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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버나드 윌리엄스, <윤리학과 철학의 한계> 요약

Bernard Williams, Ethics and the Limits of Philosophy (3rd impression with amendments), London: Fontana, 1993 (originally published in 1985). 모든 '[]'는 나의 해석.


1장: 소크라테스의 질문

철학은 “일반적(general)이고 추상적이며, 합리적으로 반성적인” 탐구의 형태를 취한다(1). 구체적으로 말해 “반성적 일반성과 합리적으로 설득력 있다고 자청하는(claim) 논증의 양식”을 특징으로 가지는 학문이다(2). 그런 철학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how one should live)’라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가? 한편으로 철학자의 입장에서는 이에 긍정적으로 대답한다는 것이 상당히 야심찬 주장(large claim)에 해당한다. 다른 한편으로 독자의 입장에서는 과연 철학이라는 특수하고 전문적인 분과(subject)가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철학은 제 전통의 무게를 벗은 채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접근할 수도 있다(2). 그러나 철학의 문제들은 철학 자체의 역사와 현재의 철학적 실천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아가 현재의 인간은 소크라테스의 시대와 달리 근대적 삶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법, 의학, 경영, 응용과학, 심지어는 허구적 작품의 경우에 이르기까지, 근대에 들어 반성[의 방법론]이나 고도의 자기의식은 철학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이 책은 이러한 사항들을 염두에 둔 채 “도덕철학에서의 가장 중요한 발전들”을 개괄하되, “철학의 힘[powers, 철학이 할 수 있는 바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도덕성[이라는 특수한 체계]에 대해서” 작금의 도덕철학적 저술들보다 회의적인(skeptical) 입장을 전개할 것이다(3).

[이와 같은 탐구에서 우선 대답되어야 할 것은]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응하기 위해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예를 들어 “타 학문으로부터 오는 지식은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 순수하게 합리적인 탐구가 우리를 얼마나 멀리 데려다줄 수 있는지, 같은 질문이 다른 사회가 아닌 [특정한] 한 사회에서 물어졌을 때 그 대답이 얼마나 달라지리라 기대할 수 있는지, 무엇까지가(how much) […] 개별-인격적(personal) 결정에 맡겨질 수 있는지” 등을 알아야 할 것이다(3). 이 과정에서 “철학 자체의 지위”가 함께 고려된다(3). “분석의 담론적(discursive, 논증으로 구성되는, 담론을 통해 이루어지는) 방법과 논증, 비판적인 불만, 그리고 가능성들 [간]의 상상력 넘치는 비교”라는 철학의 특수한 방법론들이 어떻게 살아야 최선이냐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지, 있다면 (또는 없다면) 어느 선까지 그러한지가 고려되는 것이다.

철학, 특별히 도덕철학의 시작점으로 삼기에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이를테면 무엇이 우리의 의무인지, 또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좋은 삶을 살거나 행복할 수 있는지 등의 질문에 비해 전제하는 바가 적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크라테스의 질문이 아무것도 전제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세 가지를 유념해야 한다.

①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그 어떤 특정한 개별-인격도 겨냥하지 않는 일반적인 물음이다.* 이는 이 질문을 답함에 있어 그 누구에 대해서도—그가 개인으로서 어떤 [유별난] 야심을 가지든 간에—“무언가 유관하거나 유용한” 것이 말해질 수 있다는 [확신을] 전제한다(4). 즉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일상에서 우리가 줄곧 묻는 질문, ‘나 어떡해(what shall I do, 나는 무엇을 할 것이지)’와 차별화된다.

*cf. external reasons와 internal reasons

②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특정한 시점에 닥쳐서가 아니라 전체 삶의 양식에 대해, 그 끝에 이르렀을 때 삶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묻는다. 그는 무엇보다도 행운(fortune, luck)의 위력을 배제하는 “삶의 합리적인 설계(rational design)”를 추구했다(5).

③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그에 답하기 위해 어떤 종류의 고려사항(the kinds of consideration)이 관여돼야 하는지에 침묵한다. 즉,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우리의 희망사항과 독립적으로, 그 질문 자체만으로는 그것이 도덕적인 종류의 고려사항과 관계되어있음을 함의하지 않는다. 어떤 철학자들은 그처럼 도덕적인 것과 도덕과-무관한 것(nonmoral)을 구분하지 않는 “일반적인 또는 무규정적인(indeterminate) 종류의 실천적 질문”을 그 애매성을 이유로 삼가야 한다고 말하겠지만, 그와 같은 구분이 선행돼야만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대답하기를 시도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이다(5). [반드시 도덕의 범주를 중심으로 소크라테스의 질문이 성립한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도덕적 고려사항들은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답하는 데 연관성이 있[을 수 있]는 [그저] 한 가지의 고려사항[일 뿐이다].”(6)

[그런데 ‘도덕적인 고려사항’은 정확히 어떤 고려사항인가? 이를테면] ‘윤리적인 것(the ethical)’과 ‘도덕적인 것(the moral)’의 의미(나아가 그 의미들 간의 차이)를 이해함에 있어, 후자가 근대에 들어 저만의(distinctive) 내용을 표현하게 되었음을 주지해야 한다. “도덕성은 윤리적인 것의 특수한 전개양태(particular development), 근대 서구 문화에서 특별한 중요성을 가지는 그런 전개양태로 이해돼야 한다. 도덕성은 특정한 윤리적 관념(notion)을 다른 개념들보다 특유하게 중시하며, 특히 책무(obligation)에 대한 특별한 개념을 발전시[켰]고, 특유한 전제들을 갖고 있다.”(6) 따라서 도덕성[을 중심으로 한 사고의 틀에 대해] 회의주의적인 거리가 필요하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윤리적인 것’은 당장의 철학적 실천의 탐구 대상 일반을 넓게 지칭하는 반면 ‘도덕적인 것’ 또는 ‘도덕성’은 더 협소한 [사고]체계를 지칭한다. ‘윤리적인 것’의 의미가 모호(vague)하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다. 오히려 ‘도덕성’을 위시하는 체계 쪽이 스스로를 자신이 아닌 것과 구분하기 위해 그와 같은 모호성의 제거를 요구한다. ‘윤리적인 것’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고려사항의 예시로는 크게 네 가지가 있다.

① 첫째는 책무(obligation)의 관념으로, 이를테면 약속을 통해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지우는 책무를 예로 들 수 있다. ② 둘째는 의무(duty)의 관념으로, 의무는 특정한 “역할, 지위, 또는 관계 […] 직업”에 의해 규정된다는 특징을 가진다(7).* 일반적으로 약속에 의해 지워진 책무를 제하면 의무와 책무 일반은 자발적으로(voluntarily)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대표적으로 칸트는 행위자의 의지(will)[가 개입됨] 없이 도덕적인 요구(requirement)가 성립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특정한 심리적 강박, 법적이거나 사회적인 압력만으로 도덕적 요구가 성립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도덕성이라는 특수한 하위체계에서 무엇을 중시하는지 보여줄 뿐이다. 도덕성의 체계 바깥에서는 행위자의 의지와 독립적으로 [규범적인] 요구가 성립할 수 있다.** 요구가 (단순히 이행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행되기 위해 의지적 개입(commitment, 헌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은 근대의 산물, 계약론적이며 특정한 자아관을 전제하는 근대의 산물이다.

*Q. ‘obligation’과 ‘duty’ 사이의 구분에는 어떤 현상적 또는 철학사적 또는 언어적 근거가 있는가?

A. 같은 결의 개념으로, 그저 두 개념이 사용되어왔다는 취지(J씨)

**Q. 도덕의 체계 내부에서도 요구의 존재와 그 내용 자체는 의지와 무관하게 성립하지 않는가? 단지 행위자가 그에 응할 것인가, 아닌가가 의지에 달려있을 뿐. 아니면 윌리엄스도 요구의 이행이 특수하게 도덕적이라고 불릴 수 있으려면 행위자의 자발적인 의지가 개입됐어야 한다는 정도의 주장에서 그치는 것인가?

A. 선의지에서 출발해서 정언명령이 도출이 되기 때문에, 그리고 정언명령이란 자기입법이므로, ‘정당한’ 도덕적 요구는 의지에 기반해야 한다. 사회적인 압력은 정당한 ‘도덕적’ 요구는 아니다(J씨).

***실천적 맥락에서는, 자기 자신에게 규범 지우기(J씨).

의무와 책무를 이루는 행위의 이유는 행위 자체보다 선행하는 기존의 사실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③최선의 결과라는 관념은 행위의 이유가 행위 자체보다 후행한다. 무엇이 최선인가를 계산하는 데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이를테면 공리주의와 무어의 결과주의는 같은 사항을 고려하되, 상이한 사유이다.

넷째, ④ 그를 근거로 행위를 택하거나 택하지 않게 되는 행위의 특징들, 즉 실현될 경우(또는 행위가 그와 같은 특징들로써 기술될 경우) 해당 특징을 담지하는 행위가 윤리와 비로소 유관한 것이 되는 그런 특징들 역시 윤리적인 고려사항이다. 예로는 덕(virtue)이 있다. 덕이란 “행위가 특정한 방식으로 윤리적으로 유관한 종류의 것이라는 이유로 해당 행위를 고르거나 거부하게 만드는 성격의 성향(disposition of character)”으로, 정의상 동경할 만한(admirable) 무엇이다(9). 그렇다고 해서 모든 동경할 만한 성향이 덕인 것은 아니다(e.g. 성적 매력, 절대음감). 나아가 기술—기술을 가진다고 해서 기술자가 기술의 활용을 욕망하도록 동기부여되지는 않는다—과 달리 덕은 “그 자체로, 적절한 맥락 속에서는, 덕스러운 행위자가 무엇을 하고자 원할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9) 즉 “덕은 욕망과 동기부여의 특징적인 패턴들에 관여한다.”(9) 중요한 것은 덕이라 할지라도 잘못 실천될 수 있기에, 이를테면 소크라테스처럼 “개인의 삶 속에서 아무런 단서조항 없이(unqualifiedly, 무조건적으로), 모든 가능한 상황들 하에서 좋은 무언가”를 찾으려는 시도는 단념해야 한다는 사실이다(9).

덕은 물론 숙고의 방식(how one deliberates)에 영향을 미친다. 즉 덕은 덕스러운 행위자로 하여금 바로 그 덕을 이유로 “특정한 범위의 사실들이 [그의] 윤리적 고려사항들이 되도록” 한다(10). 그러나 덕의 구현 자체는 그러한 고려사항이 될 수 없다. 진정 겸허한 사람이라면 겸허하기 위해 겸허한 행동에 임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1인칭의 수행(first-personal exercise)”으로서 덕-쌓기(cultivation)에는 어딘가 수상한 지점이 있게 된다(10). 흥미롭게도 이는 그와 같은 덕-쌓기가 자기 자신의 도야에 집착하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제 행위에 대한 타인의 기술과 평가가 어떠할 것인지에 더 집중하기 때문이다. “윤리적 개념의 중요성은 그것이 그 자체로 1인칭적 숙고의 요소가 되는 데 있을 필요가 없다”(11).

그런데 윤리적이지 않지만 행위[의 규정과 결정]에 관여하는 고려사항도 있는가? 대표적으로는 행위자에게의 이점(advantage), 즉 이기적인(egoistic) 고려사항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조리 있는(intelligible) 대답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에 ‘윤리적’이라는 표현을 붙일 수 있다면, 이기주의 역시 윤리적인 무엇이 될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아무리 모호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우리와 우리의 행위를 다른 사람의 요구, 필요, 권리주장, 욕망, 그리고 일반적으로 생명과 어렵지 않게(understandably) 관계 지우는 것으로서의 윤리적인 것에 대한 개념이해(conception)가 있다.”(12)

*Q. ‘자기 자신의 이익에 대한 윤리’는 정말 형용모순인가? 이를테면 ‘셀프-케어’나 자기연민은—자살과 같은 보다 전형적인 주제에 더해—이기주의에 대한 윌리엄스의 이해에 포섭되기는 하나, 어떤 의미에서는 윤리적인 고려사항인 것으로 보인다.

A. ’you should get enough sleep’에서의 ‘should’가 윤리적 해야 함이 맞는가? 밥을 안쳐야 한다와 다르지 않다(E씨). ⇨ Q. 고대에서는 잘 먹기가 자기배려로서의 윤리 아니었나? 윌리엄스도 근대인이다.

A2. 여기서 말하는 이기주의는 행위를 결정할 적에 윤리적이거나 윤리적이지 않을 수 있는 개개의 이기적인 고려사항이 아니라 철학적 입장(J씨). 타인의 필요와 관계된다는 사항을 자기배려를 배제한다는 뜻으로 너무 강하게 읽으면 안 된다. 

A3. 그러나 문단의 초반에는 ‘고려사항’에 대해 묻는다(J씨).

A4. 13쪽의 첫 문장에서 사익을 윤리적인 것으로부터 배제하는 것 같다. 12쪽에서 윤리적 이기주의를 ‘confusing’한 것으로 말한 데서도 같은 뉘앙스다. [고대인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 (E씨). ⇨ Q. 최초의 직관 정도의 문제인데 내가 질문을 너무 성급하게 제기한 것일 수도 있다(13쪽 두 번째 문장에 윌리엄스는 아직 우리가 일반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이기주의와 윤리성을 구분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물론 이기주의에도 철학적인 판본들이 있어서, 이를테면 ‘모두가 각자의 사익을 추구해야 한다(ought to, 해야 마땅하다)’는 윤리적 이기주의(ethical egoism)와 같은 주장도 가능하다. 그러나 윤리적 이기주의는 사익에 반하는 행위가 이를테면 왜 비합리적인지, 윤리적 고려사항이 왜 사익과 관계되어야 하는지, 그로써 윤리적 고려사항이라는 것이 애초에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한편 모두가 각자의 [사익이 아니라] 이익[이익 일반]을 추구하는 사태가 일어나야 한다’는 판본도 가능하다. 이 경우, 사익에 반해 타인을 돕는 일이 돕는 자에게 이익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이기주의의 판본은 그와 같은 사태가 최선이라는 고려사항과 결합되어 제시되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함이 최대 다수가 제 욕망을 최대치로 실현하는 최선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비록 우리가 윤리적 고려사항과 이기적 고려사항을 대비하는 데서 시작하기는 했지만, [이기주의의 두 번째 판본에서는 두 가지 고려사항이 중첩될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윤리적인 것의 관념(idea)은, 비록 모호할지라도, 어떤 내용을 가지며, 순수하게 형식적인 개념(notion)이 아니다.”(13)* 그렇기 때문에 악의나 불의처럼 ‘반윤리적인(counterethical) 것’과 같은 현상도 있는 것이다.**

*Q. 어떤 의미에서 이 결론이 도출되는가? 윤리적인 것에 대해 말할 때, 그것에 대한 실질적인(=내용 있는) 정의를 함께 제시해야 하기 때문인가?

**Q. 겁에 대한 마지막 문장을 이해하지 못했다.

[윤리적인 고려사항으로서, 단순한 사익을 넘어서는 타인의] 이익이나 필요를 말할 때에 누구까지의 이익을 고려할 것인가도 중요한 윤리학적 문제다. 특히 모든 인간, 심지어는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자들에 대한 “보편적인 염려(universal concern)에 의해서만 만족되는 윤리적 요구들”도 있으며, 도덕성의 체계는 이 염려를 상당히 풍부하게 지니고 있어서, “이러한 보편성으로 특징 지어지지 않으면 그 어떤 염려도 진정으로 도덕적이지 않다”고까지 생각한다(14). 그리하여 도덕성의 체계 내에서는 [비상식적이게도] 가족이나 당장 소속된 공동체에 대한 국부적 충성(local loyalty)이 오히려 보편적인 염려로부터 정당화돼야 한다.

전통적으로 철학은 윤리적인 고려사항과 윤리와-무관한 고려사항의 다양성을 환원주의적으로 제한하고자 시도해왔다. 먼저 다양한 윤리와-무관한 고려사항들을 한 가지 요소로 환원하고자 한 대표적인 시도가 심리적 쾌락주의(psychological hedonism)로, 심리적 쾌락주의는 윤리와 무관한 모든 행위를 쾌락이 추구된 산물로 이해하는 (그릇되거나 아니면 공허한) 입장이다. 칸트는 “도덕적 행위는 독특하게도 심리적 쾌락주의에 포섭되지 않는다”는 (역시나) 그릇된 주장을 펼쳤다. “우리는 윤리와-무관한 동기에는 여러 종들(sorts)이 있으며, 나아가 윤리적 고려사항에 반해 행위하는 데에는 한 가지 이상의 동기가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15)

무엇이 옳은 행위이며 좋은 삶은 어떤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당연한 것으로 차치하고, 다만 “자기중심성과 쾌락의 동기에 반해 그와 같은 것들을 추구하도록 어떻게 동기부여돼야 하는가”만을 물었던 과거에는 상기한 시도가 많이 이루어졌다(16). 그러나 오늘날에는 반대로 다양한 윤리적 고려사항들을 한 가지로 환원 그리고 설명하려는 시도가 훨씬 지배적이다. 이러한 시도의 예로는 의무론과 (최선의 사태를 결과로 산출함이 목적이 돼야 한다는 의미에서) 목적론적인 이론이 있다. 의무론이든, 목적론적인 이론이든 환원주의는 첫째,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데 실패한다. “[현실에서] 우리는 다종의 상이한 윤리적 고려사항들을 활용하며, 그것들은 서로 실질적으로(genuinely) 다르고 […] 이는 우리가 많은 상이한 종교적이고 여타의 사회적인 갈래를 지니는 길고 복잡한 윤리적 전통을 상속 받았기에”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16). 환원주의는 둘째, 윤리적인 것과 관련된 진리(truth)를 밝히는 데도 무능하다. 왜냐하면 그 진리가 반드시, 복합적이기보다 단순한 것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기술도 진리의 발견도 아니라면 환원주의의 핵심은 그것이 우리가 적어도 윤리적인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이라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철학은 윤리학적 이론을 생산하고자 시도하면 안 되며 […] 환원주의적 기획은 아무 정당성도 없고 [단지 그 이유로] 사라져야 한다.”(17)

꼭 윤리 또는 윤리와 무관한 것에 대한 것이 아닐지라도 환원주의 일반에는 “합리성에 대한 가정”, 구체적으로는 “그에 의거한 비교를 가능케 하는 공통의 고려사항이 있지 않은 이상 두 가지 고려사항들은 서로에 맞서 합리적으로 저울질될(weigh) 수 없다”는 가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17). 그러나 [가치론적 통화(axiological currency)가 있어야 한다는] 이 가정에는 아무 근거도 없다. 우리네 경험상 가치론적 통화가 작동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근대의 세계가 “합리성에 대한 합리주의적(rationalistic) 개념이해”를 산출하며, 그와 같은 이해에 대한 충동이 숙고와 실천이성의 관념과 관련해 “모든 결정은 담론으로써 설명될 수 있는 근거들에 기반해야 한다”는 원칙 또는 이상을 부과하기 때문에 그러한 가정이 대두될 뿐이다(18).

다시 소크라테스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그의 질문과 대비되는 것은 단순히 ‘어떡하지(what am I to do, what shall I do)?’, 또는 이보다 사유와 행위 사이에 간극이[=고민할 여유가] 더 확보되는 질문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지(what should I do)’가 있다. 여기서 “‘해야 함(should)’은 다른 방식이 아닌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하는 데 대해 내가 가지는 이유들”을 조명한다(18). 결국 내가 해야 하는 것이란 가장 해야 할 이유가 많은 그것이 된다. 소크라테스의 질문 역시 ‘이유’의 언어로, “삶의 어떤 방식에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가 가장 많은가(how has one most reason to live)?”로 번역이 가능하다(19). 이때도 여전히 특정한 종류의 이유, 이를테면 도덕적인 종류의 이유에 우선성은 없다. 나아가 이때도 여전히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특정한 시점에서의 욕망(want)과 무관한 대답을 요구한다. [반성적이고 일반적인, 즉 철학적인 질문이기 때문에] 누가 묻는지도 무관하다. “이는 우리가 다른 방식이 아닌 특정한 방식으로 [살기로 하는 데] 공통으로 갖는 이유들을 묻는 것처럼 보인다. 좋은 삶의 조건들—어쩌면 인간 존재 자체를 위해 올바른 삶의 조건들을 묻는 것처럼 보인다.”(20, 강조 삭제)

문제는 역시, 이로부터 이기주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 따라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해 소크라테스의 질문 자체는 이기주의를 대답으로 배제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질문이 지니는 결함은 “실천적 생각은 근본적으로 1인칭적(radically first-personal)”임을 간과한다는 점이다(21). 이 책은 단지 반성의 힘만으로 좋은 삶이란 윤리적인 방식으로 살아진 삶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지, 그리고 반성은 어디에까지 이르며, 애초에 왜 [반성이 이와 같은 탐구에 적합한 방법론인지] 묻는다.

“Must any philosophical inquiry into the ethical and into the good life require the value of philosophy itself and of a reflective intellectual stance to be part of the answer?” (21)

2장: 아르키메데스적 점

[그러나 그처럼, 소크라테스의 질문이 지니는 결함이 대변하는 철학의 한계를 지적하기에는] 철학적 정당화 없이는 “윤리적 삶 또는 더 협소하게는 도덕성”이 “상대주의, 무도덕주의(amoralism) 그리고 무질서”에 처해질 것이라는 (철학자들의) 위기의식이 현존한다(23). 도덕을 왜 따라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에게 대응할 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말을 제시한다고 해서 그가 들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달리 말해, 철학적 정당화가 있다는 사실이 무도덕주의자에게, 이를테면 철학을 경멸하는 칼리클레스와 같은 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기나 할까? 철학적 정당화가 힘이 있다는 주장도, 있어야 한다는 주장도 모두 의심스럽다.

윤리 또는 도덕의 철학적 정당화는 그것이 누구에게(to whom), 무엇으로부터(from where, from what), 그리고 무엇에 반해(against what) 겨눠지는지가 명확해야 한다. 마지막 항목과 관련해 윤리적 삶에는 대안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회의주의라는 철학적 문제와 관련해 이를 설명하면, 외부세계가 존재한다는 또는 타인에게도 마음이 있다는 데 대한 회의주의에는 (적어도 멀쩡한 사람을 상대하고 있는 경우) 외부세계 없이 또는 타인의 마음 없이 사는 대안적 삶이 불가능하다는 식의 대응이 가능하지만*, “윤리적 고려사항들은 힘을 가진다(have force)”는 데 대한 회의주의에는 그와 같은 대응을 할 수 없다(24). 즉 둘 사이에는 유비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에 더해, 윤리에 대한 회의주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데 그 자체로 문제적인 것도 없고, 윤리적인 고려사항에 어떤 것이 있는지 예시를 아무리 들어봤자 [어차피 그러한 예시들과 질적으로 다른 고려사항이 있기에] 윤리의 힘에 대한 회의주의자를 논파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이 회의주의자가 반드시 윤리학적 지식의 존재 또는 확보 가능성을 회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윤리적인 고려사항이 [지식 너머의 차원에서까지] 어떤 힘을 가지기는 하는지 회의할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회의주의자가 ‘약속’과 같은 윤리의 어휘를 구사하는 자라면, 그도 윤리의 어휘가 구사되는 세계 내에서 행위를 하기는 해야 하기 때문에 퓌론주의적으로 판단 일체를 중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자기모순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윤리의 어휘를 구사하기 자체를 포기할 수 있음을 조심해야 한다. [이러한 경우에 대응하고자 할 때,] 철학적 정당화의 필요성을 부풀릴 심산으로 이를테면 “윤리적 회의주의가 자연상태”라는 식의 “윤리와-무관한 삶에 유리한 객관적 선제(presumption)”를 활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26).

*Q. 정말 그런가? 통 속의 뇌에 사는 사람도 본인이 현실을 살고 있다고는 생각할 것. 다른 현실일 뿐. 유비가 정말 안 성립하진 않는다(E씨).

A. 윤리적 회의주의의 경우 회의주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이나 윤리와 무관한 삶의 가능성을 공유할 수 있다(J씨).

Q2. 그런 비대칭성으로부터 반박논증의 ‘force’상에서의 차이(외부세계 회의주의는 논파가 되고 윤리 회의주의는 논파가 안 된다는 차이)가 따라나오는가? 물론 주요 논변을 건드리지는 않는다(E씨). ⇨ Q. 실제로 논파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논파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냐 상의 차이가 중요한 것이다.

철학적 정당화가 누구에게 겨눠질 것인가에로 돌아오자. 철학적 정당화의 목표와 내용은 그것이 누구에게 겨눠지느냐, 즉 철학적 정당화에 귀를 기울일 이에게 겨눠지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을 이에게 겨눠지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후자의 경우, 윤리학의 문제는 권력을 동원하는 정치의 문제로 화한다. 한편 만일 (플라톤처럼) 합리성을 갖추고 있다면 윤리의 힘을 믿지 않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할 경우, 전자의 청자를 대상으로 윤리학을 펼치기란 그들이 이미 갖고 있는 성향에 [단지] 이유를 제공해주는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합리적 대화가 가능한 상대자라고 해서 그가 윤리의 힘을 믿는 사람이라는 보장은 없다. 단순히 칼리클레스처럼 오만해서 대화가 가능할 수도, 또는 긴급한 공동의 문제가 있어서 대화가 가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윤리적 의식(ethical consciousness)이 부재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음은 결국 “이는 질문의 1인칭적 형태, 윤리적 고려사항들을 [그가 지니는 “행위, 욕망, 또는 믿음의 최소한의 구조로부터”](from the ground up) 정당화할 수 있느냐는 질문으로 이끈다.”(28)* 만일 대화의 상대자가 이미 윤리적으로 살고 있되, 단지 그와 같은 삶의 방식에 어떤 이유가 있을지 궁금해할 뿐이라면, ‘무엇으로부터(어디서)’가, 즉 그가 갖고 있다고 가정되는 그 최소한의 구조가 무엇인지가 관건이 된다.

*Q. 정초 찾기가 왜 1인칭인가?

A. 각자에게 다 적용되므로(J씨)?

윤리 바깥에서도 합리적으로 살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에, 합리성과 윤리적 의식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아직] 미정이다. [즉 전자를 갖춘다고 해서 후자까지 갖추기가 보장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만일 보장이 된다면, 즉 모든 인간이 합리적 존재인 한에서 윤리의 힘을 믿고 있기도 하다면, “무도덕주의자나 회의주의자마저 그에 개입하지만, 만일 적합하게 끝까지 사유될 경우, 그가 [그것에 개입하면서도 무도덕주의나 회의주의를 믿는다는 것이] 비합리적이거나, 말이 안 되거나(unreasonable), 어쨌든 잘못됐음을 보여줄 무언가”가 필요하다(29). 

철학을 통해 그런 아르키메데스적 점, 곧 윤리의 기초(정초, foundation)를 찾는 데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한편으로 칸트와 같이 “합리적 행위자성에 대한 가장 단순한(minimal) 그리고 가장 추상적인 개념이해”에서 시작할 수 있다(29). 다른 한편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합리적 행위자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보다 풍부한 그리고 실정적인(determinate, 규정성이 많은) 관점”에서 출발할 수도 있다(29).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공통적으로 실천이성에 대한 논증을 구사한다. “합리적으로 행위하는 데 대한 또는 인간으로서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하는 데 대한 우리의 관심”이 행위의 우위를 가름으로써 윤리학적 명제를 정당화한다는 것이다(29). 달리 말해, 두 유형 모두 합리적으로 살고 싶다면 윤리적으로 사는 것이 정당하다는 관점을 공유한다.


3장: 기초(foundation): 웰빙

[2장의 말미에서 관건은 (무도덕주의자나 회의주의자도 포기하지 않을) 합리적인 삶이 윤리적인 삶으로 구성돼있느냐, 전자가 후자를 필요로 하느냐였다. 그러므로 만일 인간이 자신의 에우다이모니아, 즉 웰빙을 추구함이 합리적이라면*, 과연 웰빙에 이르기 위해 윤리가 반드시 준수돼야 하는지가 물어져야 할 것이다. 쉽게 말해, 잘 살려면 꼭 선해야 하는가?]

*Q. 윌리엄스는 인간이 윤리적인 삶을 원한다는 테제보다 합리적으로 살기 원한다는 테제를 그나마 받아들이기 쉬운 것으로 (논증을 덜 요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합리성(rationality)은 정확히 어떤 성질을 지칭하는가? (반드시 이기적이지는 않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

A. 논증을 덜 요한다기보다는 고대 철학자들의 합의된 인간본성(E씨) / 인간이 기계적이 아니라 특정한 규범이나 기준에 따라 산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쉬움. 최대한 중립적으로, 특정한 규범에 따라 [이유가 있음’/‘따를 좋은 이유가 있음]으로 보아야 한다. 고대철학자에게는 인간본성이 합의가 돼서 그 규범[=좋은 이유의 근거]이 저마다의 관점들이 통일이 된 거지. [3인칭적 관점 가능]. 웰빙을 추구하는 데 윤리가 구성적이기에 윤리적으로 살 만한 좋은 이유가 있다는 뜻 (J씨).

Q. 합리성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은 윌리엄스의 논의로부터 배제될 것인가?

A. 배제되지는 않는다. 이 문제 때문에 ‘real interest’ 논의가 나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실천적 추론을 못하는 사람은 인간으로서 기능을 못할 뿐이고, 그 사람들에게조차 합리성은 규범력을 가지는 인간의 본성 (E씨).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두 명의 적을 만난다. 먼저 인간은 제 자연본성상(naturally) 힘과 쾌락을 쫓는다고 믿는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를 약자를 착취하는 도구로 규정한다. 트라시마코스에게 타인[의 이익]을 ([자신의 힘과 쾌락을 위한] 착취 이외의 목적으로) 존중함은 비합리적이다. 둘째, 계약론적으로 윤리를 이해하는 [글라우콘]은 정의를 약자[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고안한] 관습으로 규정한다. 둘 모두에게 정의는 “윤리적 전망과 독립적으로, [그저] 자연본성상 존재하는 이기적 욕구들의 만족을 위한 도구”다(31). [달리 말해, 트라시마코스와 글라우콘 모두 윤리적인 삶의 방식이 합리적이기 위해서는 이기적 필요의 관념을 경유해야 한다고—정의를 준수함으로써 충족되는 이기적 필요가 있어야 한다고—생각한다. 이에 반격하려면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는 윤리적인 삶의 방식이 저마다 (다를 수도 있는) 이기적 필요에 봉사하지 않고도 누구에게나 그 자체로 합리적이라 주장해야 한다.]

그런데 특히 [글라우콘의] 규정을 따를 경우 만일 정의 없이도 충분한 힘과 쾌락을 누릴 수 있는 행위자가 있다면, [즉 도덕의 보호가 불필요한 행위자가 있다면] 그에게만큼은 정의라는 관습의 준수가 비합리적[인 억압]이 될 것이다. 사실 플라톤이 윤리에 대한 회의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역설한 것은 그와 같이 [예외적인 강자를 생각해서였다.] 정리하자면, 플라톤의 입장에서 [정의에 대한 글라우콘의] 계약론적 이해는 윤리의 기초를 행위자의 내부가 아닌 외부에, 이를테면 규칙이나 제도의 형태로 두기 때문에 문제적이다. 윤리의 준수를 비합리적인 [선택]으로 만드는 필요나 영혼의 상태를 지니는 [예외적] 인간의 가능성[, 곧 그에게만큼은 계약에 참여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은 그런 행위자의 존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예외없이] 윤리적 삶을 대답으로 제시하려면, “그렇게 되는 편이 합리적인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31). [즉, 윤리적 삶의 합리성이 특정한 자아에 있거나 없을 수도 있는 우연한 무엇에서가 아니라 모든 자아에 반드시 내재하는 무엇으로부터 기원해야 한다.] 달리 말해, [윤리학과 독립적으로 상정되는 특정한] 인간관—인간적 자아와 그의 필요, 만족[의 체계]에 대한 이해—에 윤리적 고려사항들이 [단지 우연적으로] 부합하는지 묻는 관점*은 [윤리적 삶을 정당화하기에] 부적절하다. 오히려 우리네 자아를 온전히 이해할 경우 정의의 추구가 그에 외재적이지 않고 내재적임이, 즉 자아의 목적 자체에 [필연적으로] 포함돼있음이 드러날 수 있는 관점을 취해야 한다.

[*자아관에 입각하지만 그럼에도 자아 일반을 묻는 관점도 모종의 ‘3인칭적’ 관점. 이 장에서 총 세 가지 관점이 있는 것. 자아외재적, {자아내재적-3인칭적, 자아내재적-1인칭적}.**]

**전자는 실천(practice)에 집중, {후자}는 자아[의 구조]에 집중(J씨)

[종교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윤리적 삶을 정당화해줄 수 있는 그런 자아관을 제공해줄 수 없다.] 조야한(crude) 종교적 윤리학에서는 윤리를 신의 명령으로, 그리하여 준수하면 상이, 위반하면 벌이 주어지는 근거로 이해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는] 세계가 더 이상 그와 같이 운영되고 있지 않음을 안다. 덜 조야한 종교적 윤리학은 상벌과 같은 외적 제재가 아니라 애초에 윤리[에 대한 준수]를 [인간성 자체에] 포함하는 인간관을 내세울 것이다. [이를테면 인간은 신의 모상인데, 신은 윤리적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만일 윤리에 대한 우리의 얼마간 세련되어지는, 또는 성숙해져가는 이해를 얼마나 반영하느냐를 기준으로, 즉 인간의 윤리적 의식을 기준으로 종교적 윤리학을 평가한다면, [종교는 인간의 힘을 초월하는 것으로서의 제 정체성을 상실할 것이다.] 윤리적 의식의 발달과 함께 종교가 붕괴된 [오늘날,]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자에게도 유효할 종교적 질문은 종교를 통해 인간성의 무엇이 표현되어있느냐는 질문에 그친다.

[앞서 정의가, 곧 타인의 이익에 대한 존중이 곧 자신의 이익이 되는 자아관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플라톤은 참된 자아관에 입각할 경우 정의가 그 자체로 추구되기에 합리적인 것임을 보이고자 했다.] 그런데 추구되기에 합리적인 무엇은 “에우다이모니아라는 만족스러운 상태에 기여한다.”(34) 에우다이모니아, 또는 웰빙은 (근대적 관념으로서의 행복(happiness)과 달리) 일시적으로 획득 혹은 상실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웰빙의 개념은 삶 전체의 모습을 특정한 방식으로 평가한다.

웰빙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이해—“영혼의 바람직한 상태”(34)—는 침해될 수 없는 영혼과 그렇지 못한 신체에 대한 그의 독특한 이원론에 기반한다. 하지만 그의 이원론은 [타인의 신체가 얽혀있는 이해관계를 고려해야 한다는] 윤리의 [본원적인] 요구사항에 위반된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합리적 담론으로서] 철학 자체가 덕을 기르고 웰빙을 장려하는 데 기여한다고도 믿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사회적이고 시민적인 삶을 필연적으로 영위하는—영위함이 불가피한 또는 영위해야만 바람직한—육화된 존재로 보았으며, 웰빙을 가능케 하는 데 있어 철학의 힘에 대해 더 겸허*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웰빙은 [철학이 아니더라도] “행위, 욕망과 감정의 내면화된 성향들”로서의 “특정한 성격적 탁월성 혹은 덕”에 의해 도달된다(35).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적 추론의 능력이 [철학을 하지 않아도] 모든 성숙한 인간에게 이미 갖추어져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플라톤은 철학에 의한 정신의 극적인 개조를 꿈꾼다[철학을 해야만 진정한 이성에 도달할 수 있다]. 전자는 현실적인 대신 철학을 무용한 것으로 만들고, 후자는 vice versa (E씨).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덕론이 지니는 골자(main structure)는 그가 살았던 시기의 특수한 문화적 내용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가? [그와는 다른 문화를 사는] 근대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덕론으로부터 모종의 거리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 감각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덕을 이루는 성향들이 퍽 자기중심적(self-concerned, -obsessed, -centered)이라는 데서 기인한다.* 무엇보다도 근대인에게 저항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스러운 행위자가 타인의 인격적 흠결을 너무나 잘 파악할 것인 데다, 그것도 그의 덕을 이유로 또는 덕의 일환으로서 그렇게 타인을 부정적으로 평가할 것이라는 점이다. 근대인은 덕이란 (자의식을 결여했다는 의미에서) 모름지기 순진해야 한다는 생각, 타인에 대한 평가가 과연 완전할 수 있냐는 회의주의**, 혹은 하나의 윤리적 성향과 다른 윤리적 성향이 마치 심리적 특징처럼 충돌할 수 있다는 믿음*** 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Cf. “Their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outlook is formally egoistic, in the sense that they suppose that they have to show to each person that he has good reason to live ethically; and the reason has to appeal to that person in terms of something about himself, how and what he will be if he is a person with that sort of character. But […]”(32)

**이를테면 칸트에게서는 행위의 겉모습이 아니라 동기가 중요한데, 타인의 내면은 알 수 없다. 따라서 겉모습만 보고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기 어렵다. 나아가 중립성(공평무사함, impartiality) 자체가 근대 윤리학에서 너무나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에 애초에 특정한 종류의 자기중심성이 있으면 타인에 대한 도덕적 판단 자격이 박탈된다는 관념이 있다 (J씨).

***Q. 그리하여 겸허해야 한다는 취지인가? 왜 덕의 단일성을 믿지 않으면 [특정한?] 윤리적 성향의 부재를 단순한 개성(peculiarity)으로 이해하게 되는가? 37쪽 첫 번째 문단의 마지막 문장군의 취지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타인의 윤리적 성향을 일화의 문제(subject of anecdote)로 본다는 것은 그에 대한 아무런 가치평가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인가?

A. 일화: ‘내 주변 사람은 그래.’ 일반성을 결여한, 그리하여 예외적일 수 있는 사례. 한 덕과 다른 덕 사이의 분리 가능성 - 모든 윤리적 성향이 서로에게서 따로 떨어질 수 있고 모든 윤리적 성향이 (다른 덕의 에피소드로부터) 따로 떨어질 수 있는 에피소드에 불과 (E씨).

그러나 덕과 같은 윤리적 성향은 타인의 부덕함에 대한 특정한 반응을 구조적으로 함유하는 것이 맞다. 오히려 근대의 도덕성 관념이 타인의 덕스러움 혹은 부덕함에 대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태도의 범위를 현저히 제한한다. 오직 평가와 (불)승인의 유형에 속하는 반응만을 도덕적으로 유효한 반응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는 첫째, 평가자를 [부당하게] 우월한 위치에 두며, 둘째, 도덕적 판단을 마치 이분법적인 것처럼—판단의 대상은 반드시 무죄 혹은 유죄라는 식으로—제시하고, 셋째, 오직 자발적으로(voluntary)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만 평가가 가능하다고 그릇되게 추정한다(suppose). 그 결과 반응에 대한 분류를 넘어 반응 자체에 대해서도 가치평가를 가한다. 반응 가운데서도 가져도 되는(just) 도덕적인 반응과 그렇지 못한 반응이 있는 것이다. 후자에는 불만이나 복수심과 같은 도덕과 무관한(nonmoral) 반응들이 속한다.

이러한 종류의 (타인에 대한) 도덕적 판단 체계는 펠라기우스주의적인 견해에 기반해 있다. [인간(의 행위가) 심지어는 과거나 성격으로부터도 완전하게 자유로우며, 따라서 그에 대한 책임도 완전하게 부과될 수 있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이 완전히 자유롭게 선택해 완전하게 책임질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도덕적으로 유의미한 반응 또는 판단이 가능하며*, [자유로운 선택의 대상이 아닌] 성격이나 성향은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로 미끄러진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하지 않은 것, 온전히 책임 지기 어려운 것에 대해서도 후회하거나 책임을 지고, 그렇게 하는 편이 더 바람직하다.] 

[*애초에 그런 것만 인간의 행위이므로?]

물론 성격이 확실히 자발적으로 형성되는 것인지, 아닌지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승인이나 불승인과 같은 평가적 판단만이 윤리적으로 유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성격을 완전한 자유의지에 따라 정립되는 것으로, 그리하여 실천이성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극적으로] 개선 가능한 것으로 봤을 리는 없다. 결론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윤리에 대한 철학적 탐구는 숙고를 통해 삶을 변화시키는 데 아무 효용이 없다. 누군가에게 (아리스토텔레스가 원하는 방식의) 숙고가 가능하다면, 그런 숙고가 가능한 습관이 이미 형성이 된 덕분일 것[이지 철학적 반성 덕분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덕에 대한 심화된 이해는 숙고[의 내용]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달리 말해, 철학적 반성은 그 자체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원하는 방식의) 숙고를 구성하지 않는다.*]

*부덕한 자에게는 철학이 개선의 효용이 있을 수 없다(E씨).

Q. 일회적 행위와 습관 사이의 관계를 너무 고집스럽게 고수하는 것 같다. 기존의 행위와 다른 행위들을 축적하면 습관도 변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의 개선 가능성에 대해 나는 좀 낙관적인 편이지만......

**cf. 윌리엄스에게는 그와 같은 [malleability]가 있는 새 세대의 재생산의 가능성이 중요할 수 있다(E씨).

Q. 부덕한 사람은 그러면 어쩔 수 없다는 배제의 함의가 윤리학적으로 바람직한지 모르겠다(J씨). 윌리엄스는 이후 정치적 강제를 언급할 뿐 더 나아간 설명을 제공하지는 않는다(E씨).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윤리학적 탐구는 더 이상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처해진 각 인격[의 개별적인 특수성에 입각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철학을 통해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대한 답과 윤리적 고려사항들의 의미가 명확해진다고 해도, 숙고의 개선이 가장 필요한 자—이미 돌이킬 수 없이 나쁜 습관을 가진 자—에게 철학은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처럼 철학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사람, 자신의 덕 이론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에게조차 적용되는 일반적인 진실을 내놓[고자 할]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은 “각자에게 따로 [그 자신의 입장에서] 주어질 수 없으며 […] 오히려 고루 적용되는[, 모두를 위한] 대답이다(cannot be given to each person […] but […] is an answer for each person).”(40, emphasis in the original) [반면 2장에서 플라톤은 이미 윤리의 힘을 믿는 사람에게만 말이 되는, 그리하여 칼리클레스 등에게는 통하지 않는 대답을 내놓아서 회의주의의 벽에 부딪혔다. 애초에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회의주의자가 중요한 논적이 아닌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부덕한 자에 대해 주장하는 바는 그가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필요한(necessary) 성질들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 즉 그가 인간으로서 자신의 잠재력을 충분히 펼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결여는 부덕한 자 자신의 웰빙에 반한다. 부덕한 자는 부덕의 와중에 무엇이 자신에게 진정 이익(interest)이 되는지[관심을 요하는지] 오해하고(misconceive)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행위 당사자가] 생각하는 [자신의] 이익’과 그의 ‘진정한 이익’ 사이의 차이, 즉 자신에게 무엇이 이익이 되는지에 대한 (생각의) 오류를 논함에 있어 애초에 진정한 이익이라는 관념 자체가 수상해 보일 수 있다. 단지 행위자에게 정보가 부족해서, 혹은 그가 추론의 정당한 기준을 혼동해서 일어나는 오류는 진정한 이익이라는 관념에 그다지 문제적이지 않다. 문제는 그의 오류가 숙고의 근원이 되는 욕망과 동기에 영향을 미칠 때, 그리하여 “그가 믿는 것이 합리적인 무언가를 그가 믿지 않을 때” 일어난다(41). [더 살아가는 것이 합리적임을 간과하고] 자살을 시도하는 청소년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이 청소년은 단순히 이런저런 정보의 부족에 처해있거나 추론 과정에서 실수를 범한 것이 아니라, 욕망과 믿음에 [근본적인 왜곡]이 있어 자신의 진정한 이익을 진정한 이익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즉 “무엇이 그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보는 데 대한 무능함이 그 자체로 [무엇이 합리적인가에 대한 오해의] 증상이다.”(42) 물론, 증상의 개선이 정말 당사자에게 이익이 되는지 아닌지는 당사자의 사후적인 인정만으로 확립되지 않는다. [개선과 별도의 요인, 이를테면 그 결과] 때문이 아니라 개선의 과정 자체가 개선을 스스로 정당화하는 경우(self-validating changes, of the brainwashing type) 당사자의 사후적 인정은 이루어진 개선이 정말 그의 진정한 이익에 부합하는지 전혀 보장해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진정한 이익’의 관념을 순전히 주관적이거나 관념적이기만 한(ideological) 것으로 폐기할 수는 없다. 어떤 개선이 정말로 개선된 자의 진정한 이익에 부합하려면, 개선을 통해 그가 원래 겪고 있던 일반적인 무능(general incapacity), 인간이 인간으로서 기능하기 위해 갖출 것이 기대되는 어떤 능력의 부재가 해소돼야만 한다[는 객관적인 규정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시되는 부재는 자신에게 무엇이 이익이 되는지, 곧 무엇이 자신에게 합리적인지 아는 능력의 부재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부덕한 자가 자신의 진정한 이익을 오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사람들이 자신의 진정한 이익을 인지하는 데 실패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는 “오류의 이론”을 이 동반돼야 한다(43).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기능하기 위해 갖춰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목적론적인 이론은 갖고 있었지만, 왜 부덕한 인간은 그렇게 기능하지 못하는지[, 즉 왜 자신에게 무엇이 진정한 이익인지 깨닫지 못하는지,] 그리고 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자에게조차 [덕으로 규정되는] 웰빙이 진정한 이익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근대의 목적론으로 생각할 수 있는 진화생물학 역시 윤리적 삶이 모두의 웰빙을 구성한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한다. 진화생물학은 사실 개인의 웰빙이 아니라 [환경에의] 적합성(fitness)을 [그의 진정한 이익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진화생물학이 윤리학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특정 제도나 행위의 패턴이 인간 사회에 있어 현실적인 선택지가 아님을 제안”해주는 데 그친다(44).

심리학도 윤리적인 삶의 방식이 [인간 일반의] 웰빙에 필수불가결하다는 입증을, 즉 [우리가 원하는] 윤리의 기초를 제공하지 못한다. 인성(personality)을 규정함에 있어 이미 [어떻게 사는 것이 옳다는] 윤리적인 사상이 관여돼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성을 그 어떤 윤리적 관념으로부터도 독립적으로 규정하되, 그 규정이 윤리에 우호적이게 되는 그런 심리학이 과연 가능한지[ 다소 회의적이다.]

일반적으로 심리학은 비뚤어진 성격을 딱히 윤리적일 필요가 없는 어떤 불행(e.g. 외로움) 때문으로 돌린다. 그리하여 윤리적으로 살면 성격이 올곧게 서고[또는 정신이 건강해지고], 성격이 올곧게 서면[정신이 건강하면] 행복할 수 있다는 방식으로 윤리에 대한 심리학적 기초를 세우고자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덕과 무관한 이런저런 삶의 절망과 비윤리적인 삶 사이에는 별다른 상관관계가 없다. 절망하면서도 윤리적으로 살 수 있고, 절망 없이도 비윤리적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부덕한 사람이 단순히 절망적이지 않은 게 아니라 위험할 정도로 잘 살 수도(dangerously flourishing) 있다. 윤리적 삶을 정신건강[상의 효용으로써 정당화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이러한 위험의 가능성에 부딪힌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도, 진화생물학도, 심리학도 저 일반적인 무능이 무엇인지 설명해주는 데 불가능하다(E씨).

나아가 불행의 부재, 또는 행복은 오직 윤리적인 성향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와 무관하되 [행복에 기여하는] 좋은-것(“other goods”)—특히 예술이나 학문과 같은 창조 및 문화의 산물—이 시민적인 덕성과 조화를 이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근대에 와서는 오히려 불행이나 추[한 심리]가 창의성의 일부를 이룬다는 관념이 있다. [미를 가능케 하는 심리와 윤리적 가치가 조화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갈등의 완화가 윤리적 가치의 근원이라는 생각도 비슷한 부조화에 맞닥뜨린다.

*Q. 시민적인 덕성이야말로 인간의 최선의 발달태여서, 그것이 다른 종류의 탁월성과 충돌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정확히 왜 윤리적 종류의 탁월성과 다른 종류의 탁월성 사이의 충돌이 없는가?

A. 인간의 잘-기능함이라는 강력한 목적이고 그를 위해 다양한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충돌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그런 목적론을 믿지 않는다(J씨)**.

[**그 결과 윤리와 무관한 탁월성만으로도 행복을 얻을 수 있지가 않음.]

“윤리적 성향의 형성이 인간에게 자연적인 과정”임을 염두에 둔다면, 심리학 없이도 윤리학적 탐구는 꽤 멀리 나아갈 수 있다(47). 여기서 자연이란 물론 교육, 양육, 문화, 관습과 상충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들 모두가 인간에게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윤리적 고려사항들이 인간의 웰빙[에 포함되어] 있으며, 윤리 바깥에서의 삶이 윤리적인 삶보다 더 자연스럽거나 행복할 것이라 믿을 이유는 적다는 생각 또한 우리들 대부분에게 자연스럽다. 적어도 그런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질문에 윤리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처럼 우리가 이미 임하고 있는 윤리적인 삶은 비판에 전적으로 면역력을 갖지도, 한 가지 양식으로만 영위되지도 않는다. 근대의 윤리적 삶은 [고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다양성, 비일관성, 그리고 자기비판의 도구들” 가운데서 영위된다(48). 그리하여 도덕철학은 그것이 고대에는 수행하지 않았던 역할, 즉 “윤리적으로 사는 상이한 가능성들”을 이해하고 [이들 각각에 가해질 수 있는] 비판에 근거를 제시하는 역할을 떠안게 된다(49).

고대의 사유와 근대의 사유 사이의 차이가 윤리학이라는 기획 자체의 “논리적 모양새(logical shape)”를 어느 정도까지 변경하는가는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다(49). 만약 도덕철학의 목적이 근대에 와서 달라졌다면, 윤리적 가치가 더 이상 특정한 자아의 모습으로부터[—즉 타인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으로 생각하는 자아의 모습으로부터—]기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도덕철학이 떠안게 된 역할의 변화는 고대의 윤리적 사유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라는 근대적 비판과도 관련이 있다. 근대 윤리학[의 근본적인 전제가 되는 논증]은 다음과 같다. “윤리적 동기는 자기중심적인 [동기와] 대조를 이루기 때문에, 윤리적인 것은 의무와 관계해야지,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정한 것처럼 잘 살아진 삶(life of well-being)을 사는 데 관여된 욕망과 관계해선 안 된다.”(49)

그러나 “욕망에 의해 동기부여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쾌락에 향해져 있다”는 근대인의 전제는 틀렸다(49). 욕망이 충족됨으로써 쾌락이 결과적으로 산출될(issue in)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욕망의 목표(타깃, aim)가 언제나 나의 쾌락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아가 윤리적 동기와 쾌락 추구 사이의 고집스러운 구분은 덕스러운 사람이라면 덕을 행하는 데서 쾌락을 찾을 것이라는 [우리네] 상식과 충돌한다.

내 욕망의 목표가 언제나 나의 쾌락이 아닌 이유는 내 욕망이 나와 무관한 사태를 향해, 즉 타인의 이익을 향해 겨눠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염려(self-concern)와 타인에 대한 염려(other-concern) 사이의 구분선은 욕망과 의무 사이의 구분선에 결코 상응하지 않는다.”(50) [그리하여 윤리성의 규정에 욕망의 언어를 끌어온다고 해서 특별히 이기주의의 혐의가 제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질문에는 [답변하려는 자의] 윤리적 성향과 그것이 자기 자신의(own) 웰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자기반성 또는 자기의식 일반이 포함돼있다(“Even if the dispositions are not themselves directed toward the self, it is still his own well-being that the agent in Socratic reflection will be considering.”(57, emphasis added)). [쉽게 말해 고대에 덕스러운 행위자는 무엇이 자신의 웰빙에 기여할 것인가를 잘 알고 그에 따라 실천하는 사람, 결국 자기의 웰빙을 목표 삼아 도모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대 그리스의 윤리는 이기주의의 혐의에 다시금 처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윤리는 윤리적 성향을 [이를테면 윤리적 성향으로부터 독립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자아에 외재적인 것이 아니라] 자아 자체를 실질적으로 구성하는 내용으로 이해한다. 그리하여 내가 내 윤리적 성향이 나 자신의 웰빙에 미치는 영향을 반성할 때에, 나는 내가 이미 갖춘 윤리적 성향에 입각해 반성을 수행하게 된다. 내가 이미 갖춘 윤리적 관점은 내 자아의 내용적 일부이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나의 반성을 관찰한다면, 이 반성은 [단지] 다른 종류의 욕망이나 선호보다 윤리적 성향을 더 중시하는 사람의 반성으로 드러날 것이다.

이때, 성향으로부터의 내부자적(internal) 관점과 [그러한 내부자의] 성향에 대한 외부적(외부자적, outside) 관점은 서로 대립하면서, 윤리적 가치가 자아의 특정한 모습에 놓여있다는 데 대해[—즉 소크라테스적 질문이 저마다에게(to) 각각 윤리적인 대답을 요구하기 위한 조건에 대해—] 상반된 대답을 내놓는다. 전자의 관점에서 무엇이 윤리적으로 가치있는지를 사유한다면, [자아의 일부를 이루는 윤리적] 성향이야말로 [윤리적] 가치의 유일한 근원이라는 생각은 거짓으로 드러난다. [윤리적인 사람이라면] 자아의 성향, 더욱이 자기만의 성향과는 구별되는 “타인의 복지, 정의에 대한 요구 등등” [역시 윤리적으로] 가치있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51). 반면, [윤리적] 성향을 [그것을 갖춘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외부의 시선에서 관찰하면 윤리적 성향이야말로 윤리적 가치의 근원으로 여겨질 것이다. 말하자면 ‘무엇이 저 사람으로 하여금 타인의 복지나 정의를 중시하게 만들까?’를 고민할 때, 그와 같이 윤리적인 관점을 궁극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자아의 일부를 구성하는 윤리적 성향일 것이기 때문이다(“There is a sense in which they[people’s dispositions] are the ultimate supports of ethical value.”(58)). 

자기 성향에 입각해 [1인칭적으로 반성하는] 내부자로서의 시선과 외부로부터 [그와 같은 내부자의 반성을] 관찰하는 시선을 한 사람이 동시에 갖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사실적으로 가정하건대,] 만일 누군가 자신의 성향의 영향을 배제하는 채 [무엇이 자신에게 웰빙을 가져다주는가를 고민하려 한다면], 그처럼 ‘외부자’로서 고민한 결과와 자기 성향에 입각해 내부자로서 고민한 결과가 상충할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윤리적 성향에 입각해 무엇이 나의 웰빙을 가져다줄 것인지 고민한 결과와, 아무 성향을 전제하지 않고 같은 고민을 한 결과가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후자는 윤리적인 관점을 전제하지 않기 때문에, 전자와 달리 반드시 윤리적 성향이 나의 웰빙을 구성한다는 결론을 내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전자와 후자가 충돌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나를 비롯해 인간 모두가 지닌 잠재력의 완전한 발달 자체가 윤리적인 성향을, 뿐만 아니라 윤리적 능력과 타 탁월성들 사이의 조화를 낳기 때문이다. 이미 덕스러운 행위자가 반성하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정확히 말하면 덕스러운 행위자가 자신의 덕의 영향을 배제하는 채로—] 반성하든 결론은 같다. 

[*이를테면 내가 내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과 남이 내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의 차이. 나는 직업적 성공이라는 탁월성을, 남은 윤리적 탁월성을 웰빙의 핵심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내가 생각하는 나의 웰빙과 남이 생각하는 나의 웰빙이 같다. 인간 본성에 대한 특정한 정의가 있으므로. (반면 그 정의를 안 받아들이는 근대인에게는 여전히 이기주의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근대인은 인간의 본성이나 그의 완전한 발달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공유하지 않으며, “윤리적 성향들이 다른 문화적이고 개별-인격적인 열망들과 완전히 조화되리라고 기대할 이유”를 갖지도 않는다(52).* 그 결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없던 갈등, 즉 내부자적 관점과 외부적 관점 사이 충돌이 [상당히 유의미한 가능성으로 부상한다.] “행위자[ 자신]의 관점은 [각각] 인간 본성과 똑같은 정도로 양립 가능한 수많은 관점들 중에서 오직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 이 관점들[이 가치있는 것으로 제시하는 바]는 모두 제 안에서[도] 그리고 다른 문화적 목표들과[도] 갈등할 수 있다는 것”을 [관찰자로서의] 우리도 행위자 자신도 이해하게 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말하자면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나의 관점과 외부의 관점 사이의 조화를 확립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정들은 오늘날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

*“We cannot live with the ancient Greeks or to any substantial degree imagine ourselves doing so. […] This study does not use those methods [of cultural anthropology]. […] But I do not want to deny the otherness of the Greek world.” (Shame and Necessit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 pp. 1f.)

[**요점: 윤리적 의사결정과 결단의 1인칭적 성격을 [본질적으로] ‘일반적인(general)’ 탐구인 도덕철학은 간과하고 만다. 후자로는 전자를 정초 혹은 정당화할 수 없다. 윤리의 힘(force)에 대한 회의주의자를 철학으로 설득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둘 사이의 괴리를 줄여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가정들은 오늘날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4장: 기초: 실천이성

윤리의 정초란, 윤리의 힘에 대한 회의주의자조차 추구함이 합리적이라 믿는 무언가가 윤리적 삶의 방식을 필요로 함을 보여주는 작업이다. 지난 장에서는 누구나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웰빙이 윤리적 삶으로 구성되어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인간 본성에 대한 그의 가정들에 기반해 있으나, 이 가정들은 근대에 들어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기 때문에 웰빙을 통한 윤리의 정초 작업은 실패한다. 본 장에서는 웰빙이 아닌 실천이성을 통해 윤리를 정초하고자 하는 보다 미니멀한 시도를 고찰한다. 예컨대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구체적 맥락 속에 육화된 인간의 본성이 지니는 내용 대신, 합리적 행위자성의 추상적 형식으로부터 그것만으로 윤리적 고려사항들의 힘을 입증하고자 한다.

칸트는 결코 도덕 바깥에서 도덕을 따를 동기나 유인책(inducement)을 찾을 수 없다고 주장했기에, 그가 (윤리성에 대한 한 가지 이해인) 도덕을 무려 정초하고자 했다는 해석이 불가해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칸트는 합리적 행위자성 자체가 (실천이성이 스스로 입법한 법으로서의) 도덕성을—정확히 말하면 [도덕적으로 살라는] 정언명령을—내포한다고(involve) 생각했다.  [합리적 행위자성의 의미를 분석할 경우, 합리적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본 장은 먼저 [칸트적 기획의 핵심을 보존하되] 보다 단순한 논증을 제시하고, 그것이 실패함 역시 보임으로써 왜 칸트가 [부담스러운] 형이상학적 전제들을 추가적으로 도입할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한 뒤, [그와 같은 전제들 없이 칸트의 논증을 재구성한 이후에도 잔존하는 문제점을 지적할 것이다. 이로써 실천이성을 통한 윤리의 정초 역시 궁극적으로는 좌절됨을 보이고자 한다.]

(합리적) 행위자성*은 [개념상] 반드시 첫째, 행위의 (특정한) 산물(outcome)에 대한 욕망(want, desire)을 내포한다. 세계가 특정한 방식으로 변화되었으면 좋겠다는 욕망 없이 어떤 행위에 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에 더해 둘째, 단순히 결과적으로 세계가 그렇게 변화되기만 하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행위자는 그 자신이 제 믿음 및 숙고에 기반한 제 행위를 통해 그와 같은 변화를 산출하기를 욕망한다. 셋째, 행위자는 자신의 행위가 단지 [우연적으로] 세계의 특정한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변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를, 그리하여 행위의 결과가 행위자 자신의 욕망을 직접 표현하기를 욕망한다. 요컨대 [행위자를 비로소 행위자로 만드는] 의도적인 활동(purposive activities)은 상기한 삼중의 욕망을 반드시 내포한다.

*Q. 합리적 행위자성과 행위자성 일반은 동일한가? 둘은 왜 동일하게 취급되는가(e.g. 55쪽 마지막에서 두 번째 문단)?

A. 여기서는 전부 합리적 행위자성으로 이해하면 된다. 비합리적 행위자라면 세 욕망 중 뭔가가 결여돼있겠지.

그런데 상기한 삼중의 욕망은 [네 번째] 욕망을 [함축 또는 동반]하는데, 바로 행위의 결과 산출이 특히 타인에 의해 좌절되지 않기를 바라는 욕망, 곧 자유에 대한 욕망이다. 이때 행위자가 바라는 자유란, 한편으로는 빈곤하지 않고 충분한 양의 욕망을 실현하게 해주는 자유여야 [유의미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행위자는 자신의 자유가 무제한적이기를 바라선 안 된다. 행위자가 속한 세계의 특수성이 그가 해낼 수 있는 바를 [특정한 방식으로] 제한한다는 사실은 애초에 합리적 행위자성이 요구됐던 이유이자, 합리적 행위자성의 (가능)조건, 나아가 근본적으로 어떤 인격적인 삶이 성립하기 위해 꼭 만족돼야 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자유에 대한 제한 일체의 부재는 이상적이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행위뿐만 아니라 인식의 맥락에서도 동일한 욕망의 이론을 세울 수 있다. 인식 주체는 자신의 인식이 무지나 오류에 의해 좌절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무지나 오류를 피하는 자신의 능력이] 무제한적이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며, 바라서도 안 된다. 지식의 유한성은 삶의 조건으로서 이를테면 미래와 같은 것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전지성에 대해 정합적으로(coherently)[, 곧 삶의 조건을 존중하면서] 욕망함이 불가능하다면, 오류불가능성(infallibility)에 대해서도 정합적으로 욕망할 수 없다.*

*전지한 존재에게는 미래라는 카테고리가 의미있게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J씨).

Q. 이 강한 주장들은 이 장, 이 책의 논증을 위해 얼마나 필요한가?

요컨대 윤리학이 의미있게 취급할 수 있는 행위자란 세계의 특정한 모습에 의해 그 자유가 제한되는 “유한한, 육화된, 역사적으로 위치 지어진 행위자”뿐이다(58). 신과 같은 행위자는 윤리학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

다음으로 따져볼 것은 합리적 행위자성 자체가 상술한 자유에 대한 욕망을 내포한다고 해서 반드시 자유가 행위자에게 좋은 것(good)이 되는지의 문제다. 플라톤의 ⟪메논⟫ 이후로, 무엇인가에 대한 욕망은 그 무엇을 좋은 것으로 판단함을 전제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왔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첫째, 무언가가 좋다는 관념은 “[그 좋음이] 한 명 이상의 행위자에 의해 인정될 수 있는 관점”을 도입하기(import) 때문이다(58).* 둘째, 설령 좋음의 의미를 ‘해당 행위자에게 좋음’으로 제한한다 할지라도, 그와 같은 제한적 좋음에 대한 판단조차 “행위자가 당장 지니는 욕망들을 넘어 그의 장기적인 이익과 웰빙에로 향하는 관점을 함축한다.”(59) 욕망의 대상에 대한 특정한 가치판단은 단순히 욕망함 이상의 과정으로서, 추가적인 고려사항들을 관여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비록 가장 중요한 욕망은 한 개일지언정) 욕망이 대개 다수임을 염두에 두면 [더더욱 그렇다]**. 설령 자유에 대한 욕망이 자유를 좋게 판단함을 [사실적으로] 내포하지 않는다고 해도, 내포해야 한다고 반론할 수는 있을 것이다. 좋음에 대한 판단의 [기준이 되어줄] 나의 근본적인 이익 중에 내 자유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자유가 (나의 가치판단과 별도로) 단적으로 좋은(good, period)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자유가 단적으로 좋을 수 있는 것은 내가 합리적 행위자가 되는 일이 단적으로 좋을 때만이지만, 다른 사람이, 심지어는 나 자신조차도 이에 반드시 동의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Q. 꼭 그래야 하나? 어떤 의미에서 꼭 그래야 하는가?

A1. 어느 정도의 객관성은 가져야 한다. 인식적 조건과 관련된 것이지 'good'이 자연적 속성이냐 아니냐와 관련된 형이상학적 논의와는 별개다(E씨).

**Q. 좋음이라는 가치판단을 추가적으로 이끌어낼 판단의 기준이 욕망함 자체와 별도로 확립돼야 하기 때문에?

A1. 이를테면 비합리적 충동(urge)은 내가 원하는 과정이기는 하지만 그게 좋다고 말해지지는 않는다, 좋음을 이야기하려면 장기적 이익 등을 따져야 한다, 이런 쪽(E씨)

***rational agency에게만 good이므로 Good simpliciter가 아니라 conditioned good이다(E씨).

상술한 바는 “합리적 행위의 기본적인 조건과 전제들”이며, 단지 이들만을 이유로 도덕적 커미트먼트가 각 행위자에게 요구되어야만 실천이성을 통한 윤리의 정초가 가능할 것이다(59). 그런 칸트적 기획을 보다 단순화시킨 형태의 논증은 다음과 같다. 우선 “나는 내 기본적인 자유를 원하지 않을 수 없다(necessarily want).”(59) 따라서 “나는 내 자유를 제거할 행위의 경과에 반대해야 한다.”(59) 따라서 “나는 타인에게 나의 기본적 자유를 제거할 권리가 있을 그런 상황 설정(arrangement of things)에 동의할 수 없다.”(59) 반대로 내가 필요로 하는 상황에 대해 반성하면, “나는 내 기본적 자유에 대한 권리(right)를 주장해야 한다”는 사실이 따라나온다(59, emphasis in the original; [이 부분이 문제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하여 “사실상(in effect) 나는 타인에 대하여 그들이 나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규칙을 세워야만 한다.”(59) 나의 이와 같은 권리주장은 “단순히 내가 의도(목적, purpose)를 가진 합리적 행위자이기 때문에” 성립한다(59). 그런데 그렇다면 타인 역시 자신의 합리적 행위자성만을 근거로 같은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그들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그들의 생각 역시 정당하고 적절하다(legitimate and appropriate). 따라서 나 또한 그들의 자유를 좌절시켜선 안 된다.

만일 이 논증이 실패한다면, 나에게 나의 자유가 정당한 권리라면 타인에게도 그의 자유가 정당한 권리일 것이라는 마지막 단계가 아니라—논증의 이 단계는 타당하다—애초에 나의 자유를 나의 권리로 내세우는 단계에 문제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모두가 합리적 행위자라 가정했을 때) 나의 자유에 대한 필요를 이유로 타인이 그를 침해해선 안 된다는 명령(요구, prescription)을 내리는 일이 내게 합리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그 타인이 해당 명령을 자신에게 적용되는 명령, 자신이 따라야만 하는 명령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데—그런 순응이 그에게 꼭 합리적일 필요는 없다는 데—있다. 달리 말해, (모두가 합리적 행위자라 가정했을 때) 내가 내 권리를 내세움이 합리적이라면 타인도 자신의 권리를 내세움이 합리적인 데 불과한 것이지, 이로부터 타인이 내 권리를 지켜줘야 하고 나도 타인의 권리를 지켜줘야 하는 [의무가 생성되지는 않는다. 요컨대 합리적 행위자성의 의미 분석만으로는 자유가 권리가 되지 못하며, (같은 이유로) 자유에 대한 존중이 의무가 되지도 못한다.]

해당 논증은 만일 내가 타인에게 나의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고 명령하지 않을 경우, 타인의 침해를 허락하는 꼴이 되지 않느냐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자유에 대한 나의 필요는, 내가 일관적일(consistent) 경우, 반드시 타인의 침해를 불허하는 법칙(rule) 세우기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어떤 법칙을 세움이 필연적인가? 내가 법칙을 만든다면 당연히 내 자유에 대한 침해를 불허하는 법칙을 만들고, 그를 허락하는 법칙은 만들지 않겠지만, 애초에 내가 꼭 어떤 종류의 법칙을 만들 필요가 있지는 않다. 아무 법칙도 만들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법칙이 있었더라면 금했을 그것을] 허락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덧붙이자면,] 내가 법칙을 만들게 되는 경우 단순히 내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는 법칙 이상으로 나에게 무제한적인 자유를 달라는 법칙을 세우지 않을 이유도 없을 것이다.

해당 논증은 법칙 만들기를 아주 특수한[—그리하여 우리가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바로 타인 역시 (나의 외적인 강제 없이도)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그런 법칙만 법칙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법칙이 꼭 그런 법칙일 필요는 없다. 많은 법칙들이 [이미] 법칙을 내리는 자에 의한 외적인 강제(나 그가 제공하는 여타의 이유)를 제하면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이유가 없는 그런 법칙들이다. [이때 법칙을 내리는 자가 타인으로 하여금 법칙을 받아들이게 하는 이유란, 그가 지닌 특정한 지위나 권력, 즉 이점(advantage)들일 것이다.] 상술한 논증은 이와 같은 이점들이 추상된, 그리하여 “당사자들 사이의 차이(불평등, inequalities)”가 제거된 [순전히] “관념적인 법(notional laws)”에 기반해 있다(63, emphasis in the original). 오직 법이 이렇게 관념적으로 이해될 경우에만 [내 입장에서] “나는 어떤 법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1인칭성의] 질문이 “다른 사람도 받아들이리라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으로서 어떤 법을 내가 만들 수 있을까?”, 나아가 “어떤 법이 있어야 할까?”라는 [3인칭성의] 질문과 동치되는 것이다(63). 그러나 왜 내가 실천적으로 숙고함에 있어 나 자신의 특수성을 추상해야 하는가? 즉 왜 나 자신을 [모두가 동일하게 유력하거나 무력한] 그런 국가의 시민이자 입법자로 생각해야 하는가? 그와 같은 추상의 정당성은 나 자신이 단적으로 합리적 행위자이기만 하고 그 외에는 아무 특수성도 갖지 않을 경우에만(rational agent and no more) 저절로 입증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존재자들이 아니며,] 애초에 공정성(정의, justice)을 중시하는 사람만이 법에 대한 관념적인 이해를, 저마다의 특수성에 대한 추상을 실천할 것이다. 반면 내가 그처럼 도덕적인 관점을 이미 갖추고 있지 않을 경우, 내가 무엇을 할지에 대한 숙고는 내가 실제로 지닌 이점을 배제할 때 (또는 그것을 모를 때) 어떤 규칙을 세워야 할지에 대한 숙고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합리적 행위자성의 본질, 곧 자유에 대한 칸트의 형이상학적 전제들은 바로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기여한다.] 칸트에게 합리적인 행위자란 “구체적이며, 경험적으로 결정된 인격으로부터 구별되는” “시간과 인과 바깥의 ‘예지적’ 자아”이다(64). 이와 같은 특수한 자아관은 칸트가 생각한 자유의 필요조건으로서 따라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가 생각한 자유의 관념은 일반적인 자유의 관념과 상당히 다르다.] 칸트에게는 도덕적인 원칙을 따라 이루어진 행위만이 의지, 곧 실천이성의 발휘이며 자유의 유일하게 진정한 발현이다. 도덕적인 원칙을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닌 그 외의 모든 행위는 이기적 쾌락주의에 따른 것이며, 경향성에 의해 인과적으로 결정된 [부자유스러운] 행위이다. 그러나 윤리를 정초하는 작업의 청중이 될 회의주의자는 합리적 자유(rational freedom)에 대한 이토록 특수한 관념을 [가지지도 않을 것이고, 당연하지만 가질 필요도 없다.] 도덕이 관여된 맥락에서든, 관여되지 않는 맥락에서든 똑같이 유효할 합리적 자유의 관념이 [윤리의 정당성을 내포해야만] 회의주의자에게 반격을 가할 수 있을 테지만, [칸트의 자유 관념은 그런 자유 관념이 아닌 것이다.] 자유의 개념을 경유해 윤리의 힘에 대한 회의주의를 논파하고자 할 경우, 자유를 어떻게 개념화할 것이냐는 문제를 우리는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칸트의 특수한 형이상학적 전제 없이도[, 나아가 규칙 만들기의 필연성을 섣불리 주장함 없이도] 실천이성에 의한 윤리의 정초를 정당화할 수 있는 새 논증이 필요하다. [칸트적 기획의 핵심을 여전히 보존하되 부담스러운 전제들을 떨쳐낸] 가능한 새 논증 하나에 따르면 합리적 행위자는 “특정한 이유에 의거해(따라) 행위”하는(act on reasons) 행위자다(65, emphasis in the original). “그런데 그가 이유에 의거해 행위한다면, 그는 단순히 행위자가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행위자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해 반성해야 하며, 이러한 반성이 그 자신을 여러 행위자 가운데 하나로 보는 [과정]을 내포한다.”(65, emphasis in the original) 이 과정에서 취해지는 관점은 자신을 비롯해 그 누구의 욕망과 이익으로부터도 거리를 두는 공평무사한 관점(standpoint of impartiality)이다. 이렇게 공평무사한 관점을 취할 경우, 결론적으로 “진정 자유롭고 합리적이고자 열망하는 합리적 행위자는 모든 합리적 행위자의 이익을 조화시키는 규칙을 만드는 이로서 자기 자신을 생각함이 적절하다.”(66)

상술한 새 논증에서 공평무사한 관점에로 이르는 합리적 자유의 관념은 [단순히 나의 자율성을 넘어 반성의 자유(reflective freedom)를 추가적으로 함유하는 것으로서,] 칸트에 따르면 참됨을 추구하는 이론적 맥락에서나, 옳음을 추구하는 실천적 맥락에서나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이 자유로 말미암아 이를테면 어떤 증거는 곧바로 어떤 결론의 원인이 되기보다 내가 고려할 만한 대상, “나의 고려대상(a consideration for me)”이 되는 것이다(66, emphasis in the original). 마찬가지로 해당 자유로 말미암아 어떤 욕망은 곧바로 어떤 행위의 원인이 되기보다, 그리하여 행위가 욕망에 의해 부자유스럽게 결정되기보다, 내가 그로부터 거리를 두고 반성할 수 있는 무엇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처럼 나의 욕망과 기획 들로부터 우선 거리를 둔 뒤, 그들을 취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자유롭게 결정하게 된다.]

그러나 [칸트는] 어떤 사실이 참된 사실인가에 대한 숙고(factual deliberation)와 실천적 숙고가 서로 전혀 다른 성격의 것임을 간과하고 있다. 만일 합리적 자유의 의미 자체로부터 공평무사한 관점, 즉 윤리의 관점이 도출될 수 있으려면 실천적 숙고 역시 사실에 대한 숙고처럼 순전히 3인칭적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천적 숙고는 1인칭적이며, 그것도 근본적으로(radically) 그렇다”(67). [그리하여 내가 실천적 숙고를 행함에 있어 나의 욕망으로부터 거리를 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우선 사실에 대한 숙고는 세계가 어떠한지에 대한 것이지, 나에 대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 나 자신에 대한 사실을 숙고하는 경우, 또는 나 자신[의 관점]이 세계가 어떠한지에 대한 증거의 발원지인 경우에조차 (사실적) 숙고의 참된 대답은 비인칭적이다(impersonal). ‘나의 대답은 무엇이어야 할까?’와 ‘어떤 대답이 참일까?’ 가 결과적으로 서로 동일한 것을 묻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건대 “실천적 숙고는 모든 경우에서 1인칭적이며”, 숙고의 주체는 단순한 “혹자(아무나, anyone)”로 대체 불가능하다(68, emphasis in the original). 숙고되는 행위는 나의 행위일 것이며, 이는 “내가 경험적으로 원인일 그런 세계의 변화”가 관건임을 뜻하기 때문이다(68). 그러므로 나의 실천적 숙고는 타인의 숙고를 참고할 필요도 없고, 애초에 모두의 숙고를 조화시키고자 할 필요도 없다.* “즉, [나는 내가 무엇을 할지 숙고함에 있어] 공평함(equality)의 관점에서 규칙을 만드는 일에 커밋할(commit) 필요가 없다.”(69) 사실적 숙고에서 공평무사함이 가능했던 것은 해당 숙고가 반성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을 향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실천적 숙고에서도 그것이 반성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즉 [당장의 사정으로부터 특정한 의미에서] 거리를 둔다는 이유만으로 정의를 추구할 동기가 갖춰지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나의 반성이 나의 욕망에 대한 추상을 의미한다면, 욕망을 상실한 내가 왜 특정한 욕망의 실현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지도 불분명하다. 반성과 [구체적 규정성으로부터의] 단절(detachment)은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internal reasons론 참고할 것(cf. Jonathan Dancy, Practical Reality,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뿐만 아니라 칸트가 생각한 방식대로 공평무사해진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이익을 존중하는 삶을 살 만큼의 정체성을 보유할 수 있는지”도 의심스럽다(69). “도덕성이 가능하기는 하다면, [도덕성의 발현 이후에] 내가 될 수 있는 그런 특정한 누군가가 남기는 하는가(If morality is possible at all, does it leave anyone in particular for me to be)?”(69-70). “정의(공평무사함, impartiality)와 개인적인 만족 및 목표들 사이의 관계”라는 삶의 [본질적인] 문제는 도덕성의 관점 하에서 어떻게 다뤄질 것인가? 적어도 이 장에서 확실한 것은 “합리적 숙고만으로부터 공평무사한 관점에 이르는 길은 없다”는 것이다(70).


5장: 윤리(학) 이론의 스타일들

공평무사함(impartiality)의 관점은 윤리적 고려사항 자체의 합리성을 도출하는 데뿐만 아니라, 특정한 윤리학적 개념이해(conceptions)를 옹호하는 데도 이용된다. 윤리(학) 이론(ethical theory)이란, 윤리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데 동의하는 행위자가 어떻게 사고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론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윤리(학) 이론은 “윤리적 사고(thought)와 실천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론적 설명”으로, “기본적인 윤리적 믿음과 원칙의 정확성(correctness)에 대한 일반적인 시험(general test)”[이 가능하며, 우리가 그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실정적인(positive) 이론과, 그런 시험이 있을 수 없음을 함축하는 부정적인(negative) 이론으로 나뉜다(72).

윤리(학) 이론을 특별히 상술한 대로 정의한 이유는 윤리(학) 이론과 메타윤리(학) 이론 사이의 [역사적인] 구분과 유관하다. 전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해 주장하고, 후자는 그와 같은 주장의 지위(이를테면 인식론적 지위)를 따진다. 이 두 이론이 서로 별개이며 분리 가능하다는 믿음, 곧 한편에서의 입장이 다른 한편에서의 입장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믿음 배후에는 언어로써 말해지는 것과 언어라는 수단 자체 사이의 구분이 있다. 메타윤리학이란 “윤리적 담론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에 대한 탐구”라는 입장에 따르면 전자가 윤리학의 권역, 후자가 메타윤리학의 권역이 된다(72, 밑줄은 나의 것). 이 구분은 윤리학과 메타윤리학 사이 분리(와는 별도의 구분이었음에도 그와 같은 분리)를 고무했다(encourage).

애초에 철학은 윤리학적 주장을 해서는 안 되고, 오직 메타윤리학적 주장에만 임해야 한다는 사고 역시 분리에 영향을 미쳤다. 지적인 분석(intellectual analysis)을 철학의 본령으로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윤리적인 주장은 지적인 분석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관점에서는 철학이 무엇이 올바른 삶의 방식인지를 규명하는 데 아무 기여도 하지 못할 것이다. [다행히] 오늘날에는 윤리학적 입장과 메타윤리학적 입장이 서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받아들여져 있다. 즉, 윤리적 사고의 정당성(acceptability)과 정합성(coherence)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는 입장이 윤리적 사고가 무엇인지, 그리하여 윤리적 사고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입장과 상호영향의 관계에 있다는 생각이 공유돼있다.

마지막으로 부정적 윤리 이론과, 윤리적 사고를 시험[하는 장치가] 있을 수 있는지의 여부를 정해놓지 않는(leave open) 이론은 서로 별개의 입장이다. 전자는 실정적 윤리 이론과 마찬가지로 “철학이 […] 윤리적으로(in ethics) 어떻게 사고해야 할지 결정할 수 있다”고 믿으며, 단지 [철학이 그 결정을 해내지 못하므로] 우리는 윤리학을 수행할 수 없다고 결론 짓는다는 데서만 차이가 있다(we cannot really think much at all in ethics*). [이에 반해 윌리엄스는 후자에, “철학적 윤리학에 대한 회의주의”에 개입한다(74). 윤리적 맥락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에 대해] 우리는 아예 사고를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이 그에 도움을 주지 못할 뿐이다. 윤리(학) 이론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든, 실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철학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있다.]

*Q. 윤리학을 수행할 수 없음을 넘어, 윤리적 사고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자의적이라는 입장이기도 한가? 이 문장을 정확히 어떻게 번역 및 이해해야 하는가?

A0. 일단 여기서 ‘윤리학’은 특정한 역사적 전통 말고 윤리적 사실과 대상들에 대한 학 일반.

A1. 윤리적 맥락에서 사고가 결정 메커니즘이 못 된다는 주장이 아니라 (그건 너무 강하고) 윤리‘학’이 안 된다?

A2. 아닐 수 있다. 윤리적 맥락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시험[하는 기준]이 없다는 주장은 무엇이 옭고 그른지 사고할 수 없다는 뜻이므로, 윤리적 사고와 윤리학적 사고는 여기서 딱히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윤리학을 할 수 없다’와 ‘윤리적으로 사고할 수 없다’가 다르지 않을 수 있다(E씨).

A3. 철학으로 윤리학을 못하면 윤리학은 아예 불가능하기에, 즉 무엇이 윤리적인지 알아내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부정적 윤리이론가들은) 윤리적 사고 자체를 불가능한 것으로 본다는 해석이 맞는 것 같다. 그들은 철학이 못해내면 윤리에 대해 사고할 길이 아예 막혀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적 윤리이론의 급진적 버전이 윤리적 입장취함을 [사고를 거치지 않고] “simply consist[ing] of choosing one and sticking to it”으로 보는 거고, 윌리엄스의 반대 논증은 윤리에 대해 사고할 길이 철학 외에도 있다는 것이 된다(74).

실정적인 윤리(학) 이론을 분류하는 한 가지 유용한 방식은 계약론적 스타일과 공리주의적 스타일을 구분하는 것이다(contractual/utilitarian). 계약론적 스타일의 이론은 (T. M. Scanlon의 규정에 따르면) “알아야 할 것을 모두 아는(informed), 강제 당하지 않은(unforced) [상태에서 이루어진] 일반적인(general) 합의(agreement)”를 도덕적 사실 또는 도덕적 사고의 내용으로 간주하며, 그러한 합의가 무엇을 허락하거나 불허하는가를 따진다(75). 그리하여 행위자가 도덕적으로 처신할 주된 동기는 “다른 사람들이 합리적으로는 거부할 수 없을 근거들에 기반해 자신의 행위를 그들에게 정당화할 수 있고자 하는 욕망”이 된다(75).* 반면 공리주의적 스타일의 이론은 개인의 복지(복리, 웰빙, welfare)를 기본적인 도덕적 사실 또는 도덕적 사고의 내용으로 간주한다. 복지의 수준이 어떤 단위에서 평가되어야 할지—[개별] 행위, 규칙이나 제도 등—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지만, 공통적으로 유관한 개인들의 복지를 총합함으로써(aggregate) 도덕적 결론을 도출하기를 원한다.

*Q. 윌리엄스는 계약론적 스타일을 이미 윤리적 고려사항의 힘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임할 수 있을 만한 사고 스타일로 규정하지만, 오히려 계약론자들은 윤리적 고려사항의 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이와 같은 계약에 참여할 의사가 있으리라는 식으로 제 주장의 파급력을 더 크게 평가할 것 같다.

A. 그렇지는 않다. 4장, 64쪽에 보면 롤즈의 관점도 실천이성을 통한 윤리 정초를 못한다고 돼있다. 칸트에게 왜 우리가 꼭 규칙 만드는 방식으로 가야 하냐, 제기했던 비판이 여기서는 왜 그런 합의에 참여해야 되냐, 합리성 자체로부터 합의에 누구나 참여해야 함이 따라나오지 않는다는 비판으로 변용된다(E씨).

계약론적 스타일과 공리주의적 스타일의 이론 사이 첫 번째 차이는 “도덕성의 유권자(constituency)”가 누구인지, 즉 누가 무엇이 도덕적인지를 결정하는지에 놓여있다(75). 계약론적 스타일의 이론의 경우, 행위를 정당화하고자 시도할 만한 상대자, 즉 (성인이고 인간인) 도덕적 행위자들이 일차적인 유권자가 되며, [아이나 동물의 복지가 이어서 이차적으로] 고려된다. 중요한 것은 행위자들이 “도덕적 사고의 주체이자 [동시에] 객체로서” 동등한(equal) 관계에 있는 것이다(76). 반면 공리주의적 스타일의 이론의 경우, 쾌고를 느낄 줄 아는 모든 생명체(creature)가 일차적 유권자가 된다. 즉 선호나 욕망을 가지고, 그 좌절로부터 고통을 느낄 줄 안다면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일차적인 지위를 누리는 것이다. 이에 더해 유권자 사이의 격차(disparity), 정확히 말해 도덕의 동기로서 자애로 똘똘 뭉친 도덕적 행위자와 그의 도덕성으로부터 수혜를 입는 [객체] 사이 격차가 중요해지며, 이는 공리주의의 웰페어리즘적 성격에서 기인한다.

나아가 공리주의적 스타일의 이론은 “궁극적으로는 사태에 윤리적 가치를 위치시키는” 결과주의로서의 성격도 지니기 때문에, “행위자성은 오직 부차적으로만” 중요하다(76). 중요한 것은 행위자가 바람직한 사태의 원인이 되는 것이지, 누가 그 원인인지는 중한 차이를 빚어내지 않는다. 달리 말해 최대의 복지가 결과적으로 산출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누가 행위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로부터 기인하는 두 가지 함축은] 첫째, 공리주의적이지 않은 관점에서는 나의 문제가 아닐 문제도 나의 문제가 될 수 있으며 둘째, 소위 유권자층이 넓기 때문에 공리주의적이지 않은 관점에서는 누구의 문제도 아닐 문제도 누군가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계약론적 스타일 이론과의 또 다른 결정적 차이가 드러나는데, 공리주의 하에서는 도덕적 행위자에게 세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요구가 한없이 이어지며, 자신에게 가해지는 요구와 타인에게 가해지는 요구 사이에도 경계가 없다. 그리하여 공리주의적 이론들은 어떻게 이 요구에 [납득할 수 있을 만한] 한계를 설정할 수 있을지에 골몰한다. 예를 들어 [자기 자신의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거나 자기 아이에게 사랑을 더 쏟아도 공리 최대화에 어긋나지 않을 수 있다는 식이다.] 그러나 계약론적 이론가들은 애초에 내 시간이나 내 아이의 소중함 같은 것은 공리주의자들이 [이론의 미세한 조정을 통해] ‘되돌려줘야’ 할 무엇이 아니라고 불평할 것이다. 이를테면 롤즈의 것과 같은 계약론적 이론은 행위자에게 요구되는 커미트먼트에 [처음부터] 한계를 지정한다.

롤즈에게 공정한 시스템이란 “당사자들(parties)이, 자신들에게 개인적으로(personally) 어떤 이익이 돌아올지 모르는 채로도 동의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정의된다(78). 그리하여 공정한 시스템이란 자신의 사회적 지위, 개인적 취향 또는 관심에 대한 무지, 곧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에서의 저마다의 사익에 의거한 선택(self-interested choice)으로 결정된다. 공리주의 이론과 달리 도덕적 행위자의 이타성이나 자애에 기대지 않는 것이다. 

원초적 입장에서 내려지는 두 가지 결론은 첫째, 모든 사람은 타인의 자유(liberty)와 양립 가능한 한에서 최대의 자유를 누릴 동등한 권리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불평등은 (a) 최소 수혜자가 최대의 수혜(이익, benefit)를 누리게끔 (b) 수혜를 획득할 기회가 공정하고 평등하게 주어지는 가운데서만 성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a)와 관련해, 롤즈는 이 결정권자들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가능성이 어떤 확률로 주어질지 모르고, 최소의 이익(benefit) 이상의 이익은 어떤 것일지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으며, 최소 수혜자의 입장이 지나치게 불리해질 경우 (본인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위험에 맞닥뜨릴 것이라 생각하리라고 [전제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 것인지 따져봐야 할 것이다.]

이에 따라 롤즈의 이론은 한편으로 그 부재 또는 부정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근본적으로 좋은-것들(fundamental goods)을 설정하게 된다. 예를 들어 노예제도는 특정한 확률을 계산한 결과로서가 아니라, [애초에 그와 같은 것이 합리적으로는 합의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잘못됐다는 식이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원초적 입장에 놓인 행위자들이 정말 확률에 대한 아무 고려 없이 결정을 내리리라는 보장은 없다. 예를 들어 본인이 노예가 될 확률이 무척 낮고, 노예제로 인한 이익이 매우 크게 여겨질 경우 이 행위자들이 [일종의 도박]을 걸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는 것이다.

롤즈의 이론은 다른 한편으로, (당사자들이 자신의 선호를 모르기 때문에) 복지를 좋은-것의 [본질]로, [복지라는 것의 분배를 말하자면 도덕의 최우선 관심사로] 이해하지 않는다. 대신 롤즈는 “자유와 기회, 소득과 부, 그리고 자기존중의 기반들”이라는 일차적으로 좋은-것(primary goods)의 목록을 제시한다(80). 달리 말해, “공평무사하게 납득 가능한(impartially acceptable)” 일차적으로 좋은-것(혹은 다른 가능한 판본에서는 일차적으로 좋은-원칙*)이라는 개념이 도입되는 이유는, 결정의 당사자들이 어떤 상황에서 본인에게 어떤 만족이 돌아올지, 즉 본인의 선호나 욕망에 기반해 [선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택하기를 거부하기(reluctant) 때문이다(81). [선호나 욕망 때문에 이차적으로 좋은-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좋은-것이 관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무엇이 얼마나 일차적으로 좋을 것인지의 판단에 있어 사회들 간의 차이가 간과돼있을 뿐만 아니라, 저 목록이 오직 “무지의 선택적인(selective) 조건들 하에서 행해지는 합리적 선택의 장치(machinery)”로부터 과연 도출되는지 의심스럽다(80).**

*John Harsanyi는 이에 따라 공리주의를 계약론적 방법론으로써 도덕의 원칙으로 도출한다.

**Q. 애초에 현행적 선호라는 범주에 대한 아무 고려 없이 무엇이 좋은-것일지(설령 그것이 모두에게 좋은-것일지라도) 알 수는 없을 것 같다.

A. 윌리엄스도 동의할 것이다. 애초에 구체적 상황을 추상하면 안 된다는 비판이라, 사회 간의 차이 추상과도 유관하다(J씨).

반면 공리주의는 복지 또는 사람들의 이익이라는 관념으로부터 사고를 전개한다. 이를 최대화하고자 하는 “공리주의적 자애에는 그 어떤 특정한 애착(attachement)도 관여돼있지 않다”(81). R. M. Hare는 이와 같이 “[모두의 또는 타인의] 만족을 욕망하는 공평무사한 태도”를 “상상적 동일시”[의 작용을 통해 성립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Hare는 도덕적 판단의 본성이란 규범처방적(prescriptive)인 것이며, 그렇게 처방되는 규범은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마땅한) 것으로 이해[하는 메타윤리학적 관점에서] 출발한다. 이 규범은 판단 행위자의 욕망이나 선호를 표현하지만, 보편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에 특별하게 ‘도덕적’이다.

도덕적 판단의 방법은 그리하여 일종의 역할-바꾸기 시험(role-reversal test), “내가 남들의 입장에 있었더라면 무엇을 원하거나 선호할 것인지 사고하는” 것이 된다(82). 이로써 나는 “유사한 상황 하에서는 누구나 유사한 방식으로 행위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82) 물론 역할-바꾸기란 윤리적 사고의 기본적인 구성항목(item)이며, 칸트의 정언명령도 역할-바꾸기의 한 판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Hare 식 역할-바꾸기 해석의 특수성이란 그러한 역할-바꿔봄을 통해 본인이 현재(now) 실제로(현행적으로, actually) [규범의 처방에로 이어질] 선호를 획득하게 돼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유사한 상황에 놓일 타인의 처지와 선호를 이해하기만 하고 마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윤리적 근거도 미리 들여옴 없이, 해당 상황에 놓였더라면 누.구.나. 1인칭적 숙고를 거쳐 공유할 선호와 합리적 요구사항들이 관건이다. 이러한 이상적인 반성의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저마다의 숙고 결론을] 더해내는(additive) 동일시 그 자체뿐이다. 동일시 이후 이 이상적인 반성주체는 각 숙고의 힘을 서로 비교하는 공리주의적 사고에 돌입한다.

Hare의 이론은 구조상 ‘이상적 관찰자 이론(Ideal Observer theory)’의 한 판본이다. 이상적 관찰자 이론은 “한 명의 전지적인, 공평무사한 그리고 자애로운 관찰자”를 설정한다(83). “모두의 선호들을 획득하고 총합”하는 그가 과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가 곧 특정한 도덕적 결론을 결정하는 시험이 된다(83, 밑줄은 나의 것).

그런데 Hare는 자신의 이론이 과연 역할-바꾸기 시험을 거친 이후에도 본인에게조차 불리할 [비도덕적] 결과를 받아들여버릴 광신도(fanatic)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을지 초기에 고민했다. 유대인의 선호를 [내면화한] 이후에도 반유대주의를 택하고 마는 사람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추후] Hare는 이상적인 사고를 거칠 경우, 비도덕적인 선호들이 그 과정에서 떨어져나가리라 자신하게 되었다. 그는 “윤리학을 수행함에 있어 합리적 논증의 힘”을 상당히 높이 샀으며, 애초에 광신도의 사례가 중요하게 취급된 이유도 윤리학적 논증의 성공적인 변호에 대한 기준이 상당히 [완벽주의적이었기 때문이었다.](84) 합리적 논증으로써 논파가 불가능하다고 해서 아예 비합리적이 될 수 없는 것[, 그리하여 합리적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그에게 윤리 이론이란 [이런저런 비도덕적 결론이 도출될 가능성으로부터] 면역되어있는 정도에 따라 그 파괴력이 결정되는 일종의 “공격 무기(offensive weapons)”이다(85). 파괴력이 낮은 무기는 높은 무기에 의해 대체되어 [폐기된다]. 윤리학적 논증의 변호에 대한 Hare의 이와 같은 이해는 “오직(strictly) 도덕적 언어(words)의 의미로부터 공리주의가 따라나온다는” 믿음에서 기인한다(85). 그러나 도덕적 언어의 본성이 그와 같은 것이 아닐 수 있을 뿐 아니라, 그와 같은 것이 맞다고 해도 규범의 처방과 보편성을 Hare의 식대로 이해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네 일상을 돌이켜본다면, 역할을 서로 바꿔보는 과정에서 사적인 취향에 따른 고려 도덕적 이상에 따른 고려는 구분될 수 있다. 이에 반해 공리주의적 사고의 특수성은 욕망, 열망, 이념이나 신념, 이익 모두를 강도차만 있고 동질적인 선호 일반에로 환원 또는 동화시키는 것이다. 동화의 결과 우리 스스로가 공리를 계산할 때조차 우리들 자신의 신념이 덜 고려되고 말며,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이념은 지나치게 많이 고려될 가능성이 생긴다. 이는 애초에 공리 계산에 들어가기 부적합한, 계산에 영향을 주면 안 되는 변수들(e.g. 인종차별주의자의 선호)이 도덕적 고려사항으로 개입되어버리는 [부조리를 낳는다.] 계산의 결과가 비윤리적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설령 결론이 윤리적이더라도 과정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공리주의는 (다른 이론이었더라면 그런 방식으로 부딪히지 않았을,) ‘반사회적인’ 선호를 어떻게 규정하고 배제해야 할 것인지의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한편] Hare의 이론에서 도덕적 행위자는 이상적인 반성에 돌입함으로써 본인의 선호를 교정하게 되는데, 그처럼 지혜롭게(신중하게, prudentially) 도달된 선호가 본인의 현행적인 선호와 반드시 상응하지 않을 수 있다. [즉 행위자가 (오해/몰이해가 관여됐을 수 있는) 제 당장의 선호로부터 소외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교정 또는 이상화의 과정에서 당사자 자신의 선호조차 시간 단위로 분할되어 이를테면 미래의 나의 선호는 타인의 선호처럼 취급된다. 나아가 모두의 선호를 자기의 것으로 [소화해낸] 말하자면 ‘세계-행위자(World Agent)’의 [내면은 얼마나 모순과 상충으로 가득할 것이며,] 그의 선호는 얼마나 (지혜롭기보다) 기이할(bizzare) 것인가? 서로 다른 사람들의 선호를 한 사람의 선호로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며(unintelligible), 그의 이론에 따른 도덕적 판단의 결과가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기 이전에 Hare는 윤리적 세계의 [작동방식이나 구성요소, 구조를] “선호들의 바다”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88).

*그리하여 제도의 대상자들이 어떤 몰이해에 빠져있을 경우, 그들의 현행적인 선호가 아닌 ‘그들이 사정을 더 잘 이해했더라면 가졌을 선호’를 고려하는 공리주의에 입각해 결정된 공적 제도는 불만족스럽게 여겨질 것이다. 

이상화에 따른 [실제의 소외]는 앞서 설명된 환원의 과정과도 유관하다. 사람들은 본인의 이익을 잘못 생각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화가 언제 적절할(appropriate) 것인지를 생각함에 있어 문제시되는 것은 도덕적 행위자가 타인의 선호를 잘 교정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타인이 그와 같은 교정을 인정하지(recognize) 않을 경우 어디까지 교정을 밀어붙일 권리가 주어지느냐다. 이 경우 정치의 의미와, 단순히 선호의 만족을 최대화하는 것이 목표여서 이상화가 장기적으로 그에 얼마나 기여할 것인지를 문제시하는 경우 정치의 의미는 상이할 것이다.*

*전자는 장기, 단기와 독립적으로 이상적인 반성 주체의 결론을 다른 사람에게 관철해도 되냐 아니냐의 문제고, 후자는 장기로 가면 행위자들이 현실에서도 이상적인 선호를 가지리란 기대를 가지는 측면이 있다. 이상적이지 못해 그냥 관철하는 것과 장기의 이익을 위해 관철하는 것은 서로 다른 정치(E씨).

“[선호의] 이상화는 역할-바꾸기의 과정 자체와도 애매한 관계를 맺는다.”(89) 한편으로 역할 바꾸기를 통해 기존의 나는 통째로 제거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타인이 자신의 선호를 오해할 수 있기 때문에, 이상적 행위자는 역할 바꾸기를 통해 실은 그들의 현행적인 선호와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선호를 온정주의적으로(paternalistically) 교정하게 된다. [결국 똑똑한 나의 똑똑한 선호만이 남는 것이다.]

타인의 선호에 대한 공감적인 동일시 자체가 문제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한 동일시는 “윤리적 경험의 기본이다.”(90) 그러나 이 과정을 세계-행위자의 모델에 입각해 이해함은 [정리하자면 크게 세 가지 이유에서] 잘못되었다. 첫째, 내가 특정 상황에서 갖게 될 선호와 타인이 특정 상황에서 갖게 될 선호는 [당연히] 다른 것이며, 둘을 혼동함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역할 바꾸기란 “총체적 몰입(total immersion)”과는 달라야 하는 것이다(91).] 둘째, Hare는 내가 특정 상황에서 갖게 될 선호를 당장(now) 같은 강도로 갖지 않는 이상 내가 특정 상황에서 해당 선호를 같은 강도로 가질지 알 수 없다는 [요상한] 인식론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내 집에 불이 났을 경우를 가정했을 때 내가 가질 선호의 강도와 실제로 내 집이 불타고 있을 때 내가 가질 선호의 강도는 같지 않을 것이며, 둘이 같은 것이 합리적이지도 않은데 말이다.* 셋째, 당장 내가 특정 상황에서 해당 선호를 갖고 있으며 계산 과정에서 그를 적절하게 고려할 줄 알더라도, [즉 특정한 앎에 이르는 합리성을 갖추고 있을지라도] 그로부터 인간적이고 도덕적인 결론이 나올지는 미지수다. 가학적인 사람이라면 고통의 상황에서 타인이 갖게 될 선호가 무엇인지 알고, 본인도 같은 상황에 놓였더라면 고통을 거부할 것이며, 당장도 그와 같은 마음을 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인을 위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오히려 타인의 고통을 완전하게 이해하기 때문에 가학을 택하는 사람이다.

*Q. 90쪽의 세 번째 문단을 이해하지 못했다.

A. 실제로 일어날 확률이 0에 가까운 가설적 상황은 당연하지만 무척 많을 것이고(e.g. 내가 돌고래가 되는 상황, 내가 당신이 되는 상황), 어차피 애초에 Hare는 가설적 상황이 실제로 일어날 확률은 [선호 결정에] 고려하지 않고 있다. 문제는 그처럼 불가능한 상황에서 가질 선호의 강도라는 게 개념적으로 무엇인지도 불확실하고 어떨지 알기도 어렵다(E씨).


6장: 이론과 편견

요컨대 윤리 바깥의 영역에서, 혹은 윤리 내부의 영역에서 출발해서도 도덕과 관련된 단어의 의미를 통해 윤리이론을 산출하고자 하는 노력은 실패한다. 그러나 윤리이론은 어딘가에서는 시작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믿고, 느끼고, 당연시 여기는지; 우리가 의무를 대면하고 책임을 알아차리는 방식; 죄의식과 수치심의 감정들”과 같은 윤리적 체험(ethical experience) 자체가 유일하게 남은 시작점일 테다(93). 그러나 “윤리적 삶의 현상학[…]은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은] 윤리 이론을 산출할 확률이 낮다.”(93) 윤리 이론은 어떤 시험을 마련하는 데 집중하기에, 윤리적 체험의 특정한 부분만을 시작점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 윤리 이론은 윤리적 체험 또는 믿음을 “명제들의 구조물”로 생각한다(93). 이 명제들의 구조물은 “최초의(initial, 이론화 이전의) 윤리적 믿음들”, 곧 추상적인 윤리적 진실(truth)을 꿰뚫어보는 능력으로서의 직관(intuition)으로부터 출발해 직관을 설명하거나 비판하는 데로 이른다(93).

그러나 직관을 윤리 이론의 방법론으로 사용하는 데에는 전제가 있다. 바로 윤리적 진실에 대한 이해가 수학적으로나 다른 방식으로 필연적으로 참인 명제에 대한 이해와 상당히 유사하다는 생각이다. 이와 같은 직관 모델은 역사적으로 숱한 비판을 받아왔다. 첫째, 직관은 “영원한 진실이 어떻게 실천적인 고려사항을 마련해줄 수 있는지 설명하는 데 실패하며, 영원한 진실을 필연적인 것에로 동화시키는 데서도 틀렸다. […] 무엇보다도, 능력(faculty)으로서의 직관에 대한 호소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했다.”(94) 윤리에서의 참이 만약 수학적 참과 동형이라면, 문화적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이란 말인가?

이처럼 능력으로서의 직관은 윤리이론에서 [쓸모가 없음]이 밝혀졌지만, 가설적이고 일반적인 윤리적 질문에 대한 “즉각적인(spontaneous, 절로 형성되는) 신념, 적당히(moderately) 반성적이지만 아직 이론화되지는 않은” 답변으로서의 직관들은 여전히 윤리학에서 중요하다(95). 이러한 직관들은 특정한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가 어떤 윤리적 개념을 적용하는 데 더 기꺼운지를 알려준다. 이와 같은 윤리적 직관의 관념은 무엇이 말해질 수 있고 말해질 수 없는지에 대한 언어적 직관[의 관념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다.] 촘스키는 언어에서의 직관론이 결국 모든 언어를 관통하는 보편적 문법을 지시하게 된다고까지 주장한다. 윤리의 권역에서 그런 직관을 활용하고자 할 때는 “덕이나 행위의 종류에 대한 실질적 용어들(substantive terms)”이 특정한 상황에 적용되기에 적합한가 아닌가의 문제가 대두된다(95). 직관이 유효하게 활용되려면 “어려운 사례들에 대한 논쟁(disputes)을 가능케 해주는, 핵심적인 또는 중심적인 사례들에 대한 공유된 이해가 있어야 한다.”(96) [이 공유된 이해가 언어학에서의 보편적 문법과 유비를 이룰 것이다.] 당면한 상황이 그와 같은 핵심 사례들과 얼마나 유사한지를 결정해주는 합리적인 기준 역시 요구된다. 하지만 “실질적인 윤리적 개념의 레퍼토리는 문화 간에 다르며, 시간에 따라 변화하고, 비판에 열려 있다.”(96) 이러한 혐의를 피하고 직관을 계속 활용하고자 한다면 “순전히 국부적(local)이지 않[게] 선호되는 윤리적 범주가 있다는 주장”이 [추가적으로] 필요하다(96). 그 원천이 신의 계시이든, 인간의 본성이든, 전승이든 간에 말이다.

하지만 새로운 사례와 관련한 윤리적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게 해주는 능력[=언어적 직관과 유비적인 윤리적 직관]이 우리에게 있다고 해서, 그 능력이 반드시 특정한 원칙에 기반해 발효되는지, 그리고 그 원칙이 모호하지 않은 언어로 단언할 수 있는, [즉 합리적인] 기술로 풀어서 말해질 수 있는지는 자명하지 않다. 달리 말해,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공유하는 직관적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 능력의 기저에 명확한 담론적[=명제화 가능한] 규칙이 있으리라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97) 그 능력을 우리가 설명하고자 시도할 때 역시, 어떤 명제화된 규칙에 호소할 필요는 없다.

나아가 직관들이 서로 충돌하는 사례를 생각하면, 윤리적 직관과 언어적 직관 사이에 차이가 있음이 두드러진다. 언어적 직관에 대해서는 [그를 통해] 갈등을 해소해야 한다는 요구가 성립하지 않는다. 반면 윤리적 직관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이 윤리적인 갈등을 해소해주기를 기대하며, 한 개의 직관이 더 납득 가능하다는 데 대한 이유 또한 제공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윤리 이론이 과연 그와 같은 권위를 갖출 수 있을까?

롤즈는 직관과 이론이 서로 조화되도록 각각을 조정하는 반성적 평형의 방법론을 제시한다. 그러나 반성적 평형이 [윤리학에] 적합한 방법론이기 위해서는 굉장히 야심찬 가정들이 들어맞아야 한다. 이를테면 사람들이 세계에 대한 상이한 윤리적 이해를 내세우기보다 합의에 이르기로 결심해야 하고, 그 합의가 [특별히] 명제화된 원칙에로 이르러야 한다. 이는 사람들이 어떤 행동과 믿음을 영위하는지에 대한 가정들로, 일부는 사실적으로 가능하고, 일부는 이상적이다. 그런데 이 가정들이 그 어떤 사회에서도 [보편적으로] 적용될 것이라는 롤즈의 생각은 [상당히 안일하다.] 꼭 합의를 목표로 하는 토의(consensual discussion)이 전사회적인 결정을 내림에 있어 권위 있고 평화를 가져다주는 갈등 해소 혹은 가치 대변의 방식일 필요도 없고, 그런 토의가 실현 가능한지도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롤즈는 토의의 결론이 명제화된 원칙이어야 한다는 요구뿐 아니라, 원칙[에 따른 갈등 해소의 집행] 역시 논증의 형태로 개괄될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를 추가적으로 내세운다. 이 두 번째 요구가 결국 윤리 이론을 산출할 동기가 되는 것이다. 윤리 이론은 그리하여 다양한 갈등이 한 개의 일반적인 절차(procedure)로써 해결되기를 기대하며, 이성 자체가 이와 같은 기대를 근거 지운다고 믿는다[=이성이 그 기대를 근거 없지 않은 것으로 보장해준다고 믿는다]. 그러한 믿음 뒤에는 “사회가 투명해야(transparent) 한다는 열망”, 정확히 말해 “사회의 윤리적 제도가 그 작동을 오해하는 공동체 구성원에 의존해 작동해서는 안 된다”는 열망이 자리한다(101). 투명성을 향한 열망의 예로, 막시즘은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계급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허위 의식을 타파하고자 한다. 투명성을 향한 열망은 오해가 왜 비롯하는지 등을 둘러싼 비판(critique)을 고무한다. 하지만 오해를 타파하고자 하는 열망이 반드시 윤리적 믿음이나 관련된 원칙이 명시적으로 진술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설령 롤즈의 가정이 모두 옳고, 그것이 현실성을 갖추게 된다 할지라도, 애초에 반성적 평형의 한 축을 이루는 직관이 누구의 것이냐는 질문이 남는다. ‘우리 사회’의 직관에서 출발할 때, 우리 사회란 대체 무엇인가? 도덕을 결정할 권리가 누구에게 있느냐고 물을 때, 도덕적 행위자 아무나(any moral agent)라고 답한다면 계약론은 칸트의 보편주의적 염려(universalistic concern)를 공유하게 될 것이다. [물론] 보편주의적 염려가 계약론에 아무 [이론적] 위협도 가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첫째, 그 경우 국부적 우리(local we)의 직관에 의지하는 것이 부적절해지며 둘째, [단지 국부적일 뿐인] 우리가 생각하기에 윤리 이론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직관 역시 신뢰도를 잃는다. 한편] 각 행위자가 저마다 지니는 차이를 전부 소거한 뒤 단지 계약에 참여함이 바람직할, 그저 합리적이기만 한 행위자가 대체 어떤 규칙을 원하거나 거부할 것인지 알 근거는 없다. “합리적 행위자 자체(as such)가 거부해야만 하는 무엇에 대한 개념적 이해(conception)[…]는 매우 불확정적이다(indeterminate).”(103) 자유의 [의미는] 신체의 구성, 감정, 삶의 형태상의 차이에 따라 상이할 것이다. “각 집단의 윤리적 삶의 내용을 결정함에 있어 계약론의 자유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가정들이 얼마나 적절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애초에 잘못된 질문[=합리성만으로 도출될 보편적 원칙에 대한 물음]이 던져지고 있는 것이다(104).

헤겔 역시 칸트의 도덕성 개념이 지닌 추상성을 비판하며 “지역마다의 생활 방식(local folkways)에 표현되어있는 구체적으로 규정된 윤리적 실존,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특정한 방식으로 말이 되는 삶의 형식”으로서의 인륜성을 내세운 바 있다(104). [헤겔의 정신을 따라]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보편적인 프로그램이 어떻게 적용될 것인가”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경험된 삶의 형식이 어떻게 확장될 것인가”다(104). [전자를 추구하는] 계약론은 계약에 참여하는 인원의 범위가 크든, 작든 어차피 문제적이며, “윤리를 이해하는 기본적 방법을 제공할 수 없다.”(104) 너무 많은 인원을 규제하고자 한다면 합의할 수 있을 만한 원칙을 충분히 많이 찾아내지 못할 것이고, 너무 적은 인원만을 계약에 참여시킨다면 [그렇게 말하자면 국부화하는 것]이 어떤 조건 하에서 적절하느냐는 어려운 질문에 답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계약론과 달리 공리주의는 [국부적 집단의] 직관을 어떻게 확장할 것인가의 문제, 곧 어떤 누구(까지)의 직관에 의존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에 부딪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계약론에 아무 직관도 전제되어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계약론은 첫째, 공평무사성 그리고 둘째, 단순성의 직관에 의존한다. 먼저 Sidgwick에 따르면, “우주[…]의 관점에서 볼 경우* 그 어떤 한 개인에게의 좋음도 그 어떤 다른 개인의 좋음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는 원칙”이 자명하며, “합리적 존재로서 나는 내 노력에 의해 달성 가능한 한에서는 단지 좋음의 특정한 부분이 아니라 좋음 일반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것(aim at good generally)” 역시 자명하다(105). 이와 같은 공평무사성의 직관에 “이외에는 기본적인 윤리적 고려사항이 더 없다”는 단순성의 직관을 더하면 공리주의의 입장이 정리된다(105).

*Q. 그러나 왜 윤리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내가 꼭 우주의 관점을 취해야 하는가? 애초에 내가 우주의 관점에서 봄이 가능하기는 한가?

그러나 설명이 경제적이라는 의미에서 단순해야 한다고 해서 [수적으로] 최소일 필요는 없다. 경험주의가 마음(mind)에 (이를테면 그것은 단지 백지라는 식으로) 최소 개수의 규정성을 부여해온 것이 오히려 [부담스러운 이론적 선택이었듯], 공리주의 역시 그것의 기반이 되는 원칙이 수적으로 최소라고 해서 딱히 유리할 것은 없다. 애초에 단순성이 윤리 이론의 미덕인지 여부는 “윤리 이론이 무엇을 위함인가”에 달려있다(106). 이에 Sidgwick은 윤리 이론이란 “특정한 원칙에 의거해 인간 활동과 관련된 상식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 것”이라 답한다(106). 그러나 공리주의 윤리 이론과 도덕적 상식 사이의 관계에는 의문스러운 지점이 있다. Sidgwick, 나아가 Hare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공리와 무관하게 가치있다고 직관하는 바들—“정의, 진실 말하기, 절로 나는 자연스러운 애정(spontaneous affection), 친구에 대한 의리(loyalty), 내 자식[만]을 위한 특별한 염려”(107)—역시 공리주의에 입각해 평가하는 간접적 공리주의자들이다. 그러나 간접적 공리주의에서조차 상술한 성향들은 여전히 도구적인(instrumental) 가치만을 가진다. 반면 이 성향들은 단순히 복리를 최대화하는 사태를 불러일으키는 수단으로서 체험되지도 않고, 그렇게 체험되어서도 안 된다. 이 성향들이 공리주의가 희망하는 대로 효과를 일으키기 위해서도 그렇다.

[간접적 공리주의의 기저에는 공리와 무관하게 유효한] 성향을 실제로 지니고 그로부터 실천하는 주체와, 성향의 바깥에서 공리주의적 의식을 가지고 이론을 설립하는 주체 사이의 불편한(uneasy) 구분이 자리잡고 있다. 이 구분에 따른다면, 공리주의적 의식의 결론이 부분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는 것이 최선일 가능성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계약론이 중시하는 사회적 투명성[=제도의 작동 메커니즘이 작동의 주체 혹은 제도의 구성원에게 오해되지 않는 성질]은 공리주의자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Hare의 경우 이론화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사이에 사회적 지위상의 구분 대신 시간적인 구분을 도입한다. 한 명의 개인에게 이론적으로 반성하는 시간과 그에 따라 실천하는 시간이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심어린 커미트먼트가 그에 이질적인 반성과 교대될 수 있다는 가정은 상당히 인공적이며, 커미트먼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반성에 대한 의지적 망각이 요구된다는 [점도 부조리하다.] 애초에 잠시 본인의 실천적 삶을 떠나 우주의 관점에서 (정당화를 위해) 자신의 모든 성향을 관찰하는, 그리고 관찰을 마치면 다시 실천적 삶에로 되돌아오는 그림 자체가 문제적이다. 이론화의 과정 역시 실천적 삶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이론가로서의 반성적 행위자는 그가 검토하는 삶과 인격(character)으로부터 스스로를 독립시킬 수 있다는 플라톤적 가정”을 포함한다(110). 하지만 [독립된 반성 주체에 의해 기존의] 자신에게 국부적으로 익숙한(locally familiar) 관점이 과연 암묵적으로 당연시되지 않을 수 있을까? [이처럼 전적인 독립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독립하지 않음이 오히려 진정한 반성을 위해 요구되는 것처럼 보인다.] “매일매일의 성향에서 주어지는 종류의, 세계의 도덕적 모양새에 대한 감각” 없이 반성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근거 없[기 때문이]다(110).

*Q. 내가 생각하기에 윌리엄스는 반성하는 자의 시간성을 지나치게 우스꽝스럽게 표현함으로써 오류를 범하고 있다. 헤어의 글이 어떤지야 읽어봐야겠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무반성적으로 이를테면 어떤 습관에 의거해 윤리적 삶을 영위하는 시간과 그 삶에 대해 반성적으로 검토하는 시간을 나눈다고 말했을 때 실제로 살아내는 그림은 윌리엄스가 그린 것과 같은 일정표를 갖고 있지 않다. 20시부터 20시 30분까지는 무반성적으로 기존의 윤리적 성향에 몰입하되 30분부터는 칼 같이 그 성향의 영향력을 취소하는 식으로 윤리적 반성에 임할 행위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윌리엄스의 비판이 유효해지는 지점은 반성의 시간성보다 ‘전적인 독립에 의거한 반성’과 ‘전적인 몰두에 의거한 무반성적 실천’의 구분, 그리고 둘 사이의 단절적인 교대에 있다. (윌리엄스가 아무런 종류의 독립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와 같은 독립은 반성 일반의 가능조건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떤 압력에 의해 이와 같은 이론적 구조물이 생겨난 것일까? 공리주의가 그리는 그림은 애초에 왜 매력적일 수 있는가? 우선 철저한 객관성을 갖추어야만 세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고려할 수 있다는 형이상학적 동기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설령 저 객관성이 학문 일반에는 적합한 야심이라 해도, “우리의 윤리적 의식의 기반이 되어줄 매력적이거나 적절한 자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111) 이는 부분적으로 실천적 이성과 이론적 이성 사이의 차이와 유관하다. 학문이 이해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딱히 특별한 지위를 점하고 있지 않다. “반면 윤리적 사유의 목표는 우리의 세계가 될, 우리가 그 안에서 사회적인, 문화적인, 그리고 인격적인(personal) 삶을 가질 그런 세계를 건설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111) 영원의 상 아래서 윤리를 이해함은 [윤리적 사유의 목표에 비추어보았을 때] 그저 [부적합한(inadequate)] 것이다.

형이상학적 동기 외에도, 윤리를 특별히 이론의 형태로 체계화하고자 하는 충동 자체가 윤리적 사유 일반의 특징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물론 소크라테스의 질문을 윤리학의 출발점으로 삼은 이상, 반성을 윤리적 사유[에 핵심적인 것으로 생각함]은 탐구의 현 시점에서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반성이 이론이나 철학만의 전유물인 것은 아니다[=반성이 꼭 이론화하는 반성일 필요는 없다]. 이론을 거부한다고 해서, 반성이 전부 결여된 편견에 머무르겠다는 선택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지적인 행위자에게, 또는 철학에 있어 이론 아니면 편견만이 가능한 모든 선택지인 것은 아니다.”(112)

이론에 특유한 반성을 낳는 것은, 단순히 현재의 도덕적 실천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 이상으로—그와 같은 작업은 이론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다—그에 정당성을 부여하거나 박탈할 이유(justificatory reason)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다.] 그리하여 혹자는 합리성 또는 이성 자체가 이론을 요구한다고 반박할 수 있다. 특정한 실천을 옹호하거나 비판할 수 있게 해주는 이유가 필요한 이상, 당연히 이론이 설립되어야 한다는 식이다. 그런데 특정한 이유를 대는, 혹은 특정한 방식으로 이유를 대는 실천(reason-giving practice, e.g. 임신중단과 관련된 논쟁에서 태아와 영아 사이의 개념적 구분을 이유로 활용하기)에 대해서도 [왜 그런 실천에 임하는지 그] 이유를 물을 수 있음을 생각해보자. 이러한 물음이 선형적으로 계속된다면, 이제는 수틀린 토대주의로밖에 응수할 수 없을 것이다.

선형적 모델을 버리고서도 그 어떤 실천이든 어떤 종류의 (정당화 관련) 이유는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사실 그렇게까지 어려운(까다로운, demanding) 요구가 아니다. 단지 그 이유가 실천 밖에 있는 사람에게든, 안에 있는 우리에게든 실천의 정당성을 충분히 제공해주지 못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실천 자체와 너무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탓에, 그 실천에 의해 제공되는 이유가 그 실천을 옹호할 이유보다 더 강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론 혹은 이론적 개념은 매일매일의 믿음에 비해 특권적인 권위를 누리기는커녕, 그것이 대체하고자 하는 [생활세계적인] 구분보다도 더 자의적(arbitrary)일 수 있다. “그것이 대체할 혹은 정당화할 것으로 기대되는(supposed to) 매일매일의 구분들, 그리고 우리가 영위하는 데 그것이 도울 것으로 기대되는 삶에 대한 감각을 지시하는 일 외에 이론적 개념의 약점을 볼 수 있는 길이 있을까?”(115)

합리성이 (정당화 관련 이유를 열망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윤리이론을 요구할 수는 없을까? 어떤 비도덕적인 편견에 대해, 그것이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잘못됐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부터 살펴보자.] 이때의 비합리성은 논리적 비일관성이 아니다. 말도 안 되는 편견을 내세우면서도 두루 일관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설령 일관성 외에 다른 요소로 합리성을 정의한다 할지라도,] 그것의 부재가 과연 이론으로써 고쳐치는 것인지 고려해야 한다. (도식적이고, 내용[의 다양성]을 줄이는 데 혈안이며, 여러 이유를 한꺼번에 대변하는 데 골몰하는) 철학적 이론으로서는 고칠 수 없는 이성 사용의 결함이 관여되어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쉽게 말해(basically) 반성적 비판(reflective criticism)은 윤리 이론이 고무하는 방향과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116) “이제 사실 우리의 주된 문제는 우리에게 윤리적 관념이 지나치게 많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적게 있다는 데 있으며, 우리는 될 수 있는 한 많은 윤리적 관념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117)

사실 편견이라는 표현의 의미, 그리고 편견과 이론 사이의 관계는 애매하다. 혹자는 휴머니즘 자체가 편견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휴머니즘은 그 자체로는 인간이 비인간보다 가치있거나 중요하다는 주장을 포함하지 않는다. 즉 휴머니즘의 종-주의(speciesism)와 인종주의 또는 성차별주의 사이의 작동방식은 다르다. 비인간에 대한 윤리적 고려조차 결국에는 우리의 (자기)이해에 근거한 것이기에, 공리주의에서 주창하는 [비인간적인(dehumanized)] 이상적 관찰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주장은 인간의 관점에 근거 지워져야 하며, [어차피] 그 누구의 관점도 아닌 관점으로부터는 파생될 수 없다.”(119)*

*Q. 이를테면 특정 동물로부터 세계를 보고자 하는 관점도 (우주의 관점만큼이나) 불가능할까?


7장: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

최근의 철학은 사실과 가치 사이의 관계, ‘is’와 ‘ought’ 사이의 관계—곧 가치, 세계인식, 자유의 문제—를 단어의 정의와 관련된 언어적 문제로 치환해 해결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문제적이다. ‘자연주의의 오류(fallacy)’라는 관념부터 논하기 시작하자.

Moore는 좋음을 비자연적인 속성으로 규정하면서, 좋음을 정의 가능한 무엇으로 볼 경우 ‘자연주의의 오류(naturalistic fallacy)’를 범하게 된다고 처음 주장했다. 그러나 표현 자체부터 잘못됐다. 문제시되는 오류(error)가 [특별히] 논리적 추론에서의 실수(fallacy)인지도 불명확하고, ‘자연주의’라는 표현 자체는 상당히 유용한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철저히 무용하거나 유해하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단지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며, 신이나 다른 초월적 권위를 지시함 없이 세속적으로 윤리를 이해해야 한다는 식의 넓은 의미에서의 자연주의는 무해할 뿐더러 특별히 ‘자연주의의 오류’를 범하고 있지도 않다. 심지어 Moore가 말한 ‘자연주의의 오류’를 범하는 모두가 그런 의미에서 자연주의자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좋음을 신의 명령 또는 의지로 정의하는 반자연주의자들이야말로 가장 현저하게 ‘자연주의의 오류’를 범한다.

만일 ‘자연주의의 오류’가 심각한 결함이라면, 우리가 피해야 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가? Moore가 배제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자연주의의 방식대로 좋음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좋음에 대한 정의 일반이다. 또 ‘자연주의의 오류’를 도입할 경우, 좋음에 대한 정의 일반이 배제되는 데 더해 평가적인 용어와 비평가적인(nonevaluative) 용어가 구분되는 효과가 나타난다. ‘자연주의의 오류’는 “전적으로 비평가적인 전제들로부터 평가적인 결론을 연역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금지한다.”(122) ‘ought’을 ‘is’로부터 도출할 수 없다는 흄의 주장과 [맞닿아있는 것이다.] 물론 ‘ought’과 관련된 금지와 좋음 [일반]과 관련된 금지 사이의 관계가 무엇인지 논하려면 더 많은 이론적인 작업이 요구될 테지만, 일반적으로 [언어적 전회는] 좋음을 보다 기본적인 가치-계급인 ‘ought’의 일종으로 환원하는 전략을 취한다.

Hare의 처방주의(규정주의, prescriptivism)은 ‘ought’을 ‘is’로부터 도출할 수 없음을 핵심적으로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ought’이 포함된 문장은 “모든 유사한 상황에 처한 모든 행위자에게 적용되는 명령(imperatives)을 내포하는 보편적인 표현”이다(124). 처방하는 문장은 단순히 기술하는 문장이 수행할 수 없는 것—“사람들로 하여금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하라고 말하기”(124)—을 수행한다. 평가적인 것 일반은 처방적인 것에로 환원되어, “모든 평가는 행위와 연결되어야 한다.”(124) 하지만 정말로 모든 평가가 관련된 행위에 대한 권고나 명령이 되는가? 미학적인 평가에서는 일단 절대 그렇지 않다. 인격의 윤리적 좋음에 (대한 평가에) 논의를 국한시킨다 할지라도, 좋은 사람이란 결국 우리 [모두]가 따라하도록 권고되는 사람이라는 식의 이해는 상당히 협소해 보인다.

이에 Hare는 특정한 방식대로 대상을 평가해놓고, 그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 평가가 진정성을 잃는다고(insincere) 응수할 것이다. 그런데 이때 관여되는 평가란 대상이 [단지] 그 대상으로서 가지는 이점(merit)에 대한 평가다. 문제는 설령 그 대상이 그 대상으로서 갖는 이점에 입각해[서는] 좋게 평가되었다 할지라도, 완전히 다른 그리고 완전히 말이 되는 이유로 그 대상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좋은 평가가 꼭 [결과적인] 선호와 같을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본다면, 어떤 육상 선수 A에 대해 그는 좋은 선수라고 평가했다고 해서, 내가 최대한 그처럼 달리지 않는다고 내 평가가 진정성을 잃는 것은 아니다. 나는 취미로 달릴 뿐이기 때문이며, 나의 선수가-아님은 A의 좋음과는 전적으로 이질적이지만 나에게 유효한 행위의 이유다. 윤리의 권역으로 논의를 좁혀, 상당히 외향적이고 크고 작은 정이 많은 B에 대해 B는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했다고 해서, 내가 최대한 그처럼 사람들과 지내지 않는다고 내 평가가 진정성을 잃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를테면 단지 말수가 적고 사회적 상호작용보다 내면의 심화나 명상적 실천에 더 관심을 가지는 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명상적 성향은 B의 좋음과는 전적으로 이질적이지만 나에게 유효한 행위의 이유다. 

물론 ‘무엇을 해야 하는가(should)?’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할 때 질문의 전제[e.g. 내가 처한 상황의 객관적인 특징들]로부터 그 대답이 논리적으로 연역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실천적 추론의 과정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가장 중시하는지에 대한 고민, 자신의 성향에 대한 인지가 [추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 다음에도 특정한 행동이 바로 논리적으로 연역되지는 않는데, 이 공간이 바로 아크라시아가 발생하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적이고 논리적이기만 한 분석으로 윤리의 문제에 응수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언어적 전회는 “윤리적 삶에 어떤 무지막지하게 단순한 모델을 부과(impose)한다는” 점에서 가장 문제적이다(127). 그 결과 다양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우리네 윤리적 삶은 집요하게 기형화된다(persistent deformation).

이는 우리가 윤리의 문제에 응수함에 있어 언어에 무관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언어에만 집중하는 기획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리라는 주장이다. 애초에 (윤리의 문제에 응수하기 위해) 어떤 언어 표현을 [선택해] 분석해야 할지의 문제에 명확한 대답을 내놓기란 상당히 어렵다. 윤리이론가들이 분석하기를 선호하는 ‘Good’, ‘right’, ‘ought’ 등은 사실 윤리 바깥의 권역에서도 사용되는 말들이다. 이처럼 지나치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데는 환원주의적인 동기가 작동하고 있다. 즉, “더 구체적인 윤리적 개념들(conceptions) 속에 이러한 관념들(notions)이 포함되어있다는 환원주의적 믿음”이 동기가 되는 것이다(128). 하지만 환원주의의 폐단은 첫째, “굉장히 일반적인 윤리적 표현에 의지하는 사회는 보다 구체적인 표현들에 더 많은 무게를 싣는 사회와 다른 종류의 사회라는 점”이 간과된다는 것이며, 둘째, 이 용어들의 [선택적] 탐구와 함께 이미 윤리적인 선제적 가정들(presuppositions)이 도입된다는 것이다(128).

물론 is-ought 구분과 ‘자연주의의 오류’가 던지는 유의미한 철학적 질문도 있다. 이는 바로 우리의 가치들이 세계 속에 있는 무엇이 아니어서, 세계에 대해 순전히 기술하기만 할 경우 가치에 대한 서술은 포함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그리하여 “우리의 가치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주변세계에 [단지] 부과되었거나 투사된 것”이라는 생각과 관련되어 있다(128).* 하지만 세계가 [그 자체로] 우리로 하여금 특정한 가치를 더 선호하도록 강제하지 않는다는 것은 고민거리가 아니라 해방감의 원천일 수도 있다.**

*cf. Tegtmeyer (2007), ‘Sünde und Erlösung’ 속 근대 과학주의와 니힐리즘 분석

**내가 생각하기로는, 애초에 아무 가치도 포함하고 있지 않은 철저히 가치중립적인 세계는 우리의 세계—인간의 세계—가 아니라 ‘영원의 상 아래서’ 보아진 세계에 불과하다. 그리고 윌리엄스가 6장에서 밝혔듯 우주의 관점을 취하는 기획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윤리적 사유의 목표가 이를테면 세계의 비인간적 진상을 파악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윤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면 상술한 형이상학적 문제는 더 이상 유의미하지 않다.

사실과 가치 사이의 구분은 언어에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론가들이 언어에 덧붙인 것에 불과하다. ‘두꺼운(thick)’ 윤리적 용어들을 보다 추상적인 언어로 환원하고자 하는 충동은 오도되어있다. 언어적 접근은 “윤리적 개념이 그 속에서 작동하는 사회적 조직의 형태들”에 대한 통찰을 결여하고 있으며,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을 철학으로부터 쫓아낸다. […] 윤리에 대한 이해(ethical understanding)는 사회적 설명의 차원을 필요로 한다.”(131)


8장: 지식, 학문, 수렴

윤리학의 맥락에서 객관성은 (윤리에 객관적인 기초(foundation)를 제공하고자 하는 기획보다는) 윤리적 믿음이나 지식을 다른 종류의 믿음 또는 지식, 특히 학문적 지식과 비교하면서 논의되어왔다. “무엇이 윤리적 믿음을 참으로 만들며, 윤리적 지식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는지”의 문제는 사실과 가치 사이의 여러 가능한 구분의 [배경]이 되어준다(133).

객관성에 대한 성찰은 갈등(disagreement)을 고려하는 데서 곧잘 비롯한다. 합의와 갈등 중에서 [다른 것에 비해 설명이 불필요할 정도로 당연하거나 근본적인 것은] 없다. [합의도 마찬가지겠지만] 갈등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것인지는 [그 자체로] 실천적인 효과가 있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어떻게 반대할 것인지를 묻는 경우) 타인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들 자신이 틀린 것인지를 묻는 경우) 우리들 자신의 도덕적 전망(ethical outlook)을 새로이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사실 갈등이란 반드시 극복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해하기에 아주 어려운 현상도 아니다.] 그렇지만 굉장히 중요한 문제에 대해 갈등이 일어날 경우, 나아가 그 갈등이 “타인으로부터 동의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판단으로써 표현될” 경우 [갈등은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은 상당히 약해진다.]

갈등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먼저 관여된 행위자들의 지식 수준이나 이해력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일어나는, [즉] 원초적인(primitive) [형태의] 실천적 갈등이 있다. 행위자들이 단지 서로 양립 불가능한 욕망을 가지기 때문에 일어나는 갈등(e.g. 두 명이 한 덩이의 빵을 저 홀로 먹기를 원하는 경우)에는 인지적 실패 같은 것이 연루돼있지 않다. 만일 이처럼 원초적인 갈등을 폭력이 아니라 말로 해결(settle)하고자 할 경우, “주로 정의에 대한 보다 실질적인(substantive) 판단들”이 도입될 것이다(134). [담론이 발생한 뒤에도 여전히] 누군가 [상황 따위를] 잘못 이해했거나 [어떤 사실을] 모르고 있어서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다른 한편, 갈등 당사자의 이해력이 관여되는 종류의 윤리적 갈등도 있다. 이와 같은 갈등의 [분류학]은 [윤리학적 지식과 학문적/과학적 지식 사이의 대립을 대변하는] 실천적인 것 대 이론적인 것, 가치 대 사실, 또는 ‘ought’ 대 ‘is’의 대립에 [반영되어있다.*] 그런데 사실 이 대립들은 동종의 대립이 아니다. 모든 실천적인 갈등이 반드시 가치 간의 갈등은 아니며, 사실을 둘러싼 갈등이 모두 이론적인 갈등인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모든 평가적인 것을 실천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기획도, 모든 사실적인 것을 포괄하도록 이론적인 것의 범위를 확장하는 기획도—둘은 모두 실증주의에 의해 추동되는데—의심스럽다.

*Q. 어떻게?

그렇다고 해서 윤리학적 지식과 과학적 지식 사이의 대립에 아무런 실체도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실체는 갈등의 정도차나 해소 방법에서의 차이가 아닌, 수렴에 대한 설명(explanation of convergence)상의 차이에 놓여있다. 즉 우리가 어떤 [종류의 또는 의미의] 수렴을 합리적으로 희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우리들 자신의 반성적 이해는 윤리적인 것(the ethical)의 맥락과 과학적인 것(the scientific)의 맥락에서* 상이하다.

*윌리엄스는 전자를 (미학적인 평가도 포함하는) 평가적인 것 & (윤리의 일부에 불과한** 데다 별도의 문제인 법의 문제를 관여시키는) 규범적인 것 & ([반드시 윤리적인 것만은 아닌?]) 실천적인 것과, 후자를 사실적인 것과 구분한다.

**Q. 규범은 어떤 의미에서 윤리의 일부에 불과한가? 규범에 대한 것이 아닌 윤리적 고민=? Supererogatory actions?

과학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의 권역은 각각 수렴의 성공과 실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상이하게 이해한다. 전자에서는 (이상적으로 수렴이 기대 가능한 데다) ‘실제-사태’(=‘how things [really] are’)가 그 수렴을 이끌거나 적어도 수렴에 의해 대변되리라고 정합적으로 기대할 수 있다. 실제-사태의 대변은 실제로 학문적 견해들 사이의 수렴에 대한 최선의 설명에 해당한다. 반면 윤리적인 것의 권역에서는 그와 같은 희망을 갖는 일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윤리적인 것의 권역에서는 과연 어떤 수렴을 정합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지 묻기 전에, [가능한 반론들로서] ①애초에 실제-사태에 입각한 수렴이라는 것은 (어느 권역에서든) 개념적으로 공허하다는 주장과 ②윤리적인 것의 권역에서도 그와 같은 수렴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살펴보자. 먼저 전자의 예로, [일찍이 성립해온 사태(what was already there)의 사후적 추적으로서의] 과학의 성과나 그에 따르는 [광범위하고 심도 있는] 수렴(합의)의 수준이란 문화적 산물(cultural artifact)에 불과하다는 R. Rorty의 입장이 있다. 그러나 Rorty의 주장은 그 자체로 문화가 자라날 수 있는 세계의 이미-있음(being already there, 일찍이-성립해옴)을 전제하기에 자기논파적이다(self-defeating). [보다 근본적으로,] Rorty는 과학이 이미 있는 세계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 속에서 인공적으로 산출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자신이 벗어나기를 원했던 관점인) 인간적 언어와 활동 너머의 초월적 관점을 취하게 된다.

Rorty의 입장 가운데서 그나마 유효한 주장은, 세계의 관념(notion) 자체에 모종의 어려움이 얽혀있어 세계가 어떠한지(how the world is)에 우리의 믿음과 믿음들 사이의 수렴을 근거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세계를 그 [구성요소]에 대한 모든 믿음들에 근거해 규정하든(putting all our representations of the world in), [모든 구성요소]에 선행하는 무규정적인 무엇으로 규정하든 문제적이다(all of them out). 전자의 경우 세계의 관념은 [고유한] 실체를 결여하게 되며—이미 알려진 믿음들에 추가하는 바가 없으므로—, 후자의 경우 세계의 관념은 어떤 식으로도 구체화될 수 없는 공허한 것에 불과해진다. 그러나 그처럼 극단적이지도 않고, 세계를 더 잘 규정해낼 수도 있는 가능성, 세계에 대한 우리의 표상 가운데 일부만을 활용해 세계를 이해하는 가능성도 있다. 즉 “우리의 관점과 그 특유성(peculiarities)으로부터 최대한 독립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표상한다고(represent) [우리가] 합리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몇 개의 믿음들[만]을 골라, 해당 믿음들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가 아니라, 제 대상을 해당 믿음들이 어떻게 표상하는가(how they represent what they are about)”에 집중하는 것이다(138f.). 이로써 얻어지는 세계의 관념을 세계에 대한 절대적 이해(absolute conception)라고 부르자.

[특정한 관점에 얽메이지 않으면서도 관점주의를 부정하지 않는] 절대적 이해의 장점은 ‘특별히 우리에게 [이러저러하게] 드러나는 세계(the world as it seems peculiarly to us*)’와 ‘설령 그들이 우리와 전혀 다른 조사자들일지라도 어떤 조사자에 의해서든 도달될 수 있는 그런 세계(the world that might be arrived at by any investigators, even if they were very different from us)’ 사이에 구분을 설립한다는 것이다. 이는 실제-사태에 의거한 학문적 수렴의 가능성을 그럴듯하게 그려보이는 데 기여하며, ①을 논파한다.**

*[from a particular perspective, e.g. psychological or sociological, etc.]

**Q. 세계에 대한 절대적 이해는 (학문을 문화적 산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제하면) 윌리엄스가 비판한 로티의 초월적 관점과 어떻게 다른가? [Viz., how do we know what kind of picture of the world at which investigators very different from us would arrive? What kind of perspective allows us to acquire such knowledge, a perspective that is acceptable while its transcendental counterpart would not be?]

한편 ②윤리적인 것의 권역에서도 실제-사태에 입각한 수렴이 가능하다는 주장은 두꺼운 윤리적 개념들(thick ethical concepts)*과 관련돼있다. 특정한 행위[나 부작위]에 이유를 제공하는 이 개념들은 [그 적용이 행위에로 이어진다는 의미, 행위를 이끌어낸다는 의미에서] 한편으로 행위의 지침이 되어줄 수 있다(action-guiding=☐). 다른 한편으로 이 개념들이 어떤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지 아닌지, [어떤 조건 하에서] 옳게 또는 그릇되게 적용되는지에 대한 합의나 갈등은 [세계가 어떠한지에 입각해 이루어진다는 의미에서] 세계를 지침으로 삼아 이루어진다(guided by the world=**). 두꺼운 윤리적 개념은 어떻게 이 두 속성(☐와 △)을 동시에 가지는가?

*e.g. “coward, lie, brutality, gratitude, and so forth” (140, emphasis in the original)

**애초에 ‘world-guided evaluation’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사실과 가치 사이의 조야한 구분을 논파한다(150).

R. Hare라면 모든 두꺼운 윤리적 개념은 저마다 기술적인 요소와 처방적인 요소로 분석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 경우 전자가 △를, 후자가 ☐를 설명한다. 그러나 이 주장에 따르면 오직 기술적 요소만이 두꺼운 윤리적 개념의 적용 여부를 결정하게 될 것이며, “개념의 평가적 관심은 이에 아무 역할도 수행하지 않”을 것이다(141). 그 경우 동일한 사태를 골라내 기술하기는 하는데, 그 어떤 평가적 또는 처방적 힘도 행사하지 않는 (새) 개념(a descriptive equivalent)을 우리가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는 [부조리한 귀결이 대두된다.] 애초에 특정한 두꺼운 윤리적 개념이 전제하는 평가적 관심사 또는 관점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이 단지 세계를 가치중립적으로 기술하는 특정한 방식으로서만 해당 개념(의 기술적 상응물)을 사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특정한 두꺼운 윤리적 개념이 전제하는 평가적 관심사 또는 관점을 이해하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는 그것을 공유하지만, 그에 동조하지는 않는 관찰자(= ⭐︎)* 역시 윤리적 지식을 갖췄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구성원들이 지니는 윤리적 성향이] 최대한 동질적이고, [그 안에서 작동하는 윤리적 제도에 대한] 일반적인 반성은 최소화된 초전통적인(hypertraditional) 사회**를 가정해보자.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 윤리적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 것인가?***

*“insightful but not totally identified observer” (142)

**[원시 사회 같은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조야한 내용의 윤리관을 가진 사회일 필요는 없고, 단지 반성을 안 할 뿐인, 곧장 실천에만 몰두하는 사회다.]

***Q. 이 질문은 맥락상 윤리적 지식이란 (응당 존재하는 것이며) 특정한 사회의 윤리적 제도에 상관적으로 그 유무 및 관련 믿음들의 참거짓이 결정되는 무엇이라는 메타윤리학적 입장을 이미 전제하는 것이 아닌가?

명제의 형태로 된(propositional) 지식을 갖추려면 [인식 주체가] 참된 믿음을 갖되, 그 믿음이 그것의 참됨과 우연하지 않은 방식으로(=다른 사태가 참이었다면 다른 믿음을 가졌을 그런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즉 주체의 믿음은 진실에 민감하게 성립해야만 한다(진실을 추적할 수 있어야 한다, track the truth). 이 사회의 구성원들은 실제로 두꺼운 윤리적 개념을 사용함에 있어 진실에 민감하게 성립하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만일 다른 사태가 참이었다면, 그들은 다른 두꺼운 윤리적 개념을 사용했거나 아무 윤리적 개념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그들은 특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고, 만약 그 믿음이 참될 수만 있다면 그렇게 참된 사태에 근거해 믿음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는 과연 그 믿음이 정말 참된 것인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e.g. 초전통적 사회의 관점에 입각해서는 ‘비겁한’ 행위가 있다고 하자. ⭐︎는 이 사회에서 해당 행위가 비겁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안다. 그런데 ⭐︎는 그 행위가 정말 비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는 “이 사회의 구성원들은 비겁과 관련된 윤리적 지식(=진실을 추적하는 참된 믿음)을 가졌다”라고 옳게 말할 수 있는가?]*

*Q. 질문이 너무 이상하다. (내가 인지하고는 있지만 동조하지는 않는 평가적 관점을 가지는) 이들이 윤리적 지식을 가졌다고 내가 말하는 게 괜찮냐, 가 아니라 그들이 윤리적 지식을 가진 게 맞냐, 다른 평가적 관점에서 봤을 때는(=반성을 가하면) 참된 믿음이 아닌 것 같은데, 라는 질문을 물어야 되는 것 아닌가? 왜 윌리엄스는 이들이 윤리적 지식을 가진 것이 맞다는 사실을 당연시 여기는가(cf. 148쪽의 시인)? 내가 뭔가 놓친 것일까? 애초에 윤리적 참 또는 윤리적 지식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를 선행하지 않고, 다만 자신의 전제—애초에 윤리적 참이란, 나아가 그에 의거해 규정되는 윤리적 지식이란 각 사회문화적 맥락에 입각해 그 유무와 내용이 규정된다—를 고집하면서 굉장히 특수한 상황(반성의 전적 결여)을 가정해 그 안에서 윤리적 지식이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를 따지는 게 논증의 절차상 정당한지 잘 모르겠다. ‘반성은 윤리적 지식을 파괴한다’는 본인의 결론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역으로 짜맞춰진 논증 같다.

이 이의에 응수함에 있어 중요한 사실은, 반드시 ⭐︎ 역시 초전통적 사회의 구성원의 판단에 버금가는(tantamount) 판단을 언표하거나 실행할 수 있어야만 ⭐︎이 ‘초전통적 사회의 구성원들은 (윤리적) 지식을 갖고 있다’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네 일상 속에서도 특정한 조건을 만족해야만(e.g. 학적, 성별, etc.) 어떤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 사례가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타인에 대해 그가 그 개념과 관련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은 이 문화에 소속되어있지 않지만, 그리하여 본인은 특정한 두꺼운 윤리적 개념을 [지식의 일부로서? 진심으로?] 사용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적어도) “해당 개념의 사용 조건을 만족하는 사람들은 (해당 개념의 사용 조건과는 별도의 객관적인 조건을 만족해야 성립할) 참된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즉 ⭐︎의 관점에서 봐도, 이 사회의 구성원들은 윤리적 지식을 갖추고 있다. 본인이 그 지식에 동조하지 않을 뿐.]

이는 ⭐︎과 초전통적 사회의 구성원 사이의 윤리적 관념이 지나치게 상이할 때 발생하는 사례다. 반대로 ⭐︎과 초전통적 사회의 구성원 사이의 윤리적 관념이 유사한데 그 유사한 것들이 서로 충돌해서, 후자가 외부의 시선에서는 아예 틀린(false) 것으로 판단되는 사례도 있을 수 있다. 현대과학을 아는 사람이 같은 현상을 마술적으로 설명하는 문화에 맞닥뜨리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처방주의자는 이 상황을 동일한 기술적 내용에 대해 한쪽은 만능-ought (all-purpose ought)을 부여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그러지 않고 있다는 식으로 분석할 것이다. 즉 “어떤 보편적인 도덕적 관념을 사용함으로서 표현될 판단”이 존재해서, 한 사회의 내부자는 그를 받아들이고 외부자는 거부한다는 것이다(146). 하지만 과연 그런 판단이 존재할지, 그리고 그런 대답을 당장 제시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실천과 그에 대한 반성(e.g. 비판, 타 실천과의 비교, etc.)을 서로 구분하고, 둘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두 가지 방식을 또 구분해보자. 실천에 대한 반성은 (실천 자체에 비해) “보다 일반적이거나 이론적인 [시선의] 수준”에서 성립한다(146). 반성적인 시선 하에 기존의 실천은 실천 주체들이 전혀 생각해보지도 고려해보지도 않았던 함축들(implications)을 가진 것으로서 새로이 드러날 수 있다. 만약 초전통적 사회 구성원들의 윤리적 실천을 “가치에 대한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이 반영된 것으로 객관주의적으로 이해한다면, 반성의 결과 이 사회의 구성원들은 윤리적 지식을 갖추지 못했다는 결론이 도출될 것이다(147). 왜냐하면 [해당 실천의 옳고 그름을 따짐에 있어 반성을 통해서야 비로소 드러날 함축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성립할 텐데,] 이에 따라 해당 실천은 반성을 통해 (당사자들은 전혀 모르는 것인) 타 실천과 모순되는(contradict) 함축을 가지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더 세련된 것인 타 실천이 초전통적인 사회에서의 [믿음들을] 더 이상 윤리적 지식이 아니게 만든다. 반면 만약 초전통적 사회 구성원들의 윤리적 실천을 단지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의 일부, 문화적 산물”로서 비-객관주의적으로 이해한다면, 이 사회의 구성원들은 윤리적 지식을 갖춘 것이 맞다(147). 왜냐하면 [그 경우 실천의 옳고 그름을 따짐에 있어 반성을 통해서야 비로소 드러나는 함축은 고려되지 않기 때문이다.]*

*Q. 다시금, 실천과 반성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윤리적 지식의 소유 여부가 달라진다는 사고의 과정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진다. 먼저 윤리적 지식이 무엇인지 따져야 하는 것 아닌가? (당연하지만) 윤리적 지식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윤리적 지식 소유 여부가 달라지며, 윤리적 지식의 정의란 어떠어떠하고, 이 정의는 실천-반성 관계와 이러저러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식으로 사고를 전개해야 할 것만 같다.

Q. 이에 더해, 명제적 지식을 ‘참에 민감하고 참된 믿음’으로 정의했다면 당연히 (참 또는 진실의 언어를 공유하는) 객관주의적인 이해를 택하는 것 아닌가? 비객관주의적 이해의 가능성이 지나치게 갑자기 도입되어, 윌리엄스가 그저 자신의 관점을 고집하는 것처럼 읽힌다.

문제는 [추후 반성을 통해서야 비로소 드러날 그 어떤 가능한 함축과도 모순을 빚지 않아] 문자 그대로 [무조건적으로] 살아남을(survive) 윤리적 지식이 있느냐는 것이다.* 아주 보편적이고 모호하게만 규정된 판단이라면 이렇게 “고차적인 반성적 일반성”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겠지만, 그런 판단이 어떤 실질적인 지식의 집합(body of ethical knowledge)을 이루지는 못할 것이다(148). 그러므로 “만약 초전통적 혹은 무반성적 수준에서도 지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 반성은 지식을 파괴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148, 강조 삭제).**

*Q. 객관주의의 모델을 선택한다고 해서 반드시 철저한 무모순성처럼 엄격한 기준, 최고도로 일반적인 반성을 요구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마치 수학적으로 필연적인 지식이 아니면 상대화 가능한 독사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억지인 것처럼, ‘그 어떤 실천도 최고도로 일반적인 반성을 통해서는 결함 없는 것으로 드러날 수 없다면, 아예 모든 실천을 단지 삶의 방식이기만 한 것으로서 반성과 나란하지 않게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도 억지 같다.

Q. 무엇보다도 윤리적 실천을 그에 대한 반성적 평가에 의해 그 타당성이 영향 받지 않는, 순전한 삶의 방식으로 보았을 때 비로소 윤리적 지식이 성립한다는 생각 자체가 ‘지식’이라는 개념의 정의 자체와 위배되는 것처럼 보인다. ‘지식’이라는 개념은 모름지기 그리고 정의상 모종의 객관성을 전제하는 것 아닌가?

**“[…] reflection might destroy knowledge, because thick ethical concepts that were used in a less reflective state might be driven from use by reflection, while the more abstract and general ethical thoughts that would probably take their place would not satisfy the conditions of propositional knowledge.” (167)

[학문적 지식과 윤리적 지식 사이의 차이를 이해함에 있어, 각 권역에서 관점주의가 어떤 문제를 낳거나 낳지 않을 것인가를 따지는 방법도 있다.] 서로 다른 관점을 지닌 사람들이 동일한 색깔을 서로 다르게 보는 상황을 상정해보자. 이 경우, 관점의 차이를 설명해주는 것(=인지 능력[상의 차이?])이 곧 관점의 차이를 정당화할 수 있다. [즉 설명이 동시에 근거가 되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윤리적인 것의 권역에서는 유비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 경우, 관점의 차이를 설명해주는 것은 세계에 의거한(world-guided) 윤리적 판단들[상의 차이?]일 텐데, 이것들이 관점상의 차이를 정당화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관점상의 차이를 정당화하려면 저 판단들을 넘어 “그들에 대한 반성적이거나 2차적인 설명”을, 즉 별도의 무엇을 내놓아야만 한다(150). 그런 ‘2차적 설명’이란 문화적 차이에 대한 사회과학적 설명, 곧 “한 사회적 세계 내에서 우리가 잘 지낼 길을 찾는 방식(finding our way around in a social world, [… some social world or other …])”에 대한 설명일 테다(150, 강조는 원저자). 즉 국지적인 개념들(local concepts)이 어떻게 그 개념을 사용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특정한 사회에서 [잘 지낼 수 있게 해주느냐]에 대한 설명일 것이다. 그러나 윤리적 반성은 사회과학적 설명과 [애초에 다른 것을 묻는]다. 윤리적 반성은 그 삶의 방식이 다른 삶의 방식에 비해 좋은 것인지, 그 사회적 세계가 과연 최선의 사회적 세계인지를, 곧 설명이 아닌 정당화의 문제를 따지기 때문이다. [이 정당성의 문제를 따짐에 있어(?) 특별히 철학적인 반성의 형태를 택하는] 윤리 이론은 지나치게 일반적인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두꺼운 윤리적 개념이 지니는 세계에-의거해-있음(world-guidedness)이라는 이점을 잃을 것이기에, 실제-사태에 입각한 수렴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결론적으로 “윤리적 진실의 추구”에 있어 “윤리적 삶에 대한 객관주의적 관점은” 폐기되어야 한다(152).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류의 객관주의적 탐구는 여전히 가능한데, 바로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지지 않을 수 없는?] 필요와 기본적인 동기가 무엇인지 따짐으로써 (철학적인 반성은 아닌 방식으로) 윤리에 객관적인 기초를 부여하고자 애써보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자연주의를 동반한다. ‘믿음 x, y, z는 학문적 믿음들이 참인 것과 같은 방식으로 윤리적으로 참이다’가 아니라, ‘우리의 필요, 동기에 입각해 접근한다면 x, y, z를 믿으며 살 만한 좋은 이유가 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합리적이다’라는 결론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다.*

* “[…] ethical beliefs would be true only in the oblique sense that they were the beliefs that would help us to find our way around in a social world […]” (155): [윌리엄스는 윤리적 지식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것의 권역의 특수성에 입각해 윤리적 참의 관념 자체를 재정의하고 있다. 윤리적인 것의 권역은 이러이러한 특성을 가지므로, 거기서 가능한 참의 의미란 저러저러한 것뿐이다, 라는 식으로……]


9장: 상대주의와 반성

상대주의란 갈등의 항을 이루는 각 믿음마다 그 믿음이 받아들여질 만한 자리를 찾아줌으로써 (‘이 갈등은 사실 갈등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갈등을 해소하는 [기제]로, 꼭 윤리적인 맥락에서만 대두되는 것은 아니다. 가장 단순한 상대주의는 [애초에 각 믿음이 취급하는 대상이 서로 다른 대상이라는 주장]에서 발견된다. 한 관점에서는 무언가가 한 가지 방식으로 드러나고, 다른 관점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뿐이라는 논리다.

[결국] “상대주의의 목표는 갈등을 설명해 없애버리는 것(explain away)”이다(156, 강조는 원저자). 이를 위해 [성공적인] 상대주의[적 주장은] 첫째, 왜 애초에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지, 그리고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갈등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단순히 논리적인 모순의 부재를 이유로 갈등의 부재를 설명하는 방식은 두 번째 과제를 수행하지 못한다. 이를 달성함에 있어 생각해볼 만한 관념이 바로 비교 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이다. [비교 불가능성을 만족하는 주장들은] 서로 모순되지는 않지만, 그리하여 양립 가능하며 사실은 둘 사이에 갈등이 존재하지 않지만, 서로를 배제하기는 하기 때문에 갈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로 다른 개념과 지시, 증거의 관념을 활용하는 과학 이론들을 예로 들 수 있으며, 이들은 문화 또는 삶의 형식상의 차이와 비슷한 차이를 띤다.

[그런데 배제는 거부(rejection ≠ blame)나 적대적인 감정(hostile sentiment)을 동반할 수 있다. 윤리의 맥락에서 역시] (같은 상황, 같은 행위에 대해, e.g. 인신공양) 동일한 개념을 사용해야만—그리하여 [직접적인] 상호적 비교가 가능해야만—모종의 거부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쉽게 말해 비교 불가능해도 서로 상대의 [제도를] 거부하기는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두 [윤리적 제도가] 서로를 배제한다고 해서 즉시(instantly) 상대주의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나의 문화와 비교 불가능한 타 문화에 대해 나는 여전히 그것은 틀렸다(wrong)고 말할 수 있다. 무엇이 옳거나 그른지가 각 문화 내에서 순전히 자기폐쇄적으로 규정될 수는 없는 것이다.] 나아가 그 어떤 문화도 외부의 반응이나 판단으로부터 면역될 수는 없다. 그리하여 “옳고 그름[…]이 주어진 사회에 논리적으로 내재적인(logically inherent) 상대성을 지닌다고 가정하는 것은 그럴듯하지 않다.”(158) “각 [윤리적] 전망은 [굉장히 상이한 문화를 만나서도] 여전히 전체 세계에 적용하고자 하는 의도로 [이런저런] 주장을 내놓을 것이지, ‘자기만의’ 세계에 해당하는 그 일부에만 적용하고자 하는 의도로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159)

*윌리엄스는 ‘엄격한 관계적 상대주의(strict relational relativism)’이 성립하려면 거부와 같은 반응조차 일체 불가능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있다.

Q. 하지만 상대주의는 ‘거부가 불가능하다’보다는 ‘그런 종류의 거부를 하면 안 된다, 거부가 사실은 부적절하다’고 말하는 주장에 더 가깝지 않은가? 정확히 어떤 상대주의, 상대주의의 어떤 버전을 비판하고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요컨대 윤리적 실천에 대한 비객관주의적인 이해*와 상대주의는 서로 다른 주장이다. 전자를 취한다고 해서 후자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비객관주의적인 이해 모델이 우리의 [구체적인] 윤리적 전망에 아무런 실천적 영향도 미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비객관주의적 이해를 취할 경우, 말하자면] (윤리적) 참을 [단지] (특정한 삶의 방식이 지니는) 가치에 대한 승인(affirmation)으로, (윤리적) 거짓을 거부(rejection)으로 규정할 경우 우리네 윤리적 전망에 정확히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

*(recap) 윤리적 실천(e.g. “the activities of the hypertraditional society” (147))에 대한 객관주의적 이해 모델: 실천의 주체들은 모두에게 유효한 것으로서, 가치에 대한 진실(truth)을 추구하고 있음, 더 세련된 주장과 모순을 빚고 그에 의해 반박될 수 있음 ↔︎ 윤리적 실천에 대한 비객관주의적 이해 모델: 실천의 주체들은 단지 특정한 삶의 방식을 영위하고 있음

[유의할 점은] 상대주의란 보편적인 관용[에 대한 절대적인 옹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상대주의자라고 해서 모든 윤리적 [제도]에 대해 똑같이 호의적일(equally well-disposed) 필요는 없다. 상기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물어야 할 것은 상대주의적 사고가 과연 요구되는지가 아니라 그것이 어느 정도로까지 가능하며, [어떤 의미에서,] 얼마나 적절한지(adequate)이다. 이때 한 문화의 판단이 그 문화에만 적용되어야 한다는 [강력한] 상대주의적 주장도, 모든 문화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그 반대 주장도 극단적이며 틀렸다.

상대주의자의 [진정한] 고민(concern)*을 이해하려면 한 문화와 여타의 문화 사이 구분선 자체를 지워야 한다. 둘을 구분하는 대신 대신 첫째, 다른 문화(들)은 우리의 문화와 다양한 [크기의] 거리를 둔다는 점과 둘째, 다른 문화에 대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반응 자체가 우리의 윤리적 삶의 일부라는 점, 마지막으로 셋째, [반드시 좁혀져야만 하는 거리, 곧] 해결(resolution)을 요구하는 대비와 그렇지 않은 대비 사이의 차이에 유념해야 한다.

*Q. What would this be in a sentence?

이를 위해 현실적(실제적) 대면과 관념적 대면을 구분하자(real vs. notional confrontation). 서로 다른 두 윤리적 전망이 있을 때, 둘 모두가 현실적인 선택지인 사람들의 집합이 존재하면 현실적 대면에 해당한다. 반면 둘 중 하나라도 현실적인 선택지가 아니면 관념적 대면에 해당한다. 이때 무엇이 현실적인 선택지이고 아닌지는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해당 전망을 선택함으로써 당장의 현실 감각이 [유의미하게] 유지되면(retain […] hold on reality) 그 전망이 현실적인 선택지인 것이고, [현실에 대한 지나친 왜곡을 동반한다면 더 이상 내게 실현 가능한 옵션이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 “근대 산업적 삶의 조건” 하에서 사는 우리에게, 이전의 인간사에서 나타났던 다양한 윤리적 전망들, 이를테면 “청동기 시대의 족장이나 중세 사무라이의 삶”은 더 이상 현실적인 옵션이 아니다(161).

[상술한 구분에 입각해 상대주의를 그의 진정한 고민에 따라 (그리고 더 약하고 설득력있게) 재규정하면,] 상대주의적 견해란 오직 현실적 대면의 사례들에 대해서만 좋거나 나쁘다, 옳거나 그르다는 식의 평가적 언어(language of appraisal)가 가능하며, 관념적 대면의 사례들에 대해서는 평가적 언어를 사용함이 부적절하다는 견해가 된다. 반대로 비상대주의(non-relativist)에 입각한 견해는 관념적 대면의 사례들의 경우에도 어떤 것이 ‘틀렸다(false)’고 단언할 수 있다는 견해가 된다. 전자의 상대주의는 ‘거리의 상대주의(relativism of distance)’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거리의 상대주의는 지나치게 이국적이거나, 너무 먼 과거나 미래의 것인 윤리적 전망에 대해, 즉 관념적인 대면의 사례들과 관련해서는 판단을 중지한다(relativistic suspension of assessment).

*“There is room for it in a reflective ethical outlook.” (162)

근대적 세계는 고도의 반성과 자기의식으로 특징 지어지며, 이 변화는 비가역적이다. [이와 상관적으로 오늘날에는] “더 두꺼운 종류의 윤리적 개념이 더 전통적인 사회들에서보다 덜 통용되고 있다”(163). 또 근대 사회는 홉스나 스피노자가 체계화한 “사회에 대한 자연주의적 이해(naturalistic conception)”에 의해 지배되며, 베버 식으로 표현하면 탈신비화되어있다(165). 이와 같은 [사회적] 조건 하에서 우리는 덜 반성적이었던 과거의 사회가 몰랐던 것은 무엇인지, [그렇게 비반성적이었던] 과거의 사회가 (누구를 탓함 없이 단지) 정의로웠거나 정의롭지 못했는지를—단순히 전망의 결과적인 모습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 전망을 그들이 정당화했던 방식(legitimation)과 관련하여—물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정의나 불의에 대한 근대적 관념 자체가 과거의 보다 위계적이었던 사회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버전의] 상대주의를 내세울 수도 있겠지만, 이에 따라 순진하게 판단을 중지한다면 그에 저항하는 모종의 압력(pressure)에 맞닥뜨릴 것이다. 과거의 사회는 순전히 관념적으로만 받아들여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과거의 정의관은 근대의 사람들에게도 호소력을 갖는(have a claim) 관념들이 [다만 상이하게] 육화된 것으로서 받아들여지며, 그리하여 근대의 관념들과 실제로 대면하는 것으로 경험된다.

소크라테스는 첫째, 반성적이지 않은 것은 지식이 될 수 없으며 그리하여 반성이야말로 지식을 낳고, 둘째, 그렇게 산출된 지식이야말로 [삶의] 관건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지난 장에서 보았듯, 반성은 특정한 윤리적 지식을 더 이상 활용할 수 없는(unavailable)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윤리적 지식’을 갖추는 게 가능한 것은 맞지만, 그것을 (특별히 지식으로서, 어떤 확실성[을 지니는 명제]의 형태로) 갖추는 것이 반드시 윤리적으로 최선인 상태는 아니다. 하지만 확실한 지식의 형태를 띠지 않는 윤리적 신념(conviction)이란 과연 무엇일 것인가?

우선 그것은 신념의 일종이므로 [정의상] 일종의 수동적이고 불가피한 [수용]의 결과여야 한다. ‘지성을 배제하면 의지만이 남기 때문에, 지식이 아닌 형태의 신념이란 자기 자신의 [전적으로 능동적인] 결정[일 수밖에 없]다(decision)’는 생각은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다. [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신념을 확실한 지식으로 이해하든, [능동적인] 결정으로 이해하든 그것의 실제적인(actual) 부재를 타파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애초에 무엇을 확실하게 인지할(cognize) 것이며, 무엇을 결정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져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식 모델과 결정 모델 모두의 대안이 될 수 있는) 윤리적 신념에 대한 제3의 규정은 그것을 “기본적으로 사회적인 현상”인 “자신감(confidence)”으로 이해하는 것이다(170, 강조는 원저자). 자신감은 사회적인 승인과 지지(social confirmation and support)에 의해 [존속하며? 강화되며?], 이 지지가 없을 경우 개인은 스스로의 윤리적 태도 [자체에 대해 그리고 그 특수성에 대해 특별히] 의식적이([self-]conscious) 되고 말 것이다. 자신감 모델은 어째서 철학이 ‘어떻게 하면 윤리적 신념을 형성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답하는 데 무능한지를 다른 두 모델보다 잘 설명해준다. 윤리적 신념의 형성은 “사회적이고 심리학적인 문제”로, “어떤 제도, 양육, 그리고 공적인 담론이 그것을 장려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와 관련된 사안이기 때문이다(170). 자신감은 반성 및 토의(discussion)과 무관하지 않게 길러지며, 이때의 반성과 토의는 윤리학적인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실질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은 삶을 살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충분한 수의 사람들이 [좋은 삶에 기여하는 윤리적인] 신념을 자신감 있게 영위할 수 있는지[를 다만 철학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고민한다. 그리하여 객관적으로 정초 지어진 윤리적 삶이란 “공유된 삶의 방식에 있어서의 실천적 수렴”, [사회 구성원의] 기초적 욕망과 관심에 의거한 강제없는(uncoerced) 수렴[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171).*

*윌리엄스가 욕망과 무관한 윤리적 선택지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10장: 도덕성이라는 괴이한 체계(Morality, the Peculiar Institution)

윤리적 사고를 수행하는 특정한 방식일 뿐인 도덕성의 체계는 의무(책무, obligation)에 대한 (비일상적이고 아주) 유별난 관념을 공유하는 여러 전망들의 총칭이다. 여기서 도덕적 의무란 무엇을 할 것인지(what to do)와 관련한 숙고의 결론 또는 아웃풋로서, 특수한 상황 내에서 성립하는 특별히 도덕적인 종류의 이유들(moral reasons)에 구애된다. 그런데 도덕성의 체계는 ① 숙고의 인풋으로서 특수한(particular) 의무를 산출하는 고려사항들 역시 그 자체로 일반적인(general) 의무가 돼야 한다는 압력을 행사한다. 이 [말하자면 실천적인 ‘함수’의 작동에는] ② 행위자가 실현할 수 없는 것은 숙고의 결론이 되어선 안 된다는(‘ought implies can’) 조건이 작동하는데—불가능한 선택지가 아웃풋으로 산출될 경우, 숙고는 다시 수행되어야 한다—과연 무엇이 행위자에게 가능한 실천의 선택지이며, 애초에 행위자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사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정말 난해한 문제이다. 그리고 이 어려움은 도덕성의 체계에서 특유하게 첨예한 방식으로 두드러진다. 나아가 ③ (②의 원칙 그리고 총합의 원칙(agglomeration principle)*에 따라) 숙고의 결론이 되는 도덕적 의무들은 서로 충돌하지 않아야 한다. (일상적으로는 의무들이 충돌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상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데도 말이다.)

*“if I am obliged to do X and obliged to do 𝛶, then I am obliged to do X and 𝛶.” (176)

③의 원칙에 성실한 예로는 의무들 사이의 충돌을 ‘겉으로 보기에만 의무인 것’과 ‘실제적 의무’를 서로 구별함으로써 해소하고자 한 D. Ross의 이론이 있다(prima facie and actual obligations). 그러나 이 이론은 숙고의 과정에서 [말하자면 그 중요도가] 능가 당한(outweigh) 바람에 실제로는 의무가 아닌 것으로 판명된 표면적인 의무에 대해서도 우리가 그것을 소홀히 대했을 때 [이를테면 미안한 감정을 느끼거나] 보상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내세우기만 할 뿐, 왜 그러한지]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 어떤 실제적 의무도 어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나는 나 자신을 탓해선 안 된다.”(176) 그리하여 표면적인 의무의 위반에 맞닥뜨렸을 때, Ross 식 윤리학을 따르는 사람들은 도덕과 무관한 감정(nonmoral feeling)인 후회를 느낄 수는 있어도, [특별하게 도덕적인 태도인] 자기비난(self-reproach)이나 탓하는-실천(blame)에 임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저 후회는 주지하다시피 도덕적인 종류의 감정이 아니기 때문에 말하자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관계된 일이나 [누구의 의지도 개입됨 없이] 그저 일어나버린 어떤 일에 대해서 느낄 감정과 동종의 것[인 데 그친]다. 달리 말하면 도덕적이지 않은 감정은 자발적으로 부과된 동시에 불가피한(inescapable) 것으로서의 의무와는 무관한 감정이기에, [부조리하게도] “내가 했다(I did it)는 생각이 [그 가운데서] 아무 특별한 중요성도 지니지 않는다.”(177, 강조는 원저자) 이 [변화]는 “윤리적인 것이 도덕적인 것으로 수축될(contract) 때 일어나는 일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177). 도덕성 체계를 특징 짓는 부정적 윤리적 반응인 탓하는-실천은 오직 자발적으로 [의무에 입각해] 이루어진 일에 대해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도덕적 의무는 1인칭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행위자가 그것을 욕망하느냐와 독립적으로 성립하며, 3인칭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는 도덕성 체계 바깥의 행위자에게도 적용된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문제들을 분석하기 전에, 애초에 “주어진 상황 내에서 임하기에 가장 [많은] 도덕적 이유가 있는 행위가 왜 꼭 도덕적 [‘]의무[’]로서 이해돼야(count) 하는지 동의하기 어렵다.”(179) 이를테면 행위자에게 딱히 요구되는 일 없이 단순히 그렇게 할 만한 가치가 있는(worthwhile) 행위도 있고, [그렇게 의무에 못 미치는 행위뿐 아니라] 의무를 넘어서는(supererogatory) 영웅적인 행위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의에 대해 도덕성의 체계는 (“모든 윤리적 고려사항을 한 개의 유형으로 만드는 […] 환원주의 기획”을 동기부여하면서) 최대한 많은 것을 의무화하려는 경향을 보인다(179). 예를 들어 Ross가 내세운 감사할 의무(duties of gratitude)[는 정말 이상한 개념이다]. “받은 이익에 보답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좋은 인성(character)의 표지이다”라는 윤리적 관념 속의 인성과, “도덕적으로 의무인 것을 수행하려는 성향”은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179). ‘정의의 의무’ 역시 마찬가지이다. 특별히 누군가의 의무인 것과 [객관적인 사태상] 일어나야만 하는 것(what ought to happen)은 서로 다른 것이다.

이처럼 도덕성 체계가 [무분별하게] 모든 것을 의무로 만들어버리는 이유는 도덕적 고려사항들의 갈등 상황에서 반드시 승리하는 선택지가 있어야 하고, 그 선택지가 곧 도덕적인 의미에서의 의무에 해당한다는 생각과 관련이 있다. 도덕성의 체계 내에서 의무란 그것을 위반할 경우 탓하기-실천이 따르는 모종의 엄중성(stringency)을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무를 저버리고 다른 실천적 선택지를 택하는 상황에 대해 [도덕성 체계는 그 다른 실천적 선택지 역시 의무로 만들어버리는 전략을 취한다.] 왜냐하면 엄연히 엄중한 의무를 저버려도 [괜찮은] 것으로 만드는 것은 보다 엄중한 무엇, 즉 또 다른 도덕적 의무뿐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a) “오직 의무만이 의무를 밀어낼(beat) 수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180). 그런데 상술한 ①에서와 같이, (b) (그렇게 특정한 상황에서 원래의 의무는 저버려도 괜찮게 해주는 다른) 특수한 의무에는 그것을 지지해주는(back) 보다 일반적인 의무—그런 종류의 상황에서는 이러저러하게 행위해야 한다는—가 들어선다. 그리하여 (상황에 따라 다른 내용의 의무를 그 중요도상 능가할 수도 있을) 도덕적인 고려사항들은 저마다 모종의 보다 일반적인 의무를 [배후에 지니게 된다.]

(b)에 의해 궁극적으로 우리는 “도덕과 무관한(morally indifferent) 행위”를 찾는 데 대한 어려움에 맞닥뜨린다(181). 도덕적인 목표(objective)[가 될 만한 것 모두에 저마다] 일반적인 의무가 상응한다면, 우리 삶에는 딱히 의무가 아닌 행위를 할 여유가 남지 않을 것이며, 의무가 삶 전체를 지배하는 데 이를 것이다. 여기에 (a)를 더하면 우리는 [단순히] 우리의 욕망[이기만 한 것]을 충족하기 위해 “엉터리(사기인, fraudulent)” 관념인 “나 자신에 대한 의무(a duty to myself)”라는 것을 꾸며낼 필요에마저 부딪힌다.

[도덕성의 체계가 얼마나 말이 안 되는 것인지 이해하기 위해] 의무가 여럿 가운데 단지 한 개의 윤리적 고려사항일 뿐일 때, [즉 의무가 본래의 모습으로 성립할 때] 어떤 것일지를 고려해보자. 우선 중요성이라는 관념이 존재하며, 무엇이 중요한지는 행위에게 상대적일 수 있다(a relative notion of importance, 그렇게 상대적으로 중요한 것= ☐). 그러나 단지 누군가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적으로 중요한 것(=△)에 대한 관념도, 상당히 난해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가지고 있다(important überhaupt, important period). 즉 ① 그런 관념이 존재하기는 한다. 이때 ② ☐의 주인이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 ☐을 꼭 △이기도 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 둘을 구분할 줄 [알고, 또 그럴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③ 무엇이 △인지의 문제는 무엇이 숙고적 우선성(deliberative priority)을 지니느냐, 즉 숙고의 과정에서 무엇이 다른 윤리적 고려사항들보다 더 무게 있는 것으로 고려되느냐의 문제와 구분돼야 한다. 왜냐하면 중요성과 숙고적 우선성이 비록 서로 연관되기는 해도, 나에게 중요한 것이 반드시 내 숙고의 내용에 반영되지는 않기 때문이다(e.g. 내게 중요한 그것이 당장 내게 달성 불가능한 상황의 경우). 이때 숙고적 우선성 또는 그 위계는 사물들이 그 자체로 지니는 게 아니며, 특정한 사람 혹은 집단에 대해 상대적으로만 성립한다. 그리하여 특별하게 도덕적인 종류의 고려사항들이 숙고적 우선성을 지니는 것은 도덕성의 체계를 믿는 사람의 관점에서만이다.

또한 숙고적 우선성은 여러 종류의 고려사항들(미학적인, 도덕적인, …)을 [한 숙고의 맥락에로 함께 배치시킬(relate) 수 있다.] 이는 중요성의 관념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객관적으로] 보다 중요한 종류의 중요성이 과연 존재할 것인가?

윤리적 삶을 도덕성의 체계에 입각해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도덕적 고려사항이 가장 큰 중요성을 지닌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도덕성이 [실제의] 숙고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는 그가 도덕성을 어떻게 이해하며, 그런 도덕성이 어떤 의미의 중요성을 지닌다고 생각하는지에 의존[할 뿐이]다. [한편] 윤리적 삶은 그 자체로 중요하지만, 윤리적 삶[의 요소]가 아닌 것들, 그럼에도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들도 중요하기는 하다. 윤리적 삶이 어떻게 규정되든지 간에 [근본적으로는 이질적인 것인] 중요성과 숙고적 우선성을 직접적으로 연결해주는 윤리적 고려사항이 바로 의무의 개념이다.

윤리적 삶[을 택한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일어나리라 또는 일어나지 않으리라 믿을 수 있(어야 하)는 것들(e.g. 살해 당하지 않기)을 [말하자면 보장]해주는 (여러 방법들 중) 한 가지 방법이다. 이때 이 윤리적 삶이 [이러한 보장을 가능케 하는] 방식 [가운데 단지] 하나[일 뿐인 것]은 [그에 도움이 되는] 특정한 동기들을 고무하는 것이다. 다시금 고무의 방식 [가운데 단지] 하나[일 뿐인 것]은 “그와 유관한 고려사항들에 높은 숙고적 우선성을 주는 성향을 불어넣는 것”이다(185). 이 고려사항들이 곧 의무를 구성한다.

그런데 이때, [어떤 특수한] 의무가 반드시 보다 일반적인 의무에 의해 지지될 필요는 없다. (b)에 반해 “늘 숙고적 우선성으로써 표현되지는 않는 일반적인 [그리고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염려(concern)*”가 내 삶 속에서의 즉각성(immediacy**, e.g. 나와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상황과 관련된 문제임)과 만나는 긴박한 곤경(emergency)에 부딪힐 경우, [일반적 의무에 의한 지지 없이도 어떤 특수한] 의무가 그것도 나의 것으로서 산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의무는 중요성 및 즉각성과 일반적인 관계(general relation)를 맺는 특별한 종류의 고려사항”일 뿐, 어떤 의무를 저버리는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꼭 다른 의무가 더 엄중한 것으로서 만족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187).

*윌리엄스는 계약론이 이것을 중시한다는 점을 높이 산다(186).

**어떤 의무가 나의 의무가 될 조건. 이는 나와 멀리 있는 사람은 나와 무매개적으로 관련되지 않는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으며, 단지 근대의 사회적 조건 하에서 무엇이 ‘이미디엇’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촉진할 뿐이다.

한편, 최상의 숙고적 우선성과 상당한 중요성을 지녀 관련된 숙고의 결론이 모종의 ‘달리 할 수는 없다는 무조건적(unconditional) 당위(must)’를 산출하는 경우, 그것을 “실천적 필연성(practical necessity)의 결론”이라 명명하자(188). 도덕적 의무는 실천적 필연성[만큼의 구속력을 갖고자 하지만, 다른 종류의 실천적 필연성이야 말할 것도 없고] 윤리적인 종류의 실천적 필연성조차 그런 의무[의 형태를 띨]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나에게 실천적으로 필연적인 무엇이 “타인에 의한 기대나 실패에 대한 탓하기-실천과 결부되지(associate)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188). 행위자는 타인에 대해서도 동일한 기대를 걸지도 않고 다만 그 자신이 이러저러한 신념을 지닌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언가를 당위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칸트가 무조건적인 실천적 필연성을 도덕성과 관련해서만 유효한 것으로 생각한 이유는 욕망과 전적으로 무관하게 성립하는 (행위의) 이유가 곧 도덕적 이유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도덕적 이유가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은 다시금 그의 특수한 형이상학으로부터 비롯한다. 달리 말해 칸트에게 실천적 필연성이란 행위자가 어떤 욕망을 지니든 그와 독립적으로 무조건 따를 이유가 있는 성질이지만, [사실] 실천적 필연성을 그렇게 규정할 필요는 없다. 실천적 필연성을 오히려 행위자에게 본질적인 어떤 욕망의 표현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의 견해에 따르면, 도덕적 보편성에 대한 실천이성의 요구사항들은 객관적인 것으로 제시되며 바로 그 이유로 존경심(Achtung)을 불러일으키지만, 동시에 행위자 자신의 내부에서만 배타적으로 비롯하는 무엇이라는 [역설이 대두된다. 이 역설은] 저 객관성을 이해하기 상당히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 요컨대 실천이성의 요구사항들이 지니는 객관성은 칸트의 방식으로 이해될 필요가 없고, 단지 실천적 필연성의 결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또 다른 문제는 도덕적 의무가 그것에 구속되기를 거부하는(refuse)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에서 구속력을 지니며 지닐 수 있느냐는 문제이다. 악행을 저지른 사람에 대해, ‘그에게는 선을 행할 이유가 있었다’고 확언하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는 (자신에게 있는 이유를 무시하고) 그가 행위했어야 마땅한(ought) 방식과 달리 행위했다는 종류의 탓하기-실천은 허황된 것이다. 도덕성의 체계는 모두가 모든 것에 대해 탓하거나 평가할 지위를 가진다는 환상, 그리고 그 불평이 모두 [이를테면 이후의 행위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환상에 기반해 있다. 누군가 해야 했던 것을 하지 않았는가, 또는 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을 했는가, 그것도 자발적으로 그러기를 택했는가를 묻고 그에 입각해 그의 탓을 고려하는 방식이 언제나 적절하지는 않은 것이다. [이를테면] 실제로는 의무의 위반과 독립적으로 성립하는 종류의 탈선도 있다(e.g. 완벽할 수 없는 양육).*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도덕성 체계를 따라 타인에 대해 그는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선을 행할 이유가 있었고, 따라서 그렇게 했어야 마땅한데 그러지 않았다는 식의 탓을 덧씌우곤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도덕성에 입각한 숙고적 공동체 내로 다른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탓하기-실천을 강제적인 제약(forced constrait)이 아니라 공유된 실천(shared practice)으로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사람들로 하여금 (딱히 부적절할 필요는 없는) “자신만의 두려움이나 원한”을 이를테면 “법의 목소리로 오해하게” 부추길 수도 있다(193).

*“The institution of blame is best seen as involving a fiction, by which we treat the agent as one for whom the relevant ethical considerations are reasons.” (193)

도덕성[이라는 특수한 윤리학적 체계]의 환상으로부터 벗어난다면, 우리가 남 혹은 자기 자신을 탓하는 실천이나 [악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reactive ethical reactions) 일반은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할 것이다. 도덕성 체계는 “성격과 심리적이거나 사회적인 결정”을 도외시하고(neglect), 단지 주체의 [순전한] 자발성[이라는 시야 좁은 기준]에 지나치게 의존해 책임을 분배한다(194). 이처럼 비현실적인 관점의 배후에는 도덕에서 경험적인 행운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배제하고자 하는 이념(ideal)이 작동하고 있다. 즉 행복, 재능, 인기 등과 달리 도덕성이란 그 분배가 조금도 운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순수한 영역이어야 하며, 그처럼 행운과 무관한 도덕성이야말로 [삶에서]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what ultimately matters)이라 상정하는 것이다. 이는 종교적 언어로 말하면 아무런 은총의 필요 없이 순전히 노력만으로 이룩할 수 있는 인간 실존의 궁극적인 공정성의 이념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든 행운 너머에 있는 가치의 관념은 환상”이다(196). 도덕성의 체계를 버릴 경우 “효율성이나 권력, 또는 교정되지 않는 행운(efficiency, or power, or uncorrected luck)”만이 한 사회의 정의(social justice)를 대안적으로 규정할 것이라는 위협적인 견해 역시 환상에 불과하다(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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