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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이나 소회 같은 것

20240831 밀리면서 나아가기

 문학상 공모에 또 떨어졌다. 이번에는 0명을 뽑는 공모전이어서 많이 기대를 했고, 어쩌면 나에게 운명적인 시험대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운이 부족하더라도 내 글이 정말 좋은 글이라면, 내가 절대적으로 실력이 있는 작가라면 뽑힐 수 있을 거라고. 만약 떨어진다면 내가 그대로 실력이 부족한 거라고. 그리고 설령 떨어진다 하더라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해냈으니, 그 과정만으로 충분하다고. 하지만 페이스톡으로 애인의 얼굴을 본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져내린 것을 보면 그래도 어떤 성취를 원하기는 했나 보다. 하기야 갑작스러운 소망도 아니다. 만 19살 때부터 응모를 시작했고, 1년에 한 번씩은 어딘가에 새 글을 냈다. 이제 햇수로 치면 어엿한 10년차다. 문단의 인정을 받고 싶었다. 평생 문학을 업으로 삼기로 마음 먹은 사람들의 인정에 목말랐다.

 실재 따위는 고립되어 사는 늑대인간조차 누릴 수 있다. 실재 이상의 현실, 즉물적인 것 이상의 개방적인 것을 선물해줄 수 있는 것은 나를 어떤 식으로든 대하여주는 타인 그리고 공동체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은 아름답고 동시에 잔인하다. 현실성을 부여해줄 수 있기에, 그러나 그것을 박탈할 수도 있기에. 하지만 문단의 사람들만이 나의 타인인 것은 아니다. 애인이 나를 위로해주었고, 그동안 소설을 계속해서 쓰기 위해 숱하게 받았던 상담의 선생님들께서 나를 위로해주셨었고, 지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나와 소통 중인 철학자들이 있다. 실컷 울고 나니 꽤 덤덤해졌다. 잠깐만 생각해보면, 일면식도 없는 나의 글을 시간 내서 읽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그저 감사하다.

 어제는 초기 근대의 관념론에서 스미스에로 이어지는 형이상학의 계보를 연구하는 S 언니와 하루종일 함께 있었다. 누아르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셸러를 읽다가, 언니가 준비하는 발표를 듣고 피드백을 돌려줬다. 예상 질문도 함께 짜고, 공부와 무관한 수다도 조금 떨었다. 저녁에는 필리포가 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하는 피자집에 가서 마르게리타를 먹었다. 필리포가 언니가 시킨 글라스 와인을 거의 컵이 넘치게 따라줬다. 정이 많은 친구다.

 언니에 따르면 초기 근대 철학과 그 이전의 스콜라철학 사이에는 상당한 연속성이 있다. 전자의 문제 설정, 즉 무엇을 철학적으로 중요한 문제들로 생각할 것이냐에 대한 대답이 후자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배운 뒤 중세를 건너뛰고 데카르트에로 점프하는 대개의 교육과정--시간적 제약 및 중세 철학 공부의 특수한 어려움 때문으로 인한--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할 일도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투박한 정식들을 섬세하게, 누가 보면 강박적으로 보일 정도로 분석하는 작업이 곧 스콜라 철학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내친 김에 교부 철학과 스콜라 철학 사이의 차이가 무엇이냐고도 물어봤는데, 언니가 정말 멋진 대답을 해주었다. 기독교의 사상적 아버지들은 당시 로마 철학, 이를테면 에피쿠로스주의나 스토아주의와 경쟁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성경의 메시지가 철학이라 불리는 그리스발 작업과 이질적인 것이 아님을 증명해야만 했다. 반면 스콜라 철학 시기에 기독교 철학은 이미 주류였다. 정체성이 더 이상 고민거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어떤 일에 대해 몇 년 이상 호기심을 갖기가 쉽지 않은데, 철학은 정말이지 얻게 되는 새로운 통찰마다 어떤 감동을 준다. 저녁 식사를 하고서는 피노키오에서 젤라또를 하나씩 사서 식물원의 야외 정원을 걸었다. 언니가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마침 같은 색의 장미가 수북히 핀 길가를 지났다. 수줍어하는 언니의 사진을 찍어줬다. 이곳에서 이렇게 두 번째 가을을 맞는다.


집에서도 언니랑 마저 공부.
각도 때문에 불평등(?)해 보이지만 같은 양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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