작동-밖에-두기], es-"einklammern", "dahingestellt-sein-lassen[결정하지 않은-채-내버려두기]" und nun "dahingestellt"-haben[결정-안-해놓기], sich-in-das-Leisten-"hineindenken"[수행을-마음속으로-생각해보기], bzw. das Geleistete "bloß denken", ohne "mitzutun"."(Hua III/1, 248, 강조는 필자)
후설은 중립화변양이 의지적 행위[willkürliches Tun]를 함께 표시하기는 하지만[mitzeichnen], 중립화변양된 것을 취급함에 있어 "의지와 연결된 모든 것을 도외시"하는 동시에 의심스럽거나 가설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아야 비로소 다른 모든 정립성격이 탈각될 수 있다고 말한다(214, 강조는 필자). 중립화하는 주관은 작용을 수행함에 있어 더 이상 진지하지[ernstlich] 않다. 중립화하는 작용의 대상적 상관자 역시 "현실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순전히 생각된" 무언가로 철두철미 변양된다. "모든 [순전히 생각된] 것은 변양하는 "괄호들"을 가지고 있다. [이 괄호들은] 현상학으로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너무나 중요하고 우리가 아주 예전에 이야기했던 괄호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214)* 요컨대 중립화 변양에서 중요한 구분은 단적인 정립과 중립화된 정립[Die neutralisierten Setzungen] 사이의 구분이다.** 중립화된 정립의 대상적 상관자는 그에 대한 현실적인 술어화가 불가능하다.
*Q. 중립화 변양과 초월론적 환원 사이의 관계는 정확히 무엇인가? 후자의 경우 그것이 의지의 절대적 자유에 달려있다는 사실이 무척 강조되므로 둘이 동일한 것 같지는 않은데, 관련된 서술들이 유사해서 헷갈린다.
① 'Als ob ~'의 변양, 즉 "Scheinkonstitution"으로 이해하자는 Fink (1966)의 제안(de Warren (2015), p.251)
②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철학자로서 후설의 [미완결된] ‘방랑(wandering)’의 산물 중 하나다. 사르트르의 구토와 레비나스의 불면증 개념으로 변주된다(de Warren (2015), p.252). [실존 자체, 실존의 익명성에 대한 경험. 나의 믿음으로부터 독립적인, 순수한 ‘있음’에 대한 경험.]
A. 환원은 단순한 반성일 수도 있다(J씨).
**후설이 중립화 역시 일종의 '정립'이라고 말하는 것이 흥미롭다.
§110 중립화된 의식, 이성의 평결[Rechtsprechung], 그리고 가정[das Annehmen] 진정한 데다(authentic[eigentlich]) 중립화되지 않은 노에시스들은 이성의 평결 대상이 되는 반면 "중립화된 노에시스들에 대해서는 이성과 비이성[합리와 불합리,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예컨대 무언가가 확실히 존재한다거나 가능하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성격규정은 이성에 의해 그 타당성을 따질 수 있지만, 순전한 혼자만의-사유(thinking to oneself[das bloße Sich-denken])는 아무것도 "정립"하지 않으며 특정한 입장을 취하는 의식이 아니므로 옳다고 인정되거나 그르다고 기각될 수 있는 노에마를 산출하지 않는다. 여기서 후설이 '혼자만의-사유'라고 지칭하는 중립성변양과 가설적 가정은, 나아가 중립성변양과 설명하고 파악하며 표현하는 논리적 사유는 상이한 것으로서 서로 혼동되지 않아야 한다.
§111 중립성변양과 공상[Phantasie] 조심해야 할 또 다른 혼동은 바로 중립성변양과 공상 사이의 혼동이다. 이를 설명함에 있어 후설은 우선 둘의 중첩되는 성격을 소개한 뒤에 비로소 구별을 도입하는 서술전략을 취한다. 후설에 따르면 공상은 의식의 보편적 변양에 해당하는 일반적 중립성변양과 달리 의식의 특수한(particular) 양태이기는 하지만, 중립성변양의 일종인 것이 사실이다. "공상함 일반은 "정립하는" 현전화, 즉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기억[Erinnerung]의 중립성변양이다."(215, 강조는 원저자) 모든 원본적인 현전의 체험에는 그에 평행하는 중립화된 변양태로서 공상이 이념적으로 존재한다. 이미지의식 또한 "지각의 중립성변양의 예시"로서 유사한 평행관계를 성립시킨다. 예컨대 모네가 그린 그림 속의 수련은 우리에게 그 어떤 정립의 양상으로도 나타나지 않으며 단지 "존재의 중립성변양 속에서 마치 정말 그러한 것처럼 존재함(being as though it were the case[seiend, aber als gleichsam-seiend])"의 양상으로만 나타난다(217).
cf. Phantasie와 Imagination은 다르다. 논리연구에서는 Imagination = Bildbewußtsein + Vergegenwärtigung(Phantasie 포함) (J씨)
§112 공상변양의 반복 가능성과 중립성변양의 반복 불가능성[Iterierbarkeit der Phantasiemodifikation, Nichtiterierbarkeit der Neutralitätsmodifikation] 그러나 중립성변양과 공상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현전화로서의 공상변양은 반복 가능한 반면(임의의 수준의 공상들이 존재한다, 공상 "속의" 공상), 중립화 "작업[Operation]"의 반복은 본질적으로 [그 가능성이] 제거돼있다는 것이다."(217) "원자화하고 물화하는 심리학"은 이와 같은 무한 반복의 가능성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지만, 이는 그와 같은 심리학적 입장이 자신들이 학적으로 인정하는 존재자와 전제로부터 지향성의 개념을 도출할 수 없다는 한계에서 비롯한 잘못된 이의 제기이다(218).
Q. 마지막 문단에서 "의도적인 환각"을 통해 후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대체 무엇인가?(218) 애초에 저게 어떤 사태인지도 모르겠다.
A. 우선 맥락은 공상-->공상은 자발적으로 가능한데 공상-->상응하는 지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후자의 실현 형식[neuen Form des realisierenden Handeins und Schaffens] 중 하나가 의도적 환각. 내가 한 공상을 지각 가능하게 해주는 상황에 자신을 집어넣는 상태. VR기계라든지...
cf. 후설은 42번 각주를 통해 중립성변양에 대한 이상의 논의가 제5논리연구의 39절에서 이미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그곳에서 제시되는, 상상적[imaginativ] 변양과 구분되는 한갓된 표상으로의 성질적[qualitativ] 변양이 곧 중립성변양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제5논리연구에서 후설은 객관화 작용을 해명하는 가운데, 상상작용Imagination을 정립적 상상과 비정립적 상상(예컨대 미학적 태도에서 이미지를 떠올리는 상상)으로 나누어 전자는 믿음성격을 담지하는 반면 후자는 그렇지 않다고 분석한다.
➔ §39 객관화하는 작용이라는 뜻에서의 표상과 표상의 성질적 변양 객관화하는 작용의 군Klasse은 성질상의 차이로 대립하는 두 하위군으로 나뉜다. 한 하위군은 믿음성격이나 판단성격을 가지는 작용들인 반면 다른 하위군은 그에 대한 한갓된 표상작용들이다. 모든 지향적 체험에는 그에 상응하는 한갓된 표상작용/표상체험이 있다. 이때 후설은 두 가지 구분을 도입한다. 첫째는 정립의 표상과 정립된 대상의 표상 사이의 차이다. 전자는 작용을 떠올리는 것이고 후자는 작용이 가해진 대상을 떠올리는 것이다. 둘째는 표상하는 객관화[vorstellende Objektivierung]와--예컨대 내가 어떤 것을 지각한 뒤, 내가 (i)그것을 (ii)지각했음을 표상하는 행위--한갓된 표상으로의 성질적 변양[qualitative Modifikation] 사이의 차이다. (기존의 체험과 한갓된 표상으로 성질적으로 변양된 체험 사이의 차이는 동일한 표상적 대상성에 대해 기존의 체험은 존재를 정립하는 한편 변양된 체험은 존재에 대한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dahingestellt sein läßt]. 예컨대 존재를 정립하는 지각이나 기억에는 동일한 질료에 대한 한갓된 상상이 상응한다.) 두 번째 구분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들어보자. 둘 사이 첫 번째 차이는, 표상하는 객관화는 무한 반복이 가능한 반면 한갓된 표상으로의 성질적 변양은 한 번만 가능하다. 둘째로 전자는 모든 대상에 대해 가해질 수 있는 반면 후자는 오직 [믿음성격이나 판단성격을 가지는] 작용들에만 가해질 수 있다. 셋째로 전자의 표상은 오로지 명목적인[nominal] 반면 후자의 표상에는 그와 같은 제한이 없다. 넷째로 전자는 성질은 건드리지 않고 질료 상의 변화를 야기하는 반면 후자는 문자 그대로 성질의 변양이다. 표상에 대한 표상이 현상학적으로 입증불가하다는 오해는 이 둘 사이의 구분을 망각한 데서 온다. 한편, 한갓된 표상과 대립하는 것은 표상되는 대상, 즉 표상되는 원본적 작용이 아님을 유의해야 한다. 소망의 한갓된 표상과 대립하는 것은 소망 자체가 아니라 소망의 [내적] 지각(소망의 존재를 정립함) 같은 것이다. 소망의 한갓된 표상과 소망의 [내적] 지각은 모두 객관화하는 작용에 속하지만 소망 자체와 소망에 대한 지각, 상상 등의 표상은 객관화하는 작용과 다른 유에 속한다.
§113 현행적[aktuell] 정립과 잠재적 정립 이어서 후설은 현행적 정립과 잠재적 정립을 구별하면서, 현행성에 두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믿음 성격이 부여되었다는 의미에서의 현행성이고, 다른 하나는 잠재적이지 않고 현재 주목이 가미된 채로 수행되고 있다는 의미에서의 현행성이다. 현행적 체험은 "현상학적 시간의식에서 구성된 시간적 통일체"로서 존재성격을 담지한다(219).
Q. "근원적 시간의식 자체가 지각적 의식처럼 기능하며, 그에 상응하는 공상-의식에서 자신의 짝[Gegenstück]을 가진다"는 후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Hua III/1, 255).
A. 근원적 시간의식의 말하자면 대상은 체험Erlebnis이다. 그래서 근원적 시간의식은 체험을 잠재적으로(주목 없이=현행성 없이=반성 없이=암묵적, 수동적으로) 정립한다(J씨).
후설은 예시를 통해 현행적 정립, 중립화된 정립, 그리고 잠재적 정립 사이의 구분을 해명하고자 한다. 현행적 지각의 경우, 대상은 당장 몸소 현전할 뿐 아니라 자아의 정립적인 파악을 겪는다. 반면 이미지 또는 그림에 대한 중립화된 의식에서는 "이러한 정립하는 실존의 현행성이 중립화된다"고 말할 수 있다. 주관은 그 무엇도 현실적인 것[Wirkliches]으로 파악하지[포착하지, erfassen] 않고 허구[Fiktum]를 파악할 따름이다. 여기서의 파악은 "현실적" 파악이 아니라 "파악된 것이 "마치 정말 그러한 것처럼"이라는 변양을 겪는 순전한 파악[bloße Erfassung in der Modifikation des "gleichsam"]"이다. 그런데 만일 주관의 주의가 허구로부터 멀어지면, "중립화된 정립의 형태에서의 현행적 주의는 잠재성으로 넘어간다."(220)
잠재적 정립의 또 다른 예로 모든 지각과 함께 주어지는 지각적 배경에 대한 인식을 들 수 있다. 지각적으로 파악된 특수한 대상을 둘러싸고 있는 이 배경은 현출하기는 하지만 "특수한 실존의 정립들을 결여한다. [...] 우리의 초점은 그것들의 존재를 현행적으로 정립하는 방식으로 그것들에 맞춰질 수 있다. 그것들은 어떤 의미에서 잠재적 정립들의 통일체다."(221) 그러므로 ""잠재적 정립들"을 현실화함은 필연적으로 그에 상응하는 계속해서 새로워지는, 현행적 정립들로의 초점 변화(주의의 현행성)로 이어지며 이 모든 사실은 이들의 사태의 본질에 본래적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평행하는 중립성변양들로 넘어가면, 모든 것이 "마치 정말 그러한 것처럼"이라는 존재의 변양으로 변모하며 심지어는 "잠재성" 자체도 그러하다."(221) [후설은 두 종류의 잠재적 정립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하나는 단순히 현행적 정립과 대비되는 잠재적 정립이고, 다른 하나는 중립성변양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서의 잠재적 정립이다.]
§114 정립의 잠재성과 중립성변양에 대해 추가해서 후설은 중립성변양의 특유성을 이렇게 표현한다. "상황은 다음과 같다. 중립성변양은 현행적 정립들(현실적으로 정립된 몇몇의[einzig] 정립들)에 부착되는 특별한 변양이 아니라, 그 대신 그 어떤 의식이라도 가지는 근본적으로 본질적인 특유성, 근원믿음을 정립하는 일의 현행적 가능성 또는 불가능성과 관계하는 방식에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특유성과 관련된다." 나아가 "모든 코기토 속에는 [그에] 정확하게 상응하는 짝이 본래적으로 존재한다." 이때 코기토의 "노에마는 그것에 정확하게 상응하는 짝-노에마를 평행하는 코기토에서 가진다."(223) 한 코기토는 "현행적으로 정립하는" 코기토로서 무언가를 현행적으로 성취하고, 다른 코기토는 진정하지 못한(inauthentic[uneigentlich]) 코기토로서 전자의 코기토가 성취한 것을 거울이 그러하듯 되비출 뿐이다[spiegeln]. 노에마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구성된 노에마적 성취는 동일한 성취에 대한 "순전한 사유"와 평행을 이룬다.
그러므로 지향적 체험은 서로 평행하는 구성과 구성에 대한 순전한 사유로 양분된다. 이와 같은 양분 및 평행관계는 감정과 의지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성립한다. 근본적으로 의식 일반이 "원형과 그림자, 정립적인 의식과 중립적인 의식"으로 나뉘어있는 것이다. 이 중립적 체험들을 위해 가능한 단 하나의 의견적 정립은 "내재적 시간의식의 자료로서 [체험들]에 속하[게 해주]는 정립"뿐으로 이 정립은 "변양된 노에마의 변양된 의식으로서만 [체험들]을 규정한다."(225, 강조는 필자)*
*"Bloß eine doxische Setzbarkeit verbleibt auch den neutralen Erlebnissen : die zu ihnen als Daten des immanenten Zeitbewußtseins gehörige, sie eben als modifiziertes Bewußtsein von einem modifizierten Noema bestimmend."(Hua III/1, 261) ➔ 초월적 대상뿐 아니라 (시간의식상 구성되는 체험으로서의) 내재적 대상 역시 모종의 정립의 산물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Q. "정립성은 그러므로 현행적 입장이 당장 취해졌거나 수행되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현행적으로 무언가를 정립하는 의견적 작용들의 수행의 특정한 잠재성을 표현할 뿐이다."(225, 강조는 필자)라는 문장은 내재적 대상 및 중립화된 대상의 정립을 잠재적 정립에 해당하는 것으로 만드는가?
A. 의견적인 것이 있으면 잠재적이든 현행적이든 간에 정립이다. 그러나 중립성변양은 의견적인 것이 없으므로 구분돼야 한다(J씨).
cf. "Innerhalb dieses allgemeinen Vorzugs doxischer Modalitäten überhaupt hat dann aber die doxische Urthesis, die Glaubensgewißheit, den ganz besonderen Vorzug, daß diese Modalitäten selbst in Glaubensthesen umzuwandeln sind, so daß nun wieder alle Neutralität an der doxischen Potentialität in dem ausgezeichneten, auf die Urthesis zurückbezogenen Sinne ihren Index hat."(Hua III/1, 264)
§115 응용: 작용의 확장된 개념, 작용의 수행[Aktvollzüge], 그리고 작용의 자극[Aktregungen] 작용은 수행된 작용과 그렇지 않은 작용으로 나뉜다. "후자는 "수행 밖으로 휩쓸린[außer Vollzug geraten]" 작용들이거나 작용의 자극들이다."(227, 강조는 원저자) 이러한 자극들은 지향적으로 체험되지만 "자아가 그것들 속에 "수행하는 주체"로서 살지 않"는다. 코기타치오네스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노에마적인 것을 성취하는 것이다. 후설은 이로써 작용의 개념이 확장된다고 말한다. "[...] 작용의 수행은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태세들[Stellungnahme]"을 이루고, 태세에 대한 논의는 [...] 정초된 작용들"을 소급지시한다(e.g. 증오의 태세*, 227). 이렇게 확장된 작용의 개념 하에서도 정립성과 중립성은 구분된다.
*'Position'을 '입장'으로, 'Stellungnahme'를 '태세'로, 'Einstellung'을 '태도'로 번역했다.
Q. 첫 문단의 마지막 몇 줄에 제시된 예시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Aktregungen'이 애초에 뭔지 모르겠다.
A. 미리 어떤 경향성을 가지는 사태에 대한 이야기 아닐까? / Aktregungen=잠재적 지향적 상태. Regung=작용이 촉발되는 것. 작용이 아직 수행/실행된 것은 아닌데, 수행/실행되도록 자극이 일어나는 것. '촉발'(Affektion, Ideen II). 배경의식을 염두에 둔다고 생각하면 된다. (J씨)
cf. 후설에게 작용의 좁은 의미=코기타치오네스(227)
§116 새로운 분석으로의 이행: 정초된 노에시스들과 그것들의 노에마적 상관자들 여태까지의 논의는 [현상학적 결론들을 확정 짓는 것이 아니라] 노에시스와 노에마의 이분적 구도가 야기하는 문제군을 제시하는 데 할애되었으며, 그 가운데 현전의 작용들에 현상학적인 우선성이 주어졌다. 이제 후설은 그와 같은 현전에 의해 정초되는 지향성들을, 노에시스적 종합의 편에서든 "정초된 종류의 "정립""의 편에서든 탐구하고자 한다(229). 예컨대 "감정, 욕망, 의지의 노에시스들"은 "지각, 기억, 기호-현전 등"의 현전(화)에 의해 정초된다.
이 새로운 지향적 구조에서 역시 노에시스의 본래적 계기들이 변하면 노에마의 본래적 계기들이 함께 변한다. 또한 새로운 믿음 양상, 새로운 종류의 파악, 새로운 종류의 대상(e.g. 가치)이 현상학의 연구 영역 안으로 등장한다. 다만 정립적 성격에 대한 논의는 새로운 연구 영역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예컨대 가치의 존재는 확실하게 정립될 수도, 개연적으로 정립될 수도, 정립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한 지향적 구조물 내에서 주의가 다양한 방향으로 발산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117 정초된 정립들과 중립성변양의 교설의 결론: 정립의 보편적 개념 후설은 감정 및 의지와 관련된 작용의 경우 중립성변양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묻는다. 감정 및 의지와 관련된 작용들 역시 "극단적으로 넓지만 본질적으로 통일된 의미에서 "정립들[Setzungen]"이다. 단지 그것[정립]들이 정확히 의견적 정립들이 아닐 뿐이다. [...] [이 같은] 작용들의 성격들 일반은 "정립들[Thesen]", 확장된 의미에서의 정립들이고, 그것들은 오직 특수한 의미에서만 믿음 또는 양상 자체의 정립들이다."(231, 강조는 원저자) 풀어 말해 가치평가하는 작용, 소망, 욕망 모두에서 무엇인가가 "정립"되며, 각 작용 안에 자리하는 의견적 정립성과 독립적으로 그러하다. [정초하는 객관화적 작용의 의견적 정립(믿음성격을 가지게 함)과 정초된 비객관화적 작용의 새로운 정립이 나뉜다는 뜻 같다.] 정립에는 다양한 종류 또는 성격이 있으며, 그 중에는 "자신 안에 다른 모든 [정립]들을 통일하고 그것들을 철두철미 지배하는" 아르콘적인[archontisch] 정립이 있다(232).*
후설은 이제 보편적인 "정립"의 개념을 세우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의식은 현행적이거나 잠재적으로 "정립적인 것[thetisches]"이다(232, 강조는 필자). 이로써 정립의 개념은 확장되고, 이에 평행하여 중립성변양이 적용될 수 있는 영역 역시 확장된다. 어떤 고차원적인 작용이든 (저차원적 작용과 마찬가지로) 확실하거나, 개연적이거나, 의심스러운 등등의 양상으로 [따라서 경우에 따라 진정하지 않은 중립화된 양상으로도]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Q. 아르케적 정립에 무엇이 해당하는가?
A1. 근원의견적 정립(믿음의 확실성의 정립)인 것 같다. "어떤 유에 속하든 모든 정립은 [...] 현행적, 의견적 정립으로 변형될 수 있다."(233)
A2. 아니다. 고차원적 정립이다. 저차원적 정립들을 모두 아우르는. (J씨)
Q. 가능적 존재는 확실한 존재의 파생태이며,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 난 직관 못하겠다.
"정립적 작용은 정립하지만, 어떤 "성질" 속에서 그것이 정립하든, 그것은 또한 의견적으로도 정립한다. 그것에 의해 다른 양상들에서 정립된 것은 무엇이든지 존재로서도 정립되는데, 단지 [그 존재 정립이] 현행적이지 않을 뿐이다."(233) "이런 방식으로 모든 정립적 성격 속에는 의견적 양상이 집어넣어져있다[stecken]." 그러므로 "모든 작용 또는, 더 낫게는, 작용의 모든 상관자는 자신 안에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무언가 "논리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다."* 작용과 작용의 모든 대상적 상관자는 "표현[Ausdrückens]"의 노에시스적 층위를 빌어 논리적으로 풀어말해질 수[explizieren] 있는 것이다. (이 표현작용 역시 중립성변양을 겪을 수 있다.) 이에 따라 "모든 작용들 일반--감정과 의지의 작용들을 포함해서--은 "객관화하는", 근원적으로 대상들을 "구성하는" [작용들]이다. 그것들은 다양한 존재 영역의 필연적 원천들이며, 이와 함께, 유관한 존재론들의 원천들이기도 하다." 예컨대 가치평가하는 의식은 가치론적 대상성이라는 새로운 존재 영역을 구성한다. 다만 "의견적인 코기토만이 객관화의 [잠재적이지 않고] 현행적인 작용을 수행한다." 이로부터 "논리적인 차원, 궁극적으로는 술어적 판단의 차원의 보편성"이 설명된다(234, 강조는 필자).
*Q. Doxisch와 logisch 사이의 관계는 정확히 무엇인가? 어떤 경로로 전자는 후자의 성격을 발현시키는가?
cf. "Daß "Glaube" und "Urteil" im logischen Sinne nahe zusammengehören (wenn man sie nicht geradezu identifizieren will), daß Glaubenssynthesen ihren "Ausdruck" finden in den Formen der Aussagesätze, das wird ja niemand bezweifeln."(Hua III/1, 278)
A. 로긱=독사가 어떤 구조를 가지는지 탐구하는 것. 로긱 / 악시올로기 / 프락틱의 구도. 우리가 의견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에 대한 탐구가 논리학=지. 의견적=논리학에서 다룰 수 있는. 그러나 형식적 존재론과 본래적 의미의 논리학이 또 구별됨을 염두에 두자(J씨).
§118 의식의 종합들과 통사론적 형식들 종합적 의식에서는 서로 다른 의식들이 연결되어[verbunden], "합쳐진 노에시스들의 노에마들에 의해 정초된" 하나의 노에마를 상관자로 가진다. 이와 같은 연결은 "내재적 시간의식의 통일성" 덕분에 가능하며, 연결의 결과 생겨난 작용통일체들은 체험의 흐름 속에서 지속하며 현상학적 시간을 채운다[erfüllen](235)."* 후설은 이제 이처럼 서로 다른 작용들이 하나의 구조적 통일체를 이뤄 고차원적인 작용을 가능케 하는 "구조화된 종합", 즉 "다정립적[polythetisch] 종합"을 다루고자 한다(236, 강조는 원저자). 이러한 종합의 예로는 '타인을 위한 소망', '선호', '모으기[kollegieren]', '분리시키기[disjungieren]', '풀어내기[외현하기, explizieren]**', '관련 짓기[beziehen]' 등이 있으며, 이들은 한편으로 "형식적-존재론적 형태들" 즉 "종합적 대상성들의 순수한 형식들"을 규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철두철미 노에마적 지향을 가지는 명제의 의미형태에 대한 형식논리학에 반영돼있다.
*후설은 내재적 시간의식의 통일성이 능동적이지[aktiv] 않지만 불연속적이지도[diskret] 않다고 말함으로써 수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연속적인 종합의 가능성을 지시하고 있다.
**Q. 'Explikation'은 정확히 어떤 작업인가?
A. 선술어적 E가 있고 술어적 E가 있는데, 전체로부터 부분을 부각시키는 작용이다. 가령 사과에 주목했다가, 사과의 빨강색의 계기에 주목하는 것이다. 술어적으로는 '사과가 빨갛다'는 판단이 되고, 선술어적으로는 부분 지각으로의 이행이 된다.(J씨)
§119 다정립적 작용들의 단정립적 작용들로의 변형 제각각 나름대로 고유한 노에시스들 여럿으로 구성된, 다정립적이고 구조화된 종합 작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되어있으며, 각 노에시스의 층위에 상관적인 노에마와 대비되어 하나의 "전체 대상"을 가진다. 이와 같은 작용 가운데서 "종합적 의식 또는, 더 낫게는, 그 "속에 있는" 순수 자아는 여러 지향적 빛살을 통해[vielstrahlig] 대상적인 것을 향한다."(237) 종합에는 복수의 정립작용이 관여되어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러 지향적 빛살을 통해 의식된 것은 본질적 법칙에 따라 하나의 지향적 빛살만으로도 의식되는 것으로 변화할 수 있다. 다정립적 작용을 단정립적 작용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본질적으로 존재한다. 이와 같은, 말하자면 단번의 파악 가능성의 법칙을 논리학에서는 "명사화[Nominalisierung]"의 법칙--명제적인 것을 명사적인 것으로 바꾸는 과정이므로--이라 불린다. 예를 들어 '나는 일요일 오후에는 카프카를 읽거나 낮잠을 자고 싶다'라는 분리 및 소망의 의식은 '일요일 오후 카프카를 읽거나 낮잠을 자고 싶다는 것--dass ich an einem Sonntagnachmittag Kafka lesen oder einen Mittagsschlaf halten möchte--이라는, dass절의 형태를 가진 명사절로 명명될 수 있다. "명명"을 통해 생성된 개념들은 "대상성 일반의 관념에 형식적-범주적 변주를 형성하며 그 안에 포함된 형식적 존재론과 모든 형식적-수학적 분과들을 위한 근본적 개념적 재료(material)를 마련한다."(238)
§120 종합의 영역에서의 정립성과 중립성 모든 진정한 종합들은 단순한 정립들로 이루어져있으므로 그들 자신이 다만 고차원적 수준에서의 정립들이다. 그러므로 정립성 및 중립성과 관련된 이전의 논의들은 여기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다만 정초하는 작용의 정립성 및 중립성과 정초되는 작용의 정립성 및 중립성 사이의 가능한 다양한 관계들은 새로운 탐구거리가 된다. 후설에 따르면 종합(적 작용)의 정립적 성격은 그것을 정초하는 노에시스들에 의존하며, 종합적 작용은 종합을 이루는 모든 노에시스들이 정립적이어야만 비로소 정립적일 수 있다.
§121 감정[Gemüts-]과 의지의 영역에서의 의견적 통사론 후설은 이러한 종합이 그 안의 의견적 통사론을 통해 명제의 통사론적 형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종합들은 물론 단순히 의견적인 것이 아니라 의견적이지 않은 정립들의 본질 또한 가지고 있다. '집합적 소망(e.g. 프랑스어도 배우고 싶고 독일어도 배우고 싶음)' 또는 '집합적 사랑(e.g.아버지가 두 딸 모두를 단번에 사랑함=아버지가 두 딸 모두에게 단번에 사랑스러움이라는 가치를 부여함)'과 같이, 고차원적 종합작용은 실천적이거나 가치론적이기도 하다. 후설은 이 경우, 의견적이지 않은, 예컨대 감정적인 '그리고'는 그 안에 그에 평행하는 의견적 '그리고'를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의견적이지 않은 종합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명제화하면 전체 종합을 의견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분석은 "가치론적이고 실천적 종류의 대상들의 본질, 그것들의 의미와 의식의 방식, 그러므로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개념과 지식의 "근원"의 문제들을 아는 데"(241-2) 매우 중요하다.
cf. 감정과 미학, 의지와 윤리학 사이의 연결고리가 자명하게 취급되는 것이 흥미롭다.
§122 명료화된[분절적, artikuliert] 종합들의 수행 양상들[Vollzugsmodi]: 주제 후설은 작용이 일반적으로 거쳐가는 또 다른 중요한 변양을 '주제 변경'과 관련해서 이야기한다. 종합은 특정한 개입지점[Einsatzpunkt]에 순수 자아의 "자유로운 자발성과 능동성"에 의해서 정립되고 근원적으로 생산된다[ursprüngliche Produktion]. 이때 순수 자아는 그 정립 속에 살며 창조적 시작의 주체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처음의 개입 양상은 다른 개입 양상으로 즉각 변화한다. 후설은 이 변화의 예시로 지각적 파악을 든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작용이 [이전의 정립물들을 유지하면서] (더) 복합적인 종합으로 나아가는 단계가 더해질 수 있다. 이 경우 순수 자아는 새로운 주제적 대상을 일차적 주제로서 파악하는 동시에 "동일한 전체 주제에 속하는 것으로서 이전에 붙잡은 부분[gefaßte Glied]을 여전히 붙들고 있다. [...] 그럼에도 현행성의 양식은 새로운 주제적, 근원현행성[Uraktualität]의 수행과 함께 본질적으로 변경된다." 이와 같은 정립의 변경 또는 확장 등의 노에시스적 현행성변양은 노에마적으로 ""그러그러하게 의미된 것"의 주어짐의 방식"을 변화시키며 새로운 노에시스적, 노에마적 층위를 고유하게 형성한다(243). 그런가 하면 순수 자아는 여태까지 붙잡고 있던 정립적 상관자들을 모두 말하자면 놓아버리고, 다른 주제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럼에도 이전의 주제는 그 명료한 세부들과 함께 의식에 잔존한다.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의식하지만 더 이상 우리의 주제적 통제[Griff] 속에 있지 않다."
Q. 마지막에서 세 번째 문단을 이해하지 못했다.
A. 같은 사태가 명사화돼서 명사 타입으로 인식될 수도, 명제로 인식될 수도. 아티쿨라찌온 = 어떤 대상이 어떤 논리적 형식을 가지고 있는 것/어떤 논리적 형식을 통해서 인식된다는 것.
§123 종합적 작용의 수행 양상들로서 모호함[혼동, Verworrenheit]과 판명함[Deutlichkeit] 이번에는 작용이 근원적인 지각이 아닌 다른 현실성의 양상에서 수행되기 시작하는 경우들을 고찰해보자. 생각은 모호한 생각으로서, 아무런 명료화 없이 단순히 현전할 수 있다. 어떤 복잡한 이론이 갑자기 떠올랐지만 오직 희미하게만 그리고 주의되지 않은 채 의식되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이때 순수자아가 해당 노에마적 대상을 나뉘지 않은 시선으로[in ungegliederten Griff] 파악하면 모호한 기억을 판명하고 명석한 것으로 만드는 새로운 과정이 시작된다. 이론은 예컨대 전제로부터 결론까지 단계적으로 전개되며 종합체로 변형된다. 모호함과 판명함 사이의 이와 같은 현상학적 차이는 ""표현"의 현상학, 명시적 현전들, 판단, 감정적 작용 등"을 해명하는 데 무척 중요하다(244). [애초에 표현이란 대부분의 경우 모호한 것을 판명하게 만드는 작업인지도 모르겠다.]
cf. Klarheit와 Deutlichkeit: e.g.피타고라스 정리가 무엇인지 분석하는 것과 그 정리를 직관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공허한 의식이 아니라 직관적 의식이 가지는 성격을 말하고, 후자는 대상을 모호하지 않게 분절해서, 명료하게 이해하는 성격이다. (J씨)
§124 "로고스"의 노에시스적-노에마적 층위: 의미함과 의미 상술된 모든 작용들은 무언가를 표현하는 논리적인 층위의 작용들과 얽혀있다[sich verweben]. 표현의 작용 역시 노에시스적 표현과 노에마적 의미로 나뉜다. 물론 우리는 아무런 "표현" 없이 "이것은 하얗다"라는 단순한 지각적 파악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얗다"가 생각[사고]되거나 명제화되면 지각의 층위와 더불어 그러그러하게 사념된 것의 새로운 층위가 생겨난다. "무엇이 "그러그러하게 사념되"든지 간에, 모든 사념은 임의의 작용의 노에마적 의미에서 (그리고, 확실히 하기 위해, 노에마적 핵심으로서) "의미들"을 통해 표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렇게] 제안한다: 논리적 의미는 표현이다. [...] 표현함은 의미 속에 근원적으로 자리한다. "표현"은 모든 "의미"(노에마적 "핵심")에 적응할 수 있는 놀라운 형식이며 [의미]를 "로고스", 개념적인 것, 그리고 그것과 함께, 보편적인 것의 영역으로 격상시킬 수 있다."(246, 강조는 원저자)
따라서 표현은 지향성의 다른 형태들의 형식과 내용을 거울처럼 되비추고 말하자면 흉내냄으로써 그에 고유한 개념성을 부여해주는 "특유한 지향적 매체"이다(246). 나아가 표현의 층위는 다른 지향성의 형태들과 달리 아무것도 새로이 생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표현하는 층위는 그것의 정립적 성격에 있어서 표현되는 층위와 완벽하게 그리고 본질적으로 하나다."(247) 따라서 표현하는 층위는 표현되는 하위층위(sublayer)*가 가지는 정립의 성격 또는 중립성을 고스란히 떠안는다. 왜냐하면 표현되는 층위와 표현하는 층위의 합치에 있어 오직 하나의 정립만이 있기 때문이다.
*종종 '토대[Unterlage]'라는 표현도 사용한다.
cf. ★ Bedeutung과 Sinn의 차이 "Der Deutlichkeit halber(판명성을 이유로) wollen wir das Wort Bedeutung für den alten Begriff bevorzugen und insbesondere in der komplexen Rede "logische" oder "ausdrückende" Bedeutung. Das Wort Sinn gebrauchen wir nach wie vor in der umfassenderen Weite."(Hua III/1, 285, 강조는 원저자)
cf. 표현과 의미의 근원에 대한 물음이 낳는 문제군의 나열(247), 보편성의 종류들(248)
§125 논리적 표현의 영역에서의 작용 수행의 양상들과 해명[Klärung]의 방법 작용 수행의 양상은 표현된[그것을 표현하는] 양상에 이중으로--한편으로 의미의 층위에, 다른 한편으로 정초하는 하위층위(들)에--영향을 미친다. 만일 의미함의 작용이 진정한 방식으로 수행되면 판명한 "논리적" 이해로 이어진다. 그러나 단어와 명제에 대해서는 판명하게 이해하고 있는 반면 그것들을 정초하는 하위층위[로서의 사태 자체에 대한 인식]은 명료함 없는 모호함에 휩싸여있을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차이는 곧 '해명'의 방법, 즉 어떻게 "모호한 사고로부터 진정하고 완전히 명시적인 앎으로, 판명하고 동시에 명석한 사고작용의 수행으로 이행"할 수 있는지를 탐구함에 있어 중요하다(249). 먼저 모든 "논리적" 작용들이 모호하지 않고 근원적이며 자발적인 현행성의 양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다음으로는 하위 층위에서도 모호성을 판명성으로 개선시키고 직관이 결여되어있는 곳에 직관을 채워넣어야 한다.
후설에 따르면 형식논리학의 모든 근본적인 법칙들은 "의미들의 주어짐, 즉 유관한 의미의 법칙이 처방하는 형태들을 표현하는 명제들의 주어짐"을 요구한다(249). 그러나 의미는 자족적이지 않기 때문에 감성적인 직관을 함유하는 하위층위를 불러들이는 예화 역시 요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하위층위는 만일 순수하게 논리적인 직관의 문제에서는--예컨대 "분석적" 앎을 얻고자 하는 경우--불러들여질 필요가 없다.
§126 표현의 완전성과 보편성[Vollständigkeit und Allgemeinheit] 후설은 또한 완전한 표현과 불완전한 표현 사이의 구분을 도입한다. "의미는 만일 그것이 하위층위의 모든 종합적 형식들과 질료들을 그 개념들과 의미들에 있어서 새겨낸다면[ausprägen] 완전하다. 표현은 만일 그것이 오직 부분적으로만 그러할 때" 불완전하다(250). 예를 들어 긴급한 상황에서 상황 전체를 표현해내지 않고 '불이야!'라고만 외치는 경우 표현은 불완전한 것이 된다. 완전성과 불완전성의 구분은 상대적 명석함 및 판명함과 교차한다. 그런데 표현의 본질에 속하는 또 다른 불완전성이 있다. 바로 표현은 결코 표현되는 것의 모든 특수성을 반영해내지 못한다는 뜻에서 보편성으로서의 불완전성이다. 표현함의 층위는 그 하위층위를 완벽히 복사해내는 층위가 아니다. 후설은 마지막으로 의미는 일반적으로 맥락을 필요로 하기에 맥락으로부터 고립된 단어만으로는 자족성을 결여한다는 점을 세 번째 불완전성으로서 짚어둔다.
§127 판단들의 표현과 감정적 노에마들의 표현 후설에 따르면 이제 의미의 영역에서 가장 오래됐고 어려웠던 문제 하나, 즉 "진술[주장, das Aussagen]는 어떻게, 판단의 표현으로서, 다른 작용들의 표현들과 관계하는지"의 문제가 현상학적 통찰들을 빌어 해결될 수 있다(251). 다른 작용들, 예컨대 감정적인 작용들은 오직 판단을 통해서만 우회적으로 표현을 획득할 수 있는가? 궁극적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의미작용의 매체, 로고스의 이 특유한 매체는 구체적으로 의견적인 매체인가? 의미하는 작용이 의미된 바와 합치하는 속에서, 그것[의미작용]은 모든 정립성 자체에 놓여있는 의견적 차원과 합치하지 않는가?"(252, 강조는 원저자)
결과적으로 후설은 위 질문들에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는 것 같다. 감정적이거나 의지적 작용은 그 안에 놓여있는 의견적 차원 덕분에 비로소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감정적이거나 의지적 작용 또한 다양한 의견적 변양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소망은 확실하게 이루어질 수도, 반신반의하면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e.g. "S may perhaps be P"). 전자의 경우에는 직접적인 표현이 가능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가장 적절한 표현을 찾기 위해 변양된 정립성[의 원본]을 참조해야 하므로 간접적인 표현만이 가능하다.*
*Q. 왜 이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애초에 직접적 표현과 간접적 표현은 무엇이 다른가?
A. 간접적 표현=형식적으로 소망문, 감탄문 등이 아니라 서술문인 경우(J씨). '제발 비 와라'는 직접 표현이지만, '아마도 비가 왔으면 좋겠다'는 간접 표현. 소망, 감탄 등에 양상이 부가되면 서술문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한다.
cf. 논리연구에서, 객관화적 표현만 있고 비객관화적 표현은 없다고 이미 말한 바 있다. '아 나 슬퍼'=나의 슬퍼하는 작용에 대한 내적 지각/반성의 표현. 모든 표현은 반성의 산물이다. 내 생각의 표현이므로. 그러나 스스로의 의견을 수정한 바 있어 애매하다(J씨).
4부 이성과 현실성
1장 노에마적 의미와 대상과의 관계
§128 서론 내실적인 것과 지향적인 것의 구분, 노에시스와 노에마의 구분은 "현상학적 방법들의 지배적인 주도동기[Leitmotif]"를 형성하며, 모든 탐구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의식의] 근본적인 구조이다(254). 지향성의 양면성을 충분히 포괄적으로 취급하지 않고 오직 노에시스적인 것에 치중해 탐구할 위험이 있지만, "그러그러하게 의미된 것"으로서의 노에마적 구조는 "의식의 객관성[대상성]과의 관계라는 현상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무척 중요하다(255). 4부에서는 대상의 타당성에 대해, 즉 이성의 문제들에 대해 현상학적으로 접근한다.
§129 "내용"과 "대상": "의미"로서의 내용 후설에 따르면 "각 노에마는 "내용", 다시 말해, 그것의 "의미"를 가지며, 의미를 통해 "그것의" 대상을 지시한다(refer to[bezieht sich auf])."(256, 강조는 원저자) 그러나 '작용', '내용' 그리고 '대상'이 어떻게 구별되고 어떤 뜻을 가지는지는 아직도 불명확하다. 후설은 ⟪논리연구⟫에서 노에시스의 측면에 치중해서 수행했던 "질료[Materie]"와 "성질"의 구분 그리고 그 근저에 놓인 "지향적 본질"과 "인식적 본질"의 구분을 노에마의 영역으로 확장 적용하여 명확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작용의 성격은 결국 "정립하는" 성격에 대응하며, "성질"에 특유하게 정립되는 "그것"으로서의 "질료"는 곧 "노에마적 핵심"에 대응한다. 지향적 체험의 노에시스적인 측면뿐 아니라 노에마 자체 내에도 "내용"과 "대상"이 구분돼야 한다. "[...] 노에마 또한 대상을 지시하고 "내용"을 소유한다. "내용"을 통해 노에마는 대상을 지시하며, 그 대상은 노에시스의 대상과 같은 대상이고, [이로써] 다시 한 번 [노에마와 노에시스 사이] "평행관계"가 완전히 확정된다."(258)
cf. 인식적 본질=지향적 본질+Fülle(얼마나 직관적이냐=얼마나 명석하냐=충만)
§130 "노에마적 의미"[라는] 본질의 제한(Circumscribing[Umgrenzung]) 후설은 모든 변양으로부터 독립적인 본질을 찾고자 '코기토가 그 속에 사는 정립하는 작용'에 집중한다. 살아있는 코기토는 객관적인[대상적인] 무언가에 "향해져" 있는데, 이때 그가 사념하고 있는 "대상성들" 자체는 "모든 "주관적인 표현들을 피해간다(258)." 다시 말해 그 객관적인 노에마적 핵심 또는 노에마의 내용은 주관이 무엇을 의식하고 있느냐와 관련돼있지, 주관이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의식하느냐--예컨대 판단을 통해 의식하느냐, 의심스러워하면서 의식하느냐 등--과는 관련돼있지 않다. 이 내용은 형식존재론적인, 영역존재론적인, 또는 실질적인(substantive[fachhaltig]) 술어들로써 규정된다.
cf. 각 규정의 예에 대해서는 258쪽 참조.
§131 "대상[Gegenstand]", "노에마적 의미에서 규정 가능한 X" 그런데 저 술어들은 그것이 술어화하고 있는 핵심--술어의 "담지자"--과 구별될 수만 있지, 분리될 수는 없는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 의식의 경과와 함께 동일한 대상이 다만 다른 술어들 속에서, 내용의 상이한 규정들과 함께 새로이 주어질 수 있기도 하다. 미규정된 술어가 규정되는 경우도 물론 있을 것이고, 없었던 가치가 마침내 획득될 수도 있을 것이다. 노에마에 대한 이러한 기술[Beschreibung] 가운데서 후설의 새로운 개념화가 이루어진다. "중심적 노에마적 계기(inherent aspect[Moment]): "대상[Gegenstand]", "객체[Objekt]", "불변하는 [존재자]", "가능한 술어들의 규정 가능한 주체"--모든 술어들로부터의 추상 속의 순수한 X"는 그것의 "술어들 또는, 더 정확하게는, 술어-노에마들"과 구분된다. 그러므로 지향적 체험의 다양체에서 "여러 개의 작용-노에마들은 여기서 두루두루 다양한 핵심들을 가지지만,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동일성의 통일체로 합쳐지는 방식으로 다양한 핵심들을 가지는 것"이며, 저 통일체는 모든 핵심 가운데서 규정 가능하고 동일한 것으로 남는다(260, 강조는 원저자). 유사하게, 서로 다른 분리된 작용들 역시 하나의 통일체로 합쳐질 수 있다. 이때 처음에는 분리돼있던 핵심들이 동일한 무언가로 [다시] 의식된다.
그러므로 통일체로 구성된 노에마적 "단적인 대상"과 "그것이 어떻게 규정되었는지에 따른 대상"은 서로 구분돼야 한다. 후자가 곧 "의미"에 해당하는데, 이때 후설은 이 "의미"를 더 섬세하게 [전체 대상의] 노에마적 "핵심"과 구분하려고 한다. 의미는, 그리고 의미에 속하는 의미-담지자로서의 공허한 X는 모든 노에마의 기본적인 구성요소이다. 그런데 여러 의미작용들이 서로 합치해서 전체 작용을 이루는 경우, 아니면 여러 지향적 빛살을 가진 종합적 작용의 경우에는 상이한 의미들이 통일되는 과정을 거쳐서야 비로소 전체 노에마적 핵심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cf. 의미를 가지는 X = 노에마적 단적 대상=불변하는 통일체 노에마에 대해서도 '단적인 대상'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X와 의미의 복합체로서의 전체 노에마는 의미가 변할 때마다, 술어적 규정이 다를 때마다 달라진다.
§132 충만[Fülle]의 양상에서의 의미로서의 핵심 후설은 노에마의 의미와 노에마적 핵심 사이의 구분을 보다 구체화한다. "우리가 규정한 것으로서의 의미는 노에마의 전체 구성에서 구체적인 본질이 아니라 그 대신 그것에 거주하는 일종의 추상적 형식이다." 만일 의미와 함께 [구체적으로] 사념된 것의 규정된 내용을 살펴보면 명석성의 충만성[Klarheitsfülle] 간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똑같이 규정된 내용이 명석하게도, 희미하게도(dim[dunkel])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체, 완전한 노에마적 핵심은 "그것[의미]의 충만의 양상에서의 의미"로 정의된다(262, 강조는 원저자).
§133 노에마적 정립, 정립적 그리고 종합적 정립들, 그리고 현전의 영역에서의 정립들 ⟪논리연구⟫에서의 "질료"로서의 "의미"--상이한 의미들은 하나로 통일될 수 있다--그리고 정립된 것으로서의 "정립(posit[Satz, Sätze])"은 모든 구체적인 노에마들에서 발견될 수 있는 추상적인 층위이다. 의미가 직관적인 충만과 결합하면 비로소 현출[Erscheinung]의 개념이 도출된다. 한편 "단적인 의미와 종합적 의미들 (즉 종합적 작용의 의미들), 최초와 고차원적 수준의 의미들"을 구분하는 등의 작업을 거치면 의미의 형식 또는 구조 일반에 대한 체계적이고 보편적인 교설을 형성할 수 있으며, 정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에 대해 체계적인 취급이 가능하다(264).
★ cf. 의미에 정립성격이 더해지면 비로소 참거짓의 성격을 가질 수 있고, 그래서 'Satz'라고 후설이 말하는 것 같다. 이를 '명제'라고 해석할 수도, '정립물'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J씨). ➔ 명제화라는 것을 얼마나 고차원적인 작용으로 이해하느냐에 따라 해석차가 있는 것!
§134 명제적[apophantisch] 형식들에 대한 교설 또한 노에마적 현상학은 "논리적" 의미들의 형식, 술어적 정립들, 즉 형식 논리학에서의 "판단"에 대해서도 형식적인 체계를 세울 수 있다. 다시 말해 판단의 가능한 모든 형식들을 규정하는 법칙을 세울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의견적 정립뿐 아니라 의견적으로 변양된 정립에 대해서 이루어지는 판단, 감정과 의지의 영역에서의 정립에 대한 판단 역시 법칙적으로 형식화될 수 있다. 기존의 모든 논리학의 공리들 그리고 개념들은 현상학의 장 안에 포섭되며, 논리에 대한 현상학적 탐구에서도 마찬가지로 노에마와 노에시스의 측면 모두를 고려해야 한다.
Q. 'apophantische Sätze'와 일반 'Sätze'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apophantisch'는 어떻게 번역돼야 하는가?
A. '명제론적인', '명제학적인', '명제논리학적인'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cf. 분석철학에서의 '명제 태도' 개념 ➔ 믿음이나 욕구를 가지는 것 자체가 명제 태도를 가지는 것. 심적 상태 자체가 명제화될 수 있게끔 구조화돼있다. (J씨) 후설은 현상적인 것에 대해서도 명제 태도의 개념이 적용된다고 보는 것 같다.* 정립이 있는 한, (그것을 문장 따위를 통해 명시적으로 표현하느냐 표현하지 않느냐에 독립적으로) 이미 명제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정립물'이나 '명제'나 똑같이 Satz의 번역어로 통용되는 것이며, 다만 정립의 명제적 성격을 얼마나 강하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정립물'과 '명제' 중 하나를 번역어로 선택할 뿐이다.
*그러나 후설이 비지향적인 감각자료 등을 상정하므로, 이 경우 정립도 의미부여도 안 된 것이다. 그러면 휠레는 명제 태도의 개념에 소속되지 않을 것인데, 휠레가 현상적인 것에 포함된다고 보면 저 문장은 틀릴 것. (J씨)
★ 지향됨 = 의미 부여됨 = 정립(또는 중립화변양된 정립)도 됨 = 대상이 구성됨
★ §135 대상과 의식: 이성의 현상학으로의 이행 모든 대상은 의식의 대상이다. 세계와 현실이 실제로 어떠하든지 간에 "그것은 현실적이고 가능한 의식의 틀[Rahmen] 안에서 그에 상응하는 더 직관적이거나 덜 직관적인 내용을 가진 의미들 또는 정립들을 통해 대변돼야만 한다(represent[vertreten]). 이로부터 후설은 현상학적인 환원을 통해 괄호 변양을 거쳐 배제된[ausschalten] 모든 것이 여전히 현상학의 틀 안에 소속돼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배제의 대상이 되는 실재적이고 이념적인 현실성들은 현상학적 영역에서 그것들에 상응하는 의미들과 정립들의 전체 다양체들을 통해 대변된다."(267) 한편 노에시스의 영역에서도, 휠레적 자료의 다양체들과 그에 대한 파악, 작용의 정립적 성격 등의 통일체는 "우리가 [...] 경험적 의식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을 이룬다."(268, 강조는 원저자)
cf. "Zum Beispiel ist also jedes wirkliche Ding der Natur vertreten durch all die Sinne und wechselnd erfüllte Sätze, in denen es, als so und so bestimmtes und weiter zu bestimmendes, das Korrelat möglicher intentionaler Erlebnisse ist."(Hua III/1, 310)
한편 후설은 모든 체험이 본질적이고 절대적이며 필연적으로 엄격한 법칙과 구조 하에 엄밀하게 형태화돼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이를 발판 삼아 후설은 새로운 형상적 탐구의 주제로 이행한다. 주관이 X를 다양한 정립들을 통해 의식하고 있다고 할 때, 이 X가 정말 현실적인 것인지, 아니면 현실적이지 않은데도 다양한 정립들이 다만 의식의 법칙들을 준수하며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 어떻게 판별할 것인가? 다시 말해 현실성에 대한 판단 또는 "이성의 평결"의 본질은 무엇이며, 나아가 "현실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오직 의미와 정립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대상들의 경우 "현실성"이란 말이 적용될 수 있는가? 적용될 수 있다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단순히 사념된 동일성과 현실적인 동일성 사이의 차이는 어떤 것인가? 이어지는 장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답을 추구한다.
cf. "Die Frage ist also, wie in phänomenologischer Wissenschaftlichkeit all die Bewußtseinszusammenhänge noetisch, bzw. noematisch zu beschreiben sind, die einen Gegenstand schlechthin (was im Sinne der gewöhnlichen Rede immer einen wirklichen Gegenstand besagt), eben in seiner Wirklichkeit notwendig machen. Im weiteren Sinne aber "konstituiert" sich ein Gegenstand - "ob er wirklicher ist oder nicht" - in gewissen Bewußtseinszusammen hängen, die in sich eine einsehbare Einheit tragen, sofern sie wesensmäßig das Bewußtsein eines identischen X mit sich führen.(Hua III/1, 313)"
2장: 이성의 현상학 후설에 따르면 이성적으로 사념되거나 말해진 것은 정당화, 증명 또는 분별[Erschauung]의 대상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타당성이나 현실성, 이성적 증명[Ausweisung]의 가능성을 본래적으로 지녀야 한다.
§136 이성적 의식의 최초의, 기본적 형태: 무언가를 원본적으로 부여하는 "봄" 후설은 이성적 의식의 존립[Bestehen]을 설명하면서 세 가지 구분들을 도입한다. 첫째는 ①정립된 것이 원본적으로 주어지는 정립적 경험과 그렇지 않은 정립적 경험 사이의 구분이다. 예컨대 지각과 기억은, 그리고 근거가 될 만한 통찰을 가지고 술어화된 공식과 맹목적으로 술어화된 공식은 상이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차이는 순수한 의미나 순수한 정립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동일하게 유지되기 때문이다. 차이는 "순전한 의미 또는 정립이 [...] 채워져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와 관련돼 발생한다(271). 즉 충만 그리고 충만을 가능케 하는 채워짐의 방식--예컨대 직관적이고 원본적이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나아가 후설은 이성적 성격이란 오직 정립적 성격, 그것도 무언가를 원본적으로 부여하는 채워진[erfüllt] 의미를 통해 정립하는 성격만이 동반할 수 있는 것이라고 천명한다. 이성적 의식은 몸소 현출하는 것에 의해 동기화되는[motiviert]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성적 정립은 "믿음의 확실성에 의해 근원적으로 동기화된다." 그렇다고 해서 원본적으로 부여하지 않는 다른 주어짐의 방식들이 아무런 정당성도 가지지 않는 것은 아니며, 후설의 표현에 따르면 "이차적인 이성적 성격"을 가지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근원적 근거의 특권을 결여하기는 한다. 이 [근원적] 근거는 정당성을 위해 근거들을 상대적으로 평가함에 있어 특출난[ausgezeichnet] 역할을 수행한다."(272, 강조는 원저자)
§137 명증과 통찰[Einsicht]: "원본적인" 그리고 "순수한", 확증적인[단정적인, assertorisch] 그리고 필증적인[apodiktisch] 명증 명증과 통찰은 충전적으로 부여된 내용으로서, 일반적으로 달리 인식될 가능성을 배제하는 수준의 고차원적인 이성적 작용에 의해 성립한다. 예컨대 풍경에 대한 지각과 수학적으로 참된 명제에 대한 통찰은 비록 둘 다 '봄'의 사례임에도 불구하고 상이한 말하자면 '명증도'를 가진다. 여기서 후설은 이전 절에서 개괄하지 않은 나머지 구분들을 도입한다. 바로 ②'봄'은 본질에 대해서도, 개별적인 것에 대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고 ③본질적인 것의 영역에서의 원본적 주어짐은 충전적인 반면, [일반적] 체험의 영역에서의 원본적 주어짐은 비충전적이라는 점이다. 전자는 필증적인 봄인 반면, 후자는 확증적인 봄이다. 한편 통찰된 바를 정립된 개별자에 적용하려는, 그래서 특정한 개별자가 본질적으로 꼭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류의 지식은 이 둘의 혼합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명증'과 '통찰'을 개념적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명증'은 '필증적 분별[직관, Erschauung]'에만 해당하는 '통찰'까지 아우르는 더 보편적인 개념이다. 이로써 ""원본적 체험"이라는 표현은 어떤 주어짐의 원본적 성격과 관계하여 동기화된 것으로 성격규정되는 모든 이성적인 정립을 위해 사용될 것이다." 필증적 분별과 확증적 분별은 본질적으로 같은 유에 속하며, "이성적 의식 일반은 정립적 양상들의 최고유를 지정한다"는 것이 이렇게 밝혀진다(274, 강조는 원저자). 이제 후설은 명증과 관련한 구분들을 도입하는데, 첫 번째는 앞선 분류에 따른 필증적 명증과 확증적 명증 사이의 구분 그리고 순수한 명증과 불순한 명증 사이의 구분이다. 순수하지 않은 명증의 경우 사실적인 것, 즉 그 개념상 결코 최고도로 명증적일 수 없는 대상성을 취급한다.
★ 이성적이다 = 명증을 가진다.
cf. Erfassen = 주목을 가진 채, 즉 현행적으로 파악하는 것 = '포착' <-> Auffassen = 현행적이지 않은 파악도 포함.
§138 충전적이고 비충전적인 체험 두 번째 구분은 충전적인 주어짐과 비충전적인 주어짐 사이의 구분이다. 몸소 현출하는 것을 그 자체로 의식하는 경우라 해도, 그 의미가 일면적으로만 직관되고 다양한 부분들이 미규정된 채로 남을 수 있다. 외부 대상에 대한 지각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미규정성 그리고 그에 따른 불충전성은 지각의 필연이다. "(사물들을 비충전적으로 부여하는) 그와 같은 현출에 기반하는 그 어떤 이성적 정립도 "확정적"일 수 없다는 것, 이런 종류의 그 무엇도 "뒤집힐 수 없을" 수 없다는 것"이 본질적이라고 후설은 말한다(275). 그 경우 사태 자체가 확정적으로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현출하는 것만이 확정적으로 현실적이다.
비충전적인 현출 또한 그에 대해 다양한 탐구가 가능하다. 한 가지 예는 비충전적인 현출이 지각이 경과함에 따라 "계속해서 높아지는 이성적 힘" 또는 무게를 가지고 충전성을 향해 가는 방식에 대한 탐구다(275). 서로 다른 정립의 구성요소들 또는 파악들이 갈등하다가 한 쪽이 지양되는 경우도 탐구해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의 양상은 정립의 재료가 무엇이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이러한 탐구는 이성의 무매개적 작용의 본질에 대한 탐구로 이어질 수 있다. "대상이라 주장되는[prätendiert] 대상들의 모든 영역과 범주에는 [...] 기본적인 유형의 원본적인 명증이 상응한다." 특정한 종류의 원본적 주어짐에 의해 동기화되는 그러한 명증들은 충전적이거나, 즉 "무게의 점진적 변화를 결여"하거나 비충전적이거나, 즉 "증가와 감소가 가능"하거나 둘 중 하나다(276). 이 가능성은 어떤 영역에서 명증적 체험이 이루어지고 있느냐에 의해 아프리오리하게 미리 그려진다[a priori vorgebildet].
§139 모든 종류의 이성의 얽힘[Verflechtungen]: 이론적, 가치론적, 실천적 진리 후설은 다시금, 이성적인 성격이란 모든 정립에 단순히 우연적으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부착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에 따라 모든 정립은 모종의 정당성을, 충만을 가진다. 또한 양상화된 정립들의 이성적 성격은 근원적인 믿음의 근원적인 이성적 성격을 소급지시한다. "진리는 명백히 근원의견, 믿음의 확실성[확실한 믿음, Glaubensgewißheit]이 가지는 완벽한[vollkommen] 이성적인 성격의 상관자다."(277, 강조는 원저자) 자연스럽게, 진리는 오직 명증에 대한 당장의 [현전적] 의식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본질적이지만 양상적인 명증 또한 명증이다. 그 경우 "S는 P라는 것이 양상화된 방식으로 그러하다"는 것만큼은 근원적으로 참되며 "S는 P다"라는 진리 자체와도 연결되어있다.*
Q. 정당성과 충만 사이의 관계가 정확히 무엇인가?
A. 충만할수록 정당하다.
cf. "Genauer gesprochen, "gehört" zu ihm eine so geartete Fülle, die ihrerseits die Vernunftauszeichnung der Thesis begründet."(Hua III/1, 322)
*Q. 근원의견과 양상화된 의견이 연결되는 두 번째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cf. "[...] andererseits auch mit der Wahrheit : "Dafür, daß S p ist, spricht etwas"; und wieder: "Dafür, daß S p wahr ist, spricht etwas" usw. Mit alledem zeigen sich Wesenszusammenhänge an, die phänomenologischer Ursprungsforschungen bedürfen."(Hua III/1, 323)
A. 독일어에서 für etwas sprechen = 지지하다. 'S is probably P'는 'S is P'를 지지한다. / äquivalent = 필요충분조건이다. 'S가 개연적으로 P다'와 'S가 개연적으로 P임은 참이다'가 동등한 것.
A2. 더 이상 개연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긍정 양상'이라는 아예 새로운 사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아가 명증은 감정적이고 의지적인 정립의 영역에서도 이성의 문제들을 설명하게 해주는 개념이다. 이론적 또는 의견론적[doxiologisch] 진리 또는 명증은 가치론적 그리고 실천적 진리 또는 명증과 평행하며 후자는 오직 의견론적, 특히 논리적 진리를 통해 표현된다. 그러므로 의견론적 영역과 관련한 이성의 문제들을 먼저 해소해야 한다.
§140 입증, 명증 없는 정당화, 그리고 정립적 통찰과 중립적 통찰의 동등성[Äquivalenz] 후설은 이제 동일한 의미와 정립을 가지지만 이성적인 가치에 있어 서로 다른 명증이 상호합치하는 경우를 탐구한다. 이러한 경우는 증명(demonstration[Ausweisung])과 입증(confirmation[Bestätigung]), 즉 "주어짐의 불완전한 방식이 주어짐의 완벽한 방식으로 변형"되는 사태에 해당한다(279). 물론 모든 불완전한 명증이 그에 상응하는 원본적인 명증, 그에 다다름으로써 가능한 원본적인 검증(verification[Bewährung])의 가능성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억과 타인경험의 경우가 그러하다.
또한 후설은 증명의 동기화된 가능성과 공허한 가능성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전자는 이유와 동기가 있는 증명이 가지는 가능성이고 후자는 다만 중립적으로 사념하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차이는 정립의 충만 정도에 따라 발생한다. 달리 말하면 전자의 경우 가능성이 현실성과 합치하고, 후자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가능성만 있을 뿐 현실성과 합치하지 않는다].
cf. 명증은 정립을 요구하며, 직관은 정립과 다르다. 직관=명증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 상상도 직관이므로. 공허한 가능성에 대해서는 충만이 없다고 말하면 안 된다. (J씨)
§141 매개 없는 그리고 매개된 이성적 정립, 그리고 매개된 명증 이미 주장되었듯이 모든 매개된 정당화는 매개 없는 직접적인 정당화로 소급돼 이어진다[leiten zurück]. 다시 말해 모든 정당성의 근원적 원천은 원본적 명증이다. "정립의 이성적 가치는, 그러나 이 원천으로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이끌어질 수 있다. 만일 그것이 그 자체로 명증을 가지지 못하면 파생된 [형태로], 만일 그것이 무매개적이라면 협력받고/뒷받침되고[bekräftigt] 입증된 [형태로]."(281)* 후설은 이성에 대한 현상학적 교설의 연구영역을 세 가지로 나누어 지정하며 절을 마무리한다.
cf. "Wohl verstanden ist nur die originäre Evidenz "ursprüngliche" Rechtsquelle, und ist z.B. die Vernunftsetzung der Erinnerung und so aller reproduktiven Akte, darunter auch der Einfühlung, nicht ursprünglich und in gewissen Arten "abgeleitet"."(Hua III/1, 328)
*Q. 두 경우가 정확히 어떻게 대비되는 것인가? '무매개적인 이성적 정립'의 예로 후설은 현재의 지각을 지평이자 최종적 협력의 거점으로 가지는, 자체적으로 본질적인 불충전성을 가지는 기억을 드는데, 그렇다면 아마도 그 자체로는 명증을 가지지 않을 매개된 정립의 예에는 무엇이 있는가?
A. 여기서 매개된 정립=술어적 종합의 정립. e.g. 논리적 추론 / 후설에게 좁은 의미에서의 종합 = 질료들을 종합하는 범주적 형식에 대한 의식함. 단순히 철수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모습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이런 종합 일어나지 않음. 그걸 명제화하거나, 그로부터 무언가를 추론하면 비로소 종합 일어남.(J씨)
§142 이성적 정립과 존재 참되게 존재하는 대상이란 "이성적인 방식으로 정립되는" 대상 그리고 "근원적인, 완벽한 이성적 정립에 의해 정립될 대상"과 동등하다. 즉 이 대상은 일면적으로 주어지지 않고 완전하게 주어지며, 규정가능한 X에 대해 그 무엇도 미규정적으로 남겨놓지 않는다. 이 동등성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모든 진실된 대상에 그것이 원본적으로[,] 따라서 완벽하게 충전적인 방식으로 파악될 수 있는 의식의 관념이 이념적으로 상응한다는 점이다. 한편으로 의식이 수행하는 파악은 그것이 어떻게 어느 정도의 충만에 이를 것인지 또는 이르지 못할 것인지의 방식들이 본질적으로 미리 그려져있다. 다른 한편으로 대상의 범주마다 충만화의 법칙이 상이하게 미리 그려진다.
§143 칸트적 이념의 의미에서의 사물의 충전적 주어짐 아무리 비충전적인 체험 또는 대상의 현출에 대해서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칸트적 의미의 이념으로서 완벽한 주어짐의 방식이 미리 그려져있다. 이 주어짐은 "아프리오리하게 규정된 현출들의 연속체"로서 체계화된다(285, 강조는 원저자). 이 연속적인 현출들은 내용을 구체화하기만 할 뿐, 결국 동일한 규정 가능한 X와 관계하는 현출들이다. 나아가 이러한 [이념적] 연속체는 시간적으로 무한하게 뻗어나가는데, 이로써 "전개의 고립된 통일체(즉 유한한, 순전히 일시적인 작용)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진다. 요컨대 초월적 대상을 최대한 충전적으로 지각하려면 무한한 체험의 연속체가 요구된다.
§144 현실성과 무언가를 원본적으로 부여하는 의식: 결론짓는 규정들 충전적이고 내재적인 직관의 경우, 의미는 원본적으로 채워진다. "대상은 그것이 파악된 정확히 바로 그것이며 충전적 직관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서 원본적으로 정립된다." 한편 "부여하는 직관이 초월적인 것일 경우 대상성은 충전적으로 주어질 수 없다." 오직 그것의 의미와 "인식적 본질"의 이념 그리고 무한한 비충전적 경험들의 법칙성만이 주어질 뿐이다.(286) 풀어 말해 이 비충전적 경험이 전개될 수 있는 방식은 무한함에도 불구하고 의식의 경과가 따를 경로들의 가능성은 법칙적으로 정해져있다. 경험적인 탐구는 가능한 경로들을 추적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145 명증의 현상학에 대한 비판[Kritisches] "명증은 사실, 마치 그것이 더 나은 세계에서 ["여기 진리가 있어!"라고] 우리를 부르는 신비로운 목소리인 양 판단에 부착돼있는 모종의 지표[Index]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명증이 일종의 감정과 관계돼있다는 심리학주의는 배제된다. 나아가 데카르트의 전능한 기만자에 대한 상상 또는 현실의 사실적인 진행이 우리의 지향적인 지표들과 항상적으로 어긋날 가능성 또한 배제된다.* 명증은 "정립의 고유한 양상의 문제"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287).
cf. 명증의 현상학은 부조리의 현상학 역시 지시한다(287).
*Q. 여태까지의 논의가 이 배제를 정확히 어떻게 성공적으로 수행하는지 모르겠다.
A. 명증은 판단에 부가되는 게 아니라 판단에 본질적이라는 맥락이므로, 즉 어떤 판단을 내리기만 하면 명증도가 결정되는 것이므로, 악령에 의해 명증도가 변경될 수 없다. 회의주의란 '판단 외적인 것'을 끌어와 그것이 판단의 명증도를 의심하는 것이다. 그러나 후설은 판단의 명증도가 판단 외적인 것에 의해 좌지우지된다고 보지 않고 있다(J씨).
★ A2. 회의주의는 그 어떤 명증도 가지지 못하게 만든다. 예컨대 통 속의 뇌가 계속 정립을 하는데 명증이 현존할 수 없다는 류의 주장이다. 그러나 후설에게 있어서는 정립을 하면 명증도는 무조건 어느 정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탐구는 "동일성의 연속적인 통일들 그리고 종합적 동일화들을 모든 영역들에서, 그것들의 현상학적 구성에 입각해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것"으로 귀결된다(288, 강조는 필자).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은 지향적인 구조, 예컨대 의미, 의미의 주체[X], 정립적 성격들, 충만으로 나뉘는 노에마의 다양한 층위들을 이해하는 작업, 그리고 그와 같은 구조를 가진 작용의 조합들이 어떻게 하나의 작용으로 통일되는지 이해하는 작업이다. 동일화하는 통일들이 어떻게 가능한지, 상이한 규정들이 어떻게 하나의 X에 합치하는지, 그 과정에서 의미의 규정성과 미규정성은 어떻게 뒤섞이는지, 협력과 증명, 지식의 개선과 관련된 충만의 변화를 알아내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대상을 동일화하는] 통일은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으나 본질적으로 법칙화돼있다. ""대상"은 우리에게, 어느 곳에서든 의식의 본질적인 연관의 이름이다."(289, 강조는 필자)
cf. "[...] er[Gegenstand] tritt zunächst auf als noematisches X, als Sinnessubjekt verschiedener Wesenstypen von Sinnen und Sätzen. Er tritt ferner auf als Titel "wirklicher Gegenstand" und ist dann Titel für gewisse eidetisch betrachtete Vernunftzusammenhänge, in denen das in ihnen sinngemäß einheitliche X seine vernunftmäßige Setzung erhält."(Hua III/1, 336)
가능성, 개연성, 의심스러움 등의 양상들도 결국 "의식의 "목적론적으로" 상호의존적인 형태화들의 규정된, 형상적으로 제한된 그룹의 이름들"로서 어째서 이와 같은 양상들이 어떻게 나타나게 되는지 또한 현상학적으로 탐구될 수 있다(289). 예컨대 의심스러움은 양상화된 직관들 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 [발생하는] 양상이다. 이러한 이론적인 탐구들은 가치, 실천적 대상을 구성하는 의식에 대한 것에 적용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현상학은 그것이 배제하는 모든 자연적 세계와 모든 이념적 세계들을 현실적으로 포함한다[umspannen]. 그것은 그것들을 대상의 의미 및 노에마 일반을 노에시스의 닫힌 체계와 연결해주는 본질적 정당성의 종류들을 통해, 그리고 구체적으로, 그것의 상관자가 "현실적 대상"이기에 따라서 [...] 목적론적으로 통일된 의식의 형태화들의 전체적으로 규정된 체계들의 지표를 보여주는 이성적으로 정당한, 본질적인 연관을 통해 "세계의 의미"로서 포함한다."(290, 강조는 필자)
3장 이성에 대한 이론의 문제들의 보편성의 수준들 후설은 이제 여태까지 탐구된 문제들이 형식적 존재론 그리고 영역적 존재론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탐구함으로써 이성에 대한 현상학적 형상학을, 그리고 ⟪이념들⟫ 1권을 마무리짓고자 한다.
§146 가장 보편적인 문제들 현상학은 지향성 자체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해 의식이 의식하고 있는 바가 이성의 평결[Rechtsprechung] 하에 필연적으로 선다는 문제, 즉 지향된 것의 타당성에 대한 탐구로 넘어간다. 이러한 이성의 현상학은 의미, 정립, 채워진 정립(인식적 본질)에 대한 개념화를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전개될 수 있다.
Q. 어째서 이성의 현상학이 "가장 보편적인 문제"인가?
A. 그게 아니라 이성의 현상학 내에서 가장 보편적 문제가 무엇인지를 열거하겠다는 것이다.
§147 문제의 분기들[Problemverzweigungen]: 형식 논리학, 가치론, 그리고 실천이론[Praktik] 이성의 현상학이 목표하는 바를 따르다 보면 형식 논리학과 가치론 그리고 실천이론의 문제들을 그리고 각 문제들이 취급하는 정립의 "가능한 타당성의 아프리오리한 조건들"을 법칙적으로 탐구하게 된다. 먼저 술어적* 종합의 경우 그에 대해 "의견적 이성적 확실성의 가능성의 아프리오리한 조건, [또는] 노에마적으로 표현하면 "가능한 진리"의 아프리오리한 조건"을 탐구하게 되며 이는 "형식 명제학("판단들"의 형식논리학)"의 소관이다. 한편 감정과 의지의 영역에서의 종합적 형태들, 예컨대 목적과 수단의 연관을 탐구함에 있어서는 "가치론적이고 실천적인 "진리"의 조건들"이 탐구된다(292, 강조는 원저자). 물론 [탐구의 결과가 표현되는] 과정에서 가치론적이고 실천적인 이성은 의견적 이성으로 전환되고, 노에마는 진리가 되며 대상성은 현실성을 획득한다. 그렇게 우리는 '참된 목적', '참된 수단', '참된 탁월성' 등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293).
*Q. 후설은 어째서 '술어적'과 '분석적'을 동일시하는가?(292)
A. 후설은 '분석적'이란 표현을 칸트적으로 쓰지 않는다. '논리적', '형식적'이라 치환해서 읽어도 좋은 경우가 많다(J씨).
현상학의 관점만이 명제적 형식들을 순전히 추상화시켜서만 취급하는 도그마적 순수 논리학을 뛰어넘을 수 있다. "특히, 그것[현상학]은 우리로 하여금 논리학의 아프리오리한 진리들을 위해서 중요한 것은 정립을 직관적으로 채울 수 있는 가능성(그를 통해 상응하는 사태가 종합적으로 직관되는)과 정립의 순수한 종합적 형식들(순수하게 논리적인 형식) 사이의 본질적 연관이며 이 가능성은 동시에 가능한 타당성의 조건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293, 강조는 원저자) 또한 여기서도 노에시스와 노에마의 관점에 따라 다른 탐구가 가능하다. 전자는 이성과 판단의 옳고 그름, 옳고 그름의 규범 등을 그리고 후자는 판단과 그것의 "형식적 진리", 예컨대 삼단논법적 추론과 같은 것을 취급한다. 물론 이러한 구분 가운데서도 노에시스와 노에마 사이의 필연적인 상관관계와 얽힘의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cf. 도그마적 = 현상학(순수의식에 대한 학)에 의해 정초되지 않은.
§148 형식적 존재론의 이성적-이론적 문제들 이제 이미 주어진 사태연관들 가운데서 그리고 적절한 시선 전환을 통해 [판단의] 노에시스와 노에마 측면에서의 순수한 형식들을 추출할 수 있다. 모든 형식 논리학적 법칙들은 형식적 존재론의 법칙들로 전환된다. 형식적 존재론에서는 사태연관에 대한, 대상에 대한, 대상의 특성들에 대한, 대상의 실존 등에 대한 판단이 가지는 형식들이 취급된다.* 예를 들어 복수의 정립들에 대한 명목화를 통해 집합 이론의 기본 개념이, 그리고 관계와 수에 대한 탐구를 통해 수학적 분과들이 형성될 수 있다. 감정과 의지의 영역의 상관자들에 대해서도 형식적 존재론이 확립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Q. 두 번째 문단의 대비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A. 형식논리학적 법칙이 형식존재론의 법칙이 되면, '존재', '사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형식논리학은 노에시스, 노에마와 관련된 것이지만 형식존재론은 단도직입적인 대상들을 다룰 수 있게 된다.
Q. 마지막 문단을 이해하지 못했다.
A. 가치론적, 실천학적 형식적 존재론도 가능하다. 가치학, 실천학은 영역적 존재론이지만, 그것들에 전반적으로 통용되는 형식을 다루면--예컨대 목적을 바라면 수단도 바랄 수밖에 없다든지--형식적 존재론의 의미가 확장된다. 물론 '유비적으로만' 형식적이고, 본래적으로 형식적이진 않다.
**Q. '같은 형식적 존재론이 감정과 의지의 영역의 상관자들에 대해서도 적용된다'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A. 아니다. 원래 요약문이 맞다. 말하자면 비본래적인 형식적 존재론이 성립하는 것.
§149 영역적 존재론의 이성적-이론적 문제들, 그리고 현상학적 구성의 문제 "모든 대상적 영역은 의식에 맞게[bewußtseinsmäßig] 스스로를 구성한다. 그것이 현실적인 한, 영역적 유에 의해 규정된 대상은 그와 같은 것으로서 지각 가능해지는 자신[만]의 방식들을 [...] 그것이 아프리오리하게 미리 그려진 채로 가진다."(296) 그리고 모든 영역은 저마다의 상이한 [구성과 인식의] 법칙을 가진다. 후설은 "물질적 사물"의 영역의 예를 드는데, 물질적 사물에 대한 영역적 존재론은 대상의 보편적인 "구성"의 문제를 현상학적으로 해결하는 데 특히 중요하다.
상상을 통해 물질적 사물의 본질을 직관하면 사물의 주어짐이 원본적일 때조차 그 주어짐은 원칙적으로 비충전적이라는 본질적 통찰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불완전한 주어짐(스스로를 비충전적으로 부여하는 모든 노에마)는 자신 안에 그것의 완전화(perfection)를 위한 이념적 가능성을 위한 규칙을 가지고 있다는 본질적 통찰"이 성립한다(298). 후설에게는 이 완전화의 이념적 가능성이 특정한 규칙 하에 놓인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상상 속의 대상인 켄타우로스를 이리저리 다른 시점에서 바라보며, 그에 대한 일면적 지각의 한계를 넘어서려 노력할 때조차 우리는 대상에 대한 직관들이 서로 일관적이어야 하며 의미의 담지자가 동일해야 한다는 등의 법칙을 따라야 하고, 그 대상의 공간성을 제거하지 못한다. 요컨대 "비충전적으로 주어진 "사물"의 영역은 가능한 직관들의 경로에 대한 규칙들을 규범화한다(prescribes)"고 말할 수 있다(298, 강조는 원저자). 이때, 직관들이 규범에 따라 전개됨에 따라 사물-노에마의 규정된 내용은 점차 풍부해지지만, 그 어떤 직관 또는 지각도 대상에 대한 인식을 '종결'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동시에 사물의 "이념", 사물의 이룸새(make-up)와 구성적 "형식"은 명증적이고 충전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후설은 물질적 사물의 이념적 본질을 세 가지로 규정한다. 첫째, 사물은 시간적인 사물로서 시간의 필연적 "형식"에 구속된다. 시간성의 "이념" 또한 순수하게 직관될 수 있다. 둘째, 사물은 연장을 가진 사물이며, 공간의 "이념" 또한 순수하게 직관될 수 있다. 셋째, 사물은 물질적 사물로서 특정한 내용을 가진 실체적 통일체다. 따라서 그것은 인과성을 담지한다. 이러한 규정들은 형이상학적 작업의 결론이 아니라, 다만 사물-노에마 그리고 사물을 부여하는 의식이 가지는 본질적 필연성들을 파악한 결과일 따름이다.
§150 계속: 초월론적 [영역으로의] 입문[Leitfaden]으로서 사물의 영역 "사물"의 영역에 대한 탐구는 현상학적 탐구 일반에 대한 입문이 될 수 있다. 개별적 사물에 대한 직관은 서로 합치하다가 통일되는 의식의 연속체를 불러일으킨다(bring about). "초점은 그러므로 무언가 동일한 것, 의미의 X에 [...], 스스로를 변경하고, 스스로를 비트는 등의 [일을 하는] 단일하고 똑같은 것에 향해진다."(300, 강조는 원저자) 그런데 어떻게 정립하는 직관들 그리고 다양체, 순전한 현출들 가운데서 "현실적"이고 자기동일적인 사물이 필연적 상관자로서 주어지기에 이른단 말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 하며 후설은 "사물에 대한 영역적 이념[Idee]--존재로서 정립된, 자신의 의미를 규정하는 내용을 가진 동일한 X--은 현출들의 다양체들을 위한 규칙들을 규범화한다"고 말한다(301, 강조는 원저자). 현출들의 경로 및 경과들[Verläufe]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신조차 지각은 관점적으로, 그러므로 다양체들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규범을 따라야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공간의 현전의 근원"에 대한 문제는 [...] 그 안에서 공간이 스스로를 직관적으로 선보이고 스스로를 현출들의 통일체로서, 공간적인 것을 선보이는 기술적인 방식들의 통일체로서 스스로를 "구성하는" 모든 노에마적 (또는 개별적으로(respectively) 노에시스적인) 현상들의 본질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으로 환원된다. 그러므로 구성의 문제는 고로 명석하게, 규제된(regulated) [그리고] 현출하는 것의 통일체에 필연적으로 소속하는 현출들의 연속이 직관적으로 검토되고 이론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것--그것들의 무한성에도 불구하고--이다."(302, 강조는 원저자)
cf. "Schließlich muß die vollkommene Einsicht davon erwachsen, was im phänomenologisch reinen Bewußtsein die Idee des wirklichen Dinges repräsentiert, wie es absolut notwendiges Korrelat eines strukturell erforschten und wesensmäßig beschriebenen noetisch-noematischen Zusammenhanges ist.(Hua III/1, 351-2, 강조는 원저자)
§151 사물의 초월론적 구성의 층위들: 보충 그런데 사물의 구성에는, 그리고 사물을 의식하는 의식의 틀에는 복수의 층위들이 있다. 각 층위는 자신만의 통일체를 이루며 사물의 완전한 구성을 위한 필연적 중개적(intermediate) 구성물이다. 의식의 지향빛살이 하나인 평범한 지각적 구성에서도 같은 통일체에 상응하는 복수의 층위들이 발견된다. 감성적 도식들*, 높고 낮은 차원의 "보이는 사물들"**, 실체적-인과적 사물, 상호주관적으로 동일한 사물 등이 그 층위들의 예시이다(상호주관적으로 동일한 사물이 가장 높은 층위에 있다).
*Q. 'sensuelle Schemata'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A. 시간, 공간, 인과성 가운데서 세 번째 층위를 헐어내고 시공간적인 성격만 가진 사물을 말한다.
**시각화는 됐지만 아직 인과의 범주는 적용하지 않았다.
cf. 지각의 오류를 수정하는 현상과 관련한, '무효화하는 가상(nullifying semblance[Schein])의 현상학'에 대한 언급(304)
§152 초월론적 구성의 문제를 다른 영역들로 옮기는 것 여태까지 말해진, "모든 "사고"에 앞서 놓여있는" 체험의 다양체들의 체계 내 구성은 다른 영역의 대상들에도 적용된다(304, 강조는 원저자). 서로 다른 사물의 영역들은 함께 얽혀있다. 사물은 고립된 것이기보다 [다른 사물들과 함께인 데다 주관과 1:1로만 대면하지 않고] 상호주관적으로 지각되는 것이며, [또 다른 사물인] 체험의 주체마저 '인간' 또는 '동물' 등으로서 이미 구성된 결과이다. [저 상호주관성이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고차원적 사물인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로 구성의 산물이다. 가치와 실천적 대상들, 문화의 구체적인 창조물들--국가, 법, 관습, 교회 등--역시 심리학주의적이거나 자연주의적으로 재해석될 필요 없이 구성의 문제틀 하에서 해명될 수 있다. 다만 모든 고유한 현실성들은 저만의 구성적 현상학을, 그에 따라 저만의 구체적인 이성의 교설을 요구한다. 각 대상마다 노에마의 면에서 무엇이 그것의 원본적 주어짐을 구성하는지, 노에시스의 면에서 무엇이 "현실성"에 대한 의식을 가능케 하는지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Q. 공동체가 개별적 인격 이후에 구성된다는 주장을 후설이 하는데, 헤겔과도 연관된다는 후기 후설의 모나드론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cf. "Diese Gemeinschaften, obschon wesentlich fundiert in psychischen Realitäten, die ihrerseits in physischen fundiert sind, er weisen sich als neuartige Gegenständlichkeiten höherer Ordnung."(Hua III/1, 354, 강조는 원저자)
A. 모나드론이 현상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J씨).
§153 초월론적 문제의 최대한의[voll] 확장[Extension]: 탐구들의 분류[Gliederung] 후설은 다음 책에서는 서로 다른 학문들 간의 관계와 모든 실질적 학문의 원칙이 구성의 문제의 연장선에서 다뤄질 것이라고 예고한다. 그러면서 구성의 문제와 관련해서 염두에 두어져야 할 보충사항들을 나열한다. 마지막으로 후설은 구성의 현상학과 형식적, 영역적 존재론들이 서로 얽혀있음을 강조하면서도 결코 후자가 전자를 정당화할 수 없다고 못박는다. 전자와 후자는 상이한 탐구의 분야들이며 [후자가 전자에 의해 정초되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Q. 중간에 후설이 '종합적 원본성'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해하지 못했다. 종합은 원본적으로 주어진 바에 조작을 가하는 것 아니었나?
A. 종합적 대상에 대한 의식 = 사태에 대한 의식. 범주적 대상이 원본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즉 범주적 직관. 조작이 원본성을 해치지 않는다. 종합적 대상은 오히려 조작을 해야 원본적으로 주어질 수 있는 것.
cf. Phänomenologie überhaupt = "eine systematische Ausführung aller Bewußtseinsdeskriptionen, die durch den Gesamttitel Gegenstandskonstitution gefordert sind, alle Bewußtseinsdeskriptionen überhaupt(Hua III/1, 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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