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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현상학

메모

Q. 후설은 칸트적 물 자체에 대해 뭐라고 얘기해요?

A. 헉, 글쎄요. (말이 길어지기 시작함)

 관념론을 옹호하게 되는 가장 큰 동기는 회의주의의 극복이다. 내가 가진 관념과 소위 실재 사이의 불일치라는 문제, 즉 내가 아는 세계가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아닐 가능성을 물리치기 위해 나의 관념으로부터 독립적인 실재의 존재를 어떤 방식으로든 거부하는 것이다. 그로써 버클리든 칸트든 피히테든 관념론자들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바는 주객의 일치이며, 후설의 지향점 역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후설의 필증성 개념, 즉 의심 불가능성이란 양태에서의 확실성의 개념에 집착해온 이유는 필증적인 명증이 곧 주객일치의 증거가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설의 초월론적 관념론이 가지는 독특성은 바로 그것이 실재론을 포섭한다(고 적어도 주장된다)는 사실이다. 후설이 포섭한다고 자부하는 실재론은 심지어 표상주의 실재론도 아니고 직접 실재론이다. 그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경로는 구성의 개념을 통해서이다. 우리가 의미있게 '실재'(또는 '즉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든 초월론적 주체(들)이 구성한 산물이다. 구성을 의미와 타당성을 비로소 부여하는 작용이라고 간단히 정의내릴 수 있다면, 후설의 요지는 어떤 것이 실재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체(들)에 의해 실재라는 의미를 부여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체(들)의 참여 없이 객체는 있을 수 없다. 주체의 참여가 개입되지 않은 채로 성립하는 객체라는 것은 불가해하고, 무엇보다도 무의미하다. 고로 '그런' 객체의 존재는 판단 중지, 환원의 대상이다. 환원의 대상이 되는 자연적 태도란 결국 '그런' 객체의 존재를 무비판적으로 믿는 태도다.

 여기서 나는 주객일치를 바라보는 후설의 전략이 실재를 주체의 구성물로 재정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같은 재정의는 실재라는 말이 적용되는 외연이 축소되는 효과를 낳는다. 그런데 이러한 전략은 회의주의자에게 맞서기에 불충분해 보인다. 후설은 회의주의자가 인식하기를 원하는 실재--편의상 진정한 실재라고 부르자--를 단지 논의의 터로부터 제거하는 데 그칠 뿐이다. 물론 후설은 환원을 단순한 태도변경으로 정의하면서 초월론적 태도에서 보여지는 대상-현상과 자연적 태도에서 믿어지는 대상-자체 사이의 동일성을 주장하지만, 후자가 진정한 실재에 해당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후자는 진정한 실재라고 믿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후설을 변호해본다면, 비록 그는 (자신의 말과 달리) 회의주의를 극복해내는 데 성공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무언가를 '실재'라고 부를 때 의식 내부에서 어떤 사태가 발생하는지, 혹은 무언가를 '실재'라고 부르기 위해 어떤 사태가 발생해야만 하는지에 대해서는 답변을 내놓는다. 후설이 처음부터 관심을 가진 것은 실재의 의미일 뿐이다. 예를 들어 내 눈앞에 커피 잔이 실재하기 위해서 나는 우선 세계가 제공하는 자료들 가운데 형태나 색상에 있어 동질적인 것과 이질적인 것을 분간해야 하고, 동질적인 자료들은 그것들끼리 종합해냄으로써 그것들을 그것들로부터 이질적인 배경으로부터 부각시켜내야 하며, 그러한 부각으로부터 성립하는 감각내용을 특정한 시간구간에 걸쳐 수용한 뒤, 그와 같이 시시각각 달라지는 감각내용을 하나의 통일체로 종합해내는 파악의 작용을 수행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동시성과 연속성의 질서를 부여하는 작용인 시간화의 작용이 선행되어야 하며, 시간화는 후설에게 본능의 소관이다, 등등.

 그러나 여기서 또 한 가지 나를 괴롭히는 목소리는 후설이 존재론의 문제를 인식론적 해명으로써 해결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문이다. '후설에겐 존재론이 없는 것 아닙니까?'라는 전형적인 물음을 반박하는 논문들이 수두룩하지만 결국 후설이 내놓는 존재론은 자기 식대로 재정의된 존재론, 인식된 한에서의 존재만을 다루는 존재론이다. 애초에 존재 자체가 인식된 존재, 구성된 존재, 주체에 의해 의미가 부여된 존재로 정의되어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후설을 변호해본다면, 인식된 존재, 구성된 존재, 주체에 의해 의미가 부여된 존재를 넘어서는 존재에 대해 우리는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가능한 존재론 가운데서 최선의 존재론을 펼치고 있다고는 생각해볼 수 있다. 단, 이에 대해 후설이 무의식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게 아니냐는 반박이 가능해 보인다. 과연 우리네 삶이 주체의 의식에 의해, 그리고 의식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들로만 이루어지는 게 맞는지, 의식의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에 대해서도 그 존재 및 존재 양태와 관련한 언어를 부여하는 게 가능하지는 않은지 등등. 이를테면 정신분석을 현상학은 거부하는지, 거부해야 하는지의 문제를 생각해보고 있다.

 후설의 현상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내가 후설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은 후설이 모든 문제를 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후설과 동일한 것을 보는 경지에 내가 못 이르렀을 뿐'이라는 태도는 겸허해보일지언정 지양되어야 한다. 이해가 신장되면 신장될 때마다 견해를 수정하면 되는 것이고, 당장 보이는 한계들에 대해서는 한계들인 것이 맞다고 인정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후설리안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실재의 의미에 대해 묻고 답하는 것, 자아가 세계와 접촉하게 되는 경로를 의식의 경계 내부에서 추적하는 작업의 의의에 (배타적으로가 아니라 단순히) 우선적으로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