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나는 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가장 필요한 것 하나조차 얻지 못한 계절이었다. 적이 없는 생활의 불행을 자유로 뒤바꾸어 생각할 수 있는 용기를 다질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여전히 공부가 즐겁냐고 묻는다면 단적으로는 즐거운 게 맞지만, 즐거움이란 생각보다 복잡하며 불순하기 쉬운 현상이라 덧붙이고 싶다. 연구를 통해 내가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는 감각, 그간의 체계적인 노력에 대한 승인(인정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레퓨테이션과 미래의 임용에 대한 아주 최소한의 자신감 등이 뒷받침되지 못했을 때에 공부의 순수한 즐거움이란 불안과 자기비하로 얼룩지기 쉽다. 수요 없는 인문학 공부를 하는 주제에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걸까? 지금 가진 것은 거의 논리적인 가능성에 가까운 희망 정도인데, 그것이라도 미역 불리듯 잘 가꿔나가야겠다. 미역은 작은 한 움큼만 집어도 근사하고 배부른 국이 뚝딱 만들어진다.
1. Sebastian Gardner, Sartre's Being and Nothingness, Continuum, 2009.
예전에 국역본으로 읽다 너무 어려워서 포기한 책인데 그동안 짬바가 찼는지 이번에는 술술 잘 읽을 수 있었다. 이런 작은 성과에도 스스로를 토닥토닥 해주지 않으면 지금의 생활을 견뎌낼 수 없다. 의식은 그 어떤 종류의 실체도 아닌 무이며, 오직 그런 의미에서만 자유라는 형이상학적 테제의 야심이, 사르트르는 극단적 주의주의자라는 편견에 부딪혀 오늘날 충분히 인정 받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사르트르는 의식--대자존재--의 자연적 실재성을 부정하면서도 의식 아닌 존재--즉자존재--의 존재론적 독립성을 인정함으로써 실재론도 관념론도 거부한다. 사르트르는 (즉자존재의) 존재란 현상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논지로 후설의 현상학 역시 비판한다. 현상을 통해서 비로소 존재가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 덕분에 현상이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는 초현상적이다. 단 그가 후설의 판단 중지 개념의 의의를 간과하는 것은 아닌가 의심스럽다. 판단 중지는 현상 이전의 존재가 지니는 확실성에 대한 소박한 믿음을 거부하는 절차인데, 적어도 가드너의 입문서만 봐서는 사르트르가 저 믿음을 소박하지 않은 방식으로 정당화하는지 잘 모르겠다. 달리 말하면 내가 생각하기에 후설은 존재를 현상으로 환원했다기보다, 현상하지 않는 존재에 대한 판단을 중지했을 뿐이다. 나아가 사르트르가 생각하듯이 후설에게 현상됨이 인식함과 동치인지도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
그럼에도 현재의 [점적인] 대자존재와 여태껏 설립되어온 자아, 성격 실린 인격 사이를 무 혹은 자유가 단절시키고 있다는 통찰은 참 멋지다. 내가 언제든 나의 과거를 배반할 수 있고 내 미래가 언제든 현재의 나를 배반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불안(l'angoisse)을 견디는 데서 비로소 진정성이 자라난다. 정확히 이 배반의 부재를 진정성으로 정의하는 후설의 실존철학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수치심을 통해 타인의 주관성이 무매개적으로 증명된다는 통찰도 빛난다.
마지막으로 가드너의 끝장나는 실존주의 정의.
"[...] a movement of thought whereby established values and the world-pictures associated with them, are subjected to radical sceptical revaluation and the individual, thrown back on himself as a final resource, seeks to avoid nihilsm by extrapolating from his bare self-awareness a normative orientation." (6, 강조는 나의 것)
2. James Hart, The Person and the Common Life: Studies in a Husserlian Social Ethics, Springer, 1992.
후설의 유고들로부터 인격의 형성은 수동적 종합의 영역에서부터 시작된다는 함의를 도출해내는 책이다. 아주 완성도가 높다. 내 식으로 읽자면 ⟪선의 군림⟫ 속 머독에게서와 마찬가지로 후설에게서 도덕은 의식적인 의지 이전에 이미 시작된다. 두 사람은 모두 일종의 '지각적 (행)복perceptual flourishing'을 말하고 있다. 단, 머독은 전적으로 초월적인 선을 관조할 수 있기 위한 자기-지우기(unselfing)을 주장하는 반면, 후설에게서 선이란 자기의 완성과 동일시된다. 가장 내가 아닐 때 선에 가닿는지, 아니면 가장 나일 때 선에 가닿는지, 즉 '나'라는 것은 도덕에 가닿는 데 걸림돌이 되는지 아니면 도덕의 필수불가결한 매개체인지의 문제를 둘 사이의 갈등을 통해 읽을 수 있다. 오늘도 헛되이 늘어나는 나의 희망 퍼블리케이션 리스트...^^
3. Philippa Foot, Natural Goodness, Oxford, 2001.
꿀벌이 꿀을 모으지 못하면 자연적인 결함을 가진 것이든, 인간이 도덕적이지 못하면 자연적인 결함을 가진 것이라는 식으로 윤리를 설명할 수 있지 않겠냐고 제안하는 책이다. '자연적 규범성'의 언어를 내세움으로써 풋은 도덕을 인간의 아리스토텔레스적 필요(Aristotelian necessity)로 규정한다. 그러나 인간의 필요를 논함에 있어 풋이 원하는 만큼 진화론적 고려사항들을 배제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즉 '인간에게 자연적 좋음이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진화와 무관한 고정된 답변을 내놓을 수 있는지는 불확실하며, 애초에 그처럼 인간의 자연적 좋음이 진화와 독립적일 때 저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가 내릴 수나 있는지에 관한 인식론적인 질문이 풋에게서 부재한다. 가장 큰 문제는, 만일 인간의 자연적 좋음이 진화와 독립적이지 않다면, 자연적 규범성의 개념이 풋이 멀리하고 싶어했던 자신의 기존의 관점--즉 도덕은 주관의 관심사와 욕망에 의해 조건화되는 가언명령이라는 테제--과 본의 아니게 은근히 가까워진다는 점이다. 주관의 관심사와 욕망은 아닐지언정, 이런저런 상황에 의해 좌우되는 '자연적' 사정에 의해 도덕이 조건화되기는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4. Bernard Williams, 'Persons, character and morality' & 'Moral luck' & 'Utilitarianism and moral self-indulgence', in Moral Luck: Philosophical Papers 1973-1980, Cambridge, 1981.
성지순례하는 기분으로 매우 빠르게 읽었다. 후설과 윌리엄스 모두 인간의 생생한 체험을 이유로 인격을 배제하는 윤리학에 반기를 든다. 행운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는다는 점, 가치들을 비교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일종의 통화(axiological currency)가 없다고 믿는다는 점도 동일하다. 그러나 후설에게 도덕성은 (가장 우선시되는 문제overriding concern은 아닐지라도) 진정성의 일부인 반면 윌리엄스에게는 그렇지 않다. 윌리엄스에 따르면 도덕적인 커미트먼트를 배신한 (유사-)폴 고갱은 여전히 좋은 삶을 살았다. 물론, 가족을 버리고 타히티에 떠난다는 그의 실천적 숙고의 정당성은 화가로서의 성공이라는 행운의 요소에 의존한다(했다). 행운이 숙고의 정당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중요하다. 아래는 한 교수님과의 미팅을 위해 준비했던 파워포인트의 일부.
5. 이 외 후설의 실존철학적이라 불릴 수 있는 생각들에 대한 2차 문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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