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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현상학

자크 데리다, <목소리와 현상> 5장 요약 및 발제

Jacques Derrida, trans. By Leonard Lawlor, Voice and Phenomenon: Introduction to the Problem of the Sign in Husserl’s Phenomenology,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2011(모든 강조는 필자의 것)

5장, “기호와 눈 깜짝할 사이”

 4장에서 데리다는 고혼의 삶이 꾸리는 내적 담화에서만큼은 지시가 배제되며 오직 표현만이 기능한다는 후설의 논증을 두 유형으로 나눈 바 있다. 5장은 두 번째 유형, 곧 다음의 논증 유형을 분석하면서 시작된다.

 “내적 담화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아무것도 소통하지 않으며 단지 소통하는 척만 할 수 있다. 이는 내가 나에게 아무것도 소통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 심리적 작용들의 현존은 지시될 필요가 없는데(일반적으로 오직 현존만이 지시될 수 있음을 상기하라), 왜냐하면 심리적 작용들의 현존은 당장의 순간에 주체에게 무매개적으로immediately 현전되기 때문이다.”(Lawlor 역, 41)

 내적 담화에서 심리적 작용으로서의 체험은 지시될 필요가 없다. 지시는 정의상 당장 현전하지 않는 것의 현존에 대한 지시인데, 체험은 주체에 의해 말하자면 ‘살아짐’으로써 그에게 직접 현전하기 때문에 여기에는 지시되어야 할 비-현전이 없기 때문이다. 이때 데리다가 주목하는 것은 체험의 자기현전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 달리 말해 ‘눈 깜짝할 사이’의 불가분성 및 동일성에 관한 후설의 믿음이다. “자기현전은 시간적 현재의 분할되지 않은 통일성 속에서 산출되어야 하는데, 기호의 덕으로 스스로에게 알려지게 만들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위해서 그렇다.” 데리다는 자기현전을 ‘자기직관’ 또는 ‘자기지각’이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하면서, 기호가 들어설 자리 없이 인식적 투명성이 보장되는 자기직관 또는 자기지각의 사태가 곧 후설이 진리의 담지처로 간주했던 “원본적 지각 또는 직관 일반의 가능성”을 확보한다고 주장한다. “[…] 원본적 직관은 기호의 부재와 무용성에 대한 체험이다.”(51) 

 요컨대 내적 담화에서의 지시의 부재를, 그로써 숨겨지는 것 없이 현전되는 바에 대한 원본적 직관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후설은 현전이 이루어지는 현재를 단순한 점적인 순간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현전이 이루어지는 현재가 단순한 점적 순간이 아니고 분할가능하다면, 즉 “원본적이거나 환원 불가능한irreducible 종합 속에서 구성된다면” 후설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을 것이다(52). 추측컨대 현전의 내용 속에 불투명한 요소가 섞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적 시간의식의 현상학⟫에서 후설이 내세웠던 현재의 개념은 어떤 것이었던가? 그것은 종합의 산물인가, 아니면 그 근본에서부터 동일자인가?

 첫째, 후설은 시간의 흐름을 점들로 분할하여 각 시점을 서로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며, 모든 체험은 특정한 점적 국면에 임해서가 아니라 지속을 가지는 시간구간에 걸쳐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면서도 원천지점source-point으로서의 현재의 자기동일성을, 달리 말하면 “현행적 지금의 점적 성격”을 옹호한다. 이 지금은 정초의 토대가 되는 원본적 소여가 주어지는 바로 그 시점이자, 대상(의 특정 국면)이 최초로 주어지기 시작하는 시점이고, 파지적 꼬리가[즉, 과거들의 파지변양태들이] 그에 부착되는 근원인상에 해당하며, “질료가 언제나 새로워지는 와중에 지속되는 [근원]형식”이다. 데리다가 보기에 현행적 지금이 가지는 이 같은 특권적 규정들은 현전의 형이상학의 핵심을 구성한다. 현행적 지금은 현전의 형이상학 내에서 명증성의 원천으로서 그것 없이는 진리와 의미가 논해질 수 없다. 현행적 지금의 특권을 상대화하는 “비현전non-presence에 대한 사유”를 수행하려면 기존의 철학 바깥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53).

 비현전에 대한 사유는 현전의 형이상학의 말하자면 여집합도, 부재에 대한 성찰도, 무의식에 대한 이론도 아니다. ⟪내적 시간의식의 현상학⟫은 시간의 개념을 해설함에 있어 무의식의 관여를 명시적으로 부정한다. 후설의 표현을 빌려오면, 설령 대상화가 성립하기 이전이라 할지라도 사후적으로 의식되는 무의식적 내용과 같은 것은 없다. 풀어 말해, 설령 근원인상으로서 수용된 또는 산출된 내용이 아직 대상 또는 대상의 일부로서 통각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것은 의식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애초부터 의식조차 되지 않았던 것이 파지에 의해 (새로운 근원인상의 수용 또는 산출에 발맞춰) 한발 늦게 의식되는 사태는 불가능하다. 쉽게 말해, 주체가 세계의 특정한 모습과 최초로 맞닥뜨리는 바로 그 점적인 순간에 그에게 의식되지 않는 것은 없다. 세계의 내용물은 일순 남겨지는 것 하나 없이 투명하게, 말하자면 까발려진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설은 “현재의 단순한 자기동일성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지한다.”(54) ⟪내적 시간의식의 현상학⟫에서 현전과 재현(또는 현전화)은 철저히 구분된다. 이를테면 재생산적 회상과 파지가, 상상과 원본적 인상이, 재생산된 지금과 현행적 지금이 서로 같을 수는 없다. 그런데 이 같은 구분 그리고 비교의 가능성은 “지각된 현재의 현전이 비-현전과 비-지각과의 연속적인 합성composition 속에서만 자기 자신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드러내준다. 비-현전과 비-지각에 해당하는 파지 및 예지와의 합성 없이 현재는 현전할 수 없는 것이다. 파지와 예지는 (좁은 의미에서의) 현재에 해당하는 근원인상에 우연히 덧붙는 것이 아니라 필수불가결하게 그리고 본질적으로 관여한다. 이러한 필연성으로 말미암아 후설에게 현재는 단순하게 자기동일적이지 않다.

 후설이 파지를 지각의 일종으로 개념화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파지를 비-지각이자 비-현전으로 규정하는 본 논의가 일견 부적절해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개념화는 단서조항을 요구한다. 바로 파지는 어디까지나 “현재의 변양으로서의 과거”에 대한 지각일 뿐이라는 것이다(55). 파지는 과거를 ‘원본적으로 현전시키는’ 사태이기에 무언가를 원본적으로 주어지게 하는 작용으로서의 지각의 정의에 들어맞지만*, ‘과거를’ 원본적으로 현전시키는 사태이기에 비-현재만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소여방식의 본질적 차이로 인해 파지, 나아가 예지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또는 좁은 의미에서의 지각이 되지 못하며, 파지에서는 지각이 비지각으로, 예지에서는 비지각이 지각으로 연속해서 흘러들어간다고 보아야 한다. 

*후설이 파지를 지각의 일종으로 간주하는 것은 (일차적 기억으로서) 파지와 (이차적, 재생산적 기억으로서의) 회상, 지각과 상상 사이의 불연속성을 그가 고집하기 때문이다. 이는 (기억을 상상의 일종으로 간주한) 브렌타노의 교설, 곧 상상이 지각과 연속적으로 합성될 수 있고 실제로 합성된다는 교설을 후설이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다.

 이때 지각으로써 수용 또는 산출되는 근원인상은 파지와 예지 사이에 말하자면 끼여버린 경계, 곧 이념적인 한계-개념이며 일종의 추상체이다. 구체적인 시간의 흐름에서 근원인상은 항상 파지 및 예지와 불가분하게 작동한다. 이렇게 “지금과 비-지금 사이의, 지각과 비-지각 사이의 연속성”을 인정하고 나면 “우리는 순식간Augenblick이 지니는 자기동일성 속으로 타자other를, 눈 깜짝할 순간instant 속으로 비-현전과 비-명증을 받아들이게 된다.” 눈 깜짝할 사이, 그것은 단순한 점적 순간이 아니라 제 안에 차이를 담지하는 지속duration이다.

 자기동일적인 줄로만 알았던 순간에 내재한 타자성은 심지어 현전, 궁극적으로는 표상 일반의 가능조건이기까지 하다.* 다른 한편 이 타자성을 염두에 둔다면 파지와 회상 사이의 차이는 지각과 비-지각 사이의 차이가 아니라 비-지각의 두 양태들 사이의 차이가 된다. 그 차이가 얼마나 크든지 간에 파지와 회상은 똑같이 비-현전과 관계맺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비-현전과의 관계성은 순간의 자기동일성뿐만 아니라 “구성하는 흐름 자체”의 자기동일성 역시 파괴한다(56). (구성된 통일체와 대비되는) 구성하는 흐름은 특정한—특정해낼 수 있는, 그리하여 자기동일적인—음영 또는 국면들로 분할될 수 있는 결합체로 이해되지 않으며, 후설의 비유에 의거하면 오직 차이만이 발견되는 ‘헤라클레이토스적’ 흐름이다.

*Q. ①‘파지/예지가 근원인상에 항상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합성된다’ 또는 ‘재현 그리고 재현이 대변하는 타자성이 현전에 항상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결부된다’는 명제와 ② ‘파지/예지가 근원인상을 가능케 한다’ 또는 ‘재현 그리고 재현이 대변하는 타자성이 현전을 가능케 한다’는 명제를 구분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데리다가 ①과 ②를 동일시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상의 논의를 최초의 논증과 결부시키면 내적 담화에서 체험이 주체에게 자기현전되는 그 현행적 순간에도 사실은 재현이 개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순간 속에는 재현을 요구하는 과거의 요소(파지)와 미래의 요소(예지)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재현이 정의상 현전에 비해 명증성을 삭감시킨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기호의 부재 덕택에 절대적 명증성을 향유한다는 원본적 소여의 신화는 이제 한갓된 꿈임이 밝혀진다.*

*Q. 시간의 흐름 가운데서 현전에 항상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얽히게 되는 재현이 ‘기호적’ 재현은 아니지 않은가? 모든 기호는 재현의 수단이 맞지만, 모든 재현이 기호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셋째, 현전과 재현 사이의 구분은 현상학이 꿈꾸는 정초의 토대를 제공하기 때문에 후설로서는 포기할 수 없는 무엇이다. 그런 이유에서 후설은 (현전과 분리될 수 없으며 현전을 가능케 하는) 파지와 예지를 자꾸만 ‘넓은 의미에서의’ 원본성을 가지는 것으로, (그리하여 재현이 아닌) 지각의 일종으로 상정하는 것이다. 후설이 파지의 명증성을 회상의 명증성에 비해 탁월한 것, 심지어는 절대적인 것으로 상정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이다. 그럼으로써 후설은 “두 가지의 명백하게 화해 불가능한 가능성들을 동시에 구제하고자” 한다. 한편으로 “절대적 지각적 원천”으로서 살아있는 현재는 그 사태 자체를 돌이켜보았을 때 “비지각으로서의 파지와의 연속성 속에서만” 구성된다(57). 다른 한편으로 “확실성의 원천 일반은 살아있는 현재의 원본성이기 때문에, 파지를 원본적 확실성의 권역 속에 유지시키는 것 그리고 원본성과 비-원본성 사이의 경계를 그것이 순수 현재와 [파지를 포함하는] 비-현재, 살아있는 현재의 현행성과 비-현행성 사이가 아니라 현재에로의 귀환re-turn 혹은 현재의 복원re-stitution의 두 형식들 사이, 파지re-tention와 재현re-presentation 사이를 통과하도록 옮기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57-58)

 이상 현전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밝혀진 파지와 재현의 “공통적 뿌리”는 바로 “반복re-petition의 가능성”이자 “흔적”이다. 이 반복 가능성은 “현재의 순수한 현행성에 거주할 뿐만 아니라 […] 차연différance*의 운동으로 말미암아 그것[현재의 순수한 현행성]을 구성”한다(58). 쉽게 말해, 현재의 현전은 그것의 반복 가능성에 의해, 나아가서는 그것의 지나가버림의 덕에 비로소 가능해진다. 현재가 지나가면서 남기는 흔적은 역설적이게도 현재에 주어지는 원본적 소여보다도 더 원본적이다.** 달리 말해, 현전이라는 형식의 이념성은 그것의 무한한 반복 가능성, 그것에로의 무한 번의 귀환 가능성을 함축한다. 다만 현재의 귀환은 파지라는 유한한*** 운동 속에서 이루어질 뿐이며, 이 유한한 운동을 바탕으로 해서만 원본적 진리가 가능하다.

*Lawlor (2019)에 따르면 “데리다의 유명한 용어 “차연différance”[…]은 기계적 반복 가능성repeatability 대체 불가능한 [어느 사건의] 특이성singularity에 내부적[구성적]이지만 그럼에도 둘은 서로에게 이질적인 것으로 남는 [...] 관계를 가리킨다. [...] 달리 말하면, 데리다에게서 순수성에 대한 취향은 부적절함impropriety에 대한 취향, 그러므로 불순함에 대한 취향이다. [...] [데리다의] 기본적인 논증은 언제나 다음을 보이고자 한다. [바로] 그 누구도 대체 불가능한 특이성과 기계적 반복가능성[...]을 서로에게 외재하는 두 실체들로 분리시킬 수 없으며, 누구도 하나를 다른 하나로 환원시킴으로써 하나의 순수한 실체(속성들 또는 양상들을 가지는)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반복 가능성과 특이성의 분리 불가능성 및 필연적인 교차는 후설의 파지와 예지의 개념에 의해 영향 받은 것이 분명한, ‘지금’에 대한 경험을 분석하려는 시도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데리다에게 “현재는 그러므로 언제나 부재와 복합되어있다”는 의미에서 특이한 동시에 반복 가능하다--즉 불순하다.”(Lawlor, Leonard, “Jacques Derrida”,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Fall 2019 Edition), Edward N. Zalta (ed.), URL = <https://plato.stanford.edu/archives/fall2019/entries/derrida/>)

**Q. “[…] 현재의 현전은 […] 반복의 운동으로부터 [비로소] 시작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그 역은 아니”라는 데리다의 주장에서와 달리, (파지 덕에 근원인상이 가능한 만큼) 근원인상 덕에 파지가 가능하지는 않은가?(58) 뿐만 아니라 사유를 계속 진전시킨다면, 예지 없이는 (예지적 지향의 충족으로서의) 근원인상이 없으므로, 가장 근원적인 것은 흔적으로서의 파지가 아니라 예지가 아닌가?

***오래 전의 현재는 당장의 현재에 파지로써 덧붙을 적에 희미하게 변양되어있으며, 그 희미함이 극에 달할 경우 망각에 이르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원본적 현전에 내재하는 차이, 즉 그것의 비-자기동일성이야말로 체험 일반의 반성과 재현을 가능케 한다. 파지의 작용 없이는 지나가버린 체험이 의식에 보유되지 않고 그저 소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궁극적으로 무너지는 것은 후설이 그토록 공들여 확립하고자 했던 표현과 지시 사이의 구별이다. 지시, 그리고 지시와 결부되는 (가변적) 현존, 자연성, 매개성, 경험성 등등의 개념은 이제 (근본적으로 파지에 입각해 작동하는) “초월론적 시간화의 운동 가운데서 뿌리뽑힐 수 없는 근원성을 가지”게 된다. 나아가 고혼의 삶으로의 환원이 대변하는 모든 초월론적 환원, 특히 (타인을 배제하고 나만을 유일한, 고독한 모나드적 주체로 상정하는) 원초적 환원을 통해 현전되는 바는 (모든 시간이 점적 현재를 지시한다면 사실 사용할 수 없는 용어인) ‘시간’에 의해 균열을 내포한다. 그리하여 고독한 유아(唯我)는 그 자신의 현전의 가능조건—비-현전하는 타자의 재현—에 의거해 바깥을 향하여 벌어지게split open 된다.

 순간의 동일성, 그리고 이에 유비적으로 유아(唯我)의 동일성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동일성과 비동일성 사이의 동일성”일 때, 이 ‘변증법’은 삶을 비로소 차연의 차원에로 열어준다. 풀어 말해, 해당 ‘변증법’은 (주체에게 그 전부가 투명하고 확실하게 현전되는 줄 알았던) 내재적 체험들에 지시, 나아가 기호 그리하여 언어 일반(에 의한 재현)을 요구하는 시꺼먼 빈틈hiatus이 자리한다는 점을 드러내준다. 후설은 언어를 “의미의 원본적이고 선-표현적인 층위에 덧붙여진” 따라서 “이차적인 사건”으로 취급하고자 하지만, 데리다의 눈에는 “표현적 언어 자체가 자기-관계의 절대적 침묵을 뒤따라야supervene 한다.”(59) 쉽게 말해, 침묵이 대변하는 언어의 부재상황, 곧 순수한 선언어적 체험이 주체에게 자기현전되는 사태는 오히려 언어의 개입을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