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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현상학

장-폴 사르트르, <상상계> 일부 요약

장-폴 사르트르, 윤정임 옮김, 사르트르의 상상계, 기파랑, 2010

Jean-Paul Sartre, The Imaginary: A phenomenological psychology of the imagination, (translated and published by) Routledge, 2010

 

 I 확실한 

I-I. 기술

1. 방법

 이미지화하는 작용에서 이미지화되는 대상이 아닌 이미지화함 자체, 곧 “대상이 주어진 방식”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반성이 요구된다(21). 이때 “반성적 의식은 전적으로 확실한 소여들을 건네준다는 것”이 데카르트 이래로 알려져있다(21).* 내가 나의 이미지화함을 반성한다면 반성의 내용, 즉 내가 이미지화하고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확실하게 알려진다. 반성에 비해 과학은 이미지를 기술하지 않고 그와 관련해 귀납적으로 추론할 뿐이며, 확실성이 아닌 개연성만을 가능케 한다.

*(1) 반성 없이는 대상에 몰두하기 때문에 (2) 반성 없이는 확실한 소여를 확보할 수 없기 때문에

Q. 의식을 ‘가장 잘’ 분석하는 방법이 정말 현상학적 반성/기술인가?(D씨)

A. 의식을 1인칭적인 것으로 정의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의식에 대한 정의와 관련이 있다. 현상학자들은 의식을 체험으로 정의한다.

Q. 데카르트의 내성의 투명성(내가 아는 게 전부)/오류불가능성(그 전부가 정확함) 테제를 너무 나이브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가? 나아가 반성의 ‘내용’이 투명/오류불가능한 것이 맞는가? ‘의식이 반성적’임이 확실한 것이지?

A. 여기서 반성의 내용이 ‘의식의 반성적’이라는 사실과 그 양태인 것 같다.

Q. 한계사건뿐만 아니라 다른 의식의 유형들에서도 현상학이 가장 적절한 방법인지 의문스럽다. ‘가장 타당한 관점’이 과연 반성인가? 반성에는 아무런 외부 힘도 개입해있지 않은가? 정념이나 환경. 반성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 의식을 결정하는 요소들을 규정하기 위해서는 실험이 나을 수도 있다. 반성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D씨). 

A. 후설이라면 지향성을 밝혀주는 것은 반성뿐이라고 말할 것 같다. 다만 반성/직관을 통해 보여지는 본질이 진짜 본질이다, 라는 암묵적인 전제는 작동하고 있다. 나아가 내가 직관한 본질이 객관적으로, 남에게도 본질이냐, 나의 상상력의 한계에 제동이 걸리지 않는가 하는 이야기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에게 상상 불가능한 것이 남에게는 상상 가능할 수 있으니까. 중요한 것은, 사르트르가 과거에 이루어진 모든 이미지화의식들의 공통점을 찾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2. 번째 특성 : 이미지는 의식이다

 ‘내재성의 환상’에 의하면 “이미지는 의식 안에 있고[내재하고], 이미지의 대상은 이미지 안에 있”다(23). 이에 따라 “이미지는 그것이 표상하는 물질적 대상과 암묵적으로 동화되어 버린다.”(25)* 그러나 그 경우 의식과 이미지 사이의 종합이 위태로워진다. 이미지가 의식 외부의 대상과 동화되어 있다면, 의식과 어떻게 종합될 수 있는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의식은 이미지가 나타나는 그 지점에서 불투명해지고 만다. 그러나 이는 의식의 투명성을 알려오는 내성의 결론에 모순된다.

*Q. 관념과 관념이 관계하는 대상 사이의 외재성 테제가 어떻게 이 테제로 연결되는가? 이 외재성은 오히려 이 동화에 방해가 되지 않는가? 내재성의 환상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A. 흄에 대한 사르트르의 비판의 요지는 어쩌면 흄이 이미지화함과 이미지의 지향적 대상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 같다. 내재성의 환상은 의식을 어떤 공간처럼 보고 그 내부에 이미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때 이미지화함이 의식의 작용이기 때문에 이미지화함은 의식의 내부에 있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고, 만일 이미지화함이 이미지의 지향적 대상과 동일시된다면 이미지의 지향적 대상도 의식의 내부에 있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미지의 지향적 대상은 의식에 내재하지 않고 의식을 초월한다. 외재성 테제는 초월성( 대한 지향) 놓치게 하기 때문에 문제적이다. 쉽게 말해, 이미지의 대상은 지향적이기 때문에 외재적이지 않지만, 초월적이기 때문에 내재적인 것은 아니다. 나아가 이미지화함은 의식이다.

A2. 지각을 이미지화와 동일선상에 놓고 있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지각과 이미지 사이의 차이는 단순히 강도의 차이가 아니다. 나아가 의식을 이미지들의 그릇으로 보면 작용함을 놓친다는 점도 비판에 걸려있다(D씨).

 내재성의 환상이 말하는 것과 달리, 현상학적 사유에 따르면 이미지화의 대상은 의식의 안에 있지 ( 의식과 지향적으로 관계한). 이는 지각의 대상이 의식 안에 없고 바깥에 있는 것과도 같다. 지각과 이미지화에서 “의식은 동일한 의자를 가지 상이한 방식으로 관계”할 뿐이기 때문이다(27).* 그럼에도 이미지화하는 의식과 이미지화의 대상이 흄이 주장한 것처럼 상호외재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니다. 의식과 대상은 서로 종합되고 관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미지라는 말은 의식이 대상과 맺는 관계를 지칭할 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대상이 의식에 나타나는 어떤 방식, 혹은 의식이 스스로에게 대상을 부여하는 방식이다.”(27-28) 여기서 사르트르의 요지는 이미지를 (의식 안의 것으로도, 의식 밖의 것으로도) 물화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다. “내가 피에르에 대해 가지는 상상 의식은 피에르의 이미지에 대한 의식이 아니다.”(28) 이미지화의 대상과 구별되는 제 2의 사물로서의 이미지는 없다.**

*Q. 지각의 대상과 이미지화의 대상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이후의 테제와 어떻게 조화되는가?

A. 의식에 ‘내재’하는 것은 아니되—그 점에서 지각과 같되—의식을 완전히 ‘초월’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그 점에서 지각과 다르다—인 것 같다.

**Q. 그렇다면 흄의 관념과도 같이 내성에서 우리에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것은 무엇인가? 오히려 사르트르의 주장이 이미지화의 지향적 대상을 ‘이미지’ 자체와 동화시키지 않는가?

A. 사르트르가 경계하는 주장은 이미지화의 지향적 대상과 이미지 사이의 동일성이 아니라 이미지화가 표상하는 (외부) 대상과 이미지 사이의 동일성이다. 이미지화의 지향적 대상은 이미지인 것이 맞다. 물화가 일어나지 않을 뿐, 대상화는 일어난다.

3. 번째 특성 : 준관찰quasi-observation 현상

 사르트르는 탐구의 주제—이미지—가 이제 의식 안의 요소가 아닌 의식의 지향적 구조로 바뀌었음을 천명한다. 그러면서 그는 지각(percevoir), 구상(concevoir), 상상(imaginer)이라는 의식(구조)의 세 유형을 구분한다.

 대상에 대한 관찰에 해당하는 “지각의 고유성은 대상이 언제나 일련의 단면이나 투영[음영Abschattung]으로만 나타난다는 데 있다.”(29) 후설 식으로 표현하면 지각은 관점적이며, 비충전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대상을 [여러 관점을 취해봄으로써] 학습해야 한다. […] 대상 자체는 이 모든 출현의 종합이다.”(29) 반면 개념( 대한 구상)에서는 여러 관점에서 주어지는 면들, 즉 지각에서는 동시에 주어지지 못했을 면들이 한꺼번에 생각될 수 있다. “한 바퀴 돌아보는 일” 없이도 전체가 조망되는 것이다(30). 따라서 사유는 지각과 달리 학습을 요하지 않는 지식이다.*

*버클리의 입장에서는 추상적 개념과 이미지가 서로 동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 Q. 정말 개념 구상은 음영지어져서 주어지지 않는가?(D씨)

 이미지(화)에서는 구상과 달리 대상이 음영지어져서, 각 단면씩만 주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상과 같이 ‘한 바퀴 돌아보는 일’ 없이도 전체가 확실하게 확보된다. “지각에서 지식은 천천히 형성”되어 형성의 도중 지각 대상에 대한 판단이 틀릴 수 있는 반면, “이미지에서 지식은 즉각적”이기 때문이다(31).* 이미지는 단지 “이미지화되지 않은 구체적 지식을 좀 더 정확하게 표상적인 요소에 연결하는 종합적 행위”, 쉽게 말해 표상적인 구체화일 뿐이다(31).

*디테일이 유한 개고, 그 유한 개의 디테일이 나로부터 왔으니까. ★➔ Q. 작가들의 경우, ‘내가 쓴 게 아니라 인물이 나를 이끌었다’ 같은 말들이 있는데, 정말 유한할까? 

 나아가 대상에 대해 내가 몰랐던 사실이 점차 알려지는 지각에서와 달리 이미지에서는 “내가 그 이미지 안에 들여놓은 것만을 발견할 뿐이다.”(31) 지각의 세계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한 개의 디테일과 그 디테일들 사이의 관계가 자리하는 곳으로, 그 넘쳐남이 지각 대상의 본성을 이룬다. “그런데 반대로 이미지에는 일종의 본질적인 빈곤이 있다. 한 이미지의 서로 다른 요소들은 세상의 나머지와 어떤 관계도 맺지 않으며, 그것들 사이에서[조차] 두세 가지 관계만 맺는다. […] 대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대로 존재할 이다.”(32) 그렇기에 “이미지 세계의 대상은 지각의 세계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도 존재할 없다.”(32) 말하자면 그 ‘뻔함’으로 인해 의식을 넘어서야 한다는 필요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빈곤은 오직 대상의 부분만이 이미지화된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부분의 기원은 관찰을 통해 비로소, 뒤늦게, 또는 차차 해독되는 것이 아니며 이미 알려져 있다. 이미지의 내부를 아무리 오래 관찰한다 하더라도 이미지를 처음 떠올렸을 때보다 그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가질 수 없다. 가질 수 있게 된다 해도 적어도 순수 관찰 덕분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미지의 대상에 대한 나의 태도는 준관찰로 불릴 수 있다.”(34) 이미지화와 관련하여 우리는 ①특정한 관점에서 관찰하는 위치에 서게 되지만, 이 관찰은 ②아무 새로운 것도 알려주지 않는 관찰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대상에 대한 겨냥을 가능케 하는 지향성의 구조 하에서 “이미지 안에서의 대상은 내가 그 대상에 대해 가지는 의식과 동시적”이다(34). 나아가 “나의 의식을 구성하는 모든 것은 대상 안에서 그 상관물을 발견한다.”(34) 동시에 “대상과 의식 사이에는 최소한의 간격도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 […] 대상은 […] 지향을 앞서지 않는다. […] [동시에] 의식은 절대로 대상을 앞서지 않는다.”(35)

cf. 현상학이 의식과 대상 사이의 간격을 지향성을 통해 부정하면서도 의식/대상의 구분을 방법론의 제1테제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모순되어 보인다.


음영/관점 지식을 위한 학습의 필요성
지각 O O
구상 X X
상상 O X

4. 번째 특성 : 상상하는 의식은 그것의 대상을 무로 정립한다

 모든 비반성적 의식은 자신을 초월해있는 대상을 지향한다. 앞서 말한 바 있듯이 의식 자체를 주제화하기 위해서는 반성이 요구된다. 그렇다고 해서 비반성적 의식이 자신에 대해 무의식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 의식이 스스로에 대해 내재적이며 비명제적인 [자기]의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36)

 그러므로 다음의 두 질문이 제기된다.

 첫째, “비반성적 의식은 어떻게 자신의 대상을 정립하는가?”(36) 상상은 지각과 달리 자신의 대상을 “이미지화된 것으로 정립한다.”(37). 상상을 일종의 매개적 의식으로, 즉 사물세계에 속하지 않는 매개자를 통해 비로소 사물에 가닿는 의식으로 상정하는 것은 현상학적 반성에 어긋난다. 지각과 상상 사이의 차이는 매개성의 여부가 아닌, 의식에 대상이 주어지는 방식에서, 반대로 말하면 의식이 대상을 정립하는 방식에서—즉 대상의 존재를 믿는 특유한sui generis 방식에서—찾아져야 한다. 이때 의식은 “자기의 작용을 중립화neutraliser”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대상을 존재자로 정립하지 않을 수도 있다.”(37) (달리 말해 상상은 상상의 대상이 실존하는지 실존하지 않는지에 대해 무차별하다. 중립화는 그런 의미에서 대상의 실존에 신경을 쓰는 존재부정, 부재 정립과 차별화된다.)

Q. 사르트르가 제시한 정립의 네 가지 예시들 사이의 정확한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A. 눈앞에 실존함에 대한 정립, 완전히 부재함에 대한 정립*, 눈앞에는 부재함에 대한 정립(“다른 곳에 존재하는 것으로 정립”(37)), 중립화정립 아닐까?

*Q. ‘존재하지 않는 것nonexistent’과 ‘부재하는 것absent’ 사이에 차이가 있는가?

A. 둘 다 부정이되, 부정의 양상이 다른 것 같다. 예컨대 예티와 공룡의 차이.

*Hua III/1, §109 중립성변양[Die Neutralitätsmodifikation]

 그러나 믿음의 영역과 관련해서 아직까지 해명되지 않은 가장 중요한 변양이 있다. 바로 “특정한 방식으로 [자신] 관련된 모든 의견적[doxisch] 양상을 완전히 지양하고(cancel), 완전히 무력화시키는 변양”이다. 후설이 ‘중립화[Neutralisierung]’라 부르는 이 변양은 부정의 변양과 구별돼야 한다. 후자는 결국 일종의 존재 양상에 속하는 비-존재를 실질적으로[positiv] 성취하지만 전자는 아무런 존재 양상도 “성취하지[leisten]” 않기 때문이다(213, 강조는 원저자). 후설은 중립화변양이 의지적 행위[willkürliches Tun]를 함께 표시하기는 하지만[mitzeichnen], 중립화변양된 것을 취급함에 있어 “의지와 연결된 모든 것을 도외시”하는 동시에 의심스럽거나 가설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아야 비로소 다른 모든 정립성격이 탈각될 수 있다고 말한다(214, 강조는 필자). 중립화하는 주관은 작용을 수행함에 있어 더 이상 진지하지[ernstlich] 않다. 중립화하는 작용의 대상적 상관자 역시 “현실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순전히 생각된” 무언가로 철두철미 변양된다. “모든 [순전히 생각된] 것은 변양하는 “괄호들”을 가지고 있다. [이 괄호들은] 현상학으로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너무나 중요하고 우리가 아주 예전에 이야기했던 괄호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214) 요컨대 중립화 변양에서 중요한 구분은 단적인 정립과 중립화된 정립 사이의 구분이다. 중립화된 정립의 대상적 상관자는 그에 대한 현실적인 술어화가 불가능하다.*

*들뢰즈는 중립화변양된 대상의 경우 ‘시제’를 적용시킬 수 없다고 주장한다.

cf. 후설에게서 중립화를 나타내는 다양한 표현들: “Sie liegt beschlossen[포함되어있다] in jedem sich-des-Leistens-enthalten[수행-그만두기], es-außer-Ak­tion-setzen[그것을-작동-밖에-두기], es-“einklammern”, “dahingestellt-sein-lassen[결정하지 않은-채-내버려두기]” und nun “dahingestellt”-haben[결정-안-해놓기], sich-in-das-Leisten-“hineindenken”[수행을-마음속으로-생각해보기], bzw. das Geleistete “bloß denken”, ohne “mitzutun”.”(Hua III/1, 248, 강조는 필자)

 이때 “지각은 자신의 대상을 실존으로 정립하고, 다른 한편 개념들, 지식은 관계들로 구성된 본성(보편적 본질) 존재를 정립하며 대상의 “실제” 존재에는 무관심하다.”(38) 피에르의 본질에 적극적인 규정을 추가하는 작업은 피에르의 실존 여부에 대해 더하는 정보가 없다. 한편 피에르에 대한 상상은 부재자의 정립에서처럼 그토록 적극적인 정립을 수행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상상하는 의식의 지향적 대상은 […] 여기에 없으며* 그렇게 없는 것으로 정립된다. 혹은 그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비존재로 정립된다. 혹은 전혀 정립되지 않는다.”(39)*

*Q. 비존재정립, 또는 무-정립이라는 표현은 중립화가 아닌 부정을 의미할 수도 있기에 어폐가 있어 보인다. 무-정립과 중립화 정립이 왜 같은가? 나아가 중립화 자신은 정립인지 아닌지가 모호하다.

A. ‘무를 정립한다’=‘아무것도 정립하지 않는다’(D씨)

 그러나 상상의 대상은 부재하는 동시에 직관적이다. 상상의 대상은 감각 가능한 물질성과 공간적 위치를 가지고 있다(e.g. ‘베를린에 있는 피에르’). 다만 그것이 ‘무néant’로 제시되기 때문에 감각 불가능하고 그 위치에서 그 대상을 발견할 수 없을 뿐이다. 이 직관성으로 인해 우리는 마치 상상의 대상이 현존하는 양, 헛된 발버둥을 치기도 한다.

5. 번째 특성 : 자발성

 둘째, “이 의식은 대상의 정립을 동반하는 비명제적 의식 안에서 어떻게 스스로에게 나타나는가?”(36) 사르트르의 표현으로는 ‘횡단의식’인 이 자기의식*은 “대상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것도 정립하지 않고 아무것에 대해서도 알려주지 않으며 어떤 인식이 아니다. […] 이미지의식은 스스로에게 상상하는 의식으로 주어진다. 즉 대상을 이미지로 만들어내고 보존하는 자발성으로 주어진다.”(41)

Q. 마지막 네 문장을 이해하지 못했다.

A.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기 때문에 실재 정립을 할 수 없고 그때문에 정립된 것이 불분명하다.

 
결론

 이미지는 마치 공간의 일부인 양 의식의 대상을 이루는 한 요소인 것도, 그 어떤 의식의 일부인 것도 아니고 그 자체로 (완결된) “특유한 의식”이다(42). “상상하는 의식은 그 대상을 지각의 영역 위에서 찾게 되며* 지각을 구성하는 감각적 요소들을 겨냥한다는 의미에서 볼 때 표상적”이다(42). 그런 점에서 지각과의 유사성이 발견되지만 지각이 수동적(이고 상호주관적)인 데 반해 상상은 자발적이고 그 표상적 요소가 창조적이며 소통 불가능하다. 이러한 ‘준관찰’에서는 모호한 이미지를 가지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 연장선에서 마지막으로, (흄의 인상-관념 구분에서와 달리) “이미지와 지각은 그 대상의 살chair[내면 조직]이 동일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44). 즉 이미지() 대상은 지각에서와 동일한 살이 분명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각의 대상은 여러 한정과 가능한 관계의 무한한 다수성에 의해 구성된다. 반면에 이미지는 가장 잘 한정된 것도 그 자체 안에 유한수의 한정만을, 즉 우리가 의식하는 바로 그 한정만 소유한다.”(44)

*Q. 이 경우 후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예술적 상상의 경우가 배제되지 않는가?

A. 예술적 상상의 상관자도 감각적 자질을 갖겠지.

 여태까지 이루어진 것은 이미지에 대한 정태학, 곧 정적 분석이다. 다음으로는 “이미지를 기능적[함수적?] 태도로 기술”하는 일이 남았다(45).


I-II. 이미지의 계보(family)

1. 이미지, 초상화, 캐리커쳐

“세 가지 경우에서 하나의 “지향”을 발견하며, 이 지향은 세 경우 모두 동일한 대상을 겨냥한다. 그 대상은 심적 표상이나 사진 혹은 캐리커처가 아니라 내 친구 피에르이다. 더욱이 세 경우에서 나는 동일한 방식으로 [아날로공을 통해] 대상을 겨냥한다.”(47)

“물론 이러한 소재의 다양성으로부터 우리가 기술해야 할 내적 차이가 연유하게 되[…]지만 우리는 애초부터 본래 같은 부류, 같은 유형의 지향들 그리고 기능적으로 동일한 소재들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49, 강조는 나)

“의지 없이도 이미지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은 지향 없이 이미지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 전혀 아니다.”(49)

“그렇지만 중요한 차이는 언급해야 한다. 즉 한 장의 사진은 우선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하나의 대상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심적 이미지는 즉각적으로 이미지로 주어진다. 심리 현상의 존재와 그것이 의식에 대해 가지는 의미가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심적 이미지, 캐리커처, 사진은 모두 같은 종류이고, 이제부터 그것들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를 규정해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경우에서, 문제는 여전히 대상을 “현존하게 하는” 일이다. 그 대상은 지금 여기 없으며, 우리는 그것이 여기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우선 부재하는 대상을 향한 어떤 지향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 지향은 비어 있지 않다. 그것은 어떤 내용 쪽으로 향하며, 어떤 내용이라도 상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내용 안에 문제의 대상과 어느 정도의 유사성을 제시해야 한다. […] 지향이란 자신의 대상을 환기[소환]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뿐이다. 그것은 부재하는 대상의 표상물représentant로 사용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의식의 대상의 특징인 부재를 정지시키는 데 이르지는 못한다.”(50-51, 강조는 나)

“하지만 이 경우[허구의 존재자를 대하는 경우] 나는 대상을 부재absence로써가 아니라 비존재non-existence로써 정립한다. 이 새로운 부류의 대상에 우리는 허구라는 이름을 내어줄 것인데, 그것은 우리가 좀 전에 살펴보았던 조각, 캐리커처, 심적 이미지와 같은 부류를 포함한다.”(51)

2. 기호와 초상화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기호[‘사무실’이라는 간판]의 경우에도 우리는 대상을 겨냥하는 하나의 지향, 지향이 변형시키는 하나의 소재,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겨냥된 대상을 가진다.”(54)

★기호와 이미지 사이의 차이

첫째, “기호의 소재는 의미된 대상과 전적으로 무관하다. […] 둘 사이의 관계의 기원은 규약이다. […] 물리적 이미지의 소재와 그 대상 사이에는 전혀 다른 관계가 존재한다. 그것들은 서로 유사하다.”(55)

둘째, “[기호적] 의미작용에서 단어는 푯말jalon에 불과하다. 단어가 나타나 어떤 의미작용을 일깨우며, 의미작용은 결코 단어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의미작용은 사물을 향하고 단어는 치워버린다. 반면에 물리적 바탕을 가진 이미지의 경우, 지향성은 줄곧 초상화 이미지image-portrait로 되돌아온다. 우리는 초상화를 마주하고 그것을 관찰한다. 피에르에 대한 상상의식은 꾸준히 풍부해진다.”(57)

셋째, “기호적인 의식은 그 자ㅔ로는 정립적이지 않다. 이 의식이 하나의 확인[긍정정립]affirmation을 동반할 때, 확인[긍정정립]이 그것에 종합적으로 연결되어 판단이라는 새로운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 [반면] 모든 이미지에는, 심지어 자신의 대상을 존재자로 정립하지 않는 이미지에도 정립적인 규정이 있다. […] 대상은 부재하는 것으로 정립되지만, 인상은 현존한다.”(57-58)

넷째, “[…] 그림은 피에르가 여기에 있건 없건 간에 피에르를 준다. 반면에 기호는 그 대상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비어 있는 지향에 의해 기호로 구성된다.”(59)

3. 기호에서 이미지로 : 모방 의식

“모방에 대한 의식과 초상화에 대한 의식 사이의 차이는 소재로부터 비롯한다. 초상화의 소재 자체는 관객에게 종합을 행하도록 부추긴다. 화가는 모델과의 완벽한 유사를 소재에 부여하는 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방의 소재는 인간의 신체이다. 그것은 뻣뻣하며 변질되지 않는다.”(63) ➔ 밀짚모자, 얼굴의 특정한 각도 등이 모방에서 ‘기호’로 기능하며 “기호는 의식을 밝혀주고 안내한다.”(63)

“[모방에서] 직관적 소재는 아주 빈약하다. 모방은 몇몇 요소만 재생산할 뿐이다. 게다가 그것은 직관 안에서 가장 덜 직관적인 요소이다. 그것은 관계이고, 기울어진 밀짚모자, 턱이 목과 이루어내는 각도이다. […] 모방은 이미 재고된 모델이며, 비법과 도식으로 환원된 모델이다. 바로 이 기교적인 비법 안에서 의식은 이미지화된 직관을 형상화하고자 한다. 아주 건조한—너무 건조하고 너무 추상적이라 금세 기호로 읽혀질 수 있을 정도인—이 도식은 직관에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수많은 디테일 속에 잠겨버린다는 점을 덧붙이도록 하자.”(65)

“우선 아주 건조한 도식에 생명을 빌려주어야 한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내가 도식을 그 자체로 지각하면, 즉 입술의 접합부나 밀짚모자의 색깔 등을 주목하면 이미지 의식은 사라져버린다. 지각의 운동을 거꾸로 실행해야 하고, 지식[저건 모리스 슈발리에를 모방하는 것이다]으로부터 출발하여 지식에 따라서 직관을 결정해야 한다. […] 우리는 여기서 심적 이미지의 본질적인 특징인 준-관찰 현상을 다시 보게 된다. 내가 지각하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이다. 그 대상은 나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줄 수 없으며, 직관은 둔해지고 강등된degraded 지식일 뿐이다.”(66)

“하지만 직관의 다양한 요소는 우리가 언급했던 “표현적 본성”을 실현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여기서 정서성affectivité[촉발성?]이라는 새로운 요인이 나타난다. […] 모방의식에서 지향을 가진 지식은 기호와 직관적 실현의 기초로부터 이러한 정서적 반응을 일깨우며, 이 반응은 지향적 종합에 통합된다.”(67)

“정서성은 모방의 분리된 요소에 규정할 수 없는 의미와 대상의 통일성을 부여함으로써 모방의식의 진정한 직관적 소재로 간주될 수 있다. 결국 우리가 모방 연예인의 신체에서 주시하는 것은 이미지화된 모방의 대상, 정서적 의미에 의해 모여진 기호, 즉 표현적 본성이다. […] 이미지화된 종합은 아주 강력한 자발성의 의식, 즉 자유의 의식을 동반한다. 결국 형식적 의지만이 이미지 차원에서 지각 차원으로[즉 모방된 연예인이 아니라 모방자를 그저 보는 차원으로] 미끄러지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68)

4. 기호에서 이미지로 : 도식화dessins schématiques

• 이미지: (후설이 말한 대로 충족이 아니라) 직관으로 강등된 의미작용signification

• 도식(e.g. 졸라맨, 몇 개의 선들로부터 얼굴을 읽어내는 경우): 관습에 대한 배경지식/학습에 의거한 해독decipher을 요구하는, 이미지와 기호 사이의 중간자intermediary ➔ 이미지와 달리 구성요소들이 차별화되어있지 않음undifferentiated, 특정한 구조를 표상하고 특정한 태도를 요구하는 것 외엔 그 무엇도 표상하지 않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와 같이 어떤 완전한, 구상적 형태를 겨냥함.

*D씨: 이미지는 대상과의 진정한 유사성이 없다. 그러므로 지식에 입각한 상징적 ‘무언극mime(마임)’이 요구된다.

• 일반 지각: 안구운동과 지각 대상을 구분할 수 있거나, 안구운동이 특정한 방식으로 구조화됨 ↔︎ 도식(에 대한 지각): 그 어떤 안구운동의 규칙도 미리 주어져있지 않음, 지식savoir이 관건임, 안구운동이 (수동적이지 않고) 자발적임.* 특정한 방식으로 이미지화되지만—정확히 말하면, 주체가 그렇게 이미지화‘하’지만 반드시 그렇게 이미지화될 필요 없다는 의미에서 안구운동의 방향은 ‘가설적hypothetic’. 궁극적으로 표상된 것은 선이 아니라 주체가 선에 투사한 운동들이 됨. 그렇기 때문에 동일한 선들이 여러 의미 가질 수 있음(e.g. 오리토끼). 지식과 운동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상징적 운동을 만들어냄. 이미지의식은 결국 지식에 대한 강등된 의식이 됨.

*D씨: 나의 안구운동에 따라 도식이 달라짐.

Q. 도식이 정말 이미지와 질적으로 다른가? 표상력이 낮은 이미지와 표상력이 높은 이미지가 있을 뿐 아닌가? 그에 더해, 도식의 해독을 위해 정말 학습이 요구되는가? 정말 관습에 따라 이미지에 대한 해독이 달라지는가? 졸라맨을 보고 인간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문화권이 따로 있을 것인가?

A. 도식과 이미지 사이의 경계가 애매하다는 것은 사르트르도 인정할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사진과 같이 표상력이 높은) 이미지를 읽는 것도 지식을 요구한다. AI와 인간을 구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미지들 가운데서 요구되는 이미지를 고르는 일은 매우 지적인 작업이다. 한편 고양이는 사진과 실제 인간을 헷갈릴 것인가? 예를 들어 손가락으로 화살표를 만들면 동물은 특정한 방향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화살표라는 코드는 인간들 사이에서만 통용된다. (D씨).

A2. ‘밴 다이어그램’의 그림의 경우 그 함의를 알기 위해서는 지식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이미지와 구별되는 도식에 해당하는 것 같다(D씨).

A3. 모두가 치마를 입는 문화권에서는 화장실에서 성별을 구별하는 픽토그램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5. 화염 속의 얼굴, 위의 흔적, 인간 형태의 바위 

 달리는 사람을 그린 데생에서 선들은 출발선에서부터 이미 표상적이다—즉 무언가를 표상하도록 의도되어있다. 데생으로부터의 이미지화는 이러한 표상에 대한 지각 및 지각에 따르는 실제적 존재정립 이후에 일어난다. 반면 얼룩에서 어떤 이미지를 읽어내는 경우를 생각하면, 사실 얼룩 자체는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는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에 의한 도식화는 얼룩 자체가 아닌 “우리의 눈이 일정한 방식으로 답파해낸 얼룩”을 소재 삼아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낸다(79).

 이와 같은 현상에는 두 가지 가능한 원인이 있다. 하나는 자유로운 시선에 의해 형태가 임의로 발견되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특정한 구조가 특정한 형태의 발견을 부추기는 경우다. 어느 경우이든 간에, 발견된 형태에 대해서는 존재 정립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존재 정립의 중립화 변양이 일어난다.*

*Q. 오히려 비존재정립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다. 주체의 태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지 이 의식에는 무조건 중립화 변양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 같다. cf. 별자리? / 마호가니 테이블 위의 눈 / ‘나무 안에 갇힌 강아지(환생 잘못한 경우)’ (D씨)

6. 반수면 이미지, 커피 찌꺼기나 원형 수정체에서 보이는 장면과 인물

 반수면 이미지의 경우 역시, 이미지에서 드러난 대상의 존재는 정립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현상에는 어떤 적극적인 정립의 요소가 있다. “즉 나의 시각적 영역을 가로지르는 이 여자는 내가 눈을 감으면 존재하지 않지만 적어도 이미지는 존재한다는 것이다.”(82, 강조는 나) 그러나 이 정립은 지각작용의 일부가 아니다. 반수면 이미지는 지각의 대상들과 어떠한 관계도 맺지 않은 채 홀로 부유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는 심적 이미지에는 없고 지각에만 고유한 “객관성, 명료함, 독립성, 풍부함, 외재성을” 반수면 이미지에 부여하고야 만다(83).

 물론 반수면 이미지는 주체가 이미지의 내용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준-관찰(대상)의 일종이다. 이미지의 풍부성은 상상된 것에 불과하다. “반수면 이미지는 결코 지식보다 앞서지 않는다[내가 이미 아는 것 이상으로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돌연 장미, 장방형, 얼굴 따위를 보고 있다는 확신에 급작스럽게 사로잡힌다.”(85) 이 ‘급작스럽게’가 중요하다. 지각에서, 말하자면 감각자료들을 수용하는 가운데 지각 대상이 점점 명료해지는 것과 같은, 수용과 지각 사이 “원칙적인 간격”은 존재하지 않는다(87). 요컨대 반수면 이미지는 지각과 전혀 다른 일종의 상상의식이다. 그렇다면 상상의식으로서의 반수면 이미지의 소재와, 그에 특유한 지향성은 무엇인가? 이를 탐구하려면 특정한 시간구간에 걸쳐 성립하는 ‘반수면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주체의 변형에 관해 기술해야 한다.

cf. 나아가 반수면 이미지는 “분명한 그 무엇도 결코 표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환상적이다(84). 그리하여 반수면 이미지의 내용은 개체화*나 원근법의 법칙을 준수하지 않는다.

*한 개체와 다른 개체가 구별되지 않는다(D씨).

cf. 퍼즐게임을 한 뒤 또는 당구를 친 뒤 눈을 감아도 공이 굴러다니는 경우(D씨).

 반수면 상태에서 근육은 이완되고, 시각은 말소된다(사르트르가 생각하는 반수면 이미지는 눈을 감은 상태에서만 성립하는 것 같다). 주체는 이러한 상태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나는 눈꺼풀을 들어올릴 수가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된다(90). 반수면 상태에서는 또한 주의력의 약화가 선행한다. 그리하여 “현재 [지각될 만한] 상황에 대한 무관심” 가운데서 꿈과 같은 이미지가 떠오른다고 혹자는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92). 그러나 이러한 사태 해석은 내재성의 환상에 빠질 우려가 있다. “두 개의 보충적인 세계가 존재한다고 암묵적으로 상정하기 때문이다. 즉 사물의 세계와 이미지의 세계라는 두 세계가 있으며, 하나의 세계가 흐릿해지면 다른 세계가 그만큼 환해질 거라고 상정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이미지를 사물과 동일한 차원에 놓는 일이고 양쪽에 동일한 존재 유형을 부여하는 일이다.”(93)

Q. 이미지를 물화해서는 안 된다 + 안팎을 구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요구가 합쳐져 있다. 정확히 내재성의 환상이 무엇인가?

A. 물화하지 말라는 요구: ’안에 있는 것’을 ‘밖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 그러나 사실 이미지는 ‘안에 있’지 않다. 지향이 있지, 안팎이 있지 않다.

 주의력의 약화보다 중요한 점은 바로 환영이 살아있도록 유지시키고자 하는 어떤 (자율적) 의지이다. 그렇다고 해서 반수면 이미지를 어떤 자율운동automatism[무의식적, 기계적 행위]의 산출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D씨: 반수면 이미지는 무의식이 아니다). 반수면 이미지는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의 일부이기 때문이다.”(94) 반수면 이미지를 보는 이는 매혹이라는 속박, [모방에서와 유사한] 일종의 사로잡힘possession의 상태에서* 오히려 운동 능력을 마비 당한다. 그리하여 주체의 몸은 대상을 향한 구체적인 방향성, 대상의 위치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다. 본래 “무언가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을 위치시키는 일, 이것은 동일한 하나의 작업을 지칭하는 두 개의 표현이다. 이로부터 대상[…]에 관련된 주체의 외재성 같은 것이 비롯한다.”(95) 그러나 반수면 이미지에서는 주의력이 부재해 “대상은 있지만 외재성은 없”다(95)[주체가 반수면 이미지에 대해, 그것이 가지고 있다고 느끼는 외재성은 사실 거짓된 것이다]. 그리고 외재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 의식은 관찰하거나 관조할 수 없다. 의식은 종합에 무능해진 채, “이미지나 사유가 나름의 논리대로 전개되도록 방치”한다(95)[즉 반수면 이미지는 지각 대상과 같이 외재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 이유로 주체에 의해 통제될 수 없다].**, ***

*반수면 이미지에 대한 의식을 반성하려면 반성하는 의식 역시 같은 대상에 사로잡혀야만 한다.

**Q. 사륜마차의 예를 이해하지 못했다.

A. 우리는 반수면 이미지를 ‘관조’하지 못하고, 단지 그에 ‘매혹당할’ 뿐이라는 요지이다. 칸트는 마차 산책으로 자신의 생활 리듬이 깨진 경험을 한 뒤, 누구의 마차 산책에도 따라가지 않겠다는 정언명령을 입법한다. 칸트의 도덕성 개념을 공부하다 마차의 이미지에 급작스럽게, <비자발적으로> 매료되는 사람에 대한 예시이다.

***통제권의 상실을 낳는 이러한 매혹, 또는 “합의된 속박 상태”는 잠으로 이어지곤 한다(97). 이 비자발성이 5.에서 이야기된 ‘읽힌’ 이미지들과 반수면 이미지를 차별화한다.

 내시적 섬광으로서 반수면 이미지는 일종의 오류를 낳는다. “내시적 소재[e.g. 광채]의 실재 자질은 지향의 표현매체로 사용되며, 지향은 그 매체를 과도하게 부풀린다. […] 나는 그 자주색을 보고 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자주색을 보고 있는 게 아니다.”(99) 이렇게 포착된 형태의 뒤로 이미지가 (비자발적으로, 통제권 밖에 있어 중단의 가능성도 없이) 생겨난다.* 이때 이 이미지는 자유와 대립하는 일종의 숙명처럼 느껴진다. 지식은 [모방에서처럼 다시금] 직관으로 강등된다. 물론 그토록 숙명적인 반수면 이미지 역시 변화한다. 변화의 양상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하나의 확신이 다른 확신으로 뒤바뀌는 경우. 둘째, 확신의 변화가 끊이지 않는 경우. 셋째, (하나의 확신에 머무르되) 안구운동에 따라 이미지가 변화하는 경우.

*Q. ‘원칙적인 간격’이 없다던 이전의 서술과 어떻게 양립하는가?

A. 트리비얼한 지적이다. 여전히 충분히 급작스럽다.

 5.에서 제시된 이미지와 반수면 이미지 사이의 비교로 되돌아가보자. “두 경우 모두 소재는 조형적이다.”(102) (그리고 둘 모두에 어떤 매혹이 있다.) 그럼에도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벽지에서 특정한 무늬를 읽어내는 경우, “우리는 대상이 어떤 동물이나 얼굴을 표상하는 실제의 성질을 가진 것으로 상정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존재의 정립이 없다. 의식에는 자발성의 감정이 있다. 이것은 스스로를 그렇게 의식하는 [자발적] 유희의 활동이다.* 반수면 의식에서는 이 유희 의식이 사라졌다. 우리는 이미지를 대상으로 정립하는 것이 아니라 [소여라는 의미에서?] 표상으로 정립한다.”(103) 그리고 이때, 저 표상의 기원이 의식 자신임을 의식도 안다. “나는 무엇인가를 실제로 보고 있지만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모순”이 그렇게 나타난다(103). 표상의 상관자인 대상이 비존재non-existant로 정립되는 것이다.

*5.의 이미지의 경우, 존재 정립의 자유도가 높았었다. 반면 6.의 이미지에서는 표상을 정립할 수밖에 없다. ‘보이니까’. 통제의 정도상 차이가 있다.

Q. 사르트르는 “마술사의 유리구슬, 점술가의 커피 찌꺼기”의 경우에도 사정은 반수면 이미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104). 그 정확한 이유는 무엇인가? “분명하거나 고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고 “끊임없이 주의를 자극하고 주의를 끊임없이 실망시키는 속성을 가진 형태”기 때문에?(105) 나는 오히려 저것들이 5.에 가깝다는 생각마저 든다.

A. 점성술사는 그 경우 이미지를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비자발적으로 마주친다. 트릴로니가 검은 개를 볼 때 검은 개를 읽어내려고 해서, 검은 개를 읽고 싶어서 검은 개를 읽어내는 것이 아니다.

7. 초상화에서 심적 이미지로

 초상화, 벽지의 아라베스크 무늬, 반수면 이미지가 이루는 계열의 끝에 심적 이미지가 있다.* “[…] 문제는 언제나 부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표상하기 위해 어떤 소재를 활성화하는 이었다. 소재는 표상해야 하는 대상의 완벽한 아날로공은 아니었다. 지식savoir 그것을 해석하고 결함을 보충해주었다.”(105, 강조는 나)

*cf. “그러므로 우리는 사물의 세계에서 소재를 빌려온 이미지들(삽화 이미지, 사진, 캐리커처, 배우의 모방 등)과 심적 세계에서 소재를 빌려온 이미지들(운동 의식, 감정 의식** 등)을 구별할 수 있다. 외부적 요소와 심적 요소의 종합으로 나타나는 중간 단계의 유형도 존재한다. 불꽃이나 벽지의 아라베스크 무늬 혹은 반수면 이미지 등에서 어떤 얼굴을 보게 될 때가 그런 경우인데, 이것은 곧 보게 되겠지만 내시적 섬광의 바탕에서 구성되는 것이다.”(52)

**D씨: 안구운동에 입각한 이미지, 정서에 입각한 이미지

A. 소재: 이미지의 가족 내에서 가장 먼저 살펴본 초상화의 경우, 그 소재는 준얼굴—지각된 얼굴과 매우 유사하게 생긴 그림—이었다. 초상화가 초상화의 대상이 되는 인물을 생각하게 만드는 힘은 매우 강력해서, 이미지화하는 대신 초상화 자체를—소재로서의 선과 색만을—지각하기는 매우 힘든 일이다. 나아가 주체는 (외재하는) 초상화에 대해 관찰을 행하면서 초상화의 대상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 물론 이때 알려지는 사실은 확실한 것이 아니라 개연적인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초상화는 초상화의 대상의 특정한 구체적 순간이 아니라 일반적 원형을 그려낸다는 것이다.*

*cf. 모든 초상화의 특징이라기보다는 잘 그려진 초상화에 국한된 특징 같다. 잘 그린 초상화는 본질을 표현한다. 유리의 유리됨을 보여주는 붓터치 몇 개. ➔ 오히려 이집트 초상화처럼, 측면인 얼굴에서 정면으로 보는 눈이 실제로 그 모습일 수는 없지만 눈을 가장 잘 보여주는 모습을 그려내는 사례? 아이에게 자동차를 그리라고 했을 때 정면이 아니라 측면을 그리는 사례? 그런 사례에서 그려지는 것이 prototype이다. 초상화 역시 사람을 가장 잘 보여주는 모습을 그리는 것이다. (D씨): 사르트르가 말하는 원형은 본질인가, 특권화된 순간인가?

 그러나 “상상의식의 계열에서 상승해갈수록 소재는 점점 더 빈약해진다. […] 모방부터는, 상상의식에 나타나는 것이 지각작용에서 보이는 것보다 전혀 유사하지 않다. […] 이미지의 소재에 본질적 빈곤이 나타난다.”(107) 이제 진정한 관찰 대신에 준-관찰의 현상, 즉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던 지식에 입각해서만 가능한 관찰, “오로지 우리가 거기에 들여놓은 것만을 읽어내는 현상”만이 가능하다(107). 요컨대 “상상의식의 소재가 지각작용의 소재와 멀어질수록, 소재에 지식이 스며들수록 소재와 이미지 대상과의 유사성은 약화된다.”(107-108) 유사성 대신에 나타나는 것은 지식에 의해 [인위적으로] 형성되는 등가성이다. 이를테면 내시적인 광채가 특정한 색채와 등가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동시에 엄밀하게 상상적인 지향은 이미지의 소재의 영향을 차츰 덜 받게 된다. 상상적 지향을 작동시키려면 기호의 체계(모방), 관례 전체와 지식(도식화), 정신의 자유로운 유희(벽 위의 얼룩, 아라베스크) 혹은 의식의 매혹(반수면 이미지)이 필요하다. 요컨대, 지식이 중요해질수록 지향은 많은 자발성을 확보하게 된다.*”(108, 강조는 나)

*이미지에 대해 주체가 통제를 잘 가할 수 있다기보다, 심적인 요소가 사물적인 요소보다 더 많이 작동하게 된다는 뜻 같다.

B. 지식savoir: 상상의식에서 지식이 물질이 되어버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은 직관의 부족을 보충하며 그런 의미에서 “직관으로 넘어가”고—사르트르는 ‘강등’이라는 평가적 개념을 사용하면서, 이 강등이 상상뿐만 아니라 지각에서도 일어난다고 암시한다—끝내는 어떤 “상징적 운동”을 진행하게 된다(108). “[…] 이것은 운동적 본성 자체로 보면 직관 쪽에 있게 되며 의미작용으로 보면 순수사유 쪽에 있다.”(108)*

*Q. 상징적 운동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운동인가?

A. 4.에서 제시된, (배경적) 지식과 운동의 혼합태. 직관하는 운동이기는 하지만, 그 의미를 내 사유를 만들어냈다는 뜻 같다.

cf. 후설은 이를테면 제 6논리연구에서 직관이 (한갓된) 의미작용을 충족시킨다고 보는데, 사르트르는 의미작용의 강등이 직관이라고 본다(4절 초반 참고할 것).

8. 심적 이미지

 사르트르는 이미지화하는 작용, 곧 상상의식을 ‘미약한’ 지각의식으로 정의하고자 하는 실험들을 비판한다. 둘 사이를 어떤 강도를 기준으로 구분하는 것은 부적절하다(cf. Berkeley, Hume). 심적 이미지는 (고유한 지향성을 가지는) 지각과 별도인 의식의 이름이다.

 심적 이미지는 초상화, 캐리커처, 얼룩이 보아지는 것과 달리 ‘보아지지’ 않는다. 즉 심적 이미지는 다른 지각의 대상들 사이에 위치지어질 수 없다. 물론 심적 이미지는 (보통의 경우) 지각될 수 있는 대상을 겨냥하지만, “심적 내용을 통해” 그렇게 한다(110). “이미지 의식 안에서 우리는 하나의 대상을 다른 대상의 “아날로공”으로 파악한다. 그림, 캐리커처, 모방자, 벽의 얼룩, 내시적 섬광, 이 모든 표상물은 의식을 위한 대상이라는 공통성을 가진다.”(110) 심적 내용도 마찬가지로 아날로공이다. 그러나 아날로공으로 기능하는 심적 내용의 소재는 순수의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경우의 아날로공, 즉 표상물은 ‘투명’하다. 그리고 이 표상물에 지각대상의 성질인 “외재성, 자발성, 사물의 온갖 감각적 자질을 전가”시킬 경우 내재성의 환상에 다시 빠질 것이다(110).

 그러나 심적 이미지에서 아날로공으로 기능하는 심적 내용, 곧 심적 소여의 성격과 구성요소에 반성은 가닿을 없다. 초상화 등등의 경우, 상상의식을 제거했을 때 그것의 소재가 무엇인지 알게 해줄 감각적인 잔여물(초상화의 선과 색 등)이 있었지만, 심적 이미지의 경우 상상의식을 제거했을 때 남는 무언가가 (그리하여 의식과 독립적으로 소재로 지정할 만한 무언가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사르트르는 (심적 이미지의 소재를 찾기 위해) 확실한 것의 영역을 떠나 개연적인 것의 영역으로, 곧 실험심리학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II 개연적인 : 심적 이미지에서 아날로공의 성질 (생략)

1. 지식

2. 정서성

3. 운동

4. 심적 이미지에서 말의 역할

5. 심적 이미지에서 사물의 출현 방식


III 심리적 삶에서 이미지의 역할

1. 상징

 이미지와 사유는 서로 이질적이지 않다. 이를테면 상상의식의 과정에 판단(결심)이나 추론이 들어설 수 있다. (사르트르는 심지어 모든 이미지에는 그 나름의 판단이 개입된다고까지 보는 것 같다.) 다만 이미지는 일반적인 사유와 달리 대상의 자질을 단순히 긍정하기만 하지 않고 실현하고 만들어낼 뿐이다. 이미지는 그런 의미에서 (실재하는 대상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상징은 먼저 비활성화된 채로inanimate 있는 이미지에 덧붙을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는 우연적인 기능이 아니라 이미지 자체의 본질적인 기능이다. 그러나 상징은 도대체 무엇이며, 그것을 기호나 현시[예시]illustration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 사르트르는 상징적 도식에 관한 플라흐의 논의를 끌어온다. 플라흐에 따르면 특정한 난이도 이상의 이해작용comprehension에는 비의지적으로 나타나며 단순한 기억에는 동반되지 않는 상징적 도식이라는 표상/이미지가 동반되곤 한다(e.g. ‘교환’의 개념을 리본의 이미지로 이해하는 경우). 이때 상징적 도식은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의미화하지signify 않고 상징적으로만 의미화하기 때문에, (어떤 개념이 사유되고 있는지) 모르는 이에게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 점에서 상징적 도식은 사유의 현시[예시]와 차별화된다. 사유와 사유의 현시 사이에는 단순히 “우연하고 외재적이며 순전히 연상적 차원”에서만 연결되는 관계만이 있다(184). (반면 사유와 사유의 표상, 곧 상징적 도식 사이에는 적어도 그 도식을 떠올리는 자에게는 필연적이고 내재적인 관계가 맺어진다.) “일반적으로 도식은 단 하나의 의미, 즉 도식이 상징하는 사유의 의미만을 가진다.”(186) 나아가 상징적 도식(을 이루는 요소들)의 위치 또는 공간화는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화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수행한다. (한 요소를 다른 요소와의 관계에 있어 어디에 위치시키느냐는 상징기능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상징적 도식은 우선은 사적인 것 같다.

 남은 질문은 상징적 도식이 왜 그리고 어떤 조건에서 나타나는지이다. “알다시피 쉬운 이해 행위나 단순한 의미화 의식은 도식을 동반하지 않는다. 도식은 엄밀하게 말해 지성작용intellection의 노력을 동반하며 이 노력의 결과들을 공간적 대상의 형태로 제시한다.”(188) 이제 여기서 상징적 도식과 이해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물음이 들어선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이해에는 이미지화가 동반되지 않는 ①순수 이해—말(기호)은 동반될 수도, 동반되지 않을 수 있다—그리고 ②이미지화된 이해—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말(기호)은 동반될 수도, 동반되지 않을 수 있다—가 있다. 이때 이해의 대상이 무엇이냐가 둘 중 어떤 이해 유형이 발생하는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동일한 대상이 순수하게 이해될 수도, 이미지화되어 이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특수한 이해의 유형이 발동되는 것일까? 사르트르는 의식의 구조에서, 각 유형이 취하는 특수한 태도 및 입장position의 차이에서 답을 찾는다.

 답을 직접 제시하기 전에, 사르트르는 상징적 도식에 대한 논의를 심화한다. 상징적 도식은 II부에서 분석되었던 지식, 운동신경 아날로공—‘리본’ 형태로 교환의 개념을 상징해내듯, “개념의 합리적 구조”(190)를 설명한다—그리고 정서적 아날로공—회녹색으로 타협의 개념을 상징해내듯, “개념에 대한 주체의 개인적 반응”(190)을 표현한다—으로 구성된다. 이때, 도식으로서의 이미지가 선행하고 그에 대한 해독이 비로소 이해를 개시시킨다는 플라흐의 가설은 이미지의 성립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사르트르가 보기에 도식으로서의 이미지의 구성과 이해는 함께 일어난다. “이해되어야 할 개념의 구조는 도식의 구상을 위한 규칙으로 사용된다. 결과적으로, 도식이 일단 구성되고 나면 이해할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192) 주지하다시피 이미지는 주체에게 그 어떤 새로운 것도 가르쳐줄 수 없기에, 이미지에 대한 해독으로부터 (새로운 지식의 일종인) 이해를 획득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미지는 (이해를 위하여) 상징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상징적 도식의 감각적 요소는 예지와 파지의 가운데서만 주어진다. 이때 저 예지를 가능케 하는 지식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고 사르트르는 말한다. 이해는 어떤 “판단의 진실” 혹은 “개념적 구조”를 “현재적으로 표현하는” 일종의 행위로, “단순한 재생산”에 그치지 않을 뿐 아니라, “이 행위는 무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193). 이해는 반드시 “과거의 이해들에 대한 기억”, 곧 일종의 (배경적) 지식에서 출발한다(193). 그렇기 때문에 이 배경적 지식은 그 “지식을 관통하는 의도에 따라 […] 상징적 운동이 뒤따르는 미래지향으로 변하거나 변하지 않거나 할 것이다.”(193) (‘지식을 관통하는 의도’가 바로 이해의 유형을 결정하는 기준이다.)

 이어 사르트르는 어떤 이유에서 지식은 상징적 도식이라는 직관적 이미지로 강등되는 것이냐고 묻는다. 우선 상징적 도식은 이해를 용이하게 해주지 않는다. “이해는 이미지 안에서 실현되지만 이미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194) 상징적 도식은 기호나 상징이 아니며, 아날로공으로 구성되지만 아날로공도 아니다. 상징적 도식은 “그 자체로 의식에 주어지는 우리 사유의 대상”이다(195). “‘모호하게 흐르는 바다를 가진 평평하고 검은 면적’은 […] 프롤레타리아 자체”인 것이다(194). 요컨대 도식은 이해를 위해서도, 표현을 위해서도, 예시를 위해서도 제시되는 것이 아니다. 도식은 마디로 단지 현전화[현재화]하는 (présentificateur, presentifier)으로서 이해에 봉사한다.

 이 연장선에서, 전반성적 순수 지식은 순수반성적 지식이 될 수도 있지만*, 아예 비반성적인 것인 현전된 대상에 몰두하는 것인상상적 지식으로 강등될 수도 있다. 상상적 지식을 획득하는 작용에서 일어나는 것은 반성이 아니라 눈앞에 현존하는 것의 구성이다. “‘프롤레타리아’를 이해하는 일은 프롤레타리아를 구성하는 일, 그것을 의식에 나타나게 하는 일이다.”(196)

*cf. 순수 지식=규칙에 대한 의식, 규칙=변수들 및 그들 사이의 관계로 이루어진 함수식, e.g. Rd(다비드상은 르네상스시기의 것이다) (D씨)

Q. 상징(매개적 의식)이 이미지의 본질적 기능이라고 주장하는 동시에 상징적 도식은 무언가의 매개자/상징이 아니고 대상을 무매개적으로 현전시킨다고 주장하는 것이 이상하다.

A. 상징적 도식은 매개적 의식으로서의 상징과 무매개적 의식으로서의 순수 사유 사이에 있기에 양 편의 특징을 다 가지고 있다. 상징적 도식과 사유의 대상은 동일하되 동일하지 않고, 동일하지 않되 동일하다. 문제는 그 동일성에 대한 의식이 내겐 너무 내밀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2. 상징적 도식과 사유의 현시

 사르트르는 {현시[예시], 도식적 표상—규정되지 않은 부분이 많은 희미한 예시—, 도표diagram—추상적, 연장 없는 표상에 대한 공간적 표상—, 공감각과 색청, 자동상징적 현상—반수면 환영—}의 이미지군과 상징적 도식에 대한 플라흐의 구분을 언급한다. 플라흐에 따르면 전자의 이미지군은 “사유를 표현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외재적이며 게다가 꽤 느슨한 관계들(대략 연상관계라 불리는 것)에 의[해] 관념 형성에 연결된다.”(199) 반면 상징적 도식은 “사유의 직접적 산물이며 사유에 대한 이미지 차원의 정확한 표현이다.”(199) 그러나 사르트르는 이와 같은 플라흐의 기술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미지는 제 나름의 고유한 지향적 구조를 가지는 의식의 일종인데, 의식은 다른 의식과 연상이란 이름의 인과적 관계를 맺을 없기 때문이다. 의식과 의식 사이에 맺어질 있는 유일한 관계는 동기부여motivation 관계뿐이다. (그러므로 {} 내 이미지군과 사유 사이의 관계 역시 동기부여관계로서 설명되어야 하며, {} 이미지군 역시 일종의 상징적 도식으로 이해될 있다.) 예를 들어 도표는 도표에 내재된, 달이나 요일 따위가 주체에게 나타나는 방식을 연상의 방식으로 부여하지 않고 나름의 (동기부여?) 규칙에 의거해 표현한다. 시청각적 공감각에서 환기되는 색깔 역시 연상의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고, 청각적 요소의 의미sense로서 주어진다.

Q. 국역 202쪽에서 상징적 도식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한다는 ‘삽화engraving’라는 표현으로 사르트르가 지시하고자 하는 대상은 무엇인가?

A. {} 이미지군 같다.

Q. ‘연상’과 ‘동기부여’ 사이의 래디컬한 차이를 잘 모르겠다.

A. 흄의 연상 개념(결합)을 상상하면 연상은 특별히 인과적이다(D씨). / 우리가 생각하는 연상의 개념이 사르트르의 동기부여 개념과 같고, 사르트르가 생각하는 연상의 개념이 유독 (외재자들 사이) 과학적/인과적인 것 같다.

 이처럼 삽화와 도식은 근본적으로 서로 같은 기능을 수행하지만, 현시[예시]와 도식은 그렇지 않다. 예컨대 르네상스를 설명하라는 요구를 듣고 어떤 물줄기의 이미지를 상징적 도식으로서 떠올리는 일과, 다비드 상을 떠올리는 일은 서로 다른 일이다. 물론  다비드 상은 “그 시대의 의미를 은닉”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말하자면 ‘분유’에 의하여 그 자체 “르네상스로 나타날 수 있다.”(204) 그러나 다비드 상은 르네상스만 배타적으로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다비드 상은 나의 여행 경험 속 다비드 상을 가리키게 될 수 있다. 이처럼 현시[예시]는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리면 사유를 우회하게 하고, 일탈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시는 “상징적 도식의 방식이 가지는 순수함을 가질 수 없다.”(204) 대신 현시는 모호한데—즉 무엇을 가리킬지가 정해져있지 않고 그 지시처가 언제든 어디로든 일탈할 수 있는데—“그 의미화의 모호성은 아직 개념에 대한 분명한 비전으로 고양되지 않은 사유의 불확실성에서 비롯한 듯이 보인다.”(205) 그러므로 이미지가 사유에 걸림돌이 된다는 기존의 견해는 현시-이미지의 그와 같은 일탈의 가능성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유의 불균형에 대한 책임은 사유 자체에 있지 이미지에 있는 것이 아니다.”(207) (우리는 이미지가 사유를 오류로 오염시킨다는 편견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3. 이미지와 사유

 이미지는 비반성적인 사유를 구현한다. 이미지를 통해 특정한 개념을 사유할 때, 의식에 주어지는 것은 사유의 대상 그 자체이다. 그러나 사유가 이루어지는 방식에는 여럿이 있을 수 있다. 개념을 구현하는 특수자들의 이미지가 나열될 수도 있고, 개념 자체가 “공간 안에서 대상의 형태로” 다만 개별화되지 않은 채 예컨대 특수한 한 인간이 아니라 미확정적인 ‘인간 전체’라는 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208). 마지막으로 이미지는—추상적 개념에 대한 이해의 경우—상징적 도식이 됨으로써 대상을 온전히 현전시킬 수도 있다.

 그런데 사르트르는 “이미지에서 사유는 그 자체가 사물로서 구성된다”고 의미심장하게 말한다(209). 이미지는 순수사유와 달리 공간화된 사유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사유가 공간적 표상 속에 포획”될 때, 사유는 그 포획에 저항할 수도, 그 포획에 순응할 수도 있다(210). 전자의 경우, 설령 주체가 대상의 본질을 구현하는 상징적 도식을 떠올리는 단계에 이를지라도 해당 상징적 도식은 “잠정적이고 불충분”한 것으로 취급된다(211). 예를 들어 개념에 대한 사유를 근본적으로 (공간화된 이미지적) 표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인식하는 철학자들은 상징적 도식을 오히려 개념을 왜곡하는 것으로 여길 것이다. 물론 철학자가 자신의 도식을 추후의 이해의 입구로 생각하고 만족할 수도 있지만, 그가 실제로 “자신의 사유를 그 물질적 구속들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할 수도 있다(212). 하지만 철학자가 비반성적인 태도에 머무르는 한, 그는 해방의 이후에도 특정한 대상에 몰두하는 일에 머무를 것이며, 그 가운데서 자신이 원하는 본질은 자신이 몰두하는 그 대상과 이질적이라는 점을(—곧 이미지화된 사유의 실패를—)계속해서 인지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사유를 형성하면서 일단 상상적 태도를 취했다면 그 사유는 결코 직접적으로 접근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언제나 이미지에서 이미지로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해란 결코 완수되지 않는 운동이며, 그것은 하나의 이미지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에 의한 정신의 반응이며, 이 또 다른 이미지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 이런 식으로 무한까지 곧장 이어진다.”(213) 이미지를 경유하지 않고 곧장 사유를 직관하려면 주체는 비반성적 태도에서 반성적 태도로의 선회를 감행해야 한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이러한 선회가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Q. 순수 사유에 의한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인가? + 사유 역시 대상에 몰두하는 작용인데, 그렇다면 순수 사유도 비반성적이지 않은가?

 비반성적 태도에서 이미지화된 사유에 머무를 경우, 사유되는 본질 또는 관계는 특정한 형태를 입은 채, 그리고 그 형태가 해당 본질 또는 관계의 정확한 표현이라고 믿어지는 채로 주어진다. 이제 사유되는 본질 또는 관계는 물질적인 구조 하에서 나타나며 공간적인 규정성과 특유의 존재 정립을 포함하게 된다. 이때 본질 또는 관계의 물질적 구조는 본질 또는 관계의 정신적, 관념적 구조에 의해 조정되고 종속되면서도 자신의 독립성을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종종 두 구조는 동일시되고 마는데, 사유가 이렇게 오히려 “공간성의 고유한 법칙”에 따르게 되면 “사유는 걷잡을 수 없이 뒤틀리고 우리는 더 이상 관념을[관념 자체를] 직접 뒤쫓지 않게 되고, 유추에 의해 사유하게 된다. […] 이러한 사유의 하강은 오류의 가장 빈번한 원인들 중 하나였으며, 특히 철학과 심리학에서 그랬다.”(214)

 (이와 같은 오류의 가능성은 다음의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상상의식에서 우리의 앞에 나타나는 공간적 사물은 특정한 지식의 상관물이어서, 해당 지식은 이미지의 형태로만 스스로를 의식한다. 예를 들어 통통 튀어오르는 공을 이미지화할 때, 주체는 공기의 저항에 대한 지식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다. 기존의 지식에 반하는 이미지를 떠올리려는 노력은 심지어 이미지를 변질시키고 만다. 지식의 계열과 이미지의 계열은 서로 양립 가능한 방식으로만 더불어 전개되는 것이다. 양립 가능성을 목표하는 과정에서 두 계열은 서로 갈등을 빚기도 하지만, 사유는 말하자면 첫 번째 이미지를 훌쩍 떠나 새 이미지에 안착해버림으로써 갈등을 손쉽게 해결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에 대한 불신은 은밀하게 잔존한다. ‘피억압자는 억압 당하면 당할수록 힘을 기른다’는 테제를, 자신을 억누르는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높게 튀어오르는 용수철의 이미지로써 이해하고자 한 어떤 학생의 예를 들어보자. 이러한 작용 가운데서 용수철의 이미지는 피억압자의 힘을 현전시킨다présenter. 그러나 사르트르의 생각에 용수철의 이미지는 설득력을 곧 잃고 만다. “용수철이 축적한 힘은 그것을 억누르는 힘보다 언제나 열등하기 때문이다.”(219) 용수철의 이미지를 이용하는 전략은 (용수철에 대한 기존의 지식으로 인해?) 원래 이해하고자 한 테제에 더해 ‘피억압자는 결코 자신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테제까지 의식에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미지는 의미에 의해 왜곡되었다.”(219) (요컨대 이미지화된 사유는 여러 양상에서 오류의 위험을 품는다. 이 사실이 많은 연구자들로 하여금 이미지를 혐오하도록 오도했을 것이다.)

4. 이미지와 지각

 지각의 일부를 이미지가 구성하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그릇됐다. 일부 연구자들은 지각은 감각(e.g. ‘본다’) 이상이라는 점에 입각해, 감각에 이미지화가 결합된 것이 지각이라고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지와 지각은 서로 다른 태도에서 이루어지며, “결과적으로 이미지와 지각은 서로를 배제한다. 어떤 그림을 통해 이미지로서의 피에르를 겨냥할 때,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우리는 더 이상 그 그림을 지각하지 않게 된다는 점은 이미 지적했다.”(220) 상상은 지각을 무화시키고, 지각은 상상을 무화시킨다. 상상은 부재자를 겨냥하고, 지각은 실재자를 겨냥하기 때문이다. 두 의식은 서로 교대로만 나타날 수 있지, 함께 나타날 수가 없다. “이러한 조건에서 이미지가 어떻게 지각을 형성하는 일에 협력할 수 있을까?”(220)

Q. 예컨대 영화를 볼 때, 영화 속 인물은 부재하는가?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지각하는가, 상상하는가? 둘 사이의 구분이 점차 흐려지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지는 않은가?(D씨)

 중요한 실마리는 우리가 ‘순수 감각’이라는 요소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각은 후설이 말한 것처럼 “의식이 시공간적 대상 앞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행위”이다(221). 이러한 지각에는 당장 눈앞의 단면 외에도 해당 단면과 관계를 맺는 수많은 단면들에 대한 지향—기억 또는 선술어적인 추론에 의한—이 포함되어있다(e.g. 앞면에 대한 정립은 뒷면에 대한 지향과 함께 이루어진다). (비주제적이며) 술어화되지 않을 뿐 무의식은 아닌 이러한 지향이 바로 지각을 풍부하게 만드는 그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향을 이미지로 잘못 해석하는 데서 상술한 연구자들의 오류가 자리한다. 그러나 그러한 지향이 이미지가 되기 위해서는 주제화 및 별도의 정립이, 새로운 의식의 출현이 요구된다.

*Q. 오히려 후설이야말로 순수 감각의 신봉자인데, 어째서 사르트르는 이러한 포기가 후설의 지각이론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A. 여기서 ‘순수 감각’은 당장 감각되는 단면에만 겨냥되고 다른 지향은 결코 가지지 않는, 고립된 지향을 의미하는 것 같다.

 요컨대 이미지는 특유한 지향성을 가지는 별도의 의식이며, 제 나름의 의미와 유용성을 가지고 있다. “이미지가 사유를 훼손하거나 지연시킬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부조리하며, 사유가 스스로를 해치거나 굴곡과 우회 속에서 자기 상실된다고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223) 단지 이미지화된 사유라는 이름의 종이 있을 뿐이며, 그러한 종의 사유가 실패하기 매우 쉽기에* “결국 이미지를 마주한 태도는 사물을 마주한 태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223) 지각적 삶과 상상적 삶은 상이한 삶이다. 그렇다면 우리네 상상적 삶은 어떻게 전개되는가?

★*Q. 이미지화된 사유의 실패는 필연적인가, 개연적인가?

A. 전체 흐름상 개연적인 쪽 같다(D씨).


IV 상상적

1. 비실재적 대상

“[…] 상상력의 행위는 마술적 행위이다. 그것은 사유의 대상, 욕망의 대상을 나타나게 하여 소유할 수 있게 해주는 주술이다.”(227) 상상의 대상은 욕망하는 “의식의 명령에 복종한다.”(227) 사르트르는 이제 상상에서 이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는 비실재적 대상들 특유의 존재 방식을 기술하고자 한다.

 그가 첫 번째로 지적하는 것은 ①상상의 대상이 “어떤 한 시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227). 상상의 대상은 단적으로, 그 자체로 나타난다.* 나아가 ②주체가 “이 비실재적 대상들에 작용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이중인격이 되어야만, 즉 [그]가 비실재화되어야만 한다.”(228) 뿐만 아니라 ③상상의 대상들은 주체의 자발성의 산물로서 순수하게 수동적이고 “전적으로 비활동적inagissant”이다(228).** 상상의 대상들은 서로에게조차 인과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혹자는 상상의 주체가 마치 비자발적으로, 수동적으로 어떤 이미지들의 연상적인 전개에 휩쓸리게 되는 듯한 사례를 반례로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상황에서조차 주체는 철저히 자발적이다. 상상의 의식에서 독립변수는 ‘나’의 의식뿐인 것이다. 사르트르는 심지어 강박적인 상상마저 고의적인 것이라고 단언한다.***

*Q. 정말 그러한가? 나는 상자의 뒷면과 앞면을 동시에 상상할 수 없다.

**일종의 기회원인론.

***Q. 사르트르는 모든 의식의 주체가 ‘나’라는 것과 ‘내’가 자발적으로 이미지를 형성하는 사태를 혼동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의 논지대로라면 상상뿐만 아니라 그 어떤 의식도 비자발적이지 않게 되는 것 같다. 너무 강한 주장이다. / 원치 않는 상상의 경우? / 지각에 비해서는 비자발적이다?

 또한 ④상상의식의 대상은 욕망을 구체화하고 고조시킬 뿐, 결코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이미지는 그 자체로 하나의 결핍이며, 실재하는 대상을 비실재, 부재의 방식으로 ‘나’에게 주어지게 할 뿐이다.* 그런데 ⑤“일반적으로 비실재적인 것은 대상의 소재 자체만이 아니다. 대상이 복종하는 시간과 공간의 모든 한정[규정]들이 이 비실재성에 동참한다.”(231)

*Q. 정말 그러한가? 우리가 욕망하는 바가 꼭 실재뿐인가? 욕망은 꼭 실재를 통해서만 충족되어야 하는가? 희망적인 상상만으로도 사람은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어 보인다. / 다이어트를 위해 먹방을 보는 경우?

A. 먹방은 ‘대리’충족이지 직접적이거나 완전한 충족은 아니다(D씨)

 먼저 상상의식의 대상이 지니는 공간성의 비실재성에 대해 살펴보자. 상상의식의 대상은 그것이 특정한 위치에 놓여있다는 공간적인 규정을 갖는다. 그러나 그 규정들은 운동감각적 아날로공에 의해 기껏해야 불완전하게 성립할 뿐이다. 게다가 실제로 운동감각이 의도하는 위치에 해당 대상이 실재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 규정은 “거짓된 위치설정”에 불과하다(233). 이처럼 상상의식의 대상은 실제로는 ‘나’와 그 어떤 공간적 관계도 맺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거리만큼 ‘나’에게서 떨어져있는 모습으로 주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상상 대상의 공간적 규정은 절대적인 동시에 상대적인 자질이다. 상상 대상의 공간성은 (실재하는) 타 대상과의 관계로부터 비롯하지 않고 상상 대상에 내재되어있다는 의미에서 절대적이다. 상상 대상은 ‘나’와 관련해서, 또는 무엇과 비교해서 예컨대 작은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작은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이 각각의 절대적 자질은 그 기원을 대상의 감각적 외양으로부터, 그러니까 [나에게서] 상대적[인] 자질로부터 끌어낸다. 이미지는 대상에 대한 절대적 존재의 조건들을 창출하지 않기 때문이다.”(233) 이로부터 사르트르는 상상 대상의 공간이 비실재적이며 심지어는 부분조차 갖지 않는, 양이 아닌 질이라고 결론 짓는다.*

*Q. 사르트르는 실제의 공간과 상상의 공간 사이의 단절을 너무 강조하는 것 같다. 둘 사이의 유사성이나 연속성(e.g. 상상한 건축물을 구현하려 노력하는 경우)은 충분히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또 기하학자가 이미지만으로 수학 문제를 푸는 경우 정말 이미지는 양이나 연장을 결여하고 있는가? 나아가 애초에 실제의 공간이 실재적이라는 전제도 사실은 의심 가능한 명제다. 이미 실제의 공간에 대해서도 우리가 상상력을 투사하지 않는가?(D씨)

A. 연장과 연장에 대한 심적 표상은 구분되어야 하지 않는가?

Q. 너무나 고전적인 개념구분이다. cf. Bergson; 공간 안의 시간적 계기 (D씨)

Q. ‘셜록 홈즈의 집은 8평이고 영희의 집보다 1평 작’은 사태를 상상하는 경우에도 정말 부분이 없는가? 셜록 홈즈의 집은 넓이를 가지지 않는 것인가? (D씨)

A. quasi-넓이(cf. Husserl).

 만일 상상 대상을 특정한 공간 안에 있는 것으로 상상한다면, “이러한 [인위적인] 위치설정[은] 상상의 중심적 지향들에 덧붙여진 특수한 지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235). 이렇게 추가적으로 부속된 지향에 따라 나타나는 비실재적 공간은 주지하다시피 상상의 주체가 실제로 속해있는 공간과 아무 관계도 맺지 않으며, 따라서 원근법도 지키지 않는다. 그리고 해당 공간은 공간 내 상상의 주제적 대상과도 외재적인 인접성의 관계를 맺지 않고, “소속의 내적 관계”를 맺는다(236).

 한편 상상 대상의 시간은 어떤 의미에서 비실재적인가? 의식과 의식에 상관적인 대상 사이의 본질적 차이에 의해 “이미지 의식의 흐름의 시간”과 “이미지화된 대상의 시간”이라는 “두 개의 지속[은] 근본적으로 분리되어 있다”(236). 예를 들어 반인반마를 상상할 경우, 반인반마는 초시간적intemporal[비시간적]으로 존재하며 “현재나 과거 혹은 미래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다.”(236) 우리는 여러 시점에 걸쳐서 본 대상들을 종합함으로써 불변하는 초시간적 비실재자를 상상해볼 수도 있다. (e.g. 이런저런 시점에서 본 피에르의 미소들을 종합해 ‘피에르의 미소’라는 불변자를 상정하듯.)

 상상의식의 대상이 의식의 흐름보다 천천히 변화할 수도 있다. 꿈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실제 의식의 몇 초가 비실재적 꿈의 세계 속에서는 몇 시간이 될 수도 있다. 그 기나긴 지속이란 (꿈에서 깨어난 후) 부분적으로만 기억되는 장면들을 접합시켜 형성된 ‘꿈의 전체’에 대한 믿음, 곧 특정한 정립의 상관물로서, 그 자신도 비실재적이며, 상상 대상의 비실재성 일반에 기여한다.

Q. 꿈이 왜 상상인가? 꿈은 너무 비자발적으로 꿔진다.

 실제로 당장 일어나고 있는 일을 그 템포에 정확히 맞춰 상상하는 경우에조차, 그 “두 개의 현재 사이에는 동시성이 없다.”(239)* 이는 비실재적 지속 역시 비실재적 공간과 마찬가지로 명확히 셀 수 없는 내재적 자질로서 부분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상상의 많은 경우에서 대상의 시간적 위치설정은 결여되어있다. 해당 대상이 ‘언제’ 존재하는지에 대한 별도의 규정 없이 “이전-이후라는 순수한 관계”만이 지배하는 것이다(240).

*Q. 당장 곁에 없는 상대와 약속을 잡을 때, 상상 대상과 나는 동시적인 것 아닌가?(D씨)

 요컨대 “비실재적 대상들의 시간은 그 자체가 비실재적이다. 그것은 지각의 시간의 어떤 특징도 갖지 않는다. 그것은 […] 흐르지 않으며, 마음껏 펼쳐지거나 동일한 것으로 머물러 응축될 수 있으며,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아니다. […] 상상적 세계는 전적으로 고립되어 있”다(241).

 다음으로, ⑥상상의 비실재적 대상들은 세계성을 갖고 있지 않다. 세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첫째, 그 “대상들[이] 엄격하게 개별화되어 있어야” 하고 둘째, “대상들은 주변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조건이” 만족되어야 하는데, 사정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241). “[…] 비실재적 세계란 없다. 우선 비실재적 대상들은 개별화되지 않는다.”(241)

 첫째로, 이미지의식은 그 본질적 빈곤에 의해 지각의식에서와 달리 가리키는 대상이 애매하다는 의미에서 ‘과도’하다. 지각의 실재하는 대상에 반해 “내가 아는 만큼만 그리고 내가 원하는 만큼만 존재하”는 비실재적 대상에 변형을 가할 경우, 이 변화는 실제 대상에 변형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므로 “무효이거나” 아예 겨냥되는 대상의 정체성을 바꿔버린다는 뜻에서 “근본적이다.”(243) 상상의 주체는 결코 자신이 의도한 것을 제한 변형의 효과, (예상치 못한) 결과를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어느 순간에든지 자발적이기 때문에 순수하게 수동적인) 관조자spectator의 상태에 놓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실크 해트와 그것을 쓴 피에르의 얼굴을 처음부터 함께 상상하지 않는 한, 주체가 먼저 피에르의 얼굴을 상상한 뒤 그 위에 실크 해트가 얹어진 효과가 어떠한지를 관조할 수는 없다. (실크 해트를 얹는 순간, 최초의 상상 대상은 변질될 것이다.)

 원래 정지상태에 있었던 상상 대상을 움직이게 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그와 같은 움직임은 비의지적 상상에서만 가능하고, 의지적 상상에서는 불가능하다. 주체가 의지를 통해 상상 대상을 움직일 경우, 사실상 대상의 정체성은 변화한 셈이다. 그런데 전의지적 또는 비의지적 상상의 경우 지식, 운동, 정서상의 변화가 대상을 충분히 움직이게 만들 수 있다.* 그때조차 상상 대상의 생명은 그리 길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의지대로—혹은 거의 비슷하게—내가 원하는 비실재적 대상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것을 내 맘대로 어떻게 할 수는 없다. 만일 내가 그것을 변형하고 싶다면 그로부터 다른 대상들을 창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반드시 구멍들이 있게 될 것이다. 이미지로서의 대상의 비연속성, 단속성은 바로 여기서 비롯한다. 나타나고 사라지고 다시 돌아오는 그 대상은 더 이상 동일한 것이 아니다.**”(246)

*Q. 사르트르가 ‘(자발적이되) 전의지적 또는 비의지적인 상상’으로 지칭하는 사태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A. 반수면 환영 같은 경우를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Q. 너무 초본질주의적 입장 같다. ➔ 반대로 지각에서는 무엇이 개별성/자기동일성을 유지시켜주는가?(D씨)

**Q. 정말 상상에서의 ‘개별’자는 자기동일성을 갖지 못하는가? 공감이 잘 가지 않는다. ➔ 물론 어제 상상한 유니콘과 오늘 상상한 유니콘은 다르겠지만, 둘 사이의 공통점이 있지 않은가? 소설에서 개별화된 인물을 설정하는 경우 역시 반례가 되지 않을까?(D씨) cf. ‘기록’이라는 특수성?

 둘째, 비실재적 대상이 세계성을 획득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다른 어떤 대상과 어떤 연대성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246). “그것은 주변milieu을 가지지 않으며, 독립되어 있고 고립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부족’하다(247). “그것은 아무것에도 작용하지 않고, 아무것도 그것에 작용하지 않는다.”(247) 작용하는 것은 단속적으로 새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상상의 주체뿐이다.

 이처럼 비세계적인 상상의 대상들은 주체로 하여금 (실재하는) 세계로부터 도피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하여 그것들은 세계 내 존재라는 조건에 대한 부정으로서, 반세계anti-monde로서 제시되는 듯이 보인다.”(248) 그러나 사르트르는 각주를 통해 세계내존재로부터의 이와 같은 도피가 표면적인 데 불과하며, “모든 이미지는 ‘오히려 세계의 바탕 위에서 구성되어야 한다는” 점을 추후 보이겠다고 말한다(248).

2. 비실재적인 것을 마주한 태도들Conduct

 그러나 상상의 대상들이 실재의 세계로부터 고립되어있다고 말하기엔, 우리는 허구를 상상하면서도 마치 지각을 한 양, 상상된 상황이 실제였다면 불러일으켰을 법한 신체적 반응을 보이지 않는가? 예를 들어 어둠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동공이 확장되지 않던가? 이에 사르트르는 (상상 대상이 아닌) 상상의식이라는 “실재의 존재 층”이 “실제 운동들의 실재하는 기원”이라고 답한다(249).

 이 기원을 파고들기 위해 사르트르는 상상적 태도imaging attitude 내 두 개의 층위를 구분한다. 첫 번째 층위는 비실재적 대상을 구성하는 의식의 층위이고, 두 번째 층위는 그렇게 구성된 비실재적 대상에 대한 반응의 층위이다. 두 층위 모두 지향과 운동, 지식과 감정으로 이루어지지만, 전자는 부자유스럽고*, 후자는 자유로운 대신 “대상에 새로운 자질을 제공하지는 않는다.”(249)

*Q. 그 이유로 사르트르는 “이것들은 주도적 형식에, 최초의 지향에 복종하며 비실재적 대상의 구성에 흡수된다”고 말하는데 이해하지 못했다(249). 내가 피에르를 상상하기로 작정했다면 아니를 상상할 수 없는 것과 같으려나.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반응 자체가 상상 대상의 구성을 성립시킬 수도 있다.) “신체 전부가 이미지의 구성에 협력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구역질은 역겨운 상황에 대한 상상에 잇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직접 구성하기도 한다(250). 또 다른 예로, 어떤 주체가 관능적인 장면을 상상하면서 발기하는 경우, 그는 상상을 마친 다음 그에 의해 사후적으로 촉발된 반응으로서 발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흥분한 채로 상상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와 같은 반응이 “정상적인 강도를 넘어선다면” 최초의 상상의식과는 별도의 의식—최초의 상상대상을 기억하면서 추가적으로 반응하는 의식—으로서 의식에게 주목받을 것이다(251). 물론 이렇게 격렬한 실재적 반응이 불러일으켜질 때에조차 최초의 상상 대상이 실재에 편입된 것으로 이해해선 안 된다.

 단, 의식의 전개가 상상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구운 통닭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전에는, 배는 고팠지만 그렇다고 침을 흘리지는 않았다.”(252) 상상을 통해 (실제의) 욕망이나 혐오는 “집중되고, 구체화되고, 강도가 증가”하는 등의 변화를 겪는다(252). 감정은 지식과 통합되어 비실재적 대상의 탄생에 기여하는데, 도리어 자신이 반영된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보다 풍부해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상상 대상에 대해 느끼게 되는 감정이 지각 대상에 대해 느끼게 되는 감정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이다. 사르트르는 전자가 자기규정적일* 뿐만 아니라, “대상에 비어 있음에 동참한다”고 표현한다(255). “이 반감은 구토로까지 부풀려질 수 있으며, 반감이 반감 자체로부터 부풀려지는 것을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 우리는 아무 원인 없이 감동받고 흥분하며 구역질을 했던 것이다.”(255)

*Q. 이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254쪽의 서술).

 감정에 이어 사르트르는 비실재적 대상이 특정한 행동behavior을 유발하는 경우를 둘로 나누어 제시한다. 상상에 따른 감정 및 행동은 한편으로는 자동적으로 나타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의적으로 나타난다. (불현듯 애인의 모습이 떠올라 사랑이 자동적으로 느껴지는 경우와, 특수한 기억에 입각해 애인에 대한 상상을 일부러/애써 시도함으로써 사랑을 느껴보려고 하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후자의 경우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한 비실재적 대상은 어떤 재생의 결과일 텐데, 그 재생과 더불어 체험되는 애정은 결코 예기치 못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주체의 예상 안에서 전개되는 무엇이다. “그것은 느껴지기보다는 오히려 연기된다play.”(259) 사르트르는 뿐만 아니라 이때 (연기된) 실제의 애정과 비실재적 대상은 서로 교통하지 못한다고까지 말한다.* “대상은 애정을 지탱하지 않으며 부양하지도 않고, 정념이라는 감정의 온갖 깊이를 만드는 이 힘, 이 부드러움, 이 예측 불가능성을 소통하지도 않는다.”(260)

*Q. 이 주장의 근거를 이해하지 못하겠다(259쪽의 서술). 나아가 애정이 상상 대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대상은 애정을 강화할 수 없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못하겠다. 사르트르가 실재와 비실재 사이의 심연을 너무 깊은 것으로 상정하고 있지는 않은가?

A. 상상 대상을 산출했던 그 애정이 자신의 산출물에 의해 과연 영향을 받을까?

Q. 가짜 통증을 느끼는 신경쇠약 환자의 예로써 사르트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다시 반복하건대, “실제적인 것을 마주한 감정들과 상상적인 것을 마주한 감정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261). 애인이 현존하거나 부재할 때, 각각의 경우에서 느껴지는 사랑은 서로 다른 사랑이다. 지각 대상에 대한 사랑에 비해 상상 대상에 대한 사랑은 결코 기존의 지식을 벗어나지 못하며 그 풍부함이 약하다. 사실 지각 대상으로서의 애인은 언제나 ‘나’가 사랑하는 그/그녀를 초월하는 개별자이다. 그/그녀를 둘러싼 현실은 결코 고갈되지 않으며 (‘나’에게 언제나 새로움을 주고) 그에 따라 그/그녀를 향한 ‘나’의 사랑도 고갈되지 않는 채, 언제나 새로운 가능성으로 튈 수가 있다. 하지만 상상 대상으로서의 애인에 대한 감정은 그러한 “가능성의 후광”을 잃는다(262). “본질적인 전복에 의해, [대상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감정이 자신의 대상을 만들어내며, 비실재적인 [애인은] 그녀에 대한 내 감정의 엄격한 상관물에 다름 아니다. 감정이란 이제 결코 지금 있는 것 이상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 차츰차츰 감정은 도식화되고 굳어진 형식 안에 고정되며, 이와 상관하여 내가 [애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들은 진부해진다. 지식과 감정의 정상적인 발달은 일정 시간 후에 이 사랑이 그 고유한 뉘앙스를 상실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일반적인 사랑이 되고 어떤 의미에서 보면 합리적이 된다. […] 감정이 [특수성을 잃고] 전형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환원 불가능한 의식을 만들었던 그 개별성을 감정에 부여해주기 위한 [애인이] 더 이상 여기 없기 때문이다.”(262-263) 감정의 이 같은 형식화와 추상화, 그것이 치닫는 빈곤으로 인해 우리는 실제 애인에게서 직접 올 소식을 기다리게 된다. “편지지, 검은 글자, 향기 등 이 모든 것은 쇠퇴해가는 정서적 아날로공을 대체한다. 이 모든 것을 통해 나는 [애인을] 좀 더 실제적으로 겨냥한다.”(263) 같은 사태를 다르게 표현한다면, 지각 대상으로서의 애인은 고갈될 수 없는 만큼 침투될 수 없지만, “비실재적 대상은 이런 침투 불가능성을 전혀 간직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그 대상에 대해 알고 있는 것 이상이 절대 아니다.”(264)

Q. 정말 대상의 부재는 대상을 향한 기존의 정서를 빈곤하게 또는 추상적으로 만드는가?

A. 아무리 풍부해져봤자 내가 그려낸 타인의 모습뿐이다. 예상 불가능한 것은 없다. (D씨)

 이상의 논의는 “진짜 감정[지각 대상에 대한 감정]과 상상의 감정[상상 대상에 대한 감정]” 사이의 차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논하기 위해서였다(264). “후자의 감정은 그 자체가 비실재적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언제나 비실재적 대상들 앞에서만 나타나며 이 감정을 곧 도망치게 하려면 실재가 출현하기만 하면 된다. […] 이 감정들의 본질은 강등되고, 빈곤하고, 단속적이고, 발작적이며 도식적이며, 그것이 존재하려면 비-존재를 필요로 한다.”(264) 그만큼 실재와 상상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다. 실재는 상상을 붕괴시키고, 상상은 실재의 변화무쌍함을 가지지 못한다. “[…] 실재하는 것과 상상적인 것은 […] 대상과 감정과 행동의 전적으로 환원 불가능한 두 유형이다.”(266)

 그렇기 때문에 실재의 삶보다 상상적 삶을 선호한다는 것은 단순히 상상의 내용, 이미지의 아름다움 따위만을 선호하는 것만이 아니라 상상의식의 형식 자체, 그에 따르는 반응과 감정 전개의 구조 자체를 선호하는 것이다. 몽상가는 예측 불가능한 것에 대한 적응을 거부하고, “엄숙하며 경직되어 있”는 감정에 머무르기를 선택한 사람이다(267). 새로운 감정이 솟지도 않고 의도한 감정—전부 의도된 것뿐이기에 빈곤한 감정—만이 온유한 만족감과 함께 느껴질 따름이다. “그러므로 정신분열증 환자의 세계를 실재의 단조로움을 보충할 풍부하고 화려한 이미지들의 급류로 여기는 일은 잘못일 것이다. 그것은 빈약하고 세심한poor and meticulous 세계이고 같은 장면들이 지칠 줄 모르고 반복되는 곳, 모든 것이 아주 작은 디테일까지도 동일한 의례를 따라 미리 예정되고 조정되는 곳이다.”(268)*

*Q. 이는 과연 정신분열증 환자의 상상에 대한 정확한 기술인가? 그들의 이미지는 정말 ‘의도된’ 이미지인가?

A. 자발적이되 비의지적이라고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는 확실히, 정신분열증을 마치 선택의 문제인 양 만들어버린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D씨)

3. 상상력의 병리학

주요 테제: 이미지와 지각 사이의 본질적 구분, 환각과 지각 사이의 친연성 거부

  • ‘환각’은 둘의 경계를 흐리지 않느냐? 비실재에 지각적 실재성이 부여되지 않는가? ➔ 환각(이미지의 일종)의 대상이 의식에 외재적인 것은 맞지만, (통념과 달리) 주체가 대상에 실재성을 부여하지 않으므로—심지어 조현병 환자마저 자신의 환각이 비실재임을 알고 있다*—지각이 아니다. 이를테면 환각의 대상은 실재 지각의 세계 속으로 편입되지 않는다. 위치설정은 사후적인 구성이다. “요컨대, 환각은 지각된 현실의 갑작스런 무화와 일치하는 듯이 보인다. 환각은 실재의 세계 안에 자리하지 않으며 그것을 배제한다.”(272) ➔ 질문: “본질적으로 비실재로 주어지는 이미지의 실재성을 환자는 어떻게 해서 믿게 되는가”(275), 강요의 문제
  • 비실재가 실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비실재 앞에서의 태도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276).
  • 이미지의 비실재성은 어떤 경우에도 파괴될 수 없다(이미지/환각은 실재와 중첩될 수 없다): 조현병 환자가 둘로 분열되어 저 홀로 대화를 할 때, 그는 환각(또는 빙의)에 해당하는 상대를 연기할 때뿐만 아니라 자기 목소리를 낼 때조차 환각에 빠져있는 것이다. 즉, 자신 역시 실재의 지각세계로부터 빠져나온다. (지각세계마저 앙띠몽드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Q. 일부 환자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 아닌가? + 본인의 구도에 맞춰 유리한 케이스만 갖고 오는 것 같다(D씨).

Q. ‘자발성’은 ‘자기의식성’과 일치되는가?

cf. “이미지화된 대상의 이 비실재성은 자발성에 대한 즉각적 직관과 상관적이다. 이 의식은 […] 비[정립]적 자아에 대한 의식을 갖는다. 이 자발성의 의식은 횡단 의식처럼 나타나며 대상에 대한 의식과 하나를 이룬다. 이는 심적 상태의 구조 자체이며 […]”(271) / “[…] 의식의 자발성은 이 자발성에 대한 의식과 하나일 뿐 […]”(275) ➔ 자발성의 개념이 매우 독특한 것 같은데, 이런 전제로부터 모든 주관은 자유롭다는 결론으로 내닫는다면 지나치게 비약이 있는 것 아닌가?

cf. “사실 우리로서는 의식 안에서의 모든 존재가 의식의 용어로 표현되어야 하며, 설사 상부구조들이 도달되었을 때조차 자발성이 자의식 없이 어둠의 지대로부터 솟아나온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286)

cf. 모든 구성을 자발적으로 볼 수 있을까?

Q. 사르트르는 실재와 비실재를 충분히 정의해주지 못하고 있다. 정합성이 떠오르는데 그것도 빈틈이 많다. 

A. 후설이라면 ‘정상자’의 지각대상을 실재로 정의할 것 같다.

Q. 후설에게서 지각과 환각이 해석상의 차이라면 사르트르와 달리 그는 둘 사이 친연성을 인정하는 것인가? 참거짓의 여부가 둘을 가르는 것인가? 그렇다면 참거짓의 기준은 무엇인가?

(비실재에 대해 수동적 태도를 보인다는 점에서,) 강박관념과의 유사성: “[…] 환각과 강박관념은 정신에 강요되는 것이다. […] 사실 강박관념은 하나의 의식이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다른 모든 의식들과 같은 자발성과 자율성을 갖는다.”(279)

  • 강박관념: 상상의식 + “금기 의식은 의식 자체의 희생물이고 일종의 악순환에 묶여버려, 강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려는 의식의 모든 노력들은 바로 그 생각을 재생시키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된다.”(280): (환각에서의) 자발성 a와 자발성 b 사이의 대립, “나 자신에 대한 나의 저항”(281), 분열disintegration(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지되는 헐거운 통일성) ➔ 환각 환자가 타인의 영향 아래 놓여있다고 믿는 경우에조차 자발성에 대한 의식은 유지된다. “환자는 한편으론 이러한 생각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생생한 자발성으로서의 자신임을 느끼며, 또한 동시에 자기가 그것을 원했던 게 아니라고 느낀다.”(284)
  • 환각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나’의 특징: 포착되지 않음/파악될 수 없음(“결코 개인적인 의식과 대면하여 정립되지 않는다 […] 보이는 것은 얼굴이지만 들여다 볼 수 없다”(286)), 부조리(e.g. 말장난, 욕설), 무의식이 아니라 (집중하지 못하는) 쇠락한 의식일 뿐*, 비인격적** 자발성, 주객 너머의 제삼의 존재, 의식에 외재적임, “예측 불가능하며 의지에 따라 재생산될 수 없는 것”(288), 현재의 (지각적) 종합에 편입될 수 없음

Q. 그래서 만성 환자들은 비실재를 실재로 받아들인다는 것인가? 마지막 부분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Q. 어째서 사르트르는 비인격적, 강제적, 비의지적 의식을 받아들이면서도 프로이트적 무의식을 받아들이지 않는가? 사르트르는 왜 프로이트를 의도적으로 기피하는가?(D씨)

A. 무의식 개념을 수용할 경우, 코기토의 투명성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의식을 속일 수 있지만, 의식은 의식을 속일 수 없다; 자기기만은 불가능하다; 결국 너는 다 알고 있었다(D씨).

**비인격의 사건, 인격의 경험 ➔ 들뢰즈에게 영향, 들뢰즈는 전자에 Es/Id를 부여 / 이러한 비인격적 자아가 지속적으로 등장하면 꿈이 된다.

4. 꿈 (생략)