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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데이빗 흄, <인간의 이해력에 관한 탐구> 요약

David Hume(Edited with an introduction and Notes by Peter Millican), An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광고(Advertisement) 흄은 자신의 지난 작품(<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A Treatise of Human Nature)>)이 놓친 추론과 표현상의 실수들이 있었다면서, 기존 저작 대신 <인간 이해력에 관한 탐구>(이하 <탐구>)만이 그의 철학을 담고 있는 작품으로 인정받기를 희망한다.

I. 철학의 상이한 종들에 대하여(Of the Different Species of Philosophy)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인간학(Moral Philosophy)은 저마다의 장점을 지니는 두 종류로 나뉜다. 첫 번째 종류인 '쉽고 명백한(easy and obvious) 철학'은 인간을 취향과 감정에 따라 추구 또는 기피의 행위를 선택하는 행위자로 간주하며, 그 행위자가 덕을 추구하고 악덕은 기피할 수 있도록 되도록이면 쉽고 명백하게, 말하자면 교훈적인 방식으로 독자의 상상력과 감정을 고무한다. 두 번째 종류인 '정확하고 난해한(accuate and abstruse) 철학'은 인간을 행위자이기보다 이성적인 존재로 간주하며, 인간의 이해력(오성, Understanding), 감정 그리고 승인 및 비난의 행위를 주재하는 원리들을 발견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이 철학은 도덕, 추론 그리고 [미적] 비평(비판, criticism)의 기초(foundation)를 발견하고자 하며 특수한 사례들로부터 일반적인 원리로 나아가 가장 근원적이고 숨겨진 진리들을 사변적으로 추측(speculate)한다.

 흄은 네 문단에 걸쳐 일시적으로 첫 번째 종류의 철학을 옹호한다. 두 번째 종류의 철학은 철학자를 좋은 인간이 되는 길에서 떨어뜨려놓기 때문이다. 쉬운 철학은 말 그대로 훨씬 동의하기 쉬울 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유용하며, 돌이킬 수 없는 오류에 빠져 망각되지도 않고 유명세를 유지한다. 통념과 거리가 먼 원리들에 집착하며 타인들로부터 격리되어있는 '순전한 철학자(the mere philosophy)'의 인간 유형은 사회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으악 팩폭!!!). 그렇다고 해서 학문 일반이 진보하고 있는 당장 '순전한 바보(the mere ignorant)'로 남는 것은 부자유를 자처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둘 사이의 중용을 지켜 쉬운 철학을 받아들이고, 그 속의 가벼운 지적, 감정적 교훈들을 일상에서 향유하는 것이 최선으로 보인다. 실제로 자연은 혼종의 삶을 인간의 본성에 가장 어울리는 것으로 부여한 듯하다. 예컨대 인간은 학적 이해를 통해 만족을 얻지만 그의 인식의 수확물의 범위와 안정성은 제한된다. 이성적인 만큼이나 사회적인 존재이지만, 언제나 좋은 인간관계를 맺는 것은 아니다. 활동적인 존재로서 일에 몰두하지만, 때때로 휴식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다시금, 어떤 경우에서든 한 쪽 극단으로 치우치면 안 되는데, 따라서 사변에 지나치게 파고드는 난해하고 심오한 탐구들은 "수심 어린 우울(pensive melancholy)"과 "끝없는 불확실성" 그리고 "냉담한 반응"에 맞닥뜨릴 뿐이다. "철학자가 되어라, 그러나 네 모든 철학들 가운데서, 여전히 인간으로 남아라."(6)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형이상학을 향한 몇몇 비난들에는 반론할 여지가 있다. 형이상학에 이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형이상학은 먼저, 마치 해부학이 미술에 도움을 주듯, 쉽고 인간적인(humane) 학문들에 그에 필요한 정밀성(exactness)을 제공해준다. [바람직한] 삶과 행위 방식에 대해 잘 묘사하려면 "이해력의 작동들, 정념의 발동들, 그리고 덕과 악덕을 구분하는 여러 종의 감정에 대한 [...] 정확한 앎"(6)이 필요하다.* [철학이 가능케 하거나 적어도 고무하는] 정확성(accuracy)의 정신은 비단 학문에서뿐 아니라 정치, 법, 전쟁 등 사회의 모든 사업과 이익에도 봉사하는 바가 있다. 나아가 모호한(obscure) 문제들을 해소하는 일은 인간 종에게 허락된 "몇 안 되는 안전하고 무해한 즐거움들" 중 하나다.(7, 강조는 필자)

*Q. 정념(passion)과 감정(sentiment)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도덕적으로 선하고 미적으로 아름다운 것에 대한 승인 및 그 반대에 대한 거부는 후자에 귀속되는가?

 그러나 형이상학이 보여온 저 모호함은 고통과 피로를 가져다주기 이전에 "불확실성과 오류의 불가피한 근원"이라는 이유로 반대되어온 것이다. 형이상학은 정당한 학이 아니라 인간의 허영심의 발로일 뿐인데, "이해력이 전혀 접근할 수 없는 주제들을 파고들거나"(7, 강조는 필자) 널리 퍼진 미신들과 선인견들을 근거 없이, (이따금 종교적인 두려움을 동원해) 그럴듯하게 포장하기만 해왔다. 그러므로 "인간 이성의 정당한 활동영역(proper province)을 발견"하는 일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며, 이제는 배움을 난해한 질문들로부터 해방시키고 "인간의 이해력의 본성을 [정확하고] 진지하게 탐구"해야 한다.(8)*

*흄이 기존의 형이상학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기존의 형이상학은 ①이해력의 월권을 부추기고 ②충분히 정당화되지 않은 미신 또는 선입견에 기댄다. 따라서 조심스러운 회의를 통해 이해력이 접근 가능한 영역만 건드려야 하며, 충분히 정당화되지 않은 의견은 수용하지 않음으로써 독단을 피해야 한다.

 정신의 작동들(operations of the mind)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함에도 불구하고 모호하게만 알려져있다. 흄은 자신이 착수하고자 하는 작업이 "정신의 지리학(mental geography), 또는 정신의 구별되는(distinct) 부분들과 힘들[또는 능력들powers or faculties]의 도해(구별되도록 선 그어주기, delineation)"임을 여기서 확실히 한다.(10, 강조는 필자) 이와 같은 학은 그 자체로 전혀 불확실하거나 공상적이지(chimerical) 않다. 정신이 서로 다른 힘과 능력들을 갖고 있으며 그것들이 반성될 수 있음이, 그와 관련된 명제들의 참됨과 거짓됨이 인간 이해력이 접근 가능하다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천문학 등 다른 분야에서 현상들을 지배하는 법칙과 힘이 발견된 것처럼,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 탐구하기만 하면 "정신의 힘들과 경제학"에서도 인간 정신의 작동을 관장하는 "비밀스러운 원천들과 원리들"--각주에서는 이를 "인간 정신의 행동들(behaviours)의 근원적인 원인들"(187, 강조는 필자)이라 개념화한다--을 발견할 수 있다. 탐구의 과정에서 설령 인간 이해력이 접근 불가능한 영역이 발견된다 할지라도 "조금의 자신감과 안정감을 가지고" 떠날 수 있을 것이다.(11) 따라서 독단적인 형이상학을 내버려야 하는 것이 맞지만, 인간의 정신과 관련한 모든 주장을 아예 철회해서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인간의 본성에 관련된 추론이 어렵다고 해서 무조건 오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어지는 탐구는 인간 정신에 대해 가능한 한 확실한 앎들을 확보하면서도 "미신을 보호하고, 부조리와 오류를 뒤덮어줬던 [...] 난해한 철학의 기초들을 약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12)

II. 관념의 기원에 대하여(Of the Origin of Ideas)

 흄은 로크가 정신의 대상들을 일컫기 위해 '관념(idea)'이라고 세심하지 못하게 합쳤던 것을 '지각(perception)'이란 용어로 바꾼 뒤, 지각을 각각의 강함과 생생함(force and vivacity)에 따라 '생각/관념(thought/idea)' 그리고 '인상(impression)'으로 나눈다. 먼저 인상은 보다 생생한 지각들로서 오감을 활용하거나 아니면 "느끼거나, 사랑하거나, 증오하거나, 욕망하거나, 의지할 때" 발생한다.(13) 다시 말해 인상은 감각적 인식과 정념, 의지 작용의 대상이다. 반면 생각 또는 관념은 훨씬 덜 강하고 덜 생생한 것들로서, 예컨대 기억이나 상상의 대상들처럼 "감각들의 지각들을 따라하거나 모사할 수는 있지만 결코 원래의 감정이 가졌던 강함과 생생함에 전적으로 도달할 수는 없"다. "가장 생생한 생각은 여전히 가장 흐릿한 감각보다 열등하다.* [...] 둘 사이의 구분에 주의하기 위해 대단한 분별력이나 형이상학적 지성이 필요하지는 않다.**"(12) 어떤 감각이나 정신의 움직임이든, 정신이상자가 아닌 이상 반성을 거치기만 하면 구분이 가능할 것이다.

*Millican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과 지루한 장면을 지켜보는 일을 비교하며 이 명제에 반례를 든다.(Intro xxxiii) 그러면서도 정말 흄이 '강함과 생생함'만을 기준으로 인상과 관념을 나누고 있는지는 불확실하다는 각주를 달았다.(188)

**인상과 관념 사이의 구분은 논증되는 것이 아니라 주의력 깊은 반성자에 의해 자명하게 직관되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사람의 생각 또는 관념만큼 자유로워보이는 것이 없다. 한 번도 감각된 적 없는 것이 생각되기도 하고, "절대적인 모순을 함축할 때를 제외하면 그 무엇도 생각의 힘을 넘어서지 않는다." 그러나 흄은 "보다 자세한 검토를 통해서는" 가능한 생각의 범위가 매우 제한되어있음이 밝혀진다고 말한다. 생각의 힘은 "[...] 감각들과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재료들을 합성하고, 뒤바꾸며, 증강시키고, 또는 약화시키는 능력"에 다름아니다. "짧게 말해, 생각의 모든 재료들은 우리의 외적 또는 내적 감정으로부터 파생된다. [...] 우리의 모든 관념들 또는 연약한 지각들은 우리의 인상들 또는 더 생생한 지각들의 모사다.(13, 강조는 필자)*

*Millican은 단순-복합 구분의 도입 없이 모사 원리를 규정하는 데 얽힌 어려움을 토로하며--예컨대 복합관념은 하나의 단순한 인상을 모사하지 않으므로--모사 원리의 핵심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은 "관념의 어떤 부분도 인상에서 파생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점이라고 요약한다.(xxxiv)

 흔히 모사 원리(Copy principle)라 불리는 이 원리를 흄은 두 가지 방식으로 옹호한다. "첫째, 우리가 우리의 생각 또는 관념을 분석하면 [...] 그것들이 언제나 그에 선행하는 느낌 또는 감정으로부터 모사된 단순관념들로 스스로 용해된다는 것을 발견한다."(13, 강조는 필자) 예컨대 전지하고 전선한 신에 대한 관념은 우리 정신이 가진 선함과 현명함의 속성들을 무제한적으로 증강시킨 것에 불과하다.* 둘째, 신체 기관에 문제가 생겨서 특정한 종류의 감각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관념도 가지고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시각장애인은 색깔의 관념을 가지지 못하지만, 시각을 갖추게 되면 어렵지 않게 색깔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신체 기관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단 한 번도 맞닥뜨려본 적 없는 대상에 대해서는 관념을 가질 수 없다. 예를 들어 이기적인 사람은 진정한 우정의 관념을 갖지 못한다.

*Q. 이는 데카르트의 생각에 정면으로 배치됨에도, 아무런 논증 없이 주어진다. 둘 중 누가 더 설득력이 있는가?

A. 무한이 유한의 부정이라면 흄이 맞겠지만, 그보다 말하자면 보다 신비한 무한에 대해서는 데카르트의 직관이 더 설득력이 있다.

Q2. 그런 신비를 인간 지성이 알 수 있나?

Q. 첫 번째 근거와 관련해, 모든 관념에 대해 그에 상응하는 인상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으로부터 그 인상이 관념의 원천임을, 관념은 인상의 파생물/모사물임을 도출할 수 있는가? 두 번째 근거와 관련해서 역시, 인상이 없으면 관념도 없다는 것으로부터 그 인상이 관념의 원천임을, 관념은 인상의 파생물/모사물임을 도출할 수 있는가? 예컨대 제3의 원천이 둘을 동시에 낳는 일이 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은가? 보다 일반적으로, 모사원리는 기본적인 인식론적 테제로서 설득력이 있는가?

A. 흄이 저 근거들로부터 모사원리를 도출한다기보다, 모사원리에 대해 proof를 제공하는 느낌이 강하다. (cf. 흄의 원인 정의)

 흄은 아주 양심적이게도, 상응하는 인상 없이 발생할 수 있는 관념의 예를 스스로 제기한다. '비어있는 파란 색조(missing shade of blue)'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사례 속 상황은 다음과 같다. 시력이 온전해 온갖 색조를 경험했으나, 딱 한 종류의 파란 색조는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이 사람에게 다른 모든 파란 색조들이 연한 색부터 진한 색까지 연속적으로 늘어서있는, 그러나 그가 경험하지 못한 그 색조만 중간에 빠져있는 색띠 같은 것을 제공한다고 가정하자. 그는 그 사라져있는 색조를 (인상 없이도) 상상해낼 수 있을 것인가? 이에 흄은 너무 쉽게 그렇다고 말하면서도, 이 사례는 너무나 독특하기(singluar) 때문에 모사 원리를 전적으로 폐기할 수 있게 하는 반례가 되지는 못한다고 결론 짓는다.

Q. 확신을 가지고 상상하지는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아가 이 색조가 일종의 복합관념(중간값)일 수는 없는가?(흄이 색깔=단순관념이라는 전제를 포기하기만 하면 이 사례가 모사원리의 반례가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cf. '색'만을 상상한다는 사태 자체가 조금 와닿지 않는다.(J씨) / 색을 복합관념으로 이해하면 신 같은 존재도 왜 복합관념일 수 없냐는 식의 반론의 여지를 남긴다. 

Q. 정말 무시해도 좋은 반례인가? 하나라도 반례가 나오면 모사원리를 폐기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cf. 모사원리의 존재론적 함의(관념은 존재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 --> 신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 차단)

 흄은 자신의 인식론의 근본테제로 설정한 모사원리를 기존의 형이상학적 추론들을 특징짓는 모호성을 파괴하기 위한 도구로 쓰겠다는 포부를 드러낸다. [기존의 형이상학적 추론들이 동원해온] 추상적인 관념들은 희미하고(faint) 모호하다. "그것들은 다른 유사한 관념들과 혼동되기(confounded) 쉽"기 때문에, 고유한 의미 없이 어떤 용어를 사용하면서도(employ)* 그것이 규정된 의미를 가지는 관념과 연결돼있다고 상상하기 쉽다. 반면 인상의 경우 한 인상과 다른 인상 사이의 한계는 훨씬 정확하게 규정될 수 있으며, 관련해서 오류를 범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므로 "철학적 용어가 아무런 의미 또는 관념 없이 사용되고 있다는 의혹(suspicion)"이 인다면 "그 소위 관념이라는 것(that supposed idea)이 어느 인상에서 파생되었느냐고" 묻기만 하면 된다.(15) [흄의 이와 같은 모사 원리는 데카르트의 본유관념과 같은 것을 물리치게 해준다.]

*Millican은 흄에게 단어의 의미는 그것이 연관되어있는 관념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해한다.(188)

Q(J씨). 인상들이 정말 그렇게 잘 구분되는가? 인상들의 차이가 선명한 게 정말 인상차인가? 애초에 그 인상을 수용하는 기관이 그 차이를 형성하거나 적어도 강화하는 게 아닌가? 칸트 식의 순수직관이나 범주가 요구되지 않을까?

Q. 인상에서 관념으로 갈 때 새로 생성되는 게 없어야 하는데, 새로 생성되는 게 있다(e.g.일반화를 통한 보편자). 경험주의의 자기반박?

A. 상상력이 제공하는 인상? --> 경험주의는 빈곤하고, 그 빈곤을 물리치기 위해 상상력의 역할이 너무 비대해진다.

III. 관념들의 연합[연상]에 대하여(Of the Association of Ideas)

 서로 다른 생각 또는 관념들이 정신의 무대에[기억 또는 상상의 장에] 오를 때 그것들 가운데에는 "연결의 원리"가 있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특정한 수준의 체계성(method)과 규칙성을 가지고 서로를 도입시킨다." 한 관념과 이어지는 다른 관념 사이에는 특정한 연결의 패턴이 있다는 것이다. 그 어떤 아무 말 대잔치에서도, 아무리 낯선 언어에서도 이와 같은 패턴이 관찰 가능하다. 흄은 유사성(Resemblance), 인접성(Contiguity), 인과(Cause or Effect)를 세 연결 원리로 들며 이 외에 다른 원리들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다만 여러 사례들을 주의 깊게 검토하여 사례마다 그것을 주재하는 가장 일반적인 연결 원리를 찾[은 결과가 이것이고 이 결과가 불만족스럽다면 앞으로도 같은 방식으로 찾]아야 할 뿐이다.*

*Millican은 이 원리들이 <탐구>에서 수행하는 유일한 역할은 "관습의 작동에 대한 유비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흄은 우리의 모든 사실적 추론을 주재하는(underlie) 본능적 메커니즘인 관습은 관념들의 연합과 다소간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제안할 것이다."(xxxv)

IV. 이해력의 작동들에 대한 회의주의적 의심들(Sceptical Doubts concerning the Operations of the Understanding)

PART I 인간 이성이 감행하는 모든 탐구는 두 종류의 대상을 가진다. 첫째는 '관념들의 관계(Relation of Ideas)'이고, 둘째는 '사실의 문제(Matters of fact)'다. 전자에 대한 탐구의 예로는 수학이 있는데, "이 종에 속하는 명제들은 뭔가가 이 세상 어디에든 실존하는지에 의존함 없이 오직 생각의 작동만으로 발견될 수 있다."(18) 이 종에 속하는 모든 명제(e.g. 피타고라스 정리)는 그 참됨 또는 거짓됨이 직관을 통해서나 증명을 통해서 아프리오리하게* 확실시되며, 그렇게 참된 것으로 확실시된 명제에 대해서는 그와 반대되는(contrary) 명제를 모순을 범하지 않고서는 떠올릴(conceive) 수 없다. 다시 말해 그 확실성은 완전하다.(xxxvi)

*그렇다고 해서 관념들의 관계가 본유관념을 통해, 즉 경험에 선행하는 관념을 통해 논해지는 것이 아님을 유의해야 한다. "요점은 만일 그 관념을 획득했을 경우 그 경우에 나는 확실하게, 아무런 경험적 탐구 없이, 모든 총각은 결혼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흄에게 아프리오리함은 경험에 호소하지 않고도 정당화될 수 있음을 가리킨다.(xxxvii)

Q. 데카르트적 본유관념과 그렇게까지 충돌하는가? 데카르트도 '갓난애기조차 신의 관념을 벌써 갖고 있다'는 식의 주장을 펼친 것은 아니지 않은가?

A. 관념의 관계군에서는 둘 사이의 충돌 없음/적음(?)이 별 문제가 애초에 아닌 것 같다.

 다른 한편 후자에 대한 탐구의 예로는 물리학이나 윤리학, 미학 등 사실적 추리(factual reasoning)을 동반하는 학문들이 있을 텐데, 이들은 "[...]우리가 가진 관념들 사이의 내적 관계만을 따지기보다 이 관념들이 실제 세계에서 어떻게 어울리는가(go together)를 따진다."(xxxvi) 다시 말해 무언가가 이 세상에 어떻게 실존하는가를 묻는다. 이 종에 속하는 모든 명제(e.g. 내일은 해가 뜰 것이다 or 내일은 해가 뜨지 않을 것이다)는 그 참됨 또는 거짓됨이 직관을 통해서나 증명을 통해서 아프리오리하게 확실시될 수 없으며 오직 사후적으로(a posteriori)만 확실시된다. 나아가 그렇게 참된 것으로 확실시된 명제에 대해 그와 반대되는 명제를 모순 없이 떠올릴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확실성은 이미 경험된 것에 한정된다는 의미에서 불완전하다. 당장 해가 떠 있음은 확신할 수 있고*, 내일도 2+3=5라고 확신할 수 있지만, 내일도 해가 뜨리라고는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Q. 흄에게 이때의 확실성은 '2+3=5는 참이다'의 확실성과 같은가?

A. 분석적 참 vs 경험적 참

Q2. 다 느낌이라며?

Q3. 해가 뜨는 것을 보고 있는 것과 '해가 떠있다'라는 판단 사이의 구별을 데카르트와 달리 흄이 첨예하게 안 하는 것 같다. 데카르트는 그 둘을 구분하기 때문에 회의로 나아가는 건데... (J씨)

Q4. '2+3=5는 참이다'는 인상인가 관념인가?

Q5. 반성도 인상에 속하게 되면 모든 반성은 그러면 다 인상인가? 돌에 대한 '반추'는 인상이고 '기억'은 관념이 돼버리는...

cf. Morris, William Edward and Charlotte R. Brown, "David Hume",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Summer 2020 Edition), Edward N. Zalta (ed.), URL = <https://plato.stanford.edu/archives/sum2020/entries/hume/>. 참고.

"In the Treatise, Hume qualifies his claim that our ideas are copies of our impressions, making clear that it applies only to the relation between simple ideas and simple impressions. He offers this “general proposition”, usually called the Copy Principle, as his “first principle … in the science of human nature”: "All our simple ideas in their first appearance are deriv’d from simple impressions, which are correspondent to them, and which they exactly represent. (T 1.1.1.7/4)

He presents the principle as something that everyone’s experience confirms, but he also gives an argument to establish it. He argues first that there is a one–to–one correspondence between simple ideas and simple impressions. He can’t prove that this correspondence holds universally, since he can’t examine every individual impression and idea. But he is so confident the correspondence holds that he challenges anyone who doubts it to produce an example of a simple impression without a corresponding simple idea, or a simple idea without a corresponding simple impression. Since he is certain they will fail, he concludes that there is a constant conjunction between simple impressions and simple ideas.ㅍNext, he maintains that this constant conjunction is so universal that the correspondence can’t be a matter of chance. There must be a causal connection between them, but do ideas cause impressions or do impressions cause ideas? Finally, he argues that experience tells us that simple impressions always precede and thus cause their corresponding ideas. To support this claim, he appeals to two sorts of cases. First, if you want to give a child an idea of the taste of pineapple, you give her a piece of pineapple to eat. When you do, you are giving her an impression of the pineapple’s taste. You never go the other way round. His other case involves a person born blind, who won’t have ideas of color because he won’t have impressions of color.

The Copy Principle is an empirical thesis, which he emphasizes by offering “one contradictory phenomenon” as an empirical counterexample to the principle. He imagines someone who has had the same sorts of experiences of colors most of us have had, but has never experienced a certain shade of blue. Hume thinks that if he orders all the shades of blue he has experienced from the darkest to the lightest, he will see immediately that there is a gap where the missing shade should be. Then he asks

"Whether ‘tis possible for him, from his own imagination, to … raise up to himself the idea of that particular shade, tho’ it had never been convey’d to him by his senses? I believe there are few but will be of opinion that he can; and this may serve as a proof, that the simple ideas are not always deriv’d from the correspondent impressions; tho’ the instance is so particular and singular, that ‘tis scarce worth our observing, and does not merit that for it alone we shou’d alter our general maxim. (T 1.1.1.10/6)"

Hume repeats the case of the missing shade almost verbatim in the first Enquiry. While scholars have wondered exactly how the person might supply the missing shade, he seems unconcerned with the details. For Hume, once again the exception proves the—empirical—rule."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실존 및 사실의 문제에 있어, 당장 감각되거나 기억되는 영역을 넘어서도 참된 명제를 확보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와 같이 ①이미 경험된 바를 넘어서는 사실적 추리의 증거(evidence)는 대체 무엇인가? 흄에 따르면 "사실의 관계를 따지는 모든 추리들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정초되는(founded) 것으로 보인다. 이 관계로써만 우리는 우리의 기억과 감각들 너머로 [추리를 이어]갈 수 있다."(19, 강조는 필자) 누구든, 그가 특정한 [경험적] 사실을 믿는 이유는 그 사실의 원인으로 간주된 다른 사실 때문이다. 예컨대 무인도에서 손목시계를 발견한 사람은 그곳에 사람이 다녀갔으리라고 추리한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항상, 당장의 사실과 그로부터 추론된(inferred) 것[사실] 사이에 연결(connexion)이 있다고 가정된다."(19) 저 원인과 결과 사이의 연결관계가 끈끈하든 느슨하든, 직접적이든 부수적이든 말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로 물을 것은, ②"우리가 어떻게 원인과 결과에 대한 지식에 도달하는가"이다. 이에 대한 흄의 즉각적인 대답은 인과에 대한 지식이 특정한 물체/대상들이 "항상적으로(constantly) 서로 결합됨(conjoined)을 발견할 때의 경험"으로부터만 온다는 것이다.(19, 강조는 필자) 바꿔 말하면 인과에 대한 지식은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으며, 아프리오리한 추리를 통해서는 결코 알려질 수 없다. 이 명제(편의상 '인과 인식의 경험성 테제'라 부르자)를 흄은 두 가지 근거를 통해 지지하고자 한다.

 첫째, 제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도 그에게 완전히 새로운 물체/대상 또는 사태에 대해서는--그것의 감각적 성질들을 아무리 정확하게 살펴본다 해도--그것의 그 어떤 원인이나 결과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감각적 성질도, [축적된] 경험의 도움을 받지 못한 이성도 실존과 사실의 문제에서는 그 어떤 인과적 추론도 이끌어내줄 수 없다. 예컨대 불을 처음 본 아담은 설령 완벽한 이성을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을 고통스럽게 집어삼킬 것임을 알지 못한다. 인과 인식의 경험성 테제는 복잡한 작동 메커니즘을 가진 물체/사태뿐 아니라 너무 익숙해서, 그에 대한 몇몇 성질들만 알아차려도 단번에, 아무런 축적된 경험 없이, 오직 이성만으로도 그와 관련된 인과에 대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을 것 같은 물체/사태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된다.

 그렇다면 이처럼 ③단번에, 아무런 축적된 경험 없이, 오직 이성만으로도 특정한 물체/사태에 대해서는 그와 관련된 인과적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고 느끼는 우리의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가? "이는 관습(custom), 그것이 가장 강하[게 작용할] 때에는 우리의 자연적인 무지를 가려줄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숨기는, 그리고 순전히 가장 높은 수준[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와중에] 발견됐다는 이유로 왠지 아무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의 영향이다."(20, 강조는 필자)

 둘째, 어떤 물체/대상/사태에 대해 "과거의 관찰을 참고함 없이(without consulting past observation)"는 그것의 결과를 추론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과거의 관찰을 참고하지 않고서는 순전히 자의적인 방식으로 결과가 될 만한 사건을 고안해내는 수뿐일 것이다. 다시 말해 결과라는 것은 그 어떤 꼼꼼한 검토를 거쳐서도 결코 일단 원인이라고 가정된 것(supposed cause) 자체로부터는 발견될 수 없다. "결과는 원인과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결코 원인 안에 [놓여있는 것으로서] 발견될 수 없다."(21, 강조는 필자) 그러므로** 흄에 따르면 "원인과 결과 사이의 소위 얽힘(tye)과 연결이라는 것, 그 둘을 함께 묶어주고(binds), 해당 원인의 작동으로부터는 그 어떤 다른 결과도 따라나올 수 없게끔 만드는 저것[원인과 결과 사이의 필연적 연결의 관념]"에 대해서도 그것은 자의적인 관념이라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21) 어떤 원인으로부터 하나의 결과만 나오리라고는 확신할 수 없다.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기상천외한 결과가 나오리라는 것이 얼마든지, 그 어떤 비일관성 또는 모순도 개입함 없이 상상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가능한 결과들보다 하나의 결과가 더 나옴직하다고 선호하는 결정을 내릴 때, 이 선호의 기초는 아프리오리하게 알려지는 무언가가 아니라 자연이 부여한 습관과 관습이다. (cf. E 4.11이 이 문단에 대한 좋은 요약문이다.)

*Q. 근거의 구분은 필자에 의한 것인데, 과연 저 둘이 정말로 다른 근거일까 싶기도 하다.

A. 둘째가 첫째를 함축한다.

**Q. E 4.10의 첫 문장인데, 이 논증은 타당한 논증이 아닌 것 같다. 검토가 필요하다.

A. 흄의 생각으로는, 과거의 경험을 참고함 없이 결과를 추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저 필연적 연결의 관념을 원인으로부터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경험을 참고함 없이 결과를 추론할 수 없다. 따라서 저 필연적 연결의 관념도 없다.

 여러 특수한 결과들을 몇 안 되는 일반적인 원인들로 환원시키는 것이 인간 이성의 최선의 작업(utmost effort)이라 알려져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 일반적인 원인들의 원인(cause of general causes)"에 대해서는 결코 알 수 없다.* "이 궁극적인 원천들과 원리들은 인간의 호기심과 탐구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있다. [...] 그러므로 인간의 눈멂과 유약함에 대한 관찰이[야말로] 모든 철학의 결과"다.(22, 강조는 필자) 아프리오리한 수학적 지식 등은 궁극적 [자연]법칙을 발견하고 그에 따르는 예측을 실시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법칙 자체는 근본적으로 경험에서 오는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참이리라 확실시될 수 없다. [여기서 흄은 여러 주장을 한꺼번에 실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첫째, 인간은 사태들의 궁극적인 원천과 원리를 알 수 없다. 예컨대 사과를 나무에서 떨어지게 만드는 '힘' 같은 것은 (그것이 실제로 존재할 수도 있겠지만**)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둘째, 따라서 사태들의 궁극적인 원천과 원리가 무엇이라고 단언한다면 그것은 독단이다. 셋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의 축적과 그것들의 (말하자면 다소 자신감이 덜한) 일반화를 통해 학문을 실천할 수는 있다.]

*유의할 것은 흄이 적어도 일반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비록 아프리오리한 앎만큼의 확실성을 가지지는 않겠지만) 앎이 가능하다고 인정한다는 사실이다. 이를 부정할 경우 사실에 대한 학문 일체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Q. 흄이 어떤 법칙은 거부하고 어떤 법칙은 인정한다면, 그 기준은 무엇인가? 자신의 필연성 없음에 대한 자각?

A. 원인이 결과를 낳아야 한다는 강제력은 없지만 규칙성은 있다. 이 규칙들이 곧 흄에게 인정되는 법칙일 것이다.

**뉴턴 역시 탐구를 위해 중력을 개념적으로 활용하면서도 그것의 원인에 대해서는 헤아릴 수 없다고 함구했다. 그리고 이 헤아릴 수 없음의 성격(unintelligibility)이 신의 존재를 증명해준다고도 덧붙였다. 이와 같은 입장은 어떤 개념 또는 "이론적 존재자들(theoretical entities)"이 실제로 그에 상응하는 실재를 현실에 갖든 갖지 않든 간에 설명력만 가지면 탐구의 도구로서 합당하게 인정해주는 도구주의(instrumentalism)에 해당한다.(xix)

PART II 이제 모든 인과적 지식의 기초가 경험임이 밝혀졌다. 그런데 사정이 이러하다면, ④"경험으로부터 [도출되는] 모든 결론들의 기초는 무엇인가? [...] 우리가 인과의 작동들에 대한 경험을 가진 뒤라고 해도, 그 경험으로부터 도출되는 우리의 결론은 추리 또는 이해력의 그 어떤 발휘과정(process)에 의해서도 정초되지 않는다."(23, 강조는 필자) 어떤 물체 또는 사태에 대해서 감각을 통해 알 수 있는 성질들은 그 물체 또는 사태가 야기하는 비밀스러운 힘과 효과에 대해 결코 알려주지 않는다. 빵을 보고서, 그것이 인간을 위해 영양을 공급한다고 (여러 번 먹어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이처럼 물체 또는 사태의 겉으로 드러나는 감각적[감각 가능한](sensible) 성질과 그것의 결과/효과 사이에는 어떤 필연적 연결도 알려져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유사한 감각적 성질들을 보면 그것이 유사한 비밀스러운 힘들을 가질 것이라고 전제하고, 그리고 우리가 경험한 것과 유사한 결과들이 그 성질들로부터 따라나올 것이라고 기대한다."(24) 다시 말해 명제1로부터 명제2로의 추론이 발생하며, [이 추론이야말로 경험으로부터 도출되는 모든 결론들의 기초]다.

<명제1> 어떤 물체는 항상 어떤 효과를 내왔다/과거의 모든 경우에 어떤 감각적 성질들은 어떤 비밀스러운 힘들과 결합되었다. ➡︎ <명제2> 외양상 그 물체와 유사하게 생긴 다른 물체들도 유사한 효과를 낼 것이다/유사한 감각적 성질들은 항상 유사한 비밀스러운 힘들과 결합될 것이다. (속칭 일형성 테제(Uniformity principle that the future will resemble/resembles the past))

 이 추론은 정당하고/정당할 수 있고, 항상 발생하는 추론이지만, 결코 직관적으로 추리되는 것은 아니다. 명제1로부터 명제2가 그 자체로 귀결되려면 "사실의 문제를 따지는 우리의 모든 결론들의 기원"이 되어줄 중간자(medium), 즉 별도의 명제가 필요한데 그런 것은 없어보이기 때문이다.(25)*

*Q. '외양이 유사한 물체들은 [유사한 맥락에서] 그 효과도 유사하다'가 그 명제가 아닌가? 참되지 않아서 탈락인 건가?

A. 이 명제도 UP에 의존한다.

 흄은 이상의 결론을 확실시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추리의 방식들을 열거하고, 그것들 중 어떤 것도 저 인과적 추론을 정당화해줄 수 없음을 보이고자 한다. 모든 추리는 (i)증명을 통한(demonstrative), 또는 관념의 관계를 따지는 추리이거나 (ii)인간학적인[확률적인, 귀납적인](moral/probable), 또는 실존과 사실의 문제를 따지는 추리이다. 저 인과적 추론이 증명을 통한 추상적 추리로 정당화되지 않음은, 즉 아프리오리하게 참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같은 원인으로부터 (추론한 바와)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이 충분히 상상 가능하기 때문이다.(따라서 (i)은 폐기!) 그렇다면 저 추론은 인간학적인[확률적인, 귀납적인] 논증(argument)을 통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하지만 저 추론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인간학적인[확률적인, 귀납적인] 논증은 없다. "우리는 말했다. 실존을 따지는 모든 논증들은 인과관계에 의해 정초된다고. 인과관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전적으로 경험에서 파생된다고. 그리고 경험에 관련된(experimental) 우리의 모든 결론들은 미래가 과거와 일치할 것(conformable)이라는 [저] 가정으로부터 개진된다고."(26) 그런데 결국 이 가정이 증명하고자 목표하는 바와 동일하기 때문에, 악순환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일형성 테제가 참임을 증명하려면 일형성 테제를 미리 가정해야만 하는 것이다(선결 문제의 오류, 따라서 (ii)도 폐기!). 그러므로 일형성 테제는 어떤 방식으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

cf. Henderson, Leah, "The Problem of Induction",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Spring 2020 Edition), Edward N. Zalta (ed.), URL = <https://plato.stanford.edu/archives/spr2020/entries/induction-problem/>에 따른 이 논증의 요약본은 다음과 같다. 강조는 필자에 의한 것이다.

Hume’s argument concerns specific inductive inferences such as: All observed instances of A have been B. The next instance of A will be B. Let us call this “inference I”. [...] Hume’s argument then proceeds as follows (premises are labeled as P, and subconclusions and conclusions as C):

P1. There are only two kinds of arguments: demonstrative and probable (Hume’s fork).
P2. Inference I presupposes the Uniformity Principle (UP).

1st horn:
P3. A demonstrative argument establishes a conclusion whose negation is a contradiction.
P4. The negation of the UP is not a contradiction.
C1. There is no demonstrative argument for the UP (by P3 and P4).

2nd horn:
P5. Any probable argument for UP presupposes UP.
P6. An argument for a principle may not presuppose the same principle (Non-circularity).
C2. There is no probable argument for the UP (by P5 and P6).
C3. There is no argument for the UP (by P1, C1 and C2).

Consequences:
P7. If there is no argument for the UP, there is no chain of reasoning from the premises to the conclusion of any inference that presupposes the UP.
C4. There is no chain of reasoning from the premises to the conclusion of inference I (by P2, C3 and P7).
P8. If there is no chain of reasoning from the premises to the conclusion of inference I, the inference is not justified.
C5. Inference I is not justified (by C4 and P8).

 그러나 현실에서 저 추론 없이, 일형성 테제를 버리고 사는 사람은 없다. 우리 모두는 유사한 원인들로부터 유사한 결과들이 나오기를, 유사한 힘이 발휘되기를--그 힘 자체에 대한 인상도 관념도, 지식도 없으면서--기대하며 산다. 이 기대가 이성에 기반한 것이 아님은, 저 기대가 충분히 신뢰할 만한 것으로 성립하기 위해 (한 번의 사례만으로는 부족하고) "오랫동안의(a long course of) 일형적인 경험들"이 필요하다는 사실로부터 다시금 입증된다.(26)* 이제 마지막 질문은 ⑤증명을 통해서도, 귀납추리를 통해서도 아니라면 무엇이 저 추론을 정초해주느냐는 것이다.

*비슷한 논증이 E 5.6에서 반복된다. 이성적 추론은 경험의 축적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여태까지의 논의를 재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자연상태에서 우리는 모든 물체의 힘, 효과, 그것이 야기할 모든 결과에 대해 무지하다. "이 무지는 경험에 의해 어떻게 치유되는가?"(27) 경험은 당장 경험된 바로 그것에 대해서만 알려줄 뿐이다. 당장 경험된 바를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는 오직 기대하고 추론할 수만 있다. 그런데 그 어떤 논증도 이 추론을 정당화해줄 수 없음을 앞서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뭔가를 배운다는 것은 소용없는 일처럼 보인다. 유사한 외양이 유지되었는데도 전혀 다른 효과가 야기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항상, 보편적으로 잔존하기 때문이다. 물론 행위자로서의 '나'는 계속해서 저 추론을 이어갈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로서의 '나'는 "이 추론의 기초를 알고 싶"어한다.(28) ['이 추론의 기초' 그리고 ⑤에 대한 대답은 자연에 의해 부여된 관습이다. "경험으로부터의 모든 추론은 그러므로 관습의 결과들이지, 추리의 결과들이 아니다."(32)]

V. 이 의심들에 대한 회의주의적 해결책(Sceptical Solution of these Doubts)

PART I 종종 철학은 기존의 자연적인 경향성과 정념들을 강화하기만 한다. "우리는 [...] 추리를 통해 모든 덕들, 그리고 사회적인 [상호작용에서 오는] 기쁨 바깥으로 스스로[를 내몰 수] 있다."(30) 아니면 단지 나태에 탐닉하기 위해 이성적 탐구라는 핑계를 내세우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으악 팩폭!!!) 그러나 이와 같은 위험에 맞닥뜨리지 않는 한 종의 철학이 있는데, 바로 아카데미아적 또는 회의주의적(Academic or Sceptical) 철학이다. 이와 같은 철학에 종사하는 철학자들은 늘 의심과 판단의 보류를 입에 달고 살며 성급한 주장을 내리는 일이 위험하다고 역설한다. 나아가 우리의 이해력 또는 사변의 능력이 힘을 행사하는 범위를 평범한 일상적 실천의 영역 안으로 한정하려 한다. 흄은 흥미롭게도 회의주의만큼이나 나태, 오만 그리고 미신에 빠지기 쉬운 경향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사조는 없다고 극찬한다. 이 순진무구하고 무해한 철학은 [무언가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자(partizan)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비정상적인(irregular) 정념을 부추기지 않는다고, [이미 관련된 악덕과 어리석음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악덕과 어리석음에 반대한다고 부당한 비난을 당해왔다. 이 철학을 구성하는 의심이 일상적인 추론과 행위 그리고 사유(speculation)를 파괴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차피 자연은 언제나 그 어떤 추상적 추리에 대해서도 승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경험으로부터의 모든 추론은 그 어떤 논증을 통해서도 정당화되지 않으며, 이해력을 개입시키지 않는 어떤 단계를 거친다고 결론지었다. 이 단계, 말하자면 이성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 비약은 어떤 원리에 기초해있는가?* "이 원리는 바로 관습 또는 습관이다. 어느 특정한 행위 또는 작동이 반복[됨으로써], 그 어떤 추리 또는 이해력의 활동과정에 의해 압박당함(impelled) 없이 동일한 행위 또는 작동을 새로이 반복할(renew) 경향(propensity)이 생산되는 모든 곳에서, 우리는 항상 이 경향이 관습의 결과라고 말한다." 관습은 이 경향의 "궁극적 이유(ultimate reason)" 같은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 본성의 원리"(32, 강조는 필자)일 뿐이다.** 관습 자체에 대해서는 그 근원이나 존재 이유를 따질 수 없으며, 그와 같은 것을 따지는 일은 인간의 능력의 범위를 벗어난다. 인간은 단지, 두 대상들의 항상적인 결합을 오랜 시간 관찰한 후에는 하나가 나타났을 때 다른 하나를 기대하도록 관습에 의해 결정되어있을 뿐이다.

*이 원리가 자연이 부여한 관습임을 예화하기 위해 흄은 "갑자기 이 세계에 데려와진" 이성적 인간의 예를 드는데, 그에게는 인과의 관념조차 없으리라고, 즉 그 어떤 추리도 그에게 인과의 관념을 줄 수 없으리라고 주장하는 부분이 칸트의 입장과 선명히 대조돼 흥미롭다.(31)

**Q. 차이가 명확치 않은 것 같다. 흄이 말하는 '자연' 또는 '관습'마저 예컨대 그가 비판했을 법한 중력처럼 경험 불가능한, 현상들 배후의 형이상학적 힘 같은 것일 가능성은 어떻게 배제되는가? (cf. '믿음'에 대한 흄의 정의 시도 참고)

A. 관찰한 결과에 대해 이름을 붙인 데 불과하다는 의미에서 다르지 않을까? / 적어도 어떤 형이상학을 펼치고 있지는 않다.(J씨)

Q. 흄의 본능은 이해력과 무관하기엔 너무 이성적인 것 같다. 본유적 능력과 이 본능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가?(J씨)

A. 이성의 정의를 뭐라 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흄은 논증/주장의 능력으로 한정한 것이고, 잡다를 종합하는 능력 등도 이성에 포함된다고 전제해버리고 저렇게 얘기하면 별로 좋은 비판이 아닐 수도. 사실 별로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 '선험성'이 개입하냐 여부가 다르지 않은가? 흄이 관습을 '경험의 가능근거'라고 말하지는 않으니까.

Q. 흄에게 이해력(understanding)은 아프리오리하게 참인 것만 따질 수 있는 건가? 아니면 관습적 추론을 관장하는 상상력 역시 이해력의 하위범주인 건가? 전자인 줄만 알았는데 갑자기 헷갈린다.

A. 이해력과 상상력은 서로를 배제한다.

Q. Understanding = reason? 귀납추리는 reasoning인데, 이해력의 소관인가, 상상력의 소관인가? 이성의 소관인가, 관습의 소관인가?

A. 넓은 의미의 상상력은 다시 좁은 의미의 상상력과 이성으로 구분된다. 좁은 의미의 상상력은 무작위로 [예컨대 허구의] 관념들을 뒤섞어내는 반면, 이성(=the general and more establish’d properties of the imagination)은 신뢰할만한 방식으로 [예컨대 관습에 따라] 관념들을 재조합한다.(Y씨)

cf. 상대성이론이나 양자물리학 등의 현대 과학 일부: 선관측 후이론이 아니라 선이론(수학, 형이상학적 가설) 후관측. 이론에 따르면 x라는 존재자가 반드시 있어야 하고, 그걸 관측할 수 있느냐 아니냐를 궁금해함.(S씨) --> 그럼 흄에게 너무 큰 위험 아닌가? 정말 '선험적 종합명제'화가 되어버린 게 아닌가 과학이? --> 아니다. 그래도 이론은 결국 도움의 역할에 불과하다. 결국 이론적 존재자의 존재 확증은 관측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적 입장도 관측에서 반례가 나오자 뒤집혔다.(J씨)

 "그렇다면, 관습은 인간 삶의 위대한 안내자이다. [...] 관습의 영향이 없다면, 우리는 즉각 기억과 감각들에 현전해있는 바를 넘어서는 모든 사실의 문제에 대해 전적으로 무지할 것이다."(32-33) 그렇다고 해서 기억 또는 감각에 아무것도 현전하지 않아도 사실의 문제에 대한 앎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장 기억 또는 감각에 현전하는 무언가가 있어야만 저 추론이 의미를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특정한 사실을 믿는 이유를 계속해서 캐묻다 보면, 당장 기억 또는 감각에 현전하는 무언가에 호소함으로써 심문을 종결시키거나 무한소급에 빠질 수밖에 없다. "요컨대 사실의 문제나 실제적 존재에 대한 모든 믿음(belief)은 순전히 기억 또는 감각에 현전된 어느 대상과, 그것과 다른 어느 대상 사이의 관습적 결합에서 파생된다." 계속해서 두 대상들이 결합하는 것을 관찰하다 보면 "정신은 관습에 의해 [후행하는 것으로 오래 관찰한 대상을] 기대하도록 그리고 그와 같은 [대상이] 정말 존재한다고 믿도록 몰린다(carried)."(33, 강조는 필자)*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믿음이 불가피하고, 비자발적이며 "그 어떤 추리나 생각의 과정 그리고 이해력이 생산할 수도, 방지할 수도 없는 자연적 본능들"에 속한다는 사실이다.(34, 강조는 필자)** 이제 이 본능적 믿음과 관습적 결합의 본성, 근원을 탐구하는 과제가 남아있다.

*Q. 흄은 이와 같은 대상들의 예로 "불과 열, 눈과 차가움"을 드는데 이는 실체-속성 관계를 원인-결과 관계로 대체하는 함의를 가지는가?(33)

A. 인과관계=병렬. 실체속성=의존관계. 흄의 입장에서 기존의 실체속성론은 병렬적 잇따름에 불과한 것을 의존관계로 과도하게 해석해버렸고(사실 의존성 같은 것은 상응하는 인상도 관념도 없는데) 형이상학자들은 그 의존성에 기대 형이상학적 증명을 해버렸다(신존재증명).

**관습이 본능에 포섭된다는 흄의 결론은 인간과 동물 사이의 관계에 대한 기존의 견해들을 완전히 뒤바꾼다. 인간은 이성을 가진다는 이유로 동물보다 질적으로 우월한 존재로 여겨졌으나, 그 이성이 적어도 경험의 영역에 대해 판단할 때는 동물성을 함유한다는 것, 동물성 없이는 경험 바깥의 세계가 아니면 힘도 거의 못 쓴다는 통찰이 철학사에 등장한 것이다. 이 견해는 관점에 따라 창피로도, 겸손으로도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cf. 휴머니즘과 예컨대 동물해방운동은 비일관적인 것이 아니다. '일관성'의 맥락의존성(S씨)

PART II 흄은 믿음의 본성을 탐구하기 위해 가장 먼저 허구(fiction)와 믿음 사이의 차이를 확정하고자 한다. 먼저 유의할 점은, ①동일한 내용이 믿음의 대상이 될 수도, 허구적 상상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흄은 이로부터 "허구와 [참된] 믿음 사이의 차이는 허구가 아닌 믿음에[만] 결부되는 어떤 감정 또는 느낌에 놓여있다"고 결론짓는다.* 이 감정은 의지에 의존하지 않고, 마음대로 불러일으켜지는 것도 아니므로 "자연에 의해서 자극된 것임에 틀림없다". 이 감정의 작동양상은 다음과 같다. 관습은 [광의의] 상상력을 움직여 현전한 것으로부터 그것과 보통 결합되어온 대상으로 정신을 몰아가고, 이 두 번째 대상[결과]에 대한 "[...] 사고(conception)는 공상의 견고하지 못한 몽상들과는 다른 느낌 또는 감정을 동반한다."(35) ②그 어떤 사실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 반대가 상상불가능한, 아프리오리하게 참인 사실은 어차피 없으므로 우리가 믿기로 동의하는 사고와 거부하는 사고 사이의 차이로 가능한 것은 어떤 감정밖에 남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Q. ①과 ②는 충분히 설득력 있는 근거들인가? 반박할 여지는 없을까? --> 다시 읽을 것.

A. 아예 ①과 ②를 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다. ①의 핵심은 비자발성이다. 만일 내용이 문제라면 어떤 내용이든 허구의 맥락에 위치시킬 수 있는데, 그러면 믿음 여부가 자발적인 것이 돼버리고, 이는 부조리. 감정처럼 비자발적인 것이어야 함. ②의 핵심은 비합리성이다. 이성으로는 동의와 거부를 근거 지을 수 없기 때문에 감정만 남는다는 것.(J씨) --> 그러면 흄의 이성은 필연적으로 참인 사태만 다룰 수 있나?(cf. conceivability principle) 경험의 영역에서는 아예 힘을 못 쓰는 게 된다. 너무 이성에 대해 협소한 정의를 갖고 있다. 심지어 남는 이성의 영역도 경험이 선행돼야 발휘 가능하다(아프리오리의 정의, J씨) --> 흄의 이성관을 잘 이해한 게 맞는지도 다시 검토하고.

 이 감정은 정의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다. 믿음 자체가 이 감정의 진정하고 정당한 명칭이다. 흄에 따르면 모두가 매 순간 믿음이 가리키는 저 감정을 의식하고 있으므로, 그것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풀어 말하면 우리는 믿음을 정의하지 못하지만 너무나 쉽고 일상적으로 그것을 몸소 체험하고 직관한다. 그럼에도, 정의가 아닌 어떤 성격 기술을 시도하자면 "믿음은 대상에 대해서 [협의의] 상상력이 언제가 됐건(ever) 혼자의 힘으로 획득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선명하고, 생생하며, 강력하고, 견고하며, 꾸준한 사고에 다름아니다."* 믿음은 현실[적 존재들](realities)을 허구보다 첫째, '더 현전하는(more present)' 것으로 만들어주고, 둘째, 생각 및 행위에서 더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도록 하며 셋째, 정념과 상상력에 훨씬 큰 영향을 미치도록 해준다.

*Q. 인상과 관념의 구분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생생함을 기준으로 정신의 작용 또는 대상을 분간하는 것은 철학적으로 너무나 엄밀치 못하다. 일단 반례가 너무 많다. 우울한 미래에 대한 관념에 사로잡혀있는 사람에게 눈앞의 풍경이 주는 인상들은 심리에 깊이 각인되기는커녕, 해당 관념의 한낱 시각적 배경으로 전락한다. 소설을 읽을 때만큼은 활자들이 아니라 공상된 서사의 세계가 '더 현전'하며, 현실의 타인들보다 허구의 인물에 보다 쉽게 정을 붙이는 사람들도 많다. <자명하게 직관되는 사태들인 만큼 정의하기 어렵고, 그러므로 생생함의 정도와 관련된 성격 기술에 만족하자>는 흄의 전반적으로 안일한 기조는 과연 자비롭게 해석될 수 있는가?

A. 일단 저 우울한 사람은 관념이 아닌 반성으로서의 인상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고. 데이드리밍은 행위 자체는 믿음의 대상이 될 것이고. 아무리 데이드리밍에 빠져들어도 감각만큼 선명하지는 못할 것. 그리고 데이드리밍을 하는 일 자체가 허구와 믿음을 잘 구분할 줄 안다는 것.

 마지막으로 흄은 믿음이란 관습적 결합이 야기하는 사고의 특수한 방식(manner)이라는 가정으로부터 출발해, 그것과 유사한 작동양상을 가지는 정신의 다른 현상들이 있는지 찾고자 한다. 여기서 그는 3절에서 제시했던 유사성, 인접성, 인과성의 원리들을 다시 끌어온다. 이어지는 서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하에서 관습에 의해 떠올려진 두 번째 관념에 대해서는 [그것이 존재하리라는] 믿음이 미리 가정된다. 

① 당장 기억이나 감각에 현전하는 x의 인상 또는 관념(e.g. 친구의 사진, 아카데미아의 폐허, 내 턱 밑의 칼날)  ➡︎ (관습이 다음을 생생하게 함(enliven)) ➡︎  ② x와 유사한 y(e.g. 친구의 사진을 보고 실물을 떠올림), x와 시공간적으로 인접한 y(e.g. 아카데미아의 폐허에 서서 플라톤을 떠올림), x를 야기한 원인 y 또는 x가 야기할 결과 y(e.g. 칼이 턱 밑에 있을 때 고통과 죽음을 떠올림)의 관념

Q. E 5.18의 예시는 인과와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가? (E 5.15-19는 다시 읽어야 할 것 같다. 잘 이해하지 못했다.)

A. 성인들의 손때를 탄(imperfect) 성물을 보고, 그것의 원인으로서의 성인의 존재를 생생하게 떠올리게 된다.

 흄은 이로써 자신이 사실의 문제와 관련된 정신의 모든 작동들을 포괄적으로 설명해냈다고 생각한다. 그는 귀납추리에 대한 자신의 회의주의적 반론 및 그에 대한 자연주의적 대안을 관습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비로소 마무리짓는다. 자연은 현실에서 대상들이 잇따를 때 그 잇따름의 추동력에 대한 지식이 전무해도 그 잇따름에 상응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본능을 우리에게 부여했다. 관습이라는 이 본능은 "[인간] 종의 보존과 행동의 규제에 너무나 필수불가결"하다. 특정한 수단을 동원하는 목적의 실현, 세계에 대한 지속되는 지식, 윤리적 선택 일반의 가능성 역시 관습 덕분이다. 이러한 중대사들이 오류와 실수에 쉽게 빠져드는 "우리 이성의 연역들"에 맡겨져서는 안 될 것이다.(40)

VI. 확률에 대하여(Of Probability)

 흄은 로크가 모든 주장(argument)을 증명을 통한 것과 귀납추리로 구분한 것을 보다 세분화하여 증명(demonstration), 증거(proof) 그리고 확률(probability)[을 통한 주장으]로 나눈다. 이 중에서 증거와 확률은 실존 및 사실의 문제에 관한 주장[에서 활용되는 것]으로서, 증거는 "의심 또는 이의의 가능성을 전혀 남기지 않는 경험으로부터의 주장"을 의미한다.(41, e.g. '모든 사람은 죽는다')

 한편 확률은 6절의 주제가 되는 것으로, "가능성(chances)의 우월함[큼]으로부터 야기"되는 것이다. 흄은 결정론자인만큼 "이 세상에 가능성 같은 것은 없다"고 단언하지만, "진정한 원인에 대한 우리의 무지"가 우리의 이해력으로 하여금 가능성에 대한 믿음 또는 의견을 형성하도록 영향을 준다. 이때 가능성의 우월함이 증가할수록 그에 비례해 확률 역시 증가하며, 믿음/동의/기대의 정도 및 지속성(steadiness)/안정성(security) 역시 올라간다. 요컨대 확률에 기반한 주장(e.g. 사건 A가 일어날 확률은 사건 B가 일어날 확률보다 높다는 판단, 주사위를 굴려 6이 나올 확률은 1/6이라는 판단 등)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사유 또는 추리하는 과정"에 불과하다.(41, 강조는 필자)

 여기서 흄은 확률에 기반한 주장을 두 종류로 나누는 듯하다. 첫 번째 종은 ①가능성들의 확률(probability of chances)이고, 두 번째 종은 ②원인들의 확률(probability of causes)이다.* Millican은 ①의 예로 주사위의 어느 면이 떨어질지 예측하는 상황을 들고, ②의 예로 "다음 A는 B가 될 것이라 예측하는데, 왜냐하면 모든 경우에서는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근원적인 원인이 알려져있지는 않지만, 과거의 A는 B가 되어왔기 때문"인 상황을 든다.(xli)*

*Q. 둘의 구분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뭐가 다른가? 그리고 왜 도입되었는가?

A. 확률 개념 도입의 맥락 자체가 다름. ①은 독립시행(주사위 던지는 행위가 주사위 눈 결과와 관계가 없음)st; '무슨 일이 일어날까?', ②는 인과관계(원인이 결과를 유발하는 확률); '이 원인이 어느 결과를 야기할까?'.(J씨) --> 따로 더 알아보기. 둘 사이에 환원/포함관계가 있지는 않은가?

 먼저 ①에서 사유 또는 추리의 과정이 이루어지는 양상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는 모든 특수한 가능성들이 동일한 확률을 가진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경험적 관찰을 거치고 나면 정신은 빈도수가 높은 사건에 대한 믿음을 보다 강화하게 된다. 믿음이라는 감정에 대한 5절의 정의를 유지한다면, "[...] 여러 견해들 또는 일별들(glimpses) 사이의 일치는 [그 빈도수가 높은 사건에 대한] 관념을 상상력에 더 강하게 각인시키며, 그 관념에 더 우월한 힘(force)과 생기를 주고, 정념 및 감정들에 대한 [그 관념의] 영향을 보다 [잘] 의식되도록(sensible) 만들며, 한 마디로 믿음과 의견의 본성을 구성하는 그 신뢰 또는 안정성을 낳는다."(42, 강조는 필자)* 비슷한 논리가 ②에도 적용된다. 대부분의 경우 B를 야기했던 A가 B를 야기하지 않[고 대신에 예컨대 C나 D를 야기하]는 사태가 발생할 때, 사람들은 자연이 무법칙적이라고 실망하는 대신 "웬 비밀스러운 원인들"이 관여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이제 A와 외양상 유사한 사건을 보고 그 확률적인 결과를 논할 때, 정신은 "과거를 미래로 옮겨 적용시키는(transfer) 도중 [경험한 바 있는] 모든 다양한 결과들[B, C, D 등]"을 떠올리고 고려한다.(42) 물론 가장 빈도수가 높았던, 그래서 가장 '가능한' 결과가 선호되겠지만 다른 '가능한' 결과들도 그 발생의 빈도수에 비례해 중요도를 배분받아야 하며 결코 간과되어선 안 된다.

*Q. 이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흄은 '여러 견해들이 일치(concur)함'이란 표현을 쓰는데,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A. 여러 관찰들이 하나의 결과로 수렴한다.(J씨)

cf. Millican에 따르면 6절에서의 논의는 10절에서 확률적 추리를 기반으로 기적을 논하며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 이제 관습은 단순히 우리가 추리하는 방식을 기술할 뿐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추리해야 하는지를 처방해주는 기준으로 자리매김한다. 6절 이후의 논의들은 관습을 "우리의 경험적 합리성의 시금석[기준](touchstone)"으로 삼는 일의 함축들을 열거하는 식으로 진행된다.(xli)

VII. 필연적 연결의 관념에 대하여(Of the Idea of Necessary Connexion)

PART I 자연과학에 비해 인간의 본성에 대한 추리는 그 길이가 훨씬 짧지만, 한 관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가 애매하거나 모호한 경우가 많다. 종래의 형이상학에서 특히 모호하고 불확실한 관념은 바로 "힘, 강함, 에너지 또는 필연적 연결"에 대한 관념이었다. 흄은 7절에서 이 관념을 [그것이 존재한다면] 정의하고 그로부터 모호성을 제거하고자 한다.(45) 이 작업을 위해 그는 앞서 제시한 모사원리를 활용한다. 즉 필연적 연결의 힘을 야기하는 "인상 또는 원초적(original) 감정들"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이것들은 단순하고 직관적이어서 그 안에 아무런 애매성도 없으니 말이다.(46)

 이제 흄은 필연적 연결이라는 관념의 가능한 원천(source)인 외적인 감각(outward senses)과 내적 반성(inward reflection)을 검토한다.  먼저 외부 물체에 대한 인간의 감각은 한 물체/사태가 다른 물체/사태를 뒤따른다는 것만 발견할 줄 알 뿐, 필연적 연결에 대한 그 어떤 인상도 제공하지 않는다. 경험이 축적되지 않는 이상, 오직 정신의 능력만을 발휘해서는 관찰된 원인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물체들(bodies)에 대한 논구(contemplation)로부터 힘의 관념이 파생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어떤 물체 자체도 이 힘을 가진 것으로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외적인 감각이 힘의 관념의 원천이 아니라면, 그것은 혹시 "우리 자신의 정신들의 작동들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파생"되어 "어느 내적 인상으로부터 모사"되는가?(47) 인간은 매 순간 자신의 의지가 자신의 몸과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경험하므로, 여기에 힘의 관념의 원천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꽤 자연스럽]다. 그러나 흄은 인간의 의지가 인간의 ①몸에 대해서도, ②정신에 대해서도 어떤 '힘'을 행사하는 사태가 인식되지 않는다고 논증한다. 각각의 논증들을 살펴보자.

cf. Millican은 이하의 논증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우리가 A와 B 사이의 필연적 연결의 인상을 지각했으면 [...] 우리는 A가 B를 야기한다는 것을 아프리오리하게[경험에 선행해]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A가 B를 야기한다는 것을 아프리오리하게 알 수 없다. 따라서 이로부터 우리가 그것들의 필연적 연결에 대한 그와 같은 인상을 지각하지 않는다는 점이 따라나온다."(xliii, 강조는 필자)

 ①의지(volition/will)는 몸의 기관들에 영향을 미치는 [힘을 가진] 것으로 알려지지만, 이는 오직 몸의 움직임이 의지의 명령을 뒤따르는 [축적된] 경험을 통해 추론된 결론일 뿐이다. 의지와 그로부터 영향 받는 기관을 연결해주는 에너지를 경험에 선행해 앎으로써 그 영향관계를 미리 예측하거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①-1. 만일 의지 내에 몸을 움직이는 힘이 존재함을 정신이 인식할 수 있다면, 그는 영혼과 신체 각각의 본성과 그 합일관계에 대해서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가정된 영적(spiritual) 실체가 물질적 실체에 대해 [...] 영향력을 획득하게 해주는" 이 합일관계는 아직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①-2. 의지는 모든 종류의 기관들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의지 내에 몸을 움직이는 힘이 존재함을 정신이 인식할 수 있다면, 그는 어째서 그 힘의 적용 범위가 특정한 방식으로 제한되는지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의지의 능력과 사정이 어째서 이러한지는 경험을 통해서가 아니면--'나는 손가락은 움직일 줄 알지만, 간은 움직일 줄 모른다'는 축적된 자각--결코 알려지지 않는다. 예컨대 다리가 마비된 환자와 건강한 사람은 모두 자신에게 다리를 움직일 힘이 있다고 의식한다. 그리고 "의식은 결코 속이지 않는다".(48) [그러나 실제로 다리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건강한 사람뿐이다.] 그러므로 둘 중 누구도 실제로는 어떤 힘을 경험에 선행해 참되게 의식한 것이 아니다.(사실은 아무 힘도 의식 못했다. 의식한 것은 관습적 이행인데 힘으로 착각했을 뿐) ①-3. 해부학에 따르면 의지는 즉각적으로 자신이 영향을 미치고자 한 몸의 부위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근육들, 신경들 그리고 신경계의 체액(animal spirits) 그리고 아마도 더더욱 미세하고 덜 알려진" 부위들을 거쳐서 원하는 바를 쟁취한다. 만일 의지 내에 몸을 움직이는 힘이 존재함을 정신이 인식할 수 있다면, 그는 그 힘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로에 대해서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자신이 어느 부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자신의 힘이 야기하는 결과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 경로들은 "우리의 이해를 완전히 벗어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상 1, 2, 3에 따르면 정신은 의지 내에 몸을 움직이는 힘이 존재함을 인식할 수 없다. "힘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우리들 내부의 힘에 대한 그 어떤 감정 또는 의식으로부터 모사되는 것이 아니다".(49) 의지의 발동과 그에 뒤따르는 몸의 움직임이라는 개별적인 경험들이 있을 뿐, 그 둘을 연결하는 힘은 다른 자연의 사건들에서처럼 알려지지 않는다.

 ②의지는 관념을 일으키는 [힘을 가진] 것으로 알려지지만, 위에서와 동일한 논리로 의지의 발동과 관념의 일어남이라는 개별적인 경험들이 있을 뿐, 그 둘을 연결하는 힘은 역시나 알려지지 않는다. ②-1. 만일 의지 내에 관념을 일으키는 힘이 존재함을 정신이 인식할 수 있다면, 그는 해당 인과에 얽혀있는 "인간 영혼의 본성과 관념의 본성, 또는 하나가 다른 하나를 생산하는 데 능하다는 것(aptitude)"에 대해서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49)* 그러나 의지의 명령이 관념의 실존을 낳는--거의 무로부터 유를 창조하다시피 하는--방식, 그 힘은 우리의 이해의 범위를 넘어선다. ②-2. 의지가 정신에 대해 명령할 수 있는 바는 제한되어있다. 특히 감정과 정념에 대해서는 관념에 대해서보다도 의지의 통제력(authority)이 훨씬 떨어진다. 만일 의지 내에 관념을 일으키는 힘이 존재함을 정신이 인식할 수 있다면, 그는 어째서 이 힘의 적용 범위가 특정한 방식으로 제한되는지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저 한계들은 오직 경험과 관찰을 통해서만 알려진다. 아무도 [경험 외에 이성이나 인과의 본성에 대한 통찰을 통해서는] "이 경계의 궁극적인 이유를 주장하거나, 또는 왜 한 경우에서는 힘이 부족하고 다른 경우에서는 그렇지 않은지 보여"줄 수 없는 것이다.(50) ②-3. 관념에 대한 의지의 자기명령은 상황에 구애받는다. 예컨대 저녁에보다는 아침에, 배가 살짝 고플 때가 포만감을 느낄 때보다 생각이 더 맑다. 만일 의지 내에 관념을 일으키는 힘이 존재함을 정신이 인식할 수 있다면, 그는 이와 같은 상황적 변주들에 대해 이유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저 변주들은 경험되[고 경험이 축적됨에 따라 일반화되]기만 할 뿐, 그에 이유를 댈 수 없다. 이상 1, 2, 3에 따르면 정신은 의지 내에 관념을 일으키는 힘이 존재함을 인식할 수 없다. 

*Q. 꼭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다. E 7.17의 논증은 정확히 무엇인가?

A. 저걸 다 알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저것들 중 어디서 힘이 인식된다는 거냐를 반문하는 맥락. 원인이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 알아야 그런 원인으로서의 힘이 뭔지 알아야 한다.(J씨)

Q. A를 안다는 것은 B를 안다는 것을 함축하는데 B를 모르므로 A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식의 이상의 논증은 만족스러운가? 힘의 존재를 알기 위해 힘의 세부적인 요소들에 대해서까지 알아야 하는가?

A. 너 수영할 줄 안다면서, 팔 흔들 줄 몰라?/숨 참을 줄 몰라? 이런 분위기인 것 같기는 한데...

 흄은 이상의 논증을 말브랑슈 등이 제기한 기회원인론(occasionalism)을 논박하는 데 활용한다. 기회원인론 역시 흄의 회의주의적 입장에서처럼 대상들 사이에는 결합이 경험될 뿐, 그 연결이 이해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자연의 대상들은 그 어떤 인과력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회원인론자들은 이로부터 신의 의지가 모든 인과력의 원천이고, 대상들은 단지 신의 인과력이 발휘되기 위한 기회/계기(occasion)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한 당구공이 다른 당구공에 부딪혀 그것을 움직이게 만드는 사례를 보자. 이때 첫 번째 당구공은 자신에 내재된 힘으로 두 번째 당구공을 움직인 것이 아니라, 신이 스스로 세운 일반적인 법칙들에 따라 특수한 의지를 발동시켜 두 번째 당구공을 움직인 것이다. 물질적인 대상뿐 아니라 인간 정신의 움직임도 마찬가지로 신의 능력[만]이 작용한 결과다. "신이 영혼과 신체 사이 합일의 직접적인 원인"이며, "우리의 정신적인 비전이나 관념들의 떠올림(conception)은 우리의 창조주가 우리에게 계시한 바에 다름아니다."(52) 그러나 흄에 따르면 이 이론은 신이 가지는 능력을 오히려 축소시킨다.* 이에 더해 흄은 기회원인론에 대한 두 가지 철학적 반론을 제시한다. 첫째, 기회원인론은 인간의 능력으로 알 수 없고, 일상적 경험의 영역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있는 기이하고(extraordinary) 무모한(bold) 결론들을 주장한다. 둘째, 인간의 정신이 가진다고 여겨져온 힘을 인식할 수 없는 만큼, 신의 정신이 가지는 힘 역시 인식할 수 없다. 신의 인과력에 대한 관념 역시 그 관념, 그에 상응하는 인상을 찾을 수 없는 미지의 이론적 존재자일 뿐이다.

*Q. E 7.22의 수사적인 물음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A. 매 순간 신이 세계를 관장하고 조정해야 되면 더 약한 신 아니냐, 이런 느낌.(J씨)

cf. 흄을 '신 없는 기회원인론자'로 설명하는 관점도 있다고 한다.

PART II(--> Millican 서론 읽기) 이상의 논의의 결론을 받아들이면, "모든 사건들은 전적으로 [서로에 대해] 헐겁고 분리되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결합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연결되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 우리는 [필연적] 연결이나 힘의 관념 일체를 전혀 갖고 있지 않다".(54, 강조는 필자) [이러한 결론은 인간 이해력의 작동 가능 범위에 무시할 수 없는 한계를 지운다.] 그러나 흄은 자신이 아직 검토하지 않은 가능한 원천이 하나 더 있다고 말한다. 그 원천은 바로 축적되는 경험들에 대한 인간의 습관적 사고이다. 서로 다른 두 사건들이 항상적으로 결합되는 것을 반복해서 관찰하면, "정신은 한 사건이 등장했을 때 그것이 일반적으로 동반하는 것(usual attendant)을 기대하도록 그리고 그 [결과가] 존재하리라고 믿도록 습관에 의해 몰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신 속에서(마음 속에서, in the mind) 느끼는 이 연결, 한 대상으로부터 그것의 일반적인 동반자로 넘어가는 상상력의 관습적 이행이 [곧] 우리가 그로부터 힘 또는 필연적 연결의 관념을 형성하는 감정 또는 인상이다."(55, 강조는 필자)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흄은 이렇게 묻는다. 경험이 부족할 때는 두 사건들이 단지 결합되어있다고만 간주하다가, 경험이 축적되면 두 사건 사이에 연결이 있다고 믿게 될 때 대체 무엇이 변한 것인가? "[...] 상상 속에서 이 사건들이 [서로] 연결되어있다고 이제 느끼게 된 것, 그리고 다른 하나의 등장으로부터 하나의 실존을 곧장 예지할 수 있게 됐다는 것"뿐이다.(55) 그러므로 사건들이 서로 필연적으로 연결되어있다는 관념은 [객관적이고 경험적인 근거를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서 자연에 따라 발생한 것이다.

 흄은 이상의 논의에 따라 원인과 결과를 정의하고자 한다. 원인이란 (i)"다른 대상에 의해 뒤따라지는 대상으로, 그것과 유사한 모든 대상들이 전자의 대상과 유사한 대상들에 의해 뒤따라지는 그런 대상" 또는 "첫 번째 대상이 있지 않은 곳에는 두 번째 대상이 결코 존재한 적 없는" 그런 대상이다. 그러나 이는 오직 사태의 측면에서만 원인을 정의한 것이다. 결과가 되는 대상의 관념으로의 관습적 이행 경험을 수용하면 원인은 또한 (ii)"다른 대상에 의해 뒤따라지는 대상으로, 그것의 등장이 언제나 저 다른 것의 등장에 대한 생각을 전달하는 그런 대상"이다.(56, 강조는 필자) 어느 경우에서든 원인의 정의가 그 어떤 필연적 연결이나 힘에 대한 기존의 형이상학의 관점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데 유의해야 한다.

cf. 필연적 연결, 힘의 관념이 없다(x) --> 있는데, 형이상학에서처럼 실질적이고 필연적인 힘에서 오는 게 아니라 규칙성에 대한 관습적 추론에서 온 힘이다. 두 힘의 force 자체는 같은 것 같다. (해체한 뒤 귀환한 지점이 해체 이전의 지점과 같냐는 의문과 관련하여)

cf. E 7.30에서 흄은 자신의 논의를 스스로 깔끔하고 친절하게 요약해준다.

VIII. 자유와 필연성에 대하여(Of Liberty and Necessity)

PART I 흄은 7절에서 수학적 학문이 인간의 본성에 대한 학에 비해 가지는 이점으로 학적 관념들의 명료함과 규정성(determinacy)을 든 바 있다. 반면 인간의 본성에 대한 학에서는 인상의 상태로는 판명했던 것들이 관념으로서 반성되자마자 애매성과 정의의 어려움에 빠지고 만다. 8절 역시 비슷한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시작된다. 만일 용어들의 의미와 정의 자체가 애매하지 않았더라면 적어도--우리 이해력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일상적 삶과 경험에 대한 주제"에 대해서만큼은 이미 논쟁이 불식되고도 남았을 것이다.(58) 이와 같은 애매성의 피해를 가장 크게 본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자유와 필연성의 문제다. 놀랍게도 흄은 "모든 인류는, 배운 자와 무지한 자 모두, 이 주제에 대해서는 항상 같은 의견을 가져왔으며 몇 개의 이해 가능한(intelligible) 정의들[만으로도] 즉시 논쟁 일체[가] 종결[될] 것"이라는 무지막지하게 강한 주장을 펼친다.(59)*

*Q. 나는 이렇게까지 강한 주장이 흄에게 필요한 건지 잘 공감이 안 된다. 어째서 자신의 주장이 참되고 [기존엔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까지 포함해] 모두가 동의할 만하다는 데서 그치지 않는가? 해당 주장은 진심으로 제기되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과 같은 정의를 사용한다면--즉 애매성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면--자신에게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보다 약한 주장의 강조에 불과한가? 아니면 이 둘 사이의 차이 자체가 모호한가?

 먼저 검토되는 것은 필연성의 원칙(doctrine)이다. 모든 물질은 "필연적 힘에 의해 활성화"되며, "모든 운동의 정도와 방향은 자연의 법칙에 의해" 정밀하게 결정된다.(59) 이와 같은 필연성의 관념은 사건들 사이의 유사성에 대한 관찰이 없으면 발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필연성과 인과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전적으로 자연의 작동들에서 관찰 가능한 일형성에서 야기된다. 유사한 대상들항상적으로 함께 결합되는 곳에서 정신은 관습에 의해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의 등장을 추론하도록 결정되어있다."(59-60)

cf. 정리하자면 흄의 필연성 정의에는 다음의 두 가지 측면이 공존한다. (i)철학적 정의(형이상학적 측면): 어떤 대상이 다른 대상에 시간적으로 선행하고 시공간적으로 근접되어있으며, 전자의 대상과 유사한 모든 대상들이 후자의 대상과 유사한 모든 대상들과 시공간적 근접관계에 놓이는 항상적 연결constant conjunction, 즉 원인과 결과가 항상적으로 결부된다는 규칙성이 곧 필연성이다. (ii)자연적 정의(인식론적 측면): 한 대상에 대한 관념이 생기면 자연적으로 다른 대상에 대한 관념도 생기며, 한 대상에 대한 인상이 생길 경우 자동적으로 다른 대상에 대한 더 생생한 관념도 생기게 되는 식으로 마음속에서 둘을 결합하면서 생기는 믿음, 즉 원인으로부터 결과를 추론하고자 하는, 둘이 연결되었다고 보고자 하는 '투사(projection)'--Blackburn(2008)의 어휘를 따르자면--의 욕망과 습관의 산물이 곧 필연성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①항상적 결합과 ②관습적 추론은 철저하게 자연적인 사건들에 대해서뿐 아니라 "인간의 자발적 행위들[에 대해서] 그리고 정신의 작동들 속에서"도 이루어진다. 흄은 ①을 보이기 위해 "사람들의 행위들 가운데는 굉장한 일형성"이 있으며 "인간의 본성은 그 원리들과 작동들에 있어 [시공을 초월해, 항상적이고 보편적으로] 동일하게 남는다"는 것을 든다. 그 일형성의 구체적 내용은 바로 "같은 동기들은 항상 같은 행위들을 생산한다. 같은 사건들은 같은 원인들로부터 따라나온다"는 것이다.(60, 강조는 필자) 심지어 특정한 행위에 대한 역사적 기술이 틀렸음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그런 행위를 낳을 만한 동기가 [인간의 본성상] 없다는 주장을 들면 된다. 그러므로 경험은 인간의 경향성과 동기들, 그리고 그에 따르는 행위들의 영역에서도 탐구를 가능하게 해준다.

 그렇다고 해서 흄이 "모든 인간이, 동일한 상황에서는, 항상 정확히 동일한 방식으로 행위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상식적으로 "성격들(characters), 선입견들 그리고 의견들의 다양성"을 고려하고 있다. 서로 다른 시대와 국가에서는 상이한 관습과 교육이 통용되고 있으며, 자연이 성별에 따라 부여한 성격의 차이 또한 항상적이고 규칙적이다. 한 사람 내에서도 주된 감정과 경향성이 시간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 그러나 저 다양성은 여전히 "어느 정도의 일형성과 규칙성"을 품고 있다. 같은 성격은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라도] 일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사람들과의 만남과 그들의 행동에 대한 관찰이 결코 그들의 성향에 대해서 가르쳐주지 못했을 것이고, 그들에 대한 우리의 행동을 지도(direct)하는 데 기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62)* 아무리 기존에 알려진 동기들과 동떨어져있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일지라도 "모든 원인들이 그것들의 일반적인 결과들과 동일한 일형성[의 정도로] 결합되는 것이 아니"(62-3)므로 그런 실망은 이미 익숙한 것이다.**

*논증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i)사람들의 동기와 행동의 연관에 일형성과 규칙성이 없다면, 그들과의 만남 및 그들의 행위에 대한 관찰을 통해 그들의 성향에 대해서 배우고, 그들에 대한 우리의 행위를 잘 지도할 수 없. (if -P then -Q) (ii)우리는 사람들과의 만남 및 그들의 행동에 대한 관찰을 통해 그들의 성향에 대해서 배우고, 그들에 대한 우리의 행위를 잘 지도할 수 있다.(Q) (iii)따라서 사람들의 동기와 행동의 연관에는 일형성과 규칙성이 있다.(P) [나아가, (iv)모든 사람은 (ii)를 알고 그에 따라 실천하는데, 그렇다면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iii)도 이미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Q. 그럼에도 이 주장을 피력하는 내내 흄은 제대로된 논증 대신 수사와 예시로 일관한다는 인상이 강하다. 너무 자명한 주장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여태까지의 치밀함에 비해 갑자기 너무 허술하다. 아니면 내가 놓친 논증이 또 있나?

**Q. 내가 E 8.12를 잘 이해한 게 맞을까? --> 나중에 혼자 확인해볼 것.

 배우지 못한 이(the vulgar)는 사건의 [결과가 무엇일지에 대한] 불확실성을 원인들 자체의 불확실성으로 돌린다. 원인들이 때때로, 보통의 경우엔 행사할 줄 아는 영향을 행사하는 데 실패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원인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결과에 불과하다. 후술하겠지만 흄에게 원인은 그 개념상 반드시 '필연적' 원인이다.] 철학자들은 결과의 원천과 원리가 될 수 있는 후보가 자연에 무궁무진함을 알고 있으며, "사건들의 [보통의 경우와의] 불일치(contrariety)는 원인 속에 있는 그 어떤 우연성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반대되는](contrary) 원인들의 비밀스러운[알려지지 않은] 작동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라고 관찰을 통해 결론 짓는다.* 그러므로 "[...] 모든 원인과 결과 사이의 연결은 똑같이 필연적이며, 몇몇의 경우들에서의 표면적인 불확실성은 새로운[반대되는] 원인들의 비밀스러운 대립에서 생겨난 것이다."(63, 강조는 필자) 예컨대 보통은 사건 A가 B를 야기하는데, A가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B가 일어났을 때, 이는 A가 아닌 C에서 B가 야기된 것에 불과하다.** [이때도 A는, 특정한 상황 하에서 자신의 '힘'을 실현할 기회를 놓쳤을 뿐 여전히 B를 야기할 줄 알 것이다.] 그러므로 필연성과 일형성의 원칙은 결코 위배될 수 없다. 예외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필연성과 일형성의 원칙을 반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지를 증명하는 것일 뿐이다. 그 경우에 우리는 숨겨진 원인을 찾아나서야 한다.

*Q. 이 대목에서 "결과들의 불일치는 항상 원인들의 불일치를 배반하며, 원인들 사이의 상호적인 대립으로부터 생겨난다"(E 8.13)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인가? 나아가 어째서 단순히 'new'라 쓰지 않고 'contrary'란 말을 쓰는가? --> **여기서도, 어째서 A와 C가 단순히 다른 것으로 부족하고 서로 반대돼야 한단 말인가?

A. 특정한 사태에서 한 결과에 대해 두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없으므로, 원인들이 아무리 서로 친근해보여도 서로를 배제/서로 대립한다.(S씨)

cf. Millican은 이 E 8.13이 귀납적 학문의 탐구원칙을 제시해주는 아주 중요한 문단이라고 해석한다. 표면적으로는 현상들이 불규칙적으로 보일지라도, 그 가운데서도 항상적인 인과관계를 찾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 원칙들의 견고함은 "지성적 행위자들의 행동들과 의지들"에도 일관적으로 적용된다.(63) 겉으로 보기에 규칙에 어긋나고 기대할 법하지 않은 행위도, 그 행위자의 성격[성품](character)과 그가 처한 상황을 잘 아는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설령 이러한 이해조차 어려운 경우라 할지라도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성격들은 특정한 정도로는 [원래] 항상적이지 않고 불규칙적임을 안다. 이것이, 어떤 방식으로는, 인간 본성의 항상적 성격이다. [...] 이런 표면적인 불규칙성들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인 원리들과 동기들은 일형적인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다."(64) 마치 동일한 법칙들 하에서도 날씨가 변화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보편적으로 알려져있는/인정받는(allowed, acknowledged) 일형성에 대한 경험이야말로 우리가 인간의 행위에 대해 추론할 수 있는 근거이자 원천이다.* 이러한 추론 및 기대 없이 사는/살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필연성의 원리에 항상 동의해왔다"고 다시금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여기에는 당연히 철학자도 포함된다. "그들의 삶의 모든 행위가 저 의견을 [미리] 가정"(65)하기 때문이다.** 일상적 행위뿐 아니라 역사학, 정치학, 윤리학, 미학 등 인간에 대한 학적 탐구 역시 "필연성의 원칙과, 동기들로부터 자발적 행위로의 추론, 성격으로부터 행동(conduct)으로의 추론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65, 강조는 필자) 요컨대 자연현상이나 인간사나 그것을 관장하는, 그리고 그것을 탐구할 때 활용해야 하는 본성과 원리는 똑같다. "경험된 동일한 합일은 정신에 동일한 영향을 미친다. 합일된 대상들이 동기들, 의지 그리고 행위들인지 또는 형태와 운동인지에 상관없이 말이다."(66)

*Q. 저번 절에서는 추론을 통해 비로소 연결을 감지해내는 순서의 주장이 제시됐다면, 이번 절에서 흄은 일형성을 먼저 주장하고 그로부터 추론이 가능해진다는 순서로 주장을 펼친다. 이는 표현상의/수사적 변주인가, 새로운 주장인가, 아니면 허용 가능한 범위 내의 비일관성인가?

A. 일형성부터가 이미 추론과 기대의 결과임을 저번 절에서 밝혔으므로, 수사적 변주가 아닐까 싶다.

A2. 7절과 8절은 논의의 층위/주제가 다르므로 비일관성이 성립하지 않는다.

**철학적 회의가 삶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의해 불식되는 모멘트. 일상(개연적인 바를 따라 행위)과 철학(필연적 참만 인정)의 영역을 철저히 구분했던 <방법서설>에서의 데카르트와 상반되는 모습이 엿보여 재미있다. 나아가 흄은 일상에서 사용되는 추리의 메커니즘--관습--이 학적 추리의 메커니즘과 같다는 입장 또한 견지하고 있다.

 이처럼 모두가 동일한 토대로부터 삶과 학적 탐구를 영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자유와 필연성에 관련된 철학적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 바로 인간이 여전히 한편으로는 자신이 자연의 힘, 원인과 결과 사이의 [실체적인] 연결을 간파해낼 수 있다고 [잘못] 믿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정신의 흐름에 대해서는 "동기와 행위 사이에 그와 같은 연결을 느끼지 못한다"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물질적 힘으로부터 야기되는 결과와 사고와 지성으로부터 야기되는 결과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가정하기 쉬"운 것이다.(67) 그러나 흄에 따르면 이제 우리는 두 영역 모두에서 인과의 원리는 동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철학자들도 언어상으로만 반대자로 보이는 것이지, 실제로는 자신과 동의하고 있다고 흄은 거듭 확신한다.

 흄의 자부심 넘치는 확신은 자유의 원칙에 대해서도 유지된다. 자유란 동기, 경향성, 상황 그리고 행위 사이에 아무런 연결도 없는 사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연결이 일형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명백하고 [이미] 인정된 사실의 문제(plain and acknowledged matters of fact)다." 여기서 흄은 홉스를 따라 [가언적hypothetical*] 자유를 "의지의 규정들에 따라 행위하거나 행위하지 않을 수 있는 힘"으로, 다시 말해 외적 강제의 부재로 정의한다.(69, 강조는 필자) 외적 강제 없이 의지에 따라 행위한 것이라면 자유로운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논고>에서 흄은 자유를 '무차별(indifference)의 자유'와 '자발성(spontaneity)의 자유'로 나눈다. 무차별의 자유란 필연성과 반대되는 자유로서 원인이 없는 자유, 즉 하나의 행동과 다른 행동 중에서 인간이 필연적으로 기울게 되는 쪽이 없어 두 선택지가 무차별한 상태를 일컫는다. 여기서 둘 중 무엇을 선택할지는 순전히 우연chance의 문제가 된다. 이는 양립불가능론자들 중에서 결정론에 반대하는 전통적 자유의지론자들이 취하는 자유에 대한 정의이다. 그러나 흄은 필연적 원인이 없는 인간 행위가 없다고 주장하기에 무차별의 자유를 배격한다. 확률이라는 것도 말에 불과할 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자발성의 자유란 외적 강제와 반대되는 자유로서, 인간이 무엇인가를 하고자 할 때 그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다. 이를테면 감옥에 갇혀있지 않는 한, 나는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움직이고자 하면 움직일 수 있다. 이때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욕구에 따라 자발적으로 행위했으므로 행위에 대해 책임을 가진다. 또한 의지 또는 욕구라는 행위의 원인이 존재하기에 무차별의 자유와 다르며, 그 인과가 필연성을 함유하기에 흄의 필연성 교설과 양립할 수 있다. 그러나 <탐구>에서는 이 구분을 유지하지 않고 '가언적 자유'만을 개념화하고 있으며, 이 자유가 자발성의 자유와 과연 일치하는지와 관련된 논쟁이 있다. 이 논쟁과 관련하여, 흄이 자발성의 자유나 가설적 자유를 말하며 ‘의지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행동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인지 가릴 필요가 있다. 우선 가설적 자유가 “의지의 결정에 따라 행동하거나 행동하지 않는 힘”이라는 점에서 행동의 자유는 확실히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흄은 가설적 자유가 작동하지 않는 상황의 예로 감옥에 갇혔거나 사슬에 묶인 사람을 제시하는데 이는 의지의 자유가 아니라 행동의 자유가 방해받는 경우이다. 그렇다면 의지의 자유에 대해서는 어떨까? 여기서 학자들의 의견이 대립한다. 먼저 가설적 자유가 의지의 자유를 포함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양선이(2012)가 해석한] 스트로드는 외적 강제가 있는 상황에서, 즉 자발성의 자유가 없는 상황에서도 가설적 자유를 발휘할 수 있다면서 은행 강도와 직원의 예를 든다. 은행 강도가 직원의 이마에 총구를 겨눈 채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할 때, 분명 외적 강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원은 돈을 줄 수도(돈을 주기로 의지할 수도), 주지 않을 수도(돈을 주지 않기로 의지할 수도) 있다. [양선이(2012)가 해석한] 보테릴 역시 흄의 가설적 자유가 의지의 자유를 포함하며, 그래야만 비로소 의지의 자유에 따른 해당 의도된 행위에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양선이에 따르면 가설적 자유는 자발성의 자유와 똑같은 것으로 외적 강제가 없음을, 즉 행동의 자유가 있음을 가리킬 뿐 의지는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애초에 흄에게 있어 의지 자체가 인간으로 하여금 이렇게도, 저렇게도 달리 행동할 수 있게 해주는 실체적 힘이 아니라 여러 행동들을 관찰한 뒤에 혹은 자발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면서 부과되는 내적 인상일 뿐이다.(양선이, 「흄의 인과과학과 자유와 필연의 화해 프로젝트」, 『철학 제 113집』, 2012.11, pp.47-48.)

Q. 책임을 묻지 않기 위해 요구되는 외적 강제의 수준은 어디까지인가? 이를테면 일제강점기에는 친일행위가 강제되어 신분을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일제의 압력에 굴복했다. 이때 적극적으로, 이를테면 매국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소극적인 친일행위를 자행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비판의 화살이 잘 겨눠지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동시에 죽음을 불사르고서라도 일제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음을 상기하자. 그렇다면 친일은 완전하게 강제된 것이 아니라 복종을 선택할 여지를 남겼으므로, 소극적 친일행위자들 역시 ‘의지의 박약’으로 비난 받아 마땅한가? 아니면 이 정도 수준의 굴복은 자비롭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극단적인 박해 상황에서 기존의 신념을 버리기로 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유사한 물음을 던질 수 있다. 그들은 의지가 박약한 변절자인가, 아니면 그들에게는 행동의 자유가 충분히 부재했는가? 

 흄은 이제 이와 같은 정의가 다른 사실들 그리고 그 자신과 일관되는지 검토하고자 한다. 먼저 "그 어떤 것도 그것의 실존의 원인 없이 실존하지 못한다." 이에 따르면 우연--원인의 부재--이란 언어적 표현에 불과할 뿐 실체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흄의 입장은 강경하다. <'어떤 원인은 필연적이고 어떤 원인은 우연적이다'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증명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결과와의 필연적 연결을 포함시키지 않은 채로 원인의 정의를 제시해보아라, 그는 실패할 것이다>라는 게 그의 입장이다. 왜냐하면 필연적 연결의 관념을 추론을 통해 산출하는 규칙적 결합에 대한 관찰이 없다면 우리는 애초에 인과에 대한 그 어떤 개념도 가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약[강제](constraint)가 아니라 필연성에 대립되는 자유는 우연, 실존하지 않는다고 보편적으로 알려진 [바로] 그것과 같은 것이다."(69)

cf. 그러므로 결정론자로서 흄은 첫째,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고, 둘째, 그 원인은 결과가 되는 사건을 필연적으로 산출/야기하며, 셋째, 결국 모든 사건은 자연세계에서든, 인간세계에서든 원인에 의해 인과적으로 결정되어있다고 믿는 셈이다. 이에 따라 8절에서 주장되는 흄의 양립가능론의 핵심은 <인간은 (외적 강제가 없는 한)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할 수 있기에 자유롭지만, 그 의지는 필연적 원인에 의해 결정되어있다>는 것이다.

Q. 위의 필연성 정의에서 이런 강한 결정론(존재론적 입장처럼 생각되는)이 귀결되는 게 어딘가 이상하다.(J씨)

PART II 어떤 주장을 그것의 윤리적 귀결을 문제삼아 공격하는 것만큼 철학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논증은 없다.* 위험한 결과를 낳는 의견이라고 해서 거짓된 의견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흄은 이런 변론이 자신에게 특별히 도움되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인다. 어차피 그의 필연성 및 자유의 원칙, 그리고 양립가능론 일반은 "도덕성과 일관될 뿐 아니라, 도덕성을 지지하기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수불가결(essential)"하기 때문이다.(70)

*오늘날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달라 흥미롭다.

 보상과 처벌은 선을 산출하고 악을 방지하는 동기들로서 정신에게 일형적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보상이나 처벌의 대상은 행위가 아닌 행위자다. 흄에 따르면 선과 악은 본성적으로 일시적이고 한시적인(temporary and perishing) 특정 행위 자체가 아닌, 그 행위의 필연적 원인으로서의 행위자의 성격[성품]과 성향--이것들은 지속되고 항상적(durable and constant)이다--일부에 귀속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원인으로부터 생겨나지 않은 행위는 (그 자체로 어떤 내용을 가지는지와 독립적으로) 행위자에게 보상이나 처벌을 줄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결정론, 행위의 원인으로서의 행위자와 행위 사이의 필연적 연결--선인과 선행, 악인과 악행 사이의 연결고리--를 부정하는 윤리학은 그 어떤 악행을 저지른 사람도 흠결 없는 사람으로 둔갑시킬 것이다. 쉽게 말해 그 사람이 악행을 야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 흄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세 가지 사실을 예시로 든다. (i)무지 또는 무심코(casually) 저지른 행위는 처벌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행위의 원리는 순간적이고 자체완결적이기 때문이다(momentary and terminate in them alone).* (ii)숙고된 행위보다 우발적으로 저질러진 행위가 덜 비난받는다. 행위자의 성격 전체를 반영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iii)그것을 통해 삶과 [생활]방식이 완전히 변화할 경우 반성은 이전의 죄를 씻어준다. 행위가 사람을 악인으로 만드는 것은 그것이 사람의 정신 속 악을 증거하는 한에서이기 때문이다. [그 정신 속의 악이 사라진다면, 행위가 과거에 저질러진 것으로서 남아있더라도, 죄는 사라진다.]

*Q. 무슨 뜻인가?

A. 성품과 관계가 없다. 원인이 그 사람 안에 있는 게 아니다. 

Q. 저 필연성이 결국 '나' 이전의 사태들로도 확장될 텐데, 그럼 정말 '나'의 행위로 귀속시킬 수 있냐?(J씨)

Q. 무차별의 자유를 배격한다고 해서 흄의 논의로 곧장 귀결되냐?(S씨)

 필연성뿐 아니라 자유 역시 도덕성을 위해 필수불가결하다. "[...] 그 어떤 인간의 행위도 자유가 빠져있다면 도덕적 성질을 갖추거나 승인 또는 반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행위는 그것이 [행위자의] 내적 성격[성품], 정념, 그리고 정동의 표현(indication)인 한에서 우리의 도덕적 감정의 대상들이기 때문이다."(72) 자유가 아닌 외적 강제에서 생겨난 행위는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흄은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가능한 두 반론을 스스로 제기한다. "첫째, 만일 인간의 행위가 필연적인 연결고리를 따라 신에게로 귀속될 수 있다면, 그 행위들은 결코 범죄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신은 완벽한 존재로서 선만을 의도하기 때문이다. "둘째, 만일 그 행위들이 범죄적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신에게 부여하는 완벽의 속성을 철회해야 하며, 그가 [곧] 그의 피조물들의 죄책감과 사악함(moral turpitude)의 궁극적 작자라고 인정해야 한다."

 첫 번째 반론에 대해 흄은 스토아 학파가 대표적으로 제기하는 한 가지 가능한 반박을 제시한다. 이 반박에 따르면 부분적으로는 죄악과 고통인 것이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최선의 산물이다. 예컨대 "모든 육체적 질병은 [...] 자비로운 [전체] 시스템의 본질적 부분을 구성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입장은 "편안함과 안정의 상태에 있는 사변적 인간의 상상력을 잠시 기쁘게 할 수는 있어도" 그 기쁨이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며, 그렇지 못한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73) 다시 말해 '전체의 선을 보라'는 식의 반박의 타당성은 주관(및 그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자의적으로만 보장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첫 번째 반론의 대안적인 반박이 될 수 있는가? 흄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자연에 의해, 특정한 성격[성품], 성향 그리고 행위들이 나타나면 즉각적으로 승인 또는 비난의 감정을 느끼도록 형성되었다." 사회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는 성격들[성품들]은 정신의 승인을 야기하며, 공공의 질서를 해치는 성격들은 비난을 야기한다. 그러므로 도덕적 감정은 이와 같은 이해관계[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야기되는 것이다.* 여기서도 '전체의 선을 보라'는 권유는 "대상에 대한 자연적이고 즉각적인 시선"을 상쇄(counterbalance)시킬 수 없을 것이다. 이를 일반화하면 덕과 악덕 사이의 구분, 나아가 미와 추 사이의 구분은 "인간 정신의 자연적 감정들 속에 정초"되기 때문에 그 어떤 철학적 이론이나 사변에 의해 영향 받지 않는다.(74)

*Q. 이 논리대로라면 외적 강제에 의한 행위도 부도덕한 것이 되지 않는가? 다만 처벌할 사람이 없어질 뿐인가?

A. 흄에 따르면 행위자 없이는 도덕적 감정의 대상 또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외적 강제에 의한 행위(부자유스러운 행위)는 부도덕한 것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흄의 결론에는 동의하면서도 그 과정에 반대한다. 외적 강제와 거의 다르지 않은 내적 강제에 해당하는 상황을 예로 살펴보자. 어느 조현병 환자가 살인을 하지 않으면 네가 먼저 죽을 것이라는 환청에 오랜 시간 노출되어 그 환청의 강제에 의해 (자신은 정당방위라고 생각하면서) 실제로 살인을 저지른다고 가정하자. 이때 이 살인에 대해 우리는 분명히 승인하지 못하겠는 감정, 거부감 및 반감을 느낄 것이다. 다만 이성적으로, 사후적으로 그것은 내적 강제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행위자의 악을 성립시키는 종류의 감정이 아니라고 재정립할, 또는 재정립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심지어 이 경우 도덕적 판단은 감정 외의 요소를 개입시키게 된다.)

 두 번째 반론에 대해 흄은 그것이 인간의 이해력을 벗어나는 주제라고 대응한다. "신이 어떻게 죄와 사악함의 작자가 되지 않으면서 인간의 모든 행위들의 중간자적 원인이 될 수 있는지"는 이성이 어려움과 모순 없이는 건드리지 못하는 미스터리다.(74) 인간 이성은 무모한 도전(temerity)을 멈추고 겸손하게 자신의 "진정하고 적절한 영역, 일상의 삶(common life)에 대한 검토"로 귀환해야 한다.(75) 바꿔 말하면 두 번째 반론은 흄에게 문젯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에게 신정론은 철학의 본령 바깥의 문제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IX. 동물의 이성에 대하여(Of the Reason of Animals)

 사실의 문제를 따지는 모든 추리는 일종의 유비에 의해 정초된다. 유비적 추론은 유사성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관습적 추론과 밀접하게 연관되는데(E 9.1 각주 참고), 인간 정신으로 하여금 원인이 유사하면 결과가 같으리라고 기대하게 만든다. [특정한 결론을 확장 적용하는 쓰임새.] 유비적 추론의 확실성과 확정성은 원인들 간의 유사성에 비례한다. 예컨대 우리는 한 동물을 해부한 결과가 모든 동물에게 적용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으며, 해부된 동물과 유사한 동물일수록 이 기대의 신뢰도가 올라갈 것이다. 9절에서 흄은 유비적 추론을 이전의 절들에서 내린 자신의 결론을 강화하는 데 활용하고자 한다. 만일 인간의 이해력의 작동들, 정념들의 기원과 연결에 대한 이론이 다른 모든 동물들에게도 적용된다면 이 이론의 권위 역시 올라갈 것이기 때문이다. [흄은 여기서 이미 인간과 동물 사이의 어느 정도의 유사성을 전제하고 있는 것 같다.]

 첫째,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 역시 경험 및 인과적 추론으로부터 (무엇을 피하고 무엇을 추구할지) 배운다. 동물을 훈련시키는 경우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 쇼펜하우어가 '아트만!'하고 불렀을 때,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는 임의적이기만 할 이 소리를 그의 푸들은 어떻게 알아듣고 주인을 찾아갔겠는가? 다 그와 같은 임의적인 소리와, 예컨대 그에 잇따른 부름의 손짓 사이의 연결관계에 대한 경험을 축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물 또한 "그의 감각들에 즉시 새겨진 것들 너머의 어떤 사실을 추론"하며*, "이 추론은 모두 과거의 경험에 의해 정초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77)

*이는 현상학에서 말하는 초월론적 구성(더 사념함, Mehrmeinung)을 상기시킨다. 심지어 데카르트가 주장한 인간의 지각과정과도 별로 다르지 않다. 다만 흄은 저 추론을 데카르트적 의미에서의 이성이 아닌 상상력의 소관으로 옮길 뿐이다.

 둘째, 동물의 추론 능력이 인과관계나 자연의 규칙성에 대한 그 어떤 논증 또는 추리의 과정에 의해 정초되어있을 리는 없다. 그와 같은 논증 또는 추리가 가능하다면 동물에게는 너무나 난해한 것일 터이기 때문이다. 추론(inference)이 추리(reasoning)에 의해 이끌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동물뿐 아니라 아이들, 전 인류에게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추론 능력이 철학적이지 않은 존재들에게도 필수불가결한 것으로서 사용됨을 보면, 이성보다 "더 바로 사용될 수 있고(ready) 일반적인 사용과 적용을 가지는 원리"가 추론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서 자연에 의해 부여됐어야 했을 것임을 알 수 있다.(78) 이성이 아닌 관습이 모든 감각적 존재들(sensitive beings)의 믿음과 추론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물이 모든 앎을 관찰에서만 얻는 것은 아니다. 동물은 본능에서도 얻는 바가 많을 뿐 아니라, 본능에 의해서 경험을 통해 배우고 추론할 수 있는 수준의 한계를 지정받는다. 본능의 개념은 마치 인간의 이해력의 범위를 넘어서는 기이한 무언가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우리가 짐승들과 공유하는, 그리고 삶의 모든 행동이 그에 의존하는 경험적 추론 자체가 [그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채로 작동하는] 본능 또는 기계적 힘의 일종 외에 다른 것이 아님"은 이와 같은 선입견을 불식시켜준다.(78, 강조는 필자) 인간으로 하여금 불을 피하도록 해주는 본능과 새로 하여금 둥지를 틀게 해주는 본능은, 물론 동일한 본능은 아니겠지만, 말하자면 같은 유에 속하는 것이다.

X. 기적에 대하여(Of Miracles)

PART I 사실의 문제를 따짐에 있어서 타당성을 보장해주리라 신뢰할 수 있는 기준은 경험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경험이 오류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사실의 문제로부터의 인간의 추리는 "상상 가능한 모든 수준의 [다양한] 확실성(assurance)"을 가진다. 예컨대 어떤 추리들은 그 어떤 예외도 발견된 적 없는 증거(proof)에 기반하는 한편, 어떤 추리들은 연약하기 짝이 없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그 근거[명증성](evidence)에 비례해 [설립한다]." 과거의 경험이 견고한 증거를 제공해주지 않는 사례들에서 "그는 대립되는 경험들을 서로 비교(weighs)한다. 그는 어느 편이 더 많은 수의 경험들에 의해 지지되는지 고려한다. [더 지지되는] 편으로 그는 [그래도] 의심과 망설임을 품은 채 [일단] 기우는데, 그가 마침내 자신의 판단을 확정지어도 그 명증성은 우리가 적절하게[정당하게](properly) 확률[가능성](probability)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대단하지 않다."(80, 강조는 필자)

 이상의 판단 원리들을 흄은 다른 사람의 증언에 기반한 추리에 적용하고자 한다. 다른 사람의 증언에 기반한 추리 역시 인과적 추론, "목격자들의 진술들과 사실들 사이의 일반적인 일치(conformity)"에 대한 기대에 의존한다.(81) 그러므로 이 추리 일반의 타당성을 따질 때에는 다른 모든 귀납적 추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증언과 실제 사건 사이의 결합이 경험적으로 얼마나 높은 빈도수로 관찰되는지를 따져야 한다. 저 결합이 얼마나 항상적인지 또는 변화무쌍한지에 따라 증언의 명증성은 증거가 되기에 충분하거나 확률적으로만 참인 것으로 성립하게 되며, 충분히 항상적이지 않다면 대립되는 가능성들과 우열을 비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증언의 명증성을 계산하고 다른 가능성들과의 우열을 비교함에 있어 고려해야 할 요소는 그 증언을 전복할 만한 다른 근거가 있는지, 목격자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증언을 전하는 태도(manner)가 어떠했는지 등이다. 뿐만 아니라 증언의 내용 자체가 너무 놀라운(marvellous) 성격의 것이라면 그것이 비일상적인(unusual) 정도에 따라, 나아가 다른 경험들과의 경합(contest)을 통해 증언을 신뢰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만일 증언의 내용이 기적 즉 정의상 "자연의 법칙들에 대한 위반"일 경우, 나아가 증언만이 그 기적의 유일한 근거일 경우엔 어떨까? "사실의 본성으로부터 그 어떤 기적의 존재에도 반대하는 직접적이고 완전한 증거가 있"을 것이다. 자연의 일반적인 진행 방식(common course of nature) 자체가 그 기적에 반하는 근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적의 문제에 있어 흄은 다음을 '일반적인 원칙(general maxim)'으로 설립한다. "그 어떤 증언도 기적을 [참된 것으로] 확립할 만큼 충분하지 못하다. 그 증언이 거짓되는 편이, 해당 증언을 통해 확립하고자 분투하는 그 사실[기적]보다 더 기적적이지 않는 한 말이다. 그리고 주장들 사이에 상호적인 충돌(destruction)이 일어나는 경우에도, 월등한 주장은 오직 열등한 주장의 힘(force)을 제한 뒤에 남는 힘의 수준에 합당한(suitable) 만큼의 확실성만을 준다."(83, 강조는 필자)

cf. 흄의 결정론적 주장 자체도 사실의 문제에 속하는 주장으로서, 형이상학적 필연성을 역설하는 주장이 아니다. 결정된 사태들에 대한 경험적 일반화의 산물이다. 모든 게 처음부터 결정돼있다는 강한 주장도 받아들이지만, 그 결정돼있음이 형이상학적 필연성(반대 상상불가능/아프리오리하게 참)으로 특징지어지지 않는다.

PART II 10절의 나머지 내용은 그 어떤 기적(또는 예언)도 이상의 일반적인 원칙에서 [증언이 기적을 확립시키기 위해] 요구되는 바를 만족시키지 못함을 근거 지우는 네 가지 주장으로 이루어진다.(l) 첫째, 역사상 그 어떤 기적도 충분한 수의 믿을 만한 교육의 수준 및 성품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증언되지 않았다. 둘째, 인간 본성의 어떤 면모들은 건강한 추리를 방해하고, 비일상적이며 신뢰할 만하지 못한 사실들마저 그것을 비일상적이며 신뢰할 만하지 못하게 만드는 바로 그 이유들을 이유로 인정하게 만든다. 예컨대 기적이 불러일으키는 놀라움의 정념, 다른 사람들의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는 일에 대한 사랑, 자신이 신성하다고 믿는 바를 [그것이 얼마나 참되든지 간에] 전파하고자 하는 열정(enthusiasm), [예컨대 숭고한 선지자가 되고 싶다는] 허영심, 이기심(self-interest), 능변(eloquence) 앞에서 이성과 반성 능력을 상실하기 쉬움,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파하는 데서 오는 즐거움 등이 저 면모들의 예이다. 이와 같은 정념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격정과 확신을 가지고 [증언만을 증거로 가지는] 종교적인 기적들을 믿고 또 보고하게 만든다. 셋째, 초자연적이거나 종교적인 기적에 대한 증언은 "무지하고 야만적인 국가들 가운데서도 풍부하"며 문명화된 국가들에서도 (마찬가지로 무지하며 야만적인) 선조들로부터 전승되어왔다.(86, 강조는 필자) 이는 "[기적에 대한 이야기들]이 증명 가능한 사실이기보다 역시나 상상력의 산물들"임을 암시해준다.(li, 강조는 필자)* 넷째, 상이한 종교적 기적들 간의 상충은 모든 기적의 자멸을 낳는다. "종교의 문제에 있어서는 어떤 것이든 다르면 반대되는 것이다."(87-88) 이처럼 양립불가능한 방식으로 상이한 종교는 저마다 상이한 기적들에 의해 확립되곤 하므로, 특정한 종교적 기적은 자신이 속하지 않는 다른 종교의 시스템을 전복시키는 데 일조하는 힘을 가진다. 그리고 이 힘을 행사하는 과정, 즉 "경쟁하는 [다른] 시스템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기적]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시스템을 확립시키는 그 기적들의 신뢰성을 파괴한다."(88, 강조는 필자) 쉽게 말해 한 시스템의 신뢰성을 입증하려면 다른 시스템의 신뢰성을 깎아내려야 하는데, 모든 시스템은 같은 기반--기적에 대한 증언의 신뢰성--을 공유하므로 자기파괴가 귀결된다는 것이다.

*Q. 증언자를 불신한다는 의미에서 첫 번째 주장과 겹치지 않는가?

A. 첫 번째 주장은 수가 핵심.

 요컨대 경험만이 기적에 대한 증언에 타당성을 보장해줄 수 있지만, 바로 그 동일한 경험이 [기적에 반하는] 자연의 법칙들을 확신시켜준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남는 합리적인 전략은 기존의 경험을 바탕으로 둘--기적에 대한 증언과 자연법칙--의 우열을 가리는 수, 한 편이 가지는 확실성으로부터 다른 한 편이 가지는 확실성을 제함으로써 무엇이 잔존하는지를 계산하는 수뿐이다. 그러나 종교의 문제에 있어서 이와 같은 뺄셈은 완전한 파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흄은 "그 어떤 인간의 증언도 기적을 증명하고, 그것을 [...] 종교적 시스템의 정당한 기초로 만들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가질 수 없다"고 결론짓는다.(92)

 기독교의 전능한 하나님에 대해서조차 인간은 경험을 기반으로 해서만 추리해야 한다. 흄은 기적에 대한 증언의 신뢰성을 회의에 부치는 이상의 논증이 기독교를 "인간 이성을 원리로 삼아 수호"하고자 한 기존의 학자들--예컨대 아프리오리한 탐구를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한 데카르트 같은 이들--을 반박하는 데 쓰일 수 있다고 덧붙인다. 그들은 기독교의 수호자이기는커녕 오히려 기독교의 적이다. "우리의 가장 신성한 종교[기독교]는 신앙(faith)에 의해 정초되지, 이성에 의해 정초되지 않"기 때문이다.(94, 강조는 필자) -->* 모세5경에 나타나는 기적들만 해도 경험적 검토를 거치면 그 거짓됨이 자명하다. 그러므로 기독교 역시 초기에는 기적을 동반했으며, [흄에게 있어] 오늘날까지도 기적 없이는 믿어지지 않지만, 이 동의는 이성이 아닌 신앙의 소관이다. 그리고 신앙으로써 기독교의 기적을 믿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은 "자신의 인격 내에서 계속해서 그의 이해력이 가진 모든 원리들을 전복하고 관습과 경험에 가장 반대되는 것을 믿도록 해주는 결심을 제공하는 기적[이 일어남]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95)

*네가 이성이 있다면 이런 기적들을 믿겠니? 이런 느낌에서 이어지는 듯.

XI. 특수한 섭리*와 내세에 대하여(Of a Particular Providence and of a Future State)

*개인 혹은 개별 행위의 선악에 따른 신의 보상 및 처벌(J씨)

 11절에서 흄은 "회의주의적 역설을 사랑하는 친구"(96)의 목소리를 빌려 철학에 대한 사회적 관용 그리고 박해의 중지를 호소한다. 이 친구는 철학이 자유로웠던 시절 활동했던 에피쿠로스의 가면을 쓰고, 마치 소크라테스의 처지에 놓인 것처럼 아테네의 대중 앞에서 섭리와 내세를 부정하는 자신의 철학이 "사회의 평화와 국가의 안정에 완전히 무해(indifferent)"함을 변론하고자 한다.

 에피쿠로스를 연기하는 흄의 친구에 따르면 자연의 질서로부터 그 설계자(Designer)로서의 신의 존재[및 성질들]에 대해 증명하는 작업(우주론적 신 증명)은 결과로부터 그 원인을 추론하는 과정이다. 이와 같은 추론의 과정에는 비례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 [인식론적으로] 원인은 결과에 비례해야 하며, "결과를 생산하기에 정확히 충분한(exactly sufficient) 것 외의 다른 성질을 원인에 부여할 수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원인에 그것을 생산하는 데 충분한 것보다] 더 많은 성질들을 부여한다면, 또는 그것이 다른 결과들을 생산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면" 비이성적인 추측 그리고 이유(reason) 없는 상상에 불과해질 것이다.(99, 강조는 필자) 따라서 신의 문제에 있어서도, 자연 가운데 관찰 가능하도록 드러나있는 것 이상의 성질을 신에게 부여할 수 있어서는 안 된다. 악의 문제에 맞서 신을 변호하는 신정론 역시 "소용 없는 노력(fruitless industry)"이다.

 이제 악인을 심판하고 선인을 보상하는 섭리에 대한 그의 부정을 살펴보자. 자연의 질서에 따르면 덕스러운 삶에는 평화와 환대가, 악덕에는 그에 반대되는 것이 뒤따른다. 그러나 이 정도가 인식 가능한 사태의 전부일 뿐, 여기서 (단순히 가능성을 가늠하거나 가설을 세우는 일 이상으로) 더 나아가는 것은 오만이다. "우리는 [이미] 발휘되고 충족된 것으로 아는 속성들 이상으로 신의 어떤 속성들, 행위의 원리들도 추론할 이유가 없다."(103) 자연의 질서의 원인으로서 지적인 섭리를 내세우는 작업은 인간 경험의 영역을 넘어서기 때문에 불확실하고, 비례의 원리에 따른 추리로는 원인으로부터 그 어떤 새로운 추론도, 새로운 인간 행동의 지침도 결과에 더할 수 없기 때문에 무용하다. [요컨대 흄의 친구는 자연의 질서가 존재하니 그것의 원인으로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결론까지만 인정하며, 그 무언가를 신이라고 부르는 데 그치는 것 같다. 신이 전지, 전능, 전선한지는 당췌 알아볼 수가 없는 문제다.] 

 여기서 흄은 불완전한 건축물을 보고 그 건축물을 설계한 지적인 존재를 상정하고, 언젠가 그 지성을 이용해 건축물이 완성될 것이라고 추론하는 것이 왜 불가능하냐고 반문한다. 이에 흄의 친구는 유비의 원리*를 끌어오며 흄을 반박한다. 인간의 작품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경험이 축적되어있다. 인간의 작품에 대한 관찰이 오직 한 번만 일어났더라면 그와 같은 반문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의 작품에 대해서는 사정이 다르다. "신은 오직 그가 [단번에**] 생산한 것들을 통해서만 알려지며, 우주의 유일무이한[독특한](single) 존재자다. 신은 그에 대해 경험된 속성들 또는 성질들로부터 유비를 통해 어떤 [새로운] 속성이나 성질을 그의 안에 [있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는 그 어떤 종이나 유[에 속하는 존재자]로도 이해되지 않는다."(105) 인간과 유사성이 높은 동물에 대한 탐구라면, 인간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유비를 통해 동물에 대해서도 경험된 것 이상을 추론할 수 있겠지만 인간과 유사성이 떨어지는 신에게는 그와 같은 유비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컨대 신에 대한 경험은 일회적이고, 그와 인간 사이의 유사성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유비적, 인과적 추론이 불가능하다.]

*"an inductive argument’s strength varies with the degree of similarity between the objects involved, so that any inference from human purposes to those of a god is bound to be weak [because god and men are so dissimilar.]"(liii, 강조는 필자)

**"a single manifestation"(liii)

 따라서 "자연의 작품들에 대해 [무언가를] 소위 추가하는 모든 [작업]은 자연의 작자에 대해[서도 새로운] 속성을 추가한다. 그리고 [이 추가는] 결과적으로, 전적으로 그 어떤 이유[이성] 또는 논증으로도 지지받지 못하므로 순전한 추측과 가설 외의 것으로는 인정될 수 없다." 인간은 어째서 그와 같은 지적 실수를 저지르는 것일까? 바로 자기 자신들의 시선을 신의 시선과 동치시키는 암묵적 오만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처럼 우월한 존재가 어째서 우리와 동일한 의도-행동의 연관 나아가 완벽성의 관념을 가지리라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종교와 종교적 가설 일체 역시 다른 철학과 마찬가지로 "경험의 일반적인 진행경로"를 넘어서서 무언가를 입증할 수 없으며, "일상의 삶에 대한 반성"을 통해 얻어진 [옳고 그른] 행동의 기준 외의 다른 행동의 기준을 제공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 실천과 관찰을 통해 이미 알려진 것을 넘어서 그 어떤 보상 또는 처벌도 기대하거나 두려워할 수 없다."(106, 강조는 필자) [게다가 이미 알려진 저 경험의 일반적인 진행경로 및 그에 대한 인간의 자연적 반응 일반은 어차피 변하지 않을 것이므로] 형이상학과 종교에 대한 철학적 사변은 사회의 정치에 무해하다. 이에 대해 흄은, 설령 이성이 그와 같은 결론을 가리킨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선행에 대한 보상과 악행에 대한 신적 심판을 믿을 것이며, 이 믿음을 근거로 행동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이와 같은 믿음/선입견을 뒤흔드는 자는 뛰어난 철학자는 될 수 있어도 좋은 시민이나 정치인일 수는 없다. 사람들의 정념을 해방되게 만들고, 법의 위반을 쉽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흄은 신이라는 원인과 세계 창조라는 그의 유일한 결과가 다른 종류의 인과관계들과는 너무나 상이한 성격의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그와 관련된 그 어떤 추론도 감행할 수가 없다는 사실 또한 지적하며 논의를 마무리짓는다.**

*Q. 이와 같은 조심성이 바로 다음 문단(11.29)에서 무해함을 근거로 다시금 철학의 자유를 호소하는 것과 어떻게 양립하는가?

**Q. 흄은 혹시 무신론보다는 불가지론에 가까운 게 아닐까?

Q. 신이 세계를 창조한 것도 부정되고 있는 건가? 그거는 인정이 된 상태에서 신이 전능하다는 것까지는 알 수 없다는 논지인지, 아니면 애초에 신의 존재와 세계의 창조조차 의심의 대상인지 헷갈린다.

A. 둘 다 의심되고 있는 것 같다. 후자에 대해서는 세계의 창조는 한 번의 사건이기 때문에, 원인을 옳게 추론할 만큼의 경험이 쌓이지 못했기 때문(원인이 있다는 것만 알지 그 원인이 신인지는 알 수 없을 것) + 세계의 창조에 관여된 인과의 특성이 너무나 독특하기 때문이다. 한편 흄의 친구는 세계/자연이 신의 창조에 따른 것이라는 가정 자체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함구하고(창조의 원인[의 이름]이 신임은 일단 받아들이려 함), 만일 그 가정이 맞다하더라도 신의 전능성을 추론할 수는 없다는 정도에 그치는 듯하다.

XII. 아카데미아의 그리고 회의주의적인 철학에 대하여(Of the Academical and Sceptical Philosophy)

PART I 12절에서 흄은 회의주의를 정의하고 그것을 어디까지 수용하거나 비판할 것인지를 논한다. 이를 위해 흄은 회의주의를 두 종류로 나눈다. 먼저 "모든 탐구와 철학에 선행하는(antecedent) 회의주의"는 데카르트에 의해 행해진 바 있는 것으로서, 기존의 모든 의견들뿐 아니라 인간의 [인식]능력(faculties) 자체에 대한 보편적인 비판을 제안한다.(109) 그에 따르면 인간의 [인식]능력의 진실성(veracity)은 오류 불가능한 본래적 원리(original principle)로부터 연역되어야만 비로소 회복될 수 있다. 그러나 흄은 그와 같은 본래적 원리가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존재한다 하더라도 앞서 의심스러운 것으로 가정된 바로 그 인간적 능력들을 통해서만 접근 가능하다고 비판한다. 데카르트적 회의주의는 구제불능인(incurable) 순환논증에 빠진다는 것이다. 두 번째 종류는 결과적(consequent) 회의주의로서, 특정한 학문적 탐구를 거친 이후에 인간의 인식 능력 또는 인식된 바의 확정 가능성에 대해 구체적인 회의에 이르는 형태를 띤다. 흄은 감각능력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해 이 능력의 작동과정에서 가정되는 외부세계의 존재에 대한 회의로 나아간다.

 본능은 인간으로 하여금 "감각에 현전하는 바로 그 상들(images)이 [곧] 외부 사물"이라고 항상 가정하게 만들며, "하나는 다른 하나의 표상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정신의 상은 사물의 표상일 뿐, 사물 자체가 아니라는] 의심"은 결코 갖지 못하게 만든다. 그와 같은 외부 사물은 "그것을 지각하거나 [그에 대해] 사유하는 지적 존재가 처한 상황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모든 인간의 보편적이고 일차적인 [이] 의견"은 철학적 추리에 의해 무너진다.(111, 강조는 필자) 정신에 현전하는 것은 상 또는 표상일 뿐이고, 감각 역시 이 상들이 전해지는 입구에 불과하지 정신과 [정신으로부터 독립적인] 대상 사이의 연관을 형성할 수는 없다는 것이 명백하기(obvious) 때문이다. 로크 등이 옹호한 이러한 표상주의 실재론 하에서 추리는 자연본능과 대립한다. 문제는 이러한 이론을 그 어떤 논증을 통해서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신의 지각이 외부 사물에 의해 야기되며, 사물과 다르지만 사물과 유사한 표상이라는 점을 대체 어떻게 입증할 수 있단 말인가? 꿈과 광기의 경우를 생각하면 그와 같은 지각은 정신 자신의 힘으로부터 야기됐을 수도 있고, 아직 알려지지 않은 어떤 영(spirit) 등의 소행일 수도 있다. 흄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감각의 지각들이 외부 사물들로부터 그것과 유사한 것으로서 생산되는지는 사실과 관련된 물음이다. 이 물음[의 답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같은(like) 본성을 가진 것들에 대한 다른 모든 물음들이 그렇듯이, 당연히 경험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여기서 경험은 전적으로 침묵을 지킬 것임이 틀림없다. 정신은 지각 외에 다른 것을 받아들인[현전받은] 적이 없고, 지각들과 대상들 사이의 연결에 대한 경험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 그와 같은 연결에 대한 가정은, 그러므로, 그 어떤 [이성적] 추리에 의해서도 정초되지 않는다."(112, 강조는 필자) [정리하자면, 정신에 현전하는 지각들이 표상에 불과하다는 것까지는 추리되지만, 그것이 외부 사물의 표상이라는 점까지는 추리되지 않는다.] [데카르트에게서처럼] 감각의 진실성*을 확보하기 위해 신의 진실성에 기대서도 안 된다. 만일 신의 진실성이 이 문제에 개입되어있었다면, 신은 결코 기만하지 않으리라는 점 때문에 우리의 감각은 애초부터 오류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외부세계의 실재 자체가 의문시된다면 그것을 통해 신의 존재 또는 속성을 [우주론적으로] 증명하려는 시도 또한 좌초된다.

*Q. 감각의 타당성 일반을 말하는가, 아니면 '외부' 사물의 반영 사실을 말하는가?

 이와 관련된 또 하나의 회의주의적 주제는 바로 1차 성질과 2차 성질의 구분에 대한 것이다. 온도, 색, 부드러움 등의 2차 성질은 일반적으로 "대상들 자체 속에 존재하지 않고 정신의 지각들"[에 불과한 것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연장과 고체성(solidity) 같은 1차 성질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다. 감각을 통하지 않고서 연장의 관념을 얻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감각에 의해 지각되는 모든 성질들이 대상 속이 아니라 정신 속에 있다면" 연장의 관념은 2차 성질의 관념들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1차 성질은 '추상'에 의해 얻어질 수 있다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그와 같은 관점은 이해하기 어려울(unintelligible) 뿐 아니라 부조리하기까지 하다. 2차 성질이 추상된 1차 성질은 상상 불가능하며 인간 사고(conception)의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추상 과정을 거쳐서도 남을 수 있는 것은 "지각들의 원인으로서 어느 알 수 없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뿐일 텐데, 이토록 불완전한 개념으로는 그 위에 새 이론을 정초시킬 수도, 회의주의를 불식시킬 수도 없을 것이다.(113, 강조는 필자)

PART II 이제 흄은 추상적 추리와 귀납추리 각각에 대한 회의로 나아간다. 먼저 추상적 추리는--전제를 받아들인다면 결코 부정할 수 없는 타당한 논증을 거쳐--시공간의 무한분할가능성과 같은 부조리하고 모순된 귀결(absurdities and contradictions)을 낳곤 한다.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추상적 추리의 결과를 받아들이길 망설이게 만든다. 한편 귀납추리에 대한 회의주의적 반대는 두 종류로 나뉜다. ①대중적(popular) 회의[=피로니즘]는 "인간 이해력의 자연적 유약함"을 지적하며 상황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고, 비일관적인 의견들이 만연한다는 사실 등을 근거로 가진다. 그러나 "일상적 삶 속에서 우리는 매 순간 사실과 실존과 관련해서 추리하"고 이 추리 없이는 살 수조차 없으므로, 저 회의는 너무 약하다. "피로니즘 또는 회의주의의 과도한 원리들의 위대한 전복자는 일상적 삶에서의 [....] 행위"다.(115) 또한 아무리 이 회의가 강해보일지라도, 그로부터는 그 어떤 "지속적인 선(durable good)"도 도출될 수 없다. 피로니즘이 [참된 것으로서]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대체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애초에 무슨 대답이 가능하겠는가? 피로니즘은 [이처럼 주장하는 바 자체가 불명료해] 정신에 항상적 영향을 미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회에 기여하는 바도 없다. 피론주의자의 말이 맞다면 인간 삶 전체가 퇴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②철학적 회의는 흄 자신의 인과이론에서 듯러나듯 완화된 회의주의의 형태를 띰으로써 [인간에게 유의미한 진리를 추구하는 데] 성공한다.

PART III 완화된 회의주의는 방법론적으로 독단을 방지할 수 있으며, 인간의 능력을 과신하지 않는 정확한 결론만을 내놓을 수 있게 해준다. 또 주제 면에서는 [상상력을 동원해 관습과 가장 먼 주제들로 비상하는 대신] 인간의 이해력이 도달하고 감당할 수 있는 주제들, 즉 일상적 삶(common life)에 대한 것만으로 탐구를 제한할 수 있게 해준다. "철학적 결단들은 일상적 삶에 대한 반성이 체계적이 되고 교정된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118)

 [광의의 이해력은 두 종류의 추리를 행할 줄 안다.] 증명을 활용하는 추상적 추리--모순됨이 상상 불가능한 결론을 내는--는 양과 수에 대해서만 행해질 수 있다. "양과 수의 구성 요소들은 전적으로 유사"한 반면 다른 모든 관념들은 서로 구별된다.(119) 그러므로 다른 모든 관념들에 대해서는 [증명은커녕] 저 구별을 관찰하고 선언하는 것[뚜렷하게 정의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여기서 흄은 정의의 어려움을 들어 수학적 명제 외의 분석명제들에 대한 탐구를 관념의 관계군에 대한 탐구 영역으로부터 배제하고 있는 것 같다.] 한편 사실적 추리는 그 비존재를 상상할 수 있는 실존[존재]의 문제를 다루는데, 존재는 오직 경험에 기반한 인과적 주장(argument)을 통해서만 입증될 수 있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적 필연성을 배제하는] 인과적 추론이야말로 인간의 행위에 대한 모든 지식을 형성할 수 있게 해주는 기초다. 요컨대 양과 수를 따지는 추상적 추리, 사실과 실존의 문제를 따지는 귀납적 추리에 해당하지 않는 모든 종류의 주장은 "궤변과 환상"(120)이다. 신학마저 경험에 의해 지지되는 한에서만 이성에 의해 정초될 수 있으며--경험은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이는 사실상 빈말, '신학적 거짓말'(146 참고)이다--실질적으로는 신앙과 신적 계시를 통해서 정초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