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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현상학

티머시 클라크, <마르틴 하이데거 너무나 근본적인>

티머시 클라크, 김동규 옮김, ⟪마르틴 하이데거 너무나 근본적인⟫, 앨피, 2008.

 

 문학 연구자가 쓴, 하이데거의 후기 철학에 대한 입문서이다.

 보통 후기 하이데거 철학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건 더 이상 철학이 아니'라는 뒷말이 꼭 붙기 마련이다. 이 말은 다음의 두 가지 뉘앙스 중 하나를 품은 채 말해지곤 했다. 하나는 하이데거가 일의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개념들로 이루어진 논증 대신 그 뜻들이 모호한 비유적 표현을 남발하고, 사태를 설명하기 위해 그 어떤 주장도, 현상학적 기술도 아닌 (사태를 표현하는) 단어의 어원을 끌어들이는 기행을 펼치는 등 아무런 철학적 테제도 명료하게 개진하지 않았다는 부정적인 뉘앙스다. 철학은 사태를 명석판명하게 설명할 의무를 이행할 것으로 기대되는데, 후기 하이데거의 경우 애초에 설명의 언어와 틀 자체가 너무 난해하다 보니—심지어는 '설명'의 서술 방식을 포기했다고 말할 수까지 있다 보니—철학 자체를 저버렸다는 비난이 따른 것이다. 다른 하나는 언어를 사유의 하인으로, 세계를 이성적 주체의 통제 대상으로 보는 기존의 철학이 가지는 한계들을 뛰어넘어 '해체' 또는 '탈구성'의 철학의 도래를 예지하고 실천했다는 긍정적인 뉘앙스다.

 나의 경우 학부 시절 1935년에 쓰인 ⟪예술작품의 근원⟫을 읽으면서 너무나 고생했었고, 읽는 내내 1927년에 쓰인 ⟪존재와 시간⟫과 비교했을 때 이것은 철학보다 한 편의 시적인 에세이 같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따금씩 그 작품이 여는 놀라우리만큼 넓은 사유의 공간과, 이 난해한 난장판의 와중에 어디서 기원했는지 알 수 없는 현실적인 설명력, 예술작품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예술을 뛰어넘어 삶과 진리 일반에 대해 통찰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움을 느꼈다. 그보다 더 후기에 쓰인, 예쁜 분홍색과 회색이 어우러진 표지로 이학사에서 출간된 ⟪강연과 논문⟫에 실린 '사물'이라는 짧은 글을 읽었던 것은 내가 학부생으로서 겪었던 가장 '철학적인' 경험들 중 하나였다(개인적으로 이학사에서 내는 철학 서적들의 표지를 몹시 사랑한다). 아무튼 이토록 양가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텍스트들에 대해 전문 연구자들은 어떤 해설을 내놓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티머시 클라크는 이 도전적인 과제에 아주 성실하게 임한 것 같다.

 클라크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그리스 이래로 기존에 철학이라 불려온 모든 이론들의 근본전제인 제작자 형이상학(productionist metaphysics)—이 표현은 미하엘 짐머만에게서 온 것이다—자체를 의문시한다. 하이데거는 제작자 형이상학이 사물과 자연을 형상화된 질료이자 인간 이성의 폭력적인 통제 대상으로 보고, 그러한 통제 이전의 근원적인 존재의 사건[Ereignis]을 망각하게 만들어 서구 문명 전체를 니힐리즘에 빠뜨렸다고 진단한다. 이 니힐리즘은 단순히 하루 이틀, 몇 세기만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수면 위로 드러난 수많은 변동에도 불구하고 2500년 남짓의 세월을 지배해온 단일한 심층 역사[Geschichte]의 특징이며 특히 현대에 와서는 전 인류로 하여금 테크놀로지에 의해 닦달당하는 비극을 낳았다.

 하이데거는 니힐리즘의 극복을 추구하면서, 제작자 형이상학이라는 선입견을 폐기할 경우 무엇이 비로소 근원적 사태로서 드러날 것인지를 추적한다. 예컨대 그에 따르면 진리는 더 이상 말함과 사태의 일치가 아니라 사태 자체의 드러남 또는 열림, 즉 탈은폐[숨지 않음, Unverborgenheit]이다. 말함과 사태가 과연 일치하는지 따져보기 위해서는 애초에 사태들이 우리에게 열려밝혀져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탈은폐로서의 진리 개념은 문자 그대로 '숨김의 부정'을 지시하는 그리스어 '알레테이아(alētheia)'에 반영되어 있다. 또 다른 예로 하이데거에게 언어는 더 이상 언어에 선행하는 존재, 세계, 사유를 전달하는 한갓된 의사소통 매체가 아니라 존재, 세계, 사유 자체의 발원지이다. 쉽게 말해 언어 없이는 존재가 우리에게 개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존재의 개방 계기로서의 언어의 개념은 '말함' 이전에 '흩어져있던 것을 모아서 보호함'을 지시하는 그리스어 '레게인(legein)'에 반영돼있다(잘 알려져있지만 'legein'의 명사형은 'logos'이다). 이러한 '모음'의 행위는 의미있는 것과 무의미한 것을 구분하고 전자를 비호 가운데서 축적함으로써 질서의 체계를 수립한다는, (말하자면 카오스를 벗어나 코스모스적인) 세계를 설립하는 실천을 함축한다.

 근원적 사태를 추적하는 하이데거의 접근법을 취했을 때 우리는 기존의 철학이 사유할 수 없었던, 개념화와 반성 이전의 세계에 다가갈 수 있게 된다. ⟪존재와 시간⟫에서 이미 두드러졌듯이 사실 우리는 사물을 대함에 있어 그것과 이론적인 인식의 관계를 맺는 대신, 전이론적이고 전반성적인 일종의 '몰입' 심지어는 '퇴락[Verfallen]'의 상태에 놓인다. 우리는 사물을 너무나 친숙하게 느껴서[innig und gewöhnlich] 그것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에야 비로소 그것에 대한 이론적인 인식 능력을 발동시킨다. 예컨대 우리는 망치가 있을 때 그것을 힘껏 쥐고 못 박는 데 사용하느라 여념이 없지, 망치를 오랫동안 골똘히 쳐다보면서 그것의 구성요소를 분석하지 않는다—망치를 수리해야 하지 않는 한에서 말이다. 나아가 우리는 칸트나 후설의 생각과 달리 감성과 지성의 도움을 통해 비로소 자기동일적 대상들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번에 책상, 연필, 시계 등을 지각한다. 요컨대 개념화와 반성 이전에 우리는 언제나 이미 세계-내-존재[In-der-Welt-sein]이다.

 (한편 이 책의 마지막 장들인 7장은 하이데거와 나치즘 사이의 관계에, 8장은 하이데거가 이후 철학사에 미친 영향을 주시하는데, 두 주제 모두 비전공자도 납득할 수 있을 만큼 합리적으로 서술되어있다. 하지만 쉽사리 정리될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닌 것 같아 요약을 포기했으므로... 관심이 있다면 직접 읽어보셔요!)

 후설을 공부하고 있는 입장에서 이 책은 하이데거의 철학이 전기의 철학이든, 후기의 철학이든 후설의 현상학으로부터 굉장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내 확신을 굳혀줬다. 하이데거가 후설의 제자였고, ⟪존재와 시간⟫이 후설에게 헌정됐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마치 하이데거가 근대철학의 유령인 후설의 족쇄들을 모두 벗어버린 양, 그를 완전히 '능가'해버린 양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철학은 상호적인 비판들로 점철돼있고, 심지어는 그것들로 정의되기까지 함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본질적인 '능가' 또는 '패배'도 철학의 영역에서는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만일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면 아직도 플라톤의 '이데아'나 에피쿠로스의 '클리나멘' 같은 것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진리 탐구가 아닌 이미 허구로 밝혀진 것에 대한 헛된 유희에 몰두하고 있는 것일 텐데, 상황은 결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후설이 하이데거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둘 사이의 연속성 때문이다. 후설이 중시한 인식의 배경으로서의 지평[Horizont] 개념은 하이데거에게서 특정 실천의 문맥이라는 의미에서의 세계의 개념으로 재정식화되었고, 대상이 의식과 본질적으로 결속돼있다는 지향성의 개념은 존재가 자신을 스스로 열어밝힌다는 탈은폐성의 개념으로 변형됐으며, 그 어떤 지적 가공도 이루어지지 않은 순수한 직관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하며 직관된 바를 충실하게 기술하는 데 현상학의 이념이 있다던 '주어짐'에 대한 후설의 신념 또한 탈은폐성의 개념을 통해 계승되었다. 하이데거가 자신 이전의 철학사가 존재를 현존으로만 이해했다고 지적했고, 데리다가 후설을 '현전의 형이상학'의 대표 주자 중 하나로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유사성이 발견된다는 것은 꽤나 역설적이다.

 지나치게 거친 도식일 수도 있겠지만 후설은 인식론적인 실존주의--이남인 선생님의 ⟪후설과 메를로-퐁티 지각의 현상학⟫을 따라 '상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모든 철학을 실존주의라 부를 수 있다면--를 펼친 반면 하이데거는 다만 존재론적인 실존주의를 펼쳤다는 의미에서 둘 사이의 연속성은 무척이나 진하고, 짙고, 깊다고 나는 생각한다. 둘이 각자 몰두한 탐구의 주된 영역은 달랐지만 개념적인 유사성이 나 같은 피라미의 눈으로 봐도 곳곳에서 발견되고, 근원과 변양태 또는 파생태를 구분한 뒤 전자를 쫓는 사유 방식 자체가 동일할 뿐 아니라 후설의 현상학이 이미 다분히 해석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을 지식의 유일한 확보로로서 숭상하는 과학주의에 대한 비판 역시 둘 사이에서 공유된다.

 뒤로 갈수록 시간적 제약이 있었던 것인지 가독성이 높은 초반부에 비해 번역이 아쉽기는 했지만, 좋은 2차 문헌이 한국에 소개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사실 감사하다고 느낀다. 나아가 얼마 전에 읽은 블랑쇼의 문학관의 많은 부분이 하이데거의 '대지[Erde]' 개념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 흥미로웠다(그럼에도 블랑쇼의 주장에는 조금 더 급진적인 면모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본문 258-9쪽 참고). 석사논문을 완성하고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존재와 시간⟫을 제대로 읽는 것이었는데 이 책 덕분에 그 미래가 조금 더 장밋빛이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