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들> 1권의 영역본이 최근에 새로 나왔다. 2014년도 최근으로 쳐줄 수 있다면 말이다. 내가 대학 새내기로 일주일에 서너 번씩 술을 퍼마시고 있을 때 미국에서는 누군가 이런 생산적인 작업을 하고 있었구나 싶어 헛헛하다. 아무튼 독일어 독해가 아직 느린 나에게 수준 높은 영역본의 존재는 정말이지 행운이다. 요약을 위해 참고한 판본은 "Edmund Husserl, Translated by Daniel O. Dahlstrom, Ideas for a Pure Phenomenology and Phenomenological Philosophy(First Book: General Introduction to Pure Phenomenology), 2014, Hackett Publishing Company"이다. 이하는 그 요약본이고, 모든 밑줄은 필자가 한 것이다.
서론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학문인 순수 심리학은 여러 영역의 현상들, 예컨대 물리 현상, 심리 현상, 역사 현상들 전반을 취급하지만 "전적으로 다른 태도" 즉 "현상학적 태도"에서 그렇게 한다(3). 기존에 현상학은 내적 경험에 대한 기술적 심리학으로 오해되어왔으나 현상학은 "원리적으로(4)" 결코 심리학이 아니다. 이 역시 현상학이 근본적으로 요구하는 탐구의 관점이 심리학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차이를 파고들자면 다음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심리학은 사실들, 세계 내의 실재들을 탐구한다. 반면 순수 또는 초월론적 현상학은 사실학이 아닌 본질학으로, 형상적 환원을 통해 사실이 아닌 본질을 탐구하고자 한다. 둘째, "초월론적 현상학의 현상들은 비실재적인irreal 것으로 특징지어질 것이다(5)." 초월론적 현상학은 세계 내의 실재들이 비실재적인 것으로 소위 정화된 형태들에 대한 교설이다. 여기서 실재의 개념을 명료하게 만들 필요가 있겠지만, 특히 "실재적 존재와 개별적 존재(단적으로 시간적인 존재) 사이의 구분[만큼은] 반드시 유지"돼야 한다. 요컨대 "초월론적으로 정화된 모든 "경험"들은 비실재들이며, [...] 단일한 개별자들(singular individualities)로서가 아니라 대신 그것들[비실재들]의 "본질""을 탐구하는 학이 곧 현상학이다(6).
1부 본질과 본질에 대한 지식
1장 사실과 본질
§1 자연적 태도에서의 학문은 모두 '세계'를 그 탐구의 대상 또는 지평으로 하고 있다. 여기서 세계란 "가능한 경험과 경험적 지식의 대상의 총체이자, 현실적으로 현전하는(actually present) 경험들을 토대로 올바른(correct) 이론적 사유를 통해 알려질 수 있는 대상들의 총체이다(10)." 이 태도에 따르면 참된 존재(being), 현실적(actual) 존재, 실재적 존재가 모두 "세계 내의 존재"로 일치한다(9). 각 자연적 학문에는 그에 상응하는 탐구 대상의 영역들이 있는데, 특수한 직관들이 이 대상 [자체를] 원본적으로 부여[함으로써 각 학문을 가능케 한다.]
cf. §1만 독역본 직역을 시도했다. 아래에 첨부한다.
"자연적 인식은 경험과 함께 시작되고 경험 속에 머무른다. 우리가 "자연적"이라고 부르는 이론적 태도에서는 그러므로 가능한 연구의 전체지평이 하나의 단어로[한 마디로] 가리켜진다bezeichnet: 그것은 세계이다. 이러한 근원적 태도[를 가진] 학문들은 그에 따라 다 함께[모조리] 세계에 대한 학문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배타적으로[독점적으로] 지배적인 한에서 "진정한 존재", "현실적 존재", 즉 실재적 존재 그리고--모든 실재적인 것이 세계의 통일성[통일체 안]으로 합쳐지기 때문에--"세계 속의 존재"라는 개념들이 [그 학문들에] 포괄된다.
모든 학문에는 그것의 연구의 령으로서 하나의 대상영역이 상응한다. 그리고 그것의 모든 인식들, 즉 여기서는 참인(richtig) 진술들에는 [그것들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근거지움의 원천들로서 확실한 직관들이 상응한다. 이 직관들에서 [연구]영역의 대상들은 자기소여로 그리고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원본적 소여로 나타난다(kommen). 최초의 "자연적인" 인식구역 그리고 그것에 대한 모든 학문들에서 [스스로를] 부여하는 직관은 자연적 경험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원본적으로 부여하는[내주는](gebend) 경험은 일상적인(gewöhnlich) 의미로 이해된 단어로서의 지각이다. 하나의 실재적인 것이 원본적으로 주어졌다면(Ein Reales originär gegeben haben), 그것을 단적으로 직관하면서 "인지함(gewahren)"과 "지각함"은 똑같은 것이다. 우리는 물리적 사물들에 대한 원본적 경험을 "외적 지각"에서[을 통해] 가지지만, 기억 또는 미리 내다보는(vorblickend) 기대에서는[를 통해서는] 더 이상 가지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 그리고 우리들의 의식상태들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원본적 경험을 소위 내적 또는 자기지각에서[을 통해] 가지지만, 타인들에 대해 그리고 그들의 체험들에 대해서는 타인경험[감정이입]을 통해[서도] 원본적 경험을 가지지 못한다. 우리는 [다만] 그들의 육체의(leiblich) 표현에 대한 지각을 근거로 타인들에게서 그들의 체험을 들여다본다(ansehen). 타인경험의 이와 같은 들여다봄은 직관하고 부여하는 [작용이지만] 원본적으로 부여하는 작용은 아니다. 타인과 그의 영혼삶은 "그 자체로 거기 있는 것(selbst da)"으로서 의식되고 거기 있는 그의 육체와 하나이긴 하지만, 그것[그 신체]와 같이 원본적으로 부여된 것으로 의식되지는 않는다.
세계란 가능한 연구와 경험인식[경험적 인식]의 대상들의 전체총체(Gesamtinbegriff)이자, 현행적(aktuell) 경험들을 근거로 참된 이론적 사유 속에서 인식 가능한 대상들의 전체총체이다. 여기는 경험과학적 방법의 세부(erfahrungswissenschaftliche Methode des näheren)가 어떤 것처럼 보이는지, 그것이 직접적인 경험소여성의 좁은 틀을 넘어갈 권리를 어떻게 근거 지우는지[정당화하는지]를 해명할 자리가 아니다. 세계에 대한 학문, 그러므로 자연적 태도 [속에서]의 학문들은 모두 좁은 의미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 소위 자연과학들, 물질적 자연에 대한 학문들이다. 그러나 또한 심리물리적 본성을 가진 동물적 존재에 대한 학문들, 그러므로 생리학, 심리학 등등이기도 하다. 같은 식으로 여기에는 모든 소위 정신과학들, 역사, 문화에 대한 학문, 모든 종류의 사회학적 분과들이 속한다. 우리는 이 분과들에 대해 당장은 그것들이 자연과학들과 함께 서는지(gleichstellen) 아니면 대립하는지, 그것들 자체가 자연과학들에 속해있는지(gelten) 아니면 하나의 본질적으로 새로운 유형의 학문들에 속하는지에 대해 [단언하지 않고 그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다."(Hua III/1, 10-11)
★단어: anheben 시작하다(mit) / verbleiben 머무르다 / insgesamt 다 함께 / decken 포괄하다 / zusammenschliessen 합치다 / domäne 영역, 령 / Äusserung 표현 / hinausgehen 넘어가다 / vorläufig 잠정적으로, 당장, 미리 / gegenüberstellen 대립하다
§2 그런데 경험에 대한 학문은 곧 사실에 대한 학문이다. 이 학문들은 시공간 속에 현존하는 실재들을 개별적으로 정립한다. 이러한 개별적 존재들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우연적(contingent)이다. "그것의 본질을 유지한다면[지킨다면], 다른 방식으로 있을 수 있(10)"긴 하지만 말이다. 자연법칙마저 "그 자체로 전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있을 수 있는 단지 사실적인 규칙성들을 표현할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실성("matter-of-factness"[Tatsächlichkeit])이라 불리는 우연성의 의미는 필연적, 보편적 본질에 의해 제약된다. 모든 우연적인 것은 "본질을 가지며 따라서 순수하게 이해되어야(grasped) 할 형상을 가진다. 그리고 이것[형상]은 [저마다] 다양한 수준의 보편성을 갖춘 본질들의 진리들 아래에 놓여있다." 예컨대 개별적 대상은 여러 수준에서 다르게, 그러나 고유하고 정확하게 개념화될 수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높은 본질적 보편성"은 "개별자들의 "영역들" 또는 "범주들"을 한정짓는다(circumscribe, 11).
cf. 사실Tatsache(자연적 인과적 사실뿐 아니라 사회적, 심리적 사실 포함. 본질과 대립 / Wirklichkeit도 유사한 의미) vs 실재Realität(자연인과 안에 있는 것, 우연적이고 물리적인 것. 비실재와 대립)
§3 상술한 본질 또는 형상은 문자 그대로 직접 '보아질' 수 있다. 이 직관은 본질을 충전적으로 또는 비충전적으로, 다양한 명석판명성의 정도로 "아마도 [...] 원본적인 방식으로" 부여한다. 후설은 여기서 "본질(형상)이 신종의 대상"임을 강조한다. "개별적 또는 경험적 직관에서 주어지는(the given) 것이 개별적 대상이듯, 본질 직관에서 주어지는 것은 순수 본질이다.(12)" 그러므로 본질 직관이란 그 대상이 본질인, 본질이 스스로를 몸소[leibhaftig] 부여하는 직관의 작용이며, 본질에 대한 단순한 현전화(envisaging[Vergegenwärtigung])가 아니다.* 대상으로서의 본질은 다른 모든 대상과 마찬가지로 "참되고 거짓된 술어화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본질 직관의 중요한 특징은 개별적 대상이 현상하거나 가시화되기 위해서 그것이 전제돼야 한다는 사실이다. 본질 직관 자체는 "개별적인 것에 대한 파악도, 결코 [개별적인 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정립함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13). 이때 개별적 대상은 개별적 대상의 본질의 예시인 것으로서[exemplifizierend**] 취급된다.
*"Wesenserschauung ist also Anschauung, und ist sie Erschauung im prägnanten Sinn und nicht eine bloße und vielleicht vage Vergegenwärtigung, so ist sie eine originär gebende Anschauung, das Wesen in seiner "leibhaften" Selbstheit erfassend.(Hua III/1, 15) --> Q. Anschauung과 Erschauung 사이에 차이가 있는가? 일반적으로 어떻게 달리 번역되는가? --> A. 의미상의 차이는 없다. '본다'가 중요.
Q. 본질의 존재 자체 또는 본질 직관의 가능성에 대한 논쟁은 없는가? 개별 대상의 현상의 필요조건이라는 것으로 증명은 완료되는가?
A. <논리연구> 1권의 심리주의 비판에서 본질의 실재성을 증명, 2권의 2연구가 본질에 관련된 이야기이다. 인식의 질서에서는 개별자가 앞서고, 존재의 질서에서는 보편자가 앞선다. <현상학적 심리학>에서 다룬다.
**Q. '예시'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한가? '설명', '해석'은 부적합해 보이는데...
A. instantiation은 보통 예화라고 한다.(J씨)
§4 본질 직관은 직접 경험된 바 있는 직관뿐 아니라 상상을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상적인 대상에 대해서도 본질 직관이 가능한 것이다.] 다시금 유의돼야 할 것은, "본질들을 정립하고 파악하는 일이 [...] 어떠한 종류의 개별적 현존을 정립함을 조금도 함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질들에 대한 진리들만으로부터는 사실들에 대한 진리가 아주 약간만이라 해도 [결코] 추론돼선 안 된다.(15)"
§5 후설은 본질에 대한 판단 또는 본질 직관과 형상적 판단(eidetic judgment[eidetisches Urteilen]) 일반을 구분하고자 한다. 전자는 본질 자체를 주제화하는 반면, 후자는 "개별적인 무언가에 대한 판단이지만 순수하게 본질의 예화(instantiation[Einzelheit])로서 [그것을]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판단이다(15). 예컨대 삼각형의 본질이 무엇무엇이라는 판단은 전자에 해당하지만, 모든 삼각형이 어떠한지에 대한 판단은 후자에 해당한다. 후자의 판단은 본질적, 순수한, 엄밀한,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인 보편성을 가진다.* 전자는 후자로, 후자는 전자로 쉽게 전환될 수 있다.
*Q. 내가 이해한 것이 맞은가? 형상적 판단도 거짓될 수 있지 않은가? '참일 경우' 본질적, 순수한, 엄밀한,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인 보편성을 가진다는 것인가?
A. 참일 경우, 필연적으로 참이다.(J씨)
§6 형상적 판단함 및 형상적 판단/명제와 형상적 사태에 대한 사념[der eidetische Sachverhalt in dem modifizierten Sinn der bloßen Vermeintheit사념성]--실제로 성립할 수도,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는 사념--가 상응하고, 형상적 진리(또는 참된 명제)와 단적인 형상적 사태--실제로 성립하는 사태--가 상응한다. 이때 "각 형상적 특수화[Besonderung] 또는 형상적으로 보편적인 사태의 개별적 예시[개별화, Vereinzelung]는 그것이 그러한 것인 한에서 본질적 필연성이라고 불린다.* 그러므로 본질의 일반성과 본질의 필연성은 상응한다.(17, 강조는 원저자)" 하지만 둘은 서로 구분되기도 해야 한다. 어떤 사태를 어느 형상적 일반성의 특수화된 버전으로서 의식하며 판단하는 필연성의 의식은 곧 필증적(apodictic) 의식이라 불린다.**
*Q. 문장호응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Besonderung과 Vereinzelung, 즉 본질이 특수자에 깃드는 사태/특수자가 자신에게 적합한 본질을 가지는 사태가 본질적으로 필연적이란 뜻인가?
A. 본질필연성=본질일반성의 특수한 사례, 로 정의된 것. 예컨대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본질필연성, '사람은 죽는다'=본질일반성(J씨)
**유념치 말 것.
후설은 또한 형상적 판단과 그 존재가 정립된 개별자에 대한 판단을 결합하는 사례에도 주목한다. 이는 말하자면 본질을 [개별자에] '적용'하는 작업일 텐데, "현실적이라고 정립된 사태는 그렇다면 현실성의 개별적인 상태인 한에서 사실이지만, 본질적 보편성의 개별적 예시인 한에서는 형상적 필연성*이다.(17, 강조는 원저자)" 그러나 다시금, 자연법칙의 보편성과 본질의 보편성은 혼동되지 말아야 한다. 전자의 명제, 예컨대 "모든 물체는 무겁다"는 판단은 시공간적 자연의 현존을 정립하기 때문에 무조건적 보편성을 가지지 않는다. 반면 "모든 물질적 사물(material things)은 연장돼있다"는 명제는 [분석명제로서] "형상적 타당성(17)"을 지닌다.
*본질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특수 사례(J씨) vs Findlay: 그 사례가 본질필연성을 가지는 것. --> 별 차이가 없다.
Q. §5와 6의 역할을 내가 잘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이러한 논의들이 왜 요구되는가?
A. 현상학은 본질학이니까.(J씨)
cf. "Eidetic relations condition essential generalities for their instances and in doing so also condition essential necessity for these. It is as a particular case of an eidetic generality that a particular state of affairs has essential necessity. Husserl further says that such essential necessity is quite different from the necessity of natural laws, e.g., all bodies are heavy, which have no eidetic foundation."(J. N. Findlay, NOTES ON THE IDEEN OF HUSSERL, The Philosophical Forum, Inc., 2018, p.285. 이하 'Findlay(2018)')
§7 순수 논리학이나 순수 수학, 시공간 및 운동에 대한 순수한 교설 등은 "본질에 대한 순수한 학문들"--후설은 이들을 '형상적 학문'이라 부른다--로서 사실에 대한 정립을 포함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어떠 현실적 경험도 그것들을 정당화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18). 이와 같은 순수한 학문들은 현실적 관계가 아닌 이상적 가능성들을 탐구하기 때문에 경험 대신 본질에 대한 직관[분별](discernment[Erschauung])이 곧 "궁극적으로 정당화해주는[letztbegründ] 작용"으로 기능한다(19). 반면 자연에 대한 학문에서는 (상상이 아닌 현실적) 경험이야말로 정당화의 원천이다.
Q. 시공간, 운동에 대한 이론은 실증적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나?
A. 후설이 생각하기에 현대 물리학은 경험과학에 포함될 것이고. 상대성 이론은 이 가능세계에서만 성립하고. 모든 가능세계에 적용되는 순수한 본질들의 모임이 따로 있을 것.(J씨)
형상적 학문은, 설령 직접적으로 직관되지 않는 내용이라 할지라도 직접적으로 직관된 내용을 매개로 정당화가 수행돼야 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정당화되는 한에서만 해당 내용은 필증적, 형상적 필연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순수하게 형상적인 학문의 본질은 전적으로(exclusively) 형상적인 방식으로 전개되는 식으로 구성"되며 "오직 형상적 타당성을 가지는 사태만을 알아본다"고 말할 수 있다(19). 그러나 이상적으로는 상술한 바와 같은 매개적 단계들 역시 공리들로 체계적으로 환원될 수 있어야 한다.*
*Q. 내가 이 대목을 잘 이해한 것이 맞는가?
A. 그렇다. 공리들도 직관의 대상.(J씨) 직관은 공리로부터 도출하거나, 근거로부터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봄 of 공통점'. <경험과 판단>, <현상학적 심리학>에서 자세히 이야기한다.
§8 형상적 학문은 사실에 대한 학문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러나 반대로, 그 어떤 사실에 대한 학문도 형상적 학문으로부터 독립적이지 못하다. 왜냐하면 첫째, 경험에 대한 학문은 형식의 면에서는 형식 논리학이 요구하는 "형식적 원리들을 지키면서 전개돼야 하고" 나아가 [대상의 면에서는] "대상임 일반의 본질과 관련된 법칙들에 매여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각 사실은 질료적 종류의 본질적 구성요소를 포함하는데, 각 형상적 진리는 [...] 주어진 사실적 개별적 사례가 [...] 그에 매여있는 법칙을 산출해야 하기 때문이다.(20, 강조는 원저자)." [형식적 존재론과 영역적 존재론을 만족시키면서 경험과학을 수행해야 한다.]
§9 모든 구체적 경험적 대상은 그것을 포괄하는 "최상의(supreme) 물질적 유(genus[Gattung]), 경험적 대상들의 "영역[Region]""을 가지고 있다. 이 영역의 본질에는 영역의 형상적 학, 즉 영역적 존재론이 상응한다. "사실에 대한 모든 학문(경험에 대한 학문)은 형상적 존재론들에 의해 본질적, 이론적으로 정초되어있다.(20, 강조는 원저자)" 사실에 대한 학문이 더 합리적이고 정밀한(exact) 것이 될수록, 발전된 형상적 원칙들에 의해 정초되는 것으로부터 더 큰 효용을 얻을 것이고, 그 원칙들을 인식적 정당화를 위해 사용할 것이다. 또한 그럴수록 지식의 범위와 힘은 증가한다. [사실학의 발전과 본질학의 발전 사이에 일종의 선순환이 발생하는 셈이다.] 예컨대 기하학은 다른 경험 학문을 합리화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워왔다.
Q. 기하학도 영역적 존재론인가? 형식적 존재론 아닌가/ (긁적긁적)
§10 말하자면 대상화될 수 있는 모든 것--소유물, 사태, 집합, 관계 등등--은 "원초적(primordial) 종류의 대상"을 소급지시한다. 모든 대상들은 이 대상 자체(the thing itself)의 변주물(variants)일 뿐이다. 이 대상 자체의 "형식적 구성"에 대한 해명은 범주의 개념으로 탐구자를 이끈다. '범주'는 한편으로는 "영역의 범주"라는 표현에서 의미하는 것처럼 해당되는 영역 자체를 소급지시는 데 그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특정한/규정된 질료적[material] 영역"을 "대상 일반의 형식적 본질 그리고 그와 관련된 "형식적 범주들"과 연결시켜준다(22)." 후설은 이로써 영역적 존재론을 넘어, 형식적 존재론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다. 형식적 존재론은 영역적 존재론보다 높은, 또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형식적 영역'과 같은, 그리하여 다른 영역들과 동급인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형식적 존재론이 취급하는 존재자들은 "본질의 순전한 형식"이거나 "완전히 "텅 빈" 본질, 모든 가능한 본질에 어울리는 텅 빈 형식을 가지는 방식의 본질"이기 때문이다(22). 이 텅 빈 본질의 형식적 보편성은 다른 모든 보편성들을 포괄한다. 그러므로 형식적 존재론은 "질료적 존재론들 모두에 공통된 형식적 구성을 규정해준다(prescribe, 23)." 예컨대 범주와 영역의 구분과 같은 구성의 문제를 규정해주는 것이다.
Q. 결국 '범주'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A. 결국 특정한 대상들의 집합인 영역과 대상임 일반이라는 형식 사이를 매개해주는 역할인 것 같은데...(H씨) 그러나 '영역의 범주'와 '형식의 범주'가 따로 있다는 건 염두에 둬야 한다. 형식적 영역들 안의 최고 유. <논리연구>에서의 범주는 후자에 해당한다.(J씨) --> 범주가 두 뜻으로 다 쓰인다는 단순한 의미 같다. 영역적 범주=영역, 형식적 범주=대상적 범주 or 의미의 범주.
요컨대 형식적 존재론이란 "대상 일반에 대한 형상적 학"이다. 모든 대상은 형식적 존재론에 속하는 공리들 또는 그 공리들로부터 떠오르는 "순수하게 논리적인 류(sort)의 근본개념들" 다시 말해 "논리적 범주들 또는 "대상 일반"이라는 논리적 영역의 범주들"을 소급지시한다. "이 개념들은 [어떤 것이] 애초에 어떤 것이어야 하는 한에서 [...] 해당 대상[이 만족시켜야 할] 무조건적, 필연적, 구성적 규정들을 표현해준다.* 이 범주들이 종합적이지 않고 분석적임은 자연스럽다. 이 범주들 또는 개념들의 예시로는 "속성[Eigenschaft], 관계적 성질[Beschaffenheit], 사태들, 관계, 동일성, 같음, 집합(모음), 숫자, 부분과 전체, 유와 종" 등이 있다(23) 뿐만 아니라 명제의 본질에 내재하는 근본개념인 "의미[Bedeutung]의 범주들" 역시 여기에 포함된다. 의미의 범주들은 ""대상 일반"과 "의미 일반"을 서로 연결(23)"시켜주는 본질적 진리에 속한다. 그러므로 범주는 (1)형식적, 대상적 범주들과 (2)의미의 범주들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존재자'는 유가 아니다. 존재함이라는 형식에 가깝게 간주된다.
Q. 의미의 범주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다. 명제가 의미를 가지기 위해 만족시켜야 하는 본질적 조건들을 의미하는가? 대상적 범주와 어떻게 구별되는가?
A. 의미의 범주=순수논리학/명제론/주술론(e.g. "여러 종의 명제들의 개념, 명제적 구성원들[명제를 구성하는 항들], 그리고 명제적 형태들"(22), 대상적 범주=형식적 존재론, 존재함이란 무엇인가, 사태(e.g. 관계, 동일성, 집합)란 무엇인가와 관련된 논의.
cf. 의미 i.e. 노에마 --> 대상과 별개로 보려는 해석자들이 있고, 대상에 의존하려는 해석자들이 있다. J씨가 보기엔 전자가 맞다. 그렇다고 프레게와 같지는 않다. 프레게의 Sinn은 지시체를 결정하는 반면 후설에게는 그런 이야기가 없다. 한편 술어적, 논리적 의미=Bedeutung, 선술어적인 것까지 포함하면 Sinn.
Q. 마지막 문단을 이해하지 못했다.
A. 영역적 개념들/의미들도, 형식적 본질들도 모두 '범주'라 불릴 수 있다.(나) --> 범주는 영역에 관해서도, 형식에 관해서도 논의될 수 있다. 단, 형식 내에서 개념과 본질은 구분돼야 한다.(J씨)
cf. "어떤 경험과학이 어떤 특정한 대상영역에 대한 합리적인 진술체계로서 성립하기 위해서 그것은 경험 이외의 또 다른 요소들을 필요로 한다. 실제로 모든 경험과학은 그것이 과학인 한에서 나름대로 어떤 본질적인 가정들에 입각하여 전개된다."(48) 특정한 학이 "다루고자 하는 모든 대상에 대해 타당한 가정인 한에서 우리는 그것들을" 결코 위배돼선 안 될, 해당 학의 "'본질적인 가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그런데 이러한 본질적인 가정들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우리는 그것들이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뉘어짐을 알 수 있다."(49) 바로 해당 학에만 고유한 본질적 가정과 "모든 여타의 학문이 다루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서도 타당한 가정이다." 예컨대 시간이 인간 바깥의 객관적인 것이라는 가정은 뉴턴의 고전 물리학을 가능케 하는 가정인 한편, "전체는 부분보다 크다"와 같은 가정은 다른 모든 학문들 역시 가능케 하며 이런 종류의 가정을 위배하는 어떤 것은 애초에 학적 탐구의 대상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한다. "[...] 후썰은 이러한 두 가지 유형의 가정들을 주제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을 "존재론"(Ontologie)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존재론이란 대상의 본질적인 성격을 다루는 학문, 다시 말해 본질학(Wesenswissenschaft)이다."(50) 후자에 해당하는 형식적 존재론(formale Ontologie)은 "학적 대상 일반에 두루두루 적용되며, 따라서 그것들이 어떤 유형의 학문이든 학문을 학문으로서 가능하게 해 주는 형식적 조건과 관련되는 가정이"다(51). 전자에 해당하는 영역적 존재론(regionale Ontologie)은 "특정한 대상영역에만 타당한 본질적 가정을 다루는 학"이며, "특정한 대상영역의 본질구조를 다루고 있"다. 이때 "영역적 존재론의 구체적인 모습[은] 개별 경험과학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다(52). 이남인, ⟪현상학과 해석학⟫,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04 중에서 |
§11 후설은 대상성 일반 내에서 통사적 형식(syntactic[syntaktisch] forms)과 통사적 기체(syntactic substrates)*를 구분한다. 이에 따라 범주 역시 통사적 범주와 기체적 범주로 나뉜다. 통사적 범주에는 "사태들, 관계, 구성, 단일성, 다수성, 수, 순서, 서수 등등"이 속한다.**(25) 각 대상은 저마다의 통사적 형식--통사적 범주에 상응하는--을 통해 논리적으로 규정된다. 만일 'S는 P다' 형태로 사유가 진행된다면, 통사적 종류의 대상들이 단계적으로(step by step) 의미에 맞게 배열된다. 이 "범주적 종류의 대상들"은 물론 그 자체로 기체로서 기능할 수 있다. 반대로, 이와 같은 배열은 "첫 번째의 또는 가장 종속된(subordinate) 수준의 대상들, 그러므로 더 이상 통사적-범주적 형태(configuration[Gestatlung])를 취하지 않는 대상들, 사유기능의 순전한 상관자들인 존재론적 형태들을 전혀 제 안에 포함하지 않는 대상들"인 "궁극적[letzt] 기체들"을 소급지시한다(point back). 그러므로 대상성 일반의 형식적 영역은 "그에 따라 궁극적 기체들과 통사적 종류의 대상들"로 나뉘는 것이다(25, 강조는 원저자). 궁극적 기체의 예로는 '철수'가 있겠고, 통사적 대상의 예로는 '철수와 영희', '향수 안 뿌리기' 등이 있겠다(Findlay(2018), p.286 참고).
*Q. 'syntactic substrates'는 대체 무엇을 지칭하는가?
A. 범주적 대상(S가 P라는 사태, S와 S' 등)이 기체 역할을 하는 형태를 뜻하는 게 아닐까? 주어로 쓸 수 있는, 궁극적 기체들이 형식화된 바들 곧 통사적 대상들.
**Q. 저것들 자체만인가, 아니면 저것들이 포함된 문구(e.g. '하나의 초콜릿')나 문장까지 통사적 범주인가? (만일 그렇다면 기체적 범주에는 궁극적 기체들만 포함될 것 같다.)
A. 불분명하다. 나중에는 이런 구분들 안 쓴다.(J씨)
§12 어떤 본질이든, 그것이 내용을 가지든 순전히 형식적이든 간에 "일반성과 구체성(generality and specificity[Generalität und Spezialität])의 일련의 수준들"을 가진다. 가장 낮은 수준에는 "최저종차들 또는 [...] 형상적 개체성들(eidetic singularities)"이, 가장 높은 수준에서는 "최고의 유(genus[Gattung])"가 자리한다. 형상적 개체성은 그 정의에 따라 그것의 예시가 될 수 있는 특수 사례를 가지지 못한다. 예컨대 "의미 일반" 같은 것이 가장 높은 즉 최고의 유고, 각각의 규정된 명제의 형식이 그 형상적 개체성이며, '명제 일반'이라는 유가 둘을 매개한다. 최고의 유의 또 다른 예로는 "사물 일반, 감각적 성질, 공간적 모양, 체험 일반" 등이 있으며 각각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규정성들이 곧 형상적이고 실질적인(substantive[sachhaltig]) 개체성들이다. 중요한 것은 "특수한 본질 속에 더 보편적인 본질이 "직접적으로 또는 매개적으로 포함되어있다"는 점이다. 두 본질들 사이의 관계는 부분과 전체 사이의 관계로도 이해될 수 있다.(26, 강조는 원저자)
§13 일반화 및 구체화의 과정과 "실질적인 무언가를 순수 논리학적 의미에서 형식적인 무언가로 보편화"하는--또는 반대로 "논리적으로 형식적인 무언가를 실질적인 무언가로 전환시키는--과정은 철저히 구분돼야 한다. 쉽게 말해 일반화를 형식화와, 구체화를 (말하자면) '실질화[질료화]'와 혼동해선 안 된다. 예컨대 빨강의 본질을 '감각정 성질'이라는 최고 유에 포함시키는(subsume) 것은 일반화에 해당하지만, 빨강의 본질을 '본질'이라는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형식화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후자의 과정의 결과는 해당 유의 내용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큰 틀에서 말하자면, 순수한 형식은 실질적인 것들을 일반화해서, 또는 실질적인 것들의 고차적 유로서 얻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논리적이고 텅 빈 형식들을 채우는 일은 [...] 궁극적인 차이(differentiation)로 구체화해 내려가는 "작업"과 완전히 다르다.(27, 강조는 원저자)" 순수한 형식은 실질적인 것들을, 바꿔 말해 범주는 개별적 사례들을 포함하지도(include), 그것의 전체로 성립하지도 않는다. 후설은 '범위(scope[Umfang])'에 대해서도 유사한 교설을 펼칠 수 있다고 말한다. "최저종[형상적 개체성]이 아닌 모든 본질은 형상적 범위, 구체화들 그리고 각각의 경우에서 궁극적으로 형상적 개체성들의 범위를 가진다. 반면 모든 형식적 본질은 그것의 형식적 또는 "수학적" 범위를 가진다. 나아가, 각 본질 일반은 그것의 개별적 예화들[Vereinzelungen]의 범위를 가진다. [즉] 형상적-보편적 사유와 관련될 수 있는 가능한 이것임들(thisness[Diesheiten])의 이상적인 총합[을 가진다].(28, 강조는 원저자)" 경험적 범위들은 물론 존재 정립에 의해 제약되며, 그로써 순수한 보편성을 상실한다.
§14 이번에 후설은 충만한(full[voll]), 실질적인 기체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충만한, 실질적인 통사적[범주적] 대상들과 텅 빈 기체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논리적 통사적 대상들--예컨대 "삼단논법의 또는 산수의 공리나 정리"--을 구분한다. 후자는 전혀 무규정적인 것이 아니라 "순수 논리학의 [비유하자면] 물품(stock)에 속하는 사태들의 총체(totality)"이다. 반대로 이 모든 통사적 형성물들의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은 "궁극적 실질적 기체들"이다(28, 강조는 원저자). 궁극적 실질적 기체들에는 기체-범주들(substrate-categories)**이 속하며, 이는 다시 ""궁극적 실질적 본질"과 "여기-이것[dies-da]" 또는 순수하게, 통사적 형식을 결여한, 개별적 개체성"으로 나뉜다. 이 궁극적 본질은 최저종, 즉 자신 아래에 하위의 보편자를 가지지 않는 보편자를 뜻하므로 여기-이것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독해할 수 있다. 후설은 이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tode ti'(실체의 후보가 될 수 있는 개체)의 개념을 자신이 소화했다고 생각한다.
*Q. 기체가 텅 비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어떤 존재자를 가리키는가?
A. 비어있는 항 x와 같은 것.
**Q. '기체-범주들(substrate-categories)'=? 기체적 범주와 다른가?
A. 이후 안 쓰인다. 결국은 같은 것을 뜻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러나 본질이 기체-범주에 속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불분명하다. 기체가 본질을 가진다는 의미인 것 같은데.(J씨)
§15 이번에 후설은 독립적[자립적](independent[selbstständig]) 대상과 의존적[비자립적] 대상을 구분한다. 상대자를 반드시 소급지시하거나 무조건 상대자와 함께 생각되는 대상은 의존적이다. 예컨대 범주적 형식은 그 형식에 들어맞는 기체에 의존한다. 대상 또는 본질이라는 범주적 형식*조차 모든 규정된 대상들, 규정된 본질들에 의존한다. [<논리연구>의 제3연구에 따르면, 모든 의존적 대상들(e.g. 색깔, 연장)은 전체의 부분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나아가 후설은 "개별자, 구체자 그리고 추상자라는 형식적-범주적 개념들"을 서로 구분한다. 추상자(abstractum)는 의존적 본질을, 구체자(concretum)는 절대적으로 독립적인 본질 곧 형상적 개체성을, 그리고 개별자(individuum)는 "그것의 실질적 본질이 구체자인 "여기-이것""을 가리킨다. 이에 따라 유 역시 "구체자들을 자기 아래에 두는 유와 추상자들을 자기 아래에 두는 유"로 나뉜다(30). 전자의 예로는 실재적인 것, 시각적 환상, 체험 등이 있고 후자의 예로는 공간적 모양, 시각적 성질[빨강, 파랑 등] 등이 있다(31).
*Q. '대상'과 '본질'이 어째서 범주적 형식인가? --> A. 그 어떤 질료도, 실질적 내용도 결여하고 있으므로.
Q. 두 구분 사이를 매개해주는 두 번째 문단을 이해하지 못했다.
A. 어떤 본질들은 서로 결합해야 한다. e.g. 색깔+연장
§16 이제 '영역'은 "구체자에 속하는 모든(entire[gesamte]) 최상의 유적 단일성/통일성(unity), 즉 구체자 내의 최저종차들에 속하는 최상의 유들 사이의 본질적으로 통일된/단일화된 연결(united connection[wesenseinheitliche Verknüpfung])"로 분석적으로 재정의될 수 있다.* 이제 "각 영역적 본질은 본질의 "종합적" 진리들을 구체화해준다. 즉, 이 유적 본질로서 그[진리] 속에 토대를 두고 있지만(grounded) 형식적-존재론적 진리들의 순전한 특수한 예시들은 아닌 진리들 말이다. [...] 영역적 본질에 토대를 두고 있는 종합적 진리들의 합(sum)이 영역적 존재론의 내용을 구성한다. 그들 가운데 기본적 진리들의 총합, [즉] 영역적 공리들이 영역적 범주들의 합을 제약하고 우리들을 위해 그것들을 정의해준다. [...] [영역적 공리들은] 영역의 개별적 대상에 필연적으로 "아프리오리"하고 "종합적으로" 관련되어있는 형상적 보편성을 표현해준다."(31, 강조는 원저자) 칸트의 범주론과 후설의 범주론 사이의 차이는, 후자에 따르면 영역의 수효만큼 범주의 수효가 있다는 사실이다.
*Q. "Region ist nichts anderes als die gesamte zu einem Konkretum gehörige oberste Gattungseinheit, also die wesenseinheitliche Verknüpfung der obersten Gattungen, die den niedersten Differenzen innerhalb des Konkretums zugehören.(Hua III/1, 36)" --> 정의가 와닿지 않았다. 왜 영역이 구체자에 속하는가?
A. 어느 구체자가 유에 속할 텐데, 그 최고 유들의 통일된 모임...
Q. 마지막 문단을 이해하지 못했다.
A. 형식적 존재론과 영역적 존재론의 평행관계... 같다. T^T
§17 상술한 논의는 모든 지식 또는 지식의 대상을 순수 논리학 및 각 지식/지식의 대상에 적합한 영역적 존재론에 의해 토대지우기(ground) 위함이었다. 모든 직관들, 존재자들은 저마다의 존재영역에 속하며, 그로써 "본성적으로(intrinsically) 차별화된 형상적 그리고 경험적 학문"을 지정받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 차별화가 중첩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예컨대, "물질적 사물"과 "영혼"은 존재의 상이한 영역들이지만 후자는 전자에 의해 정초된다.(32, 강조는 원저자)" 학문을 분류하는 문제는 결국 영역을 구분하는 문제로 귀결되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상의 논리적 탐구들이 요구된 것이다.
2장 자연주의적 오해들
§18 앞선 논의들은 "순수 현상학의 이념을 구축하기 위한 본질적 기초들"을 놓고, "다른 경험과학들과의 관계에서 [순수 현상학]의 자리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내용이었다. 이 논의들은 엄밀하게, 즉 이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철학적인 교설들에 무비판적으로 기대는 일 없이 "순전히 우리에게 직관에서 직접적으로 주어진 구분들에 대해 충성스러운(faithful) 표현을 부과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아무것도 미리 전제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철학의 개념조차 미리 정의되지 않았다. 이후의 탐구들 역시 같은 수준의 엄밀함을 지킬 것이다. "철학적 에포케는[...] 우리가 기존의 모든 철학의 교설적(doctrinal) 내용과 관련한 판단을 전적으로 유보하고, 우리의 모든 증명들(demonstrations)을 그와 같이 판단을 유보하는 틀 안에서 진행한다는 사실에서 성립한다.(33, 강조는 원저자)" 후설은 이 에포케를 이용해 이념(idea), 본질, 그리고 본질에 대한 지식 등의 존재를 부정하는 경험주의에 맞설 필요를 느낀다. 특히 경험주의 심리학은 이념들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보여왔는데, 그로써 오히려 자기 학문의 형상적 정초와 발전을 방해해왔다.
§19 경험주의의 동기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경험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선입견을 배제하고 '사태 자체'로, 사태들이 주어지는 그대로의 모습을 탐구한다고 믿는다. 이들은 이념이나 본질 같은 것은 사실에 비하면 "스콜라철학적 존재자" 또는 "형이상학적 유령", "사변적인 아프리오리한 구축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후설에 따르면 경험주의는 여러 치명적인 오해와 선입견 위에 세워져있다. 첫째, 경험주의는 ""사태 자체"로의 귀환에 대한 기본적 요구와 지식이 모든 경우에서 경험에 의해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동일시, 더 정확하게는 혼동"하고 있다. 모든 사태가 자연적으로 사실적인 사태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태는 자연적으로 사실적인 사태임이 자명하다고 미리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진정한 무전제성은 "경험 외적인 판단들"을 곧장 거부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35)" 본질에 대한 탐구 없이 "모든 주장들이 경험[만]에 의한 정당화를 당연히 허락하고 심지어는 요구한다고 직접적으로 주장하는 일"이야말로 오히려 "사변적인 아프리오리한 구축물"이다. "진정한 무전제성은 직관이 원본적으로 부여하는 것만을 신뢰하는 데서 온다. 그리고 이 직관들은 "사물들의 적절한 본질과 판단의 구성[Urteilsverhalte]에 의해 [...] 형성된다(ramified[geartet])(36, 강조는 원저자)."* 요컨대 "직접(immediately[unmittelbar]) "보기"[...]가 모든 합리적 주장들의 정당성의 궁극적 원천이다.(36)" 그렇다고 해서 한 번의 봄이 다른 봄과 충돌할, 갈등을 빚을 가능성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범주의 직관들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게만 주어지며, 더 많은 정당성을 가진 경험에 의해 폐기되기도 한다.
*Q. '직관'이 어떤 날것이 아니라 선험적인 요소들에 의해 이미 구성되어있음을 내포하는가? 칸트를 연상시키는 문장이었다.
cf. 직관이 모든 이론적 사유마저 선행한다고 단언하기 때문에 그런 엄청난 함의를 가진 문장인 것 같진 않다(38).
§20 그러므로 경험에 대한 학만이 학문인 것이 아니다. 순수하게 형상적인 사유도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 경험적 학과 학문 일반을 동일시하고, 순수하게 형상적인 사유가 타당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것의 부조리함으로 인해 스스로를 지양(cancel)하는 [...] 회의주의로 이끈다." 예컨대 경험주의자는 "모든 타당한 사유는 유일하게 [사태를] 부여[할 수 있]는 직관으로서의 경험에 의해 토대 지워진다"고 보편적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경험주의적 태도를 정확히 기술하는 이 핵심적인 주장의 보편성은 어디서 오는가? 경험은 오직 개별적이고 특수한 사례의 타당성만을 내어주지 않던가? 물론 경험주의자는 '귀납추론'에 기대어 저런, 보편적으로 타당한 명제를 얻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추론의 "참됨(truth) 자체" 같은 것은 도저히 '경험'될 수 없다. 그리고 추론이 귀납적인 것이든, 연역적인 것이든 그것을 이끌어주는 "원칙들(37)"은 역시 경험적으로는 결정될 수 없다. 이러한 것들이 경험적 일반화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조리 그 자체다. 실증주의 역시 형상적인 직관에 기대면서, 그러지 않는 체하고 있을 뿐이다(38).
§21 이제는 [경험주의자마저] 개별적인, 경험적인 실재들뿐 아니라 본질들 역시 직관에서 주어질 수 있고 직접적으로 보아질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특히 보편적인 진리를 말하는, "판단을 통한 분별[urteilende Einsehen]의 각 작용 [...] 또한 부여하는 직관의 개념 아래에 포섭"된다. 이 개념은 논리적 범주들에 의해 상이한 모습을 취한다(differentiated[Differenzierungen haben]). 명증을 얻기 위해 직관이 아닌 느낌에 호소하는 이론들도 있는데, 후설에 따르면 이러한 주장은 "이론적으로 지어내진(concocted) 느낌(39)"에 기대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동일한 의미가 낮은 층위에서는 비직관적이고 모호하며(confused) 구조화되지 않은 채 높은 층위(layer[Schicht])에서는 선명하게 분별되는 경우가 가능하기는 하다.*
*Q. 이 층위 구분을 이해하지 못했다.
A. 상부층 = 의미지향, 하부층 = 의미지향을 충족시켜주는 직관. 같은 의미를 지향하는데 직관이 있는 상태에서 할 때와 없는 상태에서 할 때가 있다는 게 후설의 의도. 심리학주의는 직관 없이 느낌만으로 의미지향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잘못 생각.
§22 후설은 자신의 이론이 본질에 직관적 파악의 가능성을 부여하는 만큼 "현실적 (참된) 존재" 또한 부여하는 플라톤적 실재론으로 오해받아왔다고 토로한다. 그러나 후설은 "대상(object)과 실재, 현실성과 실재적 현실성(real actuality)"은 <논리연구>에서 입증됐던 것처럼 "날카롭게 구분"된다고 말한다.* 나아가 후설은 당대의 심리학이 이념과 본질이란 추상화를 통한 "정신적 구성물(mental constructs)(41)"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데 대해, 그들이 이념 및 본질을 표상하는 작용과 이념 및 본질 자체를 혼동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수를 세는 작용은 단순히 심리적인 사실이 맞지만, 그렇게 세어지는 수 자체는 비시간적[unzeitlich] 존재이기 때문이다.
*Q. 어떤 논증에 의해 구분되었는가?
A. 보편자가 포함된 문장의 참됨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보편자의 존재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보편자를 술어화할 수 있다면, 대상화할 수 있다면 존재하는 것이다. 유사성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보편적 동일성이 있다. 보편자에 대한 의식은 개별자에 대한 의식으로 환원될 수 없다. 하나의 보편자에 속하는 개별자들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직관하지 않냐!!! J씨가 주신 보편자 논증 파일 참고할 것. --> <엄밀학으로서의 철학>도 참고하라.
★ cf. "사실, 모든 사람들이 "이념들"과 "본질들"을 보며, 말하자면 언제나 그것들을 본다. 모두가 사유하면서 이념들과 본질들을 동원하고, 본질들에 대한 판단들을 내린다. 그들은 오직 그들의 인식론적 "관점"에서만 저 판단들을 거부한다(interpret away).(40)"
§23 그럼에도 여전히 개념, 본질 등은 심리적 구성물에 불과하며 심지어는 상상된 것이라는 이의가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상상의 작용과 상상된 대상 자체는 구분되어야 한다. 예컨대 상상된 켄타우로스 자체는 "본성적으로 정신적인 것이 아니며, 영혼이나 의식에도 존재하지 않고, [사실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형상에 대한 자발적인 의식 자체 또는 형상화 작용(ideation)과 형상 자체 역시 구분되어야 한다. 물론 형상화와 상상의 작용을 함께 논의하는 것은 본질의 현존에 대한 문제, 즉 본질이 회의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허구적인 것은 아닌지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그런 문제는 지각과 상상의 작용을 함께 논의할 때도 마찬가지로 제기될 수 있다. 지각과 상상의 작용을 함께 논의할 때 지각된 대상이 혹시 상상물이 아닌지 의심하는 일이 가능한 것처럼, 본질에 대한 직관 역시 오류 가능하다. [후설이 본질 직관의 오류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본질 직관은 [본질을] 원본적인 방식으로 부여하는 작용이고, 그와 같은 것으로서 상상함이 아니라 [오히려] 감각적으로 지각함과 더 비슷하다(is the analogue of)(43)."
§24 후설은 이제 그 유명한 "모든 원칙들의 원칙"을 공표한다. "[무언가를] 원본적인 방식으로 부여하는 각 직관이 지식의 정당한 원천이며, "직관"에서 원본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그 자신의 현실성에서 몸소) 스스로를 현전시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단순히 스스로를 부여하는 것 [자체로] 취해져야 하며, 그러나 오직 거기서 그것이 자신을 부여하는 한계 내에서만 그렇게 되어야[취해져야] 한다." 이 원칙은 비단 현상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이 따라야 하는 원칙이며, 경험적으로는 확인 불가능한 본질적 주장이다.
§25 "실증주의자는 그가 "철학적으로" 반성할 때에만 사실상(de facto) 본질에 대한 지식을 거부한다. [...] 그러나 그가 자연과학자로서 자연과학의 정상적인 태도에서 [사태들을] 사유하고 정당화할 때는 그것들[본질에 대한 지식]을 거부하지 않는다(44)." 본질은 오히려 자연과학적 탐구를 인도(guide)해준다. 자연과학적 이론화의 기본적 수단인 수학 등은 순수하게 형식적인 분과들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하학은 상상의 산물도 아니고 경험을 통한 귀납의 산물도 아니다. 수학적인 공리들은 사실이나 경험과 완전히 독립적으로 수학적 사유 가운데서 직관될 수 있는 성격의 것들이다.
§26 그러므로 자연과학은 형상적인 모든 것에 대해 "말은 회의주의적으로 하면서" 방법상에서는 "독단적으로" 형상들을 이용해왔다. 애초에 외부 세계에 대한 지식을 어떻게 취할 수 있겠느냐는 고대적 회의주의의 덫을 피하는 대신, 자연과학은 자신의 탐구에 적합한 방법론을 계발하는 데 힘써왔고, 정밀한 학을 일구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그들의 경험주의는 다시금, "본질들의 영역과 관련하여서는" 회의주의에 빠지고 말았다(45). 이에 후설은 학문을 수행하는 두 가지 태도를 구분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독단적 태도에서의 학문"은 인식론적인 문제나 회의주의에 동요하지 않고(unfazed), 자신이 주제화해야 하는 대상들에 대한 원본적으로 부여된 직관을 찾아 나서는 작업에만 몰두한다. 그리고 그러한 직관을 실제로 찾아내면 아무런 의심 없이 탐구의 성과물을 받아들인다. 반면 "인식론적 태도, 구체적으로 철학적 태도에서의 학문적 탐구"는 "인식의 가능성과 관련한 회의주의적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며, "독단적 학문의 결과들의 궁극적 타당성의 의미와 인식론적 가치를 평가하기 위한 결과[결론]들을 내놓는다." 이와 같은 구분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가운데서 후설은 "독단적 탐구의 경계들을 "비판적" 의문들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맞다"고 재차 강조한다. 인식론적 선입견의 정당성 같은 것은 철학자의 탐구 주제이지, 독단적 과학자를 괴롭히는 문제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식론이 불필요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경험과학의 성과가 제 아무리 만족스럽더라도, 지식의 타당성 자체가 의문시된다면 [학문 일반에] 치명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위험은 학문 일반의 대상이 되는 사물들의 초월적인 성격에서 비롯한다.] 그러므로 어떤 회의주의는 탐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회의주의이며, 실제로 자연과학을 위협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탐구는 모든 원칙들의 원칙을 지켜가면서도 이 위협물, 방해물들을 제거(suspend)해내야 할 것이다.
2부 근본적 현상학적 고찰[Fundamentalbetrachtung]
1장 자연적 태도의 정립[Thesis]과 그것의 배제[제외, 소우(消憂), Ausschaltung]
cf. 배제 = Ausschliessung, 제외 = Ausschaltung이 낫겠다(J씨).
§27 후설은 "인간존재들이 어떻게 자연스럽게[자연적 태도에서] 사는지"를 기술하는 것으로 고찰을 시작한다. 자연적 태도에서 물질적 사물들 (또는 생명체들)은 '나'가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그저 나를 위해 거기에 있(simply there for me)"으며 "언제든 그에 손을 뻗을 수 있(on hand)"는 것으로 의식된다(48, 강조는 필자). '나'의 직관과 독립적으로 그것들은 이미 규정된(determinate) 사물들로서, 내 지각장 바깥에 놓여있다 하더라도 그 존재가 현실적인 것이다. 나아가 세계는 내 지각장 바깥으로도 무한히 확장되는 것으로서 경험된다.
나의 지각장은 "그에 대해 내가 희미하게만 의식하고 있는 미규정적 현실성의 [시공간적] 지평"을 가진다. 나는 무한한 과거와 미래를 가진 시간, 그리고 어느 방향으로도 무한한 공간을 의식하며 "경험함의 자유로운 활동"을 향유한다. 그리고 설령 이 드넓은 세계 내의 사실들이 변화하더라도 "내가 하나이고 동일한 세계와 관계하는 것을 발견하며 [...] 나 자신이 그것[세계]의 구성원"이라고 느낀다(49). 세계들 가운데는 사물세계[Sachenwelt]도 있고, 가치의 세계, 재화의 세계 등도 있다. 특정한 가치와 실용성은 역시나, 언제든 내가 그에 손을 뻗을 수 있는 대상들 그 자체를 내가 주의를 기울임과 무관하게 구성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28 이 세계는 나의 환경이기도 하며, "내 의식의 많은 상이한, 가변적인 자발성들(spontaneities*)의 복합체들"이다.(50) 나는 계속해서 내 주위의 현실적 대상들을 지각하거나 느끼거나 욕망하는 등의 방식으로 대상들과 관계 맺는다. 그러나 실재적 현실성을 가지는 환경 내 대상들뿐 아니라 (환경 바깥의) 순수한 수들과 관계하기도 한다. 물건의 세계가 존재하는 만큼이나 수의 세계 같은 것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산수의 세계는 내가 산수에 몰두하고 있을 때(arithmetically disposed[eingestellt]), 그에 한해서만 나를 위해 존재한다. 반면 자연적 세계는 [...] 내가 그것을 향해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한 지속적으로 나를 위해 [그곳에--그곳이 어디든--] 존재한다." 자연적 세계는 산수의 세계에 몰두하는 내 의식작용의 배경이지만, 두 세계 사이엔 "자아와의 관계를 제외하면 아무런 연결도 없다"(51).
*Q. 'Spontaneität'은 보통 어떻게 번역되는가? A. 자발성. 능동성은 'Aktivität'.
§29 자연적 태도에서 나는 다른 인간들을 나처럼 자아를 가진, 나와 동일한 세계를 공유하는 주체로서 받아들인다. 물론 (동일한) 대상이 저마다에게 다르게 현상하고 이해되지만, "우리는 우리의 동료 인간 존재들과 소통하며(make ourselves understood) 객관적인, 시공간적 현실성을 우리들을 위해 존재하는, [그러나] 우리들 자신이 그럼에도 그에 속하는 우리의 환경으로 공동으로 정립한다."(51, 강조는 원저자)
★§30 "나는 "현실성"[...]을 거기에 선행적으로(in advance) 존재하는 것으로 발견하고 나는 또한 [그것을] 그것이 나에게 스스로를 부여하는 [모습]으로, 거기 존재하는 것으로서 취한다. 자연적 세계에서 주어진 그 어떤 것에 대한 의심 또는 거부도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에 관해서는] 그 어떤 것도 바꾸지 못한다. 현실성으로서 "이(the)" 세계는 늘 [나의 반대편에(opposite me)] 거기 있다."(52, 강조는 원저자) 여기서 후설은 "언제나 존재하는 세계[immer daseiende Welt]"라는 유명한 표현을 사용한다. 자연적 태도에서의 학문은 이 언제나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앎을 더 많이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31 이 일반정립은 단일한 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지거나, 하나의 판단명제로서 명료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적 세계로부터 우리가 경험적으로 그리고 생각의 이전에 의식하는 모든 것이 그것의 전체 통일성 속에서 그리고 모든 명료화된 두드러짐과 관련하여(in terms of every articulated saliency) "그곳에 [있음]", "언제나 그에 손을 뻗을 수 있음"" 등의 성격을 가진다. 그러므로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을 선언하는 단일한 명제가 있다면, 그것은 여태까지의 자연스러운 경험들 가운데 그저 주제화되지 않았던 것을 주제화한 것에 블과할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데카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보편적인 회의를 시도할 수 있다.* 이러한 회의는 "우리의 완벽한 자유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회의에 부치는 시도는 오직 방법론적인 도움만을 주어야" 한다.(53)
*Q. 어째서 여기서 후설은 자신이 데카르트와 "전적으로 다른 의도"를 가진다고 말하는가?(84쪽에서도 같은 서술이 반복된다.) 후설 역시 "절대적으로 의심 불가능한 존재의 영역" 또는 진리의 토대를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53)
A. 현상학의 정초를 위함이다(J씨). + 의심은 아니다(또 다른 J씨). 후설에게서는 진리의 토대가 비자연적인 곳에 있다(나).
**Q. 정말 우리는 모든 것을 의심하기를 시도할 수 있는가? 의심하기를 '시도'조차 할 수 없을 그런 것은 정녕 없을까? '철저한' 환원의 가능성에 대해 오랜 의심을 품어왔다.
A. 환원에 대해 논의를 그렇게 복잡하게 할 필요가 있나? 현상학은 의식을 탐구하겠다는 거고, 환원이라는 건 주제 제한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지(J씨). --> 현상학적 심리학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나) --> 환원이 한 번에 이루어질 필요는 없다. 하다가 시행착오를 거치면 되는 거지. 유용성의 측면에서 단번의 보편적 환원이 의미있지는 않다. 초심자가 보기엔 불필요하다고 느낄 것 같다. 그러나 보편적 환원의 이념적 가능성은 남는다.(J씨) + 꼭 가능해야 하는지도 의문이다.(또 다른 J씨)
이어서 후설은 이와 같은 보편적 회의를 시도하는 작용의 본질을 탐구한다. 우선 이 회의는 어떤 종류의 '존재' 또는 '그러함'에 대한 회의이다. 이때 동일한 의식이 어떤 존재를 회의하는 동시에 확실하게 여기거나 존재가능성을 부여할 수는 없다. 상술한 시도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을 "철회(rescind)하는 작업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그럼에도 이 시도는 저 일반정립을 부정하는 것도, "추측, 제안, 비결정(indecisiveness),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회의(doubt)로 변화시키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변화들은 "우리의 임의적 의지[자의, Willkür]의 영역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정립한 테제를 포기하지 않으며, 우리의 신념에서 무엇도 바꾸지 않는다. [자연적 세계가 언제나 거기에 존재한다는] 그 신념은 그것으로서 그 자체로 머무른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변양(modification)을 거치는데 [...] 우리는 그것[언제나 거기에 존재하는 자연적 세계]을 그것이 존재하던 그대로 "작동 밖으로(out of action)" 위치시키고 배제하며[그것을 제외하며] 그것을 괄호 안에 넣는다."(54, 강조는 필자) 이 괄호 넣기에서는 자연적 일반정립과 조화되는 입장도, 그와 양립 불가능한 입장도 취해지지 않는다. 핵심은 그 어떤 입장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흔들리지 않고 심지어는 흔들릴 수 없는 (왜냐하면 명증하므로) 진리에 대한 신념과 양립 가능한, 판단의 특정한 유보(witholding)"가 바로 판단중지, 즉 에포케(ε᾽ποχη´)에 해당한다(54-55, 강조는 원저자). 에포케는 [당연하지만] 가정하기, 혼자 상상해보기 따위와도 구분돼야 한다.
§32 그런데 후설은 에포케의 보편성을 제한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목표(aim)*는, 정확히 괄호치기의 방법을 통해서 획득되어야만 하는, 그러나 그렇다면 그저 구체적으로 제한될 영역인 새로운 학적 영역(domain)을 발견하는 데 정확히 조준되어있다. [...] 우리는 자연적 태도의 본질에 속하는 일반적 정립을 작동 밖에 둔다. 우리는 존재적(ontic) 측면에서 그것[자연세계]이 포괄하는 모든 것을 무엇이든 괄호 안에 넣는다. 그러므로 항상적으로 "우리를 위해 있는", "언제나 그에 손을 뻗을 수 있는", 그리고 의식과 교제함에 있어(in keeping with consciousness), 그것을 우리가 기꺼이 괄호친다고 해도 언제나 그곳에 "현실성"으로서 머무를 이 전체 자연적 세계[를 괄호 안에 넣는다.]"(55) 이 세계는 부정되지도, 그 현존이 회의되지도 않는다. 다만 그것의 시공간적 현존에 대한 모든 판단이 유보될 뿐이다. 이 연장선에서, 모든 자연적 학문의 성과물 역시 괄호에 넣어진 채로만 타당성을 유지하며 유효하다--[현상학적으로는 유효하지 않다].
★*Q. '자연적 세계를 괄호치고 나서도 남는 영역이 있다'는 전제를 가진 채 탐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후설이 여기서 무전제성의 원리를 어기지 않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A. 애초에 현상학을 위해서 하고 있다. 차라리 현상학이 왜 필요한지 더 잘 서술하지(J씨).
★cf. 진리가 있다는 전제도 깔고 가는 것 같다. 제일철학 부록의 관련 부분 찾아놓을 것. --> “Die normierende Reduktion aller Meinungen auf Erschauungen besagt also die auf echte, und nicht scheinbare Erschauungen. Offenbar war ich — und sind wir alle, die wir Meinungen dadurch prüfen und ev. „sichern” wollen, daß wir ihnen entsprechende Erschauungen (Erfahrungen, Einsichten) suchen, an denen sie sich „bewähreii” oder an denen sie zerschellen — von der Überzeugung geleitet, daß es „echte” Evidenzen, Erfahrungen und Einsichten in dem Sinn gibt, den wir bei der Rede von Echtheit offenbar voraussetzen: daß solche Erschauungen, einmal vollzogen, ein für allemal und für jedermann Gültigkeit erhalten, daß sie nur in identischem Sinn und in vollkommener Gewißheit wiederholbar sind und dann in der Überschau der Wiederholungen subjektiv und intersubjektiv nur immer wieder dasselbe Gegenständliche in demselben ungebrochenen Sein erschauen lassen; ebenso, daß keinerlei sonstige echte Erschauungen, die als auf dasselbe Gegenständliche bezüglich erkennbar sind, je mit den betreffenden Erschauungen in Widerstreit treten können. Kurzum, echte Erschauungen sind nicht modalisierbar, oder, wie wir gleich auch sagen können: was in echter Weise erschaubar ist als seiend, das kann nie in echter Weise erschaut sein als nicht-seiend oder zweifelhaft-seiend. Gäbe es nichts dergleichen wie e c h t e Erschauungen, deren Echtheit wir selbst erfassen, uns ihrer — und wieder in Echtheit — erschauend versichern könnten, so wäre alles Erkenntnisstreben sinnlos. Warum strebte ich über meine „blinden” Meinungen hinaus zu entsprechenden Erschauungen, warum glaubte ich dieser Normierung zu bedürfen, wenn nicht in der Überzeugung, daß der Weg der Erfahrung und Einsicht Weg zur Neugestaltung meiner Überzeugungen im Sinn der Endgültigkeit wäre?”(Hua VIII, 365, 볼드 처리는 필자)
2장 의식과 자연적 현실성
cf. 'experience'는 맥락과 자연스러움에 따라 '경험'이나 '체험'으로 달리 번역했다.
§33 이 시점에서 후설은 "만일 전체 세계가, 우리들과 모든 생각함(cogitare)을 포함해 배제된다면, 무엇이 남겠는가?"라고 묻는다. 에포케의 목적은 (새로운) 개별적 존재(자)들이 속할 새로운 존재의 영역을 획득하는 것이다. 후설은 이 존재(자)들을 '순수한 경험들', '순수 의식'이라고 부른다. 순수한 경험은 "한편으로 순수한 "의식의 상관자"를 가지고 다른 한 편으로 "순수 자아"를 가진다." 자연적 태도에서는 의식의 작용들 일반, 학적인 사유나 심리학적 반성의 결과 등을 "세계 속에서의 실재적 발생물들, 정확히 말해 동물적 존재들의 경험으로서" 받아들인다.(57, 강조는 원저자) 그러나 현상학적인 태도의 관심사는 의식의 영역 안에서 무엇이 그 안에 내재적으로(immanently) 발견될 수 있는가이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후설은 먼저 의식 자체, 특히 자연적, 현실적 세계에 대한 의식의 본질을 분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분석의 결과를 예고하면, "그 자체로서의 의식은 자신만의 절대적 본질 속에서 현상학적 배제에 의해 영향 받지 않는 자신만의 존재를 가진다는 통찰"이 얻어진다. 이 존재는 "현상학적 잔여물"로서 남으며 독특한(sui generis) 존재의 영역이자 '현상학'이란 신종 학문의 탐구 영역을 형성한다. 추후 상술되겠지만 이 의식은 인식론적인 근거들에 의해 '초월론적' 의식이라 불릴 만하며, 그에 이끄는 방법론인 에포케 역시 '초월론적' 에포케로 불릴 만하다. 초월론적 에포케는 "방법론적으로 여러 단계의 "배제', "괄호치기"로 쪼개어질 것이므로, 우리의 방법은 단계별(step-by-step) 환원의 성격을 얻을 것이다."(58, 강조는 원저자)
★Q. 의식이 현상학적 환원의 잔여물이라는 테제는 분석철학 진영에서 논의되는 the wideness of the mental content와 양립 가능한가? (If mental contents are partly determined by, or depend upon empirical facts or environments, can they 'remain' as themselves after the epoche? Can the epoche be practiced in the first place? Would 'they would be properly modified' be an adequate answer?)
A. Narrow content가 다시 치고 올라오고 있다. Kriegel의 논의를 참고할 것. 현상적 지향성 아티클 읽을 것. 지향성은 의식에 의존하지 의식 바깥에 의존하지 않는다. (분석철학적 의미에서) 지향적 mental content가 다 넓다고 해도, 지향적이지 않은 내용은 좁은 내용으로 남는다.
cf. '잘못된 고통'이 있을 수 있는가? cf. sorority 통과의례, 환상지 --> 그래도 고통으로 쳐줘야 하지 않을까? 고통의 고통됨은 순수하게 주관적으로 결정된다. 통과의례 사례의 경우 지향적 태도 때문에 발생한 고통인 것. 이때 지향적 태도가 wide하다고 고통도 wide한가? Qualia도 외부세계에 의해 인과적으로 야기되기는 하지만 narrow하지 않냐. 어떻게 야기됐든지 간에 고통이라는 특질만으로도 고통이다. 반면 지향적 상태는 무엇에 관한 믿음인지가 환경에 의해 결정돼서 wide하다.(J씨)
★cf. 데카르트적 환원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환원인 줄 알았는데 단계별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서술이 낯설다. 앞으로의 전개가 기대된다.
§34 자연적 태도에서 '무언가에 대한 의식'의 본질이 무엇인지 탐구하려 시도해보자. [자연적 태도에서도 본질 직관은 가능하다.] 우리는 자연적 세계의 사실성을 배제한 채 순수하게 형상적인 탐구에 돌입할 수 있으며, 개별 경험 또는 기억, 자유로운 공상을 통해 형상들은 자신들 스스로를 우리에게 부여할 것이다. 여기서 의식함이란 데카르트적 코기토의 '나는 생각한다'의 모든 유형 즉 지각함, 기억함, 상상함, 판단함, 느낌, 욕망함, 원함 등 모두를 포섭한다. 이와 같은 정의 하에서 의식의 경험들을 충만하게(in its fullness)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의식의] 흐름의 각 경험은 [...] 직관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그 자신만의 본질을 가지며, 그것을 위해(for itself) 고려될 수 있는 차별화된(in its own distinctivenss) [고유한] "내용"을 가진다는 것이 명증해진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각각의 내용을 보편적으로 특징 짓는 것이며, 코기타치오[생각] 안에 드러나있지 않은 것은 적절히 배제하는 작업이다. 나아가 "순수하게 코기타치오들에 적합한 바에 의해 요구되는 의식의 통일성"을 탐구하는 작업도 필수불가결하다.(60, 강조는 원저자)
cf. 칸트의 통각 논의가 연상된다. 후설은 어떤 방식으로 자아의 동일성을 논증할지 궁금해진다.
A. 그러나 여기서 통일성이 꼭 자아의 통일성인지는 불확실하다. 의식현상들이 하나의 시간 하에 통일된다는 의미일 수도. 후설에게 자아는 습성, 촉발-작용수행이 중요하다. 절대적 시간의식이 꼭 자아로 연결되지 않는다. 이념들 2권에 '습성적 자아'가 나온다.
§35 후설은 코기타치오와 코기타툼, 즉 지각의 경험과 지각된 것을 확고하게 구별한다. 그러면서 잠시 지각의 지평과 관련된 논의를 제시한다. (특히 지각적인) 파악[포착, Erfassung]*이란 지각의 배경으로부터 그 일부를 떼어내는, 그 일부에만 스스로의 의식을 향하게 만드는(direct[richten auf]) 작용이다. "사물에 대한 각 지각에는 그러므로 배경적 직관의 띠(후광, halo)가 둘러져있다." 이 배경에 대한 암묵적인 직관 역시 의식의 경험인데, 시선[의 초점]을 바꾸거나 주의를 달리 기울이면 배경의 대상들도 명시적으로 직관화될 수 있다. 기억이나 공상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모든 경험의 본질에는 "의식을 당장 현실적으로 무언가를 향함의 양상(mode of a currently actual turn toward something)으로부터 비-현실화[더 이상 같은 것을 향하지 않음]의 양상으로 전환시키며 그 역으로의 전환도 성립시키는 변양 [가능성]"이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61). 쉽게 말해 대상은 암묵적, 잠재적이다가도 언제든 명시적, 대상적이 될 수 있다(물론 그 역도 성립한다). 나아가 모든 현실적 경험은 당장 현실화되지 않은 저 암묵적, 잠재적 경험들에 의해 둘러싸여있다. "의식의 흐름은 결코 현실화 [작용들]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62)"
*Q. Erfassung(apprehension)은 Auffassung(construal)과 구별되는가? 보통은 어떻게 달리 번역되는가?
A. Erfassung=명시적 주목된 파악만 해당. Auffassung은 암묵적 파악도 가능하다. 보통 'Erfassung'을 '포착'으로 한다.
cf. '다양한 주의의 정도로 당장 명시되거나 향해져있다=현실화되어있다(actualized)'라는 후설의 용어 사용이 흥미롭다.
A. 뒤에 작용의 '잠재성' 논의가 나온다. <논리연구>에서는 모든 지향적 체험을 작용으로 보는데, <이념들>에서는 능동적인 것만 작용으로 본다. 나중 가서는 촉발(행동을 야기)과 작용(행동)이 구분된다. 잠재적 작용은 지향성은 있지만 아직 작용이 성립하고 있는 경우. e.g.지평지향성.
§36 모든 체험은 "그것이 무언가에 대한 의식인 한 그 무언가와 "지향적으로 관련"돼있다고 말해진다." 곧 모든 체험은 지향적 체험이라고도 불린다. 물론 이 관계는 결코 어떤 심리학적인 현상과 실재적 존재자 사이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당장의 논의는 객관적 현실성으로부터 독립적인, 의식의 순수한, 아프리오리한, 무조건적으로 필연적인 본질로서의 지향성을 취급하고 있다. 그런데 후설은 체험을 "의식의 흐름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정의하면서 "당장 현실적이고 잠재적인 코기타치오들"인 지향적 체험[경험]뿐 아니라 "이 흐름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내실적 계기--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그리고 그 구체적인 부분들"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설정한다. 의식의 모든 내실적 계기가 지향성을 가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지각에서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는 감각자료가 그러하다. 감각자료는 예컨대 종이의 하양을 현시하는 자료로서 "지향성의 담지자지만 그 자체로 무언가에 대한 의식은 아니다." 감각적인 감정들(sensory feelings)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사실이 성립한다.
Q. 'sensory feelings'라 하면 쾌락과 고통을 가리키는가? A. 맞다.
Q. 현대 분석철학에서는 후설의 감각자료 개념과 매우 유사해 보이는 러셀의 'sense data' 이론이 거의 완벽하게 반박된 것처럼 취급된다고 한다. 이에 대한 현상학계의 반응이 존재하는가?
cf. Huemer, Michael, "Sense-Data",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Spring 2019 Edition), Edward N. Zalta (ed.), URL = <https://plato.stanford.edu/archives/spr2019/entries/sense-data/>. "Sense data are the alleged mind-dependent objects that we are directly aware of in perception, and that have exactly the properties they appear to have. For instance, sense data theorists say that, upon viewing a tomato in normal conditions, one forms an image of the tomato in one's mind. This image is red and round. The mental image is an example of a “sense datum.” Many philosophers have rejected the notion of sense data, either because they believe that perception gives us direct awareness of physical phenomena, rather than mere mental images, or because they believe that the mental phenomena involved in perception do not have the properties that appear to us (for instance, I might have a visual experience representing a red, round tomato, but my experience is not itself red or round). Defenders of sense data have argued, among other things, that sense data are required to explain such phenomena as perspectival variation, illusion, and hallucination. Critics of sense data have objected to the theory's commitment to mind-body dualism, the problems it raises for our knowledge of the external world, its difficulty in locating sense data in physical space, and its apparent commitment to the existence of objects with indeterminate properties."(물리주의와 양립 불가, 외부세계의 존재 또는 필요성 의심하게 만듦)
A. 러셀의 이론은 외려 표상주의일 수 있다. + 감각자료의 비지향성에 대한 논의에도 논란이 있다. 정말 후설이 그 지향성을 인정했는지 여부에 대해.
§37 지향적 대상에 대한 시선(초점, focus[Blick])은 코기토 자체 즉 자아로부터 발원한다. 지각에서는 무언가를 지각하는 시선이 발원하고, 원함에서는 무언가를 원하는 시선이 발원한다. 시선을 던지는 과정은 비록 코기토의 본질에 내재하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별도의 작용인 것은 아니다. 이 연장선에서 후설은 의식의 상관자로서 지향된 대상은 결코 포착된 대상과 동일하지 않다고 말한다. 포착이라 하면 우리는 흔히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과정을 떠올린다. 이러한 주의 기울이기 또는 포착은 "코기토 일반의 양상이 아니고, 당장의 현실화 [자체]가 아니며, 도리어 더 정확히 봤을 때는 모든 의식 또는, 더 낫게는 모든 작용[...]이 취할 수 있는 작용의 특정한 양상이다.(64)" 쉽게 말해 지향적 대상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과정 자체는 독자적인 작용이 아니라 어떤 작용이 동반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양상(mode)에 불과하며, 포착되지 않아도--즉 주의받지 않아도--지향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무언가에 전향하는 과정(turning toward something[zuwenden])과 무언가를 포착하는 과정이 동일하지 않을 수 있다. 예컨대 평가의 작용에서는 가치에 전향하지만 가치 자체를 포착하는 것은 아니다.* 가치라는 지향적 대상은 "독특한 "객관화하는 전환(turn)" 가운데서만 포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경우에 "우리는 그러므로 이중의 의미로 지향적 대상을 가진다. 우리는 순전히 "주제화된 것(subject matter)과 전체 지향적 대상을 구별해야 하며, 이에 상응해 이중의 지향(intentio), 무언가에 주목하는 두 가지(twofold) 방식을 구별해야 한다."(65) 이처럼 (단순한 작용에 의해 정초된) 단순하지 않은 작용, 예컨대 대상에 대해 특정한 입장을 취한다든지, 의지를 발휘한다든지 하는 작용과 관련해서는 지향적 대상성과 지향의 방식이 늘어날 수 있으며 주제화된 것과 전체 지향적 대상이, 주의됨과 시선을 던짐[초점을 맞춤]이 갈라설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가치평가작용=가치에 대한 인식적 포착이 아닌, 가치의 향유(J씨).
★§38 작용에 대한 반성: 내재적이고 초월적인 지각들 코기토로서 '사는' 동안에는 코기타치오 자체가 지향될 일이 없다. 그러나 코기타치오는 언제든 반성적 시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어떤 코기타치오든 소위 "내적 지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후설은 내재적 작용과 초월적 작용 사이의 구별을 정립하고자 한다. 내재적으로 향해진(oriented[gerichtet auf]) 작용들의 본질은 그 작용들의 "지향적 대상들이, 만약 그것들이 존재하기는 한다면, 작용들과 동일한 의식의 흐름에 속한다는 점"이다. "[...] 의식과 그것의 대상은 순수하게 체험에 의해 생산되는 불가분의 통일체를 형성한다.(66)" 달리 말해 '내재적 지각'에서는 "지각함과 지각된 것이 본질적으로 하나의 구체적 코기타치오의 무매개적 통일체를 형성한다." 이때 지각함은 지각된 것을 자신 안에 포함시키는데*, 지각된 것은 저차적인 체험으로서 고차적인 체험인 내재적 지각을 정초한다. 이와 같은 포함(dovetailing[Ineinander])이 곧 내재적 지각의 고유한 특징이다. 반면 초월적으로 향해진 작용들, 예컨대 본질이나 타인의 지향적 체험을 향한 작용에서는 이러한 통일체나 내실적 포함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Q. p.67의 기억의 기억에 대한 논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A. 기억과 지각 대조. 기억의 경우 작용에 대상이 포함 안 돼있음. 반면 내재적 지각에는 작용에 대상이 포함돼있다.
*Q. 통일체가 형성된다는 것은 이해됐는데, 포함관계는 와닿지 않는다.
A. 전적 포함은 아니더라도 부분적 포함은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내재적 지각의 경우 내재적 지각이 과거에 있는 그대로의 체험을 마치 초월적인 것인 양 자기동일적인 것으로 내버려둔 채 지각하는 게 아니라 반성 등을 통해 새롭게 불러내는 것이니...
§39 의식과 자연적 현실성: "안일한naive" 인간의 파악(construal[Auffassung]) 지금까지의 그리고 앞으로의 논의는 순수한 의식의 본질을 밝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순수한 의식이 실재적 세계와 연결되면서 동시에 자신만의, 오직 본질에 의해서만 순수하게 규정되는 흐름을 형성한다는 사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물질적 세계는 어느 정도로 "체험들의 본질적 독창성으로부터 배제"돼야 하는가? 만일 물질적 세계가 의식에게 낯선 것이라면 어떻게 의식이 그 낯선 것과 융합(mesh)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후설은 자신의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전제들을 본의 아니게, 또는 노골적으로 노출하는 것 같다. 그에 따르면 물질적 세계는 모든 실재적 존재가 그에 본질적으로 관련되어있는 기체와 같은 것(stratum)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과 동물의 영혼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둘 사이의 만남 또는 통일이 그에게 '초월의 수수께끼'와 같은 미스터리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후설은 마지막으로 마치 보헤미아의 왕녀 엘리자베스가 데카르트에게 보냈던 편지 속의 의문과 유사하게, '물질세계와 영혼 사이에 "본성적 이질성 대신에 본질적 공통성"이 있지 않고서는 저 통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를 궁구한다. 이상의 일련의 물음들에 답하기 위해 후설은 "세계에 대한 일반정립이 자신의 자양분을 얻어내는 궁극적 원천"을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명백히, 이 궁극적 원천은 감각적 경험이다." 그에 따르면 감각적 경험 가운데서 특히 감각적 지각은 근원경험[Urerfahrung]에 해당하며 "그로부터 다른 모든 경험적 작용들이 자신의 정당화하는 힘의 핵심을 끌어온다.(68, 강조는 필자)" 지각은 "몸소 거기 현존하는 것으로서의 개별적 대상 자체의 현존에 대한 의식"이란 속성을 가진다(68-9). "자아로서 우리의 자연스러운[자연적인], 깨어있는 삶은 끊임없는 지각함[의 과정]이다. 그 지각함이 당장 현실화되어있든지 아니든지 간에 말이다. [...] 그렇다면 어떻게 의식 자체와 그것이 의식하고 있는 것이 서로에게서, 전자는 즉자적인 구체적 존재(concrete being in itself)로, 후자는 의식에 "반대되는" 무언가로서 그리고 "즉자대자적인 것(in and for itself)"으로 분리되어있는가?**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69)" 후설은 이 문제--'지각의 가능성과 현실성'이라는 자명한 사태를 의식과 의식대상 사이의 분리와 조화시키는 문제--에 답함에 있어 우선 소박한 사람의 입장을 취해보기로 한다.
*Q. 그렇다면 대다수의 현대 철학자들이 받아들이는 물리주의를 마찬가지로 받아들일 경우 후설의 '순수 의식'과 같은 것은 난센스로 전락하는가? (다만 속성이원론, 실체이원론, 질료형상론, pan-psychism--실체가 한가지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정신적 특성이 존재한다는 입장--등은 비-물리주의에 해당한다. 특히 좀비의 형이상학적 가능성을 정당하게 인정할 경우 비물리적 속성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므로 물리주의를 반박할 수 있다고 한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저런 형이상학적 전제를 받아들이고 있는 후설이 (비록 당장은 자연적 태도에서의 체험을 해설하고 있다고 변명할 수는 있을지언정) 무전제성의 원리를 고수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cf. Stoljar, Daniel, "Physicalism",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Winter 2017 Edition), Edward N. Zalta (ed.), URL = <https://plato.stanford.edu/archives/win2017/entries/physicalism/>. "Physicalism is the thesis that everything is physical, or as contemporary philosophers sometimes put it, that everything supervenes on the physical. The thesis is usually intended as a metaphysical thesis, parallel to the thesis attributed to the ancient Greek philosopher Thales, that everything is water, or the idealism of the 18th Century philosopher Berkeley, that everything is mental. The general idea is that the nature of the actual world (i.e. the universe and everything in it) conforms to a certain condition, the condition of being physical. Of course, physicalists don't deny that the world might contain many items that at first glance don't seem physical — items of a biological, or psychological, or moral, or social nature. But they insist nevertheless that at the end of the day such items are either physical or supervene on the physical."
A. 당시의 심신이원론적 풍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게 아닐까?(J씨)
**Q. 후설에게서 '즉자'와 '대자'의 용법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헤겔 식으로 독해할 경우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A. in sich=그 자체로, für sich=독자적으로
Q. 마지막 문장을 이해하지 못했다. "Das Wahrnehmen erscheint dabei, bloß als Bewußtsein betrachtet und ab gesehen vom Leibe und den Leibesorganen, wie etwas in sich Wesenloses, ein leeres Hinsehen eines leeren "Ich" auf das Objekt selbst, das mit diesem sich merkwürdig berührt.(Hua III/1, 81)"
A. 텅 빈 의식은 있을 수 없다. 대상이 요구된다.
§40 "1차적" 그리고 "2차적" 성질들: 몸소 주어진 사물과 "물리적으로 참된" 것의 "순전한 현상": 후설은 근대철학의 화두였던 (물리적이고 객관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1차 성질과 (순전히 주관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2차 성질 사이의 구분을 임시적으로 논의에 동원한다. 그러면서 그는 해당 구분에 대한 버클리의 반박, 즉 "연장[이라는] 물질성(corporality)의 이 본질적 핵심 그리고 모든 1차 성질은 2차 성질 없이는 생각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동의한다. "도리어 지각된 것의 본질적인 내용 전체[...]가 "순전한 현상"이며 "참된 것"은 물리학의 사물이다. 만일 [저 참된 것이(?)] 현상에서 주어진 사물을 원자, 이온, 에너지 등등과 같은 개념을 통해 배타적으로 결정한다면[규정한다면], 그리고 각각의 경우에서 [주어진 것을] 오직 수학적 표현을 통해서만 특징지어질 수 있는 공간내 과정들로 결정한다면[규정한다면] 그것은 따라서 몸소 저기 서있는[주어진] 사물의 전체 내용을 초월하는 무언가를 의미하게 된다. [...] 다시 말해, 그것의 물질적 공간은 몸소 지각된 세계의 공간일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당연히 버클리의 반박에 의해 희생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것"은 몸소 [주어지는] 현실성으로서 지각에서 주어지는 것과는 철저하게 그리고 본성적으로 다른 것일 터"이다. 즉 물리학적으로 참된 것은 지각과 유리된 어느 객관적 공간에 위치할 것이고, 그것을 가리키는, 결코 지각에서 주어지지는 못하지만 다만 "수학적 규정들과 관련된 수학적 공식들[을 만족시키는] 담지자"가 될 것이다(70).
상술한 가정을 수용한다면, 지각의 감각적 내용은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즉자적인 참된 모습을 반영하지 못할 것이다. 지각된 규정성들의 기체 즉 감각상으로는 공허한 저 담지자 X--칸트의 초월적 사물 자체를 직접적으로 연상시킨다--는 물리학의 정밀한 방법론을 통해서만 규명될 것이다. 그 결과 물리적 지식은 가능한 감각적 경험의 경과의 지표(index)가 되어줄 것이다. 당장의 경험세계가 지향할 바(orientation)가 무엇이 될 (수 있는)지 가리키는 데 봉사하게 되는 셈이다.
Q. 요약을 잘 한 건가? 또 후설은 실제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헷갈린다.
A. 소박한 태도의 연장선. 환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J씨). 그렇다고 후설이 여기에 반대하는 건 아니다. 의식이 무엇인지 파고듦에 있어, 탐구의 범위를 제한하는 중인 것이다. 물리적인 것 자체는 배제하고, 우리는 지각에 주어진 것만 탐구할 것이다, 라는 뉘앙스(또 다른 J씨).
§41 지각의 내실적 구성과 그것의 초월적 대상 상술한 바를 전제한다면, 코기타치오로서 지각 자체를 내실적으로 구성하는 것은 물리적 대상이 아니게 된다. 물리적 대상은 소위 현상의 세계를 철저히 초월하기 때문이다. 후설은 다시금 의식이 어떻게 그것을 초월하는 대상을 의식하는가의 문제, 의식과 초월적 대상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로 되돌아온다. 그리고는 물리학과 이론적 사유 전체를 배제한 채 직관에 의존해 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안한다.* "그렇다면 직관과 직관된 것, 지각과 지각 속의 사물은 확실히, 본질적으로 서로 관련되어있으나 하나이지도 결합되어있지도 않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그것도 실재적으로 성립하고 본질적인 방식에서의 본성적 필연성에 따라서 말이다.(71, 강조는 원저자)" ★의식과 의식의 대상은 철저히 구별되어야 하며, 실제로 필연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이다. 이를 증거하기 위해 후설은 지각은 "의식의 끊임없는 흐름 속"에 있는 것이자 그것 자체로 일종의 흐름으로서 변화무쌍한 반면 지각의 대상은 자기동일적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지각된 것은 잠재적, 현실적 지각됨 없이도 존재할 수 있으며 변화할 필요도 없다(72, 강조는 필자).
*헐어내기. 물리학적 사유 헐어내고, 지각대상 헐어내고.
후설은 지각과 지각된 것 사이의 구별을 도입하며, 지각이라는 구체적 지향적 체험을 내실적으로 구성하는(constitute) 것은 무엇인지 탐구한다. "사물은 지향적 통일체인 한편, [...] [이 통일체를 구성하는] 다양체들(manifolds) 자체는 내내 "저 통일체[통일성]와 본질적으로 조화된(coordinated) 규정된 기술적 구성(composition)을 가진다.(72)" 저 다양체는 색깔의 음영 내용과 같은 감각자료로 이해될 수 있겠는데, "이 자료들은 "파악"을 통해 그에 혼이 불어넣어진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 자료들은 "현시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더 낫게는 저 혼-불어넣음과 더불어 우리가 색깔, 모양 등등의 "현상함"이라 부르는 것을 이룬다." 이것들이 곧 지각을 내실적으로 구성하는 계기들*이다. 그러므로 지각은 곧 "하나의 파악의 통일체로 합치는 [과정의] 덕택에 [가능한,] 하나의 동일한 사물에 대한 의식으로, 이 합쳐짐은 저 파악들의 본질에 의해 정당하게 정초되며, 결국 동일화 종합의 가능성, 그와 같은 다양한 통일체들의 본질 속에 정초되어있는 가능성 덕택에 [가능한 의식이다.]" 단, 감각자료는 예컨대 단적인 색깔, 단적인 모양 등 "사물들의 내재적 면모들"과 구별되어야만 할 것이다. "음영(profile)은 체험이다. 그러나 체험은 오직 체험으로서만 가능하고 공간적인 무언가로서는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음영진 것은 본성적으로 오직 공간적인 무언가로서만 있을 수 있으며 (그것은 그저 본질적으로 공간적이다) 체험으로서는 있을 수 없다.(73, 강조는 원저자)"
*Q. 여기서 '계기(=전체의 비자립적 부분)'란 표현을 쓰는 것이 정당한가?
cf. 색깔, 모양 = 사물의 계기이지, 지각함 속에 있는 것 아님.
§42 의식으로서의 존재와 실재(reality[Realität])로서의 존재: 직관의 방식에서의 본성적 차이 초월적 사물이 지각이나 의식에서 결코 그것의 내실적인 계기나 내재적인 존재로서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인 보편성 또는 필연성"에 따른 것이다(73). "의식으로서의 존재와 사물로서의 존재 사이에는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본질적인 차이가 자리한다. 체험의 영역적 본질[...]은 내재적 지각에서 지각될 수 있다는 본성적 속성을 가진다. 반면 공간적 사물의 본질은 이와 같은 속성을 가지지 않는다.(74, 강조는 필자)" 물론 기억이나 상상, 타인지각의 대상--이들은 내실적 내재에 해당하지 않는다--이 가지는 초월성과 공간적 사물의 초월성은 구분돼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의식과 초월적 실재 사이의 핵심적인 구분이다. 이들은 각각의 지향적 대상의 성격뿐 아니라 각각이 주어지는 방식을 기준으로도 구분된다. 초월적인 사물은 음영지어져서만[Abschattung] 주어진다. 반면 "경험은 스스로를 음영진 채로 현전시키지 않는다.(75, 강조는 원저자)"* 이것은 인간적 관점의 우연성에 따른 것이 아니라, 공간적 사물의 본질에 해당하는 필증적 진리이다. 뿐만 아니라 공간적 사물이 아닌 대상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점과 지향의 변화에 따라서 현전되는 면이 달라지는 사태를 말할 수 없다.
*Q. 정말 그러한지 우리는 현상학적으로 고민해보아야 할 것 같다.
A. 외적 사물을 경험함에 있어, 경험 자체는 2차원적이므로 뒷면도 음영도 없다. 그러나 내적 경험이나 반성적 경험은 달리 고려돼야 할 것이다. 지평이 있으면서 밝혀지는 바들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도 음영이라 부를 수 있다면, 음영이라 불러야 하겠지. 파지와 예지 등을 통해 절대의식에 의해서 1차적, 원초적으로 구성되는 내재적 통일체들도 마찬가지로. 그러나 구성하는 절대적 의식의 순간적인 '경험'은 단면일 수밖에 없고. / 여기서의 음영 없음은 지각된 것에 비하면 음영이 없다, 이런 식으로 자비롭게 해석해줄 필요도 있을 것 같다. / 애초에 음영의 정의 자체가 외적 사물이 공간상에서 주어질 때의 단면을 의미하므로 '경험의 음영'이라는 표현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75).
초월적 사물에 대한 지각에서 주어지는 "다양체들의 본질적 구조는 그것들이 그것들을 정합적으로[einstimmig] 부여하는 의식의 통일성을 생산한다는 점을 수반한다*. 이 의식은 확실히 하나의 지각적 사물, 계속해서 완전하게, 계속해서 새로운 면으로부터, 계속해서 풍부한 규정들에 따라서 현상하는 지각적 사물을 의식한다. 다른 한편, 공간에서의 사물은 이와 같은 현상의 통일체로서만 본성적으로 주어질 수 있는 지향적 통일체에 다름아니다.(75)"
*Q. 다양체의 일관적, 법칙적 주어짐이 의식의 통일성을 증명해준다는 것인가? cf. 칸트의 초월적 통각
A. 여기서는 칸트식 자아의 통일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특정한 시간구간에 걸쳐 대상에 대한 의식들이 서로 정합적이라는, 서로 잘 들어맞는 사태, 경험의 규칙을 따르는 사태. t1에서 핸드폰을 봤을 때 하얗고, t2에서 봤을 때도 하얗다는 식의.
Q. 애초에 다양체의 현출을 지배한다고 말해진 바 있던 법칙의 근원은 의식인가, 세계인가?
★cf. Taylor Carman, The Body in Husserl and Merleau-Ponty, Philosophical Topics 27.2, Fall 1999는 후설의 상술한 이원론이 그의 신체론을 왜곡된 방향으로 이끌었다고 비판한다. Carman에 따르면 후설의 신체론은 1. 주관과 객관, 의식과 현실 사이에 심연을 설정하는 이원론에 묶여있고 2. 신체를 단순히 초월론적 주관의 소유물로, 초월론적 주관의 정초에 의해 지적으로, 반성적으로 촉각이 위치지어지는 장소로 보며 3. 지향성을 가지고 있지 않고 대상과는 단지 동기화 관계를 가질 뿐이라 말함으로써 오류를 범한다. 반면 메를로퐁티에게서 신체는 그 자체로 지향적이며 환원되지 않는 주관 자체고, 세계와 지적이고 반성적인 양식의 관계에 선행하는 양식으로 관계한다. 현실은 의식에 의해 비로소 구성된다기보다 이미 의식이 몸으로서/써 현실로 향해있다. --> 그의 후설 비판은 타당한가?
§43 근본적 오해에 대한 해명 이로써 두 가지 근본적인 오해가 해명되는데, 첫째는 지각이 결코 사물 자체에 이르지 못한다거나 사물 자체는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 주어지지 못한다는 오해이고, 둘째는 아무런 현상함 없이도 사물의 무엇임을 충만하게 지각할 수 있다는 오해이다. 보통 현상함 없이도, 즉 마치 체험을 내재적으로 지각하듯이 사물 자체의 모습을 직관할 수 있는 존재로 사유되는 인식 주체는 신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신적 직관'을 상정함은 사물의 초월성을 일종의 그림이나 기호의 초월성으로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에 부조리하다.* 초월적 사물의 지각에는 그 어떤 그림이나 기호도 관여하지 않는다. 그것은 몸소, 있는 그대로 다만 부분적으로만 현전할[gegenwärtigen] 뿐이다. 한편 지각 등이 가능케 하는 현전과 기억, 상상 등이 가능케 하는 현전화[vergegenwärtigen]를 구분해야 한다.
*Q. 이 논증을 이해하지 못했다.
A. 신이 만일 음영 없이 본다면 그는 내재적 통일체를 본 것일 뿐, 사물을 본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논증 자체의 진의는 모호하다. 초재와 내재의 구별 불가능성이 표상이론으로 이른다고 후설이 생각하는 듯하다(J씨). 저런 상술한 신적 직관이 가능하다면 초월성과 내재성이 구별 불가능해질 것이고, 그렇다면 신이 표상주의적으로 사유한다는 의미가 될 것이므로, 부조리.
§44 초월적인 것의 순전히 현상적 존재, 내재적인 것의 절대적 존재 초월적 사물에 대한 지각은 또한 본질적, 필연적으로 비충전적이다. "사물은 필연적으로 순전히 "현상의 방식들"로 주어지며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실제로 현시된 것"의 핵심이고, [...] "함께 주어지는 것"의 지평에 의해 둘러싸인다. 그러나 이 둘러싸임이 진정한(genuine) 것은 아니며, 다소간 희미한 미규정성[이 저 지평을 지배한다.](77)" 그러나 이 미규정된 지평은 지각의 보편적 본질에 따라 어느 정도 예상(prefigure)된다. "당연히, 저 미규정성은 필연적으로 견고하게 규범적인(prescribed) 양식의 규정 가능성을 의미한다. 그것[저 미규정성]은 지각의 가능한 다양체들, 계속해서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넘어가며 지각의 통일체로 합쳐지는 다양체들을 선행적으로 가리킨다. 저 통일체 안에서는 계속해서 지속하는 사물이 재차 새로운 (또는 다시 나타난 낡은) "면"들을 늘 새로운 음영의 연속 가운데서 보여준다." 이 음영체들의 현실성 또는 가능성이 "체계적이고 견고하게 규칙에 의해 지배"된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지각적 지식의 계속되는 증가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미처 규정되지 못한 지평이 남는다. 이 잔존은 "1+2=3"과 같은 필증적인 진리이므로 신조차 변화시킬 수 없다(78)."*
★*Q. <제일철학> 2권에서 초월론적 환원의 데카르트적 길을 시도하며 외부지각이 기존의 본질에 따라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음을, 즉 본질 자체의 해체 가능성을 지적했던 것과 양립할 수 있는가? 후설의 시선이 변화한 것인가?
A. 여기서의 필증적 진리는 '사물은 음영져있다'이기 때문에...
★'본질학'의 필증성과 '초월철학'의 필증성은 구분해야 한다. 애초에 초월론적 성격과 필증적 성격이 같이 가지 않는다. 게다가 필증성에도 여러 차원이 있다. '나는 존재한다'가 '1+1=2'보다 더 필증적(J씨)
초월적 사물과 달리 [내적] 체험은 무관점적으로, 즉 절대적으로 주어진다. "느낌(feeling)의 체험은 스스로를 음영지운 채로 현전시키지 않는다. 내가 그것을 쳐다보면, 나는 절대적인 무언가를 가지며, 그것은 한 시점에 한 식으로, 다른 시점엔 다른 식으로 스스로를 현시할 수 있는 면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로써 현상을 통한 초월적 지각에서는 대상이 결코 절대적으로 부여될 수 없고 일면적인 현시의 방식으로만 부여될 수 있다. 반면 내재적인 부여는 이와 같은 제약을 가지지 않는다. 물론 "음영진 감각 자료들은 [...] 다른 것의 음영들로서 기능하지, 그들 자신이 음영을 통해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또한 물론 자명하다.(79)" 여기서 후설은 내적인 체험이 비충전적일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체험은 본질적으로 어떤 흐름이다. 인식 주체는 특정한 순간에 시선을 고정할 수 있을 뿐, 시야 너머의 내용은 놓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불완전성은 초월적 사물의 지각이 보이는 불완전성과 본성적으로 다른 불완전성이다. 상술한 차이들은 의식된 내용의 재생산적 변양에도 영향을 미친다. 초월적 대상에 대한 현전화에서는 모든 음영들과 파악 즉 전체 현상이 철두철미 재생산적으로 변양된다. 그러나 내적인 경험을 재생산적으로 직관할 때는 재생산적 변양을 발견할 수 없다.* 이에 더해, "상대적인 선명도 또는 희미함의 점진적인 차이들이 무언가를 현전화함의 본질적 속성"임을 유념해야 한다. 이처럼 현전화에 관련된 선명도의 가능한 스펙트럼과 부여의 충만성의 가능한 스펙트럼은 서로 구별되어야 한다.
*Q. 정말 그러한가? 반례를 너무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은데...
A. 애초에 음영이 없기 때문에 음영에 대한 변양은 찾아볼 수 없다.
§45 지각되지 않은 체험, 지각되지 않은 실재 모든 현행적인 체험은 반성을 통해 직접적으로(immediate) 지향될 수 있다. 반성은 "그 안에서 지각적으로 파악된 것이 본성적으로 그것을 지각하는 시선 내에 존재하고 지속할 뿐만 아니라 시선이 그에 겨눠지기 전부터 이미 존재한 무언가로 특징지어진다는 놀라운 속성을 가진다." 반성되지 않을 때에도 체험의 배경에 남아 언제든 지각될 준비가 되어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언제든 반성될 수 있다는 것은 체험의 존재론적인 본질이다. 반면 초월적인 사물의 경우, 그 지평에 대한 지식이 증가할 수는 있지만 단순히 시선을 던지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만으로 원하는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Q. 체험에 대해서도 사실상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는 체험을 매우 쉽게 망각하니까.
A. 현행적인 체험에 한정해서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
Q. 그렇다고 해도 사물과 어떤 대조가 유지되는지 모르겠다. 사물도 언제든 다시 지각할 수 있지 않나(J씨).
A. 사물의 경우 지각을 방해하는 요소가 끼어들 수 있을 것.(또 다른 J씨)
§46 내재적 지각의 의심 불가능성(Indubitability[Zweifellosigkeit]), 초월적 지각의 의심 가능성 상술한 바로부터 "각 내재적 지각은 그 대상의 현존을 필연적으로 보장한다"는 것이 따라나온다. "달리 말해, 그 비존재를 파악하는 것은 본성적으로 불가능하다.(82, 강조는 필자)" 주어진 경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조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체험적 삶의 흐름의 존재 그리고 그 삶의 주체로서의 '나'에 대한 명증은 반증할 수 없는 것이다. 저 명증은 어떤 의식의 흐름에서나, 어떤 자아에게서나 발견될 수 있다. 예컨대 내가 타인지각을 통해 정립한 다른 의식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지만, "나의 타인지각함 그리고 나의 의식 일반은 원본적이고 절대적인 방식으로 주어지며, 그것의 본질과 관련해서뿐만 아니라 그것의 현존과 관련해서도 그러하다." 반면 세계의 사물은 주어지더라도 현존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본질적 법칙으로서 사물적 현존은 결코 부여에 의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아니며 그 대신 특정한 방식으로 언제나 우연적이라는 것이 성립한다.(83, 강조는 원저자)" 새로운 경험이 발생하면 이전에 정립된 것이 폐기될 가능성이 언제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달리 정립될 수 있음'이 절대적인 내재적 지각의 영역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이 영역에서의 정립은 무조건적이며 무엇에 의해서도 취소되거나 대체될 수 없다.*
*Q. 너무 안일한 주장이 아닌가? '나'의 정립이 무조건적이라는 것까지는 신빙성이 그나마 있는데, 그 '나'의 개별적 내적 경험까지도 같은 수준의 무조건성을 확보하게 된다는 주장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다. 모든 내적 경험이 아니라 '당장의' 내적 경험에 한정되는가?
A. 당장 내가 고통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을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J씨).
Q. 자기지식도 피상적인 수준이 있고 완전한 수준이 있지 않나.
A. 현행적이고 명시적인 의식과 배경적 의식 사이의 필증성 차는 후설도 인정할 것이다. 복합적인 감정의 경우는 잘 모르겠다 비단 감정뿐 아니라 판단의 영역에서도... (J씨)
cf. 심리학적 전이의 사례(e.g. 사실은 나 자신이 싫은 건데, 상대가 싫다고 생각. --> 정말 적어도 그 순간엔 상대를 싫어한 걸까?)
그러므로 세계의 사물들은 오직 가정적인 현실성만을 가지는 한편, "세계가 그를 위해 있는 나 자신" 또는 "내 체험의 당장의 현실화는 절대적인 현실성"을 가진다는 것이 분명하다. "세계의 "우연한" 정립은 그러므로 내 순수한 자아와 자아로서의 삶의 "필연적"이고 완전히 의심 불가능한 정립에 반대해 선다.(83)" 나아가 경험적 관찰로부터 모아진 그 어떤 상상가능한 근거도 세계의 현존에 대한 절대적인 확실성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세계는 의심 가능하다. 합리적인 동기들이 일관적 경험들의 위대한 힘과 대립하는 경우가 고려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의심함이 생각 가능하며 그것이 상상가능하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왜냐하면 비존재의 가능성이 원칙적인 가능성으로서 결코 배제되지 않기 때문이다.(84)"
3장 순수 의식의 영역
§47 의식의 상관자로서의 자연적 영역 "인간의 경험은 [...] 우리의 이성으로 하여금 직관적으로 주어진 것들을 넘어서 [...] 그것들 기저에 "물리적 사실"을 정립하도록 강제한다."(85) 그러나 사실은 경험의 배후에 그 어떤 물리적 세계도 없는 사태가 가능하다. 그 무엇도 우리로 하여금 사물을 단지 의식의 대상으로 말하자면 파괴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사물들은 경험의 사물들이며, 오직 경험만이 그것들에 의미(sense)를 부여한다. 그러므로 '사물 자체(being in itself)'라는 개념은 [다양체들을 여러 차례 파악한 뒤] 동일시하는 경험으로부터 외에서는 도출돼선 안 된다. "초월성의 관념은 그러므로 이 동일시하는 경험이라는 순수한 관념의 형상적 상관자이다."(86, 강조는 필자)
따라서 사물 자체는 결코 의식을 배제하면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사물은 환경의 사물"(86)이기에 동기들의 연결을 따라 언제든 경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미규정적 지평은 "동기화된, 그것들이 속하는 본질적 유형에 따라 미리 형성된(prefigured)" 방식으로 언제든 규정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 변화무쌍한 그러나 항상 함께 정립되는 지평"을 통해 "세계의 정립(thesis)은 그 본질적 의미를 획득한다."(87)
cf. 동기=어떤 의식을 가질 이유가 있음. 의식의 권역에서의 유사-인과관계
§48 우리의 세계 바깥의 세계의 논리적 가능성과 물질적 부조리[불합리] 이 세계 바깥에 무언가 실재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현행적 자아에 의해 경험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 자아가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원칙적으로 다른 자아에게도 인지 가능해야 한다. 서로 감정이입이 불가능한 존재자들 가운데서도 동의의 본질적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로부터 "경험의 사실적으로 분리된 세계들이 하나의 상호주관적 세계, 정신들의 통일된 세계의 상관자(인간 공동체의 보편적 확장)로 (당장의 경험들의 연결 가운데서) 융합할 가능성"이 따라나온다(87-8). 따라서 이 세계 바깥에 무언가가 실재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런 논리적 가능성은 없다.
Q. 정확히 어떤 논증인가?
p1. 실재는 현행적 자아에 의해 경험될 수 있어야 한다. p2. 현행적 자아는 이 세계 안에 있는 것만 경험할 수 있다. <-- 이 전제가 위의 밑줄친 부분을 통해서 성립하는가? c. 이 세계 바깥에는 실재가 없다. |
이 세계에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실재들과도 상호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같은 세계 내에 포섭될 수 있다(J씨).
★§49 세계의 전적인 무화의 잔여물[Residuum der Weltvernichtung]로서의 절대적 의식 "그러나 경험의 연결성이 음영들, 파악들, 현상들의 고정된, 규율된 질서를 잃고--세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 상상 가능하다." 비존재의 가능성은 초월적인 존재자의 본질이며, 전체 세계도 예외는 아니다. 만일 세계가 무화된다면 "의식의 존재, 경험 일반의 모든 흐름은 물론 필연적으로 변형되겠지만 [...] 그 자신의 존재는 영향 받지 않을 것이다. [...] 고로 그 어떤 실재적 존재도 [...] 의식 자신의 존재를 위해 필연적이지 않다. [...] 그러므로 내재적 존재는 의심의 여지 없이[,] 존재하기 위해 원칙적으로 어떤 "사물"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절대적인 존재이다. 반면 초월적인 사물들[res]의 세계는 완전히 의식에, 그리고 물론 웬 논리적으로 지어낸 의식이 아니라 당장 현행적인 의식에 의존적이다."(86)
Q. 정확히 어떤 논증인가?
p1. 세계 전체의 비존재가 상상 가능하다. p2. [그 상상을 감행하는] 현행적 의식의 존재는 그에 변형이 가해질 뿐 해당 상상에 의해 영향 받지 않는다. c. 세계 전체는 현행적 초월론적 의식에 의존한다. |
Q. p1, p2에서 c가 따라나오는가? 논리적인 상상 가능성만으로 이런 무지막지한 형이상학적 결론으로 치닫는 게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보다 정교한 중간 단계들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의존'의 관계는 대체 어느 전제에서 온 것인가?
A. 상대적 존재는 절대적 존재에 의존한다, 라는 중간단계가 생략된 듯하다. 그러나 내재적 존재가 정말 그렇게 절대적인가라는 의문은 남을 것이다.
A2. '의존'이란 표현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자비롭게 봐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존재론적 의존보다는 인식론적 의존이어야 할 것이다. 세계에 대한 앎이 인식주관에 의존한다는 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존재론적으로 읽으면 너무 관념론적이 된다. 과하게 형이상학적으로 읽지 않는 것이 주류. 구성도 세계의 창조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앎의 창조니까.
Q. 하지만 그러면 아무 주장도 아니지 않나?
cf. '아무런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가능세계'가 상상 가능하다는 사실과는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
cf. 위 논증과 다음 논증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부모님이 있어야 딸이 태어날 수 있기 때문에, 다음 논증은 무척 부조리해 보인다.
p1. 부모님의 비존재가 상상 가능하다. p2. [그 상상을 감행하는] 딸의 현행적 의식의 존재는 그에 변형이 가해질 뿐 해당 상상에 의해 영향 받지 않는다. c. 부모의 존재는 딸의 현행적 의식에 의존한다. |
A. 후설의 논증의 경우, 의식이 없는 것은 상상불가. 왜냐하면 상상하는 것이 의식이기 때문.
A2. 여기서도 인식론적 존재로 봐야겠다.
"의식과 실재의 의미 사이에는 진정한 심연이 그 입을 벌리고 있다. 후자[실재]에는 순전히 우연하고 상대적인 존재가 [속해]있는데, 자신의 음영들[만]을 현전시키[되] 결코 그 자신 [자체를] 절대적으로 부여하지 않는다. 전자에는 원칙적으로 음영들과 현상들을 통해[서는] 부여될 수 없는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존재가 [속해]있다." 후설에 의하면 또한 의식은 그 자체로 완전하게 닫혀있으며, 무엇도 그 안으로 침투할 수 없고, 그 어떤 시공간도 점유하지 않으며 무엇에도 인과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반면 전체 시공간적 세계는 "순전히 지향적 존재"로 "의식을 위한 존재로서 순전히 이차적이고 상대적인 의미를 가진다."(90, 강조는 필자) 세계는 의식의 경험을 통해 정립되는 것이며, 현상의 동기화된 다양체를 통한 동일화 작용을 넘어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50 현상학적 태도와 현상학의 연구영역(field)으로서의 순수 의식 자연적 세계에 자연적 이론적 태도가 상응하듯이, "자연의 심리물리적 우주의 배제와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유지하는 절대적 의식의 전체 연구영역"에 상응하는 새로운 태도가 존재할 것이다. "자연을 구성하는 의식과 관련된 작용들을 소박하게 수행하는 대신 [...] 우리는 이 모든 정립들을 "작동 밖에" 두고 [...] 우리의 시선(사물들을 파악하고 탐구하는 시선)을 자신의 절대적 존재 속의 순수한 의식에 겨눈다." 작동 밖에 두어지지 않은 것, 괄호 쳐지지 않은 것--괄호 쳐질 수 없는 것--곧 순수 의식이 "현상학적 잔여물"이라고 후설이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그저 완전하고 절대적인 존재를, 정확히 이해한다면, 세속적 초월성의 모든 경우를 자신 안에 품고 있는(contains), 그것들을 제 안에서 "구성하는" 존재를 획득했을 뿐이다."(91, 강조는 필자)
작용들을 괄호친다 함은 그 안에 사는 대신 [...] 그에 겨눠진 반성의 작용을 수행하고, 그들이 그들인 바인 절대적 존재로서 그들을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제 완전히 이와 같이 이차적 층위에 있는 작용들 속에 산다."(91, 강조는 필자)* 이 작용들에서 주어지는 "절대적 경험들의 무한한 연구영역"이 곧 "현상학의 기본적인 연구영역"(92)이다.
*Q. 그렇다면 초월론적 환원 이후의 의식에 대한 시선은 단지 세계의 무화 가능성을 전제한 후의 내성, 반성적 자기지식의 획득과 동일한 것인가?
A. 그럴듯하다. 환원은 태도 변경이라서, 의식 바깥이 아닌 의식을 향하는 게 환원이라서 결국 반성이 환원인 셈(J씨).
§51 초월론적 선행적 고찰[Vorbetrachtungen]의 의미 현상학적 환원은 마치 연장체로부터 색깔을 추상해내는 것과 같은 추상의 작업이 아니다. 자연으로부터 그와 같은 종류의 추상을 감행한다면 오직 자연적인 것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현상학적 환원은 단순한 축소나 제한도 아니다. "절대적 본질자들(essentialities)로서의 의식"은 "그 자체로 엄밀하게 닫혀있지만 다른 영역들로부터 그것을 분리시킬 수 있는 경계도 없다. [...] 자연의 현존은 의식의 현존을 조건화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전자는 실제로 의식의 상관자로서[만 비로소] 스스로를 설립하기 때문이다. 그것[자연]은 오직 의식의 규칙에 의거한 연결들 속에서 스스로를 구성한다는 의미에서만 존재한다."(93, 강조는 필자)
*Q. 이런 종류의 테제는 초월론적 의식은 죽지 않는다는 식의, 직관을 통해서는 확증할 수 없는 사변을 낳을 위험이 있어 보인다. 1인칭의 시선에서 저렇게 생각될 수 있다손 치더라도, 형이상학적으로 세계 일반이 저렇게 구조화돼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까?
A. 자연적 의식과 초월론적 의식이 동일하다면, 육체와 함께 전자가 소멸한다면 후자도 소멸할 것. 그리고 초월론적 의식이 죽을 이유는 없다고 말한다 해서 기능할 이유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추록 신의 초월성은 사물의 초월성과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신이 절대적 의식에 임재하는 사태는 일반적인 내재성을 통해서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신의 초월성을 설명하려면, 현상의 다양체들의 통일에 의거하지 않는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 초월성의 자리가 의식의 절대적 흐름 가운데 마련돼야 할 것이다. 이 자리로부터 비롯할 신학적 원칙들은 [일반적인 초월자들을 주재하는] 자연적 인과와 연관된 것으로 간주돼선 안 된다.
§52 보충들[Ergänzungen]: 물리적 사물과 "현상들의 알려지지 않은 원인" 여태까지는 감각적 현상들이 "순전한 현상" 또는 "순전히 주관적인 것"으로서 취급되었다. 그러나 이 순전한 주관성[지각된 사물]은 경험[지각체험]의 주관성과 혼동돼선 안 된다. 지각된 것들이 그에 대한 지각의 성질 속에 있는 것이 아니며, 지각의 성질이 경험 자체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상의 배후에, 완전히 알려져있지 않은, 단지 가설적으로 가정된 현상들의 숨겨진 원인을 정립해서도 안 된다. 칸트의 물자체 이론과 같은 것은 경험의 본질과 사물의 주어짐이라는 사태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에 불과하다. 만일 그런 숨겨진 원인이라는 것이 애초에 존재한다면, 원칙적으로 그것은 우리에 의해서, 아니면 적어도 우리보다 우월하고 분별력 있는 자아들에 의해서 지각 가능해야 한다.** 그런데 이때의 지각 또한 현상[현출] 다양체를 통한 지각일 것이므로, 문자 그대로의 물 '자체'를 지각하려는 시도는 무한퇴행에 빠질 것이다. 요컨대 우리의 지각은 인과를 통해 설명돼선 안 된다. 이에 더해 후설은 의식에 주어지는 것이 물리적 사물의 그림이나 기호라는 이론을 배격한다. 물리적 사물은 의식에게 스스로를 현상시키는 것, 원본적으로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도교수님의 페이버릿 예시를 동원하자면, 우리는 빵을 먹지 빵의 그림을 먹는 것이 아니다.
*Q. 여기서 '성질'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바로 앞 문장도 이해하지 못했다.
A. 물리학적 사물과 지각된 사물 그리고 지각체험은 분리돼야 한다. '지각된 것'=물리적 사물이고 '지각의 성질'=지각된 사물의 계기들, '경험 자체'=지각
**Q. 이 전제는 어째서 타당한가? 버클리(Esse est percipi, To be is to be perceived)가 옳지 않은 이상... 애초에 왜 실재 여부가 경험 가능성의 여부를 통해 결정된다 말인가? 실재에 대한 앎이 아니라 실재의 존재 여부가?!
cf. 실재는 현행적 자아에 의해 경험될 수 있어야 한다.
A. 원인이 있다고 단언할 수 있으려면 증거가 필요하지 않냐. 원리적으로 인식 가능해야 한다(J씨).
Q. 인식할 수 없는 존재를 왜 거부하는가?
A. 인식 불가능한 존재자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부조리하다. 너는 그거 어떻게 아는데?(J씨)
나아가 후설은 일반적으로 지각되는 사물과 물리학자들의 이론적 탐구의 대상이 되는, 말하자면 '보다' 초월적인 사물 사이의 차이를 정립하고자 한다. 물리학적 탐구는 자연적인 경험을 토대로 가지는 채 다만 "파악의 특정한 방식들, 특정한 지향적 구조물들"을 선택할 따름이다. 그것이 동원하는 인과의 관계와 법칙들은 "구성된, 지향적 세계의 연결에 본성적으로 속하며 그 안에서만 의미를 가진다"(98). 인과가 물리적 사물과 절대적 의식, 또는 순수 의식 사이에 성립하는 것은 아님이 다시금 강조돼야 할 것이다. 이로부터 첫째, 인과물리적 자연을 절대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물리주의]는 부조리하다는 것, 그리고 둘째, 물리학, 자연과학 일반의 성과는 현상학적 탐구에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99).
§53 동물계[Die Animalien]와 심리적 의식 후설은 자연과학에 대한 이상의 단호한 태도가 인간이나 동물과 같은 동물적 실재들 그리고 그들의 영혼과 관련해서도 견지되는지 자문한다. 세계는 단순히 물리적이지 않고 심리물리적인 곳이기 때문이다. 의식은 어떻게 하여, ①모든 초월적인 것을 구성하는 절대자인 동시에 ②육체에 종속되는 세계 내의 사건일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답하기 위해 후설은 자신만의 심신관계론을 펼친다. "의식은 육체와의 경험적인 관계를 통해서만 실제로 인간적이고 동물적이 되며, 오직 이 수단을 통해서만 자연의 시공간 속에 자리를 잡을 수 있다." 나아가 "의식과 육체의 조합"을 통해서만 동물적 존재들 사이의 상호적인 이해가 가능하며, 전체 세계를 자신들 모두에게 공동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99).* 따라서 "인간 존재나 동물의 심리물리적 자연적 통일체는 육체적으로 정초된 통일체로 구성된다"는 것이 후설의 결론이다. (한편 의식은 자연적인 태도에서, 육체와 조합된 것으로서 파악될 때조차 음영을 통해 현상하는 성격을 보이지 않는다.)
*이때 의식은 자신에게 낯설고 이질적인 그 무엇도 자신 안으로 들일 수 없다고 하니, 후설이 데카르트적인 심신이원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 것 같다.
Q. 심신관계에 대한 후설의 서술은 모두 자연적 태도에서 이루어지는 것인가? 환원 이후에는 신체의 정초 기능이 소멸하는가? 어차피 '영혼'과 같은 것도 사라지고 초월론적 의식만 남으니 당연하려나?
A. 자연적 세계에서만 상술된 심신관계론이 성립하고, 판단중지 후엔 '언급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심신관계론은 영역적 존재론에서 다뤄야 할 것이지 현상학의 문제가 아니다(J씨).
Q. 정말 그런가?
A. 예컨대 키네스테제 감각을 논하는 것이지, 신체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환원 이후에는 오직 의식에만 관심을 둔다. 그러나 후기에는 순수의식이란 '순화된 마음'이라고 말한다고 한다(J씨).
나아가 물리학적 태도와 현상학적 태도가 구분되었듯 심리학적 태도와 현상학적 태도 또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심리학적 태도는 자연적 태도의 일종으로서, 경험을 인간이나 동물의 [이미 구성된] 지속하는 상태(persisting state)로 인식한다. 반면 현상학적 태도는 지속적인 상태에 대한 [구성하는] 파악을 담당하는 절대적 경험을 발견한다.
Q. ""순수한" 경험은 어떤 의미에서 심리학적으로 파악된 것 안에, 인간적 조건으로서의 경험 안에 "놓여있다." 자신만의 본질을 가지고 그것[순수경험]은 지속적인 상태의 형태를 띠게 되고, 그와 더불어 인간 자아와의 지향적 관계와 인간적 육화를 획득한다."(101)라는 문장은 어떻게 해석돼야 하는가? 초월론적 의식이 (필연적으로는 아니겠지만) 육화된다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인가?
A. 순수경험을 심리학적 태도에서 통각하면 영혼과 같은 것으로 이해될 것이고 그것은 육체 속에 놓여있다.
§54 계속: 우연적이고 상대적인 것으로서 초월적, 심리학적 경험,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것으로서 초월론적 경험 요컨대 모든 인간--'나'와 타인을 불문하고--를 비롯한 세계가 무화돼도 순수한 의식은 경험의 절대적인 흐름으로서 잔존한다. 후설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흥미로운 사고실험을 감행한다. "몸이 없고 [...] 심지어는 아마 영혼도 없는 비인격적 의식이 확실히 상상 가능하다. 즉 그 안에서 지향적 통일체들--몸, 영혼, 경험적 자아-주체--가 구성되지 않는 경험의 흐름, 그 안에서 이 모든 경험적 개념들 그리고, 그것들과 더불어, 심리학적 의미에서 경험의 개념이 [...] 아무런 타당성을 가지지 않는 경험의 흐름이 상상 가능하다."(101-2)* 이 사고실험의 결론은 바로 모든 경험적인 통일체들과 심리학적 경험들은 달리 경험될 수 있는 우연적이고 상대적인 성격의 것이라는 점이다. 반면 다른 모든 경험, 순전히 지향적이고 구성에 의존하는 상대적인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전제로서의 절대적인 경험이 존재하며, 이것은 "형이상학적 구축물이 아니라 대신 직접적인 직관에서 주어져야 하는/주어질 수 있는 것이며, 태도의 상응하는 변화에 따라서 의심의 여지 없이 그 절대성 안에서 식별될 수 있는 것이다."(102, 강조는 필자)
*Q. 정말 상상 가능한가?
A. 상상 가능하다. 해석을 안 하는데 해석의 잠재적 대상들 즉 흐름만 있는... 그걸 몸이라고, 자아라고 해석하지 않는 그런 의식이지.
§55 결론: 모든 실재들은 "감각의 부여를 통한" 것이며, "주관적 관념론"[은 내가 주장하는 바가 아니다] 후설은 절대적 순수의식이 형이상학적 가정들로부터 연역되는 것이 아니라 직관 및 의심 불가능한 절차에 의해 직접적으로 식별되는 것임을 다시금 강조한다. 또한 자연적 실재만이 존재의 전부는 아니며 '절대적 실재'라는 것은 '둥근 사각형'과 같은 논리적 모순에 불과함도 역설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론이 버클리 식의 관념론이 아니냐는 의문에 대응하는데, 후설은 자신이 "세계의 충만하게 타당한 존재[실재]로부터 아무것도 박탈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실재적 현실성은 "재해석"되거나 심지어는 부정되지 않는다. 단지 그에 대한 부조리한 해석[예컨대 물자체가 현상의 원인으로서 존재한다는 해석]이 옆으로 치워질 뿐이다. [...] 그 부조리한 해석은 세계를 절대적인 것으로 철학적으로 파악하는 데서 비롯하며, 이는 세계를 받아들이는 자연적인[자연스러운] 방식에 철저히 낯선 것이다."(103)
반면 자연적 세계의 일반정립 자체는 전혀 부조리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자연적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절대적 근원들의 존재영역"이 탐구 가능하며 분별 가능하다는 것, 그것도 그에 대한 충만하고 엄밀한 지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 된다.(103) "우리에게 본질적인 것은 현상학적 환원--자연적 태도의 배제로서 또는, 더 낫게는, 그것[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의 배제로서]--이 가능하고 그것의 수행(implementation[Vollzuge]) 이후에는 절대적인 또는 초월론적으로 순수한 의식이 잔여물로서 남으며[verbleibt]--그것의 실재성을 계속해서 요구하는(stipulate[zumuten]) 것은 부조리하다는 점이다."(104)
4장: 현상학적 환원들
§56 현상학적 환원의 범위에 대한 물음: 자연과 정신에 대한 학문들 상술한 자연의 배제(suspension[Ausschaltung])는 초월론적 순수 의식으로 우리의 시선을 전환시키기 위한 방법론이었다. 그러나 후설에 따르면 이 배제는 단박에/일격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후설은 순수 의식을 탐구하기 위해 무엇을 더 괄호 쳐야 하는지, 과연 자연의 영역만 배제의 대상이 되는지 파헤치고자 한다. 일단 물리적이고 심리물리적인 자연적 세계의 배제를 통해, 의식에 의해 구성된 모든 종류의 대상들--자연적 학문과 예술작품, 문화의 형태, 가치들, 국가, 관습, 종교, 법 등, 무엇보다 자연적 태도에서 이루어지는 자연과 정신에 대한 모든 학문들을 비롯하여--이 함께 배제됐다는 것만큼은 자명하다.
§57 순수 자아의 배제에 대한 물음 이 과정에서 "사회 속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 존재와 인격적 통일체(union)로서의 인격" 역시 모든 동물과 마찬가지로 배제된다. 그런데 순수 자아는 초월론적 환원의 영향을 받는가, 아니면 받지 않는가? 혹시 환원이 순수 자아마저 초월론적 무로 만드는 것은 아닌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후설은 순수 의식의 흐름에 환원을 수행해보려 한다. 그의 결론은 초월론적 [환원의 영향을 받지 않는] 잔여물로서 어떤 흐름이 분명히 잔존하며, 순수 자아는 그 어떤 경험으로서도 마주쳐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순수 자아와 체험은 상이하다.] [순수]자아는 항상적이고 필연적으로 존재하지만, 고정되고 지속된 경험으로서 그러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아는 모든 경험 속에 내재"되어있으며, "그것의 "시선"은 각 현행적 코기토로부터 대상적인 무언가로 지나가며 "통과"한다["넘어"간다](pass through)(105)."
그러므로 순수 자아는 스쳐지나가는 코기타치오들과 달리 본성적으로 필연적으로 존재하고 변화무쌍한 경험 가운데서 절대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험의 일부이거나 경험에 내재하는 면모로서 이해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그러면서 후설은 칸트의 초월적 통각의 통일성을 상기시킨다(순수이성비판 §16 참고). 나아가 후설은 순수 자아와 함께 구성의 결과가 아닌 초월성, 즉 "내재성 속의 초월성"이 스스로를 드러낸다고 말한다. "이 초월성이 각 코기타치오에서 수행하는 직접적으로 본질적인 역할이 주어져있으므로, 우리는 이것을 [환원을 통해]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105).*
Q. 여기서 후설의 순수 자아는 그 자체의 내용은 가지지 않는 형식에 불과한가? 후설 역시 모든 '내용'은 경험으로부터만 온다는 칸트적 전제를 가지는가, 아니면 그에겐 비경험적 내용이 가능한가?
Q. 만일 후설의 순수 자아가 후설 자신이 암시한 대로 칸트의 초월적 통각과 같은 것이라면, 칸트의 초월적 통각은 직관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가능조건으로서 선험적으로 요구되는 것에 불과한바, 모든 것은 직관을 통해 비로소 탐구돼야 한다는 현상학의 이념이 위배되지 않는가? 순수 자아가 "경험의 일부이거나 경험에 내재하는 면모로서 이해될 수도 없"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순수자아를 직관할 수 있단 말인가? 나로서는 오히려 <제 5논리연구>에서의 자아관이 훨씬 '현상학다운' 자아관으로 생각된다.
A. 확실히 자아가 어떻게 인식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요구되는 것 같다. Ichpol만 언급하는 1권과 달리 습성, 성향을 취급하는 2권 역시 탐구해야 한다.
cf. 사르트르의 비판: 사르트르는 자아 또는 인격이 질료적으로도(예컨대 성격들의 집합), 형식적으로도(<이념들>이나 칸트가 말하는 초월[론]적 구조 또는 절대의식 같은 것) 체험들 또는 의식들에 선행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자아 또는 인격은 체험들에 몰입해있을 경우/체험들 속에 살고 있을 경우 결코 발견될 수 없고, 반성을 통해서만 발견된다. 그러나 반성은 반성되어 발견되는 것의 본질적 기술적 성격을 바꾼다. [따라서 반성되어 발견된 것이 반성 없는 상태에서도 발견되리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대안적으로 사르트르는 자아 또는 인격을 모든 체험 또는 의식의 조건으로서 상정하지 않고도 체험 또는 의식의 통일성과 고유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바로 지향성과 시간성을 통해서이다(이 둘은 모두 대상들의 자기동일성identity of objects과 관련돼있다). 이로써 초월론적이고 질료적인 모든 자아성selfhood이 제거되면 의식이 세계와 직접적으로 접촉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직접성은 자기부정으로서의, 즉 무로서의 의식 개념과 연결된다. 요컨대 사르트르는 <이념들>에서의 견해--체험 속에 자아극이 필연적으로 포함되어있다--에 반대하고 <논리연구>에서 나타난 초기 자아관을 옹호한다. 그래야만 후썰이 희망했던, [형이상학적, 심리학적 가정 등으로부터의] 의식 영역의 '정화'를 진정으로 이룰 수 있다고 본다(Lior Levy(2016), Intentionality, Consciousnes, and the Ego: The Influence of Husserl's Logical Investigations on Sartre's Early Work 요약).
Q. "그러나 우리는 순수자아를, 그것의 직접적, 명백하게 확인 가능하며, 본질적인 고유성과 순수의식과의 함께 주어짐이 이루어지는 데까지만 현상학적 자료로서 인정하기를 의도한다."(106) --> 이건 또 무슨 뜻일까? 후설은 순수자아와 순수의식을 개념적으로 어떻게 달리 정의하는가?
A. 순수자아=자아극, 순수의식=흐름 총체. --> 주어진다는 거야 안 주어진다는 거야!!!
A2. 순수의식이 주어지면, 의식의 흐름 가운데서도 불변하는 극으로서의 순수자아도 주어진다. 순수자아는 순수의식의 부분이 아니라, 순수의식을 가지는 주체다.
*Q. 순수 자아의 초월성은 어떤 의미에서 초월적인 것인가?
A. 순수 의식 안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예컨대 산수할 수 있는 능력과 같은 것은 의식적 대상이 아니지. 본능도 마찬가지로. 본능이 대상인 것은 아니다. 이후에 습성의 기체로서 자아를 후설이 더 중요하게 보기 시작한다. 본능에 대한 논의가 그 종결점 비슷한 것.
§58 배제되는 신의 초월성 환원 이후, 순수자아의 초월성과 같이 환원된 의식과 함께 단번에 주어지진 않지만 세계의 초월성의 대척점으로서 간접적으로 알려지는 초월성으로 신의 초월성이 있다. ①자연법칙 하에서 작동하는 물리적 자연현상의 기저에는 "놀라운 목적론"이 자리함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자연적 사실들의 본질 자체에 합리성이 실현될 것이 포함되어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목적론은 자연세계에 대한 경험적 탐구를 통해 완전하게 해명되지 않는다. ②개별적인 구성하는 의식의 사실성은 어떤 토대 위에 있느냐는 물음 역시 피할 수 없다. 사실(factum)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것의 토대에 대한 물음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리고 이러한 물음들은 세계 밖의 신적인 존재의 현존을 암시한다(hint). 이 신은 의식이 절대적인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절대적이며, 세계가 초월적인 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초월적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초월론적 환원은 이 절대성과 초월성에도 가해진다. 왜냐하면 환원의 시선은 오직 순수의식 자체의 연구영역[장]에만 겨눠져야 하기 때문이다.
*<사물과 공간>의 결론 참고. "한마디로 말해서, 세계는 그 있음(Dasein)과 어떠함(Sosein)에 있어서 비합리적 사실(Faktum)이고, 이것의 사실성(Faktizität)은 오로지 동기 연관들의 견실함에 기인한다.(에드문트 후설, 김태희 옮김, <사물과 공간>, 아카넷, 2018, p.500, 강조는 필자)"
Q. 여기서 후설은 ①, ②를 통해 (현상학의 연구영역[장]에서 배제할 뿐) 일종의 신 존재 증명을 간접적으로 시도하는 것인가?
cf. 신 역시 환원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 후설이 데카르트보다도 급진적인 회의를 수행했다는 근거가 되곤 하는데, 이상의 논의를 통해 데카르트의 아이디어 자체--인간이 가지는 무한성의 관념은 유한성의 관념을 더하여 생성시킬 수 없으므로 인간보다 형상적 실체성이 큰 신이 무한성이란 관념의 원인으로서 현존해야만 한다--가 직접적으로 논박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신에 대한 데카르트의 관점과 후설의 관점은 전적으로 이종적인 것이기 때문에, 신에 대한 취급이 어떠했는지를 기준으로 후설의 우위를 역설하는 것은 피상적이라고 생각한다.
§59 형상적인 것의 초월성과 보편수학(mathesis universalis)으로서의 순수 논리학의 배제 환원이 배제하는 초월적인 것에는 본질들 역시 포함된다. 본질 또한 순수 의식에 내실적인 것이 아니며 그것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월성의 배제에는 한계가 있어야 한다. 이 한계가 있어야만 순수의식을 넘어 순수의식에 대한 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후설은 모든 형상들과 형상에 대한 학을 배제하는 데로 나아간다. 그는 우선 모든 영역적 존재론을 배제한 뒤, 사유의 의미에 대한 형식논리학 및 사물 일반의 형상을 취급하는 형식적 존재론까지 배제되어야 하는지 자문한다.
*Q. 현상학 자체의 존재는 초월적이라는 뜻인가?
A. 본질들은 배제하는데, 의식의 본질은 배제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의식의 본질이 탐구의 영역이니까(J씨).
이에 후설의 대답은, "만일, 순수 의식에 대한 현상학의 탐구가 순수 직관에서 해답을 찾아야 하는 상술한 기술적 분석을 스스로의 과제로 부과하고(그리고 그것은 그렇게 부과해야만 할 터인데) 그렇게 [부과]하는 데 그친다면, 수학적 분과들의 이론들의 형식들도, 그것들의 중개적인 정리들theorems도 현상학에 아무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상학은 [...] 순수하게 기술적인 분과이며, 초월론적인 순수 의식이란 연구영역[장]을 순수 직관에서 철저하게 탐구한다. 때때로 현상학이 그에 호소해야 할 계기을 찾을 [순간이 있을] 수도 있는 논리적 명제들은 그러므로 사실 엄격하게 논리적인 공리들axioms(예컨대 무모순율)일 것이며, 그것의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타당성은 그러나 현상학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여들 속 예시들을 통해 분별[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108-109, 강조는 원저자)*
*'무한퇴행은 피해져야 한다'는 명제도 후설은 이런 공리들 중 하나로 본 것 같다(그러니 그렇게 자주 활용했을 것이다!!!). 이 명제를 현상학으로써 어떻게 정초시킬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이에 따라 후설은 형식 논리학 역시 에포케의 대상으로 삼기에 이른다. "우리가 의식 자체 속에서, 순수한 내재성 속에서 우리들 자신에게 본질적으로 투명하게 명백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 외에는 주장하지 않는 것"이 곧 현상학자가 반드시 따라야 하는 규범이다. 기술적 현상학은 경험과학뿐만 아니라 영역적 존재론, 형식적 존재론 등 다른 모든 분과들로부터 "본성적으로 독립적"임이 이제 확실하다(109, 강조는 원저자).
§60 질료적-형상적 분과들의 배제 현상학 역시 본질학이지만, 모든 본질이 현상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개별적인 대상들의 종류에 내재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사이의 구분이 성립하는 것처럼" 그에 상응하는 본질의 영역에서도 같은 구분이 발견된다. 예컨대 "사물", "운동", "색깔", "인간(human being)", "영혼", "영혼의 경험", "인격" 등은 초월적 본질들이다(109). 현상학이 "의식의 내재적 형성물[immanenten BewußtseinsgestaItungen]의 본질에 대한 순수하게 기술적인 교설"이기 위해서는 초월적 본질들 또한 정립돼서도, 타당하게 생각돼서도, 법칙화돼서도 안 되며 환원돼야 한다. 그것들은 그에 상응하는 초월적 대상들의 본질학에서 자신의 마땅한 자리를 찾을 것이다. 그리하여 후설은 자신의 "원초적인(primitive) 환원을 모든 초월적-형상적 영역들과 그에 관련된 존재론들을 명시적으로(explicitly) 확장"하면서 현상학을 순전히 순수하게 토대 짓는 데 성공한다고 생각한다(110, 강조는 원저자). 경험과학뿐 아니라 형상학까지 환원의 대상이 되면서, "현상학의 절대적인 독립성이 확립"된다(§59와 같은 결론).
★데카르트적 환원의 두 단계 ①자연적 세계 및 자연적 세계에 대한 경험과학의 배제 --> 확장 --> ②형상과 형상학=존재론의 배제 |
§61 현상학적 환원들의 체계적 범위의 방법론적 중요성 따라서, 만일 배제된 영역들에 속하는 전제들이--"명제", "추론", "수", "순서", "다양체" 같은 개념들의 정의마저--현상학에 이용된다면 부조리한 메타바시스(범주오류)가 될 것이다. [이 개념들을 사용하려면 현상학 자신이 저 개념들을 정초해야 할 것이다.] 이에 덧붙여 형상을 심리적인 것으로 잘못 환원하는 경향성을 극복하고, 초월적 본질과 내재적 본질 사이의 구분을 유지한다면 "[구성의 결과가 아닌] 의식 자체가 형성한 본질들"*은 배제돼선 안 될 것이다(112).
*Q. 후설이 말하는 '내재적 본질'이 뭔지 전혀 모르겠다. 예시가 있을까...
A. 의식의 본질!
§62 인식론적 예상[예취, Antizipation]들: "독단적" 태도와 현상학적 태도 여태까지의 논의를 종합하면, 모든 독단적 학문은 자신 스스로는 수행할 수 없는, 오직 현상학만이 수행할 수 있는 비판(critique)을 필요로 하며 환원의 대상이 된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현상학의 독특성(peculiarity)은 "자신의 형상적 보편성의 범위 속에 모든 종류의 지식과 모든 과학을 포함"시킨다는 것이다(113). 이처럼 환원의 대상이 되는 독단적 태도에서의 독단적 학문과, 환원을 수행하는 현상학적 태도에서의 현상학이 나뉠 수 있을 것이다.
cf. "[...]현상학은 [...] 모든 근대 철학의 비밀스러운 열망이다."(114) 근대철학에 대한 후설의 코멘트들 참고.
Q. §62에 딸린 추록의 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A. 초월론적 '사실학'의 가능성을 묻고 있다. 본질학부터 해야 결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철학 > 현상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칼 심스, <해석의 영혼 폴 리쾨르> (0) | 2021.07.26 |
---|---|
에드문트 후설, <순수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 1권 (Hua III/1)> 3, 4부 요약[개선 요] (0) | 2021.07.18 |
티머시 클라크, <마르틴 하이데거 너무나 근본적인> (0) | 2021.07.18 |
에드문트 후설, <논리연구 2> 제6논리연구 요약 (0) | 2020.10.27 |
에드문트 후설, <논리연구 2> 제5논리연구 요약 [개선 요] (0) | 2020.1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