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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김홍중, <은둔기계>

김홍중, ⟪은둔기계⟫, 문학동네, 2020

 <팡세> 이후로 오랜만에 정말 좋은 단상집을 읽었다. 언젠가 다시 한 번, 가방 깊은 곳에 두었다가 은둔지에서 꺼내 읽고 싶은 책이고, 또 다른 은둔-기계인 친구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이다. 남들의 우상에 현혹돼 은둔을 생명력의 부재로 의심하게 되는 날, 스스로를 꾸짖기 위해 재차 펼쳐봐야 할 책이기도 하다. 야구와 축구, 여행, (나에게 사실 굉장히 소중한) 영화 <버닝> 그리고 인류세 등 특정한 주제에 대한 단상들도 무척 좋았지만 이 책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이 담겨있다고 생각한 '은둔', '파상력', '자기-비움', '페이션시', '헐벗음' 장을 중심으로 독후감을 남기고자 한다.

 김홍중(2020)이 개념화하는 '은둔'은 사실 완전한 고립상태를 가리키지 않는다. '은둔'은 또 다른 은둔의 주체들--그들은 '은둔기계'라는, 노골적으로 휴머니즘을 피해간 이름을 획득하는데--과의 연합을 허락하며 심지어는 고무하는 상태다. "은둔기계가 은둔기계를 알아본다. [...] 별로 친하지도 애틋하지도 않지만, 함께 헐벗음을 살아내는 것이다.(281)" 이처럼 은둔이 단순히 문자 그대로의 혼자됨 이상의 것이라면, 그것은 (i)무엇으로부터의 은둔이며, (ii)무엇을 위한 은둔인지, 나아가 (iii)어떻게 이루어지는 은둔인지 독자로서 묻지 않을 수 없다.

 (i)무엇으로부터의 은둔인가? 사실 이 질문에 대해 한 마디로 대답할 수는 없다. 은둔-기계마다 은둔하는 계기도, 이유도 저마다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동체의 우상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55)"나 "사회적인 것, 지배적인 것, 패권적인 것으로부터의 필사적 탈주(57)", "지금 승리를 구가하는 세력의 한시적 진리 주장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다(59)"와 같은 문장들을 통해 자신이 속한 (그러나 소속감은 딱히 느끼지 못하는) 사회에 당장 만연해있는 소위 주류적 세계관, 가치관, 생활방식, 소통방식 등에 등을 돌리는 몸짓 또는 심적 태도로서 은둔을 이해해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은둔기계는 자신이 특히 그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영역으로부터 보호된 안전한 은둔지를 구축해야 한다. 그 안에 웅크림으로써 현대적 양생술을 행하고, 생명력을 비축해야 한다. (내가 외부 유입이 적은 티스토리 블로깅에 정열적으로 몰두하는 모습이 문득, 생판 남을 관찰하듯 머릿속에 그려졌다.)

 (ii)무엇을 위한 은둔인가? 앞서 '양생술', '생명력'이라는 표현에서 암시했듯, 은둔의 목표는 생존 곧 서바이벌이다. 김홍중(2020)은 실존이 본질보다, 그리고 생존이 실존보다 앞선다고 위트 있게 확언한다(26, 무척 재미있으면서도 처절한 구절이었다!). "지금의 기준(59)"은 자신을 짓누르다시피 하기 때문에, 그것이 막강한 사회적 권력을 발휘하는 영역으로부터 반은 자발적으로 반은 타율적으로 물러나면서--헐벗으면서--생존을 도모하는 것이다. 은둔의 또 다른 목표는 창조다. "[...]헐벗은 사람들, 헐벗음과 싸우면서 은둔하는 사람들만이 귀한 시간을 축적한다. 이 시간을 통해서만 오직 시간의 작용을 이기는 무언가를 탄생시킬 수 있다(69)." 은둔기계들은 지배세력권의 바깥에 놓여있기 때문에 사회를 좋게 말하면 날카롭게, 나쁘게 말하면 삐딱하게 관조할 줄 안다. 그 결과 당대의 유행이나 주류적 가치관에 휩쓸리지 않는 무언가를 생산해낼 수 있다*. 한편, 은둔이 진정한 생산과 창조를 가능케 한다고 해서 은둔이 오직 그것들을 위한 도구적인 가치만 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강박적인 사고 또는 말하자면 기만적인 낭만주의는 결코 엿보이지 않는다.

*김홍중(2020)이 '주류적 가치관'으로 지목하는 것은 자유주의, 휴머니즘 그리고 특수하게 철학적으로는 실체론적 사고인 것처럼 보인다(77). 이에 따라 그는 <버닝>에 대한 분석에서 자본주의의 강박성 그리고 폭력성을--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직결시키는 일이 내게 허용된다면--비판하고, 비인간의 아우라 및 생명력을 역설하는 동시에 인류세 담론을 통해 인간됨에 대한 경멸을 감추지 않는다. 나아가 관점을 달리할 경우 존재는 생성의 과정으로 재현상한다고 주장한다. 독서 당시 니체나 베르그송이 연상되었던 것 같다.

 (iii)은둔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김홍중(2020)이 말하는 '은둔'은 다양한 방식으로 수행된다. (에이전시(행위자성)과 대비되는 '페이션시' 개념을 접하고 나서도 내가 '수행'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면 말이다.) 첫째, 은둔은 파상의 산물이다. 파상이란 "현존하는 것의 공성[텅 빈 성격]을 직관하거나 체험하는 것(72)"으로 정의된다. 사회의 주류적 세계관이 모두를 위한 궁전을 짓는 척, 사실상 곳곳에서 베일에 싸인 폐허를 양산할 때 행위자는 은둔-기계가 되려는, 되고 싶은, 돼야 하는 계기를 얻을 것이다. 둘째, 은둔은 자기-제한 또는 자기삭감의 양상으로 발생한다. '자기-제한'의 개념을 가장 잘 정의해주는 문구는 "과도한 체험, 과도한 섭취, 과도한 존재로부터의 이탈(61)"이다. (이와 유사한, 케노시스라고도 불리는 자기-비움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한 예수와 아들의 죽음을 내버려둔 그의 전능한 아버지에 의해 가장 대표적으로 실현되었다는 분석(83-84)은 이 책의 정말이지 빛나는 대목들 중 하나다.) 자기-제한을 동기짓는 주된 정동은 "겁(62)", 심지어는 "비겁(258)"이다. 은둔-기계는 파상력을 갖추고 있기에 "세계의 무서운 힘을 잘 알고 있다. [...] 그는 생존주의자다.(65)" 그러나 그들의 파상이 순전히 겁에 질린 물러남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파상 이후 "각성의 순간 우리는 과거의 꿈-세계의 파산을 아프게 겪는 동시에 현실을 다르게 지각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73)" 이에 따라 나는 파상력을 어떤 것의 파괴, 파괴된 것들이 흩어져있는 폐허를 자기기만 없이 있는 그대로 응시할 수 있는 능력, 나아가 그 응시로부터 생겨난 상처를 자폭을 충동질하는 절망이 아닌 문자 그대로 '버티는 힘'의 원천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셋째, 은둔은 "인(69)" 곧 참아냄이며, 넷째, "감수(77)"이자 감당해냄이다. 참아냄, 감수함, 감당함과 같은 극단적으로 수동적인 상태 가운데서 우리는 오히려 자기 자신과 대면할 수 있다(273). 하이데거 식으로 표현하면 기존의 세계가 무너져내린 근본적 불안상태에서 비로소 본래적인 자기 자신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발생한 파상을 겪어낼 수 있는 힘, 외면하지 않고, 부인하지 않고, 다른 허구를 지어내어 리얼리티를 은폐하지 않고 그것을 겪어낼 수 있는 힘, 그리고 이를 통해 자아를 제한하고, 삭감하고, 변형시킬 수 있는 힘. 페이션시patiency. [...] 파상 이후, 우리는 은둔-기계가 된다.(78)"

 김홍중 선생님의 수업을 들어본 적이 있다. 대학원에 들어오기 직전이었으니 아마 2019년이었을 것이다. 사회학자이자 문학평론가로서 선생님의 명성은 익히 듣고 알고 있었지만, 당시의 난 철학에 정신이 팔려있었기 때문에 거의 마지막 학기가 되어서야 수강신청을 했다. '문학사회학'이란 수업명에 기대감으로 부푼 가슴을 안고, 창밖으로 사회과학대학의 허름하면서도 운치 있는 봄 풍경을 멀찍이 내다보며 강의실 적당한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선생님께서는 이번 학기엔 문학을 가르치지 않겠다고 공표하셨다. 문학이란 독자가 그에 흡수되고, 푹 빠져있을 수 있어야 하는 무언가인데--영어 수업이었던 터라 'immerse'라는 단어를 쓰셨던 것으로 기억한다--우리 세대는 특정한 대상에 오랜 시간 빠지기는커녕 언제든 대상과 긴밀히 접속했다, 연결을 끊었다 할 줄 아는 플러그들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수업은 인류세 담론과 포스트휴머니즘을 주제로 진행되었고, 덕분에 로지 브라이도티라는 철학자를 알게 되어 행복했지만 마지막까지 한국문학이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학기 내내 실망감을 안고 지냈다. 뒤끝 있는 문청으로서, 인간 사회의 미래를 묻는 다소 무지막지한 기말고사 문제--질문은 한 문장뿐이었지만, 배점은 70점이었다--에 고집스럽게도 최인훈과 배수아의 이름이 포함된 내용을 끄적이고 나왔다. 김홍중 선생님께서 직접 내 답안을 읽으셨을지, 아니면 조교님께서 당황하고 피로한 얼굴로 채점하셨을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이 책을 읽으면서, 한때의 내 나른한 금요일 오전들을 채웠던 김홍중 선생님의 독특한 음성이 활자들 사이에서 울리고 있는 것만 같아 신기했다. 문학사회학 수업을 같이 들었던 친구에게 책을 읽었냐고 물었었는데, 그녀 또한 '김홍중 선생님과 대화하는 기분이었다'고 대답해왔다. 앞으로도 ⟪은둔기계⟫처럼 독창적이고, 세련된 한글로 쓰여있으며, 숙성된 사유로부터만 비로소 집필 가능한 철학서를 계속해서 출간해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